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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9-25 02:38
[한국사] 임진왜란때 명군이 구원군이고 도움되는 군대였다고요? 전혀 아닙니다.
 글쓴이 : 고이왕
조회 : 7,708  

이 글은 중국 자본으로 만들어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KBS 모 드라마 임진왜란의 명군의 실상을 알려주는 글입니다. 명군은 총 115회 전투 중 단 6회 정도만 참여했고 육전 해전 포함해서 조선 육군과 해군이 주역으로 싸운 전투입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이 일본에 맞써 싸워서 이긴 전쟁이기때문에 일본과 전쟁을 해서 이겨본 적이 없는 중국인들이 우리 선조들이 우리 국토에서 싸운 전투로 마치 명군이 없었다면 조선은 망했다 명군이 잘 싸웠다 혹은 중국이 일본을 이겼다라는 중국 공산당 거짓 선전과 오랫동안 이민족에게 지배당한 중국인들이 역사적 자위를 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심지어 중국과 대만 동남아 화교 북미 화교 심지어 국내에 거주하는 산동화교 조선족까지 댓글로 우리나라 인터넷을 점령하고 심지어 해외 영어 포럼애서도 거짓말을 일삼고 있습니다 마치 이순신이나 정기룡 김시민 권율과 같은 주역 장군들이 있는데도 중국인들은 이런 영웅들이 우리나라 정부가 민족주의적 역사 날조를 한 것이며 조선왕이나 당시 조선인들은 명나라를 천조국 신국으로 모셨으며 조선군은 하등 도움도 안되었는데 근대에 박정희가 명나라 장수 진린의 공을 폄왜하고 속국 장군밖에 안되는 이순신을 반일 혹은 민족주의적 사관으로 만들어낸 영웅이라고 왜곡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중국

1592년에 일어나 1598년까지 계속된 임진왜란은 조선시대사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영향을 남긴 대사건이었다. 7년여에 걸쳐 지속된 전란은 조선왕조의 정치 체제와 사회경제적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임진왜란은 애초 일본의 침략에 의해 조선과 일본 사이의 전쟁으로 시작되었지만 명군의 참전을 불러왔다. 또 당시 명의 간접 지배 아래 놓여있던 건주여진의 누르하치 역시―비록 조선의 거부 때문에 실현되지는 못했지만―조선에 원군 파견을 제의하는 등 이 전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요컨대 명의 참전을 통해 동북아시아의 3국이 모두 전쟁에 휘말림으로써 임진왜란은 바야흐로 동북아시아 차원의 세계대전으로 비화되었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임진왜란을 어떻게 인식해 왔는가? 임진왜란 당시부터 17세기까지 명에서는 임진왜란을 '동원일역(東援一役)', '만력동원지역(萬曆東援之役)', '동사(東事)' 등으로 불렀다. 앞의 두 명칭은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사'는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명 내부에서 임진왜란을 부르는 명칭으로 고정되어 갔다. '전쟁은 곧 끝날 것이고, 명군 역시 잠시 동안만 조선에 머무르면 된다'고 생각했던 명에게 전쟁이 장기화되었던 것은 '곤혹' 그 자체였다. 내부의 정쟁(政爭)과 민변(民變) 등을 추스르기에도 겨를이 없었던 명에게 임진왜란이 이제 '조선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들의 '내부 문제'가 되어버린 것을 상징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었다. 전쟁이 장기화되어 명군의 철수 역시 기약할 수 없게 됨에 따라 명 일부에서는 임진왜란에 공연히 참전함으로써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고, 국력을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대두하고 있었다.
20세기 들어 민국시대가 되자 임진왜란을 '왜구의 난동'이자 1894년 청일전쟁의 선구적 사건으로 파악하는 시각이 나타났다. 나아가 임진왜란 당시에는 중국이 일본을 제어할 수 있었는데 청일전쟁 이후로는 그렇지 못했다고 반성적 차원에서 접근하기도 했다. 19세기 후반이래 '왜구(倭寇)의 후예'인 일본에게 눌려 중화(中華)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중국 지식인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었다.
오늘날 대륙이나 대만에서 임진왜란을 부르는 공식 명칭은 '항왜원조(抗倭援朝)'이다. '일본에 맞서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는 뜻으로 역시 '도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중공군이 참전했던 1950년의 한국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라고 부르고 있는 사실을 함께 고려한다면 '항왜원조'라는 용어 속에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인 한반도에 대한 중국인들의 지대한 관심이 스며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명군은 왜 임진왜란에 참전했는가? 그리고 그들의 참전은 조선사회에 어떤 영향을 남겼는가? 나아가 명군의 참전은 진실로 '조선을 도운 것'이라고 할만한 것인가? 명군의 참전에서 오늘날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과연 무엇인가? 이 글은 바로 임진왜란이 지닌 국제전으로서의 성격을 염두에 두면서 위와 같은 문제들을 검토해 보려고 쓴 것이다.


2. 명군의 참전 목적과 참전 과정

1) 명군의 참전 목적

명이 임진왜란에 참전한 까닭은 무엇인가? 명은 일본군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조선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참전했다. 명은 '책봉-조공 관계' 아래서 명의 충실한 제후국을 자처했던 조선의 위기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참전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명분'이었을 뿐 더 중요한 목적은 명 자체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은 동쪽 변방에 끼여 있어서 우리의 왼쪽 겨드랑이와 가깝습니다. 평양은 서쪽으로 압록강과 인접하고, 진주는 직접 등주(登州)와 내주(萊州)를 맞대고 있습니다. 만일 일본이 조선을 빼앗아 차지하여 요동을 엿본다면 1년도 안되어 북경이 위험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을 지켜야만 요동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병하여 일본군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명나라 인사들이 내세웠던 논지는 대개 위와 같은 것이었다.
명은 이미 14세기 후반부터 절강(浙江), 복건(福建), 광동(廣東) 등 동남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창궐했던 왜구(倭寇)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하지만 명 조정의 당국자들은 동남지방에 상륙한 왜구가 내륙을 가로질러 북경까지 도모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북경은 이들 지역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일본의 정규군이 조선을 차지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조선은 압록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요동과 잇대어 있는 데다 조선에서 해로를 이용하면 바로 산동(山東)이나 요동(遼東) 등으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요동이나 산동으로 진입할 경우, 북경이나 천진 등 명의 심장부가 바로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도발하면서 "조선에서 길을 빌려 요동으로 들어간다(假道入遼)"고 공공연히 내세운 바 있었다.
명의 조선 참전은 바로 조선을 지킴으로써 요동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명에게 요동이 '이(齒)'라면 조선은 '입술(脣)'이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이다. 명이 조선에 참전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순망치한론(脣亡齒寒論)이 자리잡고 있었다.
더욱이 요동은 대부분이 평원 지대인데 비해 조선은 산악 지역이 많아 방어에 훨씬 유리했다. 적은 병력으로도 효과적으로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병력이 적으면 자연히 전비(戰費)의 지출 규모도 줄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원한다"는 것을 내세워 '시혜자'로서 자임할 수도 있고, 조선에 대해 필요한 군수물자를 공급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어차피 일본군을 막아야 할 것이라면 조선에 나아가 싸우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어쩌면 명의 참전은 '최선의 공격이야말로 최선의 방어'라는 판단에서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었다. 요컨대 명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전략적 차원에서 조선에 참전했거니와 그들은 그 과정에서는 조선의 지형적 조건, 경제적 이해 관계까지 세심하게 고려했던 것이다.

2) 명군의 참전 과정

(1) 조선에 대한 의구심과 최초의 출병
자국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명군의 참전은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명이 병력을 실제로 조선에 투입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우선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 명이 조선에 대해 취했던 태도는 석연치 않았다. 명은 이미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복건(福建) 등지와 일본을 왕래하면서 무역에 종사했던 상인들의 보고를 통해 일본이 조선을 치려한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명은 그 같은 정보를 조선에 알려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왜란이 일어났다는 조선의 보고를 접한 직후, 명 조정 일각에서는 "조선과 일본이 공모하여 요동을 탈취하려 한다"는 풍문이 돌기까지 했다. 당시 명에서는 조선을 군사 강국 '고구려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거니와 그런 조선이 불과 보름 남짓 되는 사이에 수도를 일본군에게 내주고 평양까지 쫓겨왔다는 사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조정은 1592년 6월, 청원사(請援使) 이덕형(李德馨) 등을 명에 보내 원병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조선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던 명 조정은 조선에 보내는 사신 편에 화가를 동행시켜 선조의 모습을 그려오도록 조처하는 등 세심하게 대응했다. 북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는 조선 국왕이 진짜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동시에 일본군의 동향을 탐지하는 한편 천진, 요동, 산동 등 북경과 인접한 해안 지대의 방어 태세를 점검했다.
자국의 방어 태세에 대한 점검을 끝내고, 조선이 보고한 상황이 사실임을 확인한 뒤에야 명은 비로소 병력을 조선으로 투입했다. 선조와 조선 조정이 이미 평양을 버리고 의주를 향해 후퇴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명군이 최초로 압록강을 건너온 것은 1592년 6월 15일이었다. 요동유격(遼東遊擊) 사유(史儒)가 거느리는 1천여명을 선발대로 하여, 부총병(副總兵) 조승훈(祖承訓) 등이 거느리는 병력을 합해 모두 3,500명 정도였다. 조승훈 휘하의 명군은 "당장 일본군을 쓸어버리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같은 해 7월 17일에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참패했다. 병력도 부족하고, 조총에 맞설만한 무기를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작전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유격 사유를 비롯한 대다수의 장졸들이 전사하고 부총병 조승훈은 패잔병들을 이끌고 귀국해 버렸다.

(2) 본격적인 참전과 평양전투
명 조정은 조승훈의 패전을 계기로 일본군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과 그들을 제압하려면 절강(浙江) 등지의 화포(火砲) 부대를 동원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에 명 조정은 각지에서 화기수(火器手)를 비롯한 병력을 징발하고, 은을 풀어 군량을 매입하는 등 다시 출병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하지만 북경과 요동 출신 병력들 뿐 아니라 절강, 광동, 사천(四川), 운남(雲南) 등지에서 징발한 병력들이 집결지인 요양(遼陽)까지 모이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렇게 하여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군이 다시 조선으로 들어온 것이 1592년 12월이었다. 당시 명군은 각지에서 징집한 병사들과 유력한 무장들이 개별적으로 거느리는 가정(家丁)으로 구성되었는데 대략 4만 8천명이나 되는 대군이었다. 참전 병력 가운데는 북병(北兵)이라 불리는 요동, 광녕(廣寧), 선부(宣府), 대동(大同) 등지의 기마병 뿐 아니라 남병(南兵)이라 불리는 절강, 광동(廣東) 출신의 포병과 화기수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남병들은 특히 대장군포(大將軍砲), 멸로포(滅虜砲), 호준포(虎 砲) 등 일본군의 조총을 제압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화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제독 이여송은 본래 조선족 출신으로 요동 지역의 군벌 이성량(李成梁)의 아들이었다. 당시 '역전의 명장'으로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명 조정은 이여송을 감독하고(이여송이 조선족 출신이라 그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조선 원정군의 모든 사무를 관장하는 총사령관 격인 경략(經略)에 병부시랑 송응창(宋應昌)을 임명했다. 송응창은 절강 출신으로 유명한 양명학자이기도 했다. 각기 '북병 출신 야전 사령관'과 '남병 출신 총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이여송과 송응창은 서로 미묘한 갈등과 알력을 빚으면서 1593년 1월의 평양전투를 치르고, 강화협상을 시작하는 등 임진왜란 초반의 상황을 주도하게 된다.
명은 조선에 대병을 다시 보내면서 전쟁이 장기화되리라고 예측하지 않았고, 또 그들 스스로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실제 1593년 1월,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의 본진이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전세는 대번에 역전되었다. 평양성에서 패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일본군은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함경도에 머물고 있던 가또 키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병력은 고립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제 명이나 조선이나 모두 전쟁은 일본군의 철수에 의해 끝날 것으로 낙관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하지만 후퇴하는 일본군을 파주(坡州)까지 추격했던 이여송 휘하의 병력이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일본군의 역습에 말려 대패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금방이라도 일본군을 몰아낼 듯이 보였던 명군의 기세는 꺾였고, 전쟁은 다시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3) 강화 협상과 명군의 장기 주둔
벽제관의 패전을 계기로 명 조정과 명군 지휘부는 태도를 바꾸었다. '결전(決戰)'을 벌여 일본군을 몰아내겠다던 종래의 태도에서 돌변하여 이제 강화협상(講和協商)을 통해 일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전쟁이 예상보다 장기화되면서 명 조정에서 전비(戰費) 지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간데다 조선에 파견된 명군 내부에서도 염전의식(厭戰意識)이 퍼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명군 내부에서는 "왜 속국 조선을 위해 끝까지 피를 흘려야 하는가?", "한강 이북 지역을 탈환한 것만으로도 명은 조선에 대해 할 만큼 했다"는 식의 인식이 퍼져갔다. 명 조정은 골동품 상인 출신인 심유경(沈惟敬)을 통해 소서행장과 본격적으로 강화협상에 착수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은 철저히 소외되었다.
하지만 강화협상은 결말을 맺지 못한 채 시간만 끌었다.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로 물러났지만 철수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명군은 이제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철수할 수도, 무작정 주둔을 계속할 수도 없었다. 이 같은 와중에 임진왜란의 성격은 '전쟁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非戰非和)' 어정쩡한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그 같은 상황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난 뒤까지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명 조정은 강화협상의 진전 등 조선의 상황 변화와, 자국 내부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 따라 조선 주둔군의 병력을 조절하기도 하고, 최고 사령관인 경략을 교체했다. 명군 병력은 4만 8천(1592년 12월)→ 5만 1천(1593년 1월)→ 1만 6천(1593년 9월)→ 7만(1596년)→ 9만 2천(1598년 10월) 등의 추이를 보이는데, 강화 협상 초반기에 해당하는 1593년 9월을 제외하면 대략 5만 명에서 10만 명 수준을 유지했다. 또 정유재란 이후에는 이전과는 달리 명의 수군도 조선에 참전했다.
경략 역시 송응창→ 고양겸(顧養謙·1593년 12월 임명)→ 손광(孫鑛·1594년 7월 임명)→ 양호(楊鎬·1597년 3월 임명)·형개(邢 )→ 만세덕(萬世德·1598년 6월 임명) 등의 순으로 교체되었다. 경략직에는 대개 명 조정의 병부시랑(兵部侍郞) 급의 인물이 임명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에는 조선 원정군의 사무를 책임지는 직책을 경리(經理)라 하여 산동우참정(山東右參政) 양호를 임명하고, 조선을 포함한 요동과 산동 일대의 방어 문제를 총괄하는 직책으로 경략을 두어 그 자리에 병부상서였던 형개를 임명했다. 조선 원정군을 감독하고 요동 일대를 방어하는 책임을 맡은 당국자가 한사람 더 늘어난 것이자 경략의 위상이 사실상 더 높아진 셈이다. 정유재란 이후에는 동사(東事)를 어떻게 마무리하느냐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명의 국가적 대사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3. 명군 참전이 남긴 것

1592년 12월, 이여송이 이끄는 대군이 들어온 이후 1600년 9월,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많을 때는 10만여 명의 명군이 조선에 주둔했다. 8년여에 걸친 명군의 주둔은 당시 조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남겼을까? 몇 가지 측면에서 검토해보자.


