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6-10-26 18:57
[기타] 조선 도시의 포스와 에도시대
 글쓴이 : 햄돌
조회 : 7,667  

1.jpg

종서를 불러들여 보고 말하기를, “내가 풍질(風疾)을 얻은 까닭을 경은 반드시 알지 못할 것이다. 저번에 경복궁에 있을 적에 

그때가 바로 한창 더운 여름철이었는데, 한낮이 되어 잠시 2층에 올라가서 창문 앞에 누워 잠깐 잠이 들었더니..."
 -조선왕조실록 세종 13년(1431년)-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에 관해서 근정전이 단층이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의 근정전을 그린

 그림입니다. 2층이었음을 알 수 있죠.근정전 앞에 좌우 협문도 2층이며...사정전, 강녕전, 교태전도 모두 2층입니다.
 

 

(5월 3일) 술시(戌時) 조선의 도읍 동대문으로 진입, 거기서 황성(皇城)의 모습을 바라보니 옥루금전(玉樓■x殿) 늘어선 기와집, 

널따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헌(軒)과 늘어선 대문들, 보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막아 싸우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온통 적막하였다. 

(중략) 내리(內裏)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위에 솟아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秦宮)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중략) 후궁(後宮)에는 화장품 향기가 감돌고 산호의 대상(臺上)에는 화려한 거울이 덧없이 남아있다. 

난 향기는 전각 밖까지 풍기고 사람 살던 자취도 그렇거니와 하염없는 구슬로 장식한 침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건물마다 문이 열려 있고 궁문을 지키는 자 없으니 어디를 보아도 처량하기 짝이 없다.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도 천자(天子)의 옥좌(玉座)에 절을 하고 신성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여 두 눈에 눈물이 괴니 

소오스시마, 아리마, 오무라도 따라 눈물을 흘리었다. 

-에도시대의 문헌 "조선정벌기 (朝鮮征伐記)"에서-  




2.jpg

대개 성곽을 쌓을 때 높은 산을 베고 있다. 가끔 언덕이나 산기슭을 나와,
또한 구불구불 둘러 있는 것이 보인다. 큰 것이 날아갈 듯 치첩이 솟아 있고,
작은 것도 우뚝하게 표관이 웅장하다.

환취(황해도 봉산군에 있는 누각)는 날아갈 듯 아름답고총수(산 이름)는 구름이 이어졌다.
보산(관<關> 이름)에는 서기가 날아오르고, 금암(관<關> 이름)에는 시내가 통과한다.

[개성은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
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평양)에 견줄 바가 아니다.

[서울은트인 길과 통한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잘라낸 듯한 처마에 우뚝 빛나는 집이다.
모든 집은 높은 담이 있어서 바람과 불을 막고,
방마다 북쪽 창을 뚫어 더위를 피한다.

[서울에는종고라는 다락이 있다. 성 안의 네거리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길가에 높고 높도다.

시끌벅적 수레와 말 소리가 울리고,  끝없이 어룡 유희가 나온다.

식기는 금, 은, 동, 자를 섞어서 쓰고, 품물(品物)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고루 많다.

경기 안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누대는 높아 구름을 막고, 물은 푸르러 거울처럼 비춘다.
나루로는 양화도가 있는데, 물산(物産)이 또한 번성하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명(明)의 동월(董越)이 1488년의 조선을 보고 1490년에 쓴 조선부[朝鮮賦]-

 

이 나라는 풍요하여 많은 쌀과 보리가 나고, 과일로는 배, 호두, 무화과, 밤, 사과, 잣, 
그리고 무진장한 꿀, 약간의 비단, 다량의 면화와 베를 생산하고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금과 은 광산은 적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말과 소, 양질의 노새, 당나귀, 게다가 전 국토에 걸쳐 
수많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그 밖에 갖가지 다양한 동물이 있다. 그들이 만든 공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들이 솜씨가 좋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피부색이 하얗고 
건강하고 대식가들이며 힘이 세다. 그들은 터키 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역대의 조선 국왕들은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도시에 큰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에 수많은 가신을 거느린 관청이 있었다. 서민들의 집은 대부분 기와지붕이며, 
그 밖에는 초가지붕으로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귀인과 부호들은 
결이 고운 식물로 짠, 정교한 장식이 있는 극히 질 좋고 광택이 나는 돗자리를 
집안에 깔고 있는데, 일본인이나 일본에 오는 포르투갈 인들은 그것을 매우 진귀하게 여겼다. 

