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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10-29 21:57
[기타] 불교란 무엇이고 이번 종교사태에 대한 생각
 글쓴이 : 객님
조회 : 8,038  

최근 요 몇일 기독교의 불교에 대한 땅밟기 논란으로 기독교가 좋으냐 나쁘냐로 나뉘어 아주 많은

게시물이 올라왔습니다. 그중엔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행한 행동에 대해

잘못된 지식과 인식으로 무조건적인 배타만 하는 글도 봤고 또 어떤분들은 불교가 무조건적으로

좋다 라는 인식도 있었습니다.

전에도 쓴적이 있지만 전 종교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종교에서

말하는 어떠한 특징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첫째, 종교는 신을 믿는다.


식상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사실입니다. 불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의 주체는 신이고 신을 믿고

추구한다며 신앙심이라는 단어로 표현됩니다. 또한 신의 가름침을 배우는 학문 즉 신학 이라는

것도 존재 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의 신학은 신학이라 말할수 없고, 신의 족보학 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신의 가르침, 그뜻을 파악하고 공부하려는것이 아니라 신을 믿는다는 전제로

신의 발자취를 따르고 신의 후손을 따라가고..

그렇다면 사람은 신을 믿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후에 천당을 가기 위해??

단순히 믿기만 하면 되는것입니까?

기독교도 불교도 사후세계에 대하여 천당이나 지옥이란것이 존재합니다. 기독교든 불교든

천당이 필요한 이유는 현실적 인간의 선업에 대한 보장 때문에 있는것입니다.

그 보장에 대한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하느님이란 존재가 필요 한것입니다.

(선 혹은 사랑을 베푼다>>>천국에 간다>>>누가보증해??>>>신이 보장한다)

임마누엘 칸트는 신이란 것은 우리가 존재한다 안한다를 말할수가 있는것이 아니요, 인간의

윤리적 요청에 의해서 만든것이다. 라고 하였고 서양의 종교에서는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선을 쌓는다는 행위는 절대 나쁘지 않은 행동인데 가장

기본이 되는 선을 쌓는 행위에 대하여 꼭 어떠한 보답이나 보장이 전제되야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인간은 자율적 도덕성을 가지기 힘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욕망이란게

존재하고 이 욕망이 도덕적 양심보다 강할때가 많기 때문에 인간은 어떠한 도덕적 압력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선을 행하는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선을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에 댓글로 한번 언급한적 있지만 세계는 3가지의 세계관이 있는데

첫번째는 초월적 세계관 입니다. 두번째는 역사적 세계관, 그리고 세번째는 윤회적 세계관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도덕적 압력(moral pressure)을 어디서 받느냐에 따른

기준입니다.

즉 누군가의 강요나 강압이 아닌 스스로 욕망을 절제하고 악행을 하지않게 되고 선을 지키게되는

압력을 어디서 받느냐에 따른 분류라고 할수있습니다.


초월적 세계관은 서양, 그리고 유일신, 즉 기독교가 이곳에 포함된다고 할수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유일신 하느님이 나와 항상 함께하시며 위에서 나를 언제나 지켜보시기에 언제나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만 사후 천국으로 갈수있다 라는 압력입니다.


역사적 세계관은 중국 및 과거 유교중심의 동양국가에서 발전했는데 이들의 특징을 보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을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라는 말이 가장 이 세계관을

잘 표현한것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즉 나의 역사나 우리 가족의 역사. 더 나아가 국가의 역사속에서
 
후대에 내가 어떠한 존재로 평가받을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마인드가 여기에 포함된

다고 할수있습니다. 따라서 선을 행함에 있어서 역사에 압력을 받고 살아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것이 오늘 이야기할 불교적 특징인 윤회적세계관 입니다. 이 윤회적 세계관은

초월적 세계관과 역사적 세계관 사이에서 교차적으로 움직이는 성향을 가지고있습니다.

이 세계관은 초기 불교의 근간이라 할수있습니다.


둘째, 모든 종교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팔아먹고 사는것이다.

살아 숨쉬는 모든 생물들 중에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인식하고 살고있습니다.

인간이 원시인일때. 혹은 부모와 나를 인식하고 대화가 가능한 아기를 벗어나

갓 꼬맹이였을때, 인간은 죽음을 인식하고 살았습니까? 이 죽음이라는 의식은 오직 언어라는

것과 더불어 생겨난 것입니다.

죽음은 개념이며 언어입니다.

종교는 언어를 통해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팔아먹고 사는것입니다.

하다못해 어떤 암이 걸린 환자에게 의사가 "살수있습니다 희망을 가지세요." 라고 말하는것과

"죽을수도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것중 어떤것이 환자에게 힘이 되며 위안이 되는가.

 

한국의 불교를 알기전에 우리는 먼저 초창기 불교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논란에 대한

글을 보면 초기기독교 자체와 인간의 의지와 문화 및 환경적 요인으로 성서를 기형적으로 해석하고
 
실천하는 지금의 변질된 소위 "개독교"라 불리는 개신교를 동일시 하면서 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원래적 모습을 살펴보지 않고 이들을 동일시 하는것은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불교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되어 불교도 똑같이 욕할수 있는 일종의 "꺼리"를 제공할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가장 순수했던 원시적 모습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것이 가장 중요

하다고 할수있습니다.

원시 기독교의 모습은 간략히 설명하면 인간은 원죄가 있으니
(선악과 이야기인듯, 왜 도덕적 압력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 및 근거),

항상 죄를 짓지말고 선을 행하고(이것이 중요),

하느님을 믿고(도덕적 압력을 주는 주체 및 결과에 대한 보증자)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선의 구체적 방향제시자 및 보이지않는 도덕적 압력을 구체화)가

우리의 죄를 위해 희생한것을 믿으면 천국에 임하게(결과 및 보상) 되리라


이런 형태가 원시기독교의 모습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즉 어떠한 행위에 대한것은 결과가

있는것이 필연적인데, 그 어떠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결과나 결과에 따른 보상이

있어야만 인간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게 정석이겠죠. 이것은 결국 인간은 자율적 도덕성이

부족하기에 압력을 가하는것이라 할수있습니다. 행위에 대해서 나쁜것은 벌, 지옥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고 좋은 행위에 대한것은 보상으로 나타납니다. 보상이 없으면 행위 자체를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보상이라는것이 나오는거죠. 그 보상에 대한 믿음과 보증을 하기위해

인간의 개념으로 "" 이라는 것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초기기독교인들은 모습은

행위-결과-결과에 따른 보상-믿음 이 순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행위" 에 충실했다면,

인간의 개념대로 각 지역별 문화별 혹은 시대별, 정치적 정복수단이나 이념적 대립의 수단으로도

종교는 변질되고 종파별로 나뉘고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나뉘어 결국엔

가장 기본이 되는 "행위"가 우선이 아니라

"죽음과 결과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여 믿음이라는 것이우선" 되는것으로 변질되었다고

할수있습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도 부처를 인간으로 규정하지만 해탈을 통한 초월자로 불상이나 형태를 만들어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가? 이것을 어찌 신이 아니라 할수있는가?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것입니다.

이제부터 초기불교의 모습부터 불교의 변질화되는 과정과, 한국내에 있는 모든 불교가 좋은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이 변형되고 지금의 "개독교" 라 불리는 부류와 다를바 없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가 될수도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불교의 시초는 부처라고 알고있습니다. 기독교의 예수님이 등장하기 이전에

부처는 등장했지만 현재 많은 진실과 왜곡으로 인해 예수라는 존재가 실제로 존재했느냐?

안했으냐를 가지고 논란도 있지만 예수는 존재 했던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존재하느냐 안하느냐 에 대한 존재성 여부 논란 자체를 할수 없는 부분은 절대자

유일신 하나님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존재성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예수 보다 더 오래된 부처의 존재성 여부는 논란이 되지 않았던 것이 인도 역사상

가장 강력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이 적극적으로 소승불교를 장려하였는데 경전을

정리시키고 주변국에 불교를 전하여 불교가 세계종교로 발전하는데 공헌하며 각종 그시기의

기록과 유적이 많이 남게 되는데 이 아소카왕이 살던 시기와 부처가 사망한지 불과

100년밖에 차이가 나지않았고 부처의 가족이 살던 성과 가족에 대한 기록도 있기에 부처의

존재성 여부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당시의 초기 불교는 지금처럼 불상

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서 수레바퀴(윤회굴레 모습 형상)로 불법을 상징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부처는 이름이 아닙니다. 예수가 그리스도(Christ :

기름부음을 받은자, 하느님의 아들로 선택받은자)가 되었듯이, 부처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 입니다.

이 싯다르타가 붓다(깨달은 자)가 되고 불교가 중국을 거쳐 신라도 들어오면서 붓다

라는 말이 부처로 번역된것입니다. 여기서 고타마는 성이고 싯다르타가 이름인데

중국의 한자에 없는 발음이기에 한자식 발음으로는 구담실달 이라고 합니다.

그럼 석가모니는 무엇인가? 석가모니도 인도식 발음으로는 샤카무니 입니다.

이뜻은 샤카는 고타마씨족의 커다란 씨족 이고 무니는 성자라는 뜻입니다.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제가 만약 밀양박씨 라면.

밀양이 "샤카" 이고 고타마 가 "박" 이라고 할수있죠. 즉 샤카무니는 샤카족의 성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오는 말하고자 하는것은 부처의 역사를 논하고자

하는것이 아니기에 이정도만 상식적으로 알고 계시면 좋을듯합니다.


고대 인도의 언어는 샨스크리트 어로 불교의 초기 경전은 대부분 샨스크리트어로 기록

되어있습니다. 샨스크리트 어는 한글과 같은 표음문자이고 중국의 문자는 표의 문자

이기 때문에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될때는 불교의 경전을 해석하고 표의문자로 재작성

되는 기간이 100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신라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적잖은 왜곡이 발생됩니다. 이것은 언어적 차이도 있지만

문화적 차이도 한몫을 하게됩니다.

위에서 언급한데로 윤회적 세계관은 역사적 세계관과 초월적 세계관 사이를 왕복한다

하고 정의했는데 기본적으로 샨스크리트어와 불교의 지독한 개인주의 사상은 서양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인간의 선의 실천과 고도의 도덕성 강조는 동양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수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중에 "그게 니 업보다" 라는 말을 종종 쓰곤 합니다

업이란 인도말로 karma 즉 영어로는 do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고, 우리식으로 해석하면

어떠한 "행위" 라고 할수있습니다. 보 란 그 행위에 대한 결과 라고 할수있습니다.

윤회란 업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라고 할수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세계관은 지닌

중국의 불교에서는 윤회가 없어도 불교 이론에 대한것을 성립할수 있었습니다.

흔히 서양문명이나 종교를 보면 인간이 사후에 영혼이 하늘로 가거나 지옥으로 간다고

합니다. 즉 사후에 대한 세계를 인정하죠. 사후세계를 인정한다 함은, 영혼이 존재

한다는 것인데, 그럼 지금 내가 살아있다고 함에 있어서 진정하게 살아있다고

말할수 있는 부분은 육신입니까? 영혼입니까? 불가에서 말하는 진정한 삶은

불멸하는 즉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육신이란 영혼을 잠시 담는 껍데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윤회는 서양에 가깝습니까? 동양에 가깝습니까? 이것이 과거에 불교가  서양적인 영향도

많이 받았다는 반증이 되곤합니다.


