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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0-01 13:30
[한국사] 조선 선비가 본 18세기 일본
 글쓴이 : 흑요석
조회 : 5,739  

일본인들은 전통적으로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한다. 이는 의로움을 숭상하는 것도 아니고 타고난 성질이 그런 것도 아니다. 일본에선 중세 이후 전쟁이 밥 먹듯이 일어났고 각 주의 태수들은 군사를 육성하는 데 혈안이 돼 평민들의 고혈을 짜냈다. 군인들은 한 해 쌀 25석의 급여를 받았고 병역 이외 다른 부담을 없었다. 백성은 군인이 되지 않고는 살길이 없다. 일단 군인이 되고 나면 죽고 사는 것이 모두 태수의 손에 달려 있게 되고 한번 겁쟁이라고 소문이 나면 사회에서 매장된다. 얼굴에 칼이나 창에 맞은 상처가 있으면 용감한 사나이라 하여 녹봉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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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고베시립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의 문장가이자 1719년(숙종 45년) 조선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시문과 학문 토론을 담당하던 관리)으로 일본을 다녀온 신유한은 일본에서의 경험을 정리한 '해유록(海遊錄)'에서 "일본인이 싸움에서 무모하게 덤벼드는 것은 자기 몸 하나 편안해지기 위해서일 뿐"이라고 기술했다. 책은 지리, 인습, 풍속, 제도 등에 대해 저자가 일본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기술한 견문록이며 문학성이 뛰어나 당대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행문학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18세기 일본에는 무사, 농민, 공인(工人), 상인 등 네 종류의 백성이 있었다. 무사는 태수에게만 복종하면 돼 가장 편하다. 그 외 승려, 의사, 유학자가 있는데 이 중 유학자의 신분이 가장 낮다. 과거시험을 치러 관직에 나갈 수 없으며 각 주에서 서류를 만드는 일을 하거나 무사에게 의탁해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학문과 예술에 대한 갈증은 높았다. 조선통신사에게는 글이나 그림 청탁이 쇄도했다. 신유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책에서 "날마다 시를 써달라고 조르는 일본인들에게 시달려 우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견딜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요청은 심지어 새벽까지 계속됐다. 그는 답답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일본인 통역관과 호위병을 대동하고 밖을 거닐었다. 

 저자에게 일본의 음란한 풍속은 충격적이었다. 신유한은 "사창가의 창녀들이 화장해서 용모를 예쁘게 꾸미고 외설스럽게 구는 형태를 알게 되었는데 너무 저질스러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고 개탄했다. 남창(男娼) 풍조에 대해선 아연실색한다. "열서너 살에서 스물여덟 살까지의 미남자들이 향기로운 기름을 머리에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분을 바르고 알록달록 무늬를 수놓은 옷을 입고 있으면 아름다운 꽃 한 송이 같았다. 왕족과 귀족은 물론 부유한 상인에 이르기까지 이런 남창에게 재물을 쏟아붓지 않는 자가 없어 밤낮으로 반드시 함께하며 남창의 애인을 질투하여 죽이기까지 했다." 신유한은 일본 유곽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지만 외국 풍속을 살펴 취할 것은 취하고 경계할 것은 경계해야 한다며 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여러 편의 시를 지어 함께 실었다. 그중 한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쩌면 이리도 적나라할까. 낭군이 품고 온 그림 펼치니, 부끄럼 모르는 낭군에게 감동해 그림과 비교하며 즐긴답니다." 

 기술을 숭상하는 문화는 높게 평가했다. 그는 "집과 집을 짓는 재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규격화돼 있으며 집을 지을 때는 복도와 부엌, 욕실 등을 한 지붕에 배치하며 건물 주위는 신기하게 생긴 바위와 대나무와 이름난 꽃들이 에워싸고 있다. 여자들이 짜는 비단은 매우 정밀하고 가벼우며 화초 등도 그냥 두는 법이 없이 온갖 모양으로 다듬는다"고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읍으로 삼았던 오사카를 보고선 천하의 으뜸 도시라고 치켜세웠다. 곧게 난 길이 잘 닦여 있고 길에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다리는 200여 개, 절은 300여 개나 되며 번주나 가신의 좋은 집들은 그 두 배가 됐다. 평민 중에서도 농업, 공업, 상업에 종사해 부자가 된 집이 수천, 수만이나 됐다. 

