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중국 자본으로 만들어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KBS 모 드라마 임진왜란의 명군의 실상을 알려주는 글입니다. 명군은 총 115회 전투 중 단 6회 정도만 참여했고 육전 해전 포함해서 조선 육군과 해군이 주역으로 싸운 전투입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이 일본에 맞써 싸워서 이긴 전쟁이기때문에 일본과 전쟁을 해서 이겨본 적이 없는 중국인들이 우리 선조들이 우리 국토에서 싸운 전투로 마치 명군이 없었다면 조선은 망했다 명군이 잘 싸웠다 혹은 중국이 일본을 이겼다라는 중국 공산당 거짓 선전과 오랫동안 이민족에게 지배당한 중국인들이 역사적 자위를 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심지어 중국과 대만 동남아 화교 북미 화교 심지어 국내에 거주하는 산동화교 조선족까지 댓글로 우리나라 인터넷을 점령하고 심지어 해외 영어 포럼애서도 거짓말을 일삼고 있습니다 마치 이순신이나 정기룡 김시민 권율과 같은 주역 장군들이 있는데도 중국인들은 이런 영웅들이 우리나라 정부가 민족주의적 역사 날조를 한 것이며 조선왕이나 당시 조선인들은 명나라를 천조국 신국으로 모셨으며 조선군은 하등 도움도 안되었는데 근대에 박정희가 명나라 장수 진린의 공을 폄왜하고 속국 장군밖에 안되는 이순신을 반일 혹은 민족주의적 사관으로 만들어낸 영웅이라고 왜곡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중국
1592년에 일어나 1598년까지 계속된 임진왜란은 조선시대사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영향을 남긴 대사건이었다. 7년여에 걸쳐 지속된 전란은 조선왕조의 정치 체제와 사회경제적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임진왜란은 애초 일본의 침략에 의해 조선과 일본 사이의 전쟁으로 시작되었지만 명군의 참전을 불러왔다. 또 당시 명의 간접 지배 아래 놓여있던 건주여진의 누르하치 역시―비록 조선의 거부 때문에 실현되지는 못했지만―조선에 원군 파견을 제의하는 등 이 전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요컨대 명의 참전을 통해 동북아시아의 3국이 모두 전쟁에 휘말림으로써 임진왜란은 바야흐로 동북아시아 차원의 세계대전으로 비화되었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임진왜란을 어떻게 인식해 왔는가? 임진왜란 당시부터 17세기까지 명에서는 임진왜란을 '동원일역(東援一役)', '만력동원지역(萬曆東援之役)', '동사(東事)' 등으로 불렀다. 앞의 두 명칭은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사'는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명 내부에서 임진왜란을 부르는 명칭으로 고정되어 갔다. '전쟁은 곧 끝날 것이고, 명군 역시 잠시 동안만 조선에 머무르면 된다'고 생각했던 명에게 전쟁이 장기화되었던 것은 '곤혹' 그 자체였다. 내부의 정쟁(政爭)과 민변(民變) 등을 추스르기에도 겨를이 없었던 명에게 임진왜란이 이제 '조선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들의 '내부 문제'가 되어버린 것을 상징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었다. 전쟁이 장기화되어 명군의 철수 역시 기약할 수 없게 됨에 따라 명 일부에서는 임진왜란에 공연히 참전함으로써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고, 국력을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대두하고 있었다.
20세기 들어 민국시대가 되자 임진왜란을 '왜구의 난동'이자 1894년 청일전쟁의 선구적 사건으로 파악하는 시각이 나타났다. 나아가 임진왜란 당시에는 중국이 일본을 제어할 수 있었는데 청일전쟁 이후로는 그렇지 못했다고 반성적 차원에서 접근하기도 했다. 19세기 후반이래 '왜구(倭寇)의 후예'인 일본에게 눌려 중화(中華)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중국 지식인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었다.
오늘날 대륙이나 대만에서 임진왜란을 부르는 공식 명칭은 '항왜원조(抗倭援朝)'이다. '일본에 맞서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는 뜻으로 역시 '도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중공군이 참전했던 1950년의 한국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라고 부르고 있는 사실을 함께 고려한다면 '항왜원조'라는 용어 속에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인 한반도에 대한 중국인들의 지대한 관심이 스며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명군은 왜 임진왜란에 참전했는가? 그리고 그들의 참전은 조선사회에 어떤 영향을 남겼는가? 나아가 명군의 참전은 진실로 '조선을 도운 것'이라고 할만한 것인가? 명군의 참전에서 오늘날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과연 무엇인가? 이 글은 바로 임진왜란이 지닌 국제전으로서의 성격을 염두에 두면서 위와 같은 문제들을 검토해 보려고 쓴 것이다.
