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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0-26 22:57
[한국사]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과 성시(城市)
 글쓴이 : 햄돌
조회 : 4,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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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시도> 일부(18세기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덕무의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에는 성시전도의 모습이 문자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시에 의하면 '성시전도'는 맨 위에 백악산과 인왕산이 버티고 있고 그 아래 성곽이 둘러쳐져 있다. 그 안에 궁궐을 중심으로 사찰, 가게, 집들이 즐비하여 오고가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성 밖의 정경 또한 표현되었다.

산수로 둘러싸인 이러한 장관은 백악, 인왕산, 북악산, 삼각산들이 펼쳐진 아래 경기감영을 중심으로 서대문 밖의 풍경을 묘사한 <경기감영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서울에서 시장이 밀집되어 있었던 종로거리의 저자 풍속을 주제로 한 1789년(정조 13) “종가호시(鐘街互市 : 종로거리를 그린 그림)”를 시작으로 순조 4년(1804) “열사현기(列肆衒奇 : 줄지어 늘어선 가게의 진기한 물건)”, “종가도(鐘街圖)” 등이 화제로 빈번하게 출제되었다.

 

서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종로거리는 조선 초기부터 비단, 명주, 종이, 베 등을 파는 여섯 개의 시전(市廛, 육의전)이 있었다. 이 육의전은 으뜸가는 시전이라 하여 큰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정조 15년(1791)에는 사상(私商)들에 의한 난전(亂廛)을 합법적인 상업 활동으로 인정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이 실시되었다.

게다가 이 무렵에는 양반들도 상업에 종사할 정도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여 종가의 저잣거리는 더욱 활성화되어 갔다. 정조대를 전후하여 이러한 시장통의 모습이 속화(俗畵)의 화제로 출제된 것은 당시 활성화된 상업 활동의 모습이 반영된 결과이다.

 

일본 유현재(幽玄齋) 소장 <담와평생도(澹窩平生圖)>에서 종로거리를 지나는 영의정 행차장면은 좌판을 벌여놓고 물건을 파는 여인과 물건을 사러 나온 사람들로 붐비는 번화한 종로 저잣거리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영의정 행차로 인해 가던 길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거나, 물건을 머리에 이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경기감영도>의 장면과 비슷하다.

조선시대 도성을 그린 지도는 사대문 안을 중심으로 그린 지도가 대부분이었으나, 18세기 후반 이후 19세기에는 도성 내부와 도성 주변지역을 세분하여 그린 지도들이 편찬되어 서울의 범위와 지리적 인식이 외곽으로 확장됨을 보여준다.

 

이밖에 일반적으로 궁궐과 관청 등 행정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표시하던 것과 달리 궁궐 이외에 관청이나 공공건물은 생략하고 일반 민가를 빽빽하게 그려 넣은 지도도 있어서 흥미롭다.

(176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국여지도’ 중에는 도성 안에는 기와집, 도성 밖에는 초가집을 다수 표현한 지도가 있다.)

 

반송방 지역은 일찍부터 거주인구가 많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789년 파악된 한성부의 호수는 43,920戶이고, 인구는 189,153口였다.

그중 성 밖의 인구가 21,835戶 76,782口이고, 한성부 전체인구의 절반에 이르고 있다.

 

15세기 전반 성중오부(城中五部)의 인구가 17,015口이고 성저십리(城底十里)의 민호가 1,719戶로 성 안에 91%의 인가가 살았던 것에 비해 성 밖의 인구증가가 두드러졌다.

특히 서부는 한성부 전체의 1/3 이상의 인구가 밀집하여 서울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았던 곳이었다

시정 풍속

<경기감영도>에는 궁관(宮館) 풍속 외에 묘사된 관찰사 행렬 주변으로 다양한 시정(市井)풍속이 펼쳐져 있다.

거리에는 구경꾼들이 생업을 중단한 채 경기감영까지 계속 이어진 행렬을 지켜보고 있다.