자꾸 말이 헛돌았습니다. 윤회에 관해서 설명하다보니...흔히들 윤회라고 하면 사람이 죽은뒤

살아있을때의 죄의 크기나 선의 크기에 따라 짐승으로도 태어나기도 하고 천계에 가기도 한다

라고만 많이들 알고있을것입니다.

하지만 윤회라는 것은 "육도윤회" 라고도 하며 즉 6가지의 세계를 돌고 돈다는 뜻 입니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계, 천계 이 6가지의 세계를 전생의 업에 따라 돌고 도는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면 死者의 죽음. 죽은자가 또 죽고 또 죽고 죽는것을 계속 반복하는것입니다.

지금의 삶에서 많은 선업을 쌓아서 다음생이 천계에 태어난다 해도 인도에서 말하는 천계는 영원히

사는 천국이 아니라 무결점의 공간이지만 인간의 삶처럼 한정된 삶을 사는 공간입니다.

그렇기에 천계인이 천계에서 선업을 쌓지않으면 죽은뒤 지옥이나 축생 이런식으로 고통을 받는

세계에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인도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고통이였고 괴로움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을 해탈(풀어벗어던지다)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윤회의 옷을 벗어버리다. 뭐 이렇게 풀이해도 무방합니다.


그럼 이 업을 통해 윤회가 계속 반복된다고 할때, 내가 지금 현생에서 고통받고 괴롭다 하면 그것은
 
전생의 내 업이 지금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뜻인데 인도역사에서 불교가 가장 많은 공격과 지탄의
 
대상이 되는 부분이 이처럼 인간의 삶이 하나의 숙명론, 그리고 결정론으로 규정되어 인도

신분제도인 카스트제도에서 노예에 속하는 수드라 계급과 짐승보다 못한 불가촉천민인

하리잔 계층사람들을 온전히 부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사상의 단편만을 보고 해석한것이고 만약 수드라나 하리잔 계급에서 자신의

삶을 하나의 숙명이나 결정된 삶으로 봤을때, 지금 처해진 자신의 환경이 짐승보다 못한

고역같은 삶에서 단한번 이라도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 반역하지 않았을까요?

대부분의 이들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습니다. 이들은 왜 현실을 받아들이고 순응했을까요?

결국 윤회란 과거를 중심으로 해석하면 숙명론이나 결정론 밖에 안되지만 현실에서 선을 쌓으면

다음생을 바꾼다는 커다란 반전이 있었습니다.

결국 싯다르타는 숙명적 업을 혁명적 업으로  바꾼 사상가였기에 많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 것이죠, 그리고 그들이 어떤 힘든 상황에 있어도 주변 모든이들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게 됩니다.

욥기엔 "오늘의 고통은 선업을 통하면 하느님이 보상해 주신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에서는 냉정하게도 "지금의 고통을 현실에서 해결할 방법이 없다. 지금의

고통은 전생의 잘못이기 떄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럼 해탈은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하실것입니다. 열반에 들어간다 혹은 해탈을 했다 라고들

하는데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성불했다고 합니다. 성불이란 붓다. 위에 언급한대로 깨달은 자 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소위 부처님 하면 석가모니, 미륵, 아미타 등등등 많은 이름들이 있는데 단순하게 이야기 하자면

미륵부처란 미륵이란 이름의 깨달은자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복잡하게 들어가면 석가모니불

이후에 등장하는 세상을 구원할 미륵부처님 이라고 하고 내용이 어려운 단어가 많고 복잡한데.

중요한것은 불교의 기원인 고타마 싯다르타도 세상을 구원한다는 그런 거창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다음에 오시는 미륵보살님 이런건 모두 인간이 만든 하나의 설 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미륵보살에 대한건 기독교의 메시아 와 유사점이 많습니다.


그럼 해탈은 어떻게 하는것인가? 정답은 불교에서도 모릅니다.

불교에서는 불교가 열반이나 해탈을 위한 해탈교가 아니라고 합니다. 윤회의 과정속에서

선업을 쌓아가느냐의 문제이고 끝없는 윤회의 굴레 속에서 반복되는 선업을 쌓는 과정중에

깨달음을 얻을때. 그것이 해탈이고 그것이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입니다.


복잡하게 설명하면 굉장히 어려운 윤회적 사상을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풀이해서 쓰니 내용이

단순하군요. 그럼 불교가 중국을 통해서 신라로 들어올때 가장 크게 어떻게 왜곡 되었는지

대략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불교는 개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는 극도의 개인주의적인 성향

강합니다. 내가 지금 고통받는건 나의 잘못때문이지, 내 부모의 탓도 아니고 내 자식의 탓도

아니라는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바탕인데, 이러한 불교의 윤회의 주체를 개인에서 가족으로

바꾼것이 중국입니다. 중국은 본래적으로 동양적 사상이 강하기에 개인보다는 공동체적 성격을

많이 요구하는게 특징입니다.

이러한 왜곡은 중국의 역사적 세계관과 가족적인 부분이 강조되어 왜곡되는데

주역에 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불선지가 필유여앙 :

선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남게 되고 불선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재앙이 남게 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불교가 윤회의 주체를 가족으로 묶어버리는 오류를 범했으며

이러한 중국적 불교가 신라로 유입되어 오면서 발전된것이 불교을 종파별로 성격별로 나눌때

크게 쓰는 대승불교 와 소승불교의 성격으로 나누는 기준점이 됩니다.


선을 쌓아가는 과정속에서 깨달음을 소승불교에서는 가르쳐줄수도 없는 부분이며 누군가의

도움도 바랄수 없이 스스로 해야하는 부분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고,

대승불교에서는 깨달음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나의 깨달음은 남에게도 알려주어야 하며

같은 수행을 하는 자에게 동시에 깨달음이 일어날수도 있다고 해석하는 입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렇듯 중국을 통해 왜곡되어 들어온 불교적 특징은 쉽게 찾아볼수 있습니다.

자식의 수능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나, 돌아가신 조상을 위한 우란분제 같은것이나, 사업 번창을

위한 기도나 등등등 이 이러한 모든것이 잘못된 불교의 행태라고 할수있습니다.


또 하나 변형된 불교의 특징은 보면 인간의 운명을 점친다든지 하는 행태입니다. 초기 불교의

성격을 위에서 언급한것중 하나가 윤회를 과거적 시각으로 보면 숙명론이나 결정론밖에

안되겠지만 싯다르타는 선을 통한 혁명론을 말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지금의 고통을 당장

바꿀수는 없지만 업을 통해 바꿀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사회에서 불교적 성격을 많이 볼수있는것은 "적선하십시요" 라는 말입니다.

그대로 풀이하면 "선을 쌓으십시요" 라는 말인데 우리는 "한푼 줍쇼" 라고 해석해버립니다.

이러한 이유는 이러한 말을 하는 자들이 통상 거지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하나의 고정관념이

되버린것이지요. 인도어로 bhikkhu(비쿠)를 비구 라는 단어로 한역합니다. 이 단어에서

비구니 라는 말도 나오는데 인도의 이말은 수행자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적선하십쇼 라는 말을 한푼줍쇼의 의미로 해석하듯이, 초기 불교인들은 욕심이란 수행자에

있어서 가장 큰 죄악이라 생각하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선을 쌓으라 했습니다.

그건 수행하는 자들의 모습이 거지와 같은 초라한 행색을 보며 인도인들은 비쿠라는 단어를

"걸식자" 라는 의미로 해석해버립니다. 따라서 동양에도 거지같은 초라한 행색을 한 수행자들이

하는"선을 쌓으십시요" 라는 말을 듣는 이들은 이들이 거지인줄 알고 그것이 한푼줍쇼 라는뜻

으로 해석되어온 하나의 헤프닝 입니다.


어떤분이 질문했던 것인데. 불교에서 귀신이나 악마를 퇴치하는 행위는 어떤것인가?

불교에서는 서양적 개인주의가 바탕이지만 동양적 성격인 선과 악에 대한 이분법적 구분을

하지는 않아요. 선은 선이되 악은 악이 아닌 불선. 즉 선과 선이 아닌것으로만 생각하죠.

나는 선인데 다른놈은 선이 아니다. 그렇기에 악이다. 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기본적으로 초기

불교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선하지 않은 존재가 선을 쌓는 과정을 방해하는 정도로

인식하곤 합니다. 그렇다보니 이러한 불교안에서 독특한 종파가 있는데 밀교 즉 현교라

불리는 종파가 입니다. 이종파는 대승불교 화엄사상과 여러사상을 이끄는데 일반인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밀교의 특성은 선과 악의 구분이 뚜렷하고 불법이나 불가의 힘으로 악을

퇴치하고 벌주는 듯한 성격이 있는것은 이러한 종파를 따른것이라고 보면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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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하고 잡담게시판을 보니 어떤분이 기독교의 교리와 기본적인

성격에 대해 잘 논하면서 타종교에 대한 언급을 다음과 같이 했는데 이러한 기독교의 해석으로

지금의 땅밟기 논란이 일어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럼 구원은 무엇이고 어떻게 받는것이냐를 설명하기위해 종교시스템과 기독교의 차이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단 가장 대표적으로 이세상 모든 종교시스템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자신이 살면서 선행을 많이 쌓고 좋은일을 많이 하여 나중에 죽어서 심판자앞에서 저울을 달아 선행이 악행보다 많아서 선행쪽으로 저울이 기울어지면 극락이니 뭐니 하는 좋은곳 악행쪽으로 가면 평생고통 받는 안좋은곳 이런 시스템과 자신이 신이 되는 시스템입니다
(http://www.gasengi.com/bbs/board.php?bo_table=comu&wr_id=44724&page=2)

다들 잘아시는 선행을 쌓아 저울에 다는 시스템은 기독교의 짝퉁이 즐겨쓰는 시스템이고 성경의 마귀가 쓰는 시스템은 인간이 신이되는 뉴에이지시스템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창조도 전부터 존재한 시스템입니다  일단 마귀는 인간과 우주만물이 창조되기전에 하나님과 천사와 천상의존재만 하나님계시는 셋쨰하늘에 있을때 마귀는 원래 하나님의 왕자를 자신의 날개로 덮는 그룹이란 존재였습니다 스랍과 그룹은 천사가 아니라 천사와는 다른 더뛰어난 영적존재입니다 천사는 육체를 입을시에 날개가 없는 인간과 똑같은 형상이지만 스랍과 그룹은 인간얼굴의 모습도 부분 갖고 있지만 천사와는 달리 날개도 있고 인간의 형상이 아닙니다"
(http://www.gasengi.com/bbs/board.php?bo_table=comu&wr_id=44724&page=2)

 

뭐 위의 명제에 반박을 하자면 불교에서는 선을 안쌓으면 안좋은곳으로 가서 평생 고통 받는것이

아니라 위에 윤회에서 설명했듯이 6가지 세계에서 끝없이 반복되는것을 윤회라 하는데 너무

기독교적으로 선과 악, 천국과 지옥으로 묘사하신듯 하군요. 또한 인간이 신이되는 그런 시스템을

아마 불교의 성불에 빗대어 쓰신거 같으신데..물론 해탈을 하면 성불한다 하고 이 성불이라는

단어적 뜻이 기독교에 빗대어 이야기 하면 3위일체 즉 성부,성자,성신을 하나로 합친게 성불,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불교의 성불이라는 것에 엄청난 반박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독교적

시각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성불이란 해탈의 굴레를 벗어난 "스스로 존재하는 자" 즉 윤회라는

굴레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통스럽게 쳇바퀴처럼 구르는 영혼이 선을 쌓음으로

자연히 깨달음을 알게되고 굴레에서 벗어나 윤회의 굴레를 옆에서 지켜볼수있는 "자존자"

됨을 말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기독교적 사고에서 말하는 유일신이나 절대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육도윤회를 한바퀴 도는것을 1년의 한계절이라고 칩시다. 그럼 4계절이라는것을 모르는

북극이나 남극에서만 살던 무지한 사람이 4계절이 존재하는 곳에서 1년이란 계절동안

비가오는날 더운날 추운날 각종 모든 날을 겪고 그 1년을 몇번 겪다가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아 이게 반복되는구나" 라는것을 알게되고 어느정도 더 익숙해지면 언제쯤 뭘 준비해야하지를

깨닫게 되는것처럼 춥기전에 따뜻한 것을 준비하게되어 추위라는 고통을 피하는것처럼

윤회라는것은 죽은자가 또 죽고 죽고를 반복하는 굴레인데 이런 고통속의

굴레속에서 선이라는 것을 쌓는 행위를 하게되면 어느 순간 윤회의 이치를 깨닫게 되어 그 윤회의

굴레라는 고통속에 벗어나는 곳으로 비켜 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열반이라고 표현하죠.