 오사카는 또한 책의 도시였다. 신유한은 "천하의 장관이라 할 만하다"고 부러워했다. 우리나라 명현의 문집 가운데 일본 사람들이 가장 아끼는 것은 퇴계집(退溪集)이었다. 집집마다 읽고 외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도산서원이 어느 군에 속해 있는지 물었고 퇴계의 후손이 지금 몇 사람이나 있으며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퇴계가 평소에 좋아한 게 무엇인지 등등 질문이 지나치게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책은 밝히고 있다. 학자들은 최치원, 설총으로부터 김장생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문묘에 모셔진 선현의 이름을 순서대로 정확히 외우고 있었으며 우리나라 학자들의 문장과 자취도 막힘이 없었다. 

 국가 기밀에 속하는 서적도 버젓이 일본에서 유통되고 있었다. 김성일의 해사록, 유성룡의 징비록, 강항의 간양록 등의 책들이다. 통역관들이 밀무역으로 일본에 넘긴 것으로 추측됐다. 신유한은 "우리나라의 기강이 엄하지 못한 때문"이라며 "적을 정탐하여 적에게 일러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탄식했다. 

 음식도 상세하게 적었다. 대부분의 일본 음식을 맛있다고 서술한다. 하지만 고래회만은 이상했다. 일본인들은 고래회를 가장 귀중하게 여겨 비싼 값으로 사들여 손님을 접대했다. 고래는 버리는 게 없어 큰 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자신은 물론 후손까지 부유해질 수 있었다. 신유한은 "그러나 먹어 보니 부드럽고 미끄러우며 기름지기만 할 뿐 별다른 맛은 없었다"고 시큰둥했다.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은 복식제도에서 유래했다. 길에서 술을 파는 여자이건 곡식을 거두는 사람이건 반드시 두 무릎을 땅에 대고 옷을 여미며 앉는다. 옷이 짧고 바지가 없어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남자든 여자든 은밀한 곳을 가릴 수 없게 된다. 부득이하게 꿇어 앉는 법도가 생겨났고 그것이 습관화되어 버린 것이다. 

 중세 이후 일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했지만 그 위상은 더욱 낮아져 일본인들은 조선통신사들에게 일왕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조차 극도로 경계했다. 조선 국왕과 일본 왕 사이에 국서 교환이 이뤄져야 하지만 쇼군이 이를 대신했다. 첫째아들을 제외한 일왕의 모든 아들은 승려가 돼 칭호를 법친왕(法親王)이라 했으며 딸도 비구니가 되게 했다. 부마나 공주라는 명칭도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본인들은 한글에 비상한 관심을 나타냈다. 나고야에서 한글을 보여달라고 말하면서 어느 시대에 누가 창제했는지 물었다. 한글을 써내려가자 그들은 "글자의 생김새가 별이나 초목 같다. 용마의 등에 그려진 그림이나 거북이 등에 쓰인 글의 형상을 취해 만든 것이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신라가 일본 본토를 공격했다는 기록도 책에 등장한다. 한반도에서 일본 히로시마 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시모노세키에는 백마총(白馬塚)이 있었다. 신라왕이 장수를 보내 일본을 공격하자 일본인들이 이에 굴복해 강화를 맺기를 청했다. 신라의 장수는 강화의 표시로 백마를 죽여 무덤을 만들었다. 일본 풍속에는 무덤의 봉분을 만들지 않는데 백마총은 봉분이 있는 것으로 미뤄 신라 사람이 쌓은 게 틀림없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땅이 저절로 부풀어오른 것이라고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수많은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갔는데 한 마을 전체가 일본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교토 인근 요도강(淀江) 기슭에는 진도도(晉州島)라는 마을이 있었으며 이곳에는 진주 출신 포로들이 모여 살았다. 임진왜란이 터진 지 100년도 훨씬 지난 신유한의 방문 당시까지도 진주 출신들이 거주했으며 다른 지역 출신은 한 명도 없었다. 신유한은 "그때의 일을 생각해보니 모골이 송연해진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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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한 일행을 안내했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초상. 조선과의 실무교섭을 담당했던 외교관이다.