우리는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부터 들여온 몇 벌의 백의를 보았는데, 그 옷에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게 공을 들인 자수를 해 놓았다. 그것은 어떤 부분은 짠 것인지 
아니면 실과 바늘로 꿰맨 것인지 여간한 시력이 아니고서는 구별이 불가능 할 정도였다. 
이상의 내용들이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사람들을 통해 관백의 궁정이 
조선에 대해 입수했던 정보의 요약이다.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1532~1597년)의 일본사(Historia de Japam)-



3.jpg
ili.jpg

ilillll.jpg

<고려 청자기와와 조선 청황와와 청기와>

---------

4.gif

5.jpg

[개성은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
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평양)에 견줄 바가 아니다.
 

-명(明)의 동월(董越)이 1488년의 조선을 보고 1490년에 쓴 조선부[朝鮮賦]-


3,300여칸에(혹2600여칸) 달하는 시전행랑이 1414년에 완성했습니다.
이제 조선을 건국한 시점이고...조선 후기보다는 고려시대와 가까웠던 시절입니다.

그리고 동월이 본 술집깃발은 고려시대의 문화입니다. 그리고 조선 전기에도 짧은 기록에까지 남아있을 정도로 여전히 번성했음을 알 수 있고, 당시 개성이 매우 발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jpg

7.jpg

8.jpg

9.jpg

10.jpg

성중의 사찰이 민가보다 더 많았으며, 그 중에도 크고 웅장하며 높고 특출한 전각은

지금까지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 당시의 존숭함이 지극하였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연복사탑 중창기(演福寺塔重創記, 1393년)-

 

십천교(十川橋)를 지나 연복사(演福寺)에 이르니 절 가운데 5층 누각이 높이 솟아

주위의 성문을 누르듯이 서 있었다. 누각의 벽면과 모서리에 채색 그림이

그려져 있는 참으로 웅장한 건물이었다.

-유송도록(遊松都錄, 1477년)-


-----------



11.jpg

12.jpg


13.jpg

14.jpg

15.jpg

16.jpg

<조선 후기의 그림들>


17.jpg

1800년대 후반 서울거리


18.jpg

1892년 한양


19.jpg

조선 시가지


20.jpg

대원군 장례


21.jpg

조선 시가지


22.jpg

23.jpg


---------------------


< 에도시대 >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이이 다이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어 막부(幕府)를 개설한 1603년부터 15대 쇼군[將軍] 요시노부[慶喜]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한 1867년까지의 봉건시대.

 

일부 섬나라 극우들이나 에도시대부터 섬나라가 조선을 능가했다는 식의 말들을 하지만 분명 에도시대가 임진 왜란 이후 조선의 여러 문화들을 강탈하고 이후 대외적 안정을  구가하면서 도시가 커진것은 사실이나 사회전반적인 백성들의 삶은 매우 열악하며  일부 상류층에 국한된 한계적 사회발달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24.gif


파란색은 백성들의 반란

검은색은 백성들의 가옥 파괴 행위

 

 

섬나라은 에도시대의 정작 백성들에 관해서 별로 설명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에도시대를 통틀어서 농민들의 반란은 3,000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 평화로운 시대는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검은색에서 표현한 가옥 파괴 행위는 불만을 품은 백성들이 상류층의 가옥을 파괴하는 것을 뜻하며  농민반란과 함께 당시 참혹했던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도시대 후기로 갈수록 증가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25.jpg

26.jpg








27.gif

왜의 소동(小童)이 밥과 국 세 상을 내왔다. 모두 옷칠한 작은 그릇에 담아 뚜껑을 덮었다.

나뭇조각을 겹쳐 접어서 마치 부채를 펼친 것 같은 데다가 생선회와 고래비계 등을 담았다.

방어와 자포(煮泡)등 반찬이 거의 십여가지나 되었지만 시고 싱거워서 모두 먹을만 하지 못하였다.

계속해서 건과를 내왔는데 역시 먹을 수가 없었다.

 

이키섬에 머물렀다.날이 개고 좋았다가 반나절만에 다시 흐려졌다.
..이 섬의 지공은 빠진 적은 없으나 그 조잡하고 더럽고 자질구레한 음식들은 먹을 수가 없었으며, 

대통과 찬합의 비리고 누린내 나는 것은 웃을 수조차 없었다.

