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골칫거리의 상징이었습니다. 해안을 아무리 순찰해도 해적들은 어떻게든 빈틈을 찾아내 치고 빠집니다. 무역을 하는 상선들의 경우 더 골치아프죠. 국가가 일일이 군함을 붙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유럽은 중세부터 사략선이라는 개념을 고안해 대응책을 마련했습니다. 사략선이란 국가로부터 적국의 배를 약탈하는 것을 허가받은 배를 말합니다.
적국뿐만 아니라 특별허가장이라 하여 해적이 소속된 국가의 배를 공격하는 방식도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해적으로부터 입은 손실을 메꾸는 한편 타국에게 빅엿을 선사하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동아시아도 왜구때문에 골머리를 썩여왔는데 사략선이란 개념이 나오지 않았네요
중국은 스스로를 대국이라 자청했으니 대놓고 해적질을 장려하면 체면에 손상이 갔겠지요.
그런데 이민족들이 내려와 중국땅에서 힘 좀 쓴 시기가 여럿 있었는데도 사략선과 같은 개념이 없었습니다. 이민족은 중화사상에 입각한 대국의 자비를 한족만큼 내세우지 않았을 텐데요.
우리나라는 중국바로 옆에 붙어있던지라 중국상선을 저리 대놓고 약탈하면 불이익이 막심했겠지요. 그렇다고 다른 나라 배를 약탈해 봤자 크게 남는 것도 없었을 듯 하고요. 조선쯤 가면 유교를 가장 중히 여기는데 상스러운 해적질을 봐줄 수 없었겠지요.
다만 삼국시대만 해도 중국뿐만아니라 우리끼리도 치고받고 싸웠는데 사략선 비슷한 개념이 없다는게 의아합니다.
동남아시아도 항상 중국말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을텐데도 거기서 사략선이 나왔다는 말은 못들어봤네요. 동남아 국가끼리도 늘 친하기 지내지 않았을텐데요
특히 일본에서 사략선이 나오지 않은게 의문이 듭니다.
일본은 자국에서 생산하는 선진문물이 부족한 시점이라 타국을 약탈할 경우 생기는 이익이 큽니다. 여기에 자국 백성들은 물론 지방의 실력자들조차 왜구가 되었죠. 고려가 애먹을 정도로 강력했고요. 어차피 해적들 통제할 힘도 없는데 차라리 손을 잡고 사략선처럼 운용했다면 약탈한걸 조금이라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일본은 섬이라는 이점이 있습니다. 옛날에 바다를 건너 원정을 간다는 것은 막대한 부담이었습니다. 일본이 한반도와 달리 외적의 침입을 거의 안받은건 그들의 국력때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덩치큰 명나라가 그렇게 왜구에 시달렸는데도 막부를 공격하지 않았죠. 조선도 세종 때 대마도 원정을 갔지 혼슈에 상륙해 싹 쓸어버리진 않았습니다.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만약 해적질이 극심해 타국에서 항의가 들어오면 '몰라, 우리가 힘이 없어서 그것들 통제 못해. 미안ㅠㅠ'이라고 잡아떼면 그만입니다. 당시 기술과 첩보활동에 한계가 있었으니 섬나라의 상황을 세세히 알 수 없었겠지요.
설사 사략선을 운용한다는걸 파악했다고 해도 뭐 어쩌겠습니까? 바다라는 장애물을 방패삼아 낄낄대는 애들인데요.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에서 사략선이란 개념이 생기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