신유한 일행과 헤어질 때 그들의 안내를 맡았던 아메노모로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라는 일본인이 눈물을 흘렸다. 신유한은 그러나 책 말미에 "겉으로 문인인 체하지만 마음속에 창과 칼을 품고 있어 권력을 잡았다면 반드시 우리나라에 해를 끼칠 인물"이라고 했다. 

▶신유한(1681~1752)=경상도 밀양에서 출생했으며 1713년(숙종 39년) 33세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김창흡(1653~1722), 정선(1676~1759) 등 당대 명사들과 친분을 쌓았지만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연천 현감, 평해군수 등 지방관직을 전전해야만 했다. 빼어난 시문을 많이 남겼으며 특히 해유록은 일본에 관심을 두거나 통신사로 일본에 간 이들에게는 필독서였다. 

출처: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6&no=686716


18세기 당시 신유한이 본 일본의 특징: 


1. 학문과 예술의 대한 집념이 강함. 조선통신사에게 글이나 그림 청탁이 쇄도함. 매일 밤낮으로 시를 써달라고 조르는 일본인들에게 시달려 우울하고 답답할 정도. 심지어 새벽에도 조름. 이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도 일본은 조선을 문화적으로 배울 점이 많은 나라라고 인식한 듯. 


2. 일본의 음란한 풍속은 충격적. 사창가의 창녀들의 형태가 너무 저질스러워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 남창 풍조에 대해선 아연실색함. 안 그래도 성에 대해 엄청 보수적이었던 조선 선비에겐 엄청난 충격이었을 듯. 
성 풍속이 음란한 건 일본의 전통이라고 볼 수 있을 듯. 


3. 기술을 숭상하는 문화는 높이 평가할 만 함. 집과 집을 짓는 재료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규격화돼 있고 건물을 각종 바위, 나무 그리고 꽃들로 꾸밈. 이로 보아 일본인들이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잘 꾸미는 건 종특인 듯. 


3. 오사카는 꽤 번듯한 도시였음. 오사카의 길은 잘 닦여 있고 길에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함. 다리는 200여 개, 절은 300여 개나 되며 번주나 가신의 좋은 집들은 그 두 배가 됨. 평민 중에서도 부자가 된 집이 수천, 수만. 


4. 책을 많이 읽음. 조선의 명헌의 문집 가운데 일본인들이 가장 아끼는 것은 퇴계집(退溪集). 집집마다 읽고 외우고 있었음. 사람들은 도산서원이 어느 군에 속해 있는지 물었고 퇴계의 후손이 지금 몇 사람이나 있으며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함. 퇴계가 평소에 좋아한 게 무엇인지 등등 사소한 것부터 질문이 너무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할 정도. 심지어 조선의 문묘에 모셔진 선현의 이름을 순서대로 정확히 외우고 있었으며 조선 학자들의 문장과 자취도 막힘이 없음. 


5. 국가(조선) 기밀에 속하는 서적이 버젓이 일본에서 유통되고 있음. 해사록, 징비록, 간양록 등. 신유한은 "우리나라의 기강이 엄하지 못 한 때문"이라며 "적을 정탐하여 적에게 일러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탄식함.


6. 일본인들은 한글에 비상한 관심을 가짐. 나고야에서 한글을 보여달라고 말하면서 어느 시대에 누가 창제했는지 물음. 한글을 써 내려가자 그들이 말하길 "글자의 생김새가 별이나 초목 같다. 용마의 등에 그려진 그림이나 거북이 등에 쓰인 글의 형상을 취해 만든 것이 분명하다"라고 평가했다.