집안 창문이나 대문 안쪽에서 바깥 풍경을 엿보는 사람, 젖먹이를 업고 나온 여인,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행렬을 구경하는 아이,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인, 종복과 마부를 거느리고 말을 타고 외출하는 양반,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나는 나그네, 길가에 앉아 쉬고있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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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렬 양 옆에는 쌀과 잡곡을 파는 가게, 주점, 약국, 짚신을 파는 승혜전(繩鞋廛) 등 의식주와 관련된 상점들이 늘어선 저자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흥정을 벌이는 곡물가게 주인과 손님, 행렬구경에 넋이 나간 주모, 가위장단에 엿을 파는 어린아이, 상점 앞을 서성이는 지게꾼, 땔감을 팔러 나온 촌부, 보부상, 행상과 좌고(坐賈)의 모습, 머리에 짐을 이고 가는 여인 등 활기찬 시장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경기감영도>에 보이는 시정의 다양한 모습은 인구 증가, 상품화폐경제의 발전, 도성외부공간의 확대 등 다양한 변화를 겪고 있었던 조선후기 서울의 모습을 그대로 반양하고 있다.

이러한 상업도시로의 변화상을 <경기감영도>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① 미전(米廛)

<경기감영도>에서 돈의문을 나오자마자 있는 기와집은 대로변에 접한 행랑채에서 잡곡이나 쌀을 파는 미전(米廛)이다.

짚으로 지붕을 덮었으며, 차양을 달아 도로 쪽으로 좀 더 넓은 면적을 확보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ㄷ자형 배치로 뒷쪽에 생활공간을, 앞쪽에 점포를 두어 주거와 상업을 겸하고 있다.

점포의 좌우 측벽은 화방벽으로 되어 있고, 앞쪽 4칸 중 오른쪽에서 두 번째 칸이 대문이다.

점포에서 팔고 있는 물품이 비교적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내부 마당까지 점포가 개방되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제3폭 아래 감영을 향해 가는 길의 오른쪽에도 쌀과 고추를 파는 상점이 있다.

짚으로 지붕을 덮었으나 위와 마찬가지로 차양을 달았다. 점포의 오른쪽 벽은 다른 집의 벽에 연접해 있고, 왼쪽과 정면은 판벽과 판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점포의 뒷면에 주택 내부와 통하는 문이 있고, 왼쪽에 별도의 대문이 설치되어 있다. 점포와 생활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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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감영도>에서 미전(米廛)이 2군데나 묘사된 것은 18세기 초부터 미전이 늘어났던 사실과 관련해 생각할 수 있다. 1660년대를 전후하여 마포 미전, 서강 미전, 서대문 밖 문외미전(門外米廛), 외어물전(外魚物廛) 등이 새로 창설되었는데, 이와 같이 대중들이 일용소비품인 미곡과 어물을 판매하는 시전의 증가는 소비 인구의 증가 외에 다른 원인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17세기 후반 이후 대동법 실시와 금속화폐의 전국적 유통은 노동력의 상품화를 촉진시킴으로써 농촌에서 유리된 농민들이 도시에 정착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을 마련하였다.

당시 통계에 의하면 서울의 인구는 급증하였으며, 이러한 인구의 급증구조와 주민 구성, 도시문화, 이념적 지향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조선이 중세적 질서에서 근대적 사회단계로 이행하고 있음을 예비하는 징후로 이해되고 있다.>

 

② 약국(藥局)

<경기감영도>에는 감영 앞 네거리에 위치한 약국 2곳이 확인된다.

간판 대신 흰 벽에 ‘新設藥局’ ‘萬病回春’이라 써넣은 것이 확인된다.

 

제6폭 감영 앞 대로 남쪽 기와집에 ‘만병회춘(萬病回春)’이라는 상호가 흰 벽에 쓰여 있다.

‘만병회춘’은 명대 중국의서(醫書)의 이름을 딴 것이다.

ㅁ자에 차양 구조를 하고, 약방을 겸하고 있는 주택이다.

약방 오른쪽 주요 도로변으로 짚으로 지붕을 덮은 가가(假家)를 형성해 놓은 것으로 보아 상업활동으로 인해 부를 축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감영 서쪽에 있는 주택은 ‘신설약국(新設藥局)’이라고 표기되어 있어 대로 대각선에 위치한 ‘만병회춘’보다는 늦게 생긴 약방임을 알 수 있다.