1) '재조지은(再造之恩)'과 조선 주권의 침해

명군의 참전이 조선에 군사적으로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실제 당시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쫓겨갔던 선조와 조선 조정은 심리적으로 '공황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 같은 형편에서 5만 가까운 명의 대병력이 '구원군'을 표방하면서 조선으로 들어온 것은 분명 '대사건'이었다. 나아가 명군이 평양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전세가 단숨에 역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선조와 조선 조정은 명군의 참전과 원조를 일러 '망해가던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再造之恩)'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명군이 참전하면서 조선의 주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우선 명군이 조선에 진입하면서부터 조선군을 지휘하는 작전권은 사실상 명군 지휘부에게로 넘어갔다. "조선 조정이 명군 지휘부에 작전권을 이양한다"는 내용을 명시한 구체적인 외교 문서가 작성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과 명의 전통적인 관계나 당시의 전황(戰況), 조선이 처해있던 상황 등을 고려하면 조선은 명에 대해 독자적인 작전권을 갖겠다고 내세울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우선 '책봉-조공 체제'라 불리는 양국 관계에서 조선 국왕은 명 황제의 제후(諸侯)로 치부되었고, 명은 조선을 공공연하게 속국(屬國)이라 여기고 있었다. 조선 역시 명을 '천조(天朝)', '상국(上國)', '대국(大國)' 등으로 부르면서 섬기던 상황이었다. 이 같은 현실에서 '구원군'을 표방했던 명군은 참전 초부터 조선군의 작전권을 갖게 되었다.
명군이 진입할 당시 조선이 처해 있던 전황 역시 작전권이 명군 지휘부로 넘어가는데 일조했다. 조승훈 휘하의 명군이 최초로 들어왔던 1592년 6월이나 이여송 휘하의 명군이 다시 들어왔던 1592년 12월 당시 선조와 조선 조정은 평안도까지 쫓겨가 있는 상태였다. 특히 1592년 6월 당시, 일본군이 무서운 기세로 북상하고 평양이 함락되면서부터 조선 신료들 사이에서는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라는 체념적인 분위기마저 번져가고 있었다. 실제 선조는 일본군이 의주까지 북상할 경우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굳힌 상태였다. 비록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기 시작하고,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서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의주에 있던 선조와 조선 조정에게는 별로 실감나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지척에 있는 일본군의 위협이야말로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조선 조정이 이처럼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구원군'을 표방하면서 들어온 명군은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선조는 유격장군에 불과한 명장 사유와 맞절을 나누는가 하면 그에게 "지휘를 삼가 받겠다"고 요청하는 판이었다. 이 같은 형국에서 조선 조정은 명군 지휘관들을 접대하고 병사들에게 군량을 공급하는 문제에 신경을 써야 했고, 조선군의 작전권이 넘어가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따질 겨를이 없었다.
작전권을 비롯한 조선의 주권이 명군에 의해 침해되었던 추세는 강화 협상이 시작되면서부터 더욱 심해졌다. 명은 일본군을 달래기 위해 결전을 포기했고, 조선군에게 일본군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강요했다.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던 권율(權慄)은 송응창에게 불려가 곤장을 맞을 뻔했다. 송응창의 허락 없이 일본군을 공격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593년 4월, 명군은 서울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을 조선군의 보복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정유재란 이후에는 명군의 경략이 서울에 도찰원(都察院)이라는 것을 설치하여 머물면서 조선군의 작전권을 장악했다. 실제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명 수군 제독 진린(陳璘)의 간섭과 압력 때문에 일본군에 대한 독자적인 작전을 펼칠 수 없을 정도였다. 명군 지휘부는 작전권 뿐 아니라 때로는 조선 국왕의 인사권까지 간섭하기도 했다. 또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강화 협상에 조선이 반발하는 기미를 보이자 명 조정에서는 선조를 퇴위시키고, 조선을 직할령(直轄領)으로 삼아 직접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요컨대 강화협상이 시작된 1593년 1월 이후 명군이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작전권을 비롯한 조선의 주권은 명군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되었던 것이다.

2) 명군과 민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국 내부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것을 용인해야 했던 나라들이 필연적으로 안게 되는 문제 가운데 민폐(民弊)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 당시 명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왜란 초반 선조와 조선 조정은 명에 원군을 요청하기로 결정했으면서도 한 때 망설였던 적이 있었다. 바로 명군이 조선에 들어와 자행할지도 모르는 민폐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명군이 진입하면서 그 같은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당시 명군 장병들이 준수해야 할 군령(軍令) 가운데는 "민간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라도 건드리는 자는 목을 벤다", "조선 부녀자를 범하는 자는 목을 벤다"는 등의 조항이 있었지만 민폐는 만연되었다.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는 이국 땅에서 명군 병사들이 받았던 스트레스는 때로 조선의 민간인들에게 민폐로 전가되었다. 특히 명군이 전투에서 패했을 때, 조선의 신료나 백성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않는다고 판단할 때 그들은 극심한 횡포를 부렸다. 약탈, 강 0간, 폭행 등이 자행되었다.
일본과의 강화협상이 시작되고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면서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강화협상이 성과 없이 지속되고, 일본군이 남해안 일대로 철수하여 장기 주둔 상태로 들어서자 명군 역시 남하하여 어정쩡한 대치 상태에 돌입했다. 적과의 결전을 회피한 채 장기간 주둔하는 군대는 군량만 축내게 되고, 군기(軍紀) 역시 풀어지기 마련이다. 군기가 풀어지면 민폐는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희문(吳希文)은 {쇄미록( 尾錄)}에서 당시 명군 주둔지 부근의 백성들은 낮에는 숲에 숨고, 밤에만 이동한다고 적고 있다. 바로 명군의 약탈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조선 조정은 명군이 자행하는 민폐에 대해 이렇다 할 대책이 없었다. 그저 가끔 명군 지휘관들에게 휘하 병력에 대한 단속을 요청했지만 실효성은 없었다. 명군 지휘관 가운데는 '구원군'으로 들어온 자신들이 이역(異域)에서 고생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어지간한 민폐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겠다는 입장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와중에 명군이 자행하는 민폐는 제어할 수 없는 상황까지 악화되었고, 조선 백성들 사이에서는 "명군은 참빗, 일본군은 얼레빗"이라는 속요까지 돌게 되었다. 명군을 '천병(天兵)', '구원군'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의 한편에서, 민폐에 시달리는 하층민들은 명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명군과의 관계를 형상화한 구비설화(口碑說話) 가운데 이여송 등에 대한 이미지가 극히 부정적으로 묘사된 작품이 많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3) 명군 참전과 문화적 접촉

(1) 명군을 따라 들어온 것
명군의 참전을 계기로 조선 국경은 중국인들에게 거의 무제한적으로 개방되었다. 수많은 중국인들이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 가운데는 단연 상인들이 많았다. 전장은 위험하기는 하지만 이익이 널려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명군은 한달에 1냥 50전씩 은(銀)으로 봉급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조선 사회는 주로 곡물이나 면포를 화폐로 썼기 때문에 은이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다. 명나라 상인들은 우선 명군의 봉급으로 뿌려지는 은을 노리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술, 절인 고기, 중국식 된장 등을 싣고 전장을 떠돌았다. 그 가운데는 조선에서 은광을 개발하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 또 일부 상인들은 조선사람들이 좋아하는 털옷이나 모자, 비단 등을 가져와 종로 등지에서 난전을 열고 팔기도 했다. 전쟁중임에도 "중국산 사치품이 넘쳐난다"는 우려가 제기되는가 하면 조선사람들 역시 명 상인들의 행태를 목도하면서 은을 화폐로 쓰는 거래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2) 명군을 둘러싼 사회상
명군이 대규모로 참전하여 장기간 주둔하면서 자연히 조선인과 중국인들 사이의 접촉이 잦아졌다. 우선 많은 명군들이 동거, 매춘, 결혼 등의 형태로 조선 여자들과 맺어졌다. 당시 사천병(四川兵)을 이끌고 참전했던 지휘관 유정(劉綎) 역시 조선 여자와의 사이에 아이를 두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여자들 뿐 아니라 명군 주둔지 부근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모여들었다.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은 조선인들에 비해 보급 상황이 좋은 명군에게 의탁해서 목숨을 부지하기도 했다. 명군 지휘관 가운데는 주둔지 부근에 진제장(賑濟場)을 두어 굶주린 조선인들을 구휼하는 사람도 있었다. 간혹 조선인 고아들을 거두어 키우거나, 조선인을 휘하에 두고 방자(房子)로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명군과 이런저런 사연을 가진 사람들은 명군이 철수할 때 그들을 따라 조선을 떠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 조정은 인구의 유출을 막기 위해 그들을 단속했지만 명군을 따라 중국 내륙으로 들어간 사람은 의외로 많았다.
명군의 위세를 등에 업고 조선 사람들을 괴롭히는 부류도 있었다. 1599년, 명군 지휘관 이영(李寧)에게 투탁했던 막동(莫同)이란 노비는 양반가의 계집종을 겁탈했다가 이영의 비호를 받고 석방되었다. 그는 양반가에 난입했을 때 명군 복장을 하고 있었고, 체포된 뒤에도 중국어를 지껄였다고 한다. 명군 복장을 한 강도들이 떼지어 설치기도 하고, 힘있는 명군 지휘관에게 줄을 대어 관직을 얻으려고 덤비는 부류들도 나타나고 있었다. 명군의 주둔이 이어지면서 나타난 웃지 못할 장면들이었다.

(3) 명군 지휘부의 '조선개조계획'
조선인과 명군들 사이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다양한 명의 문물이 조선으로 흘러들어 왔다. 명 문물 가운데는 자연스럽게 유입된 것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명군 지휘관들이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던 것도 있었다.
왜란 기간 내내 대부분의 명군 지휘관들은 조선의 '숭문주의(崇文主義)'를 비판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조선이 너무 문치만 숭상하고 무비(武備)를 경시했기 때문에 전쟁을 불렀다"고 조선의 '문약(文弱)'을 질타했다. 그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명군 지휘부는 병사의 훈련, 진법(陣法), 화포제도 등 군사제도 전반을 명나라 방식으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한 때 조선은 그들 '명나라 군사 고문단'의 요구대로 중국인 교사(敎師)들을 초빙해다가 병력을 훈련시키는데 투입하기도 했다.
명군 지휘관들은 주자학(朱子學)만을 정통으로 여기는 조선의 학풍도 불만이었다. 송응창 같은 경우는 조선의 학풍을 양명학(陽明學) 중심으로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의 진중(陣中)으로 조선 신료들을 불러다가 경서를 읽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관우(關羽)를 모신 관왕묘(關王廟)가 전국 각지에 세워진 것도 명군 지휘부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명군의 철수가 임박해오자 명군 지휘관들은 '조선선후사의(朝鮮善後事宜)'라는 명목으로 일종의 '전후(戰後) 복구 방안'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대개 무비를 갖출 것, 상공업을 육성하여 재정을 튼튼하게 할 것, 중국식으로 체제를 개혁할 것 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실용적인 분위기가 강했던 사회에서 성장한 명군 지휘관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이 철수한 뒤 조선의 '장래'가 심히 걱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장기간의 조선 주둔을 통해 명은 조선의 내부 사정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되었고, 그를 토대로 전후 조선의 사회를 '명나라식 모델'에 맞춰 개조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조선은 군사관계 문물 전반을 명나라 방식으로 바꾸는 데는 대체로 동의했지만 양명학 등을 수용하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명군의 주둔, 조선인과 명군 사이의 잦은 접촉을 통해 명 문화에 대해 눈을 뜨고, 세계관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명군의 참전은 분명 문화접변(文化接變)의 한 계기로 작용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최영희, 1975 {임진왜란중의 사회동태} 한국연구원
임철호, 1989 {설화와 민중의 역사의식} 집문당
정병철, 1996 {명말청초의 화북사회 연구}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사논문
최소자, 1997 {명청시대 중·한 관계사 연구} 이화여대 출판부
한명기, 1999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한명기, 2000 {광해군} 역사비평사
石原道博, 1964 {倭寇} (東京, 吉川弘文館)
中村榮孝, 1965 {日鮮關係史の硏究} (東京, 吉川弘文館)
李光濤, 1972 {朝鮮壬辰倭禍硏究} (臺北, 中央硏究院歷史語言硏究所)
鄭樑生, 1984 {明日關係史の硏究} (東京, 雄山閣)
北島万次, 1990 {豊臣秀吉の對外認識と朝鮮侵略} (東京, 校倉書房)
李啓煌, 1997 {文祿慶長の役と東アジア} (京都, 臨川書店)

1. 임진왜란과 중국

1) 임진왜란은 세계사적 대사건

* 동북아시아의 '세계대전'
* 일본군 18만, 명군 10여만, 조선군 10여만
* 누르하치(老兒哈赤)의 성장에도 일정 영향



2) 중국이 보는 임진왜란→ 명칭에서 드러나는 역사인식

* 동원일역(東援一役), '만력동원지역(萬曆東援之役)'
* 동사(東事)
* '왜구의 난동', '청일전쟁의 선구'

* 항왜원조(抗倭援朝)와 항미원조(抗美援朝)
→ 강대국들의 각축장이자 전략적 요충인 한반도에 대한 지대한 관심
* cf. 영화 較量


2. 명군의 참전 목적과 참전 과정

1) 명군의 참전 목적

① 참전 명분

* '책봉-조공 체제' 아래서 충순(忠順)했던 조선을 구원해야 한다


② 참전의 실제 목적

* 요동(遼東)의 보호→ 요동은 이(齒), 조선은 입술(脣): 脣亡齒寒의 관계
* 왜구(倭寇)에 대한 공포, 가도입명(假道入明)의 표방
* 조선의 험준한 지형→ 방어 용이→ 적은 병력→ 전비(戰費) 절감


③ 참전 목적을 둘러싼 조선과의 갈등

* 명은 조선이 '순망치한' 운운하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
→ 선조와 명나라 관리 유황상(劉黃裳)의 대화

"전에 전하께서 '倭奴가 不道하여 相國을 침범하려고 하기에 조선 君臣이 대의로써 그를 배척했다가 마침내 그 노여움을 샀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왜노가 중국을 침범하려면 절강이나 영파부(寧波府) 등지로도 침범하여 올 수 있는데 하필 조선을 경유하겠습니까?…… 황제께서 속국이 兵火를 입은 것을 염려하시어 天兵을 동원하여 구원하시고, 또 琉球와 暹羅에도 명을 내려 왜노의 소굴을 소탕하도록 했습니다. 조선은 다만 皇恩에 감사해야 할 따름이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신료들에게도 경계하여 이런 말을 못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宣祖實錄} 권34 선조 26년 1월 6일)

2) 명군의 참전 과정

① 처음에는 사태를 주시하며 참전 여부를 저울질

* 전쟁이 일어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명: 1590년이래 許儀後 등의 보고
* '고구려의 후예' 답지 않은 조선의 참패에 대한 의구심→ "고토(故土) 요동 수복"
* 자국 해안의 방어태세 점검
* 조선의 청원(請援)과 선조(宣祖)의 진위 확인


② 명군의 최초 참전: 1592년 6월

* 조승훈(祖承訓) 휘하의 북병(北兵) 약 3,500명 cf. 남병(南兵)
* 곧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에 참패
∵ 빈약한 전투력, 일본군에 대한 경시

③ 명군의 본격적인 참전: 1592년 12월

* 조승훈의 패전을 계기로 명 조정은 일본군의 전력(戰力)을 제대로 파악
* 남병과 북병을 합하여 대략 48,000여명에 다수의 화포(火砲) 보유
* 지휘관은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


④ 평양 전투와 벽제 전투: 1593년 1월

* 평양 전투의 승리: 화포의 위력, 전세는 단번에 역전
* 논공행상과 이여송 vs. 송응창의 갈등→ 조선인 학살, 벽제전투 패전으로 연결
* 벽제 전투 패전: 이여송의 무리한 추격→ 평양 전투 승리 효과 반감

3) 강화 협상과 파탄, 그리고 정유재란

① 강화 협상의 시작

* 벽제 전투의 패전→ 명은 자신들의 참전 '목적'을 다시 환기하고 강화로 방향 전환
"우리는 조선에 대해 할만큼 했다" "우리가 왜 조선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하나?"
* 명 내부의 재정 문제, 명군 내부의 염전의식(厭戰意識)
* 심유경(沈惟敬)과 고니시의 협상


② 강화협상의 전개와 파탄

* "기만에 가득찬 사기극": 명과 일본의 요구 조건은 근본적인 모순 관계
* 사기극의 장기화→ 전쟁의 성격을 변화시킴 (非戰非和)
* 1596년(선조 29) 4월 3일: 책봉정사 이종성(李宗城)의 탈주 사건


③ 정유재란(丁酉再亂)의 발발: 1597년

* 일본군의 재침, 명군 대병력(약 10여만)의 재진입, 수군까지 참전
* 간헐적인 전투가 진행
남원 전투(8월), 직산 전투(9월), 울산 전투(11월)
* 전투는 진행되어도 명의 본심은 강화에 있었음

邢 旣身赴王京 人心始定  召參軍李應試問計 應試請問朝廷主畵云何  曰 陽戰陰和 陽剿陰撫 政府八字密畵 無泄也 應試曰 然則易耳… ({明史} 권320 列傳 208 朝鮮)



3. 명군 참전이 조선에 남긴 것

1) 정치적 영향

① 조선 주권의 침해

* '구원군'인 명군에게 작전권이 넘어감
* 강화협상 과정에서 조선은 철저히 소외: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조선은 명 내정의 변동에 휘둘리게 됨
ex. 권율(權慄)과 행주대첩, '심유경 표첩(標帖)', 일본군을 '에스코트'했던 명군
* 왕위교체론, 직할통치론의 대두

② '재조지은(再造之恩)'의 형성

* "망해가던 나라를 다시 세워 주었다"
* 재조지은 강조의 양면성

答曰 今此平賊之事 專由天兵 我國將士 不過或隨從天兵之後 或幸得零賊之頭而已 未嘗 一賊酋 陷一賊陣 其中如李元二將海上之  權慄幸州之捷 差强表表 若論天兵出來之由 則皆是扈從諸臣 間關顚沛 隨予則到義州  號天朝 得以討賊 恢復彊土耳({扈聖宣武淸難功臣儀軌}, 1601년 3월 13일)




2) 명군과 민폐

① 명군의 군기(軍紀) 해이로 인한 민폐
* 명군의 장기 주둔, 패전, 염전의식은 민폐로 전가됨
* 강화협상 이후에는 상황이 더 악화
"명군은 참빗, 일본군은 얼레빗"

②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과정의 민폐

* 장기 주둔→ 명 내부의 재정 악화→ 조선에 군량과 군수 물자를 요구
* 빈번히 왕래하는 명의 관리들을 접대하는 문제
* 군량 보급에서 '명군 우선'의 원칙→ 의존의 악순환
"명군에게 주고 남은 썩은 것이라도 좋으니 조선군도 좀 생각해 주소서"


3) 명군 참전과 문화적 접촉

① 명군을 따라 들어온 것

* 쇄도하는 명나라 상인들 ∵ 명군은 봉급을 銀으로 받는 군대
* 은광개발의 열풍
* 명나라 물자의 범람과 사치풍조



② 명군을 둘러싼 사회상

* 명군과 조선인의 접촉: 결혼, 동거, 방자(房子)
* 조선인의 중국 유출
* 명군 도망병의 조선 정착
* 명군의 권위에 기댄 '해프닝'들


③ 명군 지휘부의 '조선개조계획'

* 명군 지휘부의 조선 비판: '문약(文弱)'
* 무비(武備)에 대한 강조와 명나라식 병법의 수용 요구
cf. 양명학(陽明學)의 강조, 관왕묘(關王廟)의 건립
* 조선선후사의(朝鮮善後事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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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습니다 16-09-25 03:20
   
글쎄요.. 평양점령이후의 상황을 보더라도 명군의 도움이 없었으면 일본군이 시간이 조금 걸렸지 조선을 모두 점령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거라 보이네요.
     
