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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5-30 16:45
[한국사] 일본은 고려의 속국이다
 글쓴이 : 에버모션
조회 : 2,999  

고려일본 침략

일본의 역사서 백련초(百練抄)의 기록

 

997년 고려에서 3통의 서신을 보내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일본고려의 요구를 거절하고 쓰시마와 큐슈 지방의 경비를 강화하였다. 이 일로 고려일본 큐슈지역을 침입했다 기록,

 

다른 기록에는 고려군 병선 500척이 침공 한다는 정보를 큐슈의 다자이후(太宰府)가 일본 조정에 급보를 올렸다는 내용이 있다

 

백련초의 (997년) 10월 1일조에 고려인이 큐슈에서 침입한 기록
이 때 고려인들은 큐슈에 와서 민가를 태우고 재산을 수탈하고 남녀 300명을 납치해갔다
(백련초”초우 토쿠 3년 1월 1일의 나가사키의 역사)


그 이전부터 침입한 고려국인이 큐슈에서 살인을 일삼고 있다고 기록

(백련초의 토쿠3년(997년) 10월 1일조)


규슈 지역에서 고려국인의 그 지역에서 일본인을 살해하였다,
피해규모가 치쿠젠, 치쿠고, 사츠마, 이키, 쓰시마에 이르며 수백명의 사람들이 납치 당하고 죽었다
(백련초 토쿠3년(1001년)기록)

 

고려는 17년간 일본에 통상을 요구하고 무력으로 침입하였다

그 이후..

 

11세기 중엽 고려일본 간에는 북큐슈와 금주(김해)를 오가는 무역로가 있었다.

고려에 도항하는 일본인들 중에는 상인 이외에
일본국사, 대마도주,살마주사 등 토산물을 헌상하고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지방관에 의한 고려에의 ‘조공’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문종대인 11세기 후반부터 큐슈 각지의 지방관과 민간상인들이 고려에 도항하여

 ‘방물(方物)’을 바쳤기 때문에,

“동쪽에 있는 왜(倭)가 바다를 건너 보배를 바쳤다”는 평가가 내려질 정도였다

 

 

일본에서 내왕하는 선박을 일본인들이 진봉선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물품을 바친다는 뜻으로 진봉이란 용어사용은 이미 오래되었으며
일본인이 물품을 진봉하는 항례적인 법규가 제정 되었다

 

때로는 고려에서 주는 사급품을 노리고 일본인들이 진봉하기 위하여 상호간에 경쟁이 심하여 서로 싸우는 폐단까지 생겨 고려에서는 진봉 그자체에 대하여 좋아하지 않은 경향을 보였다
이같은 경향은 일정 기간내에 일본상선을 출입선수 횟수에 대하여까지 제한을 두었다

 

이 시기의 양국 교류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고려일본에 의사파견 요청을 한 사건이다.
1079년(문종33)에 중풍을 앓고 있던 문종의 병치료를 위해 고려의 외교를 담당하는 예빈성에서 일본에 의사파견을 요청하는 문서를 일본에 보냈다.
이를 전한 사람은 일본의 다자이후에 거주하고 있던 중국계 상인인 왕칙정(王則貞)이었다.
외교문서에 의하면 「국왕은 수년 전부터 중풍을 앓고 있으니 귀국의 명의( 의사)를 선발하여

고려에 보내주면 좋겠다.
만약 치료에 효능이 있으면 후한 상을 내릴 것이다. 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조정에서는 회의를 열어 고려의 의사파견 요청에 대한 오랜 논의 끝에 잠정적으로 파견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며칠 뒤에 열린 회의에서는 만약 병을 치료하여 차도가 없으면 일본의 망신이라는 한 공경의 제의에 다른 사람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그 이후...

 

고려와 몽고의 항쟁 발생

1281년에 여몽연합군이 일본정벌을 감행

여몽연합군 이후 고려일본은 관계 단절

여몽연합군의 일본 침공 이후 고려일본에 최초로 외교사절을 파견한 것은

공민왕 15(1366)이었다

 


 

 

고려사에 기록된 일본의 조공 내역

 