차양을 설치한 팔작지붕에 오른쪽 길쪽에 초가로 된 가가(假家)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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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감영도>에 표현된 약방들의 모습은 조선후기 상업경제와 의약학의 발달을 그대로 보여준다.

18세기 서울에는 시전(市廛)이나 사상(私商)들의 난전(亂廛) 상인 외에도 점포상도 발다하고 있었다.

 

19세기 초에 작성된 『동국여지비고』에는 시전과 다른 점포상을 특별히 ‘사(肆, 방자할 사)’로 독립시켜 서술시켜 기술하고 있는데 현방(懸房), 약국(藥局), 서화사(書畵肆), 책사(冊肆), 금교세가(金橋貰家)가 그에 해당한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조선 전기 서울에 거주하는 양반들도 약재의 구입과 구득이 어려워 관청에서 안면을 통해 약간씩 얻는 정도였던 것에서, 조선 후기에 이르면 심지어는 약물을 과용하거나 남용하는 폐단이 지적될 만큼 약물과 처방전의 구득이 쉬워지고, 약재시장과 의료 환경이 변화되었다.

 

『한경지략』이나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誌)』 등에서 당시의 시장들의 성행과 연관하여 약방들은 모두 갈대로 발을 만들어 문 앞에 늘어뜨리고 ‘신농유업(神農遺業)’ ‘만병회춘(萬病回春)’ 등의 상호를 내걸고 장사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 약국은 현재 을지로입구인 구리개(銅峴) 근처에 집중적으로 분포하였지만, 『한경지략』에 의하면 ‘서울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후기 의약학의 발달로 1613(광해군 5) 간행된 『동의보감(東醫寶鑑)』은 17, 18세기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급기야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사설(私設) 약국과 의원들 그리고 일반 양반들 모두에게 『동의보감』을 기본으로 이루어졌다. 이와함께 민간의료가 확산되면서 서울에는 수많은 의원과 사설약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서울에 거주하던 양반 유만주(1755-1788)의 일기 『흠영(欽英)』은 이러한 서울의 약국과 의원들의 활동모습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의원이 환자에게 처방전을 내리면 그 처방전으로 환자가 약국에서 약을 지어다 먹는 방식이었다. 약국은 약재를 공급할 뿐 아니라 환제나 탕제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여 약재 가격과 별도의 공임을 받았던 듯하다. 따라서 약국은 약재의 유통과 제약의 제조비 수익으로 경제적 지위가 상승한다.

 

또한 약국은 병자에게 약을 지어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시정인들의 약속장소,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어 약국이 시정의 소문들이 발생하는 근원지이면서, 그러한 소문이 빠르게 확산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경기감영도>는 조선 후기 상업경제와 의약업 발달 면모를 그림 속 약국의 존재를 통해 반증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③ 기타 난전(亂廛)

주택에 붙어있는 상점과 별도로 놓여져 있는 가게 두 곳중 돈의문 근처 미전(米廛) 옆에는 신을 파는 가게가 있는데 초가집의 주택에 차양 구조를 하고 있다.

 

<경기감영도> 제4폭 아래쪽의 감영을 향해 가는 길 오른쪽에 위치한 주택에 붙어있는 점포는 세 칸으로 되어 있다. 신발가게처럼 세 칸 중 가운데 칸은 주택 내부로 출입하는 대문이다. 대문 오른쪽은 붓과 종이, 왼쪽은 먹거리를 파는 곳인 듯하다.

두 품목 모두 기둥과 기둥 사이에 판을 대고 그 위에 물건을 진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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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을 파는 곳은 기둥 사이에 줄을 걸고 그곳에 붓을 매달아 진열하고 있다.

양쪽 점포의 뒷면은 흙벽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칸은 주택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대문 그리고 벽과 벽 사이 개방된 공간은 이중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구조에 대해 주택에 붙어있는 점포에 별도의 사람이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다. 초가집, 점포 부분에만 차양이 설치되었다.