국산아몬드 16-09-25 04:07
   
어떤면에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오히려 평양성점령때 심각한 병참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는데요
너무 빨리 달려오느라 병참선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의주까지 어떻게 가겠어요?
바토 16-09-25 06:40
   
잼있는 주장이네요 
선조는 왜 참전해달라고 하고  또 쓸모없으니 돌아 가라고 얘기를 안했을까?
     
Marauder 16-09-25 11:48
   
선조는 사대주의자라서 실제로 도움이 안되었어도 부를인간이라 여기서 꺼내는건 별상관없다고봅니다.
          
바토 16-09-25 12:28
   
그럼왜?  조선왕조실록에 명군철수를 주장한 신하가  하나도 없죠?
               
고이왕 16-09-27 10:57
   
조선왕조실록에 명군 철수를 주장한 사람이 없다니요 그게 기록에 나오는 이야기인지 궁금합니다..
                    
바토 16-09-27 12:02
   
조선왕조실록 안보섰어요? 인터넷에 다 나와있습니다.
               
Sulpen 17-12-14 09:46
   
애초에 명군 참전 자체를 거부한 신하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단 참전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상황에서 참전한 명군을 철수하라고 말하는게 참으로 이치에 맞는 말이군요
그노스 16-09-25 06:49
   
명군의 실제 참전 명분과 그 과정에 대해서 잘 정리해주셨습니다.
조선의 청병에 대해서 명 내부에서 논란을 갖다가 자신들의 요동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을 돕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군대를 보내면서, 조선과 일본의 야합을 명이 의심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실록을 보시면 조선이 얼마나 다급하고 절박하게 청병을 했는지 나오는만큼 원조한 이에게도 나름의 꿍꿍이가 있었다고 지적한다고 해서 명군 참전의 의의가 사라지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참전해줘서 열라게 감사하다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고 봅니다.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도 자신들의 해상영역을 유지하기 위한 대륙의 거점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자기들대로 계산기 안두들겨보고 원군을 보내는 경우는 드물다고 생각이 드네요.

물론 전쟁 초기에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황과 조선의 다급한 요청 때문에 서둘러 긁어 보내왔던 명의 군대가 잡졸이더라 하며 이런 군대를 먹이느라고 조선 군대가 굶주리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기록도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룩 양질의 후속군대가 조선에 들어온 것도 사실입니다.
명국의 해상 지역을 약탈한 왜군에 맞서 효과적인 결과를 보인 절강병법을 숙지한 경험있는 유명한 절강군대의 추레하고 빈약한 무장에 조선 민중이 처음에는 조소를, 나중엔 도울 마음이 없다며 분노를 표했지만 그들의 분전에 놀라워했다 라는 기록도 보이더군요.

심리적인 도움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2차대전때 프랑스는 자국내에 아직 전쟁 수행 역량이 남아 있었음에도 패배의식에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는걸 상기해 보게 되네요.
왜군의 살인과 약탈에 저항해 일어난 의병과는 별개로, 정부의 무능에 절망해 왜군에 동조하는 민중들이 생겨나는 민심이반, 그에 따라 민중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가 점차 약화되는 상황에다가 국왕이 도망가다못해 남의 영토로 달아나겠다고 드립까지 할만큼 패배의식이 감돌고 있을때 자기 옆에서 나름 도움을 주는 이웃이 있다면(명군이던 누구던간에) 전쟁수행 지속의지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전황이 호전되니 도리어 그 이웃이 안방마저 자기것인냥 위세를 부린 것이 큰 문제가 되었지만요.

명군들의 약탈이 왜군보다 심했다는 기록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청병을 원했던 조선측의 상황을 엿볼 필요가 있을거 같아요.
말씀하신대로 조선에선 은의 유통이 활발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명국은 자국의 병졸들에게 식량을 현지에서 직접 구입해 먹으라며 은자를 지급해 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 상인들에겐 그 은자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낯설었고 받는다해도 대군을 일시에 먹일 거대한 상권이 이루어져있지 않아 명군쪽에서는 돈주고도 식량을 구할수 없는 일이 벌어져 굶주리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물론 군인이 굶주린다고 약탈은 절대로 해선 안되지만, 청병한 조선 정부에서 현지 보급을 어느 정도 가능케 해주었어야 함으로 정부의 일부 책임을 피할수가 없다고 봅니다.
결국 굶주린 명군을 먹이느라 조선군이 굶는 상황이 벌어지는 악순환...

원죄는 침략했던 왜군의 몫이지만 미리 방비만 든든히 했다면 이렇게까지 우리가 외세에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었던만큼, 선조와 그를 따른 지배층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생깁니다(고구려때처럼 영토를 넓히라고 요구한건 아니잖아. 집이나 잘 지키라고. 그런데...)
     
mymiky 16-09-25 07:58
   
근데, 웃긴게 방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실제로는 선조와 조정에서도 왜군이 처들어 온다니까
방비책을 강구했습니다.
안 한적 없어요, 사람들이 잘 모르더군요;;

성벽도 쌓고 무기가 얼마나 갖추어져 있나 실태조사도 나갔고,
백성들 훈련- 지금의 예비군 훈련같은 것도 하긴 했었죠.

근데, 백성들이

전쟁은 무슨-.-;; 천하가 이렇게 태평한데,
임금이, 졸렬한 신하 하나가 전쟁난다고 꼬셔서, 우릴 이리 못 살게 군다면서
훈련도 제대로 안 받고, 땡땡이 치고 그랬습니다.

걍.. 전반적으로 사회 분위기가 그랬어요.
백성들이 성벽 수리에 동원되어도, 다 도망가고 그랬습니다.
힘든일 시킨다고..

200년 장기간의 평화가 준 안일함과
한국인 특유의 안전불감증 같은 것인데, 그게 하루이틀 문제도 아니였는데다가

선조나 류성용이나 다른 관료들도, 전란이 일어나도,
많아봤자 1-2만 정도?겠지 생각했습니다.

10만의 군대가 우리나라에 들어온게 고려초기 거란족의 침입때가 마지막이라
선조시절엔 거의 500년전의 일이여서, 별로 감흥이 안 왔고

기껏 중종때 일어난 왜관에서 왜인들이 일으킨 삼포의 난 정도가 최근의 일이였을텐데
뭐 그것도 수천명?정도였고, 한 20일만에 진압 완료했었던지라..

이번에도, 그와 비슷할꺼라고 생각했죠.
근데, 현실은 ㅋㅋㅋㅋㅋ 그게 아니였지 말입니다;;
          
그노스 16-09-25 09:08
   
네, 마이미키님 말씀에도 공감이 갑니다.
수많은 이들의 책임속에 개인적으로 전 결국 선조의 책임이 가장 크지 않았나 합니다. 공화정이 아니라 전제주의 치하에서 권력을 집중부여 받은 군주가 전황이 불리해 수일내에 도성까지 내주고 도주하여 타국으로의 망명까지 언급한건 비난받아도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전쟁준비에 들어가며(그것도 방어전) 백성들을 닥달하는건, 현재 우리에게도 달갑지 않은 일과 같겠지만 조선은 공화체제가 아니라 전제체제이므로 전쟁 준비로 백성의 원성이 자자하니 준비가 유명무실해졌다해도 가장 큰 책임은 군주가 지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더욱이 이 시대의 군왕이 조선 후기나 말기처럼 신권에만 휘둘리는 시대는 아니었고, 선조는 정여립의 기축옥사 이후에 나름 왕권을 강화했다고 평가받는데 일단의 권력을 가지고 방비를 한것 치고는 너무 허술, 부족했다고 느낍니다(기병도 아니고 보병에 의해 수일내에 도성까지 뚫린건)
도요토미가 공공연히 조선침략을 포르투칼 신부에게 알릴 정도로 군사 계획이 비밀도 아니었고, 본능적으로 난리가 날것을 깨달은 조선 민중들이, 전쟁전에 지형을 염탐하는 왜군첩자들을 찾아내 때려죽였다는 기록을 보아도 조선 지배층의 방비는 너무 부실했다는 생각이 드네요(고구려때처럼 예방용 선제공격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전 이 시대 조선의 자체 역량이 절대로 부족했다고 생각치 않으므로 실전 경험이 많은 왜군을 상대 했어도 홈그라운드에서 피해가 컸을지언정 방비만 충실히 했더라면 쉽진 않아도 자력으로 막아냈을수 있었다고 보는 만큼 최고 지도자의 책임에 더 무게를 싣고 싶네요.
저 시기의 조선이란 국가의 전체 사회 분위기가 엉망인 부분이 있었다는 것에도 공감하지만, 자칫하면 망국으로 치달을뻔 했던 난리에 대해 형태가 없는 시대나 사회 분위기가 대신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라 사료됩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며 사회와 국가를 만드는건 그 역사를 쓰는 인간이므로 사회 분위기라는 무형의 탓으로 돌리는건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고로 전 임금님과 지배층에게 다수표^^
               
Marauder 16-09-25 11:56
   
실재로 6만 vs 천오백의 전투에서 조선이 패했고 신립은 하도 병사들이 도망치니까 배수의 진같은것을 쓰는 이상한짓을 했죠... 이순신이 수군에서 이긴것 또한 배에서 도망칠수가 없고 명량해전에선 이순신혼자서 막다가 하도 호통을 치니까 그때서야 12척이 도와주러왔던... 이런분위기라면 그나마 수전에서라도 이긴 이순신이 대단한거고 육군이었다면 누구라도 이기기힘들었을거라고봅니다. 그전의 허무한 패배도 위설명보니까 다 이해가 가네요. 뭐 군대의 참패의 가장 큰 원인은 지휘관이라지만 청나라때도 이런일이 있던걸로 알아서...
                    
그노스 16-09-25 12:16
   
그렇죠. 말씀하신 신립군의 탄금대에서의 탈영이나 용인전투 같은 참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평소에 미리미리 훈련시키고 잘 대비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시대에도 제대로 훈련이 안된 장정들을 모아다가 총들고 쏘라고 하면 다 도망가버릴테니까요.
          
12척 16-09-25 09:09
   
니탕개 검색이요.
득운 16-09-25 06:56
   
6.25때 미군
임진왜란때는 명군.
그놈의 병참..어디서부터 이딴 개소리가 만연하는거지.

일본군이 싸우기 싫어지기 시작한건 선조랑 명나라 때문이야.

일본 내전처럼, 수도 성 점령하면 게임 끝인줄 알고 한양까지 겁나 뛰었는데, 선조 내뺌,
대장이 내뺐는데, 이상하게 통치권이 안 넘어 옴.
대륙은 뭔가 다르다는 걸 느낌.
장기전 삘.
안 그래도 하기 싫은 원정, 이 자체만으로 사기가 막 저하됌
평양 스톱.
거기에 명군까지 쳐들어 옴.
평양 뺏김.
완전히 싸우기 싫어짐.
집에 가고 싶어짐.

이거라고. 뭔 병참 타령이야
     
섬나라호빗 16-09-25 16:34
   
병법을 모르는 거죠 내빼는 게 당연하지 전세계에서 피신 안 한 사례가 있기나 한가요?

병법 모르고 지들 방식대로 하다가 식량 후달려서 망한 겁니다

식량 없이 전쟁을 어떻게 함? 고수전쟁도 비슷한 양상 아닌가요?
mymiky 16-09-25 07:37
   
명군이 도움이 되긴 했죠.
학자들도 객관적으로 명군 도움 안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 없습니다.

시청율에 목마른 드라마나 국민여론상,
조선군의 힘과 이순신 때문에 이겼다고 하는 사람이 많지.
그게 더 뽀대나는 일이기도 하고,

뭐, 우리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겠지만..
아시아 국가들이 자기들 특유의 민족사관?이 아주 강해요..

한국이 민족주의 때문에 명군 다 쓸데없고, 조선군 짱! 이순신 짱!
중국 또한 민족주의 때문에, 명군 짱짱짱!
일본 또한, 자기들 흑역사라서 걍 넘어가버리던가, 잘 가르치지도 않음.

제각각, 자기 편한데로 보고 있는게 임진왜란인듯 합니다.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고,
어쨎거나 명군의 참전으로 일본군도 부담을 많이 느끼게 되어
초반 전투에 비해, 후반엔 거의 왜성에 짱 박혀있게 됩니다.

정유재란때는 거의 명군이 주력이였어요.. 거의 10만이 넘어가는 군사들이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조선군들은 지방에 가서 농사짓고, 고향 재건하라고 얼마 안 남기고 내려 보냈고-

그 덕분에 조선으로써도 부담을 퍽-줄일수 있었죠.
거기다 명황제가 은자며, 쌀이며, 구원물품도 실어 날라다주고..
그래서 만력제 별명이 고려천자임..

우리나라는 명군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중국은 중국대로 명군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승리의 요인에는 단순히 한가지만 있는건 아닙니다.
여러 요인들이 합해져 시너지가 나야 성공하는 것이지..

보통 후대의 현대인들이,
떠오르는 청나라와 손 안 잡고, 끈 떨어진 명나라에 목 매었다고
우리 조상들을 한심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대 조선인들에게 명나라는 오늘날 미국 입니다.
하나도 다를거 없어요.

미군이 때때로 사고치고 다녀도
미군 철수하라고 하면, 대다수는 그 인간을 약간 미친놈? 빨갱이?로 보듯이..

명군이 아무리 참빗이네 어쩌네 해도
당장, 똥줄이 타는데 찬밥 더운밥 따질 것도 없었고

당시 백성들 여론도, 그래도 오랑캐들 보다는 왜란때 파병해준 명나라가 낫지..
라고 생각했던건 역사적 사실이거든요-.-

항상 드라마에선,
광해가 명군이고( 미화빨에 어이가 없네 ㅋㅋㅋ)
인조가 바보라고 아주 단순하게 처리되어 나오지만 ㅋㅋㅋ
타샤 16-09-25 09:47
   
병참...
미친...

옛날에도 병참 지원을 위해 철도를 징발하고, 트럭을 징발해서 수송하는줄 아는 모양이네...


왜군이나 명군이나 병참은 현지 조달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그래서 명군의 군량미 대느라 허덕일 수 밖에 없는거고...

그래서 왜군이 평양까지 올라왔어도 병참 문제가 없는거고...

따라서 병참문제가 없기 때문에 명군이 없었으면 바로 점령 가능합니다.
의주 점령 했으면 선조는 명나라로 넘어갔을거고, 그때부턴 선전 선동이 가능하죠.

"임금은 너희를 버리고 도망갔으니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


병참 병참 하는데, 현지 조달이 아니라 하더라도...

