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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8-13 19:31
[일본] 일본의 근대화는 운이 좋았다
 글쓴이 : 솔루나
조회 : 1,538  

"그러나 상대방이 바빴다고 하는 국외 사정은 일본 쪽에서는 그다지 강조하지 않습니다. 일본 쪽의 반응이 민첩했다고 하는 점만 강조하고 말이죠. 일본은 운이 좋았다고 하는 해석은 국제정치를 전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식입니다. 동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가 본격화 되기 직전에 세계는 서로 전쟁을 하느라 바빴습니다. 특히 크림전쟁과 남북전쟁이 결정적이죠. 크림전쟁은 영국·프랑스와 러시아의 차르가 거국적으로 일으키니 대대적인 전쟁이었고 남북전쟁의 사상자 수도 엄청났습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할 처지가 못되었던 겁니다. 그 두가지 사정 때문에 일본에 대한 압력이 급격히 감소했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겠죠." p18-p20

번역과 일본의 근대, (가토 슈이치, 마루야마 마사오), 

일뽕들이 간과하는 것과 일본이 보기 싫어하는 건 똑같네요.

1. 일본의 민첩함. 2. 침략할 상황이 안된 외국

1번만 강조하고 2번은 언급안함.

분명 이글에서도 2번을 축소하고 1번을 강조하는 분들이 나올겁니다. ㅎㅎ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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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롱콘 17-08-13 21:40
   
어짜피 미국은 당시 유럽열강들과는 달리......

1898년의 미서전쟁 이전까지는 적극적인 해외식민지획득으로 상징되는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은 극도로 자제한 고립주의 정책을 취했었기 때문에....

남북전쟁의 한시적인 기간을 제외한 19세기 중후반의 대부분의 시기에 걸쳐

가용병력이 고작 3~4만에 불과했기 때문에, 3~4천만 인구규모의 일본정도 되는

나라를 제압하고 식민지로 삼기에는 여력이 부족했습니다.

게다가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부터는 적어도 극동지역에 한정해서는

미국 뿐만 아니라 서구의 어느 열강이라 하더라도 일본의 대외정책방향과 일본의 승인-협력을

구하거나 염두하지 않으면 정치외교적, 군사적 행동을 취함에 있어 커다란 제약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추세로 변화되었습니다.
     
국산아몬드 17-08-13 22:00
   
폐리에 의한 강제개항이후 명치유신 이전상황을 말하는 겁니다. 고작 몇천만명 인구를 유럽열강이 두려워했을까요? 인구대국인 인도도 먹었고 중국까지 반식민지로 만든 유럽인데
          
촐라롱콘 17-08-13 22:16
   
유럽이 아니라 당시 미국의 상황위주로 언급한 것입니다만.....???

그리고 고작 몇 천만 인구라니요....???

그리고 유럽열강들이 일본 근처에 있는 나라들인가요...???

유럽에서 일본까지는 지구 반대편인지라 1~2만 규모 동원하는 것도 상당한 결단력과

분위기가 무르익어야만 가능한 것이고(1~2만 병력 이상을 동원해서 먹을 가치가 있는

나라인지도 염두해야겠지요) 이는 이웃나라 10~20만 규모로 침략하는 것과 거의 맞먹는

국력과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메이지유신 이전에 일어났던 1860년대의 영국함대와 사쓰마번 간의 전투,

미-영-프-네덜란드 4개국 연합군과 조슈번 간의 시모노세키 전투를 통해서

일본전체도 아닌 일개 번들(물론 일본내에서 가장 유력한 번들이지만)과의 전투에서도

미국-유럽 열강들이 고전한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굳이 중국,인도처럼 커다란 땅덩어리와 인구,자원을 지니고 있는 나라도 아닌

일본까지 큰 희생을 치러가며 먹을만한 동기부여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국산아몬드 17-08-14 01:14
   
일본은 운이 좋았습니다. 서구에서 일본을 눈독들이고 먹을만한 동기부여도 없었겠지만
일본 개항이후 명치유신이 끝나는 30년간은 미국,영국,프랑스 누구도 일본에 신경을 쓸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을 강제개항했던 미국도 7년뒤 남북전쟁이 발발했고 전쟁 후 정리에 여념이 없었으며 영국은 아편전쟁으로 중국에 집중하고 있었고 프랑스도 보불 전쟁으로 제 코가 석자인 상태이므로 상대적으로 외세의 간섭이 없는 상태에서 유신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님은 일본이 3천만이라고 대단한 나라 취급하시는데 당시 청나라 인구가 4억이었습니다
그 4억 인구를 상대로 단 2만명의 영국해군이 아편전쟁에서 굴복시켰으며 의화단의 난때 5만의 병력으로 중국을 반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그까짓 2~3천만 일본을 상대로 병력이 얼마나 필요했을까요?
사쓰마번, 시모노세키전투에서 고작 1~2000명이 동원되었을 뿐입니다

