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우리가 니들보다 우월하지만, 그렇다고 확실하게 군신관계급의 차이는 아니라서 같이 친하게 지내자는 사탕발림식의 말입니다.
당연히 청 입장에서 조선은 껄끄러운 위치에 있고, 명을 치는데 조선이 도와주면 좋은거니깐요.
전연의 맹약이라는 걸 들어보셨을겁니다. 여기서 요는 실리를 챙기고 송은 명분을 챙겼죠. 즉 송은 형이라는 명분을 요는 막대한세폐를 얻었죠. 그렇다고, 거란족과 송의 한족이 동류의식이 있었나요.
결론은 국가간의 형제란 개념은 명분과 실리를 놓고 화친을 청할때 쓰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한쪽이 우월해지면 군신관계로 바꾸죠. 조선이나 중국은 보통 명분을 중시하고, 유목민들은 실리를 매우 중시하는 경향이 컸습니다. 유목민들은 실리를 위해서는 부모도 가져다 바칠 정도로 영악합니다. 그러니 배신도 난무하고요.
우리는 농경민족이지, 유목민족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진과 우리는 말이 다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조상들이 여진을 오랑캐로 여겼지, 결코 같은 민족으로 치부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귀부하는 이들이 있다면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말이죠.
그리고 여진은 우리보다 몽골과 더 친숙합니다. 머 몽골도 우리민족이다 이러면 할말 없죠 ㅋㅋㅋ. 누르하치도 몽골과 동질감을 더 가지고 그쪽을 공략했습니다. 반면에 조선은 그냥 사탕발림만 하면서 적대하길 바라지 않았죠. 이게 유목민족들의 습성입니다. 그러다가 몽골도 접수하고 힘이 세지자 조선을 침공한 겁니다. 애당초 조선이 적대시했다는건 핑계일 뿐이죠.
아이고 이 사람 또 소설질이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중국 사신이 한 말이 있었죠..
조선이 나약해진게 기존의 국가 운영방식에서 바꾸어서 농업에 치중하다보니 나약해졌다고요..
또 명나라와 조선과의 교역들을 보면 조선은 명나라에 말을 공급했습니다.
또 조선인 무역상들이 명나라에 말을 팔러갔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시대에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보면 포르투칼인이 조선을 여행한 기록을 쓴게 있습니다.
조선은 말이 많은 나라다..
보통 고조선 밑에 진국 후에 마한 변한 진한으로 이루어지는 삼한을 한족으로 보죠. 물론 여기분들은 민족사학계라 주류사학의 3한범위를 인정하지 않는편이긴 합니다만. 근데 예맥족도 아니고 한족이 유목민족이라는 말은 저도 처음듣는듯한..
부여 고구려(여진) 만주는 공통점으로 반농반목을 했었죠. 어떻게보면 고려보다 만주가 고구려를 닮지않았나 싶은
自是之後百有餘年,晉悼公使魏絳和戎翟,戎翟朝晉.後百有餘年,趙襄子踰句注 而破代以臨胡貉
그로부터 100여년 후 진나라 도공이 위강을 사신으로 보내 융적과 화친하였으므로 융적이 진나라에 조회했다.
그로부터 또 100여년 후 조양자가 구주산을 넘어 대나라를 쳐서 병합하고 호맥(胡貉)에 임하였다.
胡貉: 索隱案:貉濊也
호맥: (색은) 맥(貉)은 예(濊)다.
사기 천관서제오(天官書第五)
其西北則胡貉月氏諸衣旃裘引弓之民
중국의 서북쪽은 호(胡), 맥(貉), 월지(月氏) 등 모피 옷을 입고 활로 사냥하는 민족들이다.
胡貉數侵掠
호맥이 여러 차례 침략했다.
燕北迫蠻貉
연의 북쪽 만맥(蠻貉)을 핍박하였다.
사기 열전 이사열전
又北逐胡貉南定百越
또한 북쪽으로 호맥을 축출하고, 남쪽으로 백월을 평정하였다.
한서
北貉、燕人來致梟騎助漢
북맥(北貉)과 연(燕)나라 사람이 와서 날래고 용맹한 기병으로 한(漢)을 도왔다
應劭曰:北貉,國也
응소가 북맥은 나라라고 말했다.