도망가는 조정 대신들과(여기에 류성룡도 포함되어 있었죠?) 쫓아가는 왜군...
어디가 더 유리할까요?

625 이야기를 해볼까요?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했어요.
그리고 바로 10월에 압록강에 도달했죠.

3일 정도 지체된건, 38선에서 멈춰서는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를 망설였던거 뿐이고.
실제로는 일주일도 안되서 압록강에 갔습니다.

병참지원? 물론 현대라서 제대로 되겠지만, 그런거 없어도 가능해요.
왠줄 아세요?

도망가는 놈들은 전쟁 물자를 챙기지 못합니다.
심지어 총까지 무거워서 버리고 도망가죠.

쫓아가는 쪽은 매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군비를 튼튼히 하고 쫓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생기는건, 저항이 없어서죠.

조선도 마찬가지였어요. 별다른 저항을 할 병력도 없고, 병참도 없고...
그러니 왜군이 몰려와서 의주를 쳤으면 바로 함락입니다.
     
스코티쉬 16-09-25 23:04
   
논산에서 조교로 병장제대 했습니다만,
몇달에서 몇년씩, 병참도 다 현지조달하면 되니까
맨몸에 무장만 걸치고 수만명씩 보내도 된다는 거군요.

군대는 갔다오셨음??
     
구름위하늘 16-09-26 08:49
   
대형 보급창고를 털지 않으면,
민간을 통한 현지조달로 해결할 수 있는 병참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일본군은 평양성 점령으로 성에 쌓인 보급품으로 병참의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정도이겠죠.

단기전이면 몰라도 전쟁이 길어지면 병참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일본의 평양성 점령 시점에서 의주 공략의 가능성은 높게 평가하고
그것을 막아낸 명군의 역할론도 상당히 인정합니다.

하지만, 병참을 너무 쉽게 보는 것 같네요.
전쟁에서 50% 이상이 병참이 주도하거든요.
미군의 무서움은 무기와 숙련된 병력도 있지만,
그 무시무시한 병참 능력에도 있거든요.
미군이 병참능력이 안된다면, 지금처럼 세계의 경찰이 아니라 지역 강군으로 머물렀을 것 입니다.
진실게임 16-09-25 10:05
   
왜성 공격한 전투 같은 걸 봐도 동원 숫자만 조선군 1만 몇 천, 명군 3만 몇천.

조선군 보다 배는 더 많이 참여했는데 도움이 안된 군대...라고 말할 수는 없죠.
바람노래방 16-09-25 13:41
   
선조는 자신의 도망을 명군에게 구원요청 하러 간것이라는 개소리를 하죠!
그래서 선조는 조선군의 전공의 무시하고 명군은 치켜세우기를 반복합니다!
초반의 명군이 도움된건 맞지만 이후 명군은 지속적으로 전투를 피하죠!
명군에게 전투를 독려하는 조선 관료를 매질까지하고 선조는 이걸 또 쉴드치죠!

임란 전 기간동안 거의 대부분의 전투는 조선군이  했고,  더 심각한 문제는 명군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군을 지속적으로  감축하는 바람에 단독작전에 심각한 지장을 받을 정도로 감축해버렸다  점입니다!
이순신 장군도 병참을 조정에 의지했다면 필연적으로 해체 됐을겁니다!
두리네이터 16-09-25 15:14
   
솔직히 엠엘비파크같은데 가서 이런 주장하면 최다댓글 장판파찍고 국x환자 취급받을듯. .
Centurion 16-09-25 16:09
   
임진왜란 때 평양성 수복과
정유재란 때 직산전투, 남해안 왜성 공략 시즌까지는 확실히 도움이 된건 사실인데..

명나라군은 평양성 수복 이후 벽제관에서 왜군 매복에 깨진 후로 협상하며 4년 정도 전쟁 안함.

그 다음에 정유재란이 일어나는데..
당시 조선군은 식량난으로 농사지으러 돌려보낸터라, 명군이 숫적으로 다수였고,

직산전투까지만 해도 명나라군이 그렇게 많았던건 아니지만, 일부 선발대가 남하해 직산전투벌이고,
그 후 대병력이 투입되면서 일본군이 명량대첩 패배와 직산전투의 경험 이후 다시 남해안으로 물러감.

어쨌든,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북상을 막을만한 대병력이 '제승방략'에 따라 모이지 않거나..
혹은 북방의 정예군을 동원했어도, 지휘력 부족으로 삽질하다 깨먹고,
남쪽의 근왕병이 올라가도, 사기와 훈련부족으로 우왕좌왕하다 깨지는 상황에..
이여송이 끌고온 4만3천명의 명군이 급한 불 끄는데 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임.

비슷한걸로 따지면.. 6.25 때 미군이 스미스 특임대대와 미 24사단 투입했다 깨지고(조승훈의 명군 3천명)
낙동강 방어선에 미군이 투입되서 방어선 유지해준 역할이랑 비슷함.

(평양에서 고니시의 1군만 깨졌을 뿐, 일본군이 숫적으로 더 많긴 했으나,
 명나라 개입에 슬슬 일이 꼬였다 싶었는지 쌍방이 휴전상태로 협상함. 물론 점령지역을 넘겨달라 이딴 협상)

어쨌든 도움은 된게 사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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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 명군의 참전 이유





(명나라 군대 기록화)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이유에 관해서는 명백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다. 그런고로 여러가지 잡스런 야사들이 많지만 이 전쟁의 목적이나 전략적인 시각에서 보나 참전할 필요성은 명백했다.

우선 상술한 내용을 보면 알다시피, 당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궁극적인 목적은 명나라를 정복하여 중국 대륙에 진출하는 것이었지 조선을 정복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본래 조선에 통보한 요구사항도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속할 것과 명나라를 치는데 앞잡이가 될 것' 이었고, 이런 불손한 내용을 그대로 전달했다가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 대마도주가 온건하게 돌려 말한답시고 바꾼 것도 '명을 치러 가는데 조선은 명으로 침공할 길을 빌려달라'는 내용이었으므로 어느 쪽이든 일본이 명나라를 침공하겠다는 의사는 분명했다.

또한 당시 명나라는 북쪽에는 북원과 적대적이라 토목의 변이 일어난 적도 있고, 남쪽 국경에는 베트남과도 전쟁을 치뤄 점령했다가 물러난 적도 있다. 게다가 이때까지는 큰 위협은 아니었지만 여진족도 있다. 이런 판국에 일본은 명나라를 정벌하겠다고 대놓고 적대적인대다가 2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데, 조선을 집어삼키면 국력이 더 커지고 명나라와 국경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면 명나라의 동북 국경에 못해도 수십만 병력을 상시 주둔시켜야 하고 이 막대한 비용을 두고두고 감당해야 한다. 게다가 일본이 북원과 손을 잡고 명나라를 침공한다면 아무리 명나라라도 간단히 막아내기는 힘들 것이다. 반면에, 조선은 건국이후 명나라에 침략은 커녕 절대적인 우호국이었으니, 당연히 조선을 살려두는게 명나라에 이득이 된다. 온 사방이 적국으로 둘러쌓이는건 명나라로서도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만약 명나라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수백년간 수십만 대군을 주둔시킬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으니 단기적으로는 임진왜란에 참전하는게 명나라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참전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은 만력제가 동의한 것도 사실이나 더 중요한건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인 석성의 적극적인 참전 주장때문이었다. 석성은 홍순언과의 야사가 유명하지만 종계변무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야사는 야사. 실제로는 저런 야사때문에 조선을 도운게 아니라 병부상서를 맡았던 인물인 만큼 당시 명나라의 국제정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3.4.2. 명군의 참전과 역할

아무튼 그 사이 조선의 연이은 요청으로 명도 심각성을 느끼고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 참전했다. 참전 초기에는 빠르게 일본군을 밀어내며 금세 일본군을 몰아낼 줄 알았으나 오히려 일본군이 종전 협상을 요청할 때마다 그걸 들어주느라 시간을 끌어서 전쟁이 7년이나 지속되게 된 큰 이유가 되었다. 조선군이야 어떤 방법을 쓰던 당장 일본을 몰아내고 싶었겠지만, 명군은 일본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는 입장이였기 때문에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싸우지 않고 공을 세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외교를 담당한게 심유경인 게 문제.[41]

제1차 조승훈의 5천명은 평양성 공격에 실패(7월), 제2차 이여송이 이끄는 4만명이 12월 압록강을 건너 다음해 정월 최신 대포로 포격해 평양성을 탈환(1593.1.27)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무리하게 남하하다가 고양 벽제관(碧蹄館)에서 매복에 걸려 패배하였고, 개성으로 퇴각한 뒤 전선은 임진강을 경계로 교착상태를 벌인다. 그 뒤 일본군은 행주 대첩에서 패배, 북쪽으로는 명군 남쪽으로는 조선군으로 쌈싸먹힐 위기에 처하였고, 명나라와 교섭을 진행하여 결국 한양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1593.5.18)



하지만 명군의 참전은 분명히 의의가 있었고, 특별한 케이스인 벽제관 전투 같은 몇몇 패배한 전투가 있기는 하지만 평양성 전투, 직산 전투처럼 승리한 전투도 있고 명군이 못 싸운 것이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명군이 형편없는 군대였다면 전쟁 중 조선에서 명군의 편제와 교리, 무기를 다급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이여송이 평양을 우수한 화력과 기술력, 전략으로 점령했을 때, 일본군은 정말 심각한 패닉에 빠졌고 조선군의 사기는 고조되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상대가 명군이라서 도망치는 경우도 많았다.[42]

결론적으로 명군은 그럭저럭 제 역할을 해냈으며, 7년동안 각지에서 명군과 조선군이 연합해서 많은 전투에서 활약했다. 명군의 참전으로 인해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더불어 명군이 대규모의 육군을 파병하게 되면서 조선은 그때까지 유지하던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며 숫자를 줄이게 된다. 병농일치제인 조선에게 있어 생산 가능 인구를 군대에 잡아두는건 국가 생산력에도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는 부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17만에 육박했던 조선군은 명군의 참전이후 크게 줄어든다.

따지고 보면 임진왜란 당시의 명군은 후반의 조선 조정의 주요 딜탱 역할을 수행한 셈이고, 조선의 수군, 근왕병, 의병이 서폿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유재란 즈음에는 숫적으로 명군이 주력이 되었다.[43]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군은 최대 17만, 명군은 약 5만이었지만 정유재란 당시에 조선군은 약 3만, 명군은 최대 11만에 달했다.

이 외에도 명군이 아니라 명나라가 조선에 큰 도움을 준 바가 또 있다. 가령, 임진년 이후부터 명나라는 산동 등지에서 군량을 조달하여 현지의 명나라 병사들과 조선인들에게 뿌렸는데, 이 덕에 전쟁과 기근[44]에 따른 조선의 식량사정이 나아졌다. 사실 명나라 역시 자국 군대가 조선에 끼친 바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배려하는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때 지원한 식량은 후일 조선에서 환대미라 하여 다시 상환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명의 지원은 2차대전 당시 미군의 랜드리스에 버금간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당시 선조가 재조지은이라고까지 한 것이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45]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준할 레벨이다. 한국의 TV 드라마나 미디어에서는 민족주의+근대 이후로 중국을 멸시하게 된 풍조+사대주의에 대한 반감 등으로 명군의 활약을 묻어가는 경향이 강한데, 백성에 대한 횡포와는 별개로 명군은 분명 왜군을 격퇴하는데 어마어마한 도움을 줬다. 그리고 백성에게 패악질을 한게 잘한건 결코 아니지만, '끝까지 저항한 지역은 민간인까지 학살하는게 기본 옵션인[46] 왜군'과 '구성원 개개인의 도덕적 해이와 일탈로 패악질을 하는 명군'을 같은 레벨로 볼 수는 없다.[47] 게다가 명군 개개인 단위의 횡포와는 별개로, 명나라 조정은 정확히 말하면 만력제는 공식적으로 조선에 식량까지 지원해줬다. 또한 징비록에서는 백성들이 굶어죽어가자 자기네 군량 50석을 내어줬다는 기록도 있다.[48]

3.4.3. 명군이 악평을 들은 이유

이처럼 참전한 만큼의 몫을 톡톡히 해준 명군이지만 후대에 이르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민폐만 끼친 양 묘사되기도 한다. 이는 명군의 입장상 적극적인 전투 참여가 적었고[49] 벽제관 전투에서 패전하여 전선을 고착화시킨 것도 있지만, 명군의 심각한 약탈과 엉망진창인 군기의 역할이 컸다.[50]

게다가 징비록 등 여러 신뢰할 만한 사료에서는 명군의 장수들이 조선의 관료를 폭행하거나 무례하게 군 일이 많아서[51] 애를 먹게 했다고 기록돼 있는데,[52] 이렇게 명군이 장수와 병사 할 것 없이 조선의 조정, 백성들에게 일관되게 나쁜 모습을 보여준 탓에, 명은 멸망의 원인이 됐을 정도로 성심껏 자국의 역량을 다 들어바쳐서 조선을 도와주고도 비난받는 꼴이 됐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중국인들은 임진왜란 관련 창작물에서 명군이 나쁘게 나오는 걸 보고 도와주러 온 자국 군대를 욕하는 한국인들이 뻔뻔하다며 비난할 정도다. 당시의 명군은 기강이 엉망이었고, 여러 지방에서 온 장수들이 군벌처럼 병사를 거느린 탓에 상호 협조나 전략적 교류가 제대로 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실제로 몇 년 안가 모문룡 같은 막장스러운 장수[53]가 나타난 것도 명군의 말기적 상태를 보여주는 좋은 예.

약탈과 보급상 무리수가 발생한 이유를 살펴보자면, 명나라 군대의 규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명나라 군대도 사람이니까, 식량은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명나라 군대가 식량을 조달할 방법은 2가지가 있는데, 조선에서 돈을 주고 사먹는 방법과 중국에서 조선까지 식량을 운반하는 방법이다.

첫번째 방법이 불가능한 이유는, 명군의 식량 보급이 명의 은본위제를 이용해 식량을 구매해서 사용하는 방식에 상당부분 의존했는데 조선은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아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명은 중기 이후로 식량을 직접 운반하는 방식을 포기하고 민간 상인을 이용해 식량을 운반하도록 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즉, 명의 중앙정부가 직접 군량을 군대가 있는 곳까지 수송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 상인들이 군량 수송을 맡겨서 병졸들에게 은을 지급하여 이것으로 알아서 식량을 사먹도록 한 것이다. 이는 명이 은본위 경제체제를 구축한 것과 맞물려서 상당히 효율적으로 돌아갔고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얻었다.[54] 그러나 이러한 명의 병참체계는 조선에서는 활용할 수가 없었다. 조선은 아직 현물경제체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55]

결국 두번째 방법인 직접 수송을 시도했는데, 이것은 실로 엄청난 노동력을 요구하는 힘든 작업이었다. 명은 자국 상인들을 끌어들여 보급을 해결하려 했지만 조선까지는 너무 멀었기 때문에 협조를 많이 얻지 못했다.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수지타산이 맞지 않고 위험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협조하는 상인들이 적었던 것이다. 협조하는 상인들도 이제까지 하던 대로 요동까지만 식량을 수송해 놓아서, 결국 요동에서부터 조선까지 식량을 운반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는 조선에게도 존재했다. 조선의 수송체계는 수운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수운체계 하에서 명군의 주요 기지인 평안도는 예외였기 때문에(공교롭게도 '명의 사신을 맞이할 때를 위해서' 라는 이유였다) 수운이 제대로 형성된 지역이 아니었고,[56] 따라서 기껏 요동까지 식량을 실어와도 이걸 수운을 통해 전선까지 운반할 능력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황해도 일대에서 배를 끌어왔지만 이것도 수량이 부족했다. 결국 육상으로 병참을 대야 했는데, 그 결과 수십만의 조선군 및 백성들이 식량을 나르다 지쳐서 죽는 상황이 전개되어 버린 것이다.[57] 임진년 17만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했던 조선이 이후 동원력이 점점 떨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은 말 그대로 필사적으로 식량을 공출했지만 그 식량을 제대로 실어 나르기가 너무나 힘들었고, 후방 거점에 쌓여서 제대로 수송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명군 참전 이후 의병들이 줄어든 것은 이런 사정도 있는데, 상당수의 의병들도 이 수송작업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현지보급을 통해 병참을 수행하는 것이 현실적이지만, 이미 임진년 전란을 거치며 관야에 비축한 식량은 남아난 게 없었다는 게 또 문제. 약탈없이 현지보급이 이루어지려면 사회지도층 내지는 관야에서 식량을 제공해야 하지만 이미 그런게 남아난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다 상국의 구원병이라는 오만함까지 있었기 때문에 약탈에 가까운 현지조달이 일상화되었다.