마치 쳇바퀴속에서 돌고있는 다람쥐가 그 굴에서 옆으로 빠지면 되는 이치를 깨닫는것과

비유할수 있겠네요. 이것은 신이 아닙니다. 감히 말하지만 불교는 무신론입니다.

더 적나라 하게 표현하자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심리학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심리적 행동

양식이나 도덕적 압력에 대한 행위를 해탈이라는 어떠한 보상을 걸어 종교처럼 표현됐지만

불교의 시초인 싯다르타는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많은 불경을 지은 자가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선한 행동에 대한 필요성을 설법했을뿐이고 그를 추종했던 제자들과 후대에 해석을

통해 싯다르타를 신처럼 추앙하고 해탈의 주체를 가족으로 묶는둥 변형된 모습을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불교란 극도로 개인의 책임과 선의 행동을 강조하는 하나의 심리학과 가깝습니다.

우리가 중국으로 통해 들어온 불교에 익숙해 있지만 중국의 표의문자로 된 불법때문에 종교스러운

성격을 많이 느끼지만 인도의 불경을 보면 다름을 알수있습니다. 인도의 불경엔 싯다르타의

말이 그대로 적혀있으며 그의 우회적인 표현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많이 다릅니다.

 

"마귀종교의 가장큰 특징이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 신처럼 된다는것입니다 마귀인 뱀또한
아담과 이브를 유혹할떄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된다고 하여 그들의 교만을 부추겼습니다 교만이 가장큰죄인이유도 이떄문이죠 인간이 신이되는것 이런 뉴에이지 종교는 인류의 시작부터 존재했습니다 인도에서 파생된 모든 종교들이 그러하죠  자신이 수행을 하고 명상을 하고
고행을 해서 자신의 행위로 열반에 들어가고 부처가되거나 무에 들어가거나 전부 다 자신의 행위가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http://www.gasengi.com/bbs/board.php?bo_table=comu&wr_id=44724&page=2)

 

위의 명제를 반박함과 동시에 인도 불교의 우회적이고 재미있는 경전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위에 보면 기독교에서는 뱀을 마귀로 표현했습니다. 또한 불경엔 뱀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등장합니다. 얼마전 봉은사 땅밟기 영상을 보면 사찰에 그려진 용의 문양 같은것을

빗대어 마귀의 상징 뱀을 우상숭배한다는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예수님이 등장하기 더 오래전에 모든 교리나 불교적 특징과 윤회적 시스템이

이미 완성이 되어 있었고, 기독교는 존재의 여부를 알수 없는 하느님이 직접 성경책을 땅으로

하사 하신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자, 하느님의 대리자,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으로

기독교적 교리와 시스템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마치 불교적 특징을 하느님이

마귀의 형상이라고 알려주신것 마냥 해석하는것은 대놓고 종교적 다툼을 하자는것밖에 안됩니다.

모든 종교의 경전과 교리는 인간이 해석하고 풀이 한것이지, 절대자나 신이 글자 토시

하나 하나 마다의
뜻 하나 알려준 종교는 없습니다.

인도에서는 지금도 많은 분들이 상식적으로 알고있겠지만 뱀이 참 많습니다. 인도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피리를 불며 코브라가 바구니에서 춤을 추면서 나오는 그런 장면을 상상하시는 분이

많으실겁니다. 그만큼 붓다의 시대에도 뱀이란 인도인에게 있어서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친밀한 동물입니다. 또한 뱀은 각종 지저분한 동물의 시체나 병균을 옮기는(당시엔 페스트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경험적으로 알게되는것, 쥐가 많은 곳에는 전염병이 도는 현상들) 쥐를

잡아먹기에 인도인에게 있어서 뱀이란것은 하나의 커다란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기독교에서는 불교가 마귀의 상징인 뱀도 숭상한다.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인도불교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중에 "슷파니파타" 라는 경전이 있습니다. 이것은 붓다가 수행

하면서 돌아다닐적에 했던 우회적인 말들을 그대로 기억한 경전입니다. 물론 표음문자이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의미를 받아들여야 하는것이 기본이지만 표의문자식이 익숙한 중국인에게

단어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면서 암호처럼 숨겨진 더 깊은 진리가 숨어있을꺼다 라는 식의

해석과 해석을 거치다보면 뭐든 종교가 변형됩니다.

그 경전에 나온 "뱀의 장"을 그대로 올려봅니다.

 

뱀의 독이 몸에 퍼지는것을 약으로 다스리듯

치미는 화를 삭이는 수행자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모두 떠난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던지듯 연못에 핀 연꽃을 물속에 들어가 꺾듯이 애욕을 말끔히

끊어버린 사람은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모두 떠난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던지듯 생사 윤회의 근거가 되는 어떠한 찌꺼기도 없는 수행자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모두 떠난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던지듯

 

이렇듯 인간의 영혼이 죽음으로 멸하지 않고 윤회라는 굴레속에서 고통스럽게 또다른 삶을

반복하고 또다시 죽고 또 죽고 이런 현상을 느끼며 싯다르타는 진정하게 살고 있다는 것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육신은 다만 영혼이 잠시 머무는 껍데기일 뿐이라고

생각헀고 이 육신이라는 껍데기에 욕심과 애욕을 벗어던지면 해탈을 할수있다고 합니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던지듯 생사 윤회의 근거가 되는 어떠한 찌꺼기도 없는 수행자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모두 떠난다" 이런식의 표현으로 말이죠. 이렇듯 모든 독이 있는 뱀이라

할지라도 만물의 소중함을 알고 그 미천한 동물의 허물을 벗는 행동속에서 욕심은 허황된것

이라는것을 빗대어 말한것 뿐인데, 저것이 어찌 뱀을 숭상하는 것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쓴 글이 길지만 제 논리의 명제는 아주 간단합니다.


1. 모든 종교(종교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치부하는 유교)는 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선을 추구

하는 이유는 인간의 도덕적 자율성에서 욕망이라는 것에 취약하기에 스스로 압력을 가하는것

입니다. 이러한 선이 하나의 행동이고 그 행동에 대한 결과나 보답이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결과

라면 그것을 보장하는것은 신이라는 존재입니다. 결국 선을 행함을 배제하고 맹목적인 신에

대한 믿음이란것은 사과나무를 심지 않고 사과를 먹기만을 바라고는 것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2. 모든 종교를 설파한 특출난 성인들(붓다, 그리스도 등등)은 자신들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스르로 기록에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을 행하며, 욕망과 욕심을 버리기 위해

고행을 감수하고 설법을 전파한것 뿐입니다. 그들을 따르는 자들이 성인의 말을 기록하고

자신의 주관대로 해석함으로써 변형된 교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엔 선을 행하라는

커다란 out line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것을 보지않고,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퍼트리려 하다가

해석자의 주관적 사관이 개입됨으로서 왜곡이 반복되는것 뿐입니다. 부디 모든 종교의 커다란

목적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3. 그렇다면 부처가 신이 아니고 부처를 믿고 신앙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면 왜 부처상을 만들고

그것에 대한 절을 하는가? 이것은 우상 숭배가 아닌가? 라는 의구심을 가질것 입니다.

계속 언급되지만 불교에서는 유일신이란 존재하지 않고 누구나 붓다가 될수있습니다. 더 심하게

언급하면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가르침의 방향대로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므로

무신론입니다. 부처의 상이 우상이라는 전제는 어떠한 유일신이 존재하는데 왜 다른 존재 즉

부처의 상을 만들어놓느냐 이 질문 밖에 안됩니다. 위에 글쓰신 분의 글중에 링크된 곳을 가보니

각종 멸망의 증거라든지, 우상숭배의 증거라든지 하면서 유로화에 동물을 타고있는 자의 그림

말을 타고있는 여인의 그림이라든지 뭐든것을 우상이라고 하는데, 반대로 십자가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형상이나 그런것은 우상이 아닙니까? 어떠한 것을 우상이라고 할때 제가 말한것

처럼 유일신이 존재한다는 전제하에 그 유일신을 배제한 모든것이 우상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자, 즉 기름부음은 받은자 예수님의 형상이 하느님입니까?

아니면 유다 라든지, 아브라함이라든지, 이삭이라든지 많은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에 대한

그림같은것은 우상이 아닙니까? 이러한 자들의 그림은 하나의 기록이라고요? 숭배의 대상은

아니라고요? 그렇죠?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제 논리가 안먹히고 그래도 우상이라고 우긴다면 우리가

좋아하는 연예인 브로마이드를 방에 커다랗게 건다거나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자가 자신의 몸에

박혀있던 총알이나 파편을 책상위에 장식처럼 놓는다거나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품을 간직한다거나

뭐든 의미가 부여된 사진이나 물건은 우상이 되겠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나 붓다같은 성인을 많은 이들이 따르고 존경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들을 기억하고 싶어했고 이들의 가르침대로 살다가 자신의 의지가 약해졌다고

느낄때마다 자신의 의지를 다잡고자 그들의 형상을 기록하여 지금말로 따지면 자신의 룰모델로

삼고 의지를 다잡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엔 카메라가 존재하여 그들의 모습을 기록할수

있는것도 아니고 그림을 그려도 그 그림이란것이 후대까지 몇십년 몇백년을 갈것도 아니고,

그거 아십니까? 아니러니하게도 엄청난 과학문명이 발달한 지금도 사람이란 존재가 공룡처럼

멸망한다면 사람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증명할수 있는 기록이란게 지금의 기술로 만든

그림이라던지, 사진이라던지, 아니면 컴퓨터 하드디스크라든지 CD라든지, 이 모든 기록매체들은

천년안에 망가지고 형태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가장 원시적으로 돌에 새겨진 글자가 오래갑니다.

그렇기에 고대사람들은 자신의 룰모델은 돌로 조각해서 남기곤 하죠. 이러한 습성이 지금도

종교에서 남아있는것입니다. 불교의 스님들은 부처에게 절을 하는것이 아닙니다.

부처상에서 108번 절을 하는것은 불교의 108번뇌 즉 자신의 육신에 채찍을 하며 108가지 번뇌를

되새기는것입니다. 자신의 룰모델을 보면서..결코 부처상이 숭배의 대상이 아니란거죠.