1056년 문종 10년 10월 日本國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문종 27년 7월 日本國人 왕칙등 42인 나전 외에 12가지 물건을 진상
문종 27년 7월 일기도(규슈 나가사끼)구당관 등정안국 등 33인   방물을 진상
문종 27년 11월 日本國 에서 예물과 명마를 헌상 
문종 28년 2월 日本國 선두 중리 등 39인 특산물을 진상
문종 29년 4월 日本國  오옹에 등 18인 특산물을 진상
문종 29년 6월 日本人 조원. 시경등 12인 특산물을 진상
문종 29년 7월 日本國  상인 59인 고려에 도착
문종 30년 10월 日本國 승속(승려와속인) 25인  불상을 헌상
문종 33년 11월 日本國  신통 등  소라.해조 등을 흥왕사에 진상
문종 34년 9월 日本國 축전주에서, 방물을 헌상, 살마주(가고시마)에 사신을 보내와 헌상
문종 36년 11월 대마도에서, 방물을 헌상
1084년 선종 원년 6월 日本國 축전도의 후지와라,,수은을 헌상
선종 2년 2월 대마도주 구당관, 감귤을 진상
선종 3년 3월 대마도주 구당관, 방물을 진상
선종 4년 3월 日本 상인 중원.친종 등 32인 특산물 진상
선종 4년 7월 대마도의 원평 등 48인 수은.진주.보도.우마 등을 헌상
선종 6년 8월 다자이후의 상인, 수은.진주.궁전.도검 등을 진상
예종 11년 2월 日本國에서 감자를 진상

 

 

왜국은 고려의 속국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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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러브 17-05-30 16:53
   
다만 유의해야 될 것은, 당시의 속국과 지금의 속국은 그 뜻과 뉘앙스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
     
인류제국 17-05-31 13:22
   
설설설설설 17-05-30 16:58
   
근데 백련초는 좀 신뢰성이 떨어지는 사서입니다. 제작시기도 13세기쯤으로 알고있고 편찬자가 불명확하다고 알고있습니다.

어쨋거나 고려-일본간의 진봉이라는 국제무역이 성립되어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고려일본에 의사파견을 요청한것도 사실이고 그 첩에는 성지(황제의명령)라는 표현과 고려국황제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사용했죠.

중요한건 일본국에서 이첩의 내용중에 성지 라는 표현을 처음에 문제시 삼지 않았다는겁니다.
저 내용중에 며칠뒤 라는 부분이 있는데 며칠이 아니라 몇개월동안 저 문제로 토의합니다.
그런데 본문 내용대로 처음에 파견하는 쪽이 우세였지만 나중에 만약 파견되어서 병을 치료하지 못하면 어쩔것이입니까? 이는 자기들의 큰 수치라는 내용이 크게 대두되었고 결국 나중에 성지라는 표현을 문제시 삼아 의사파견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고려에서 왜구들의 횡포가 생기자 일본국에 공식적으로 왜구들의 횡포에 대해 따지는 첩을 보내는데 일본국에서는 고려 사신 앞에서 왜구 수십명을 직접 참수시키는걸 보여줍니다. 일본고려가 자기들을 계속 하국으로 대우하자 그 부분을 불편해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정욱 17-05-30 17:26
   
일뽕들이 지들이 고려속국이라고 지나가서 그랬잖나.
     
그노스 17-05-30 19:14
   
고려 성종 시기에 그 군사력이 강대했는데, 일본에서는 고려일본을 침략해올 것을 두려워해 대비하던 시절입니다.
구주 각국부에 명하여 무기와 무구를 보수하도록 했고, 관내의 신위를 승급시키며, 섬의 경비를 강화했다고 합니다.

고려 성종 16년에는 일왕과 대신 이하 조신이 연회 석상에서 좌근진관이 소리지르며 '고려인이 대마를 침략하여 히젠국에 도착했고, 여기도 침략하려 한다' 하자, 상하가 놀라서 선례를 잃고 정신없이 뛰어나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변동이 발생한 것이 바로 1019년에 벌어진 여진족의 대마도, 히젠, 이키, 하카타 습격 사건인데, 고려 수군이 이들을 공격하여 붙잡혀가던  일본인  포로  300명을 구출했고 이로 인해 일본고려에 대한 오해와 두려움을 풀었다고 합니다.

사다이진 미나모토슌보의 수좌기(水左記)에 의하면, 고려 문종 시기에 일본이 의사를 보내지 못하는 이유가 님의 말씀처럼 고려의 '성지' 라는 표현 때문이 아니라, 자국의 의사가 너무 늙어서 곤란하다며 그 사유를 고려에 보내는 반첩에 기재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이 당시 고려는 거란의 대군을 완전히 물리치며 그 국제적 위상이 높기로, 위에서 언급한 강성한 고려 성종 시기와도 비교가 안되게 높은 상황이었는데, 일본이 자존심을 내세우며 실제로 '성지'라는 표현에 집착했을지 의문입니다.
그 속내가 어떠하였을지...
          
설설설설설 17-05-31 16:14
   
??? 죄송한데 수좌기 어디에 의사가 너무 늙어서 곤란하다는 내용이 나와있습니까?
완전 금시초문입니다만?
성지라는 표현을 외교의례형식에 어긋나다라는 이유로 거절한것 맞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할건 이 부분을 처음에는 문제시 삼지않고 나중에야 꼬투리 잡을려고 문제시 삼았다는걸 살펴봐야죠.