명은 조선에게도 식량을 사들일 것과 은광을 개발해 은을 채굴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조선 입장에서 이를 해결하는 것은 무리였다.[58] 여기에 이런 군량 수송을 맡은 명 상인들이 식량을 착복하는 행위가 자행되어 보급문제를 심화하기도 했다.[59]

여기에 명군의 군기마저 매우 나빠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당시 명군은 내몽골 및 만주와의 국경을 지키는 몽골인과 여진족 그리고 다우르족(거란잔존세력) 혼성부대인 북병과 조총 및 홍이포로 무장한 남병이 있었다. 북병은 주로 기병이었고 거의 주축은 몽골기병이었으며 남병은 보병 및 포병이었다. 여기서 북병은 대부분이 말도 안 통하던 오랑캐 출신들로 기강이 엉망이었으며 되려 평양을 몽골 기병대가 약탈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조선은 명군에 대해 그나마 군기가 살아있던 남병은 약탈이 덜한데 북병은 약탈이 너무 심하다면서 남병 중심으로 지원군이 왔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유성룡도 이 부분을 징비록에서 수시로 불평하고 있다.조총과 홍이포 그리고 불화살 등의 화약으로 무장한 명나라 남방군은 승률도 높고 조선군과 같이 싸우는 데 적극적이었던 데 반해 정작 이여송이 직접 통솔하는 북군은 전투를 회피했다는 것이다. [60]

이런저런 이유로 명군은 약탈을 자행했고, 이것이 명군에 대한 이미지를 극히 나쁘게 하여 후세에는 한것도 없이 짐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약탈의 정도만 따지면 일본군이 심하면 심했지 당연히 덜하진 않았다.[61]

물론 이에 대해서 명군을 그럼 배제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긴 했지만, 그럼 전쟁은 조선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의병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일정 수준 이상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웠고,[62] 정규군도 개편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수성전에 치중했다. 그렇다 보니 조선으로서는 명군을 어떻게든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사실상 의병들보다 정규군이 주전력이자 활약을 많이 하였는데 정규군마저 사기와 훈련도가 그렇게 높지 않아서 조선이 자력으로 일본군을 이길 수 있을지는 의문인 상황이었다. 단적인 사례로 고대일록(孤臺日錄) 1592년 6월 15일을 보면

○ 6월 15일 계묘(癸卯) 충청도 순찰사(忠淸道巡察使) 윤선각(尹先覺)ㆍ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 이광(李洸)ㆍ경상도 순찰사(慶尙道巡察使) 김수(金睟)의 군대가 수원(水原)에서 궤멸되었다. 군대가 패배하던 날은 6월 초순이었지만 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전갈이 비로소 도달했다. 이에 앞서 이광은 스스로 근왕(勤王)을 칭하며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윤선각은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김수는 50여 명을 거느리고 수원에 진을 쳤다. 일본 기병 여섯이 깃발을 세우고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오자, 1만여 명의 조선 군인들은 겁먹고 무너져 갑옷과 활을 내팽겨치면서 달아났다. 버려진 양식과 궁시(弓矢)ㆍ깃발ㆍ북 등의 물건이 산처럼 쌓였다. 그 외에 상실(喪失)한 것은 파악조차 할 수가 없었다.

보다시피 제대로 된 전투 병력이라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병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명군의 참전으로 일본군이 조선 정복에 회의적으로 변한 것도 있고[63] 솔직히 일본군에 계속 밀리고 있던 판국에서 대국인 명이 계속 지원해준다는 사실로 인해 조선군의 사기 역시 올라갔을 것이다. 까놓고 조선 스스로는 대패하고 있던 상황에서 자력으로만 일본군과 싸워야 할 상황이 되었다면 조선 병사들과 장군들이 제대로 된 사기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64] 물론 분전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6.25 때 미군이 없었다고 생각을 해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참고로 고대일록은 공문서나 사문서를 참고해 비교적 객관적·사실적으로 역사를 전하고 있으며, 특히 1592년부터 1593년까지의 임진왜란 초기 사회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들어 있고 임진왜란 당시 사대부들이 겪은 애환과 향촌사회 연구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 또한 다수 포함하고 있어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자력으로 조선군이 많이 이기고 있었다는 주장도 일본의 자료[65]와 비교를 해보면 정말 그렇게까지 이기고 있었을까?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3.5. 교착 상황과 강화회담

임란 최대의 분수령인 이치 전투에서 권율 장군이 일본군을 격파하고,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을 지켜냄으로써 전라도 방어선을 지켜내자, 일본군도 더이상 진격하기 힘들어져 물러나는 분위기가 되었다. 진주성이 함락되었던 2차 진주성 전투(1593년 6월)는 그 물러나는 가운데 히데요시의 김시민에 대한 분풀이와 일본군의 세력과시를 위해 벌어진 전투이다.[66] 주로 조선군은 진주대첩 때의 두 배 정도인 6~7천여 병력으로 방어전에 나섰으나[67] 9만 명이 넘는 적[68]을 상대로 9일동안이나 항전했으나 황진 등이 어이없게 전사하고 갑작스런 폭우로 성벽 일부가 무너지면서[69] 성이 함락되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학살되었다.

또한, 김덕령, 곽재우, 정문부 등의 의병들과 정기룡 같은 정신차린 관군들이 반격을 시작했고, 사명당이 승군을 조직하며 일본군을 곳곳에서 격파하고 향토의 방위를 책임진다.[70] 이 과정에서 의병 중 다수가 경험 부족과 전략적 결함으로 전사하기도 했다. 조헌과 고경명이 그 예. 물론 조헌은 양면 포위 매복을 깨부숴주면서 데뷔하고 훨신 딸리는 물량으로 급습해 청주성을 점령하고 포위공격으로 다굴까는 압도적인 적을 상대로 전라도 공격을 좌절시킬정도로 (1차 금산전투가 있었지만) 피해를 입힌 분쇄왕이셨다는건 알아두자.

1593년이 되어 행주 대첩의 승리로 한양을 되찾고 전선이 안정화되자 조선은 의병, 수군 제외하고 13만 대군을 뽑는 기염을 토한다.[71] (조선까들중엔 17만이 장부상기록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조선보다 인구도 딸리던 고구려도 주필산 전투때 15만 모았고 고려도 2차 여요전쟁때 30만 모았는데 조선이 17만 못 모았을 가능성은 없다,게다가 선조때는 아직 조선이 세도정치시기만큼의 막장이 아니었다.)그러나 평화협상이 질질 늘어지고 소강상태가 계속되다 보니 17만 5천의 군사는 3만 5천 정도로 줄어드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이 있다.

전쟁의 양상이 경상도 남해안에 한정된 국지전으로 변모해서 대규모 병력이 불필요했다.
선조는 명군에게 전투를 맡기고, 조선군 병력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서 재건을 서두르고 싶었다.
선조는 계속된 명군의 삽질 때문에 명나라에 대해 원군을 요청한 결정 자체도 삽질이 아니냐는 눈초리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명군에게 기회를 많이 주고 싶었다.
선조는 군대가 비대해지는 것이 불안했고, 따라서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돌아갈 명군에게 전투를 맡김으로서 조선군을 줄여 군의 규모를 통제가능한 수준으로 제한하려 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의 대표적 반전파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의 장군 이여송, 심유경 등이 주축이 되어 평화협상을 벌이는데, 명에서는 협상의 대가로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入貢)을 허락한다는 봉공안(封貢案)을 보냄으로서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히데요시의 요구 사항이 너무 터무니없었다. 히데요시는,

1.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삼는다.

2. 무역증서제를 부활한다.

3.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4. 조선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이양한다.

5.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일본에 보낸다.

6. 포로로 잡고 있는 조선의 두 왕자를 석방한다.

7. 조선의 권신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사실상 일본의 승전을 의미하는 거나 진배없는 협상이다. 히데요시가 단순히 '정치적 이유'로만 이 전쟁을 벌인 것은 아니라는 것, 특히 굵은 글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당시에 얼마나 허황된 망상을 품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명나라의 조건은,

1.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2.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번 전쟁을 공식적으로 사죄할 것.[72]

심유경은 일본의 개념상실한 요구를 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더군다나 이 개념상실한 요구를 명이 알았다가는 명나라가 어떤 패닉 상태에 빠질 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측의 반전파와 협의해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명은 봉공안에 의해 1596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金印)을 보냈다.

고니시 등은 이를 다시 한 번 '일본측의 요구를 적극수용'하는 것으로 위조해 도요토미의 허락을 구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나, 위조한 내용대로 글을 읊기로 한 승려 사이쇼 죠타이(西笑承兌)가[73] 명의 봉공안을 그대로 읽어버렸다. 당연히 히데요시는 분노했고 사신들을 추방함으로써 화의는 결렬되었다. 그리고 이듬해(1597) 정유년, 일본군은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74]

3.6. 정유재란과 전쟁의 종결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錢別圖} 중 일부)[75]

정유재란에서 일본은 총병력 14만(특히 수군이 강화되었다)의 군세로 다시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에서도 하삼도를 청야하며 명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수군을 보내 배후를 차단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그 때 일어난 것이 칠천량 해전(…). 자세한 건 해당 문서와 원균 참고. 조선 수군이 없어지자 일본군은 바람같이 진격해서 한 달만에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키고 좌군은 전라도 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남하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상한다.

* <정유재란 당시의 군편성>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 14,700명
제2군 가토 기요마사 10,000명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 10,000명
제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12,000명
제5군 시마즈 요시히로 10,000명
제6군 쵸소카베 모토치카 13,300명
제7군 하치스카 이에마사 11,100명
제8군 모리 히데모토,우키타 히데이에 40,000명
이 때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코 베기가 시작됐는데, 남원성 전투 전후로 일본군 장수들이 바친 코 숫자가 삼천오백개가 넘는다. 자세한 건 귀무덤 참조. 장수들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죽이지는 않고 코를 베기도 했고, 할당량(?)을 채운 후에는 식량을 주고 안전을 약속하는 등 백성들에게 미화적인 모습을 보인다. 난중잡록을 보면 이것 때문에 항복한 백성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더불어 조선의 백성들이나 관리들을 많이 잡아갔는데, 아무래도 조선에서의 지배가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데다 노예 장사나 착취를 해서라도 전쟁에서 들어간 비용을 벌충하려는 시도로 보인다.[76]

조선군은 흩어지거나 산성에 틀어박혀서 고립되어서 전멸을 당하는 편이고, 명군은 남원, 전주, 충주 등에 분산돼 있다가 각개격파 당하거나 후퇴했다. 이렇게 순조로운 진군이 가능했던 것은 임진왜란과는 다르게 강으로 보급이 가능했기 때문. 이에 맞설 명군은 고작 오천 안팎으로 적이 경기도를 노리는 상황까지 가자 명군은 기병 사천을 출격시키는데 이것이 직산 전투이다. 이 때 명군이 적을 크게 격퇴했다고 하는데,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로 실록을 보면 그 이후에도 일본군이 직산 근처에 남아 있거나 오히려 진격해 와서 조정이 혼란에 빠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77] 아무튼 직산 전투가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시킨 것은 확실하며 9월 중순에 적이 갑작스럽게 후퇴하자 조정은 유인이 아니냐며 다시 혼란해 할 정도였다.

일본군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후퇴했는지는 논란거리지만, 대체적으로 직산 전투로 인해 다시금 명 기병의 위력을 보았고, 명군이 빠르게 집결하기 시작했으며, 히데요시의 명령에서 한양을 무조건 공격할 필요는 없다고 한 것 등으로 짐작된다.[78]

당시 종군승이었던 케이넨의 일기에는 한양을 치기 위한 회의를 했다, 한양으로 가는 길이 즐겁다 같은 말이 나오고 9월 중순부터 "항구"로 가기 위한 후퇴를 하는 모습도 나온다. 즉 이 때 일본군의 후퇴에는 해상으로의 보급이라는 이유가 있었고, 보급만 잘 된다면 한양을 노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러니까 그놈의 보급만 잘 된다면.

일본 수군은 육군의 진격에 맞추어 서해로의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진격하는데, 바로 이 때 벌어진 세기의 전투가 바로 그 이름도 아름다운 명량 해전. 이미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정예 병력을 궤멸시킨 일본 수군은, 압도적인 수군 병력의 우세를 바탕으로 서해 진출을 시도했으나 돌아온 조선 수군의 먼치킨 장수에게 처참하게 박살이 나고 만다. 이걸로 서해로의 보급 가능성은 완전히 끊기고 일본 수군은 무안까지 살짝 진출했다가 후퇴한다. 육군도 보급 가능성이 완전히 끝났으니 역시 그대로 후퇴한다.[79]

결국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로 퇴각하여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고, 이후로 전쟁은 대치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와중에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에서 조명 연합군에 의해 엄청난 손실을 입기도 했다.[80] 그 외에도 일본군이 자기들이 조선 남부에 쌓은 왜성들 속에 농성을 하여 조명연합군이 공성 과정에서 피해만 크게 보고 함락도 못하였기에 명군도 필사적으로 사우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결국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이 본국으로 급거 귀국하게 되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철수를 차단하려는 조명 연합수군과 일본군의 전투인 노량 해전과 일본군이 본국으로 철수 한 후 잔존 일본군을 소탕한 남해안 전투를 끝으로 전쟁은 종결됐다.

http://namu.mirror.wiki/w/%EC%9E%84%EC%A7%84%EC%99%9C%EB%9E%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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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설계 16-09-26 03:03
   
3.4.1. ??

너 어디서 배껴오냐?
별 내용도 없구만. 니 할 얘기만 해.. 눈 피곤하다

꼭 할 말 없는 애들이 배껴오더라..

이렇게 배껴오는 애들이, 할 말 없으니
"임란7년" <-- 어트게 임란이 7년이여? 이러고 논다
"명나라군대가 어뜬 군댄데.. 최영 따위가"  <-- 이러고 논다
입 벌리믄 망언이라.. 그래서 배껴서 채우냐?
          
Centurion 16-09-26 18:18
   
정신이 오락가락하더니 눈까지 침침하나?

젤 밑에 출처 링크도 안보여?

임진왜란 1년 후인 1593년 하고 1597년 정유재란 남원성전투를 섞어서
역알못 주제에 말많네. 같잖은게.

넌 그냥 수준 낮으니까 역사토론을 하지마. 입만 열면 무식이 줄줄 쏟아져.
               
전략설계 16-09-26 23:41
   
집에 널리고 널린게 전쟁사책이니까..
책 베껴오지 말구 니 할 얘기만 하라구

베껴서 채운다고 무논리가 만회되냐?

임란과 정유재란은 연속선상의 전쟁이야..
임란 7년 동안 왜군 완전히 철군한 적 없어.
이게 병란-정묘호란 하고 차이야..

그래서 임란7년이라고 하지.
임란5년-정유재란2년 이런 병자는 지구상에 너밖에 없자나..
따질걸 따져..

할 말 없음 그냥 찌그러져.
"임란7년" 이걸 따지냐..
그거 따진다고 정신승리가  돼?
국산아몬드 16-09-25 18:04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 되어 있는데 돈들고 와서 식량 사먹겠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미친짓 아닌가요?
화폐경제가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전쟁터에 시장이 있을 리 만무하고 있다 하더라도 양식이 유통될까요?
그점만 보더라도 진짜 명군은 오합지졸 맞습니다.

그리고 1차 울산성 전투에 명군이 수는 많았을 지라도 조선군이 선봉에 나셨고 제일 많이 죽었어요.
명군은 뒤에서 구경만 했지.
총 병력 47500명( 조선 1만 1500명, 명나라 3만 6000명 )  조,명전사자 (조선군  1만명, 명군 1400명 ), 왜군 전사자 11200명 )
     
없습니다 16-09-25 19:05
   
왜군의 진출이 너무 빨라서 명나라에서 급박하게 파병하느라 군량까지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은자를 준비해서 파병했는데, 조선에 와보니 조선이 화폐경제 이전의 물물교환경제라는걸 알고는 경악한겁니다. 명군으로서는 은자가 무용지물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죠. 그래서 당시 명나라 장군들은 전쟁이 끝나자 조선에 화폐를 받아 들일것을 강력히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국산아몬드 16-09-25 22:09
   
조선경제가 물물교환이라니? 말이 좀 심하십니다.

조선은 금,은의 역할을 쌀이나 면포가 대신했습니다.

면포나 금화나 같은 실물화폐입니다. 즉 화폐 스스로 교환가치가 있는거죠.
면포를 사용했다고 원시적이고 금을 사용했다고 선진적이 아니란 겁니다.