 

만약 이러한 모든 종교적 커다란 그림을 보지못하고 기독교적 교리로 다른 종교를 바라보면서

믿음=천국, 불신=지옥 이라는 잣대와 명제가 진리라 한다면..

저 역시 법정스님 말씀대로 "믿지 않는다하여 자신의 자식이라 하는 인간들을 지옥불에 던져

버리는 당신네들의 신을 난 당최 이해할수가 없다. 차라리 난 지옥에 가서 당신네 신에게

버림 받은 그 억울한 영혼들을 구제하겠다."

이런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더 이상 타종교를 무시하거나 타종교를 자신들의 교리 잣대로 평가하며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합니다. 또한 죽음과 지옥이라는 공포로 사람들을 믿음 이라는 구석으로 몰아세우지

않았으면 합니다. 차라리 그 공포로 반강제적일지 모르지만 선을 베풀게 하는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 다른 제가 쓴 자료

http://www.gasengi.com/bbs/board.php?bo_table=comu&wr_id=42039&sca=&sfl=wr_name%2C1&stx=%B0%B4%B4%D4&sop=and (독실한 기독교신자님과 대화)


http://www.gasengi.com/bbs/board.php?bo_table=comu&wr_id=42581&sca=&sfl=mb_id%2C0&stx=aias9&sop=and  (댓글에서 성경책 구절중 한부분 해석한것)

뭐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 기독교 좋아하는 사람 아닙니다만 기독교가 믿음 소망 사랑 이셋은 항상필요할진데 이중 제일은 사랑이라 라는 말때문에 기독교 자체의 교리에 대해서는 나쁘다고 평가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물론 유일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존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교리중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면.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 다음과 같이 쓰여있습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말에서 단순하게 중요한 요점을 요약하자면 어떠한 밀알과 같은 흩어진 단편적 지식을 알고 즉 부분적인 지식을 알고 전체적으로 앎이 확대되어 갈때, 이런 자연적인 지식의 확장 만으로도 이 종교는 훌륭한 종교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지식이 확대되고 깊어지는 현상을 "사랑" 이라고 표현한것이죠. 즉 사랑이란 부분적인 앎에서 전체적인 앎으로의 확대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부분적으로 알때 보다는 온전하게 전체적으로 알때 비로소 가능해 지지 않겠습니까? 너무 이거 아니면 저거 라는 식의 흑백논리에 치우친 토론은 접을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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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종교적 분쟁거리로 게시판이 혼란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것 같으니

제글에 대한 다른 의견은 댓글로만 의견 남겨주세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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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Ta 10-10-29 22:54
   
정독하는데 근 1시간 지난듯 
잘보고 갑니다
     
객님 10-10-29 22:55
   
여기서도 무엇이 옳고 그르다 라고는 판단할수는 없지만 제가 쓴 글에 대해 이해가 되셨다면 잘 썼다고 생각할것이고 아무리 읽어도 이해할수 없다면 제가 글을 잘 못쓴거겠죠~ㅎㅎ
          
새옹지마 10-10-30 01:00
   
잘쓰셨어요...한눈에 쏙쏙 들어옵니다..장문 쓰시느라 수고 하셨네요..^^
T0Ta 10-10-29 22:54
   
아...혹시 쉐도우베인 이란겜 하셧나요?
     
객님 10-10-29 22:56
   
아니요 처음들어봅니다.
새옹지마 10-10-30 00:59
   
저는 종교란...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나약한 마음엔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은맘이 있기때문이죠.
저역시 무엇인가 일이 잘풀리지 않을때 절에 갑니다만 일이 잘풀릴땐 안가게되더군요.
내 마음이 나약해져 있을때 찾는다는거죠.
어떤 종교를 갖든 내마음이 평온하면 되는거 아닐까요?
     
객님 10-10-30 02:03
   
정답이네요~~
123 10-10-30 10:52
   
무교인이라면 모를까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밝히고 쓰신 글이니 불교에 대한 해석이나 설명은 빼거나 줄이는게 좋겠네요. 그래야 오해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모르셔서 그랬으니, 의도적이지 않겠지만요. 불교에 대한 설명에 너무나 많은 오류가 보여서 하는 말입니다.
제법무상, 제법무아의 뜻을 되새겨본다면,이글에서의 불교에 대한 내용은 바뀌는게 당연할 겁니다.
     
객님 10-10-30 14:04
   
제 글 어디에도 특정종교를 믿는다 라고 말한 부분은 없는데요..불교에 대한 설명도 학문적으로 접근했고 복잡하게 특정 종파와 교리나 원리에 대해 설명한것보다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을 썼으니 문제 될게 없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의도적이지 않겠지만..제법무상, 제법무아의 뜻을 새겨보라고 하셨는데..
제가 아는 뜻은 삼법인 중에 제행무상, 제법무아 는 들어봤지만 제법무상은 처음 듣는거
같습니다. 무슨뜻인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너무나 많은 오류가 보인다고 하셨는데 저의 전제는 해석을 어찌하느냐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님과 다른 시각으로 인해 오류라고 보이는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저도 그 오류가 무엇인지 알고 수긍할수 있으니깐요
          
123 10-10-31 02:18
   
아.. 그렇네요. 제법무상이라고 적었군요. 삼법인은 일체개고, 제행무상, 제법무아가 맞습니다. 그리고 이글에선 특정종교를 믿는다라고 하지 않았지만, 링크를 따라서 오다보니 님의 다른글을 읽었습니다. 오해 없으시길...
제가 이 글에서 많은 오류가 보인다고 했습니다만, 사실은 공감하는 내용도 많을뿐더러 여러분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 흔적이 보이는 글이고 저 역시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조심스럽게 이러한 댓글 남기게 됐습니다.
그나저나 해석의 차이라고 생각하신다니 이건 뭐라 딱히 꼬집어 말하기가 어렵네요. 더구나 제 가방끈이 많이 짧아서 생각한 내용을 긴글로써 표현할 능력이 되지 못하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내용이라 생각되는 무아에 대해 몇자만 적어보겠습니다. 
님의 글에서도 나오다시피 불교에선 무신론을 이야기 합니다. 맞습니다. 불교는 무신론이지요. 하지만 불교 말고도 무신론을 말하는 종교는 많지요. 그리고 무신론은 그리 중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무신론을 이야기하는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 무아를 이야기 합니다. 무아?? 쌩뚱맞은 단어..무아! 무아라는 단어를 읽으면서 그 의미하는 것이 확 떠오르시나요? 전혀 그렇지 않으시죠. 그럼 과연 무아란 뭘까요??
힌두교에서는 절대적인 신과  합일하는 아트만과 같은 존재를 말합니다. 변치 않는 자성이나 영원히 윤회하며 불멸하는 영혼이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God과 합일한다고 하는 식이지요. 그리고 기독교에서도 천국에서 영생하며 사는 삶을 이야기 합니다만... 무아는 그런 것을 싹 다 부정합니다. 길게 적을 것도 없이 간단히 말하면 인연으로 생긴것은 결국엔 다 사그라지며 영원한 그런 존재 따위는 없다고 하는 것이죠. 어찌보면 쉬운 내용입니다만, 님의 글을 읽다보니 단순한 해석의 차이가 아닌 오류라고 보여지기에 적었습니다. 해탈에 관한 내용에서도 그렇고...암튼...여러가지로 그렇습니다.  테클을 걸고자 한건 아니였습니다만, 결국엔 뭐 그런 모양새가 됐군요. 죄송합니다. 이상입니다.
               
객님 10-10-31 13:33
   
우선 저부터 먼저 사과 드리겠습니다. 제가 불교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일반적인 시각으로 이해되기 쉽게 쓰려다보니 가장 근본적인 모순이 되는 이원론적 사고를 어떻게 정리해서 쓸까 하다보니 그렇게 쓰면 일체개고를 언급해야하고 일체개고를 언급하다보면 고(苦)를 설명해야하고 그렇다면 제법과 무아를 언급해야하고 너무 복잡해질거 같아서 단순하게 윤회적 흐름을 설명할때 윤회는 "고통" 이라는 것에만 치중 했으니 오류가 있어 보이는 것은 당연한것입니다. 그렇기에 느낌적으로 오류를 느낄지 모르지만 정말 뭔가 아시고 오류를 지적하는지 무턱대고의 지적인지 알아보기위해 단순하게 글자의 오타인 제법무상을 꼽았는데 제 실수입니다. 일단 제법과 무아를 꺼내시어 이원론적 사고를 벗어나야한다는 지적을 하셨고 님의 글때문이라도 추가 설명을 피할래야 피할수가 없군요


일체개고 즉 여기서 고 라는것은 인도말로는 duhkha 입니다. 위에서 언급도 했지만 불교가 중국에서 가장 많이 왜곡되었다고 했는데 그중엔 이러한 부분도 많이 차지합니다. 중국에서는 고(苦)를 괴로울 고 라는 한자로 썼기에 많은 이들이 이 고의 반대말을 樂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도에서 말하는(duhkha에서는) 락(樂)또한 고(苦)의 일부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즐거움만 있을수가 없지 않습니까? 왜 락 이 고의 일부분이라고 하냐면 즐거움은 집착을 부르고 집착으로 인해 즐거움이 지나가면 더큰 허전함이 밀려오고 그것은 더 큰 고통을 준다고 생각하기에 락은 고의 일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럼 인도인들이 말하는 duhkha의 반대는 무엇인가. 이것은 마음의평화 santi : nirvanan santam : 열반은 평화로운 것이다 를 나타 냅니다.

고는 단순히 고통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든 한계적 상황을 총칭하는 근원적이고 우주적인 명제 라고 할수있습니다.
영어적 표현으로 고가 꼭 pain은 아닙니다.

왜 인간은 죽을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라는  죽음에 대한 공포, 존재의 한계상황에 대한 성찰, 이것이 고 라고 할수있습니다.

따라서 싯다르타는 선정을 했으며, 그후엔 육신의 고행도 했습니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초월주의와 금욕주의는 상통하는데 이는 다 이원론적 분열을 전제로 하고있어 고를 가중시키기만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말이냐면 불멸적인 영혼이라는것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불멸적인 "나" 라는 존재가 "육체"라는 껍데속에 갇혀서 고통을 받고 오염되어가는 것이라면 육체의 고통을 통해 정신을 해방시킨다. 라는 취지가 고행론이며 많은 이들이 불교의 수행과 꺠달음을 이것으로 묶고 변질되어 가는 불교를 설명하지만 이건 영욕의 철저한 이원론이죠. 영육 이원론의 영혼초월주의는항구적인 아트만을 전제로 하기에. 바로 그러한 아트만이 고의 근원이라고 할수있습니다.

따라서 보리수 밑의 싯달타는 선정에만 몰입한것도 아니고 악마와 투쟁한것도 아니다 그는 인간의 근원적 문제들을 깊게 깊게 사색한 것입니다. 이로서 도달한것이 연기입니다.

연기란 : 모든것은 의존하여 같이 일어난다.
산다는것은 죽음이 있기때문에 산다는것을 의식하는것이고 그렇기에 죽음과 산다는것은 같이 일어난다 라고 생각한것이죠
우리가 흔히 장단점 이라는 말을 종종하곤 하는데 이말을 하면서 우리는 짧은게 따로 긴게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하게 이원론적인 사고죠.
짧은 것은 그것보다 긴것이 존재할때만 짧다고 할수있고 긴것 또한 그것보다 짧은것이 대조되야만 길다고 할수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이원론적 생각 때문에 삶이 따로 죽음이 따로 라고 생각를 하게 되는것이죠.