 

제5폭 아래의 간이건물은 먹거리를 팔고, 한쪽 구석에서는 땔감을 파는 곳인 듯하다.

작은 규모이지만 차양이 달려있는 지붕과 한쪽은 판벽을 설치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주변은 대로를 따라 많은 가옥에 차양과 가가(假家)가 설치되어 있어서 <경기감영도>에 표현된 영역 중 비교적 상업적 활동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수공업 중 종이나 그릇 등 넓은 작업공간이 필요한 분야는 도성 밖에서 제조하였는데, 이 수공업자들 역시 시장에 물건을 판매하기 위한 것이었다.

 

짚신이나 종이, 붓 등을 취급하는 가게들과 소나 말, 지게 등을 이용한 하역운반업 등도 새로운 직업군으로 등장하였던 사실을 <경기감영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서울 인구구성을 보면 17세기 중반 이전에는 서울 인구의 대부분은 국가나 왕실 사무에 종사하는 사람들, 관료나 중인층과 상인층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반 자료에 의하면 직임자(職任者), 서리(胥吏), 공인(貢人), 시전상인, 군병, 영세소상인, 수공업자, ‘한잡지류(閑雜之類)’로 서울주민을 구분하고 있으며, 이들 중에 농사를 짓지 않고, 길쌈(織布)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한잡지류’들이 수십만 명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한잡지류들은 대부분 좌판 행상하여 생계를 유지했던 사람들이었다.

 

조선 후기 문장가인 남공철(南公轍, 1760-1840)에 따르면 “서울은 돈으로 생업을 삼으며, 팔도는 곡식으로 생업을 삼는다.(竊嘗論之 生民之業 京師以錢 八路以穀)”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정조 5년(1781) 장령(掌令) 구수온(具修溫)은 “도하민(都下民) 중에서 각사리예(各司吏隸)를 제외하면, 장사로 살아가는 자가 10중 8,9”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보듯 18세기 서울 인구의 대부분은 상업 인구였던 셈이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은 시전상인과 공인(貢人)을 ‘도민의 근본(道民之根本)’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상은 문학과 회화들에 자연스레 반영되었다.

이와 같이 생업이 다양해지면서 서울에는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인간 군상들이 출현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 풍속화와 마찬가지로 18세기 중엽의 한문 단편소설이나 한시(漢詩)에는 개장수, 닭장수, 말장수, 거간(居間), 염색업자, 야장(冶匠 : 대장장이), 갖바치, 약국쟁이, 연희패, 서리, 도둑, 포교, 경강상인이나 도고상인, 도시의 수공업자 그리고 경강 일대에서 미곡, 시탄(柴炭 : 숯), 잡화를 하역, 운반하는 도시의 노동자 등을 주인공으로 그리고 있다.

그동안 문학작품에는 대부분 산수와 자연을 소재로 삼아왔는데, 18세기 이후에는 도시 발달에 따라 여러 종류의 인간 군상들을 형상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표암 강세황의 손자 강이천(姜?天, 1769-1801)은 도시 시정을 무대로 하여 온갖 인간군상들이 등장하는 18세기 서울의 풍속과 생활양상을 묘사한 『한경사(漢京詞)』에서 그러한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전해준다.

 

 

4) 상업적 농업

<경기감영도>에는 <U>돈의문 밖 대로(大路) 남쪽으로 밭이 있는 것</U>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아마도 미나리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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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후반 이후 급속히 상업도시로 성장함에 따라 서울에서는 사업적 농업 또한 크게 성행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채소, 과수농업과 약초 재배업이었다. 특히 서대문 밖에는 미나리밭, 영은문 주변에는 무와 채소, 석교에는 가지, 오이, 수박 등이 유명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채소농업은 미곡 농사보다 훨씬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19세기 초 우하영(禹夏永, 1741-1812)에 의하면 “미나리 2마지기를 심으면 벼 10마지기를 심어서 얻는 이익을 올릴 수 있고, 채소 2마지기를 심으면 보리 10마지기를 심어 수확하는 것과 같은 이익을 올릴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정약용 역시 “서울 안팎의 파밭, 마늘밭, 배추밭, 오이밭에서는 상지상답(上之上畓)의 벼농사에 비해 10배 이상의 이익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경기감영도>에 나타난 밭 역시 상업적 농업의 성행을 방증해준다.

