5. 낙랑국의 멸망
대무신왕 27년(서기 44)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위의 기록을 보면, 한나라의 광무제가 낙랑국을 정벌하여 군현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낙랑국의 영유권을 잃게 된다. 이에 대하여 중국인들이 남긴 역사서 《후한서》에는 이렇게 전한다.
건무 20년(서기 44년), 한국(韓國)의 염사(廉斯) 사람인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군에 배알하고 조공을 바쳤다. 광무제는 한염사읍군(漢廉斯邑君)에 봉하고, 낙랑군에 복속시켜 사철마다 입조시켰다.
서기 44년, 같은 시기에 위의 기록에 따르면 한국(韓國) 사람이 광무제에게 조공을 바쳤다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한국은 낙랑국을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중국인들은 낙랑국이 위치했던 평양이 본래 마한의 영토였기 때문에 낙랑을 한국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즉, 낙랑국은 고구려에게 저항하기 위해서 외세를 끌어들인 것이다. 당나라를 끌어들인 신라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다시 말해, 낙랑국은 고구려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 한나라의 광무제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기록이 바로 위의 《후한서》의 기사이다.
그렇다면 낙랑국은 정말로 한나라의 지배를 받았을까?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만약 한나라가 정말로 낙랑국 땅에 군현을 설치하였다면, 낙랑군이 2개 라는 기록이 존재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즉, 군현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실제로는 없던 일이거나, 중국측의 과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설사, 실제로 낙랑국 땅에 군현을 설치했다고 가정해도, 그 기간은 길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고고학 유물들을 보았을 때, 이 시기에 낙랑국에 대한 한나라의 입김은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연하다. 낙랑국의 독립을 한(漢)나라가 도와주었으니, 한나라는 그에 대응하는 이익을 얻고자 했을 것이다. 그 이익이란 낙랑국을 배후세력으로 이용하여 고구려의 후방을 위협하는 것이다. 한나라는 이것을 위해서 낙랑국의 독립을 도왔고, 이를 긴밀히 하기 위해 위의 《후한서》의 기록처럼 낙랑국(한국)을 낙랑군에 복속시킨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실제로 군현을 설치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평양의 낙랑국에 대한 한나라의 입김이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평양 지역의 고고학 유물들을 보면 광무제 시기를 이후로 중국계 유물들이 대량 출토되는데, 이는 이러한 이해관계에 따라 중국의 입김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아마 당시 평양은 지금의 차이나타운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 하지만 인천에 차이나타운이 있다고 인천이 중국 땅은 아니듯이, 실제로 당시 평양이 중국의 군현일 가능성은 없다. )
한나라의 도움으로 국가를 재건한 낙랑국은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다음은 《삼국사기》태조대왕조의 기록이다.
태조대왕 4년(서기 56) 가을 7월,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국경을 개척하여 동으로는 창해(滄海),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