연기라는 것은 모든것이 같이 움직이고 일어난다고 생각하는것입니다. 내가 태어나는것도 내가 독립적으로 태어난것이 아니고 내 부모가 있기에 태어난 것이고 내가 지금 이러한 글을 쓰는 이유도 누군가 내 글을 보기에 쓰는것이죠.
모든것은 독립되고 고립되어 일어날수 없습니다.

A가 있기에 B가 생기고 B가 생겨서 C가 생기고 C가 생겨서 D라는 것이 파생된다면 가장 근본적인 A가 없다면 나머지 B.C.D가 존재할까요? 그렇기에

연기의 모든 항목(ABCD)를 제법이라고 부르죠. 그런데 연기속의 제법은 불변하는 자기(아트만)를 가질수 없다(無我:무아)
즉 제법무아는 연기론에서 도출되는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그럼 무아는 무엇인가.
서양철학인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말에서 동양과 서양의 가장 커다란 철학적 차이가 있는데 불교는 개인주의적 성격에서는 서양적인 부분이 많지만 철학적 부분에서는 동양적인 사상이 많습니다.

만약 내가 걷는다, 내가 간다=내가 있어서 그 "내"가 간다. 이것은 정당한 명제입니까? 그렇다면 비가 내린다. 비가 있어야 하는데 비가 있는가?
내리는것 하고 비를 분리하는가? 그렇다면 구름이 내려온다? 떠있을때만 구름이고 내리면 비다.

꽃이 핀다. 피어있지 않은 꽃 있는가? 정확히 이야기하면 봉우리가 핀다가 맞는말일진데. 봉우리가 핀다는 말이 맞는가? 피었다면 그것이 꽃이지 봉우리인가. 결국 꽃이 핀다는 말은 피어있는 꽃이 핀다는것 아닌가.
결국은 꽃이라는 말과 핌이라는 말을 따로 따로 말할수있는가? 근데 우리는 말속에서 꽃이 따로 있고 핌 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는것입니다.

여기서 중론 이야기가 나오고 하면 복잡해지니깐 간단히 이야기 하면
가는 작용(술부)을 떠난 가는놈(주어)이 따로 있어서 그 가는놈이 가는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원론적으로 설명할수 없죠
가는놈 속에 감이 있는것이고 간다는것 에서 감이 있지 않는가.
이것은 동어반복적 토톨로지 입니다.

영희가 간다 라는 말도 가는 놈이 간다 이다. 결국 말은 모든것이 모순입니다.

모든 언어는 주어중심설에서 동사중심설로 영어로 how a you?(you 라는 것이 존재 하지만)우리말 에서는 안녕하십니까?(you라는 존재가 생략) 식사하셨습니까?

주어가 숨은 주어로 감추어져있다 할지라도 명제에 있어서 주어가 꼭 필요충분 조건은 아니죠.
술부를 주어의 종속으로만 이해하는것은 실체적 사유의 오류에 속하는것입니다.

결론은 나라는건 간다는속에서 존재하는것이고 나라는 주어는 감이라는 술부속에만 존재하는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항상 있어서 내가 가는게 아니다.

내가 산다. 내가 먼저 존재하고 그 내가 살아가는것일까? 나와 삶이 분리될수 없다면 "내가 산다" 라는 명제도 성립될수 없습니다.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간다."  나의 인생 밖에 "나" 라는 존재자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명제도 성립할수 없다. 이것은 불멸의 내가 있고 나의 인생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것이다. 싯달타는 우리의 이러한 사고의 오류를 연기론으로 지적한것입니다.

나와 너 주관과 객관의 언어적 분별이 사라지고 모든것이 한몸이 될때 비로소 대자대비의 마음이 생겨난다.

불교의 윤리는 신앙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것입니다.
무아론은 형이상학이 존재할수 있는 근거를 무너뜨리는 이론이므로 불교는 철저히 반형이상학적이다. 서양철학과 헤겔의 형이상학적 철학에만 심취되어있던 서양인들에게는 이러한 사상이 이해될수 없었고 19세기를 지나서야만 이것을 이해할수 있었죠. 그렇기에 현재엔 많은 서양인들이 불교의 이러한 윤리를 따르고 배웁니다.

결국 불교라는것은 무신론이고 이론적으로 심리학에 가깝다는 말이 이런부분에서 나오는데 이러한 제법과 무아. 일체개고 같은것은 언급하면 많은이들이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할거 같아서 두리뭉실한 테두리만 설명하려다 보니 님처럼 불교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신분의 시각으로 봤을땐 당연히 위에 쓴 제 글이 뭔가 오류가 있는데 꼭 짚을수 없는 오류를 느끼실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법과 무아 그리고 일체개고를 말하면서 이원론적 사고를 벗어나 생각하는부분부터 성찰해야 하는데 이것을 설명안하고 선에 대한 추구만을 설명하다보니 당연한 지적이십니다.

마지막으로 결론은 "상이 있다는 생각조차 없애라" 이것이 불교적 특징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새옹지마 10-10-31 18:39
   
잘봤습니다...전 이런글이 잼있어요.
여기서 가장 마음에 와닿는것은...
"불교의 윤리는 신앙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것입니다"
이부분이 가장 좋네요...스스로 깨달음으로서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객님 좋은글 쓰시느라 고생하셨네요...감사합니다..
총통 10-11-01 18:48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자기수양이라 보는게 맞을겁니다. 어떤 형의상확적인 절대자를 숭배하는게
아니지 않읍니까.  부처란분도 원래는 인간이엇구, 부처를 숭배하는게 아니라. 우리도 득도하면 부
처처럼 될수있다는 거니..이는 숭배라기보단.  롤모델로 삼는다고 봐야겠죠..
..
반명. 기독,알라,힌두 등은 인간과는 아예다른 현실적인 존재가능성도 없구, 그렇다구 있다고도,
없다고도(이부분을 이용하고있죠) 검증할수없는  초월적인존재를 설정해 놓구 섬기는거니깐요.
..
천주교신자지만. 전 절에 자주갑니다. 절에가면 정말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당근 공양도 하고
옵니다. 전그게 절대 우상숭배라 보지 않으니깐요...스님들처럼 부처도 저의 롤모델(절대 따라
갈순없지만)이라 생각합니다.
현봉 10-11-07 05:56
   
불교에 대해서 어느정도 공부하신 분 같습니다. 하지만 불교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정확하지 않는 점은 불교교리나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불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것을 모른다고 불교가 아닌 불교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몇가지는 얘기해보려합니다.
     
객님 10-11-07 18:36
   
습작같은 지식이긴 합니다만 불교의 전문용어를 쓰면서 구체화되게 써봐야 많은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할거 같아서 되도록 일상용어를 쓰면서 이해시키기 위함으로 썼더니
불교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계신분들에게는 오해를 살수도 있는 부분이 있어요
현봉 10-11-07 05:59
   
첫번째 불교의 윤회에서는 냉정하게도 "지금의 고통을 현실에서 해결할 방법이 없다. 지금의 고통은 전생의 잘못이기 떄문이다" 라고 말합니다라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불교의 사상이라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이건 불교에 영향을 끼친 인도의 사상중 하나이고, 그 때의 가르침은 과거에 의해서 현재를 포함하여 미래까지 불변이라고 말했습니다. 석가모니는 이것을 부정하고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산다면, 계급에 상관없이 해탈을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과거에 설사 잘못을 했다고 해도 진리를 깨닫게 된다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해를 돕는다면, 율법학자들이 율법만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 것에, 예수가 반박하여 세례만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 중 하나를 실천하는거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객님 10-11-07 18:35
   
지금의 고통을 현실에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다 라는 부분은 뒤에 읽어보면 윤회는
해탈을 통해 반전이 있다는것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결국 싯다르타는 숙명적 업을 혁명적 업으로  바꾼 사상가였기에 많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 것이죠, 그리고 그들이 어떤 힘든 상황에 있어도 주변 모든이들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게 됩니다."

요 부분이요~
          
현봉 10-11-08 00:51
   
객님 님 대답이 타당하려면 초기 인도사상이 윤회를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싯달타는 그것을 부정하고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주장해야합니다. 하지만 님은 하지 않았습니다.

싯달타는 선을 베풀면 업을 사라지게 한다고 말했지만, 선을 쌓는것보다 또는 시주를 많이하는 것보다 진리의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윤회의 업이 한꺼번에 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역시 다릅니다.
현봉 10-11-07 06:03
   
두번째 그럼 해탈은 어떻게 하는것인가? 정답은 불교에서도 모릅니다라는 부분입니다.

해탈이란 깨달음과는 다른 말이고 윤회를 거치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영원히 지운다는 말입니다. 고에 대한 지식이 있으실테니, 고를 겪지 않는 것 또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란 뜻입니다. 

깨달음이 삶에서 오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 마음의 괴로움이 없는 상태라면, 해탈은 그런 것을 느끼는 존재마저 없애겠다는 말 정도로 이해할 있습니다.
     
객님 10-11-07 18:37
   
이 부분에서도 해탈의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해도 많은이들이 어려워할거 같아서
위에 리플에 어떤분이 삼법인에 대해 말을 하셔서 일체개고를 말하고 제법무아를 설명
하면서

"상이 있다는 생각조차 없애라" 라는 말로 풀이 해줬습니다~
          
현봉 10-11-08 01:00
   
윤회를 없애기 위해선 존재마저 소멸되어야한다고 합니다. 즉 님은 진리를 깨달음과 존재가 없어짐을 구별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구체적으로 제법무아만을 말씀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깨달음의 내용이 일체개고 제행무상 제법무아라면 열반은 열반적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현봉 10-11-07 06:07
   
세번째 중국의 불교가 윤회의 주체를 가족으로 묶어버리는 오류를 범했으며 이러한 중국적 불교가 신라로 유입되어 오면서 발전된것이 불교을 종파별로 성격별로 나눌때 크게 쓰는 대승불교 와 소승불교의 성격으로 나누는 기준점이 됩니다라는 부분입니다.

대승불교의 출발점은 윤회의 주체를 가족으로 변질시켰다가 아니라 해탈을 할 대상을 타인이란 존재조차 부정하면서, 무아를 추구하는 공사상이 나타난 시점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성직자집단만이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도 해탈의 대상이 되게 해야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초기에 싯달타가 힌두교 사제인 브라만을 비판했던 것과 같은 목적으로 출발한 것으로 대승불교가 나타난 시대배경이 싯달타 제자들이 교단을 형성하면서 스스로 특별함을 추구했었기 때문에, 특별한 무언가를 추구해야만 해탈할 수 있는게 아니라 단순한 것이다를 강조한 것입니다.
     
객님 10-11-07 18:39
   
대승과 소승에 대한 견해는 조금 다르네요~^^ 전 깨달음에 있어서 동시에 같이
꺠닫는것과 깨달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라는 전제하에서 대승과 소승을 분류
하곤합니다. 아마 이부분은 정답을 말하긴 힘든 부분이지 않나 싶네용
          
현봉 10-11-08 00:36
   
객님 이부분은 반야사상으로 출발한 대승불교시작의 역사적 사실에 해당합니다. 정답을 말하기 힘든 부분이 아니라 객님이 불교 역사를 잘 모르셨던 부분입니다.
현봉 10-11-07 06:20
   
네번째 선을 쌓으십시요" 라는 말을 듣는 이들은 이들이 거지인줄 알고 그것이 한푼줍쇼 라는뜻으로 해석되어온 하나의 헤프닝 입니다라는 부분입니다.