 

비전주의 일기도를 출발해서 축전주의 남도(藍島)에 정박했다....숙공(익힌음식)을 내왔다. 

이른바 연근국이라는 것과 익힌 전복인데 모두 먹을 수가 없었다.

 

에도에 머물렀다...음식은 진무(振舞) 때와 다름이 없었으나 가히 젓가락을 댈 수가 없었다.

 

의복은 비단을 쓰기는 하지만 아래에는 바지가 없고, 또 겹으로 입거나 솜을 두툼하게 넣지 않는다.

음식은 아침저녁 밥을 반드시 다 먹는 것은 아니다. 음식에는 작은 그릇을 쓰는데 술잔만 하다. 반찬도 많이 차리지 않는다.

생선은 비리고 싱겁다. 장 역시 짜지 않다. 먹는 것은 쌀 몇 약(1홉의 1/10)에 지나지 않는다. 

입고 먹는 비용은 그다지 많이 들지 않는다. 방에는 구들이 없고 재목은 이루 다 쓸 수 없는 정도이다. 

사치스러운 것은 오직 방과 집뿐이다. 저들이 우리의 의관을 보고 흠모하는 마음을 가져서 빌려다 보고 제도를 상고하는 자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풍토가 맞지 않아서 저들의 익힌 음식을 먹지 못하는데, 

저들은 우리 종들이 이바지한 형편없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맛있다고 한다. 

음식이 좋지 못한 것을 저들이 일찍이 알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일관기(日觀記, 1763년)-




 

 

(일본)백성들이 고생스럽고 인색한 것은 아마 천하에서 최고일 것으로 

비록 우리 배를 끄는 격졸(格卒)로 말한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익힌 고구마 뿌리를 두 번 먹고 

그 뒤에 밥을 먹는 사람은 오분의 일에 불과하다.

또한 수저질 몇번에 나무 그릇 바닥에 닿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비록 같이 앉아서 먹는 사람이 (밥이)없다고 해도 양식 한 톨도 나누어 주지 않는다.
(우리)여섯 배에 타고 있는 왜의 사공들은 예에 따라 우리가 음식을 먹이는데, 모두 큰 통을 가지고 와서 반드시 음식을 많이 달라고 한다.

(우리)격군들이 그들의 음식을 탐하는 것을 비웃으며 질책을 하여도 또한 부끄러움을 알 지 못하였다. 

백성들은 날로 번창하는데(숫자는 많아지는데)살아가는 형편이 이와 같이 심하게 고통스러우니

만일 그들의 배를 만드는 능력이 우리의 열배가 된다면 우리 앞날에 닥칠 근심이 또한 적지 않으리라 저어된다.

마을은 가히 백 호쯤 되는데 모두 초가집이었고 사는 것이 궁핍했으며 모두 남루했고 빗질도 안 했으며 씻지도 않았다. 

여자들은 나오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으니 의복이 깨끗하지 않아 다른 사람을 만날까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널로 덮은 3층짜리 집들이 있었는데 모두 신사(神舍)와 승사(僧舍)라고 한다.

고공사 아래에 머물렀을 때 작은 배에 나무 손잡이가 있는 둥근 어망을 실은 어부가 그 아내와 더불어 배를 저어 오징어를 잡고 있었다. 

어부는 한 자쯤 되는 베로 음부를 가리었고 그의 아내도 한 자쯤 되는 베로 치마폭을 만들어 앞뒤를 가리었으니,

 남녀가 온몸을 벌겋게 내놓고 있었다. 


-승사록(乘사錄, 18세기)-

 

위의 마지막 그림이 섬나라의 시대에 따른 평균신장의 통계치 입니다. 섬나라 극

 

우나 혹은 섬나라인들은 에도시대가 사회전반적으로 매우 윤택하고 발전한 시대

 

처럼 과장되게 묘사하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 앞선 고분시대나 야요이

 

시대보다 더욱 낮은 최저점의 단신시대입니다. 백성들의 하루 하루 먹고 사는 것

 

조차 힘든 시기임을 알수 있는 부분입니다.