화폐경제사회는 명목화폐가 유통될때야만 가능합니다
즉 돈 자체가 신용을 얻을 때 가능하단 말이죠. 종이던 철이던 관계없이 말입니다

조선은 조선후기 상평통보가 전국에 유통될 때 명목화폐경제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고
영국도 19세기 초나 가능합니다.
그것도 금본위라 해서 은행에 금을 잔뜩 쌓아놓아서 화폐가 신용을 얻은 뒤에나 가능했습니다
오히려 명목화폐 시작은 조선이 앞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은 면포대신 금,은을 화폐로 사용하라고 조언했다는 뜻이지 조선이 물물교환경제라서가 아닙니다

너무 조선을 후진적사회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쌀이 있다면 금화,은화가 아니라 금덩어리를 가져와도 바꾸지 않았겠어요?

쌀이 없어 은자가 소용없었다는 뜻이지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아서 쌀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건 앞뒤를 구분못하는 지극히 1차원적인 발상입니다

화폐경제가 발달했다고 없는 쌀이 생겨나지 않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TheCosm.. 16-09-26 04:08
   
주안점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보는 이들로 하여금 차이가 있지만, 화폐경제 체제가 보다 발전된 경제구조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영국의 사례를 언급하셨지만, 영국을 포함한 유럽 전반이 금본위제 이전부터 화폐경제체제에 점진적으로 돌입하였었고, 현물거래를 하는 경우에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은행과 신용, 담보 체계 등이 갖추어져 있거나 우리와는 다른 단계였습니다. 이는 조선과 같은 현물거래 개념과는 거리가 먼 상거래입니다.

단적으로 영국이나 유럽에서 앞서 시행된 물물거래에서, 양모를 제외한 특정한 물품이 그 거래의 주된 매체로 사용된 적은 없습니다. 명목화폐라고 표현하시지만, 실상 유통환경의 열악함, 신용/신뢰할 수 있는 국가/민간 사업단체, 상거래에 대한 법적 틀 등 그 어느 것 하나 이전의 조선에서는 뒷받침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나마 개경 상인들이 비슷한 시스템과 그 나름의 체계를 갖추었고, 평화로운 시기에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매우 비중있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국가 전체의 상거래 시스템에 지속적인 발전을 이끌어내진 못하였고 전쟁 중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애초에 이 본글에서 나온 당시 조선의 문제는 이것과는 별개이긴 하지만. 아무리 대규모 전란이나 전쟁이라 하더라도 화폐나 그에 대신하는 명목화폐가 무용지물 수준으로 쓸모 없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도 아니고, 명군이 돌입한 후방지역에서도 그러한 여파가 미칠 정도면 상거래 체계 자체가 빈약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조선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국산아몬드 님은 금,은의 역할을 대신하는 쌀이라고 하셨지만. 전쟁 직후에 수확은 제대로 되는지, 어디로 모이고 어디로 유통되는 지조차 파악이 안될 만큼 사정이 엉망이었으니. 화폐가 아닌 식량 자원의 관리라는 관점에서도 실패한 수준입니다.

게다가 면포는 전쟁 기간 내내 유의미한 명목화폐로서의 역할을 상실했습니다. 완전히 사용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면포가 어떠한 이유에서 명목화폐로 취급받던 것임을 상기하신다면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런 면포가 다시 유의미한 화폐 역할을 하는 건 병자호란 이후에서입니다.

화폐경제가 발달했다고 쌀이 생겨나진 않겠지만, 화폐경제 체제에 돌입하거나 그에 근접할 수 있는 수준으로 조선 내 상거래 구조나 환경이 발달되었으면. 쌀의 관리와 유통, 재생산이 한결 더 용이하였을 것이라는 점도 기대해볼만 했을 것이고, 설령 쌀이 아니더라도 군대에 유지에 필요한 여타 재원과 자원의 조달 역시 이렇게 심각한 수준으로 발전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도 조선 만의 고유한 체계라거나 문화라고 덮어주기에는...
                    
국산아몬드 16-09-26 19:32
   
님은 병참도 없이 5만 대군이 지원오는게 정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지원군에게 병참지원이 당연하다면 나선정벌때 왜 조선군이 청군의 병참지원을 받지 못했을까요?

그리고 전쟁중에 식량 공급이 어려운건 동서 고금 같습니다.
일본군이 전국을 장악한 마당에 상업이 발달했다고 식량수송이 원할히 될리 있겠어요?

오히려 상업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더 고통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원시사회일수록 자급자족 사회니 교통마비 된다고 특별히 더 고통스럽진 않으니까요

그리고 병참지원 가지고 조선의 후진성을 말한다면 유럽은 훨씬 더 합니다

유럽에서는 자국군이나 외국 지원군이 오면 왕이 자국 백성에 대한 약탈권을 줘버렸습니다.
자기 백성을 죽이고 강.간하고 약탈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아예 병참을 포기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유럽과 비교해서 조선이 더 후진적인가요?

전쟁중에 병참지원이 어렵다고 조선 상업의 후진성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TheCosm.. 16-09-26 22:29
   
질문투로 맺으시는 말씀이 많아서 하나하나 정리를 해보죠.

1.님은 병참도 없이 5만 대군이 지원오는게 정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명나라의 대응 역시 정상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선의 상황 역시 정상이 아닌 위급한 상황이라는 것 또한 반영되어야 합니다. 게다가 명나라 역시 본군이 아닌, 지리적으로 가까운 요동에서 선발대를 우선적으로 보낸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우 병참이 수반되지 않은 긴급한 이동의 전례는 동서고금 전쟁사에서 무수하게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적진이 아닌, 우호 지역으로의 진입이라면 더할 나위 없고 말이죠.

명나라가 조선의 열악한 운송체계와 상업과 유통의 미약함, 식량자원 관리의 미흡 등을 고려하지 못하고, 현지에서 식량 조달하려 했다는 것을 마냥 탓하시면서, 어째서 조선이 그만큼 지원군을 수용할 여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음을 지적하지 않으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아예 보급 자체를 생각 안했다면, 명나라에서 통용되던 금, 은을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고, 처음부터 오자마자 자기네들 마음대로 징발을 했을 것이지 거래를 시도하려 하지 않았을 겁니다.

2. 지원군에게 병참지원이 당연하다면 나선정벌때 왜 조선군이 청군의 병참지원을 받지 못했을까요?
-왜 뜬금없이 나선 정벌이 나오는 건지 오묘한 상황입니다. 그래도 기왕 말씀하셨으니 억지로 연결지어 생각해볼까요? 임진왜란은 조선의 존립 자체를 다투는 시급한 상황이고 여기서 조선은 명나라의 지원군을 반드시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필요로한 상황이었습니다. 결코 우리가 명나라 군이 오건 말건 괜찮다로 넘어갈 수 있는 위의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반면 나선정벌은 그 전체적인 맥락이 수비 반격 역공의 단순한 양상이며, 나선 정벌이 진행된 지역은 청나라 전체의 국운이나 위기와는 무관한 전쟁이었습니다. 나선 정벌 당시 우리 조선 군이 활약한 것은 사실이나, 조선군이 없었다고하여 청나라의 국운이 시급한 상황도 아니었으며 전반적인 지원군의 요청과 수용과정을 살펴봐야 겠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가 청나라 군에게 어떠한 우위적인 지위나 입장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좀 비약하자면, 너는 내 부하이니 저놈과 싸워라 하고 일시켜놓고 제대로 지원 안해준거라고 보면 됩니다. 임진왜란 때의 명나라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입장이었습니다. 여기서 청나라를 깐다면 엄청 깔 수 있지만, 이걸 왜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와 엮어서 보시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입니다.

3.그리고 전쟁중에 식량 공급이 어려운건 동서 고금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뭉퉁그려 표현하는 것 매우 싫어합니다. 보급이 어려운 전쟁은 분명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때 그 때의 보급의 어려움은 제각기 사정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자국의 방위에서 자국이 확보한 지역에서 그것도 쑥밭이된 전방이 아닌 후방지역에서도 보급이 안되는 경우를 마냥 전쟁은 보급이 당연히 어려운 거야 라면서 뭉퉁그려 넘어가시는 건 지적하고 싶습니다.
 
자국이 아닌 먼 지역으로 원정을 나간 군대가 보급이 어려운 건 흔한 일이지만, 반대로 자국에서 보급의 어려움을 겪는 건. 그 나라가 그만큼 전쟁과 같은 외부 충격이 쉽게 사회 경제 구조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농업을 주된 업으로 삼는 국가에서 말입니다.

4.일본군이 전국을 장악한 마당에 상업이 발달했다고 식량수송이 원할히 될리 있겠어요?
-상업이라는 단어 하나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도로와 같은 인프라에서부터 각 상업 조합 또는 단체 간이 인적 물적 네트워크, 정보의 교류, 물자의 거점과 저장,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나름의 대응 체계 등, 거래를 위한 사회적 인식체계, 법적인 틀 등 수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이 전국을 장악하셨다고 하시는데. 임진왜란 전체 기간 중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시는 건 궁금합니다. 임진-정유 전체 중 임진에서 일본군이 상당히 화급하게 한성을 점령하고 북진하긴 했지만, 전라도 지역은 무사하였으며 강원도도 점차 밀리지만 방위를 견지하는 추세였으며, 한성이 함락되고 왜군이 올라오는 시점까지 개경의 물자도 나름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당장 언급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만큼이나 있었는데. 그런데 일본군이 전국을 장악했다고 식량수송이 원활이 되었겠느냐 라고 이야기하신다면 저는 무얼 더 언급해야될 지 난감합니다. 역으로 제가 질문을 드려보죠. 상업 체계가 발달한 국가 중에서 자국 방위 중에 보급이 제대로 안되어먹은 나라가 어느 나라가 있었습니까? 임진왜란일어나던 조선과 근접한 시기에 자국의 본토가 침공당한 네덜란드도 자국의 최대 물류 거점이었던 크레타 섬 방위 나섰던 베네치아도의 사례도. 그 외에도 무수한데.  공격하는 상대보다 자국 내에서의 보급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인지 이렇게까지 설명해드려야 겠습니까?

5.오히려 상업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더 고통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원시사회일수록 자급자족 사회니 교통마비 된다고 특별히 더 고통스럽진 않으니까요.
-답글을 읽다가 여기서 한숨이 나왔습니다. 분명 상업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어떠한 부분에서는 고통이 더 클 수 있습니다. 상업이 발달한 국가일수록 국가의 재정규모나 운용의 범위가 넓은 편이며. 민간의 상인, 상업 단체들도 물리적인 위기에 노출될 수 있으닌깐요.

그런데 말입니다. 애초에 이러한 국가들이 식량과 같은 가장 기초적인 부분에서 고통스러워하시는 것인 줄로 진심으로 믿고 계신 것입니까? 상업이 발달한 국가일 수록 전쟁이 장기화되고 패배했을 시에 발생하는 거점, 인적자원의 손실, 확보한 자원과 이를 유통할 경제망의 와해, 전쟁으로 발생되는 부채와 이로 인한 자국 활동의 축소 등 총체적으로 부분에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당장 먹을 식량이 없고 필요로한 최소한의 기초적인 물자 그리고 이를 대신할 수 있는 대용품의 확보가 안되어서 후방지역까지 고통받았던 조선과 그 고통의 정량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생각해보시면 이게 얼마나 한심한 이야기인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알면서도 답을 적으시다가 실수로 적으신 이야기라고 이해하고 싶습니다.

6.유럽에서는 자국군이나 외국 지원군이 오면 왕이 자국 백성에 대한 약탈권을 줘버렸습니다.
자기 백성을 죽이고 강.간하고 약탈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아예 병참을 포기했다는 의미입니다.
-부분적으로는 맞습니다. 대표적으로 신-구 간의 전쟁을 들 수도 있고 그 외에도 사례는 많겠죠. 애초에 국경선 개념이 어느 정도 확립된 건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부터이니, 그 이전만 하더라도 어지간히 난장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국 국민 약탈하라고 약탈권을 준 건 앞서 언급된 신-구 전쟁 같이 난장판인 경우와 그 이전 시기 때의 용병들에 대한 비용을 주기 꺼려하면서 발생된 소요행위 등 언급할 수 있습니다. 그마저도 후자는 자국 내에서라면 의도한 경우가 아닌 게 보통입니다. 세상에 어느 왕이 미쳤다고 자국 도시 약탈하는 걸 허락하겠습니까? 실제 사례가 궁금하네요. 힘이 없어서 사후 승락한 거라면 저도 몇가지 기억하지만, 대체로 사전에 승인하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사례를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조선보다 후진적이다 후진적이다 이야기하시면서 유럽을 이야기하시는 걸 보면 유럽사에도 능통하신거라 짐작해보는데. 애초에 자국이 고용한 외국/용병 군대로 인해서 자국 내 도시나 마을이 약탈되었던 사례는 10~14세기 이탈리아, 카를 황제 옹립 전인 신성로마제국, 동유럽의 난장판 등인데. 이것 외에 사례가 더 있으십니까?

덧붙여 중세에 용병들의 고용이 활성화되었다는 것과 이 용병들이 얼마나 제멋대로 였는지를 상기하시는 것도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또한 병참이 포기된 전례는 생각보다 많이 없습니다. 혹여 조선과 비슷한 14~15세기를 기준으로 이야기하시는 게 아니라면. 그 밑으로는 사례가 많겠지만. 적어도 비슷한 시기에서는 카를 황제의 이탈리아 동맹 격파 시에 보내었던 병력들에게는 교황청을 포함한 점령지를 약탈하라고 부추긴 사례나, 동로마가 줄 돈이 없자 자국의 섬을 대신 줌으로서 그 땅을 타국에 거래 또는 수탈(약탈이 아닙니다)하도록 허락한 예시 외에 당장 떠오르는 건 없군요.

 7.전쟁중에 병참지원이 어렵다고 조선 상업의 후진성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병참에는 자원과 재원의 원활한 유통만 아니라 생산도 포함되니 마냥 후진성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양대 축이 어느정도 맞물려야 원활한 보급이 되는 것은 동서고금을막론하고 사실입니다. 그리고 조선은 적어도 이 양 기둥 중 하나는 없었습니다.

전쟁에 취약했다고, 무방비했다고, 서양과는 다른 현물거래 체계라고 포장하시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이 임진왜란 시기 동안에 얼마나 큰 파탄을 겪었습니까? 자국 내에서조차도 부족한 물품 치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전쟁을 맡아야하는 장수(우리나라는 지역의 통치도 어느정도 포함되지만)가 필요로한 물자의 생산에 직접 발벗고 나서는 경우가 막연하지 않습니까?

다른 분들이 올려주신 조선의 임진왜란 전 잠재적 경제수치나 경제력/생산력/총체적 국력은 분명 유럽의 어느 국가들에 못지 않게 대단하거나 훨씬 뛰어났음에도, 정작 그 유럽의 국가들이 치룬 여러 전쟁과 비교하여서 잘 치룬 전쟁이라고 포장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볼 수도 없고 감싸줄 수도 없기에, 이런 취약했던 부분들을 냉정하게 보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략설계 16-09-26 23:56
   
//국산아몬드

님은 병참도 없이 5만 대군이 지원오는게 정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 명나라가 14만석을 보낸다고 보냈는데 운송에 차질이 생긴 것인데..
      병참 없이 왔다고??  국뽕짓 한다고 자꾸 역사 왜곡할래?
      니가 평양성 쳐들어갈래?
      소정방이는 쌀부대 데리고 백제 쳐들어갔냐?
      별걸 다 트집잡네.. 아는건 쥐뿔도 없는게
      남나라 군대 앞장세워 평양성 쳐들어간건 정상이냐?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 8월 28일 기유 4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장삼외의 충고에 따라 경략에게 군량을 청하는 자문을 보내기로 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장 도사(張都司)가 【삼외(三畏). 】 말하기를 ‘산동(山東)에 사들인 쌀 14만 석이 있는데 이곳에 온 쌀은 1만 석도 채 되지 않으며, 요동해(遼東海)에 민간의 비상량(備上糧)이 14만 석이 있는데 이곳에 온 것은 겨우 1십만 석뿐이다. 지금 2만 명의 유병(留兵)이 하루에 먹는 양이 4백 석이나 되니, 그대 나라에서 어떻게 마련하여 공급할 수 있겠는가. 만약 양곡을 청하고자 한다면 빨리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 나라가 잔파(殘破)되어 군량이 떨어졌으니, 끝까지 구원의 은혜를 내려 접제(接濟)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뜻으로 경략에게 이자(移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그노스 16-09-25 19:17
   
님의 말씀에도 공감이 가지만, 전쟁 초중기의 다급했던 전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국왕이 명으로 도주를 꾀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에서 청병을 하는 경우, 명의 입장에선 잡병까지 긁어모아 급히 보내야 하는데 현지 보급을 꾀하지 않고 일일이 본국에서 수송을 해야한다면 시일이 걸리니까요.
임진왜란이란 전쟁 자체가 조선에게든 명에게든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던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실제로 왜군의 경우, 전쟁으로 조선 국토가 황폐화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쟁 발발 전의 조선 수확량에 근거해서 농민들에게 세납을 요구하다가(님의 표현을 빌리면 미친짓) 농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히고 다시 살육과 약탈을 반복하는 악순환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확실히 전쟁 후반으로 가면 다행히 우리측 전황이 나아져 명군 쪽에서도 보급에 신경쓴 것으로 보이고, 이순신 장군 같은 경우엔 조정에 의지하지 않고 자급자족한 경우가 보이므로 양군의 보급 상황이 좋아졌던 것 같습니다.