초기불교에서 강조된 것은 탁발행위입니다. 초기불교시절엔 수행자들이 자연 깊숙한 곳에서 의식주를 해결했고, 이것이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싯달타도 처음엔 자연 깊숙한 곳에서 소위 고행을 했지만, 후에 태도를 바꾸었고, 일반인과 가까이 있으면서 자신의 가르침을 얘기하고 동시에 물질 욕망은 억누르게 구걸로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싯달타는 물질추구는 악-가르침추구는 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질을 최소화하면 욕망에 휘둘릴 가능성을 낮게하여 깨달음을 얻기 쉬워지기 때문에 , 불교적으로 표현해본다면 집착할 대상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추구했습니다. 그것이 거지와 무엇이 다르냐고 한다면 거지는 물질만 얻어가지만, 수행자는 물질을 받으면서 가르침을 얻고자하는게 가르침을 주는 행위를 한다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객님 10-11-07 18:41
   
이건 불교적 교리와 맞지않는다는것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한국인이 일상적으로
잘못받아들이는 부분이 적선하십시요 라는 말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왜 그러한 경향이 생겼는지에 대한 헤프닝스러운말입니다~
현봉 10-11-07 06:24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는 주장이나 자신의 지식은 진리의 단편에 불과하고, 난 길을 가르쳐 줄 뿐, 목적지에 닿는 건 너희들이 힘내서 닿아야한다는 말이 불교의 가장 단순한 가르침입니다.

소위 고집멸도라고 하는 것중, 멸에 이르기 위해서 팔정도를 수행해야한다고 말하지만 그러한 의무는 처음부터 해탈하기 위해서 출가한 수행자에게만 요구되는 덕목일 뿐, 일반인에겐 선하게 살면서 이런 수행자의 말에 좀 더 귀기울이라고만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일반인 대상 가르침은 수타니팟타를 읽으셨다면 "더 없는 행복"이란 글을 읽어보시면 이해가 빠르실 듯 합니다.
현봉 10-11-07 06:28
   
불교는 여러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초월자를 믿는 모습이 있고,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고행을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초기처럼 수행자-일반인이 구별되어 있고, 일반인에게 요구되는 것과 수행자에게 요구되는 것이 달라지는 건 카톨릭이나 개신교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어떤 것이 불교냐는 질문에 민간인의 모습만으로 불교는 초월자를 믿는 것이다고 해도 맞는 말이고, 수행자의 모습만으로 해탈을 추구하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일종의 철학이거나 심리학이라고 해도 맞는 말입니다.  다만 윤회나 카르마등 사상사적 접근을 우선한다면, 아마도 수행자 집단의 불교가 더 이해하기 쉬운 모습으로 보일 듯 합니다.
     
객님 10-11-07 18:42
   
제가 시각을 맞춘건 지극히 원시.불교의 모습을 설명했기 때문에 초월자적 시각의
불교는 아예 배제하고 설명했습니당
          
현봉 10-11-08 00:41
   
객님은 불교만이 옳다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서 불교를 설명한다고 하셨습니다. 달리말하면 현실 한국불교에 대해서 논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해본다면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체 또한 초기불교를 설명하려했다지만 불교의 종교적 발달과정도 깨달음의 의미도 심지어는 대승과 소승의 차이도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근데 어떻게 정보를 취사선택한다고 하셨습니까? 현재는 과거에 뿌리가 있지만 같다고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다른 것을 님은 열심히 설명하신 겁니다.
현봉 10-11-07 06:37
   
전 이제 사상사적 접근으로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해보려합니다.

첫째는 불교의 사상마저 잊는 것, 내가 소위 불교사상에 맞게 행한다는 의식 자체를 잊는 것이 불교사상의 목표이고 동양사상이라면 공자가 말한 덕을 체화해야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둘째는 나를 잊는 것으로 첫번째보다 더 직접적인데 이런 행위를 하고 있는 "나"를 의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체화한다면 나와 타인을 구별하지 않는 행위, 좋은 것이 있다면 나눠먹고, 고통을 겪는다면 같이 고통을 겪는 행위들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말 거칠게 말한다면 동고동락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스스로 희생하는 행위까지 포함하지만 이것은 상황에 맞게 행동해야한다는 조건이 붙게 됩니다.

셋째는 만약 첫째 둘째를 깨달았다면 자신만 아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은 스스로 원해서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 할 것입니다. 소위 "발심"을 가진 자에게 가르침을 전한다는 말이고, 달마가 혜가가 팔을 자르자 가르침을 전한 것에서 알 수 있는데, 혜가는 스스로 팔을 자를 각오를 하면서 듣고자했기 때문에 가르침을 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극단적인 예라 보통의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타인에게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넷째는 열반입니다. 열반은 죽음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티벳밀교는 이 죽음과정에서도 사자의 서를 듣고 깨달음을 얻으면 윤회를 벗어난다고 말하고 있고, 그 때 인간이 느끼는 빛이 신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한국불교는 중국영향도 있지만 인도나 티벳에서 발달한 밀교영향도 강한데, 이렇게 진리를 상징하는 빛을 신격화하여 숭배하는 행위도 영향을 받습니다. 비로자나불이나 아미타불 금강야차등등이 대표적이고, 그렇게 신격화된 것을 모시기 위해 종교적 행위를 하는데, 그 중 하나로 다라니외기와 제식이 있었고 현재 한국사찰도 그런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불교를 단순한 심리학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현봉 10-11-07 06:44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경전을 중시하지 말고, 단어 하나하나의 뜻에 얽매이지 말 것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쉽게 표현해본다면 스님들의 행동을 기록한 공안을 읽을때 글자만을 외우려고 하지말고, 왜 그렇게 말을 했고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정말 미친듯이 거기에 빠져서 생각하라고 가르칩니다. 소위 화두라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화두를 현대적으로 표현해본다면 항상 왜라는 질문을 잊지말고 고민하는 동시에 불경이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추종하지 않는 행위를 말합니다.  싯달타는 상황에 맞는 행동을 강조했는데 구체적으로 만약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해서 항상 죽여선 안된다는 식으로 절대적으로 이해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치명상을 입어서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있을때, 생명은 죽여서 안돼라면서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숨을 끊게 해주는 것이 더 옳은 행동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더 나와 타인을 구별하지 않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현대적인 안락사와 동일점이 있습니다.

업 카르마 비구등등의 단어가 불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지도 모르지만, 전 한국불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놓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국불교는 중국땅에서 노장사상과 결합하여 나타난 중국의 선종 특유의 가르침의 영향이 굉장히 크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말로 불교를 사상사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다면 이런 선사상이나 대승불교의 시작인 반야사상을 이해하려했을거라고 생각됩니다.
     
객님 10-11-07 18:44
   
선사상 노장사상까지 언급하고 대승불교의 시작도 설명한다면 제가 한국 불교의 흐름적
특징을 설명하는것인데, 제가 위의 글을 쓴 목적은 원시.불교의 모습을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쓸려고 했던것입니다. 너무 오해하지않길 바랍니다
          
현봉 10-11-08 00:45
   
초기불교의 모습은 한국불교와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형으로 판단하려했다면 동남아시아쪽 불교가 초기불교의 모습과 가깝습니다. 이것도 아주 거칠게 말한 것입니다.

중국불교와 한국불교를 얘기하려 했다면 선사상이 언급되어야하고, 중국불교와는 또 다르게 티벳에서 출발한 밀교사상까지 언급되어야합니다. 하지만 님은 어느것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현봉 10-11-07 07:21
   
불교는 종교가 아니고 철학이거나 심리학이라고 거칠게 말한 것이 전 불교를 처음부터 종교가 아니라고 단정했다고 생각됩니다. 불교사상적으로 표현해본다면 아상에 갇혀서 불교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불교는 종교적 색체가 강합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밀교의 영향과 인도의 독특한 신관과 중국의 노장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한국에 와서는 정안수를 놓고 천지신명에 비는 행위까지 결합하면서 가족의 안녕을 바라면시 초월자에게 기도하는 것이 부처에게 공양하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달리말하면 초기불교의 반야사상과 공사상이 한국화 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반야사상이 신격화된 여래을 믿는 것이 되었고, 그런 여래중 하나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행위를 하기 위해서 제례를 만들고, 제례행위로 주문을 외웠으며, 한국에 전해져서 스님들이 염불(정확하게는 불경을 외울때의 음율이 있는것과 다라니를 외우는 것)을 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신만 외우면 자신의 악업이 사라진다고 믿는 한국불교 특유의 "나무관세음보살"이란 주문외우기는 이 모든 행위를 단순화한 원효의 영향입니다. 승려들의 탁발행위와 그런 탁발을 돕는 유례가 업을 없애야 해탈할 수 있다는 불교윤회사상의 영향이라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불교는 여러모습을 띄고 있고, 그 여러모습의 유래를 쫓아가야만 불교를 이해할 수 있으며, 이렇게 여러모습을 보면서, 한가지 생각에 갇히지 않는 것이 싯달타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는 걸 불교특징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님은 불교를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계신 것 같다는 말로 긴 댓글을 마무리합니다.
     
객님 10-11-07 18:47
   
밀교와 반야사상이 신격화된 후기의 불교를 설명하면 불교가 철학이거나 심리학이라고
설명한것이 완벽하게 잘못되었지만 또다시 말하지만 전

 "원시.불교 그 자체를 설명한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앎" 이라는것에 대한 전달에 있어서 어려운 단어나 불교의 특징적인
용어를 쓰면서 설명해봐야 "앎"을 전달하는데 커다란 방해가 될꺼라 생각했기에
일상용어로 풀어 설명하다보니 불교에 많은지식을 가지신 분들에게는 오류가 있어 보일
수도있습니다~

어쨋거나 좋은 지식과 정보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현봉 10-11-08 09:00
   
님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불교의 윤리는 신앙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것입니다"

 는 부분은 불교역사와 맞지 않고 한국불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해가 보일 수 있는게 아니라 완전히 틀린 설명입니다. 팔정도는 윤리학이기 때문이고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습니다.

 흔히 듣는 세속오계는 불교의 오계를 화랑들이 맞게 변형시킨 것이고, 싯달타마저 승려들이 지켜야할 것과 일반인이 지켜야할 것을 구별해서 말합니다. 즉 특정한 가치를 추구함과 동시에 그것에 신념을 강조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덧붙여 교조주의를 경계하여 스스로 회의하는 습관을 강조한 것은 교리에 해당하는 싯달타의 말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것조차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싯달타 말의 절대화를 통한 신념의 맹목화를 경계한 것입니다. 동시에 싯달타의 말은 진리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강조했을 뿐입니다.

 다만 진리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 그림자란 너무도 중요한 것이고, 그 그림자를 통해 진리를 보거나 느낄 수 있어서 따른다면 그것은 신념이고 신앙에 해당합니다.

 길었지만 님 주장은 틀린 주장입니다.

 님 주장이 맞다고 인정해볼까요? 님 말을 그대로 따라보겠습니다. 바로 모순이 발생합니다.

 윤회도중 천상계만 인정해도 천상계는 신의 세계이고, 때문에 불법을 보호하거나 수행자를 보호하는 신,부처가 되는 길을 막는 마군도 등장합니다. 이것을 비유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성경이 천국과 지옥 그리고 신의 행사를 기록한 것처럼 불경도 신의 행동이나 천국과 지옥을 말합니다. 이중기준을 사용해야할까요? 아닐 겁니다.