결론: 학문, 예술엔 관심이 엄청나서 조선보다 발전하고 있는 게 눈에 띄었지만 여전히 문화적으론 그 수준이 만족스럽지 못해 갈급함이 컸고 새벽까지 조선통신사들을 괴롭혀가면서도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매달림. 사람들이 책을 엄청 읽음. 성 풍속은 굉장히 문란하였고 일본에선 그저 당연한 것이었음. 당시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것들이 버젓이 일본에 돌아다니고 있음.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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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아몬드 16-10-01 15:44
   
학문, 예술엔 관심이 엄청나서 조선보다 발전하고 있는 게 눈에 띄었지만 ?

읽어봤는데 그런 문장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독서열은 조선도 굉장했어요.

프랑스가 강화도 침입했을 때도 프랑스 병사의 수기에도 일반 백성들의 집에 책은 여러권이 반드시 있었다고 해서 열등감이 생겼다고 했지요
     
흑요석 16-10-01 16:46
   
제가 글을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한 게 아니잖아요 ㅋㅋ

건축에 대한 언급과 여러가지 감탄한 게 있기에 조선보다 발전하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고 한 겁니다. 덧붙여 여전히 조선보다 문화는 떨어진다고 했고요.
          
꼬마러브 16-10-01 19:45
   
원래 문학이라는 게 그런 경향이 있어요.  일종의 과장?
          
국산아몬드 16-10-02 13:19
   
신유한은 그냥 집이 규격화 되어 있다고 한겁니다.

신유한은 단지 "집을 지을 때는 집과 집을 짓는 재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규격화돼 있으며 집을 지을 때는 복도와 부엌, 욕실 등을 한 지붕에 배치하며"라고 했습니다.
일본 건축에 감탄했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한지붕에 복도, 부엌,욕실이 있으면  건축기술이 발달한 건가요? 오히려 위생문제, 프라이버시 침해가 막대할 것 같은데

집짓는 기술을 높이 평가했다는 말은 신유한의 책을 소개한 저자가 한 말이죠

그리고 그 구절을 보고 님은 일본건축이 조선건축보다 발달했다고 더 과장되게 말한 거고요

그리고 규격화에 대해 언급한 게 두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죠
하나는 "조선는 하지 않는 규격화를 하는구나?"의미일 수 있지만
"조선만 할 줄 알았는데 일본도 규격화를 할 수 있구나"란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단지 규격화했다는 말로  일본건축이 조선건축보다 발달했다고 단정짓는 건 경솔한 주장이란 겁니다
               
흑요석 16-10-02 13:41
   
이분 진짜 하나하나 태클 장난 아닌 듯.

글 요약 부분에 내가 이렇게 적음

'3. 기술을 숭상하는 문화는 높이 평가할 만 함. 집과 집을 짓는 재료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규격화돼 있고 건물을 각종 바위, 나무 그리고 꽃들로 꾸밈. 이로 보아 일본인들이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잘 꾸미는 건 종특인 듯. '

그리고 마지막 결론에는 이렇게 적음

'건축에 대한 언급과 여러가지 감탄한 게 있기에 조선보다 발전하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고 한 겁니다. 덧붙여 여전히 조선보다 문화는 떨어진다고 했고요.'

내가 언제 일본 건축이 조선 건축보다 발달했다고 했음?

건축에 대한 언급과, 즉 건축 언급을 했다는 거임. 그리고 여러가지 감탄한 게 있기에 조선보다 여러모로 발전하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고 했지

내가 언제 조선 건축이 일본 건축보다 떨어진다고 했음? ㅡㅡ

그리고 님이 첫 댓글에, "독서열은 조선도 굉장했어요" 하셨는데

아니 누가 뭐래요? ㅡㅡ 신유한이 일본에 대해 묘사한 걸 얘기하는데 조선 독서열이 왜 나옴? 누가 조선인들은 책 많이 안 읽는다고했나? 신유한이 일본인들 책 많이 읽었대잖아요 ㅋㅋ 그런다고 조선인은 책 많이 안 읽는 게 되는 거임?