실제로 18세기 이후에는 도성 내의 채소밭이 크게 증가하고 규모가 확대되었다.

 

영조 1년(1725) 살곶이벌에 있던 사복시(司僕寺) 둔전도 채소밭으로 변했고, 어영청 관할의 동대문 밖 채소밭도 생겨났다. 또한 도성 안의 용흥구궁(龍興舊宮) 자리가 채소밭으로 바뀌었는데, 이 밭의 주인들이 양반이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관청 외에 일반사대부들도 상업적 농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홍화나 자초 같은 약초 또한 상업적으로 재배되었는데 영은문 주변에 홍화가 재배되어 이 일대를 홍화동으로 불렀다고 한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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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돌 16-10-26 23:14
   
이상의 시정 풍경에서 살펴보았듯이 돈의문 밖은 도성을 벗어나 지방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상권이 확대되었던 곳이었다.
 
<경기감영도>는 도성과 주변 근교를 잇는 하나의 유통권으로서, 당시 난전(亂廛)을 중심으로 새로이 형성된 상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채소밭의 존재는 조선 후기 서울의 도시화 경향에 따른 농업 성격의 변화를 보여준다.



출처 : http://cafe.daum.net/hankookhistory
20cFox 16-10-26 23:39
   
하.. 근대화에 성공해서 식민지만 안됐으면 저런 건축물들과 거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텐데......
흑요석 16-10-27 02:11
   
햄돌님 덕에 양질의 자료를 보게 되네요~~

잘 봤습니다.
아비요 16-10-27 07:58
   
안타까운건 저 당시의 국가가 너무 무기력했다는 것이죠. 조선의 좋은 점도 있겠지만.. 경제면에서 작은정부 모형처럼 아무것도 안하면서 시장을 억압하는 정책을 펴서 제대로된 발달이 되기 힘들었지요. 작은정부면 시장에 맞기든가.. 그것도 아니면 큰정부처럼 정부가 나서서 뭔가를 해나가야 하는데.. 말그대로 방치했죠.
그나마 도성쪽은 나은편이고, 지방에선 정말 거의 아무것도 안했죠. 평양은 물론이고 경주등의 도읍지들에 있던 시가지들이 폭삭 줄어든것도 그렇고.. 하향평준화에 너무 힘쓰고 현상유지만 급급한 면이 크다고 봅니다. 그나마 왕중에는 의욕적인 왕이 제법 있었지만, 비대한 신권이 발목을 잡았고..

조선 멸망은 어찌보면 필연이고 빨리 안망해서 더 고통받은게 사실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몰락이 대한민국의 밑거름이 되긴 했는데.. 써글 일본놈들과 중국놈들 공산당놈들이 껴들어서 북쪽으로 영토확장 하나도 못하고 나라는 반토막나고.. 일본놈들 덕분에 고생은 고생대로하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문제가 생기고 있죠.
     
비좀와라 16-10-27 11:28
   
조선의 문제점은 너무 비대해진 신권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란 말이지요.

조선이 신권을 통제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역대 조선의 군왕들이 언제나 정통성 시비에 휘말려 있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라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조선군왕들 중에서 정통성 시비에서 가장 자유로운 왕이 숙종으로 조선 후기의 상공업의 발달이 숙종시기에 이루어 지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 이지요.

왕권이 강해져야만 상공업이 발달 하는 것 이고 서민이 잘 먹고 살게 되는 것이죠. 신권이 강해지면 약탈자가 왕만이 아니라 중간에 또 다른 약탈자가 생기는 것이라 신권의 비대는 국가의 약화와 더불어 착취의 정도가 심해지는 것을 의미 하죠.

영조 시대에 영남지방에 툭하면 반란이 일어나는데 정조시대에 영남의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많은 시사가 있는 것 입니다. 영남권의 왕권 흔들기가 결국은 성공하였다는 것이죠. 정조의 어쭙잖은 자비심이 결국은 국가는 물론이고 자신의 후손마저 패망의 길로 이끌었죠.