님 말씀대로 명군중에 오합지졸도 있었고, 수수방관한 자들도 있었으며, 나름 분전한 군도 있었습니다.
특히 울산성 전투에서는 많은 명군이 방관한 것이 맞을 겁니다. 사료에도 나오는 것이 그들은 평양성을 탈환한 후 자국 영토인 요동 안정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으므로, 왜 자기들이 남의 전쟁에서 죽어야 하냐며 불만들이 터져 나왔으니 전쟁 당사자인 조선군이 공성전에 더 적극적이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명군이 별 도움이 안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 공성전에서는 선봉으로 용감히 싸웠던 뒤에서 구경만 했던 간에 일단 다수로 성을 포위하고 압박을 가해야 하기 때문에 공성자의 수가 중요하므로, 조선 단독으로 성들을 탈환하거나 난공불락에 가까웠던 왜성을 공략하기엔 무리가 있었다고 봅니다.

이 왜성들이 문제였던 것이 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이 직접 이끈 거북선이 무적이었던 것처럼, 한반도에 건축된 왜성이 조명연합군의 공성전에서 한번도 함락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전략적인 전황이 불리해져 스스로 버리고 간적은 있지만요.
성 내부 구조가 우리 고구려의 '치' 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성문을 돌파하고 나면 공성자에게 정면에 바로 보이는건 넓다란 평지가 아니라 벽으로 막혀있어서 좌측이나 우측으로 연결된 비탈진 통로로 올라가야 하는데 위에서 조총부대가 연사하면 통로로 올라가던 공성자가 엄폐물도 없이 몰살당하는 그런 구조였다고 합니다.
고구려성의 '치'는 외부로 나와있는데, 왜성은 내부에 있는 개념이라할까요.

수성자에게 유리한 왜성의 이런 구조에도 불구하고 공성자에게 결국 돌파당하면 수성자는 일단 위층으로 후퇴하는데, 성의 구조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여서 수성자가 좁은 공간에 밀집해 아래층의 공성자에게 화력을 한곳에 집중해 몰살시키는 구조입니다.
큰 피해를 입은 공성자가 다시 후퇴하면 위층의 수성자가 다시 아래층을 재점거하는 방식이지요.
이런 수성술이 가능했던건, 조선이나 중국의 성들, 혹은 동시대 유럽의 성들은 대개의 경우 민간인들이 성내에 함께 거주하며 수성전에 참여하므로 비전투원의 수도 많고 식량도 많이 필요하므로 장기전이 어려운 상황에서 성문이 일단 뚫리면 끝이지만, 왜성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순수한 군사 시설이므로 군인들만 거주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7년 전쟁의 후반에 갈수록 지리하게 시간을 보낸 이유는 거북선을 위시해 수군이 강했던 조선군, 왜성을 중심으로 육군이 강했던 왜군...
양 세력의 주력 분야가 서로 다르다보니 상대에게 결정적인 카운터를 먹이지 못하는 바람에 전쟁이 길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더군요.

그럼 이런 조선군과 왜군 사이에서 명군에는 오합지졸만이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십수년전 대규모 왜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던 명나라의 척계광이 자신이 고안한 무기와 진법으로 왜군과의 전투에서 전승을 한 기록이 있습니다(명나라의 이순신)
그는 원앙진이라는 진법을 고안해서 낭선이라는 죽장을 창작해내었는데, 이 낭선은 난 널 겁탈하고 빼앗고 죽일거야 라며 공포심을 잊은채 양손에 긴 일본도를 꼬나잡고 흥분해 달려드는 이상성욕 변태 살인마를 밀어내는데엔 최적이었다고 합니다.

평양에서의 승리후 선조와 이여송과의 일화를 보면, 선조가 친히 이여송을 찾아가서 묻길, 지난 번 전투는 패배했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승리했냐고 묻자, 이여송이 답하길 지난번에는 여진족 기병에 최적화된 전법이었지만 이번에는 왜군 보병에 최적화된 척계광의 절강병법이었다고 했다 합니다.
선조가 그 병법을 알아내길 원했지만 이여송이 기밀이라며 거부하자(너 조선 출신이라며), 이여송 휘하의 낙상지라는 장군이 명군 철군후의 조선을 걱정하며 유성룡에게 배워가길 직접 권고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우리나라는 현재까지 무예 원형을 보유중인데, 중국 본토에선 오래전에 실전되어서 중국인들이 놀라워했다고 하네요.

명군이 비록 욕심많고 약탈도 했으며 자신들에게 필요한 전투 이외엔 참전을 회피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분명 일정 부분의 역할을 맡아 해내었다고 봅니다.
님 말씀대로 명군이 오합지졸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우리가 명군의 철군을 요청해서 정말 명군이 철군해 버렸다면 십만명이 넘는 대군의 공백이 생기는만큼 전선에 구멍이 뚫려버렸겠지요.
그럼 급히 우리 백성들로 징병해서 훈련시키고 공백을 막아야 하는데 왜군과의 수년간의 전쟁 경험을 가진 동맹군을 잃고 신병만으로 얼마나 빨리 그 공백을 메울수 있었을지...
글쎄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최선의 선택이라면 전쟁 발발전에 우리가 방비를 든든히 해서 명국에 청병을 하지 말고 스스로 전쟁을 수행해 나가는 것이었을 만큼, 현대에도 유비무환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국산아몬드 16-09-25 22:01
   
전쟁발발 1년 뒤 왜군은 모조리 남해안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전선이라 할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명군이 그때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그냥 하는 일없이 밥만 축낸겁니다

그리고 절강병법이 사용된 전투도 평양성전투가 유일합니다.
이여송이 벽제관전투때 기병이 박살난 이후로는 전투에 참여자체를 안했습니다.
               
그노스 16-09-25 23:30
   
말씀드렸듯이 명군도 일정 역할을 해냈고, 조선 수군의 승리와 의병등의 전적이 없었다면 왜군이 또 다시 북진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지요. 냉전도 전선은 전선이라고 봅니다. 여차하면 다시 열전이 될 상황이었고(미래에 사는 우리야 그 때의 역사를 미리 알지만), 애당초 위의 사항들 중 하나라도 부족해 군형이 깨진다면 냉전이 다시 열전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리고 왜군이 조명 연합군에게서 가졌던 공포 유발 요소들이 무엇이었는지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 시대에 대한 현대의 평론이 중요한 만큼, 그 시대를 직접 살았고 그 전쟁을 체험을 했던 이들의 시각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기록을 보면 왜군에게는 명군도 분명 주요 공포 요소였습니다. 일본의 '조선 정벌기' 에 따르면 2차 평양성 전투에서 고니시는 20만 명군에 포위되어(과장이겠지만) 새장 속의 새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근세 일본에서 최초로 임진왜란 7년의 전체상을 제시한 일본의 오제 호안은 '벽제관 전투'를 일본군이 적의 주력인 명군을 물리쳤다며 '천하를 가른 전투'라고 규정합니다. 지금까지도 일본의 시각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천오백여명의 왜병으로 수만의 조선군을 격퇴시킨 용인전투가 아니라요.
중요한건 조선에서도 분명 이런 명군의 도움을 필요로 했으며 철군하겠다는 수차례에 걸친 명의 협박을 만류했다는 점이지요.

전 명군이 절강병법으로 모든 왜란에 참여했다고 말씀드린적이 없습니다만??
님과 나누는 토론의 논점을 모르겠네요.
님께서는 명군이 오합지졸 무용지물인듯이 주장하셨고, 전 명군 중에 오합지졸도 있었고 방관자도 있었으며, 나름 분전한 군대도 있었다며 그 하나로 절강군대를 소개했는데, 님께서는 마치 제가 명군이 무적의 군대로서 조선내 모든 왜란에 참여했다고 주장한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제가 위에서 척계광의 절강군대가 '무적'이었다는 기록을 소개한 것은 분명 그 때는 임진왜란 발발 전이라고 설명했는데요)
평양성 전투에서 명군이 효과적이기도 했었다며 제가 사례를 소개한 것이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명군이 왜란에서 일정 부분을 담당했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전략설계 16-09-26 02:23
   
//국산아몬드

국뽕 아니라까봐.. 지식은 쥐뿔도 없는게 밑도 끝도 없이 까고 자빠졌네.
"230만 명군이 어뜬 군댄데"의 저자 C모가 들음 섭하겠다..

뭔 전선을 형성 안해?
왜군 철수하면서 진주성 10만으로 때릴 때..

명군,
남원, 대구, 상주에 배치됐는데.. 이게 전선이지 뭐가 전선이야?
이 정도는 왜군하고 벌려줘야지..

정유재란때..
남원성 병력 명군이 3천, 조선군 1천..
전주성은 명군보다 조선군이 먼저 도망갔다..

왜군이 전라도 진격할 때,
남원성, 전주성에 명군이 배치돼 있었는데..
전선이랄 것도 없고, 전투에 참여 자체를 안해?

아는건 쥐뿔도 없는게 성의도 없네.. 좀 검색이나 해라
                    
Centurion 16-09-26 04:35
   
이 인간은 아직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여기저기 들이대나.
게다가, 중국 속국 조선을 주구장창 외치던 본인 정체성 꼭 드러나게...
명군 쉴드 오지게 치는거 보소. ㅋㅋ

그리고 이 인간아. 암만 무식해도 임진왜란 1년후랑 정유재란은 좀 구별해라.

최소 임진왜란, 정유재란 연표라도 좀 보고 떠들어.
국산아몬드님이 말하는 임진왜란 1년 후 시점이랑(1593년)
니가 말하는 남원성전투(1597년)랑 연도가 달라.

에효~ 무식한게 아는 척 하는것보니 헛웃음만 나오네.
                         
전략설계 16-09-27 00:03
   
내 밥들아--

명군, 남원, 대구, 상주에 배치됐는데.. 이게 전선이지 뭐가 전선이야?
<-- 이게 정유재란때라고? 1593년 6월 진주성 2차싸움 직전 상황이야..

1593년 6월 진주성 2차싸움 직전 상황이라구..
1593년 6월 진주성 2차싸움 직전 상황이라구..
1593년 6월 진주성 2차싸움 직전 상황이라구..

1593년에 명군이 전선을 형성하고 포진을 하고 있었다니까..

정유재란이 어째??

정유재란때..
남원성 병력 명군이 3천, 조선군 1천..
전주성은 명군보다 조선군이 먼저 도망갔다..
--> 아몬드 병자가 전선 형성 안 했다고 해서,
      정유재란때도 명군이 전선을 형성했다니까..

1593년이나 정유재란때도 명군은 주요 전선에 군대를 상주시켜 전선을 형성했다니까..

이 밥드라
무식하면 용감하지?


명군,
남원, 대구, 상주에 배치됐는데.. 이게 전선이지 뭐가 전선이야?
<-- 이게 1593년인지 못 알아먹네.. 대단하다 병자드라..
                         
Centurion 16-09-27 00:58
   
이 인간은 군대 안갔다온 티 내냐? ㅋㅋ
적군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게 전선 형성이야?

진주성하고 남원성하고 거리 차이가 얼만데 그게 전선형성이야?

넌 60~70km 떨어진 곳도 전선이라고 부르냐?

게다가, 뭐 니가 말한 지역에 배치된 명군 인원 다합쳐봐야 1만 수준인데.
그걸로 2차진주성 싸움이나 경상도 지역 왜군이랑 전선형성한다고?

이게 숫자계산을 잘 못하나. 넌 산수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그리고 밥? 이게 식인종인가? 우마오당인가? 사람을 밥이라고 하네.
너네 나라에선 한글로 댓글 달면 하나에 300원 쳐주냐?

어쨌건 춘장 냄새 풍기는 짜장국백성 정체성에 적절한 어울리는 표현이긴 하다.

그리고 전주성이 또 왜나오냐? ㅋㅋㅋ

임진왜란 1593년에 전주성이 함락된 적 있어?
정유재란 때로 타임워프하는 소리하고 있네.
                         
전략설계 16-09-28 02:05
   
그리고 이 인간아. 암만 무식해도 임진왜란 1년후랑 정유재란은 좀 구별해라.

최소 임진왜란, 정유재란 연표라도 좀 보고 떠들어.
국산아몬드님이 말하는 임진왜란 1년 후 시점이랑(1593년)
니가 말하는 남원성전투(1597년)랑 연도가 달라.

<-- 인간아 니두 사람이면, 니가 써 올린 내용이나 해명한 뒤에 다른 얘기해..

1593년 명군 배치상황을 얘기해도 1593년을 못 알아보자나??
이게 니 주제여..

명군이 1만4천인데.
10만 대군 우글대는데 붙어있는게 전선이냐???

병자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저 정도 병력 차로는 이틀 거리 정도는 벌리고 있어야지..

반나절 거리라도 포진해야 잘한 전선이냐..

1593년 배치 상황을 얘기하면, 왜 정유재란 얘기해??
왜군이 한성에서 남하해서 아직 각지에 왜성을 짓기 전이고,
냅다 10만대군을 진주성 한곳으로 쏟아붓는 상황인데..

남원, 상주, 대구 정도면 당시 병력차나 왜군의 유동적 상황에 적절하게 배치했구만..

최영의 요동출병 얘기하면, "철령위 얘기 왜 하는데" 이런 병자모드로 가더만..
명군이 남원, 상주, 대구에 배치됐다고 하면, "왜 1593년 얘기 안 하고 정유재란 얘기하는데"

너 병자짓 제대로 한다
끝이 어디냐?

지뿔도 모르는게 책만 배껴와.
지뿔도 모르니까 책만 배껴온다고 봐야되나.. ㅋㅋㅋ
                    
국산아몬드 16-09-26 18:42
   
이 병.신은 따라다니면셔 병.신짓하네 
군대끼리 대치를 해야지 전선이지 싸우지도 않는데 전선이냐?
임진왜란 1년 후부터 정유재란이 발발하기까지 전투다운 전투가 없었는데 무슨 전선이 형성되?
이 인간은 말귀를 못알아 듣네
그리고 남원성전투때 명군이 얼마나 닭짓을 했는지 알고나 떠들어라 .
전략적으로 유리한 산성을 버리고 평지성에 일부러 기어들어가서 남원군민 아작내버린것이 잘한 짓이라 생각하니?

그리고 넌 더이상 속국주장 안하니? 일본영주하고 같다며?
논파당하니 엉뚱한 소리나 지꺼리고  그렇게 살지마 이 인간아
                         
전략설계 16-09-27 00:08
   
아몬드 니가 보면 지식이 젤 딸려..

임진왜란 1년 후부터 정유재란이 발발하기까지 전투다운 전투가 없었는데
<-- 진주성 2차싸움은 언제냐? 병자야
      왜군 10만대군이 이동해 10일간 공성을 벌인게 임란 1년뒤야 이 병자야

나서봐야 항상 내 밥짓 하는게..
그냥 찌그러져라~ 나서기엔 니는 내공이 마니 딸려

임진왜란 1년 후부터 정유재란이 발발하기까지 전투다운 전투가 없었는데
<-- 왜군 10만이 공성벌린 진주성 2차싸움 어디로 갔냐
<-- 왜군 10만이 공성벌린 진주성 2차싸움 어디로 갔냐
<-- 왜군 10만이 공성벌린 진주성 2차싸움 어디로 갔냐

명군, 남원, 대구, 상주에 배치됐는데.. 이게 전선이지 뭐가 전선이야?
<-- 이게 니가 말한 임란 1년뒤여.. 1593년 6월 진주성 2차싸움 직전 상황이여.
      이걸 셋트로 못 알아먹으니까.. 니기는 맨날 밥이야

니기는 그렇게 깨지고도 쪽팔린줄 모르냐..
셋트로 댐비믄 역사도 바꾸냐?
니기같은 밥들 백만이 와도 결과는 똑같어
토론이 쪽수냐..
     
전략설계 16-09-26 02:56
   
지 나라 전쟁에서 지 나라 병사가 앞장 서야지.
외국 군대 불러온 것도 쪽팔린데 외국 군대가 앞장 서 싸울 걸로 생각하냐?
욕심도 많다.

