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나 신라나 모두 우리의 훌륭한 고대 국가들이었지 않나요? 굳이 한쪽만 낮추어 보실 필요가 있을지.
백제만큼 신라 또한 현대 한국의 중요한 뿌리입니다.
더욱이 석굴암이 님의 그런 논리로 해석되야 한다면 백제가 양나라 기술자 인력을 빌어온 기록이 있으니 백제의 무령왕릉도 그런 논리에 따라 해석을 해야하는지...
중국 양서 백제전, '백제가 양조에 공장(工匠)과 화사(畵師) 등 인원파견을 요구했다.'
중국 난징(南京)에서 발굴된 귀족 무덤인 '손오묘'와 백제의 '무령왕릉'
일본에 기악무(伎樂舞)를 가르친 백제의 음악·무용가인 미마지가 중국 오나라에서 기악무를 배웠다고 했으니 백제가 일본에 전파한 것은 사실 오나라의 그것이라고 봐야 하는지....
일본의 사또 천리대학 교수는 일본 서기에 그것이 백제에서 넘어왔다고 되어 있으니 백제 음악이라고 봐야 한다고 하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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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드렸듯이 남조의 무덤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무령왕릉이 백제의 기술인 것이 맞듯이, 독창성에서 더 뛰어난 신라의 석굴암은 신라의 기술이 아니라는 근거가 있습니까?
혹 석굴암이 백제의 영향을 받았더라도 무령왕릉의 경우처럼 신라의 기술이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여쭙는데 물타기라니요?
말씀대로 무령왕릉과 천마총 비교하시면서 정작 님의 발제글 타이틀은 '백제와 신라의 기술력 차이는 300년 이상 차이 났을겁니다' 라며 백제와 신라의 전체 기술력을 비교하시는데요?
발제글 타이틀에선 전체 신라 기술력이 형편없는 듯이 말씀하셔놓고는 발제글 내용은 무덤 양식만을 그 근거로 삼으시고, 또 이제 신라 후기는 논하지 말라??
무슨 토론이 그런가요...
특정 단체나 대상을 지적해 비판은 가능하지만, 그것의 특정 시기만 저격해서 마치 전체가 형편없는 듯이 말씀하시는 것은 별로 절도있는 견해 같지 않군요.
애당초 무덤양식 하나 가지고 백제-신라 300년 차이라는 무리수가 섞인 주장을 하시니 저도 님과 국산아몬드님과의 석굴암 토론에 참여한 겁니다.
그건 제 첫 댓글부터 다시 읽어보세요.
제가 신라 후기의 석굴암이 더 이른 시기의 백제 무령왕릉보다 더 뛰어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저 신라빠 아님) 님의 논리대로라면, 남조 무덤양식의 영향을 받은 무령왕릉이 백제 기술이 아니라는 주장도 합리화 되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무령왕릉이 석굴암 보다 거의 400년 전 유적이든(이것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4000년 전 유적이든 간에 이런 식의 논리의 위험성을 말씀드린 겁니다.
백제의 영향이 있었든 없었든 또는 백제가 존재했든 망했든 간에 석굴암은 신라의 기술이라는 것이지요.
님의 견해로서 삼국시대에 백제의 기술이 많이 훌륭하게 보인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백제가 더 우수한지 신라가 더 우수한지, 아니면 고려가 더 우수한지 조선이 더 우수한지가 뭐가 중요할까요.
다 같은 우리 조상분들 아닙니까?
무덤 양식이든 금관이든 귀걸이든 간에 일종의 예술품이고 보는 사람의 견해 차이가 있겠지만, 그걸 토대로 한 문명의 기술력 전체를 비하하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네요.
솔직히 신라 천마총도 뭐가 그렇게 떨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술품에는 다 그것만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 제 주의)
삼국시대 금속 상감 유물은 백제에서 일본에 보낸 4~5세기 예물용 칼인 ‘칠지도’를 비롯해, 5~6세기의 경남 함안 마갑총 출토 가야 환두대도, 경주 호우총 화살통 장식, 천안 화성리 고분 출토 백제 철제 칼 등 소수에 불과하다. 주로 큰칼 자루나 칼몸에 새긴 물고기ㆍ용, 거북 등의 무늬와 글씨들인데, 계림로 14호분 출토품처럼 전면을 금은 상감으로 꾸민 유물은 전례가 없었다고 한다.
[중앙박물관 신라실] 신라의 금관과 장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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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대표하는 유물로 화려한 금관을 들 수 있다. 금관은 세계적으로 남아 있는 숫자가 많지 않으며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남아 있어 세계적으로 중요한 유물들이다. 경주 도심에 위치한 5~6세기에 조성된 돌무지덧널무덤에서 5점의 금관이 출토되었다. 금관이 출토된 고분으로는 항남대총 북분,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금령총이 있다. 신라 금관은 금판을 오려 붙여 만든 것으로 아래쪽에 관테가 있고 그 위에 세움장식을 부착하였다. 세움장식은 나뭇가지모양과 사슴뿔 모양을 하고 있는데, 시베리사 샤먼(Shaman)이 착용했던 것과 유사하다. 이런 연유로 신라 금관을 만든 사람들은 시베리아 유목민들이 한반도 이주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 중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국보 191, 192호로 지정된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금관과 금제허리띠가 전시되어 있다. 이 금관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형태와 화려한 장식 등으로 미루어 왕관으로 추정하고 하고 있다.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이 금관은 나무와 사슴뿔 모양의 세움장식에 푸른빛의 곱은 옥이 달려 있고, 전체적으로 금판으로 장식해서 상당히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금관이 실생활에 사용한 것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전체적인 구성요소에서 신라의 지배층과 북방 유목민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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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인용하지 않으셔도 신라 금관이 북방 유목민의 사슴뿔과 연관된 샤머니즘 영향을 받았다는 연구를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요?
설마 신라 금관이 신라인들의 기술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싶으셔서 제게 인용하신 것입니까?
아님 그것과 관련된 어떤 연구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