2. 명군의 참전 목적과 참전 과정
1) 명군의 참전 목적
명이 임진왜란에 참전한 까닭은 무엇인가? 명은 일본군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조선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참전했다. 명은 '책봉-조공 관계' 아래서 명의 충실한 제후국을 자처했던 조선의 위기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참전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명분'이었을 뿐 더 중요한 목적은 명 자체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은 동쪽 변방에 끼여 있어서 우리의 왼쪽 겨드랑이와 가깝습니다. 평양은 서쪽으로 압록강과 인접하고, 진주는 직접 등주(登州)와 내주(萊州)를 맞대고 있습니다. 만일 일본이 조선을 빼앗아 차지하여 요동을 엿본다면 1년도 안되어 북경이 위험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을 지켜야만 요동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병하여 일본군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명나라 인사들이 내세웠던 논지는 대개 위와 같은 것이었다.
명은 이미 14세기 후반부터 절강(浙江), 복건(福建), 광동(廣東) 등 동남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창궐했던 왜구(倭寇)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하지만 명 조정의 당국자들은 동남지방에 상륙한 왜구가 내륙을 가로질러 북경까지 도모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북경은 이들 지역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일본의 정규군이 조선을 차지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조선은 압록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요동과 잇대어 있는 데다 조선에서 해로를 이용하면 바로 산동(山東)이나 요동(遼東) 등으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요동이나 산동으로 진입할 경우, 북경이나 천진 등 명의 심장부가 바로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도발하면서 "조선에서 길을 빌려 요동으로 들어간다(假道入遼)"고 공공연히 내세운 바 있었다.
명의 조선 참전은 바로 조선을 지킴으로써 요동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명에게 요동이 '이(齒)'라면 조선은 '입술(脣)'이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이다. 명이 조선에 참전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순망치한론(脣亡齒寒論)이 자리잡고 있었다.
더욱이 요동은 대부분이 평원 지대인데 비해 조선은 산악 지역이 많아 방어에 훨씬 유리했다. 적은 병력으로도 효과적으로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병력이 적으면 자연히 전비(戰費)의 지출 규모도 줄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원한다"는 것을 내세워 '시혜자'로서 자임할 수도 있고, 조선에 대해 필요한 군수물자를 공급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어차피 일본군을 막아야 할 것이라면 조선에 나아가 싸우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어쩌면 명의 참전은 '최선의 공격이야말로 최선의 방어'라는 판단에서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었다. 요컨대 명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전략적 차원에서 조선에 참전했거니와 그들은 그 과정에서는 조선의 지형적 조건, 경제적 이해 관계까지 세심하게 고려했던 것이다.
2) 명군의 참전 과정
(1) 조선에 대한 의구심과 최초의 출병
자국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명군의 참전은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명이 병력을 실제로 조선에 투입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우선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 명이 조선에 대해 취했던 태도는 석연치 않았다. 명은 이미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복건(福建) 등지와 일본을 왕래하면서 무역에 종사했던 상인들의 보고를 통해 일본이 조선을 치려한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명은 그 같은 정보를 조선에 알려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왜란이 일어났다는 조선의 보고를 접한 직후, 명 조정 일각에서는 "조선과 일본이 공모하여 요동을 탈취하려 한다"는 풍문이 돌기까지 했다. 당시 명에서는 조선을 군사 강국 '고구려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거니와 그런 조선이 불과 보름 남짓 되는 사이에 수도를 일본군에게 내주고 평양까지 쫓겨왔다는 사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조정은 1592년 6월, 청원사(請援使) 이덕형(李德馨) 등을 명에 보내 원병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조선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던 명 조정은 조선에 보내는 사신 편에 화가를 동행시켜 선조의 모습을 그려오도록 조처하는 등 세심하게 대응했다. 북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는 조선 국왕이 진짜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동시에 일본군의 동향을 탐지하는 한편 천진, 요동, 산동 등 북경과 인접한 해안 지대의 방어 태세를 점검했다.
