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밑 한국사-38] 벼룩을 가지고 실험을 한 연구자가 있었다. 벼룩에게 "뛰어!"라고 말하면 벼룩이 팔짝 뛰었다. 연구자는 벼룩의 다리를 떼어낸 뒤에 "뛰어!"라고 말했다. 벼룩은 뛰지 못했다. 연구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연구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벼룩은 다리를 떼어내면 명령을 듣지 못한다."
연구자는 완전히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다리가 없으면 뛸 수가 없다. 그런데 연구자는 명령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뛰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뜻밖에도 이런 우스갯소리와 같은 일이 학문 세계에서도 일어나곤 한다.
<환단고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보통 사람들과의 생각과 달리 역사학계 역시 이 책에 대해서 주목했다. 보통 유사역사학계에서는 역사학계가 <환단고기>를 연구하지도 않고 무작정 위서라고 말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조인성, 박광용 교수와 같은 역량 있는 역사학자가 <환단고기>를 분석했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내놓았다. 해당 논문들은 <한국사 시민강좌>와 <역사비평>과 같은 시민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역사 잡지에 실렸다.
이런 역사학계의 노력을 통해서 <환단고기> 열풍은 서서히 꺼져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천문학자인 박창범, 라대일 교수가 내놓은 논문이 꺼져가던 <환단고기>에 새로운 불씨를 던졌던 것이다.
1993년에 두 사람은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이라는 논문을 한국상고사학보에 실었다. 이 논문에서 두 사람은 천체물리학을 이용하여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 실린 천문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바로 언론 지면을 장식할 만큼 센세이셔널했다. 과학이라는 이름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과학자들이 증명을 해주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결정적인 증거라 할 수 있었다.
유사역사가들이 환호작약한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의 수세를 한 번에 역전시킬 카드가 생겼다고 좋아했고, 이들의 공세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럼 정말 과학이 <환단고기>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아주 간단하게 왜 이런 연구가 잘못되었는지를 증명할 수 있다. 어떤 천문현상이 과거에 일어난 것을 증명하려면 그 천문현상이 몇 년에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한다.
<환단고기>에 적힌 천문현상이 사실이 되려면 그 천문현상이 일어난 해가 제대로 적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환단고기>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보통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의 고조선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이 연도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 시대에 '정한' 연도이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조선 시대에 만들어낸 연도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칼럼에서 이미 한 번 다룬 바 있다.
따라서 <환단고기>의 연대가 후세 조선 시대에 임의로 정해진 연대와 동일하다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증거인 셈이다. 더구나 박창범 교수 등이 계산에 사용한 <단기고사>는 연대 자체도 뒤죽박죽으로 알 수 없는 형태의 위서이다. 그럼 이런 점을 당시에 두 교수는 정말 몰랐던 것일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까지 몰랐던 것은 아니다. 박창범 교수는 2002년에 출간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역사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박창범 교수의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과학적 계산으로 확인이 가능한 기록은 일식과 오행성 결집, 썰물 현상 등 12개 기록에 불과했다. 더구나 단군 재위 몇 년이라는 시점을 서력으로 바꾸어 놓은 연구가 없어서 그중에서도 가장 횟수가 많은 일식 기록마저도 안타깝게 포기해야만 했다."
1993년의 논문에서는 박창범 교수 등이 연도를 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2002년에는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창범 교수는 일식 기록은 검증할 수 없다고 했지만 <환단고기>에 실린 '오성취루'라는 천문현상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성취루에서 오성은 다섯 개의 행성을 가리킨다. 즉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다. 이들 행성 다섯 개가 한 군데 모이는 것을 '오성취'라고 부른다. 오성취루의 '루'는 루성이라는 28수의 별 중 하나를 가리킨다. 즉 다섯 개의 행성이 루 별자리 근처에 모인 것을 오성취루라고 하는 것이다.
박창범 교수의 계산에 따르면 기원전 1734년에 오성이 결집하는 현상이 있었다. 위 논문에서는 기원전 2333년에 맞춘 연대를 가지고 오성취루 기록과 가장 가까운 연도를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오성 결집은 루성이 아니라 한참 떨어진 장성에 모였다. 박창범 교수는 연도에 더 큰 비중을 두어 기록에 착오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몇 년 차이 나지 않는 기록은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강변했다.
그런데 연도가 의미가 없다는 점이 밝혀졌으니 기록 자체가 오류라는 것도 증명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박창범 교수는 기원전 1734년 전후로 550년간 단 두 번밖에 일어나지 않은 천문현상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이니까 연도를 이 현상을 기준으로 재정립할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이다.
▲ 빨간 박스 왼쪽부터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 이를 가리켜 오행성이라고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그런데 이 주장이야말로 벼룩의 다리를 떼고 듣지 못한다고 하는 셈이다. 오성취는 550년간 왜 단 두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렇게 설정했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오행성이 10도 이내로 모인 경우만 계산했다. 다섯 개의 행성이 어느 정도 가깝게 모이는 것을 오성취라고 부를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대충 다섯 개의 행성이 한눈에 보일 정도만 되어도 오성취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결집의 각도는 어떤 책에도 규정된 바가 없다. 전 천문연구원 원장 박석재는 이런 현상은 1년 만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석재 원장 역시 <환단고기> 신봉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말이 <환단고기>를 흔들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오성취가 일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흔하다. 평균적으로 20년에 한 번 일어난다. 목성과 토성이 19.9년마다 만나기 때문이다.
박창범 교수는 오성취루 말고 남해의 조수가 3척을 물러났다는 기록도 검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역시 연대를 확정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논문에서 주장한 기원전 931년에 최대 조석력이 발생했다는 것은 맞지만 그것을 수치로 보면 191 정도인데, 전후 200년 동안 190 이상의 조석력이 발생한 수치만 50회가 넘는다. 대체 이런 수치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과학을 이용하여 역사적 실체를 찾는 노력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엄정한 과학적 기준 아래에서 이용되어야 한다. (이상의 내용 중 일부는 기경량, <'단군조선 시기 천문관측기록'은 사실인가>(<한국 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 수록 논문)를 참고했음을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