실제로 여진족이 일본을 침략해서 수백명의 일본인포로를 끌고 간적있고 고려가 반파 시켜서 일본인 포로를 송환시켜준건 사실입니다.

고려가 거란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둬 송-거란-고려 로 이어지는 동북아3강 구도가 만들어진것도 사실이고 전쟁끝나고 특히 여진족들이 고려에 엄청나게 입조해오죠.
송나라도 고려사신 대접하느라 쩔쩔맨것도 사실이고 요-고려 사신들 동등하게 대접하고 대우했죠.

송나라 입장에서 고려가 요나라 수십만대군과의 싸움에서 이긴건 솔직히 엄청나게 놀랐을겁니다. 고려-요 전쟁이 있기 몇년전 송-요 전쟁에서 송나라는 굴욕적인 " 전연의맹약 " 이라는 강화를 맺었죠. 당연한 소리지만 북방유목민족들의 중장기병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지라

고려-요 전쟁에서 요나라는 자기들의 중장기병의 힘을 너무 믿다가 고려한테 털렸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 기동력으로 승부하면 이길수 있겠지? 했는데 우리도 말을 다루고 중방기병을 운용하는 부분에는 일가견이 있는지라
               
그노스 17-05-31 20:15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주관한,

신편 한국사 15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   >   4. 일본 및 아라비아와의 관계   >   1) 일본과의 관계   >   (1) 사절의 내왕,

이 페이지에서 '수좌기'의 내용을 근거로,

일본이 의사를 보내지 않으려면 구실이 필요했는데, 의사가 늙어서 곤란하다고 고려에 보내는 반첩에 기재하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성지'라는 표현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일본이 의사를 보내는 것을 거절했다는 님의 말씀을 못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 저도 다른 서적에서 비슷한 기록을 읽은 적이 있으나 그건 별 다른 출처가 없었고,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기록은 '수좌기'라는 출처가 있었으며,

또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설사 '성지' 표현이 사실이라고 해도 당시 고려일본의 힘의 역학관계 상 일본의 실제 속내가 과연 그러하였겠냐는 것입니다.
송나라는 고려의 전공과 그 영향력을 높이 사서 훗날 고려 사신을 다른 나라처럼 조공사가 아니라 국신사로 높여 대우했고 당대 최강국으로 여겨졌던 요나라 사신과 고려 사신을 동등하게 추밀원에서 접대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일 것입니다.
                    
설설설설설 17-05-31 23:24
   
음 색다른 시선에서의 글이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일본은 예전부터 믿을거라곤 섬나라 이것밖에 없기때문에 허세와 망상이 좀 많이 심하지요.

근데 말씀하셨듯이 고려일본과 교역할때는 절대적으로 일본은 하국으로 깔고 들어갔습니다. 고려 입장에서는 일본하고 교역한다해서 얻을것도 딱히 없거니와 아쉬울게 없는 입장이였으니깐요.

고려 11대 문종대에는 " 고려는 문화와 예악이 융성하고 상선들이 끊임없이 출입하여 날마다 귀중한 보화가 항구로 들어오니 중국으로부터 도움받을건 없다" 라고 자신있게 말할만큼 문화적으로 상당히 융성했던 시기죠.
                         
그노스 17-06-01 01:15
   
네, 저도 말씀 잘 들었습니다.
흑요석 17-05-30 19:20
   
고려의 속국이라..

근데 고려가 왜구들에게 엄청나게 고생하지 않았나요?

고려 때 왜구 침입이 극성이던 시절 아예 온 국토가 쑥대밭이 될 정도였는데

왜구가 고려의 속국이었다?;;;
     
햄돌 17-05-30 19:27
   
해적들을 국가에서 어떻게 관리함?
     
Marauder 17-05-30 19:39
   
밑에 말처럼 해적인것도 있지만 애초에 기간부터가 다르잖습니까.
     
그노스 17-05-30 19:40
   
고려의 속국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고,

말씀하신 고려가 왜구들에게 고생한 시기, 고려 국토가 쑥대밭이 되는 시기는 고려가 쇠락을 맞는 후대의 일이자 가마쿠라 막부가 흔들리며 왜구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시기의 일이고,

발제글에서 속국을 언급한 시기는 왜구가 극성을 부리기 이전이자, 고려의 전성기이기 때문에 그 시기에 차이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흑요석 17-05-30 19:56
   
아~ 고려 전기 때 왜가 고려의 속국이었다는 건가요?
               