자국의 방어 태세에 대한 점검을 끝내고, 조선이 보고한 상황이 사실임을 확인한 뒤에야 명은 비로소 병력을 조선으로 투입했다. 선조와 조선 조정이 이미 평양을 버리고 의주를 향해 후퇴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명군이 최초로 압록강을 건너온 것은 1592년 6월 15일이었다. 요동유격(遼東遊擊) 사유(史儒)가 거느리는 1천여명을 선발대로 하여, 부총병(副總兵) 조승훈(祖承訓) 등이 거느리는 병력을 합해 모두 3,500명 정도였다. 조승훈 휘하의 명군은 "당장 일본군을 쓸어버리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같은 해 7월 17일에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참패했다. 병력도 부족하고, 조총에 맞설만한 무기를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작전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유격 사유를 비롯한 대다수의 장졸들이 전사하고 부총병 조승훈은 패잔병들을 이끌고 귀국해 버렸다.
(2) 본격적인 참전과 평양전투
명 조정은 조승훈의 패전을 계기로 일본군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과 그들을 제압하려면 절강(浙江) 등지의 화포(火砲) 부대를 동원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에 명 조정은 각지에서 화기수(火器手)를 비롯한 병력을 징발하고, 은을 풀어 군량을 매입하는 등 다시 출병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하지만 북경과 요동 출신 병력들 뿐 아니라 절강, 광동, 사천(四川), 운남(雲南) 등지에서 징발한 병력들이 집결지인 요양(遼陽)까지 모이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렇게 하여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군이 다시 조선으로 들어온 것이 1592년 12월이었다. 당시 명군은 각지에서 징집한 병사들과 유력한 무장들이 개별적으로 거느리는 가정(家丁)으로 구성되었는데 대략 4만 8천명이나 되는 대군이었다. 참전 병력 가운데는 북병(北兵)이라 불리는 요동, 광녕(廣寧), 선부(宣府), 대동(大同) 등지의 기마병 뿐 아니라 남병(南兵)이라 불리는 절강, 광동(廣東) 출신의 포병과 화기수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남병들은 특히 대장군포(大將軍砲), 멸로포(滅虜砲), 호준포(虎 砲) 등 일본군의 조총을 제압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화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제독 이여송은 본래 조선족 출신으로 요동 지역의 군벌 이성량(李成梁)의 아들이었다. 당시 '역전의 명장'으로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명 조정은 이여송을 감독하고(이여송이 조선족 출신이라 그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조선 원정군의 모든 사무를 관장하는 총사령관 격인 경략(經略)에 병부시랑 송응창(宋應昌)을 임명했다. 송응창은 절강 출신으로 유명한 양명학자이기도 했다. 각기 '북병 출신 야전 사령관'과 '남병 출신 총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이여송과 송응창은 서로 미묘한 갈등과 알력을 빚으면서 1593년 1월의 평양전투를 치르고, 강화협상을 시작하는 등 임진왜란 초반의 상황을 주도하게 된다.
명은 조선에 대병을 다시 보내면서 전쟁이 장기화되리라고 예측하지 않았고, 또 그들 스스로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실제 1593년 1월,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의 본진이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전세는 대번에 역전되었다. 평양성에서 패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일본군은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함경도에 머물고 있던 가또 키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병력은 고립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제 명이나 조선이나 모두 전쟁은 일본군의 철수에 의해 끝날 것으로 낙관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하지만 후퇴하는 일본군을 파주(坡州)까지 추격했던 이여송 휘하의 병력이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일본군의 역습에 말려 대패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금방이라도 일본군을 몰아낼 듯이 보였던 명군의 기세는 꺾였고, 전쟁은 다시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3) 강화 협상과 명군의 장기 주둔
벽제관의 패전을 계기로 명 조정과 명군 지휘부는 태도를 바꾸었다. '결전(決戰)'을 벌여 일본군을 몰아내겠다던 종래의 태도에서 돌변하여 이제 강화협상(講和協商)을 통해 일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전쟁이 예상보다 장기화되면서 명 조정에서 전비(戰費) 지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간데다 조선에 파견된 명군 내부에서도 염전의식(厭戰意識)이 퍼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명군 내부에서는 "왜 속국 조선을 위해 끝까지 피를 흘려야 하는가?", "한강 이북 지역을 탈환한 것만으로도 명은 조선에 대해 할 만큼 했다"는 식의 인식이 퍼져갔다. 명 조정은 골동품 상인 출신인 심유경(沈惟敬)을 통해 소서행장과 본격적으로 강화협상에 착수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은 철저히 소외되었다.
