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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4-23 15:34
[기타] 나선정벌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378  

러시아는 1581년 코사크 예르마크 탐험대가 우랄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에 진입한 이후 계속 동쪽으로 원정대를 보냈다. 1598년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 식민도시 톰스크를 세웠으며, 17세기에는 바이칼호 부근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후 1647년, 기어이 러시아는 북태평양 연안에 도달했으며, 이를 오호츠크 해라 이름붙인다. 이후 러시아는 예니세이 강에 세운 식민도시와 레나 강 중류의 야쿠츠크를 바탕으로 1638년 남진을 시작, 헤이룽 강(아무르강) 유역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당시 헤이룽 강에 도달한 탐험대는 포야르코프 원정대로, 이후 하바로프[6] 원정대가 1649년, 1651년 두 차례에 걸쳐 강 근처 원주민 부락들을 공격하고 부락의 물품들을 노획하는데, 이때 주로 노획한 물품은 가죽이었다.

문제는 하바로프 원정대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청의 영토까지 들어가서 청나라 영토 내의 원주민 부락에서도 행패를 부렸다는 것. 이에 원주민들은 청에 도움을 요청했으며, 청은 이를 받아들여 1652년 영고탑 주둔 사령관 하이써의 지휘 하에 군사 1500명을 헤이룽 강에 파견한다. 당시 헤이룽 강에서 열심히 행패를 부리던 하바로프 원정대는 206명의 군인밖에 없었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하이써가 손쉽게 이들을 무찌를 것처럼 보였지만....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대패한다.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하이써의 청군은 패배하고 만다. 청군은 매우 강력한 군대였지만, 당시에는 중국을 완전히 휘어잡은 상태가 아니었는데다 만주 지역이라는, 그야말로 후방 중의 후방에 주둔한 군대의 힘은 안 봐도 뻔하다. 당시 하이써의 군대 중 총을 다루는 군사는 30명. 그나마 대포를 동원했지만 대포가 6문뿐이었다. 물론 아까 말했듯이 후방 중의 후방, 만주에 주둔한 군대의 화기 상태가 어떨지는 또 안 봐도 뻔하다(...) 하바로프 원정대의 전사자는 10명. 하지만 청군은 무려 676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고야 만다. 물론 앞서 몇 번이나 강조했듯이 무기나 기강 차이가 심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 머릿수의 차이를 이렇게 활용하지 못한 것은 명백하게 하이써의 병 신같은 전략에 힘입은 바가 크다. 순치제는 이에 하이써에게 책임을 물어 하이써를 처형한다.

이후 하이써의 후임으로 나선 정벌군 지휘관으로 임명된 자가 앞에 언급되어 있는 샤르후다였다. 샤르후다는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 들어온 장수 중 하나였는데, 그는 2년에 걸쳐 반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인 화력의 차이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당시 화기를 잘 다루는 한족 출신의 정예 녹영병들은 남명 정권과의 전투에 모조리 투입해야 했기에 만주의 소규모 적군 좀 해결하겠다고 빼서 보내 줄 정도로 상황이 여유롭지가 않았다. 샤르후다만큼이나 이들 때문에 골치를 썩던 청나라는 결국 조선군 포수들을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1654년 2월, 조선에 청의 사신 한거원이 도착한다. 한거원의 서신에는 조창선수 100여 명을 보내시오. 나선을 정벌하려 함이오.라는 말이 적혀져 있었다. 이에 효종이 "나선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으며, 한거원은 "영고탑 인근 별종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재미있는 점은 당시 청은 러시아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이 러시아 원정대가 러시아인임은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중국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모스코비아(말할 것도 없이 모스크바를 말한다)라는 나라가 있다는 정보는 들어와 있었는데, 선교사들은 중국에 있으면서 유럽의 소식을 들으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거나 불가능한 상황이다 보니 모스코비아라는 먼 나라에서 청까지 원정대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따라서 청은 이들을 그냥 나선이라고 불렀다.