일본의 무력이 부담스러웠던 것이 아니라 서양 열강들이 각가 더 큰 문제로 일본에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리고 사쓰마번 전투에서 일본의 전과는 사쓰마번 자체가 에도막부보다 더 강한 무력을 보유했고 영국이 방심했기 때문입니다
사쓰마번은 250개 번중에서 2~3위에 해당하는 경제력이 있었고 대부분을 서양대포와 무기를 구입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게다가 영국이 방심했을 뿐 아니라 가고시마만이 좁아 영국함대가 피할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많은 투자에도 일방적으로 당했고 가고시마현은 초토화 되었습니다

일본을 과대평가하지 마세요.
일본은 단지 운이 좋았고 신이 일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대한제국도 광무개혁 단 5년만에 아시아 경제강국 2위로 도약했습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 일본이 방해만 하지 않았더라면 근대화를 이루었을겁니다

신이 어찌나 일본을 사랑하는지 여몽연합군도 태풍으로 막았고 근대화시기에도 열강의 관심을 다른대로 돌려서 근대화를 성공시켰고 제때 1차 세계대전이 터져서 경제불황에서 빠져나갔으며  2차 대전 패전에도 엉뚱하게 한반도가 분단되어 한민족이 지금도 고통받고 있고 원폭으로 수백만 국민들의 목숨을 살렸으며 영원한 농업국가로 살뻔한 걸 공산주의 발흥으로 미국이 경제부흥을 시켜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과거에 자신들이 저지른 죄과에 대한 반성은 조금도 없으며 오히려 혐한짓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진짜 세계사적으로 봐도 일본은 로또맞은 국가입니다. 어찌나 운이 절묘하게 좋은지 그리고 일본의 부흥으로 인한 피해를 왜 역사적으로 한민족이 다 뒤집어 쓰는지 신이 원망스럽고 분통이 터질 지경입니다.
정말 일본은 신국인지 모릅니다.
신은 왜 이다지도 한민족이 일본에게 고통받게 만들까요?
일본을 문화적,경제적으로 어느 나라보다도 많이 도와준 국가인데 그런 은덕의 나라의
등에 칼을 꽂았고 말할수 없는 고통을 주었고 한민족을 멸절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천운으로 식민기간이 끝나긴 했습니다만
조선은 어느 나라보다 민본사상을 펼친 선의의 나라인데 . 그 어느나라보다 백성을 사랑했던 국가인데 한민족은 일본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받았고 지금도 남북 분단으로 북한의 주민들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에 일본이 바라는데로 정말 미-북간에 전쟁이 터져 일본의 경제가 살아나고
한국이 초토화된다면 신은 5번째로 일본을 도와주고 또 한민족을 제물로 삼은 셈이 되겠네요
진짜 신은 사랑과 정의의 신일까요?
                    
촐라롱콘 17-08-14 17:23
   
[[사쓰마번, 시모노세키전투에서 고작 1~2000명이 동원되었을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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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쓰마번 간의 전투에서 영국함대 7척이 동원되었으니 고작 1~2천명
동원된 것은 사실인 것 같은데....
미-영-프-네덜란드의 4개국 연합군과 조슈번과의 시모노세키 전투에서
연합군은 5,000병력과 17척의 군함을 동원하였으며, 치열한 전투끝에 시모노세키포대를
점령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슈번의 저항이 워낙 완강하여 더 이상 내륙으로 진출하지는
못하고 배상금을 지급받는 선에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영국-사쓰마번간의 전투에서 님께서 언급하신....
[[그렇지만 그 많은 투자에도 일방적으로 당했고 가고시마현은 초토화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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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함대는 사쓰마번과 해상에서 치열한 포격전을 전개하여
사쓰마번의 해변요새를 일부 파괴하기는 했지만, 육지에는 상륙조차 못하고 철수했는데
어떻게 사쓰마번(가고시마현)이 초토화될 수 있는지......????

피해규모로만 보면 양측이 거의 비슷하여 사쓰마번으로서는 어느정도 선전한 것이고
(물론 지리상의 이점을 확실히 활용한 결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함대와 비슷한 피해를 입은 것은 결국 영국의 우위라는 점을
인정하고.. 이후 사쓰마번은 이전의 서양배쳑에서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받아들이자로 180도 태세전환을 하게 됩니다.