 님은 불교를 님이 주장하고 싶은 심리학으로 판단하기 위해서 불교를 변형시키신 듯합니다. 그리고 심리학으로 파악하려해도 인간의 의식을 강조한 유식불교에만 님의 설명틀에 맞을 뿐입니다. 아니면 불교적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론만 강조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확인한 것처럼 사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몇가지는 맞는게 있지만 그것을 모아서 불교사상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도 차이가 납니다. 구체적으로 유식불교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인 공사상을 주목하지 못하시고 , 방법론에 주목해 심리학이라고 단정했으면서 가장 방법론적인 선불교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신 듯 합니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시길 바랍니다.
객님 10-11-08 10:47
   
제가 불교에 관한 글을 쓴 가장 큰 목적은 글을 읽으셨다면 느끼실 것입니다. 기독교의 여러 종파로 나누어 볼적에 최근 한국내에서 개신교 라는 종파의 공격적인 신앙의 전파가 커다란 분란을 일으켰기에 모든 종교를 자신이 믿고 있는 종파적 특징과 해석을 통해, 그리고 그 시각으로 타 종교나 타 종파의 논리를 반박하거나 공격하기 이전에, 모든 종교의 근원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않을까 라는 취지로 설명하여 쓴것입니다.

현봉님이 불교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다 한늘, 불교 자체를 종교로 규정하고 타 종교를 공격하는것과 타 종파가 틀리다고 부정하는 행위 자체야 말로 이분법적인 종교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 글엔 대승이든 소승이든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다고 기록한 부분은 한구절도 없습니다. 다만 초기의 모습과 다르게 왜곡되었다는 언급은 있습니다. 이것은 나쁘다는 표현이 아니고 문화적 차이에 의해 해석의 차이라는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대승이냐 소승이냐 하는 이딴 개념들은 붓다가 만든 개념도 아니고 사람들의 해석에 따른 개념이고 자신의 신념을 합리화 하기위한 개똥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가장 큰 오류이며 제가 초기불교의 모습을 일상언어로 풀어 쓴것은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들 위함도 아니고, 각종 불교적 언어나 화엄사상이니 노장사상에 근거하여 변했다느니 이딴 두리뭉실한 단어로 설명한다 한들, 정말로 "앎"  혹은 "깨달음" 라는것을 많은 이들에게 전달해주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노장사상이 무엇이며 선사상이 무엇이며 공사상은 무엇이며 이러한 개념들까지 일반인이 이해할수있는 일상언어로 풀이 해석할줄 아는 자가 진정 아는자라 생각됩니다.

전 한국불교를 설명하고자 한게 아닙니다. 불교의 역사적 혹은 사상적 교리니 이딴거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성도 못느낍니다.

종교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따라서 해탈이든 이러한 구체화된 방법에 있어서는 정답이 없는것이 당연하기에 "알수없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현봉님은 해탈에 대한 구체화된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게 얼마나 위험한 생각이라고 생각해본적 없습니까?

육도윤회든 인도의 윤회적 사상을 불교가 만든 하나의 개념이라는 전제로 본다면 싯달타가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도 제시했을것이고 그렇다면 불교가 제 말대로 "신앙에서 비롯되는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것에서 부터 비롯된다" 그렇기에 불교는 심리학에 가깝다. 라는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이 될것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지만 불교가 윤회사상을 창시했고 육도윤회를 언급하면서 천계든 아수라든 이딴 개념을 싯달타가 만들었다는 언급은 하나도 안했습니다. 다만 싯달타가 수행하던 그 시기의 인도인에게는 동양의 역사적 세계관이 아닌 서양의 초월적 세계관도 아닌, 인도만의 윤회적 세계관이라는것이 존재했었고, 그러한 세계가 존재한다면, 업에 따라 현실의 인간의 고통이 전생에 대한 업에 대한 결과라면, 현실에서는 극복할 방법이 없지만 "선업"을 통해 다음생을 바꿀수있다는 혁명론적 사상이라는것을 싯달타는 언급하여 현실에서 절망에 빠진 많은 이들에게 희망적 메세지를 전달헀다. 라는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후에 대승이든 소승이든 교리가 어떻고 해탈은 어떤식으로 하며 열반을 알아야 하고 무아가 무엇이며 제법은 무엇이고, 교조주의 노장사상등등 공부를 하지않으면 알수없는 개념들 따위가 해탈에 있어서 꼭 필요한것이고, 해탈을 하는 어떠한 방법론적인 것이 존재한다면, 그러한 개념을 몰라 깨달음을 못하여 열반에 들어갈수 없다면,

법정스님 말대로 "믿지 않는다하여 자신의 자식이라 하는 인간들을 지옥불에 던져 버리는 당신네들의 신을 난 당최 이해할수가 없다. 차라리 난 지옥에 가서 당신네 신에게버림 받은 그 억울한 영혼들을 구제하겠다." 라는 말이 기독교를 빗대어 한것처럼 교리는 다를지언정 같은 불교에서도 이말이 통용되어야할것입니다.

이것처럼 타종교를 인정하지않고 배척하는 무리와 다를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제가 강조한것은 해탈을 하는 방법론은 논한것도 아니고, 교종이나 선사상, 화엄이든 뭐든 대승이든 부파불교든 이런것을 언급한게 아니고 주 목적은 "선업" 이라는 것입니다.

전 현봉님이 틀리다고 한적이 없는데,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하며 틀리다" 함은 대승이냐 소승이냐 라는 이딴 개똥같은 개념을 만들어 놓고 자신이 알고있는 교리적 지식과 잣대의 기준으로 다른것은 무조건 틀리다 라고 하는것과 다를바없으니 이것이 지금의 개신교의 행태와 다를게 무엇이며, 그렇기에 초기적 불교의 원형을 보는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것입니다. 그것이 부파불교의 성격과 많이 부합되는 부분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부파는 대승이 나쁘다 혹은 틀렸다 라고 설하지 않습니다.

대승이라는 개념을 창시한 자들이 소승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놓고 자신의 논리와 다르다하여 공격하는 경향도 있지만 인도나 미얀마 등 부파불교인들에게 대승과 소승의 개념을 백날 설명한다 한늘 그들이 이해못하는것은 어쩔수 없는 부분일진데.

어찌하여 자신이 믿고 알고있는 것과 다르다 하여 틀리다 라고 말할수 있습니까? 불교의 원형적 모습을 주목하고 그 후에 "선업" 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 나만의 이해로 대승이든 소승이든 어떤원형을 거치지않고 나만의 독특한 철학과 사상을 만들었다고 한늘,

그러한 나만의 해석을 틀리다 라고 말할수있는 자가 누가있겠습니까? 성철스님이든 법정스님이든 모두가 자신만의 해석과 시각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 어느누구도 자신의 시각과 다르다 하여 틀리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종교적 교리나 지식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이 알고있는 그 지식을 잣대로 삼아 다른것은 무조건적으로 틀리다 라고 규정하는 잣대부터 바꾸시길 바랍니다.

싯달타도 해탈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적이 없으며 다만 "선업"을 강조했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열반이니 득도의 방법이니 해탈과 깨달음에 있어서 어떠한 방법이 있는것처럼 설명하는것처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것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선업을 무시하고 좌선하고 수행하면서 득도를 하겠다! 라고 역설하는 하는것과 같습니다.

가장 기본인 선업이라는 것에 주목하시고 님의 대승적 잣대로 저의 부파적 성향이 틀리다고 규정짓는것은 개신교 사람이 장로나 천주교는 틀린것이고 다른 종교는 전부 이단 이라고 말하는것과 하등의 차이는 없습니다.

정답이 없는 종교적 이해에서 교리나 이해관계로 인해 언쟁을 안했으면 합니다~

그냥 "나와는 다른생각" 고로 그냥 두어라 는 식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현봉 10-11-08 22:45
   
객님 정확하게 알지못하고, 특정대상을 평가하려 하셨습니다. 그래서 특정대상은 님이 생각하고 있는것과 차이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님은 이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승사상을 님은 지금 깨똥철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불교를 인정하지 않고 모욕하는 것이 아닐까요? 한 종교의 교리를 그렇게 말해도 된다는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건 님의 자의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됩니다. 설사 대승을 처음에 주장한 자들이 기존의 부파불교를 소승이라면서 비하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해도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부파불교가 싯달타 가르침과는 다르게 특권화를 추구했던 사실은 어떻게 이해하실지 궁금합니다.

 노장사상의 영향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긴 시간과 긴 공간앞에선 인간의 시비선악 따지기와 인간의 존재는 무의미하다는 장자의 주장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와 비슷한 점이 있어서 중국이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겁니다. 비록 황로학파나 현학파의 영향때문에 해석이 복잡해지고 잡다한 개념이 만들어졌지만, 세상엔 빛과 그림자가 있듯 그렇게 불교가 어렵지만 한편으로는 더 철학적으로 깊이있게 발달하게 됩니다. 유학이 이런 불교에 대항하기 위해서 성리학이란 이름으로 너무도 현학적으로 변하여 현실과 멀어지게 되는 원인도 제공합니다.

 님은 이것을 알아갈 준비나 받아들일 준비를 하셔야 불교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답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가장 오해하고 계신 것이 있는데 님은 부파불교만 불교라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동시에 나머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과연 타당한 주장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양보해서 부파불교만이 불교라고 인정해도, 부파불교의 주장도 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전 대승이 맞고, 소승은 틀렸으며 대승만이 불교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불교란 무엇인가?를 답하기 위해선 대승 소승 그리고 밀교까지 알아야하고, 각각의 모습을, 그리고 한국불교와 타종교라는 현실문제를 논하기 위해선 구체적으로 한국불교를 말하기 위해선 부파불교만이 아니라 님이 깨똥철학이니 타락했다는 나머지 것들을 알아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깨달음과 해탈을 구별한 또는 해탈의 의미를 말한 열반경은 죄송하지만 부파불교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전입니다. 역시 님은 틀렸습니다.

 부파불교에 대한 지식으로 불교를 논하려다가, 거기엔 무리가 있었다는 것만 인정하셔도 전 이 토론이 서로에게 유익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부파불교 자체에 대한 오해를 말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하지만 님은 자기가 알고있는 것을 절대화하기 위해서 나머지 부분을 부정합니다. 그런 무리수로 자신의 생각을 지키려합니다. 이게 과연 합리적인 태도일까요? 개인적으로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정확하게 얘기해봅시다. 불교란 무엇인가?를 논한 것일 뿐 부파불교란 무엇인가?를 논하지 않았고 한국불교를 다루기 위해서 불교를 말한 것일뿐, 부파불교만으로 한국불교를 논한 것이 아닙니다. 이건 자기주장을 지키기 위한 님의 논지일탈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님은 불교의 수많은 모습중 명상수행법만 주목했을 뿐이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싯달타는 명상수행법만 말했고 나머지는 후대에 창작되었다는 너무도 무모한 주장을 하셨습니다. 하나 더 있다면 선업 쌓기만이 싯달타의 가르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주장도 정말로 맞을까요? 불행하지만 진리를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한 싯달타의 말을 왜곡하셨습니다.