효종은 이에 변급을 지휘관으로 삼고 포수 100여 명, 초관, 통역들을 포함하면 총 152명의 부대를 결성, 파병시킨다. 조선군은 1654년(효종 5년) 3월 23일 두만강을 건너 청의 영토로 진입했다. 이후 8일간 걸어서 행군한 끝에 영고탑 인근에 주둔하던 샤르후다 지휘하의 청군과 합류한다. 이들은 쑹화강과 무단 강이 만나는 합류점인 삼성까지 가기 위해 무단 강의 흐름을 따라 배를 타고 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결성된 조청연합군은 총 1000여 명의 규모였다. 이들은 한 가지 크기가 아닌 여러 가지 크기의 배를 타고 쑹화 강 하구까지 내려갔는데, 배는 120척이나 되었다. 이들과 마주친 러시아 원정대는 이전 하이써를 대패시킨 하바로프가 아닌 그의 후임 스테파노프였다. 하바로프는 공로를 인정받고 모스크바로 돌아간 뒤였다. 당시 스테파토프가 거느린 군사는 400여 명의 규모였다. 스테파노프의 함대는 헤이룽 강에서 쑹화 강으로 가고 있었는데, 마침 쑹화 강 하구로 진입한 조청연합군과 마주친다. 이 때가 4월 28일이었다.

원래 샤르후다의 전략은 이들이 타고 온 함선을 이용, 수전을 벌이고 선두에 조선군이 서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함선의 크기 및 위력 차이가 심했다. 청은 당시 온 전력을 남방에 집중하고 있었으니만큼 크고 위력적인 함선들 역시 그 쪽에 투입되어 있었는지라 대부분이 매우 작은 배였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함선은 두껍고 튼튼한 대형 범선이었고, 청군이 동원한 배는 자작나무 껍질이 주 재료인 매우 약한 배였다. 샤르후다는 적의 전선이 꽤나 강력함을 인지하고 전략을 변경한다.

http://military.china.com/zh_cn/history2/06/11027560/20090106/images/r_15270143_200901061639329237700.jpg
샤르후다는 전투 전에 군사들을 시켜 강변에 참호를 파게 하고 나무 방패를 세운다. 그리고 조선군을 모두 강변에 투입한다. 이후 전투가 시작되었다. 청군의 함선이 비록 작고 약하지만 이들을 아예 안 쓴 건 아니었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전투는 청군이 러시아군의 주의를 끌면서 배를 주로 공격하는 동안 조선군이 강변에서 러시아군을 내려다보며 사격하여 러시아군의 피해를 누적시키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전세는 러시아군에게 불리해졌다. 러시아군은 전투 중 강변에서 사격하는 조선군이 자신들에게 매우 큰 피해를 입혔음을 알아채고 상륙대를 내보내 강변에 군인들을 내려 조선군에게 돌격한다. 하지만 조선군은 침착하게 이들에게 계속해서 사격을 가했고 결국 러시아군은 상륙했지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퇴각한다.

며칠 동안 같은 양상의 전투가 반복되었고, 스테파노프의 원정대는 완전히 기진맥진해 버렸다. 사상자가 엄청나게 많아 전투 가능 인원이 너무나도 부족했던데다 물자는 바닥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따라서 당연히 스테파노프 원정대는 헤이룽 강 상류로 퇴각하기 시작하는데, 청군이 이를 추격한다. 청군의 함선은 4일 동안 쉬지 않고 러시아군을 추격했지만 마침 동풍이 불어 스테파노프 원정대는 돛을 올리고 빠르게 퇴각하여 헤이룽 강 상류에 러시아 원정대가 세운 쿠마르스크 요새에 들어가 버린다. 요새를 공격할 수준의 무기나 병력을 동원한 건 아니었던지라 조청연합군은 퇴각하여 6월 13일 영고탑으로 돌아간다. 조선군은 이후 조선을 떠난 지 84일만에 돌아오는데, 사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후 청은 희한하게도 겨울 내내 쿠마르스크 요새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지 않았다. 이에 스테파노프는 러시아 본국으로부터 지원 병력과 물자를 보급받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등 힘을 키워 나갔고 결국 이듬해 봄 완전히 세력을 회복, 활동을 개시한다. 이때 러시아 원정대를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 청군의 사령관은 밍안달리였는데, 밍안달리가 이끄는 군사들은 북경 수도 방위를 맡은 군사 1500명이었다. 그런데 청이 남방에 군사력을 집중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 때문에 수도 방위도 꽤나 개판이었던 모양이다(....) 밍안달리는 쿠마르스크 요새에 3개월 간 공격을 퍼부었으나 러시아군항복을 받아내는 데에 실패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식량 보급까지 끊기는 바람에 북경으로 철수했다. 이에 청은 1658년 대규모 공격을 준비한다. 지난번의 공격이 그랬듯이 청은 또다시 조선군의 파병을 요청했으며, 이에 파견된 조선군의 지휘관 자리에 함북병마우후 신류 장군이 임명된다. 신류 장군이 이끈 포수들은 지난번 1차 나선정벌 때의 2배인 200명이었다.