몇 년 후의 조선이 병인양요, 신미양요에서 고작 육전대 160명(프랑스군),
450명(미군)과  맞서 싸워... 특히 미군과의 광성진 전투에서는 조선군 350명이
전사할 동안 미군은 고작 3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당할 정도로 극심한 전력차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스스로 물러난 것만 가지고 조선의 승리라고 정신승리하며
쇄국정책을 더욱 가속화시킨 것과는 어찌나 비교가 되는지...... -.-
                         
솔루나 17-08-14 17:49
   
당시 우리가 갖고 있던 세계관과

일본이 무사 통치이고 청-조선이 문사 통치인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국산아몬드 17-08-15 15:25
   
확실히 일본분이시라 일본의 피해에는 민감하군요
https://namu.wiki/w/%EC%82%AC%EC%93%B0%EC%97%90%EC%9D%B4%20%EC%A0%84%EC%9F%81

사쓰마 번은 비전투원 5~8명 및 부상자 18명 정도로 상대적으로 경미한 인명손실을 냈으나 영국 함대의 무차별 포격으로 인해 관공서가 불타는 등 도시는 불바다가 되었고,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었다. 사쓰마 측의 인명피해가 적었던 것은 일반 백성들이 미리 숨어있었기 때문이었다.

--> 가고시마 현은 포격으로 불바다가 되었답니다


사실 은엄폐가 불가능한 바다에 떠있는 거대한 군함과 흙과 돌 등으로 차폐물을 구축해놓은 해안 포대와의 싸움이기 때문인데, 이러한 지상포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군함이 불리한 특수성 때문이다

강화도 해엽은 넓어 조선의 포가 미군군함에 닿지를 았았지만 사쓰마번은 해협이 좁아 충분히 영국 군함을 맞출 수 있었던 겁니다

1차 시모노세끼 전투는 연합군 2천명입니다. 2차에는 5천명이지만
그리고 시모노세끼 전투에서 죠수번이 어떻게 싸웠는지 알아요?
고작 대포 100문에 조총, 창,화살로 싸웠어요. 대포도 수가 모자라 나무포로 만들었는데
전투가 되겠습니까?
얼마나 피해가 심했으면 무력을 믿고 날뛰던 조슈번이 그 이후 막부에 고분고분하게 되었죠

엄청나게 싱겁게 끝난 전투였는데 연합함대가 뭘 두려워해요?
단지 막부의 무역쇄국을 타파하기 위한 제한 전투였을 뿐이고 조슈번의 무조건 항복으로 배상금과 무역개방 약속을 받아내었으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서 물러난 것뿐입니다
시모토 세키 전투의 연합군 사망자는 육전에서 발생했고 그 때는 후장식 소총이 사용되기 전이라 육전으로는 충분히 상대할 만 했죠
병인양요에서도 오히려 조선군의 사망자가 적었으니까요.

참고로 죠수번은 에도 막부보다 무력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었죠. 250개 번중에서 경제력
4위이고  세입의 대부분을 무기 도입에 사용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막강하다고 자랑하던 죠수번의 무장이 고작 대포 100문이라. 얼마나 일본이 역사에서 과대평가되었는지 짐작이 가시나요? 마치 영국,프랑스와 대등하게 싸운것처럼 거짓말 투성이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죠

그리고 신미양요, 병인양요로 조선의 군사력을 까시는데
사쓰마번, 시모노세끼 전부보다 신미양요는 8년후에 벌어집니다

그사이 미국 남북전쟁으로 군사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여 전장식 소총이 후장식으로, 미니에 탄환, 기관총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죠.
그리고 포격에 의한 기선제압 전술도 개발되었고요
그러니까 신미양요의 미군 해병대는 시모노세키의 전투원와 비교해서 질적으로 달랐다는 겁니다.
전장식 소총과 더불어 일제 포격으로 포대를 압도하고 기습 돌격으로 승리를 확정짓는 전투 교리가 남북전쟁에서의 수많은 실전경험으로 완숙단계에 도달했던 겁니다

전장식 소총을 사용하던 병인양요때 프랑스 해병대와는 조선도 겨루어 볼만 했고 전과도 비슷했어요

그리고 병인양요에 프랑스군은 600명이고 신미양요에는 미군 800명이 참여했습니다
왜 병력을 줄일려고 왜곡하는 거죠?
               
구름위하늘 17-08-18 13:30
   
남북전쟁에서 남군과 북군이 운용한 병력수가 북군 200만, 남군 80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특수한 내전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외부 투사가 가능한 가용 병력수는 50만을 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0%)

일본 4천만 인구에서 뽑을 수 있는 병력수는 1%로 높게 평가해도 40만. (보통 0.5%수준)

서로 가지고 있는 무기의 질적 수준까지 고려하면 충분히 식민지 경영이 가능하죠.
페리함대의 흑선 몇대도 감당하기 힘들어했던 일본이었으니까요.
     
가남 17-08-15 21:49
   
진짜 필사적이다
너의 갓본은 운이 좋았을리가 없어?
사과죽 17-08-13 22:21
   
근데 뭐...

운도 실력임.

하지만... 운으로 이룬거도 잘 유지해야지

요샌 슬슬 약발떨어지는듯...ㅉ
레스토랑스 17-08-14 00:49
   
한국도 은근 운이 좋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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