 

에도시대에 관해서 엄청나게 부유했던 것처럼 자료를 인용하지만...실제 조선

 

통신사들이 본 모습은 저런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일부만 인용하고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것이 섬나라쪽과 친일학자들이죠

 

섬나라인들의 평균신장을 보면 가장 큰 것이 고분시대, 그 다음이 야요이시대

 

니다. 가장 작은 것은 에도시대죠. 에도시대의 경우 섬나라백성들은 최소한

 

의 생명유지선까지만 생활하는 상황으로 매우 어려웠습니다. 위의 기록은 당

 

시 섬나라의 모습을 잘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도시대의 게이샤문화도 관해서도 일본의 왜곡이 있습니다. 섬나라에서 게이

 

문화와 같은 것은 상류층에 한정된 문화입니다. 반면 조선시대의 기생들이

 

는 기방에 가는 것은 평민들입니다. 양반들은 기생을 직접 불러서 자기집의

 

후원이나 교외에서 놀았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문화는 양반에 국한'이라는

 

식으로 양반이 기방에서 기생들과 노는 모습이 일반적입니다. 실제 그러한 것

 

은 일본의 문화입니다. 양반들이 기방에서 기생들과 노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

 

니다.

 

로마제국의 창.녀들은 몸파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특기가 체위입니다. 반

 

면 조선시대의 기생들은 문학작품을 외우는 것이 특징이며, 제주나 함경도(혹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흑요석 16-10-26 19:50
   
실상은 참 달랐군요

일본 놈들만 아니었어도 조선이 좀 더 부유하고 평화로운 나라가 됐을 텐데..
순대천하 16-10-26 20:53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조선시대 양반만 기와집이고 서민은 못살고 전부 초가집이라고 알더군요. 물론 조선후기 들어서면서 못살아진건 맞지만 개화기 들어서고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부흥을 하려는 순간에 쪽바리들이...

본문엔 서울과 개성만 나왔고 그걸로도 와 하지만 실제론 평양이 제일 잘살았다죠. 평양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무역으로 번성했던 도시.. 근데 또 어떤 사람은 조선이 상업을 거의 안할줄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고...
20cFox 16-10-26 21:00
   
조선은 도로 정비가 안된게 참 아쉬움. 도로 정비는 도시 미관의 핵심인데, 그것만 됐어도 더 볼만했을텐데..ㅎㅎ
     
굿잡스 16-10-26 21:34
   
조선은 도로 정비가 안된게 참 아쉬움. 도로 정비는 도시 미관의 핵심인데, 그것만 됐어도 더 볼만했을텐데..ㅎㅎ >?? ㅋ

이 사람은 아래 댓글들이고 번역기 돌리는건가 본문은 제대로 정독하고 이런 글을 매번 올리는지??


[서울은] 트인 길과 통한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잘라낸 듯한 처마에 우뚝 빛나는 집이다.


이런 기록이나 실제 한양(서울)전도 및 개성 시가지등 올려준 건 눈에 안보이남요??

본인이 보기는 고대 도시라는 공간과 개념이 이런 기록들이나 그림, 사진들 말고 따로 있는건지??

조선 중후기로 갈수록 도로 정비에 어쩌고는 이런 고대 성곽내의 도시안의 미정비가 아니라 도시와 도시간 즉 지금으로 치면

경부,경인 고속도로같은 지역 도시와 도시간의 연결 도로정비에 대해 외적의 침입등의 여러 이유로 힘을 제대로 쏟지 않거나 미비했다는 말임.
          
20cFox 16-10-26 22:38
   
구한말 한양 사진 보면 도로 정비가 안되서 기와집이나 초가집들이 중구난방으로 위치해 있는것 처럼 보이죠.
               
굿잡스 16-10-26 22:49
   
그건 사대문 밖이나 또는 도로에 장사하는 가건물들임.
                    
20cFox 16-10-26 23:36
   
제가 봤던건 남대문 주변 풍경이었는데.. ㅋㅋ
햄돌 16-10-26 22:04
   
다시보니 게시글이 너무 길어서 다 안 올라 갔네요..

-------
 
섬나라에서 게이샤문화와 같은 것은 상류층에 한정된 문화입니다.

반면 조선시대의 기생들이있는 기방에 가는 것은 평민들입니다. 양반들은 기생을 직접 불러서 자기집의
 
후원이나 교외에서 놀았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문화는 양반에 국한'이라는
 
식으로 양반이 기방에서 기생들과 노는 모습이 일반적입니다. 실제 그러한 것
 
은 일본의 문화입니다. 양반들이 기방에서 기생들과 노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
 
니다.
 