허나 지난번 정벌과는 달리 이번 정벌은 시작부터 뭔가 순탄치가 않았는데, 일단 청나라 통역관이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이 통역관은 조선군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가 늦게 오는 바람에 조선군은 급하게 행군하는지라 도중에 말이 쓰러져 죽고 물건이 진흙에 빠지는 등 별별 고생을 다 하게 된다. 조선군은 5월 6일 영고탑에 도달한다.
지휘관은 예전의 샤르후다였다. 영고탑에 도착한 신류 장군은 샤르후다를 그곳에서 만날 줄 알았으나 샤르후다는 이미 출동한 상태라 조선군은 환영식은 받았으나 적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한다. 신류 장군은 헤이룽 강과 쑹화 강 근처의 오랑캐(왈가, 혁철...)들의 정세를 궁금해하며 잠에 들었고, 5월 10일 비 오는 날씨를 뚫고 30리를 행군하여 샤르후다의 부대가 주둔한 곳에 도착한다.

이들은 왈가족 사공이 모는 왈가족 배를 타고 쑹화 강 어귀까지 올라가는데, 쑹화 강 어귀에는 5월 15일에 도착했다. 5월 14일 왈가족 사람 4명이 청군과 조선군에게 러시아군이 헤이룽 강 어귀에 도착했음을 알렸기에 신류는 걱정을 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때 러시아군과의 전투에 투입될 전선이 아직 다 건조되지 않았던데다 북경, 선양, 영고탑에서 장수들이 파견되고 선양에서 지원군이 오며, 북경에서는 잠수병이 온다고 소식이 왔었는데 이들도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5월 20일까지 조선군은 그곳에서 머물며 사격 훈련을 진행한다. 이때 혁철족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난번 전투에서 적군이 조선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보았습니다. 그 일 이후로 도적들은 말끝마다 머리가 큰 사람이 두렵다고 했습니다."라고 전한다. 즉 대두인은 혁철족이 벙거지나 전립처럼 챙이 넓은 모자를 써서 머리가 커보이는 조선군을 부르는 표현이었는데[7] 이들과 러시아가 교류하면서 러시아 역시 조선군을 대두인이라 칭하게 된 것.[8] 당시 러시아는 혁철족을 나나이라고 불렀다.

이후 늦게 도착한 청군이 도착하고, 전선 역시 도착했다. 신류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전선은 총 48척이 왔으며, 생긴 건 판옥선이랑 비슷한데 더 튼튼했으며 지붕이 없고 단청이 매우 화려했다고 한다. 이들 중 대형 함선은 36척이었고 소형 함선은 12척이었다. 전선 한 척마다 조선 포수를 5명씩 탑승시키고 청나라 갑군을 한 척마다 25명씩 탑승시키는 식으로 군대를 정리한 뒤 6월 5일 함대는 진격을 시작한다. 참고로 갑군은 갑옷을 걸쳐 입고 창칼과 활로 무장했으며, 등패를 보유했다고 한다. 이들은 며칠 동안 나아가 열벌마을에 도달했고, 6월 10일 아침 일찍 마을을 떠났다. 이들은 헤이룽 강 어귀를 지나 20리쯤 가서는 러시아 함대와 마주쳤다.