만일 정조가 영조가 했던데로 영남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했더라면 세도정치가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조선이 다시 살아났을 수 도 있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현대의 한국에도 시사 하는 바가 많습니다. 정치인에게 어쭙잖은 자비심은 엄청난 재앙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죠.

송시열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숙종시의 정치인 으로만 아는데 유가에서는 공자 맹자 주자에 이은 송자로 유가의 4자로 평가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굉장한 사상가 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꼴통이라는 것이죠.

공자는 사생아에 서자이며 모친은 비천한 무녀 출신으로 공자의 출신을 대단히 높게 평가 하는데 공자의 출신성분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자가 주장하는 사상은 혁명사상의 내용을 담을 수 밖에 없단 말이죠. 더군다나 맹자의 사상은 역성혁명을 옹호하는 사상으로 민심을 저버리는 군주에 대한 반란을 옹호 합니다.

유가사상은 초기 민주주의 사상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죠. 그 중에서도 플라톤이 주장한 철인에 의한 정치를 이상적으로 구현하려 한 사상입니다. 이러다 보니 언제나 조선은 신권에 의해서 왕권이 견제 당했죠. 신권이 너무 세서도 안되고 왕권이 너무 세서도 안되는 서로 견제와 견제를 통한 합의제가 조선정치 체제의 근본 개념으로 현대의 국가체제와 거의 흡사 합니다.

이러한 서로간의 견제가 무너지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조선의 역사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는 것인데 지금 한국의 정치체제가 바로 서로의 견제가 무너져 내렸다는 것이죠. 조선말의 상황도 마찮가지 입니다. 견제세력의 부재가 결국은 조선의 멸망의 길로 이끌었고 이 것은 미래의 한국의 모습 이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조선의 모습을 보고 비웃는 사람 많은데 현재 한국이 조선보다 낮다고 자신 할 수 있나요. 제가 보기엔 조선보다 못한 모습이라는 것이죠.
비좀와라 16-10-27 11:57
   
중국 강남지방에선 젓가락을 쾌자快子라 합니다.

중국 강남지방은 대단히 더운 지방으로 남방지역에 속합니다. 우리가 흔히 중국인을 만만디라 부르는데 이것은 더운지방 사람의 속성 입니다. 이 만만디란 말과 쾌자라는 말은 서로 반대적인 개념이죠. 결국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한 사람들은 추운지방의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더운 지방의 사람들은 도구를 사용해서 음식을 먹기보단 아직도 그러 하듯이 손으로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젓가락을 사용하며 마치 자신들의 문화인양 떠들어 대는데 일본은 남방문화권이라 절대로 숟가락이나 젓가락등의 도구 사용법을 알 수 없었던 문화란 말입니다.

과거의 일본은 그냥 손으로 집어먹던 그런 문화였던 것이죠. 이것이 지금은 젓가락을 사용 하죠. 이것이 뭘 의미 할 까요? 일본왕가에선 아직도 숟가락을 사용 합니다. 다시 말해서 북방 문화권의 어느 족속이 일본 원주민을 점령 지배 했음을 의미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북방 문화권의 어느 족속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한국계 이고요.

애시당초 문화라는 것이 없었던 일본 원주민에게 인간 답게 살 수 있었던 것을 가르쳐 주었더니 자신이 인간 인 줄 착각 한다니 깐요. 유교을 가르쳐 주었던 왕인을 우리의 기록에는 별 로 없지만 일본에는 남아 있는 것이 우리에게 왕인이란 존재는 수 많은 유학자 중의 하나 이었던 반면에 일본에게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예법을 가르쳐 주었던 은인이라 그랬던 것이죠.

그런데 잘 못 가르쳐 주었습니다. 인간 답게 살려면 은혜를 갚는 방법 부터 가르쳐야 하는데 형식만 따르는 것만을 가르 쳤으니 ㅉㅉㅉㅉ
     
흑요석 16-10-27 16:16
   
일본에서 제일 따뜻한 지방이라면 규슈 지방인데 규슈는 대략 제주도와 기후가 비슷하거든요.