하지만 강화협상은 결말을 맺지 못한 채 시간만 끌었다.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로 물러났지만 철수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명군은 이제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철수할 수도, 무작정 주둔을 계속할 수도 없었다. 이 같은 와중에 임진왜란의 성격은 '전쟁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非戰非和)' 어정쩡한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그 같은 상황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난 뒤까지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명 조정은 강화협상의 진전 등 조선의 상황 변화와, 자국 내부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 따라 조선 주둔군의 병력을 조절하기도 하고, 최고 사령관인 경략을 교체했다. 명군 병력은 4만 8천(1592년 12월)→ 5만 1천(1593년 1월)→ 1만 6천(1593년 9월)→ 7만(1596년)→ 9만 2천(1598년 10월) 등의 추이를 보이는데, 강화 협상 초반기에 해당하는 1593년 9월을 제외하면 대략 5만 명에서 10만 명 수준을 유지했다. 또 정유재란 이후에는 이전과는 달리 명의 수군도 조선에 참전했다.
경략 역시 송응창→ 고양겸(顧養謙·1593년 12월 임명)→ 손광(孫鑛·1594년 7월 임명)→ 양호(楊鎬·1597년 3월 임명)·형개(邢 )→ 만세덕(萬世德·1598년 6월 임명) 등의 순으로 교체되었다. 경략직에는 대개 명 조정의 병부시랑(兵部侍郞) 급의 인물이 임명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에는 조선 원정군의 사무를 책임지는 직책을 경리(經理)라 하여 산동우참정(山東右參政) 양호를 임명하고, 조선을 포함한 요동과 산동 일대의 방어 문제를 총괄하는 직책으로 경략을 두어 그 자리에 병부상서였던 형개를 임명했다. 조선 원정군을 감독하고 요동 일대를 방어하는 책임을 맡은 당국자가 한사람 더 늘어난 것이자 경략의 위상이 사실상 더 높아진 셈이다. 정유재란 이후에는 동사(東事)를 어떻게 마무리하느냐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명의 국가적 대사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3. 명군 참전이 남긴 것
1592년 12월, 이여송이 이끄는 대군이 들어온 이후 1600년 9월,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많을 때는 10만여 명의 명군이 조선에 주둔했다. 8년여에 걸친 명군의 주둔은 당시 조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남겼을까? 몇 가지 측면에서 검토해보자.
1) '재조지은(再造之恩)'과 조선 주권의 침해
명군의 참전이 조선에 군사적으로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실제 당시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쫓겨갔던 선조와 조선 조정은 심리적으로 '공황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 같은 형편에서 5만 가까운 명의 대병력이 '구원군'을 표방하면서 조선으로 들어온 것은 분명 '대사건'이었다. 나아가 명군이 평양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전세가 단숨에 역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선조와 조선 조정은 명군의 참전과 원조를 일러 '망해가던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再造之恩)'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명군이 참전하면서 조선의 주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우선 명군이 조선에 진입하면서부터 조선군을 지휘하는 작전권은 사실상 명군 지휘부에게로 넘어갔다. "조선 조정이 명군 지휘부에 작전권을 이양한다"는 내용을 명시한 구체적인 외교 문서가 작성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과 명의 전통적인 관계나 당시의 전황(戰況), 조선이 처해있던 상황 등을 고려하면 조선은 명에 대해 독자적인 작전권을 갖겠다고 내세울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우선 '책봉-조공 체제'라 불리는 양국 관계에서 조선 국왕은 명 황제의 제후(諸侯)로 치부되었고, 명은 조선을 공공연하게 속국(屬國)이라 여기고 있었다. 조선 역시 명을 '천조(天朝)', '상국(上國)', '대국(大國)' 등으로 부르면서 섬기던 상황이었다. 이 같은 현실에서 '구원군'을 표방했던 명군은 참전 초부터 조선군의 작전권을 갖게 되었다.
명군이 진입할 당시 조선이 처해 있던 전황 역시 작전권이 명군 지휘부로 넘어가는데 일조했다. 조승훈 휘하의 명군이 최초로 들어왔던 1592년 6월이나 이여송 휘하의 명군이 다시 들어왔던 1592년 12월 당시 선조와 조선 조정은 평안도까지 쫓겨가 있는 상태였다. 특히 1592년 6월 당시, 일본군이 무서운 기세로 북상하고 평양이 함락되면서부터 조선 신료들 사이에서는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라는 체념적인 분위기마저 번져가고 있었다. 실제 선조는 일본군이 의주까지 북상할 경우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굳힌 상태였다. 비록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기 시작하고,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서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의주에 있던 선조와 조선 조정에게는 별로 실감나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지척에 있는 일본군의 위협이야말로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조선 조정이 이처럼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구원군'을 표방하면서 들어온 명군은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선조는 유격장군에 불과한 명장 사유와 맞절을 나누는가 하면 그에게 "지휘를 삼가 받겠다"고 요청하는 판이었다. 이 같은 형국에서 조선 조정은 명군 지휘관들을 접대하고 병사들에게 군량을 공급하는 문제에 신경을 써야 했고, 조선군의 작전권이 넘어가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따질 겨를이 없었다.