왜 혼자 난리임 ㅡㅡ
                    
북창 16-10-02 15:04
   
조선보다 발전하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이 부분이 거슬리는 겁니다.
납득이 안가네요 저도...대체 어느 부분이 조선보다 발전하고 있다는 건지요?
납득 안가는 말을 써놓으시고 뭐가 그리 불만이신지?
                    
국산아몬드 16-10-02 18:07
   
당신이 하는 수법이 인조이 재팬에서 일본인과 많이 논쟁하면서 보던
일본인들이 많이 하고 있는 수법이죠
은근 슬쩍 왜곡되는 작은 구절을 집어넣고 누가 문제제기하면 사소한 일에 목숨건다고 화내는 것

신유한의 구절중에 "예술엔 관심이 엄청나서 조선보다 발전하고 있는 게 눈에 띄었지만 "
이란 내용은 오해의 여지가 있는 글입니다

누군가 문제제기 하지 않으면 당신 글이 이 게시판에 영원히 남을 텐데 많은 사람이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노스 16-10-01 16:17
   
일본에는 어느 위대한 외계인이 가르쳐줬다는 찬란한 신대문자가 있었을텐데 본글에 나오는대로 왜 일본인들이 조선의 한글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는지 의아하네요. 우리 민족이 외계인인줄은 몰랐습니다...

본글에 나온대로 이 시기 일본인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 상당히 높아 일본의 유학이 상당히 발전을 거듭했었다고 하더군요. 전성기 조선에 비할바는 아니었겠지만...
통신사나 일본에 정기적으로 보내며 일본에 별 관심이 없던 조선이 뒤늦게 일본의 유학에 대해 정보를 캐고자 했는데, 일본내의 유학 학풍이 마치 유행처럼 적극적으로 변해서 조정에 보고했을 당시엔 이미 일본에선 유행이 지난 학풍이었다고...
그만큼 조선후기 정보력이 늦었다고 해야할지 아님 일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컸다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네요.
참고로 왜란시 조선에도 용맹한 장군들과 충의열사들이 있었다며 근세 일본 대중들이 조선에 대한 인식을 바꾼 이유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 유출되버린 징비록에 대한 내용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18세기 일본의 이런 학문적 열정이 19세기에도 이어져 네덜란드 학문인 난학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고 하지요.
페리제독의 일본 개항후, 미국은 일본이 흔히 보는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서양 의학이나 산업혁명 이후의 초기 내연기관의 기본적인 개념을 일본이 이해하고 있어서 놀라워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일본이 페리제독의 개항 이후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급속적으로 발달했다고 믿지만, 17세기초부터 지속되어온 나가사키 지역의 개항처럼 제한적인 개항으로나마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에 대한 거부감이 동시대 타 아시아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덜했으므로, 훗날 페리 제독의 전면개항시 근대화에 대한 충격파가 덜했다고 봅니다. 근대화 예방주사를 미리 맞았다고 해야 할까요.
불편한 얘기지만 구한말 우리는 서구 문물과 근대적 사고방식면에서 일본에 비해 고작 몇십년만 뒤졌었다고 단정하기는 개인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병자호란후 청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한 인조에 비해 그 아들인 소현세자는 청국 문물은 물론 청국에 들어와있던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적극적이었다고 하니, 소현세자가 요절하지 않고(인조에 의한 독살설 유력) 순리대로 왕위를 이었다면 조선의 역사가 패전을 딛고 조기에 다시 한번 긍정적으로 변화할수 있었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마치 극단적인 반공이념처럼 청에 대한 북벌이라는 이념에 사로잡힌채, 망해버린 명국을 그리워하지 않고)