師古曰:「貉在東北方,三韓之屬皆貉類也
사고는 말했다. 맥은 동북방에 있으며 삼한의 족속은 모두 맥류(貉類)다
四貉咸服
사맥이 다 항복했다.
四貉猶言四夷
사맥은 사이(四夷)라는 말과 같다.
臣聞秦時北攻胡貉,築塞河上
신이 진나라 때에 호맥(胡貉)을 공격하여 요새를 강 북쪽에 쌓았다고 들었습니다.
索隱 案:貉即濊也
(색은) 맥은 곧 예다.
후한서 본기 광무제
遼東徼外貊人寇右北平, 漁陽, 上谷, 太原,遼東太守祭肜招降之
요동(遼東) 요새 밖의 맥인들이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략해 와 요동태수 제융이 그들을
포위하고 항복시켰다.
(夾注) 貊人 穢貊國人也
(협주) 맥인은 예맥인이다.
후한서 본기 효화효상제기
遼東太守耿夔擊貊人破之
요동태수 경기가 맥인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후한서 열전 동이열전
於是發廣陽漁陽右北平涿郡屬國三千與騎同救之而貊人已去
이에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 속국의 3천여 기병으로 함께 구원하였는데, 맥이 이미 돌아간 뒤였다.
후한서 천문지
其年遼東貊人反鈔六縣發上谷漁陽右北平遼西烏桓討之
그 해에 요동의 맥인이 반하여 6현(縣)을 약탈하자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오환의 병(兵)을 발하여 물리쳤다.
후한서 열전 경엄열전
賊散入遼西、遼東,或為烏桓、貊人所鈔擊,略盡
도둑의 무리가 요서, 요동으로 흩어져 들어와서 오환과 맥인에게 초격(鈔擊)을 받아 경략되었다.
元興元年,貊人寇郡界,夔追擊,斬其渠帥
원흥 원년(105년) 맥인이 군(郡)의 경계를 침범하자, 요동태수 경기가 추격하여 그 거수를 목베었다.
3. 예맥(濊貊)에 대한 중국 고대 사서의 기록
사기 화식열전
北鄰烏桓夫餘 東綰穢貉朝鮮真畨之利
(연[燕]은) 북으로 오환, 부여와 인접하고 동으로 예맥, 조선과 진번의 이익을 지배한다.
한서
是時漢東拔濊貉、朝鮮以為郡
이때 한(漢)은 동쪽으로 예맥과 조선을 정벌하고 군을 두었다
玄菟、樂浪,武帝時置,皆朝鮮、濊貉、句驪蠻夷
현도와 낙랑을 무제 때 두었다. 모두 조선, 예맥, 구려 만이(蠻夷)다.
삼국지 위서 문제기(조비)
濊貊、扶餘單于、焉耆、于闐王皆各遣使奉獻
예맥(濊貊)과 부여(夫餘)의 선우(單于) 언기(焉耆), 우전(于闐)의 왕이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濊貊貢良弓
예맥이 좋은 활을 바쳤다.
幽州刺史毌丘儉討高句驪,夏五月,討濊貊,皆破之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했다. 하(夏) 오월에 예맥을 토벌하여 모두 깨뜨렸다.
삼국지 위서 삼소제기
樂浪外夷韓、濊貊各率其屬來朝貢
낙랑 밖의 오랑캐 한(韓)과 예맥이 각기 족속을 거느리고 와서 조공했다.
삼국지 위서 공선찬
又烏丸、濊貊,皆足下同州
또한 오환(烏丸), 예맥(濊貊)이 모두 그대와 같은 주(州)이다.
삼국지 위서 견초전
忠曰:我遼東在滄海之東,擁兵百萬,又有扶餘、濊貊之用
한충이 말했다. 우리 요동은 창해의 동쪽에 있으며 백만 군사를 끼고 또한 부여, 예맥을 부리고 있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阮鄕侯紹, 承制詔遼東屬國率衆王頒下·烏丸遼西率衆王蹋頓·右北平率衆王汗盧:維乃祖 慕義遷善,
款塞內附, 北捍玁狁, 東拒濊貊
완향후(阮鄕侯) 원소는 제(制)를 받들어 요동속국의 솔중왕(率衆王) 답돈, 우북평 솔중왕 한로에게
조서를 내린다. 너희들의 선조는 의(義)를 흠모하여 착하게 되었으며 항복하여 내부(內附)하였다.
