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서양세력이 출몰하게 되고
위기의식이 과잉이 되어서
'일본'이라고 하는 터전이 중요해지고
양이론이 활발해지고
쇼군과 일왕사이의 최종적인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라는 그들 스스로의 자문에서 시작합니다.
그러한 이유는
서양에의 문호개방이 막부정부의 독자적인 권한인가
일왕이라고 하는 일본세계의 대변자가 행사하여할 명분인가를 놓고
원래는 정치적 참여권이 없었던 사무라이 사회에서 '국가대사'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그 시작은 다들 알다시피 조선등에서 건너온 유학이 이유였고
명치유신 자체가 근대화로 나아간것처럼 보여도
원래 기획은 유교식 중앙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라는것이 목적이었으니까요.
명치유신하면 자주 나오는 '존왕양이'의 키워드는
대륙역사에서 그들이 관념적으로 설정했던 남만,북적,서융,동이라는 오랑캐의 침입을 막고
주왕실을 보호하며 높인다라는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의 일본인들은 일본이라고 하는 틀에 놓고서 서양세력을 이적으로 놓고
실권을 쥐고 있으나 그 존재이유가 불투명한 정이대장군과 일왕의 관계에 관해서
일왕으로의 모든 권력이 복귀하는 유교식 근대국가로의 건설을 부르짖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일본이라는 단일한 국가는 명치유신부터 만들어진 것이고
그 이전에는 각각이 하나의 국가였던 다이묘들과 좀 더 큰 다이묘(쇼군)들의 집합입니다.
어쨌거나 이런 각각의 국가들 위에 황제권으로서 '일왕'이 존재하고 있고
일본적 세계를 지지하고 있다라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는건 18~19세기 와서입니다.
그럼 그 이전부터 이미 중앙국가화된 조선과 명치유신 이후에야 완성된 일본 사이에서 단일한 국가를 설정해놓고 국력차이를 비교하는 것이 타당한 질문일까는 의문을 제시할 수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