러시아 함대의 규모는 총 전선 11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러시아 범선들은 강 한가운데에 닻을 내리고 있었는데, 조청연합군의 함대가 다가오자 닻을 올리고 돛대를 세워 10리쯤 물러난 뒤 강가에 자리를 잡았다. 러시아군은 그곳에 머물며 지붕 위로 올라가 조청연합군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고, 연합군의 함대는 적의 배와 한 마장(400m)쯤의 거리만큼 가까워지자 포격을 시작하였고 이에 러시아군도 응사했다. 이때 청군이 아직 전투에 투입하지 않았던 전선까지 모조리 한번에 밀어넣어 러시아군에게 활, 대포, 총 등으로 공격을 가하자 범선 위에서 총을 쏘던 러시아군은 버티지 못하고 배 안이나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쳤다. 이에 청 전선들이 러시아 범선들을 포위하고 쇠갈고리를 던져 배들을 끌어당겼고, 포수들이 적선에 올라타 배를 태우고자 했다. 이때 샤르후다는 러시아 배에 실린 많은 물건을 탐내 화공을 하지 못하게 명령했다. 조선군이 적선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 조선군들이 탑승했던 배의 포수와 사수들 모두가 러시아 배로 옮겨 탔다. 이때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쳤던 러시아군이 빈 청 전선에 올라타 강가를 따라 상류로 끌고 갔다. 이에 뒤에 있던 배들이 일시에 그 배를 추격했는데 선두의 배에는 신류 장군이 타고 있었다. 배 여러 척이 러시아군이 탈취한 청나라 배를 포위하자 러시아군은 다시 내려 숲 속으로 도망치려 했다. 이때 청나라 갑군들이 뛰어들어 러시아군 40여 명을 죽였다

그동안 청 전선 위에 있던 포수와 사수들은 풀숲으로 도망친 러시아군에게 사격을 가했는데, 이들이 쏜 총에 청군과 조선군에 사상자가 생겼으며, 또한 화공을 위해 올라탔다가 샤르후다에게 저지당한 포수들 역시 아군 전선으로 돌아간 뒤 배 안으로 도망쳤던 러시아군이 튀어나와 연달아 사격을 가해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들 중 사망자는 7명으로 이름과 출신은 길주의 윤계인과 김대충, 부령의 김사림, 회령의 정계룡, 종성의 배명장과 유복, 온성의 이응생이다. 이들은 러시아군의 총격에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이후 청의 갑군과 청 사공들에게도 계속 사상자가 나왔는데, 이에 상황이 다급해지자 기어이 화공을 가해 러시아 함선 7척을 불태웠다. 이후 청군은 청 전선 3척은 닻을 내리고 적선을 감시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맞은편 기슭에 모이게 하고 밤을 샜다. 단 화공을 가한 것은 어디까지나 긴급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가한 것으로 샤르후다의 뜻이 아니었기에 기어이 샤르후다는 적선 4척만은 태우지 않고 남겨 둔다.

당시 러시아 원정대는 말 그대로 참패를 당했다. 원정대는 어찌어찌 구한 배 한 척에 생존한 사람들이 탄 채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생존한 군인 중 하나인 페트릴로프스키가 남긴 기록을 통해 피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페트릴로프스키 보고서에 따르면 스테파노프와 카자흐 270명이 전사했으며 짜르에게 바칠 국고 소유의 담비 가죽 3800장, 대포 6문, 화약, 납, 군기, 식량을 실은 배가 파괴되었으며 겨우 성상을 실은 배 1척에 95명의 생존자를 태우고 탈출했다고 한다. 페트릴로프스키가 연합군에 대해서 묘사한 것은 화승총과 대포로 무장한 중국 범선 47척이라고 되어있다.