로마제국의 창.녀들은 몸파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특기가 체위입니다. 반
 
면 조선시대의 기생들은 문학작품을 외우는 것이 특징이며, 제주나 함경도(혹
 
은 평안도 둘중 하나) 기생들은 특기가 '말타기'입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이유는 양반들이 교외로 기생을 불러서 놀았기 때문이죠
</xscript>
 
조선의 한양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고려 4대 대도시중 하나인 남경으로 
 
그 규모가 대봉(東), 기봉(西), 면악(北), 사리(南)를 경계로 했는데그 면적
 
이 조선시대 한양도성보다 훨씬 큰 규모를  보유하며 발달한 곳이었습니
 
다.남경이라는 도시는 고려의 다른 대도시들처럼 불교가 번성한 곳이었
 
고,개경과 서경처럼 궁궐을 둔 곳이었습니다.
 
풍수지리로 인해서 중요하게 취급되었고,고려시대에 이미 여러 차례 천도
 
를 계획한 곳으로 이미 고려의 상당한 인프라가 구축된 상황에서 이후 조
 
선시대와서 정부차원의 더욱 계획화되고 정책적으로 규모면에서 확장적
 
시각보다는 효율적 관리로 일부 축소되어  더욱 발전한 도시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hankookhistory/5Dli/340?docid=497462241&q=%C1%B6%BC%B1+%B5%B5%BD%C3%C0%C7+%C6%F7%BD%BA%BF%CD+%BF%A1%B5%B5%BD%C3%B4%EB
     
비좀와라 16-10-26 22:22
   
조선의 기생이 문학작품 만을 외운것이 아니죠.

기생은 문학이나 기타 재주를 파는 홍루와 몸을 파는 청루로 나뉩니다.

조선은 둘 다 있었습니다.

여기서 일장기가 일본의 국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일본은 청 또는 동의 국가로 몸을 파는 노예의 국가란 말이죠.

반면에 일장기는 몸이 아닌 재주를 파는 전문가 집단을 상징하는 깃발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청루의 전통은 고대 신전의 신녀들은 여행자와 잠을 자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여행자를 의미하는 손(님)과 객족이

신을 의미하였기에 동 서양 모두 신전의 신녀들은 여행자와 잠을 자는 것이 일종의 풍습 이었습니다.

이런 풍습이 청루의 전통으로 내려 오는 것이죠.

본래 창녀 / 유녀 등은 신전의 신녀들을 말하였던 것 이었습니다.

기록에 일본녀들의 조선의 남자와 잠을 자고 아이를 배개 하였다는 말은 조선의 남자가 신족이라는 말이고

잠을 잔 일본녀 등은 신녀라는 이야기죠.

이것은 몽골의 풍습에서도 보이는 것이 양을 친 양치기 등이 어느 부락을 지나면 그 부락의 여성과 동침하는 풍습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럼 고려 왕과 결혼하는 몽골 공주의 어떤 의미를 지니었고 고려 왕은 어떤 의미를 지녔는 지를 알 수 있지요.

또 기록에 야인(여진)의 여인들은 조선의 관리를 유혹하여 이들과 동침하여 신분상승을 노렸다라는 기록도 있지요.

거기다가 고려 왕건은 신라의 낙랑공주와 결혼 합니다. 도대체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 까요?

그리고 신라의 낙랑공주의 낙랑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요? 그 낙랑이 한나라의 낙랑이라는 것인가요? 아님 누가

박박 우기는 지금의 평양이라는 것인가요?

한국의 역사는 누군가의 어떤 집단들이 워낙 변조 해대서 알 수가 없는 UFO 같은 역사가 되버렸단 말이죠.

누구도 확인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죠.
          
Silli 16-10-27 05:26
   
님말이 UFO같네요 한국말인데 한국말같지가 않네
          
촐라롱콘 16-10-27 13:45
   
신라 낙랑공주의 낙랑이라는 명칭에 큰 의미는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중국에서는 물론 당시의 역대 한반도 왕조들조차 그보다 이전 시기에는 한반도 지역 대부분을

낙랑이 관할했던 구역으로 인식했기에....... 낙랑공주의 아버지 경순왕도 태조왕건에 의해 낙랑군왕으로 책봉되지요!

삼국~통일신라시대에는 신라의 역대 국왕들이 당나라에 의해 낙랑군왕으로 봉해졌습니다.