그리고 북쪽으로 험윤(玁狁)을 막고, 동쪽으로 예맥(濊貊)을 저지하였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分其地爲三部 東接夫餘濊貊二十餘邑爲東部
(선비 단석괴가) 그 땅을 나누어 삼부(三部)로 만들었다. 동쪽으로 부여, 예맥 이십여읍과 접하여 동부라고 하였다.
후한서 본기 현종효명제
烏桓、濊貊咸來助祭
오환과 예맥이 함께 내조하여 제사를 도왔다.
十二月,鮮卑及濊貊寇幽并二州
12월 선비와 예맥이 유주와 병주 2 개 주(州)를 침범하였다.
누르하치가 당시 몽골에서 가장 강력했던 차하르 몽골의 릭단 칸(Ligdan Khan)에게 1620년에 보낸 편지입니다.
"대명과 조선 두 나라는 말이 다를 뿐이지 입은 옷과 머리 모양은 하나같아서 같은 나라처럼 삽니다. 만주와 몽골 우리 두 나라도 말이 다를 뿐이지 입은 옷과 머리 모양은 하나같습니다"(만주실록 권6)
누르하치는 일단 몽골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들이는 걸 중요시했고, 이쪽에 더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죠. 왜냐하면 서로 동질감이 많은 유목민족들이었으니깐요. 그리고 같은 유목민족이라서 유목민족의 특성을 잘 알았죠. 몽골의 유목민족들이 언제든 자신을 배신하고 명에 붙을 수 있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특히나 몽골에 대한 장악력에 신경을 썼습니다.
누르하치의 사탕발림 소리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여진인들은 자신들의 동류감을 몽골에 더 가까이 뒀지, 조선에 결코 두지 않았으니깐요.
소설 좀 쓰지 마세요..
누르하치 6대조 먼터무는 이성계 휘하 장수였고요..
또 이 먼터무는 명나라에 자기는 조선의 백성이 되겠다고 했고요..
또 누르하치 또한 조선에게 한 말이..
조선은 왜 동족인 우리를 돕지 않고 이민족인 명나라를 돕냐고 했습니다.
임진란에는 스스로 조선을 돕겠다고 햇고요..
누르하치는 본래 명나라 요동총사령관이던 이성량(조선인 출신 명나라 장군)휘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실록에서도 기록하고 있는게 여진은 본래 우리나라 사람들이다라고 기록하고 있고요..
거란고전을 보면..
만주인들의 역사인식이.. 한민족과 여진족 몽골족이 모두 섞이다 보니 다 같은 공동체의식이 있었습니다.
사탕발림은 개뿔 님이 역사를 왜곡하려는것이죠..
원나라 시절에도 몽골인들이 포로를 잡았을때..
한족의 경우엔 귀를 자르고 목을 베었지만..
고려인과 여진인들은 뿌리가 같은 민족이라 해서 풀어줬습니다.
본래 몽골이라는 민족이 6개의 부족이 통합돼서 만들어진 민족이며..
이 6개 민족중 실제 그 통합을 주도했던 민족은 우리와 가까웠던 민족입니다.
징기스칸이나 쿠빌라이칸의 초상화를 보면 알수 있듯이..
그들의 복식은 우리의 한복과 같습니다.
원나라 시절에 고려와 전쟁을 치룬후에도
6개의 부족을 모두 통합했던 방식으로 고려도 똑같이 혼인동맹을 채결해서 동족대우를 해줬고요..
농경민족에 의해서 흡수돼?? 장난치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조선시대에 농업을 발전시키려고 국가에서 장려했다고 농경민족이 흡수한거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대에 몽골도 농업을 했고.. 농업이 가능한 환경의 땅을 차지하려고 전쟁도 수없이 치루는것이다.
고대 한국에 농업은 농업국가다운 농업까지는 아니었단다..
진짜 넌 어쩔수가 없다..
니가 결론 지어놓고 말도 안되는 개소리로 짜맞추려고 애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