작전권을 비롯한 조선의 주권이 명군에 의해 침해되었던 추세는 강화 협상이 시작되면서부터 더욱 심해졌다. 명은 일본군을 달래기 위해 결전을 포기했고, 조선군에게 일본군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강요했다.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던 권율(權慄)은 송응창에게 불려가 곤장을 맞을 뻔했다. 송응창의 허락 없이 일본군을 공격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593년 4월, 명군은 서울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을 조선군의 보복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정유재란 이후에는 명군의 경략이 서울에 도찰원(都察院)이라는 것을 설치하여 머물면서 조선군의 작전권을 장악했다. 실제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명 수군 제독 진린(陳璘)의 간섭과 압력 때문에 일본군에 대한 독자적인 작전을 펼칠 수 없을 정도였다. 명군 지휘부는 작전권 뿐 아니라 때로는 조선 국왕의 인사권까지 간섭하기도 했다. 또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강화 협상에 조선이 반발하는 기미를 보이자 명 조정에서는 선조를 퇴위시키고, 조선을 직할령(直轄領)으로 삼아 직접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요컨대 강화협상이 시작된 1593년 1월 이후 명군이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작전권을 비롯한 조선의 주권은 명군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되었던 것이다.
2) 명군과 민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국 내부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것을 용인해야 했던 나라들이 필연적으로 안게 되는 문제 가운데 민폐(民弊)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 당시 명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왜란 초반 선조와 조선 조정은 명에 원군을 요청하기로 결정했으면서도 한 때 망설였던 적이 있었다. 바로 명군이 조선에 들어와 자행할지도 모르는 민폐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명군이 진입하면서 그 같은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당시 명군 장병들이 준수해야 할 군령(軍令) 가운데는 "민간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라도 건드리는 자는 목을 벤다", "조선 부녀자를 범하는 자는 목을 벤다"는 등의 조항이 있었지만 민폐는 만연되었다.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는 이국 땅에서 명군 병사들이 받았던 스트레스는 때로 조선의 민간인들에게 민폐로 전가되었다. 특히 명군이 전투에서 패했을 때, 조선의 신료나 백성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않는다고 판단할 때 그들은 극심한 횡포를 부렸다. 약탈, 강 0간, 폭행 등이 자행되었다.
일본과의 강화협상이 시작되고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면서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강화협상이 성과 없이 지속되고, 일본군이 남해안 일대로 철수하여 장기 주둔 상태로 들어서자 명군 역시 남하하여 어정쩡한 대치 상태에 돌입했다. 적과의 결전을 회피한 채 장기간 주둔하는 군대는 군량만 축내게 되고, 군기(軍紀) 역시 풀어지기 마련이다. 군기가 풀어지면 민폐는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희문(吳希文)은 {쇄미록( 尾錄)}에서 당시 명군 주둔지 부근의 백성들은 낮에는 숲에 숨고, 밤에만 이동한다고 적고 있다. 바로 명군의 약탈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조선 조정은 명군이 자행하는 민폐에 대해 이렇다 할 대책이 없었다. 그저 가끔 명군 지휘관들에게 휘하 병력에 대한 단속을 요청했지만 실효성은 없었다. 명군 지휘관 가운데는 '구원군'으로 들어온 자신들이 이역(異域)에서 고생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어지간한 민폐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겠다는 입장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와중에 명군이 자행하는 민폐는 제어할 수 없는 상황까지 악화되었고, 조선 백성들 사이에서는 "명군은 참빗, 일본군은 얼레빗"이라는 속요까지 돌게 되었다. 명군을 '천병(天兵)', '구원군'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의 한편에서, 민폐에 시달리는 하층민들은 명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명군과의 관계를 형상화한 구비설화(口碑說話) 가운데 이여송 등에 대한 이미지가 극히 부정적으로 묘사된 작품이 많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3) 명군 참전과 문화적 접촉