백제의 국왕들은 대방군왕으로 주로 봉해졌구요.....

고구려의 보장왕은 당나라에 의해 조선군왕으로 봉해졌습니다.

심지어 선비족 모용황조차도 조선공으로 봉해지기도 했습니다.

선비족이 흥기한 요서지역이 예전에는 고조선의 판도였기에.......

고구려도 마찬가지 경우구요~~~
유베르디아 16-10-26 22:12
   
나 역시 일본의 잔혹한 과거의 짓거리들과 반성하지 못하는 현재의 모습을 보며 분노하고 괴로워하지만
다음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함을 잊지 않고 있다.

콩 한쪽도 서로 나누어 먹듯이 좋은 것을 서로 나누어 쓰고 인색해하지 않으며 서로를 위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살기 좋아질 것이며 일본이라 하여 무조건 깔보거나 그들의 궁색했던 시절을 비웃고 얕잡아 본다면 그 또한 패권주의를 추구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아 고쳐야 한다.아주 오래전부터 이러한 말이 있어왔다.

'하늘은 어떤사람을 부자로 만들어 다른사람들을 가난으로부터 돕게 만들고 하늘은 어떤사람을 영리하고 똑똑하게 만들어 다른사람을 깨우치게 만든다'
이러한 말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는가

영리한 사람은 못배우고 무식한 사람을 깔보고 비웃으며 이용하고
돈이 많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깔보고 비웃고 이용하며
힘이 센 사람은 힘이 약한 사람을 깔보고 얕본다.

지금 글을 쓰는 나도 본문의 글쓴이와 다른이들을 나무라면서 거만해하고 얕보지는 않는지 나의 마음을 돌아본다.
언제나 남의 탓을 하기전에 자신을 돌아볼줄 안다면 결국 세상살기 편한 법이다.

아무쪼록 이땅의 젊은이들이 건강하고 밝은 마음으로 세상의 기둥이 되길 바라며..

                                                                  -화곡초등학교 5학년 3반 뒤에서 3번째가..
굿잡스 16-10-26 22:19
   
참고로 우리나라의 도시 축조술이나 역량은 이미 고구려가 실질적으로 5세기 동북아 최강대국의 반열에 오르면서 평양일대에 조성한 당대 동아시아 최대급의 장안성(일명 평양성:전체 길이는

약 23㎞에 성안의 넓이는 자그만치 1,185만㎡. 그중 내성은 130만㎡, 중성은 300만㎡, 외성은 730만㎡, 북성 25만㎡ 그주변에 우리나라 도시 성곽의 특징인 산성 셋트로 대성산성이나 고방산성등도 규모가 상당함)등에서 보이듯

계획된 도시 설계와 규모는 당대 유럽의 최대 도시인 로마를 상회합니다.(삼국시대 이미 우리 고구려는 이런 장안성뿐 아니라 국내성, 한성(10.5킬로), 오골성(둘레 16킬로), 부여성,요동성, 신성, 책성등 상당한 크기의 다중 수도체계와

대형 도시형성곽을 사방으로 구축했고 신라 역시 서라벌, 백제는 한성 수도 이후 계획도시인 사비성과 해양대국답게 열도에 아스카도시를 구축하며 담로로 다스리고 있었고 이후 남북국 시대의 신라는 과장없는 100만의 거대 도시

및 남국에 5소경을 운영, 북국의 발해 역시도 로마 이상의 고구려 5부의 도시 영향을 받은 거대 5경체재를 구축하며 중세로 오면서 고려는 이런 기존의 100만의 거대 서라벌인 동경을 전쟁없이 흡수하고 50만 이상의 개경(개성)을 수도로

서경(평양: 도시 시가지 면적 11.85㎢)을 동급으로 남경(지금의 서울 조선시대 한양)의 4경 체재의 거대 도시를 운영하던 나라였군요. 고려시대의 북국의 패자가된 금나라 역시도 신라계 황제와 발해인 연합으로

금나라가 북송을 멸망시키고 세운 중도 도시 역시 우리 고구려인의 작품.

조선시대 한양이 당대에 뚝딱 만들어진게 전혀 아니군요. 이미 삼한 이후 백제 시대 한성부터 고려 남경으로 이후 조선 전기 고려 호족 세력들의 약화를 위해 기존 남경을 활용해서 조선의 중심 수도가 되었지만

이런 조선 전기의 도시의 모습은 당연히 고려시대 풍의 다층 구조와 도시 역량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보니 명나라 기록등에서도 저런 내용들이 나오는 것이죠.