그럼 제주도 사람이나 한반도 남부에 사는 사람들도 손으로 음식을 먹나요? 아니잖아요;;

이게 기후랑 관련이 있나..
     
그노스 16-10-27 17:52
   
일반적으로 일본 젓가락의 원형은 한국에서 찾지 않고 중국에서 찾으며 중국 기원설이 강하다 하지만, 일본 무사들이 득세하기 전인 가마쿠라 시대 전에는 귀족 취향으로 숟가락을 썼다는 기록으로 보아 분명 일본이 한반도 수저 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더운 지방 사람들이 손으로 먹는다고 해서 인간답지 않은 것은 아니고, 추운 지방 사람들이 젓가락으로 먹는다고 해서 인간다운 것은 아니지요.

세계에는 지금도 관습상 손을 신성시 여겨 손으로만 음식을 먹는 회교권 국가인들이나 인도사람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이티오피아에서는 대형 접시를 중심으로 여럿이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눠먹는데 Injera 라고 불리우는 빵에 각종 음식을 담아 쌈을 싸먹으며, 존경과 친절을 보이고 싶은 대상에게 이 쌈을 손으로 직접 먹여주는 Gursha 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직접 먹여주는 이런 행위는 소중하고 깊은 의미가 있는 것으로서, 요즘 프리 허그가 유행중인 서구에서도 이런 문화를 직접 체험을 해보고 종종 극찬을 합니다.
님께는 이런 문화가 인간 이하의 것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더욱이 숟가락, 포크를 쓰는 문화권에서조차 종종 손만을 사용해 먹는 음식들이 있습니다.
고기쌈을 손으로 직접 싸서 먹는 우리네 문화가 있듯이 저 그노스도 종종 쌈을 즐겨 먹기도 하고,

뉴욕시장 - 포크로 피자 먹고 뉴요커의 입방아에 올라
http://m.business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0

님께서는 그노스나 뉴요커들이나 인간이 되다 만 이들이라고 보실지 모르겠네요...

수저 문화가 있던 없던 간에 각국의 문화 차이일수 있는 문제에 대해 너무 편파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시는 것이 아니신가 합니다.
자부심과 우월심에는 차이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옛날 제국주의 시절, 산업혁명의 유산에 도취해 있던 서구인들이 동양 남녀들을 가리키며 근대 문명의 혜택없이 짐승처럼 살며 짐승처럼 일하다가 짐승처럼 죽어갔다고 인간 이하로 비하하던 그들의 시각이 떠올라 솔직히 기분이 유쾌하지 않습니다.

님께서는 식문화 교육을 받은 이후의 인간다움을 논하시지만, 현대에 들어와 관점에 따라서 님같은 사고방식도 인간답지 못하다고 하기도 합니다.
비좀와라 16-10-27 12:24
   
근세 조선의 지배층은 누가 뭐래도 기호지방 사람 이었습니다.

실제로 조선의 관리들의 출신지역의 통계를 내보면 거의 기호지방의 사람들이고 그외 지역이란 말이죠.

전라도나 경상도의 비율도 거의 같으며 평안도의 비율도 이들과 거의 대동소이 합니다.

이런 비율이 어느 정도 깨지는 것이 세도정치 기간이죠. 그래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는 것 입니다.

양반이란 어는 한 가문의 인물이 정승 반열에 오르고 다시 손자대에 정승 반열에 올라야만 받을 수 있는 칭호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손자의 손자 대에 정승 반열에 오르지 못하면 양반 가문이 아니게 되는 것이죠. 한번 양반 가문이 되면 영원히 양반가문이 되는 것이 아닌 일시적인 가문의 성세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속적인 양반 가문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지 않는단 말이죠. 현재의 한국에선 양반가문 이란 것이 존재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굳이 존재 한다고 한다면 풍양 조씨 파평 윤씨 여흥 민씨와 안동 김씨 정도죠. 이중 에서 여흥 민씨 정도가 지금도 양반 가문 이랄수 있단 말이죠.