(1) 명군을 따라 들어온 것
명군의 참전을 계기로 조선 국경은 중국인들에게 거의 무제한적으로 개방되었다. 수많은 중국인들이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 가운데는 단연 상인들이 많았다. 전장은 위험하기는 하지만 이익이 널려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명군은 한달에 1냥 50전씩 은(銀)으로 봉급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조선 사회는 주로 곡물이나 면포를 화폐로 썼기 때문에 은이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다. 명나라 상인들은 우선 명군의 봉급으로 뿌려지는 은을 노리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술, 절인 고기, 중국식 된장 등을 싣고 전장을 떠돌았다. 그 가운데는 조선에서 은광을 개발하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 또 일부 상인들은 조선사람들이 좋아하는 털옷이나 모자, 비단 등을 가져와 종로 등지에서 난전을 열고 팔기도 했다. 전쟁중임에도 "중국산 사치품이 넘쳐난다"는 우려가 제기되는가 하면 조선사람들 역시 명 상인들의 행태를 목도하면서 은을 화폐로 쓰는 거래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2) 명군을 둘러싼 사회상
명군이 대규모로 참전하여 장기간 주둔하면서 자연히 조선인과 중국인들 사이의 접촉이 잦아졌다. 우선 많은 명군들이 동거, 매춘, 결혼 등의 형태로 조선 여자들과 맺어졌다. 당시 사천병(四川兵)을 이끌고 참전했던 지휘관 유정(劉綎) 역시 조선 여자와의 사이에 아이를 두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여자들 뿐 아니라 명군 주둔지 부근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모여들었다.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은 조선인들에 비해 보급 상황이 좋은 명군에게 의탁해서 목숨을 부지하기도 했다. 명군 지휘관 가운데는 주둔지 부근에 진제장(賑濟場)을 두어 굶주린 조선인들을 구휼하는 사람도 있었다. 간혹 조선인 고아들을 거두어 키우거나, 조선인을 휘하에 두고 방자(房子)로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명군과 이런저런 사연을 가진 사람들은 명군이 철수할 때 그들을 따라 조선을 떠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 조정은 인구의 유출을 막기 위해 그들을 단속했지만 명군을 따라 중국 내륙으로 들어간 사람은 의외로 많았다.
명군의 위세를 등에 업고 조선 사람들을 괴롭히는 부류도 있었다. 1599년, 명군 지휘관 이영(李寧)에게 투탁했던 막동(莫同)이란 노비는 양반가의 계집종을 겁탈했다가 이영의 비호를 받고 석방되었다. 그는 양반가에 난입했을 때 명군 복장을 하고 있었고, 체포된 뒤에도 중국어를 지껄였다고 한다. 명군 복장을 한 강도들이 떼지어 설치기도 하고, 힘있는 명군 지휘관에게 줄을 대어 관직을 얻으려고 덤비는 부류들도 나타나고 있었다. 명군의 주둔이 이어지면서 나타난 웃지 못할 장면들이었다.
(3) 명군 지휘부의 '조선개조계획'
조선인과 명군들 사이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다양한 명의 문물이 조선으로 흘러들어 왔다. 명 문물 가운데는 자연스럽게 유입된 것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명군 지휘관들이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던 것도 있었다.
왜란 기간 내내 대부분의 명군 지휘관들은 조선의 '숭문주의(崇文主義)'를 비판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조선이 너무 문치만 숭상하고 무비(武備)를 경시했기 때문에 전쟁을 불렀다"고 조선의 '문약(文弱)'을 질타했다. 그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명군 지휘부는 병사의 훈련, 진법(陣法), 화포제도 등 군사제도 전반을 명나라 방식으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한 때 조선은 그들 '명나라 군사 고문단'의 요구대로 중국인 교사(敎師)들을 초빙해다가 병력을 훈련시키는데 투입하기도 했다.
