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징옥(李澄玉)은 세종(世宗) 때에 6진의 개척에 큰 공을 세운 무장(武將)이다. 그는 1423년(세종 5) 황상(黃象)의 추천으로 경원(慶源)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임명되어 함길도 지역으로 파견된 뒤 20년 가까이를 그 지역에서 근무하며 북방의 방어를 담당했다. 그는 성격이 굳세고 용감할 뿐 아니라 군령이 매우 엄하여 방어체제를 잘 유지했다. 그리고 여진족의 근거지로 쳐들어가 족장을 죽이는 등 용맹을 떨쳤다.
1438년(세종 20) 모친상을 입은 뒤에 경상도 도절제사와 평안도 도절제사 등을 지내던 이징옥은 1450년(세종 32) 문종이 새로 왕위에 오른 뒤에 부친상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다시 도절제사로 임명되어 함길도로 파견되었다. 1453년(단종 1)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단종도 명을 내려 이징옥을 함길도 도절제사로 계속해서 유임시켰다.
하지만 조선 최고의 장수이자 김종서(金宗瑞)와도 가까운 관계였던 이징옥은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首陽大君) 이유(李瑈, 제7대 세조) 일파의 주된 표적이 되었다. 1453년 음력 5월 한명회(韓明澮)와 홍달손(洪達孫)은 수양대군에게 이징옥이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과 공모해 경성부사(鏡城府使) 이경유(李耕)를 시켜 경성(鏡城)의 병기들을 한양으로 옮겼다며 그의 문책을 주장했다. 그리고 음력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안평대군과 김종서, 황보인(皇甫仁) 등을 죽인 뒤에는 곧바로 함길도에 주둔하던 이징옥을 불러들여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다음날인 음력 10월 11일에 이징옥을 평해(平海)로 유배하라는 명을 내리고, 평안우도 도절제사(平安右道都節制使) 박호문(朴好問)을 그를 대신해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해 파견했다. 음력 10월 13일에는 형조참판(刑曹參判) 김문기(金文起)가 이징옥이 병기를 빼돌린 혐의가 있다며 고발했고, 음력 10월 17일에는 고신(告身)이 추탈되었다. 그리고 음력 10월 21일에는 우헌납(右獻納) 김계우(金季友) 등이 이징옥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정에서 자신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징옥은 박호문이 후임으로 임명되어 오자 그에게 병부(兵符)를 넘겨주고 길주(吉州)에 있던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중에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등이 죽고 조정에서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다시 길주로 돌아가 박호문을 죽이고 그의 아들 박평손(朴平孫)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도진무(都鎭撫) 이행검(李行儉)과 함께 도절제사영에 주둔하던 병력을 이끌고 종성절제사(鍾城節制使) 정종(鄭種)이 지키고 있던 종성(鍾城)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길주와 종성의 병사들로 진영을 갖추고, 각지에 군사를 일으키라는 통문을 보내는 한편 여진의 여러 부족에도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당시 그가 스스로 왕위에 오르며 금나라를 계승한 대금(大金)의 황제(皇帝)임을 자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단종실록(端宗實錄)’은 워낙 세조의 정난(靖難)을 합리화하는 내용으로 왜곡되어 있어서 사실 여부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징옥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수양대군을 중외병마도통사(中外兵馬都統使)로 삼아 토벌군을 꾸렸다. 그리고 각지에 이징옥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우면 크게 포상하겠다고 알리고, 6진 인근의 여진족에게도 반란군에 동조하면 함께 토벌하겠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전했다. 하지만 토벌군이 출정하기 전에 종성에 주둔하던 이징옥은 이행검과 정종의 계책에 넘어가 주변의 경계를 느슨히 했다가 이행검과 정종 등에게 기습을 당해 세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징옥의 시신은 거열(車裂)로 찢겨졌으며, 그의 머리는 3일 동안 효수되었다가 한양으로 보내졌다.
이처럼 이징옥의 난은 함길도 도절제사로 그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이징옥이 여진족의 지원을 받아 6진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군사행동을 벌이려 했다는 잠재된 위험성과는 달리 이징옥이 일찍 살해됨으로써 실제 실행으로 옮겨지지는 못하고 끝맺었다. 그래서 박호문이 죽은 것 이외에는 조정이 입은 피해는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이징옥을 제거하려고 했던 수양대군 일파는 손쉽게 뜻을 이루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으로 북방의 방어가 흔들리는 것을 우려한 조정은 음력 11월 3일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몇몇만 처벌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붙이겠다고 하여 사건의 파장을 최소화하였다. 이징옥의 형제인 이징석(李澄石)과 이징규(李澄珪)의 일가도 모두 처벌하지 않고 풀어주었다. 그리고 이징옥을 살해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들을 3등급으로 나누어 포상했는데, 최초로 모의에 참여한 대호군(大護軍) 이행검(李行儉)ㆍ종성 절제사(鍾城節制使) 정종(鄭種)ㆍ종성 판관(判官) 정포(鄭圃)ㆍ전 수만호(守萬戶) 장영(張永) 등 10인이 1등, 이들을 도운 사직(司直) 김익맹(金益孟) 등 43인이 2등, 이들이 이징옥을 기습하여 죽일 때 군사들을 이끌고 성 밖을 지킨 삼휘(三麾) 진무(鎭撫) 전유지(全有之) 등 5인이 3등으로 포상되었다. 이징옥을 죽여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된 정종은 이듬해 종성도호부사(鍾城都護府使)로 임명되었다.
이징옥의 난은 여진족과 연합해 군사행동을 벌이려 했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그리고 실제 군사행동이 벌어지지 않고 이징옥이 살해됨으로써 일찍 진압되었지만,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는 데도 영향을 끼쳐 조선의 북방 방어와 여진족에 대한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징옥의 난 [李澄玉─亂]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