구한말에 그래도 정승 반열에 오른 집안이라 그런 것 이죠. 이것은 기본 상식 이거든요. 그런데 역사를 공부 했다는 학자들도 이런 기본 상식을 모르는 것이 지금 한국의 역사학계죠. 정말 한심한 집단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뭐 젊은 사학자들의 반란? 에라 XX 뽕이다...

역사에 관해서 이것 저 것 물어보고 하던 사람이 어느 날 책을 냈더군요. 아무리 봐도 역사을 잘 모르는 사람 이던데요 말이죠. 시중에 나도는 상당수의 책 중에는 틀린 내용을 담은 책 들이 많습니다.  학자들이 돈을 밝히면 그 순간 학자가 아니게 되죠 그래서 이영훈은 학자가 아닙니다 그냥 사기꾼이죠. 학자들이 돈을 구하는 것이 일면 이해가 되긴 한것이 원서의 값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죠 연구를 할려면 돈이 필요 합니다. 그래서 돈이 필요한 것은 이해가 되지만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돈을 밝히는 것은 장사꾼이지 학자는 아니죠.

다시 양반에 돌아가면 손자 대 까지 정승 반열에 오르지 못하면 그냥 중인이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사대부는 중인 집단이란 말입니다. 중인이 따로 양반과 천민 사이의 계급이 아니란 말입니다. 중인이 관리도 되고 전문가 집단도 되고 하는 것이란 말이죠.

최소한 이런 개념은 조선 중기 초반 까지는 유지 되었는데 사림이 득세하는 시기 부터 이런 사회가 무너지기 시작 하는 것 입니다. 사림 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 하기 위해서 진입 장벽을 마구 쌓기 시작 하기 때문이죠. 바로 조선의 몰락은 사림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 들이 지방세력 이란 것이죠.

언제나 중앙세력이 지방세력을 통제하지 못하면 그 국가는 망하게 되어 있는 것 입니다. 일본의 에도 막부가 그러 했고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이라는 지방세력에 밀리는 것도 그러 했으며 정말 잘 나가던 폴란드가 지방세력 또는 신권을 통제하지 못해 망했죠. 근세조선도 그런 시대적 흐름을 따라 간거란 말입니다.

심심하면 티비에서 지금은 지방시대라고 하는데 현대국가와 근대국가의 특징은 중앙집권적인 효율적인 국가 운영 인데 다시 봉건시대로 돌아 가자고 선동 하는 것인지...

근세조선의 중심은 누가 뭐래도 기호지방 이었기에 서울은 당연히 발달 할 수 밖에 없고 그 밖의 지방들은 쇠락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이 것이 역전되면 반란이 일어나고 혼란이 일어나는 것 입니다. 동학혁명은 기호지방 보단 당시 전라도 지역이 발달 되었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죠. 그리고 박정희의 쿠테타가 성공한 것은 서울이 한국전쟁으로 초토화가 되었던 반면에 경상도 지역은 한국전쟁으로 부터 이익을 얻어서 발달 되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촐라롱콘 16-10-27 12:53
   
조선의 지배층은 누가 뭐래도 기호지방 사대부들이었다고 언급하시고서도

안동김씨는 영남지역이라고 하시는 모순된 주장은 도대체 뭔지........???

정조 후반기부터 부상하여 순조~철종시기의 절정기를 거쳐 고종때에도 무시못할 가문이었던

안동 김씨는 본관만 안동이다 뿐이지 영남지역 안동하고는 거의 연관이 없습니다.

세도정치 시기에 집권한 안동김씨는 따로 장동김씨라 불릴 정도로 당시 한양 장동(현 경복궁 주변

북촌일대)를 기반으로 했던... 다시 말해 한양지역이 근거지였으며.....

장동 김씨를 포함한 조선후기의 집권 노론 세력들의 근거지도 한양-경기-호서지역까지가 최대 범위의

근거지였습니다.

조선후기 당시 안동을 비롯한 영남지역은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들의 근거지였으며 일부 북인과 소론

가문들이 근거지로 하던 지역이었습니다. 남인들도 비록 일시적으로 집권하거나 노론의 경계대상이

될 정도로 부상했던 시기도 있었으나 당시 집권남인들도 지역적으로는 어디까지나 기호지역 남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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