Marauder 17-05-30 21:29
   
자세히는 모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1. 막부가 아니라 지방 다이묘가 개별적으로 조공을 했고
    특히 신하를 자처한 이는 대부분 다이묘
2. 중앙의 경우는 쇼군이 했는데 이경우는 조공이라고 보기엔 애매하고
    쇼군 또한 실질적으로는 왕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신하라는점
    그리고 신하를 자처한 곳은 대부분 중국
3. 조공을 했다고 다 속국은 아니라는 점 때문에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다라고 말하는 일뽕들이 자주 써먹는논리라서 알게되었네요.
               
인류제국 17-05-30 22:07
   
고려 전기때는 엄청 강했죠 고려가 전성기때는 일본을 속국이라 부를만큼 무시를 했을만도 하죠

고려가 현종이후 요나라가 망할때 까지 [1009~1125년] 이때동안 고려가 얼마나 강했는데

그걸 아는 한국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설민석 17-05-30 21:06
   
맨 마지막 글에 감자를 진상했다는데 그 당시에는 감자가 아시아에는 없었는데요?
     
호랭이해 17-05-30 21:17
   
二月 丙寅 日本國進柑子.

제 기억으론 감자가 밀감이였던걸로 기억하네요
비좀와라 17-05-30 22:38
   
" 고려의 침구경 원본 9권을  송국 철종 원무 8년에 전함.

침술의 원전인 황제내경 영추경의 기원이 고려임을 입증, 침구의 종주국이 한국이라는 사실이 한 재야

침구 의학도의 끈질긴 추적에 의해 밝혀짐으로써 한의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침구 의학도 한헌구(전 의료보험연합회 상임감사)씨의 [침의 종주국설]이 그것인데, 침구의 최고 경전

인 황제내경 영추경은 고려가 송나라에 헌납한 침경으로서 침의 종주국이 한국이라는 사실이 문헌적으로

입증해 냈다.

한씨는 중국학자 龍伯堅(1900~1983)이 쓴 [황제내경 개론]에 기록된 [고려의 침경 헌납설]을 확인하기

위해 국내 관련 문헌을 모두 추적해 보았으나 실패, 그러나 중국 방문을 계기로 천진 남계대학 도서관에서

수일동안 체류하며 사서를 뒤진 끝에 영추에 관한 기록 원본을 찾아 내는데 성공했다.

1900년대에 용백견이 쓴 황제내경개론에 영추경은 송국 철종 원무 8년(1093년) 고려가 헌납한 침경으로서

당시 9권본이었으나 그것을 史崧(사숭)이 개편하여 24권으로 만들고 영추경(靈樞經)이라고 개제했다.

영추경 원본(침경)은 과거 고보충 등의 교정을 거친것도 있었으나 그 교정의 원본은 분실되었으며 왕수가 

개편한 24권 소문과 사숭이 개편한 24권본의 영추경이 현존하는 최고의 황제내경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씨는 이의 전기를 확인하기 위해 원본 기록을 추적한 결과, 송사(송조실록)17권중 철종본기에 [00

高麗所獻 黃帝鍼經于天下....]라는 기록을 확인 영추경의 기원이 고려임을 확증한 것이다.

한씨는 중국 침구계 권위자 王雪苔 교수(중국중의 연구원 전문위 부주임)와 馬廷芳 교수(중국침구학술

부 주임)등 중국학자들에게 이같은 문헌 자료를 입증시키는 등 한국이 침술의 종주국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고 말했다. "

아무리 보수적으로 해석해도 현재 동양의학에서 침술부분은 고려침술을 기반으로 발전 한 것이고 이 침술학의 기본이 고려초기에 완성 되었음이 기록으로 남아 오는데...

도대체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의술을 지닌 고려가 뭐가 아쉬어서 쪽발이 의사를 데려 올라고 했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노스 17-05-30 23:26
   
글쎄요.
발제글에 나온 고려 문종 시기의 <고려사 권9 > 세가 권제9 > 문종(文宗) 33년 > 7월 >> 을 보면,

고려 문종이 풍비증(風痺症)에 걸렸는데 고려에 의관과 의술이 부족하므로 송 황제에게 중국의 의관과 백품약(百品藥)을 먼저 청했다고 하고, 그에 답해 송 황제가 의사와 약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풍비증은 중풍의 일종으로 님께서 말씀하신 동아시아 최고라는 황제내경의 침술로만 치료가 가능할지 의문이고, 중병에 걸린 군주의 입장에선 당장 자국에서 치료가 불가능한데 외국에 용하다는 의원이 있다면 어디에서든 의원을 구하려하지 않을까 합니다.

일본측에서 자국의 의원이 문종을 치료하지 못할 경우를 우려한 것을 보면, 일본 스스로 자국의 의술 수준에 크게 낙관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설설설설설 17-05-31 16:16
   
고려일본에 의사파견을 요구한건 그냥 의사외교?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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