외부세계의 정보와 지식에 대한 끝없는 욕구가 주변 지역에 대한 침략과 약탈을 재료로 삼아 아시아 변방의 일본을 급성장 시켰는데 21세기에 들어와 한류도 싫다, 세계속의 사랑받는 일본이라는 망상을 외치며 쇄국으로 나아가는 현 일본의 상황을 좋아해야 할지, 중화 최고를 외치던 우리 조선말기와 비슷해서 씁슬하다고 해야할지...
역시 역사는 돌고 도나 봅니다(21세기는 한국의 세기야~)
그래도 비록 이렇게 현실감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으나 근대 어느 서구 학자의 말대로 '전쟁에 중독이 된 일본민족' 에 대한 경계심은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타샤 16-10-02 03:46
   
그 높은 문화 라는게...
오늘날 우리가 여기 저기서 까대는 유교 아닌가?
유교 때문에 망했느니... 하면서 유교로 자긍심을 갖다니.. 어불 성설.

그리고 당시 선비가 본 오사카만 봐도, 조선에 비해 일본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만한데...
그걸 미개하다고 보는 사람은 뭔지...


아 미국이 미개하지.. 빌딩만 높지 말이야... 하늘천 따지도 모르고...
퇴계 선생을 알기나 하나?
     
그노스 16-10-02 07:23
   
전 시각이 좀 다른게 중세 유럽의 기독교 문명이 유럽의 진보를 분명히 저해했지만, 그 정신문명이 찬란하게 꽃피워 그 분야의 학문적인건 물론 그림, 조각 같은 예술품에서도 뛰어난 기술적 성과를 이끌어냈습니다.
요즘 서구에서조차 중세가 암흑시대만은 아니었다며 나름 중세시대를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보이더군요.

유교도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유교의 단점과는 별도로 우리 조상들이 추구했고 꿈꾸고자 했던 정신세계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도 큰 의의가 있다고 사료됩니다.
동방의 주자라고 불렸던 퇴계 이황, 조선 유교문명의 극치 사군자, 서예, 그에 따른 종이, 서적의 발달...

그렇다고 조선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유교에 사대부들이 순응만 했던 것도 아닙니다. 동양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평가받는 정여립은 조선 초중기의 다양한 학문적 풍요로움 속에서 자라나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라며 시대를 앞선 급진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지요. 백성이 임금보다 중요하므로 왕위계승은 혈통이 아니라 자격여부를 먼저 논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혁명적인 세상을 꿈꾸다가 그것이 빌미가 되어 역모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기도 했지만요.

아시다시피 유교의 한계(어차피 종교이고 지나친 사대주의)가 분명히 있었지만 유교는 철학에 더 가까운 개념이고 책속에만 파묻히지 않고 행동하길 추구했던 학문이던만큼, 동시대의 다른 학문들과 비교해 보자면 좀 더 진보적이고 나름의 체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그 문화에 매혹된 것도 나름 이해가 갑니다(저 시대에 상대성 이론이 있었겠습니까)

님께서도 재언급하시듯 조선 선비조차 찬탄할 정도로 당시 오사카가 천하의 으뜸이라며 웅장함과 화려함에서 뛰어났을지 모르나, 화려함을 멀리하고 검소, 질박함을 찬양하며 정신문명을 추구하던 조선과 저 일본이 서로 가는 길이 달랐던 것이지 굳이 우열을 나눌 필요가 있을까 하네요.

'미개하다'는 표현은 저 스스로도 기피하는 단어이지만, 조선이고 근대 일본이고, 서구 국가들이고 간에 서로 앞다투어 균등히(?) 타국에 써오다시피 했던 표현인만큼 그냥 퉁치도록 하지요^^
          
타샤 16-10-02 13:50
   
그걸 왜 일본에만 인정을 못할까요?

동아시아에서는 어찌보면 유교만이 진리 였습니다.
그리하여 유교가 발달한 중국을 숭상하고, 유교가 발달한 조선을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유교가 덜 발달한 일본을 내려 보고...

상대적인 거죠.

