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는 메갈입니다만.... 실재로 저랬을까 싶을 정도로 특유의 중국식 과장의 글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군이 초창기 패한 것은 사실이나 과연 짱깨 말처럼 형편엾이 무너졌다라고 말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특히 중공의 사이버 전사들 조선족 메갈 같은 반사회적 반국가적 마인드의 무리들이나 기타 세력들이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고 있는 점이 심각합니다
일단 초창기 대대장으로 중공군에 포로로 잡힌 사람은 5명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일단 왕수쩡이라는 짱깨 말 처럼 공산군 만세라고 외쳤다고 한 것은 루머라고 생각합니다.. 긴말 필요없고 그냥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일단 이런 황당한 주장에 대한 것은 누차 반박할 생각입니다.
-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 [왕수쩡]
• 1950년 10월 중국군과 처음으로 조우한 한국군은 몇개 대대가 거의 섬멸되다시피 했다. 그 때의 일이다.
"포로가 된 한국군 대대장 중 하나는 중국군이 자신을 죽일까봐 돈과 시계를 뇌물로 주려다 거절 당했다. 한국군 장교는 아군에게 항복하란 선전을 했고, 기다렸다는 듯 한국군 80명이 투항했다. 그들은 '공산군 만세!'라고 외쳤다.
• 11월 2차 전역 역시 한국군은 한심했다. 중국군 중대 하나가 한국군 포로를 200명 넘게 잡았다. 중국군은 자기들 식량도 없으니 한국군들을 먹일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자 기록에 의하면 '먹을 걸 안주니까 한국군 포로들은 한국 농민들이 심어놓은 배추를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뽑아 먹고 민가 처마 밑에 걸어놓은 옥수수를 날로 먹었다. 이는 '군중기율을 심하게 위반한 일이었으므로 한국인들의 총기를 뺏고 놔줬다.
• 나중에 한국전쟁 관련으로 출간된 수많은 저서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건 바로 한국군의 지리멸렬한 전투력이다. 미국 전쟁사료에서 너무 낮은 한국군의 전투력을 문제삼은 내용을 쉽게 볼 수 있다. 한국군은 오합지졸이라거나 당황하면서 어쩔줄 몰랐다는 등의 기록을 되풀이 했다. 한국은 미군에게 분노하면서 미군이 '책임회피'를 위해 한국군을 모함한다고 말한다.
• 1950년 11월 평안남도 덕천 지역 전투에서 한국군 7사단이 지키던 전선을중국군 38군이 323명의 선발대를 뚫고 100km에 달하는 거리를 침투했다. 이 작전은 중국에서 <기습>이라는 영화로 나와 중국 농촌에서 몇해 동안 상영됐다. 이들 활동 소개에서 한국군의 무기력한 모습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어 '323명으로 구성된 선발대가 적군한테 안 들키고 전군의 최전방 기지를 뚫고 나가는 건 불가능한 일'인데 상대가 한국인이라면 능히 가능하다고 했고, 실제로 그들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한국군 진지를 뚫고 나갔다.
• 중국군 376연대 2대대가 식사하는데 갑자기 한 무리의 한국군들이 뛰어왔다. 2대대가 아군이라고 착각한 나머지 배를 채우고자 온 것이다. 그들은 포로가 됐다는 걸 뻔히 알면서 총을 버려두고 먹는데 급급했다. 2대대 중국군은 그렇게 한국군 200명을 생포했다.
• 전진하는 중국군이 미처 후퇴 못한 한국군과 섞였따. 중국군 부대 참모장과 같은 미군 외투를 입은 사람이 참모장이 안신는 미군화를 신고 있어서 땅바닥에 눌러 외투를 벗기자 공포로 안절부절 못하는 한국 포병 대대장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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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지웨이가 한국에 부임해 이승만을 향해 '한국에 머무르려 왔다'고 안심시켰다. 리지웨이가 서울에서 철수하기로 하자 이승만이 무초 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리지웨이 장군님은 한국에 머물겠다고 했잖아요. 근데 한국에 부임한 지 일주일 밖에 안됐는데 서울에서 철수하다뇨? 장군 부대는 철수 밖에 못합니까?" 이에 리지웨이가 서울에서 철수하는 거지 한국을 떠나는 게 아니라고 이승만에게 전하며 말했다. "한국군이 중국군 공격 앞에서 양떼처럼 뿔뿔이 도망치는 꼴이나 보시오."
•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Almond)가 1951년 횡성전투에서 결국 분노가 폭발했다. 그는 리지웨이한테 전화해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한국군 때문에 제 10군단이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 1951년 4월 화천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과 함께 한국군 해병대가 활약한 일이 있었다. 한국의 사료에는 '격렬한 전투 끝에 중국군은 참패해 도주했다. 한국군은 미 해병 5연대와 한데 모여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고 기록했다. 미 해병 1사단장인 스미스도 한국 해병대에 축전을 보냈단다. "용감한 전투 정신에 깊이 사의를 표합니다. 이렇게 강한 한국 해병대와 함께 싸울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럽군요."
그런데 불과 몇 시간 뒤 한국 해병대는 중국군 제 39군의 압박을 받자 저항도 없이 바로 철수했다.
• 일국의 군대가 자국에서 참패했다고 '그들의 전투에 협조한' 외국 군대한테 강제해산 명령을 받다니, 이유는 차치하고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희귀하고도 희한한 일이다.
- 조선전쟁 [코지마 노보루]의 기록
• 미 육군전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인은 중국인 혹은 차르멜라 피리 소리에 본능적인 공포심이 있는 것 같다."
임부택 대령의 한국군 7연대는 예정대로 10월 29일 아침 남하하기 시작했다.
행군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보급 받고 휴양한 장병들은 생기를 찾은 표정으로 이야기 했는데 연대소속 군사고문 플레밍 소령이 들은 바 한국군 장병 대부분은 중국군 출현 정보는 유언비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오 조금 전에 고장에서 20마일 정도 떨어진 중만강 나루터에 이르자 제 7연대는 매복하고 있던 중국군의 집중사격을 받게됐다.
“한국인들은 중국인에게 콤플렉스가 있는 걸까? 갑작스러운 습격에 한국 군들이 동요했다.”
플레밍 소령은 당황하지 마라, 걱정 없다며 한국들에게 소리치며 무선으로 항공지원을 요청했다.
전투기가 기총소사와 네이팜탄 투하로 원호했지만 한국군 7연대는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져 산 속으로 피신했다.
군사 고문 4명 중 3명이 죽고 플레밍 소령도 15 군데에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아침 6시 30분 중국군에 의해 포로가 됐다.
“결국 싸우지 않고 피신한 거다. 그 당시도 적의 병력은 사실상 중공군 제 125사단 제 373연대의 1개 대대에 지나지 않았다. 1개 대대 적의 공격을 받고 무려 1개 연대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피신부터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플레밍은 1953년 가을에 포로교환으로 미국에 귀국하고도 당시를 생각하면 머리를 갸우뚱했다.
• 미 공간사가“한국 2연대는 중국군과의 최초 조우전에서 적을 물리치려는 의지가 없었던 듯 하다. 무기를 모두 버리고 분산한 군인이 90%라는 사실이 이것을 입증한다"고 기록했으며 “한국군은 중국군에게 잠재적인 공포를 갖고 있는 듯 하다”고 추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