임진과 병자 호란등 대전을 거치고 소빙기를 맞이하면서 온돌등이 대중화 되면서 이런 조선 전기의 도시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그기에 사진에서 나오는 저 모습도

조선 전성기 모습이 전혀 아니라 안동김씨의 수십년 폐단 이후 어느 정도 복구되는 상황에 저정도였다는 말이죠. 그럼에도 구한만 선교사등 조왜간의 도시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보면

더욱 알만하죠.


1878년 일본을 여행한  gustafv kry torner가 남긴 동양기행기 에서 당시 일본인의 여러모습중 인상깊은 부분과 특히 수도 도쿄에 대한 설명.




[실제로 가면 기대한 것만큼 실망하게 된다  도쿄는 큰마을 정도의 느낌이다 그리고 도시에 널려있는 빈약한 목조주택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왕의 거처도 궁전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성벽같은 모습에 매우 초라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심각한 모습은 바로 통치자의 행태이다 바로 민족의 낮은 수준을 그대로 방치하고 근절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의 발전은 가장 핵심 공중도덕에 있다 하지만 일본인에게

공중도적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옷을 벗고 다니고 아무데서나 소변과 대변행위를 한다 한 마디로 공중도덕 완벽히 결여되어 있는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인의 사고방식은 유럽인과 너무 차이가 난다 일본은 방문하는 사람들은 유럽과는 일거수 일투족이 전혀 다른 모습들을 늘상 목격하게 될것이다 어떤 도시든

마을이든 목욕탕이 있고 그곳에서는 어김없이 남녀가 한곳에서 목욕을 하는 모습을 발견할수 있다 그리고 특히 일본의 시골은 모두가 전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너무나 비참한 모습들이다]




반대로 한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대명사로 알려진 이자벨라의 조선의 수도 즉 한양에 대한 구절

[지금 서울은 어느나라의 수도 에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며 자신만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근대 이 전통문화에서는 세계 최고의 수준을 간직하고 있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372498&sca=&sfl=mb_id%2C1&stx=mooha1870
굿잡스 16-10-26 22:29
   
그리고 이런 삼국시대 우리 고구려등의 거대 발달한 도시 축조역량은 다름 아닌 고조선과 이전 선대에 기반한 것이군요.

요하 대릉하 일대의 조양 북쪽에는 흥룡와 문화(기원전 6000년~5200년)가 나오는데 이미 이곳은 우리 고조선문화의 색채가 농후하거나 선대 문화로

서토와 구분되는 빗살무늬토기부터 고조선의 대표적 동검인 비파형 동검의 모티브가 되는 정교한 옥기에 심지어 이미 이때 해자까지

두르고 온돌 아궁이에 신석기 시대 상당한 밀집 취락의 정교한 도시형의 발달한 촌락이 이미 나오고 있는 상태군요.


기원전 20세기 하가점 하층 문화의 삼좌점 고구려 치의 원형 석성으

로 보이는 방어형 성곽.(사진)

http://daily.hankooki.com/lpage/culture/201410/dh20141025100423138640.htm
굿잡스 16-10-26 22:48
   
그리고 아래 보니 어떤 분이 한일간의 고대 국력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일본은 소국 (小國)이였다는 근거로

<1811년 늪과 뻘이었던 간토지역을 개간하여 평야를 만들고.

메이지 유신이후 홋카이도를 경작>(오키나와 강제 병합등)에 토지 관련 헥타르를 가지고 비교를 하시는데

이 부분 뿐 아니라 실제 이런 고조선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중세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도시 규모나 역량만 봐도

왜의 도시 역량은 에도시대 100만 어쩌고 하기 이전에는 협소한 규모군요.(물론 에도시대의 잽 극우 자랑질과는 달리 실상을

보면 나머지 2할 땅에 인구의 60만명 이상이 몰려 살든 극빈부차, 극빈의 생활상. 조선은 도리어 향촌에 가면 왜에서 볼 수 없는

기와 집성촌이 나오고 전국 향교등 교육 인프라도 상당히 잘 갖춘 나라에 읍성도 일반 양반이 아니라 상당수 서민들이 누리고 살든 곳임.