일본은 유교가 덜 발달했습니다. 단순하게만 봐도 일본은 중국에서 떨어져 있었으니, 유교는 당연히 덜 발달 합니다. 지리적인 상황 뿐인거에요.

하지만 그 외에는 대단히 발달하죠.
일본이 더 잘 살았고(전국시대 조차도 더 잘 살았습니다. 물론 전국시대니 행복하다고 보기 힘들지도...) 일본이 더 발달한 측면도 있죠.

하지만 그런건 전부 개무시 하죠.
단지 유교적으로 쪼끔 앞서 있다고, 미개하느니 합니다.

그런 잣대를 미국에도 적용시켜보면 됩니다.

유교적으로 조선이 미국에 한참 앞섰죠.
그러니 미국은 미개한 미개국이 아니면 뭡니까? 그런 나라에서 1960년대 달에도 사람을 보냈지만, 그래도 미개하죠. 같은 잣대로 재보면 말입니다.
               
북창 16-10-02 15:07
   
일본이 더 잘살았다니...ㅋㅋ 못배워 처먹어도 이정도면 회생 불가다 진짜 ㅋㅋㅋ
               
그노스 16-10-02 15:14
   
말씀하신대로 상대적이지요.
일본은 조선 통신사마저 자국민들에게 왜곡되게 알려 마치 조선이 일본에 조공왔듯이 과장 선전하지 않았던가요?
심지어 일본은 근대화 이후,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을 계속 무시해오지 않았나요?
후쿠자와 유키치가 왜란 이후의 조선과의 선린우호를 또 다시 배신하고 얼마나 조선을 미개하게 보았는지, 얼마나 또 다시 조선침략을 선동했는지... 님께서는 우리와 일본의 근대사를 다시 한번 읽어보실 필요가 있으실듯 합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이 있는데 조선이 유교적 우월성을 가지고 고작 일본에 미개운운 했다고 해서 님께서 그렇게 분노하실 일 같지는 않네요.
상대방이 미개하다며 우월감을 갖는 것과, 상대방이 미개하다며 우월감을 가지고 침략행위를 하는건 엄연히 차이가 있을텐데요.
그리고 전통적으로 일본도 역시 자국민 중의 일부를 부라쿠민이라고 차별을, 열도 밖 외국민들도 역시 오랑캐 취급했습니다.
굳이 조선의 유교를 언급하시지 않으셔도 이 시대 동아시아는 대부분 타국에 대해 이런 식이었지 않나요.

전 조선이 유교를 유일시 했다는것이 옳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유교 때문에 망했다면서 유교에 왜 자부심을 갖냐는 님의 의문에 양면 모두 바라보고자 다른 시각을 제시한 것입니다.
님께서는 유교를 바탕으로한 조선왕조 오백년 전체를 부정하시고 싶은 뉘앙스이시지만, 모든 국가, 왕조, 사상이 유능에서 시작해 무능으로 끝납니다.
조선이 분명 동아시아에서 선진 문명국일때가 있었으므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자체가 틀린것 같지는 않군요.

님께서 그토록 변호하고자 하시는 일본 스스로의 연구를 보도록 하지요.
'1983년 일본에서 편찬한 ‘과학사기술사사전’에 따르면 1400~1450년까지의 주요 업적으로 한국(Korea)이 29건, 중국(China)이 5건, 일본(Japan)이 0건이며, 동아시아 이외의 전 지역이 28건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제시했다.'
(15세기 중반 조선의 학문적 성과는 분명 독보적이었고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미국의 예를 드시는데 조선의 지정학적인 개념에 미대륙이 언제부터 포함이 되었나요. 존재조차 잘 몰랐던 상대를 계속 예로 들으시며 비교하시는건 적절치 않은것 같습니다.
중세 유럽국가들은 로마나 비잔티움을 제외하곤 자신들의 국가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했나요. 근세 이전엔 여전히 대부분 유럽과 지중해 지역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님의 말씀을 빌려본다면,
'일본은 유교가 덜 발달했습니다. 단순하게만 봐도 일본은 중국에서 떨어져 있었으니, 유교는 당연히 덜 발달 합니다. 지리적인 상황 뿐인거에요.'