 이걸 다른 것으로 이해해야한다구요? 님의 해석으로 존중받아야하고 성철스님의 불교해석과 동등하게 평가해야한다구요? 아직까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님이 얘기하는 성철의 해석도 논해볼까요? 성철은 돈오돈수를 내세워 돈오점수를 비판했습니다. 교종-선종의 타협을 다시 부정하여 선종에 보다 가까운 해석을 하였습니다. 이게 님의 불교해석과 비슷합니까? 아닐 겁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님은 불교를 이해하고 싶었던게 아니라 님은 불교는 선업강조와 명상수행이 전부라는 님의 해석만 지금까지 주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불행하게도 님이 그토록 강조했던 현실불교를 다루겠다는 목적과 너무도 멀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모르는 것이나 내 생각과 다른 것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가장 피해야할 오류를 지금 범하신 겁니다. 그런 오류를 상대에게 뒤짚어 씌우는 주장까지 하셨습니다. 대승방법론만이 해탈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상대의 주장을 왜곡했기 때문입니다. 전 부파불교의 주장은 해탈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심지어 지옥으로 떨어뜨린다는 주장은 어느 한곳에도 한 적이 없습니다.

 불교에 대한 수많은 해석중 하나이다고 주장하셨지만, 해석은 기존의 관념의 바탕으로 나오는 것이지, 스스로 창작하여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관념을 배우면 거기에 갇힐 위험은 있지만 그것을 배우는 것이, 비유하자면 그림자가 그림자인지 알아야 실체도 볼 수 있는 겁니다. 님은 그림자마저 보지 못하시는 중입니다.
현봉 10-11-09 12:24
   
객님의 논지일탈도 인정해봅시다. 불교는 초기와는 다르게 타락했기 때문에 초기 불교로 돌아가야한다는 주장으로 단순화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으로 현재의 종교적 분쟁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전 문제해결가능성이 낮을 뿐아니라 주장자체가 양비론의 오류에 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의 종교분쟁 또는 상대적으로 특정종교가 왜 존경받는가?의 문제는 교리와는 무관하게 타종교를 얼마나 관용할 수 있는가? 종교가 사람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권력집단과의 관계는 어떠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각 종교들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른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타종교에 관용적이며, 행복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편안함에 있다라고 말하며 종교는 권력집단과 멀어져야한다는 주장을 하는 종교가 상대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고, 존경이 과장이라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건 종교자체의 교리에서 오는 문제점이 아니라, 종교의 권력화와 세속화라는 외적인 문제입니다. 물론 타종교에 대한 관용여부는 내부문제이기도 하지만 타집단과의 관계문제이기 때문에 외부문제라고 표현했습니다.

 님이 애초에 시도하고자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게 종교외부적 문제에 보다 가깝습니다. 이것을 이해관계로 단정하실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양비론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도 나의 불교인식이 타당하고, 불교가 초기모습으로 돌아간다면 한국에서 벌어지는 문제가 상당히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전 그런 입장에 이런 대답을 하고 싶네요.

 "우리가 착하고 평화를 사랑하면서 살았다면 식민지시대를 겪지 않았을 것이고, 아프리카도 유럽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으며 인디언도 미국인에게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으며, 그 때의 사람들이 건국초기나 부족정신으로 돌아갔다면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부에 원인이 있는지, 외부에 원인이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최소한의 옳고 그름보단 양비론으로 판단해야한다고 처음부터 생각한 것 아닌지 개인적으로 궁금합니다.

 관용과 용서는 상대의 입장도 변화할 때 비로써 현실문제를 해결하고 의도한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한 종교가 비판받는것은 부당하기 때문에 공정하기 위해선, 상대종교도 비판받아야한다는 주장보단 현재를 더 정확하게 바라보는거 같습니다.

 선한 의도에 좋은 결과가 나오길 바랍니다. 그리고 불교교리논쟁은 시간이 필요한 문제처럼 보입니다.  불교를 넘어 각 종교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시길 바랍니다. 건강하세요
허당 10-11-10 02:09
   
두분 열심히 불교에 대해 깊게 담소를 나누고 계신데 한마디 하겠습니다.
이번 종교사태에 대해 무슨 원시 불교에 대승에 소승이 나오시고 하시는데 일반인들이 불교를 더 좋게 보는 이유는 불교에 대해 이해나 신앙이 아닙니다. 일반인이 느끼는 불편함이 얼마나 강하고 약하냐이죠.

일반적으로 성범죄, 폭행, 강도, 사기 등등은 무속인, 신부, 승려, 목사, 사이비교주 등등 모두 동일합니다. 그리고 종교에 대한 포교도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 동일하고요. 개신교 욕하는 글이 올라오면 어떤 개신교인은 그러죠. 일부가 저럴뿐이다. 또는 스님들의 폭행, 사기 등등의 뉴스를 보여주면 불교도 똑같다고 아예 댓글들을 도배를 해버립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불교보다는 개신교를 욕합니다. 그런데 왜 유독 개신교만 사람들이 미워하고 불편해 할까요. 그건 포교과정에 나에게 미치는 정신적, 시간적 불편함 때문이에요.

이 간단한 걸 객님은 개신교의 땅밝기에 대해서 평하는 댓글을 읽고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행한 행동에 대해 잘못된 지식과 인식으로 무조건적인 배타만 한다는 개신교 옹호하는 듯한 인식과 또 댓글인들이 불교에 대해 잘 모른다는 인식의 개인생각을 밝히며 초기불교에 대해 글을 풀었고, 현봉님은 거기에 불교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바탕으로 객님의 불교에 대한 인식에 문제점을 찝어내시는데 이거 아무 필요없는 겁니다.

여기에 개신교를 욕하는 댓글인이나 길거리의 일반인들은 나에게 피해를 주냐 안주냐가 큰 겁니다. 그동안 개신교가 대중들에게 물질적은 아니지만 시간적, 정신적 피해를 많이 주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저 땅밝기 뿐만아니라 여러 사건에 공조현상을 보여 개신교에 대체할 수 있는 종교를 찾아서 불교에 친밀감을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은 피해주는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것도 아니고 종교적으로 포교만 했을 뿐이라며 정당함을 강조하고 상대방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 모르죠. 그러니 왜 개신교를 싫어하는지 모르고 이해를 하려고도 안합니다.

객님께서 이번 일의 댓글을 보고 사람들의 종교 교리적인 측면으로 접근을 하신게 잘못된 것이며 현봉님은 불교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시는 필요없는 시간을 보내고 계시다는 겁니다. 물론 두분 이야기에 서로 주고받은 도움말이 있으시겠지만 제3자인 전 이번일에 이렇게까지 깊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개신교 싫어하는 사람들은 피해를 한번쯤은 겪어본 타종교인 포함 무신론자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나라에 무신론자가 50%이상입니다. 천주교+개신교해서 기독교가 인구가 많고 불교가 그 다음 입니다. 어차피 개신교는 천주교도 포교대상으로 보고 있으니 기독교를 나눠서 이야기하면 불교, 천주교, 개신교 순이라고 알고 있는데 50% 이상되는 무신론자나 일반적인 불교인(불교인이라 해도 불교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두분의 어려운 불교 논쟁은 잠만 오는 교리시간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두분의 글을 읽고 잊어버릴 뿐이죠. 이번뿐이 아니라 대부분의 개신교 논쟁은 유일신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된 그릇된 포교와 남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심에서 비롯된 것이니 그점에 대해 담론을 해보심이 어떨까 합니다.

두분 너무 깊게 담론들을 하시기에 한대목 끼어 들었습니다.
적루 10-11-10 15:42
   
원문 글과 댓글들을 읽고나서...

마지막에 허당님 말씀대로 인터넷에서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를 디스하는 이유는 교리보단 그들의 행태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알려진 "회개하면 모든걸 용서"하는거 처럼 보이는 한국 개신교의 교리도

한 목하는 듯 보이고요.


그리고 신도수를 보면 무교>불교>개신교>카톨릭 순입니다..

최근 개신교의 행태에 개신교 신도들이 카톨릭으로 많이 개종하여

카톨릭 신도가 늘었지만 아직은 개신교 신도가 많습니다.
친일개불교 10-11-10 23:16
   
불교가 뭔지 관심없고, 국내 불교는 친일테러단체 아닌가?
친일해서 일왕한테 산이랑 임야 받은거 국가에서 반납하라고 재판결정났는데도
종교란 틀 이용해서 계속 안 돌려주고 있고, 통행료 조폭처럼 받아가며
수십억씩 이윤챙겨서 외제차 타고 다니고. 오사마개불이란 말이 왜 나왔겠어요.
교회 불지르고 단군상 목치고 교회 흔적 남겨서 또라이짓하다 걸리고.
국내 불교는 정치랑 합세해서 나라 말아먹는데 일조한 역사도 있고
국가세금은 불교사찰 짓고 아무튼 문제 많음.
     
친일개불교 10-11-14 02:15
   
이글은 불교가 친일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글이 아닙니다.
친일을 따지면 개신교의 친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일제시대를 지나온 나라로서 우리나라 종교치고 친일에 자유스런 종교는 없습니다.
친일행위를 따지면 기독교도 못지 않습니다.
이글은 왜 사람들이 개신교를 디스하는지 그걸 이야기 하는 겁니다.
논지를 흐리지 마세요.

정히 친일을 이야기 하려면 개신교의 친일은 쏙 빼고
불교의 친일만 이야기 하지 말고 같이 이야기 하시기 바랍니다.
조정 11-01-03 03:30
   
전 눈팅만 평소하던 사람인데..이글을읽다보니 결국 아이디만들고 댓글을 달게돼는군요..
객님께서 불교에대한견해글을읽다보니...잘못된시각이 여러부분 보이지만 일일히 말씀드리기엔
제 지식이 부족해서..ㅎㅎ 제 관점으로써 객님의글을 굳히 평하기엔 제가 부족하니 그러질 못하겠고
불교적인 부분으로써 말씀드린다면..어중간히 아는상태를 선불맞았다고들 하죠..
왜 이런표현있쟎아요..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불교에서도 선불맞았는소리가 바로 그소리죠..ㅎㅎ
불교에선 나와남을 따로 보기를 안합니다 동일시하죠..남이 곧 나이고 내가 곧남이돼는거죠
모든게 수행의 거울이라고나할까요.머 이런말조차도 언어의유희일뿐이지만..깨달음이란 절대로
표현을할수가 업는거라고도 볼수가있답니다..단지 말과 행동은 방편일뿐이죠
깨달음을 표현할수만있고 글로써 전달될수만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실상은 그렇지를 못하니
환장할노릇이죠..ㅎㅎ
     
객님 11-01-04 12:42
   
저도 참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해요. 글은 좀 치우친 느낌이 있지만 불교의 개인주의+평등주의를 중점으로 설명을 하자니, 나와 남이 다른 개별적인 존재로 분류해야하고..그렇다고 연기론+윤회에 입각하여 기술하자니

붓다는 부모은중경 이라는 책에서 길가에 버려진 사람의 뼈를 보고 극진히 모시니 그의 제자들이 "스승님은 어찌하여 존재를 알수없는 뼈에 절을 하십니까" 라고 물으니 붓다가 말하길 "억겁년의 윤회속에서 이분이 내 부모일지 어찌아느냐" 라고 말하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내가 있는것도 내 앞의 타인과 밀접히 연결되어있고 고로 나의 존재는 타인의 존재하기에 존재하고 있는 설도 맞는것 같고 모든게 어찌보면 언어유희일지도 모르지만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전 제가 쓴 논지가 맞다고 우기지도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라도 관심가져 읽어주시고 좋건 나쁘건 평가를 해주시는것이 감사할뿐입니다.
미흡한 글에 관심가지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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