명군 지휘관들은 주자학(朱子學)만을 정통으로 여기는 조선의 학풍도 불만이었다. 송응창 같은 경우는 조선의 학풍을 양명학(陽明學) 중심으로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의 진중(陣中)으로 조선 신료들을 불러다가 경서를 읽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관우(關羽)를 모신 관왕묘(關王廟)가 전국 각지에 세워진 것도 명군 지휘부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명군의 철수가 임박해오자 명군 지휘관들은 '조선선후사의(朝鮮善後事宜)'라는 명목으로 일종의 '전후(戰後) 복구 방안'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대개 무비를 갖출 것, 상공업을 육성하여 재정을 튼튼하게 할 것, 중국식으로 체제를 개혁할 것 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실용적인 분위기가 강했던 사회에서 성장한 명군 지휘관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이 철수한 뒤 조선의 '장래'가 심히 걱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장기간의 조선 주둔을 통해 명은 조선의 내부 사정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되었고, 그를 토대로 전후 조선의 사회를 '명나라식 모델'에 맞춰 개조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조선은 군사관계 문물 전반을 명나라 방식으로 바꾸는 데는 대체로 동의했지만 양명학 등을 수용하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명군의 주둔, 조선인과 명군 사이의 잦은 접촉을 통해 명 문화에 대해 눈을 뜨고, 세계관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명군의 참전은 분명 문화접변(文化接變)의 한 계기로 작용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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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호, 1989 {설화와 민중의 역사의식} 집문당
정병철, 1996 {명말청초의 화북사회 연구}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사논문
최소자, 1997 {명청시대 중·한 관계사 연구} 이화여대 출판부
한명기, 1999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한명기, 2000 {광해군}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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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村榮孝, 1965 {日鮮關係史の硏究} (東京, 吉川弘文館)
李光濤, 1972 {朝鮮壬辰倭禍硏究} (臺北, 中央硏究院歷史語言硏究所)
鄭樑生, 1984 {明日關係史の硏究} (東京, 雄山閣)
北島万次, 1990 {豊臣秀吉の對外認識と朝鮮侵略} (東京, 校倉書房)
李啓煌, 1997 {文祿慶長の役と東アジア} (京都, 臨川書店)
1. 임진왜란과 중국
1) 임진왜란은 세계사적 대사건
* 동북아시아의 '세계대전'
* 일본군 18만, 명군 10여만, 조선군 10여만
* 누르하치(老兒哈赤)의 성장에도 일정 영향
2) 중국이 보는 임진왜란→ 명칭에서 드러나는 역사인식
* 동원일역(東援一役), '만력동원지역(萬曆東援之役)'
* 동사(東事)
* '왜구의 난동', '청일전쟁의 선구'
* 항왜원조(抗倭援朝)와 항미원조(抗美援朝)
→ 강대국들의 각축장이자 전략적 요충인 한반도에 대한 지대한 관심
* cf. 영화 較量
2. 명군의 참전 목적과 참전 과정
1) 명군의 참전 목적
① 참전 명분
* '책봉-조공 체제' 아래서 충순(忠順)했던 조선을 구원해야 한다
② 참전의 실제 목적
* 요동(遼東)의 보호→ 요동은 이(齒), 조선은 입술(脣): 脣亡齒寒의 관계
* 왜구(倭寇)에 대한 공포, 가도입명(假道入明)의 표방
* 조선의 험준한 지형→ 방어 용이→ 적은 병력→ 전비(戰費) 절감
③ 참전 목적을 둘러싼 조선과의 갈등
* 명은 조선이 '순망치한' 운운하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
→ 선조와 명나라 관리 유황상(劉黃裳)의 대화
"전에 전하께서 '倭奴가 不道하여 相國을 침범하려고 하기에 조선 君臣이 대의로써 그를 배척했다가 마침내 그 노여움을 샀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왜노가 중국을 침범하려면 절강이나 영파부(寧波府) 등지로도 침범하여 올 수 있는데 하필 조선을 경유하겠습니까?…… 황제께서 속국이 兵火를 입은 것을 염려하시어 天兵을 동원하여 구원하시고, 또 琉球와 暹羅에도 명을 내려 왜노의 소굴을 소탕하도록 했습니다. 조선은 다만 皇恩에 감사해야 할 따름이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신료들에게도 경계하여 이런 말을 못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宣祖實錄} 권34 선조 26년 1월 6일)
2) 명군의 참전 과정
① 처음에는 사태를 주시하며 참전 여부를 저울질
* 전쟁이 일어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명: 1590년이래 許儀後 등의 보고
* '고구려의 후예' 답지 않은 조선의 참패에 대한 의구심→ "고토(故土) 요동 수복"
* 자국 해안의 방어태세 점검
* 조선의 청원(請援)과 선조(宣祖)의 진위 확인
② 명군의 최초 참전: 1592년 6월
* 조승훈(祖承訓) 휘하의 북병(北兵) 약 3,500명 cf. 남병(南兵)
* 곧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에 참패
∵ 빈약한 전투력, 일본군에 대한 경시
③ 명군의 본격적인 참전: 1592년 12월
* 조승훈의 패전을 계기로 명 조정은 일본군의 전력(戰力)을 제대로 파악
* 남병과 북병을 합하여 대략 48,000여명에 다수의 화포(火砲) 보유
* 지휘관은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
④ 평양 전투와 벽제 전투: 1593년 1월
* 평양 전투의 승리: 화포의 위력, 전세는 단번에 역전
* 논공행상과 이여송 vs. 송응창의 갈등→ 조선인 학살, 벽제전투 패전으로 연결
* 벽제 전투 패전: 이여송의 무리한 추격→ 평양 전투 승리 효과 반감
3) 강화 협상과 파탄, 그리고 정유재란
① 강화 협상의 시작
* 벽제 전투의 패전→ 명은 자신들의 참전 '목적'을 다시 환기하고 강화로 방향 전환
"우리는 조선에 대해 할만큼 했다" "우리가 왜 조선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하나?"