님의 이런 논리라면 상대적으로 얘기해서 일본이 미국에 의해 개항하고 조선보다 더 빨리 근대화한건, 일본이 조선보다 미국에 더 가까웠으니까요. 너무나 당연하지요.
(전 농담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ㅋ)

우리 실록에서 보아도 일본의 경우 일부 분야에서 더 발전했다는 정황이 보이긴 하지만, 전국시대에도 일본이 조선보다 더 발전했다는 님의 예는 옳지 않은것 같습니다.
일본 전국시대는 살기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혹자는 다이묘들이 자신들끼리 분쟁을 했을뿐 자국이나 타국의 영민들은 철저히 보호했다고 하나, 분명히 상대국 영민들에 대한 약탈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우에스기 겐신이나 다케다 신겐 같이 영명했다는 다이묘들마저 영민들에 대한 인신매매가 극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백여년에 걸친 내란에 휩싸인 나라가, 오랜 평화시기를 거치며 착실히 인구와 경제력을 성장시킨 조선보다 이 시기에 국력이 앞섰다는건 동의할수 없군요(조선의 군비 준비는 엉망이었지만)
                    
스코티쉬 16-10-04 22:08
   
오랫만에 보는 팩트 폭력이네요. 너무 잔인하신듯 ;ㅅ;
               
구름위하늘 16-10-06 15:13
   
동아시아의 주도적인 철학은 유교도 있지만,
도교는 물론 불교, 선도(무당이나 사당으로 대표되는 만물신)도 있습니다.

오히려 유교는 우리나라에서 더 대접을 받은 편이고,
중국은 도교
일본은 불교와 선도(흔히 신관이나 사당으로 대표)이 더 대접 받음.

신유학이라고 이야기하는 주자학은 불교와 도교의 도전으로 약화된 유교의
새로운 바람이지요.
햄돌 16-10-02 14:03
   
일종의 과장 문학인데 저걸보고 일본이 조선보다 발전했니 어쩌니;;
     
타샤 16-10-02 14:12
   
저건 기행문입니다.
기행문을 과장 해서 쓰나요?
아...

파리가 꼬이는 시장에 간걸 햄돌님 블로그에는 "파리에 갔더니 에펠탑도 별거 아니더라" 라고 적는가 보군요.
이쯤 되야 과장 문학이죠.
          
햄돌 16-10-02 14:20
   
일종의 문학이예요

저 책에 일본에 타고 간 배의 크기가

지금 계산해보면 세월호 크기의 3배로 나옴

말이 됨?

아, 이건 일동장유가네요
     
흑요석 16-10-02 14:15
   
모든 면에서 일본이 조선보다 발전했다고 한 적도 없고

모든 면에서 조선이 일본보다 뛰어나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고.

일본이 발달했던 면, 하지만 문화적으론 여전히 갈급하여 조선통신사들에게 시를 써달라고 하거나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는 등 밤낮으로 매달릴 정도로 조선에게 배울 점이 많은 나라라고 인식한 듯 하다라고 굉장히 객관적으로 요약해서 적었는데

여기서 누가 일방적으로 "일본이 조선보다 발전했다"라고 했나요?
karin123 16-10-02 19:53
   
그냥 쉽게 말해서 두 나라가 발전된 분야가 서로 다를 뿐 아닌가요..
호랭이해 16-10-02 20:35
   
섬나라호빗 16-10-03 18:02
   
건물 찬양하다 좀 지나서 엥? 다른 곳은 왜 이리 비참하지? 라는 글도 있다던데 ㅋ
사랑투 16-10-03 18:21
   
단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변발을 했군요.  옷도 여러색으로 알록달록 하고 갓이나 모자를 쓴 사람도 없네요.

삼국시대 이후 수백년의 교류 단절이 저런 문화의 차이를 가져오네요.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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