윗 조왜간 도시 비교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메이지시대까지 왜의 일반 서민 주거는 수혈식 즉 아직도 땅파고 들어간 집에서 살 정도로

생활 수준이 열악했군요)


당연히 지금이나 고대나 이런 거대 도시를 구축할 역량에는 국력 뿐 아니라 경제력의 부가 가치도 더욱 높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대지값의 거래 자체가

높아지죠) 고대나 지금이나 이런 도시라는 건 소비성이기에 이런 거대 도시인구를 소비하기 위한 역량은 그만큼 그 나라 국력의 또다른 지표가 되기에

중요한 또다른 증표중 하나군요.

그리고 백제가 분국으로 세운 열도의 아스카 문명은 다름 아닌 불교 건축물들입니다. 이후 백제가 망하고 일부 우리 도래인들에 의해 우리나라 할때 나라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 본격적 도성이 출현하지만 이도 경제력이 안되어 판개궁 즉 궁성도 기와가 아닌 판자 형태가 주류를 이루고 교토의 도시 규모 역시 역대로 협소했군요)
후아앙 16-10-27 00:00
   
바닥에 뭘깔고있었을까요... 너무 궁금하네... 맨바닥은 아니었을건데..
 
 
Total 19,97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5653
1322 [중국] 조선왕=청나라 친왕과 동급레벨? (9) mymiky 11-19 6550
1321 [중국] [펌] 조선족 (26) 무명씨9 08-20 6552
1320 [기타] 외노자들의 도가니(성폭력)은 왜 보도안하나 (14) 인디고 10-26 6553
1319 [기타] 中에 뺏긴 거대한 우리 영토…‘역사적 자긍심’이 … (4) 두부국 03-25 6554
1318 [기타] 조선의 무역량과 일본의 은수출량의 비교 (53) 자하드경제 01-02 6555
1317 [한국사] 조선(朝鮮)이 바로 천축국(天竺國)이었는가? (펌) (6) 비좀와라 04-19 6557
1316 일본이 한국인에게 저지른 대표적 생체실험 10가지 (6) 해밀 10-25 6559
1315 [대만] 여러분 이사실을 보고 놀라지 마세요. (27) Poseidon 03-19 6559
1314 [기타] 마치 조선이 대단히 민본주의적인 나라 여성인권을 … (131) 호호호호 01-31 6561
1313 [한국사] 조선의 유니크한 갑옷 두정갑 (3) 전쟁망치 02-19 6562
1312 [북한] 북한에 대북비난전단 40만장 살포했다네여 - 탈북자… (2) 엥가 11-27 6563
1311 [기타]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을 "조선인, 삼한인, 발해인"이… (20) 예맥사냥꾼 11-09 6563
1310 [통일] 한반도에도 원숭이가 살았다? (6) 달다냥 10-16 6566
1309 [일본] 일본인이 느낀 한국인의 '나눔' (10) doysglmetp 07-14 6568
1308 비싼 것 점 부시지 ㅋㅋ (2) 지성♥태희 11-19 6569
1307 [일본] 일본 빚 다 갚을수는 있어요? (16) ㅇㅇ 01-30 6571
1306 [중국] 19금) 영화 투우 (9) 벽괴수 11-07 6574
1305 [일본] 왜인의 정체와 기원을 탐구 (日本人は東南アジア人) (24) 예맥 07-22 6575
1304 [한국사] 한국과 몽골, 그 천년의 비밀을 찾아서 - 김운회 동양… (13) 비좀와라 11-09 6578
1303 한국 한국인의 뿌리는 신라다 (9) 정통 01-25 6579
1302 [중국] "중국 대세론은 환상… 일본처럼 위기 겪을 것" (13) States 04-28 6588
1301 [중국] 후금의 최초 황제는 조선인이었다.. (39) 심청이 07-19 6589
1300 [한국사] 터키보다 카자흐스탄이 한국과 직접적인 형제국.. (11) 알밥청소 01-27 6589
1299 백제 근초고왕의 왜국에 하사한 칠지도 (4) 근초고광123 09-04 6591
1298 공자와 칭기스칸 조조는 사실 모두 한국인입니다. (17) 공자 12-28 6592
1297 [기타] 고구려 신라 공성무기들 (3) 대은하제국 12-18 6592
1296 [일본] 반등중인 일본가계소득 (96) 애국주의 08-01 6594
 <  691  692  693  694  695  696  697  698  699  7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