이 전투에서는 1차 정벌과는 달리 피해자가 꽤 나온 편인데, 조선군의 전사자는 7명이고 크게 부상당한 사람은 25명이었다. 게다가 온성 출신의 이충인은 부상이 덧나 사망하기에 이른다. 샤르후다는 시체를 화장하는 데에 쓰라며 러시아 함선 1척을 내주지만 신류는 거절하고 강가에 매장한다.

전투 당시 조선군은 러시아 함선에서 부싯돌이나 러시아 총 등을 노획했는데, 샤르후다는 러시아군이 보유하고 있던 담비 가죽을 모조리 챙긴 것도 모자라 조선군이 챙긴 총과 부싯돌도 빼앗는다. 조선군은 이후 러시아 함선의 구조를 살펴본다. 신류의 표현에 따르면 러시아 범선은 몸체가 크고 갑판 위는 모두 널빤지를 둘렀으며, 배 위에는 방을 세워 두었는데, 넓은 널빤지로 서까래를 만들어 작은 나무 엮은 것을 얹었고, 그 위에 벚나무 껍질을 씌운 뒤 그 위에 또 흙을 깔고 또 두꺼운 널빤지를 덮었기에 "살림집도 이만큼 튼튼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한다. 이어 배 위의 집이 이 정도로 튼튼한데 배 또한 바닥이 통나무에 홍이포로 공격해도 잘 부서지지 않는데다 갑판 주위를 두꺼운 나무로 두르고 있어 만약 적이 배 속에 숨거나 육지에 내리거나 하지 않고 끝까지 배 위에서 싸웠다면 승부를 가리기가 만만찮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후 풀숲으로 도망쳤던 러시아군 10여 명이 빠져나와 조선군과 청군에게 살려 달라고 빌었다. 샤르후다는 이들을 배에 나누어 수용하고는 갑군과 포수들을 시켜 수풀을 뒤져 생존자를 찾아 보라고 명했으나 이들 외에는 모두 총알과 화살에 맞아 말 그대로 벌집이 되어 있었다. 이때 조청연합군을 안내했던 왈가족과 혁철족은 러시아군의 시체에 칼질을 하며 보복했다.

청군은 전투에서 총 80여 명이 전사했고 사공 역시 30여 명이 사망한데다 부상자는 200여 명에 달하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한편 조선군은 상태가 꽤나 안 좋아지고 있었는데, 샤르후다가 사전 통보 없이 조선군의 주둔 기간을 연장해 버리는 바람에 조선에서 가져온 식량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류는 이에 샤르후다에게 요청하여 쌀을 빌리는데, 샤르후다는 조선군이 원래 조선에서 들고 왔던 쌀의 절반 수준만을 빌려 준다. 게다가 쌀을 옮길 때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지 배에 물이 샌 나머지 쌀의 30% 가량이 썩었다. 쌀뿐만 아니라 장작도 별로 안 빌려줘서 조선군은 떨어질 때마다 청군에게 사정해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신류는 끊임없이 청나라 수석 통역관을 통해 러시아 총을 전리품으로 들고 가게 해 달라고 샤르후다에게 요청했는데, 샤르후다는 계속된 간청을 이기지 못해 러시아 총 한 자루(....)를 내준다. 참고로 청군은 수백 정의 총기를 노획했다. 신류는 당시 러시아 총기가 수석식이었기에 화승 없이 쇠붙이와 부싯돌로 일으킨 불꽃으로 사격하는 모습이 매우 신기하다고 적었다. 조선군은 8월 27일 조선으로 돌아갔다. 이로서 2차 나선정벌까지 완료되었다.
 
 
 
나선정벌, 그리고 사라진 민족 듀체르와 고굴리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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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leSeve 17-04-23 16:08
   
어휴 청나라 새끼들 지금이랑 다를게없네 ㄹㅇ지금 중국이 세계패권국가 엿다면 끔찍햇을듯
급양2년차 17-04-23 17:50
   
한반도에서는 수석총에 쓸법한 좋은 부싯돌 구하기가 힘들어서....
설민석 17-04-23 18:56
   
짱개들의 쪼잔함은 옜날부터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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