* 명 내부의 재정 문제, 명군 내부의 염전의식(厭戰意識)
* 심유경(沈惟敬)과 고니시의 협상
② 강화협상의 전개와 파탄
* "기만에 가득찬 사기극": 명과 일본의 요구 조건은 근본적인 모순 관계
* 사기극의 장기화→ 전쟁의 성격을 변화시킴 (非戰非和)
* 1596년(선조 29) 4월 3일: 책봉정사 이종성(李宗城)의 탈주 사건
③ 정유재란(丁酉再亂)의 발발: 1597년
* 일본군의 재침, 명군 대병력(약 10여만)의 재진입, 수군까지 참전
* 간헐적인 전투가 진행
남원 전투(8월), 직산 전투(9월), 울산 전투(11월)
* 전투는 진행되어도 명의 본심은 강화에 있었음
邢 旣身赴王京 人心始定 召參軍李應試問計 應試請問朝廷主畵云何 曰 陽戰陰和 陽剿陰撫 政府八字密畵 無泄也 應試曰 然則易耳… ({明史} 권320 列傳 208 朝鮮)
3. 명군 참전이 조선에 남긴 것
1) 정치적 영향
① 조선 주권의 침해
* '구원군'인 명군에게 작전권이 넘어감
* 강화협상 과정에서 조선은 철저히 소외: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조선은 명 내정의 변동에 휘둘리게 됨
ex. 권율(權慄)과 행주대첩, '심유경 표첩(標帖)', 일본군을 '에스코트'했던 명군
* 왕위교체론, 직할통치론의 대두
② '재조지은(再造之恩)'의 형성
* "망해가던 나라를 다시 세워 주었다"
* 재조지은 강조의 양면성
答曰 今此平賊之事 專由天兵 我國將士 不過或隨從天兵之後 或幸得零賊之頭而已 未嘗 一賊酋 陷一賊陣 其中如李元二將海上之 權慄幸州之捷 差强表表 若論天兵出來之由 則皆是扈從諸臣 間關顚沛 隨予則到義州 號天朝 得以討賊 恢復彊土耳({扈聖宣武淸難功臣儀軌}, 1601년 3월 13일)
2) 명군과 민폐
① 명군의 군기(軍紀) 해이로 인한 민폐
* 명군의 장기 주둔, 패전, 염전의식은 민폐로 전가됨
* 강화협상 이후에는 상황이 더 악화
"명군은 참빗, 일본군은 얼레빗"
②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과정의 민폐
* 장기 주둔→ 명 내부의 재정 악화→ 조선에 군량과 군수 물자를 요구
* 빈번히 왕래하는 명의 관리들을 접대하는 문제
* 군량 보급에서 '명군 우선'의 원칙→ 의존의 악순환
"명군에게 주고 남은 썩은 것이라도 좋으니 조선군도 좀 생각해 주소서"
3) 명군 참전과 문화적 접촉
① 명군을 따라 들어온 것
* 쇄도하는 명나라 상인들 ∵ 명군은 봉급을 銀으로 받는 군대
* 은광개발의 열풍
* 명나라 물자의 범람과 사치풍조
② 명군을 둘러싼 사회상
* 명군과 조선인의 접촉: 결혼, 동거, 방자(房子)
* 조선인의 중국 유출
* 명군 도망병의 조선 정착
* 명군의 권위에 기댄 '해프닝'들
③ 명군 지휘부의 '조선개조계획'
* 명군 지휘부의 조선 비판: '문약(文弱)'
* 무비(武備)에 대한 강조와 명나라식 병법의 수용 요구
cf. 양명학(陽明學)의 강조, 관왕묘(關王廟)의 건립
* 조선선후사의(朝鮮善後事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