조선군 2만 단독으로 평양성 치러 갔다 한 것 없이 평양성 구경만 하고 돌아왔는데.
명군이 오합지졸이믄,
이 조선군은 뭐여..
그렇게 조선군 정예강병이어서 의주까지 도망가서 망명 청했냐?
입으로 전쟁해?

역사에 21세기 니 존심 넣어서 오합지졸이네 하지 말고 지발 있는 그대로 보자.
명나라 군대 없으면 조선군 울산성 근처도 못 간다.
전쟁에서 많이 죽은건 자랑이 아니여
          
Centurion 16-09-26 08:42
   
아니~ 230만 명나라군대 그까이꺼 이성계가 맘만 먹었으면 4~5만으로 박치기해서..
자존심 세워서 "정신적 속국"을 면해야 했었다던 그 전멸설계님 맞으세요? ㅋㅋ

조선이 중국 속국이라고 할 땐 그렇게 명나라 공격안한걸 갖고 GRGR하시더니..

왜 갑자기, 이번엔 명나라군 없었으면 안됐네.. "니 존심" 타령해가며..
현실주의자가 되셨을까나? ㅋㅋㅋ

조선이 중국 속국이라고 할 땐 "자존심 없어서 정신적 속국"이라더니,
갑자기 명군의 은혜는 부정하지 말라며 "자존심" 세우지 말라니..

이 인간 확실히 한국인이 아닐세. ㅋㅋㅋㅋ Ni HAO~
               
전략설계 16-09-27 00:14
   
"명나라군대가 어뜬 군대인데, 최영따위가"
"명나라군대가 어뜬 군대인데, 최영따위가"
"명나라군대가 어뜬 군대인데, 최영따위가"

<-- 내가 남긴 어록이다. "황제폐하 만만세" 니 조국으로 가

정신나간 인간이
"황제폐하 만만세" 할라고 최영장군을 떠라이를 만드네..
에라이~
               
전략설계 16-09-27 00:18
   
니가 지도까지 그려 위대한 군대라는 명나라군대.
고려군은 절대 요동도 가서는 안 된다는 명나라군대

시대는 바꼈다만 인구도 늘었을텐데.

니 조국 300만 군대 다 어디가고..

조선에는 조승훈이 몇천 딸랑 보내다 몰살당하고.
발배난 진압하고 그제서야 오냐..
300만은 다 어디갔냐?
               
Centurion 16-09-27 01:34
   
병자야, 제발 " " 큰 따옴표 사용시엔 남이 했던 말 그대로 인용해라. 인간아.
이건 남의 말 왜곡해서 의역해서 전달하려면 ' ' 작은 따옴표 쓰고 알겠냐? ㅋㅋㅋ

내가 언제 '최영따위가?'란 표현을 쓰디?
최영장군 욕하는 디바 2한테 오히려 뭐라고 한 사람이라니까.
이게 밑도 끝도 없이 구라질이네.

그리고 내가 언제 주원장이 보고 황제폐하 만만세라고 했냐고..
몇번 지적한거 같은데 졸라 꾸준하게 왜곡질이네. ㅋㅋ

게다가, 임진왜란 때 1만 정도의 명군이
10만이 넘는 경상도로 후퇴한 왜군과 전선을 형성했다고라 ㅋㅋㅋㅋ
와따~ 대단하네 대단해.

지도에서 대구, 상주, 남원하고 진주하고 거리가 70~80, 길게는 130km 나오더라. ㅋㅋ
대단한 전선이야. 나는 현대전 시대에 북한군하고 4km 비무장지대(철조망,지뢰밭)에
전선형성된 곳에서 군복무했는데..

세상에 명나라군은 무슨 400 여년 이전에 뭔 레일건이라도 발명했다냐? ㅋㅋ
70~130km 를 거리에 두고 전선형성하게?

이딴 개소리를 지껄이며 명군 미화하는 인간한테서
내가 명나라군 대가릿수 많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을 말한걸로
주원장보고 '황제폐하 만만세'했다는 개구라를 들어야 됨?

병자, 참~ 추하다. 추해.

게다가 나보고 밥이라고 했지?
식인종 같은데.. 제발~ 한국에서 사람 죽여서 뜯어먹고 그러지마. ㅋㅋ
댓글질로 돈 버는 우마오당이거든, 참 먹고 살기 힘들겠어. ㅋㅋ
댓글 하나당 한 90원일텐데. 하루 벌이 하려면 100개 달아야 돼?

전멸설계 어록

"역사에 21세기 니 존심 넣어서 오합지졸이네 하지 말고 지발 있는 그대로 보자.
명나라 군대 없으면 조선군 울산성 근처도 못 간다. "

이 인간아 큰 따옴표는 이렇게 쓰는거야. 명나라 지원군 쳐 빠는 춘장아.
                    
전략설계 16-09-28 02:10
   
툭허믄 "최영 5만 따위가 어디 230만 명군을 치냐"
이게 니 메들리자나??

이 계시판에서 최영장군 또라이 만든게 누구냐?
너 말고 누가 있어..
5만이 230만 어떻게 치냐고.. 그 소리가 최영장군 정신나갔단 소리 아냐..
그 5만을 요동에 누가 보냈냐?

그 말은 주어담고 싶냐?
그럼 머더러 지도 그려서 5만이 230만 어떻게 상대하냐고 나불대..
병자야..

언제 한족이 요동 지배한 적 있냐..
한나라때로 가야 한다니까..
최영 장군이 요동 보낼 때는 명나라도 요동이 지꺼다는 확신 못 갖을 때여..
너같은 "중국은 어뜬 나란데 최영 따위로" 이런 족속들이
당시 요동상황을 뭐를 안다고..

오죽했음 다른 분이..
"최영이 명을 치러갔냐.. 요동 치러갔찌" 이러 소리 하겠죠..

최영이 마치 명을 치러갔다는 식으로 230만 어쩌고 5만으로 되냐고..
최영을 들 떨어진 사람 만든게 너 아니야..

"황제폐하 만세"하고 얼른 니 조국으로 가
                    
전략설계 16-09-28 02:17
   
1593년인지도 모르고, 정유재란 타령한게.
내가 알려주니까.. 인제 병력 타령하고 자빠졌네..

너는 그냥 황제폐하 만세나 해

니 국뽕 친구 아몬드가,

전쟁발발 1년 뒤 왜군은 모조리 남해안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전선이라 할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명군이 그때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그냥 하는 일없이 밥만 축낸겁니다
<-- 이런 헷소리를 해서..
      남원-대구-상주면
      진주성을 조선군이 점령한 상황을 보면,
      명군이 조선군과 함께 경남, 부산 일원의 왜군을 카바하는 전선을 형성한 것이야..
      진주성 칠 때 명군이 뒤로 가서 부산을 칠 까봐.. 왜군이 부산쪽 병력을 강화하기도
      했어.. 전선을 형성 안 했음 먼 걱정을 하냐..
      그 시절에 연락수단도 없는데, 적 성 앞에 병력을 상주시켜야 전선이냐??
      최소한 대규모 기습을 사전에 알고 준비할 시간은 벌어놔야지..
      전쟁 기본도 모르는게..

그러고 니 친구 아몬드는 1593년에는 전투가 없었대..
너나 아몬드나 여기 국뽕들은 왜 이 모냥이냐..

1593년에 전투가 있었는 지도 모르는 것들이..
이게 와서 병력 1만이 어쩌고 저쩌고..
에라이 집어쳐라..
수준 안 맞아서 못 놀겠다..

그만큼 망신 당햇으면 찌끄러져.
남원 - 대구 - 상주 명군 배치가 1593년인 것도 모르는 것이
먼 더 할 얘기가 있다고 1만이 어쩌고 타령하고 자빠졌냐


그니까 내가 널 두고 병자란거야
                    
전략설계 16-09-28 02:24
   
"역사에 21세기 니 존심 넣어서 오합지졸이네 하지 말고 지발 있는 그대로 보자.
명나라 군대 없으면 조선군 울산성 근처도 못 간다. "

<--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1%EC%B0%A8_%EC%9A%B8%EC%82%B0%EC%84%B1_%EC%A0%84%ED%88%AC

조선군 11,500    가토군 15,000

11,500으로 15,000을 공성하냐?
세상에 그런 공성도 있어..

병자야 객기로 전쟁하냐..
너같은게 지휘하면 다 죽겠다.. 지휘할 리도 없겠지만

명군 36,000이 같이 가도 공성에 실패했는데.
조선군 11,500만 딸랑 가서 공성해?

다 죽는 미친 군대 만들래..
                    
전략설계 16-09-28 02:29
   
평양성 3차 전투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3%EC%B0%A8_%ED%8F%89%EC%96%91%EC%84%B1_%EC%A0%84%ED%88%AC

위키가 다 맞는건 아니겠지만.. 위치 내용대로 결과를 보면

조선군 단독으로 2만 가서 7천 죽고
소서군  16,600중 딸랑 100명 죽었다

조선군이 더 많아도 공성에서 이런 결과가 나오는데.

조선군 11,500으로 가토군 15,000을 공성해?

이 병자는
말 꺼내는 족족 나한테 털리고도 쪽 팔린지를 모르네..

계속 지껄이믄 안 지는거냐??
그만큼 깨졌으믄 찌그러져
내 시간이 아깝다. 계속 이렇게 털리믄 너 Pass한다
엉아하고 말 섞을라믄 수준이 되야지

남원-대구-상주가 1593년인지를 모르고 정유재란 타령해..
요동이 한족껀줄 알고 최영보구 5만으로 요동 안 갔냐 그러고..
11500으로 15000 수비하는 성 공성하라질 않나..

말하는 족족 너는 지적당할 모자란 소리만 하냐..
불쌍타
          
비좀와라 16-09-26 08:51
   
명나라 에게도 임진왜란은 자신들의 전쟁입니다.

오히려 조선이 억울한 전쟁 이지요. 일본의 침략명분은 정명가도로 명나라와 싸우기 위해서 가는 길을 열라는 것 입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영토에 외국의 군대가 지나간다는 것은 절대로 허락 할 수 없기에 일본과 전쟁을 한 것이지 명나라를 보호하자고 전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명나라는 자신을 침공하려고 하는 일본군을 막아서고 있는 조선이 고마운 존재 이고요. 하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명나라는 조선을 배신합니다.

이래서 정유재란시의 명나라의 태도를 못 마땅하게 보는 이유 입니다.

명나라는 전력을 다해서 조선을 도와야 하는 입장으로 자신의 영토로 침략군이 진입하지 않고 막고 있었던 당시 상황은 명나라로서는 아주 유리한 상황으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명나라의 입장에서 보는 임진왜란은 외국간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의 전쟁인 것 입니다.
흐아앙 16-09-26 13:38
   
우선 평양에서 막아준것만해도 크고 정유재란 이후에는 육군 주력부대는 항상 명군이였다고 보면 되서 딱히 활약이 없어도 도움이 안됐다는건 비약이죠 적어도 우리가 아는 사료에선 그리 말하니깐요.. 실제로 명군에겐 자신들이 싸워야할 이유는 있었기에 정황증거도 명군덕을 안봤다고는 하기 힘듦니다.
wepl 16-09-26 14:48
   
솔직히 명군이 참여를 안하고 우리들의 힘만으로 이겼다면 인조반정,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병맛짓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듬
돌개바람 16-09-26 16:15
   
당연 당시 명은 왜군이 조선을 넘어 명 영토로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출병한게 맞죠 그렇다고
그게 우리한테 도움이 안된건 아닙니다. 당시 당장 조선군 단독으로 평양을 탈환할 능력이 안됐습니다.
정유재란때의 명군 꽤나 도움이 되는 전력이었습니다.
     
Joker 16-09-26 17:13
   
제 의견과 같은 의견이시네요
전략설계 16-09-27 00:24
   
여기에 국뽕 몇이 매일같이 설칩니다만..
위에 재야에 깨어있는 분들 많네요.

치욕적인 역사라도 직시하여야 다시 재발하지 않는겁니다.

그게 비록 부끄럽더라도 21세기 기준으로 존심 차린다고,
치욕적이고 쪽팔린 역사 다 잘했다고 역사왜곡해서 정신승리해서 덮어버리면,
치욕적 역사는 다시 반복되는 것입니다.

센카쿠, 남지나해 정리되면, 다음은 우리 이어도 순서가 옵니다.
박근혜가 중국 전승절 열병식까지 가서 비위를 맞췄지만,
돌아오는 것은 4차 핵실험 박근혜 전화 시진핑의 거부였습니다.

C모처럼 "중국이 어뜬 나라인데 최영 따위가 요동을" 이런 대국에 바지 질질 흘리는 근성으로는,
다 내줘야 합니다.
홍건적에 왜구에 나라 망해가는 상황에서도 철령위 요구에 요동을 때리는 고려처럼 강대국을 상대해야
철령위 설치도 중지돼 영토도 지키면서 바지 질질 흘리지 않고 목에 힘주고 사는 겁니다.

수치스런 역사도 직시해야 됩니다
     
Centurion 16-09-27 01:43
   
병자야, 제발 " " 큰 따옴표 사용시엔 남이 했던 말 그대로 인용해라. 인간아.
이건 남의 말 왜곡해서 의역해서 전달하려면 ' ' 작은 따옴표 쓰고 알겠냐? ㅋㅋㅋ

내가 언제 '최영따위가?'란 표현을 쓰디?
최영장군 욕하는 디바 2한테 오히려 뭐라고 한 사람이라니까.
이게 밑도 끝도 없이 구라질이네.

그리고 내가 언제 주원장이 보고 황제폐하 만만세라고 했냐고..
몇번 지적한거 같은데 졸라 꾸준하게 왜곡질이네. ㅋㅋ

게다가, 임진왜란 때 1만 정도의 명군이
10만이 넘는 경상도로 후퇴한 왜군과 전선을 형성했다고라 ㅋㅋㅋㅋ
와따~ 대단하네 대단해.

지도에서 대구, 상주, 남원하고 진주하고 거리가 70~80, 길게는 130km 나오더라. ㅋㅋ
대단한 전선이야. 나는 현대전 시대에 북한군하고 4km 비무장지대(철조망,지뢰밭)에
전선형성된 곳에서 군복무했는데..

세상에 명나라군은 무슨 400 여년 이전에 뭔 레일건이라도 발명했다냐? ㅋㅋ
70~130km 를 거리에 두고 전선형성하게?

이딴 개소리를 지껄이며 명군 미화하는 인간한테서
내가 명나라군 대가릿수 많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을 말한걸로
주원장보고 '황제폐하 만만세'했다는 개구라를 들어야 됨?

병자, 참~ 추하다. 추해.

게다가 나보고 밥이라고 했지?
식인종 같은데.. 제발~ 한국에서 사람 죽여서 뜯어먹고 그러지마. ㅋㅋ
댓글질로 돈 버는 우마오당이거든, 참 먹고 살기 힘들겠어. ㅋㅋ
댓글 하나당 한 90원일텐데. 하루 벌이 하려면 100개 달아야 돼?

전멸설계 어록

"역사에 21세기 니 존심 넣어서 오합지졸이네 하지 말고 지발 있는 그대로 보자.
명나라 군대 없으면 조선군 울산성 근처도 못 간다. "

이 인간아 큰 따옴표는 이렇게 쓰는거야. 명나라 지원군 쳐 빠는 춘장아.
     
Centurion 16-09-27 02:06
   
그리고..

인간이 아무리 낯짝이 두꺼워도..
없는 말 지어내면서 남을 상대로 모함을 하지 말고 최소한 증거라도 들고와.

없는 말 " " 큰따옴표 지 혼자 만들어서 구라 치지말고..

자 내가 어디서 "최영 따위가!" 라고 표현했는지 내 댓글 다 뒤져서 못들고 오면..
넌 앞으로 가생이에서 댓글 달고 설치지마라잉~

너 얼마나 궁지에 몰렸으면,
상대방이 한적도 없는 말을 했다고 지어내면서까지 그렇게 모함하고,
버티는거야? ㅋㅋㅋ

고작 인터넷 논쟁에 양심도 팔고 밑바닥처럼 구는 너의 비참한 모습이 불쌍하구나. ㅉㅉㅉ
          
전략설계 16-09-28 02:33
   
툭허믄 "최영 5만 따위가 어디 230만 명군을 치냐"
이게 니 메들리자나??

이 계시판에서 최영장군 또라이 만든게 누구냐?
너 말고 누가 있어..
5만이 230만 어떻게 치냐고.. 그 소리가 최영장군 정신나갔단 소리 아냐..
그 5만을 요동에 누가 보냈냐?

그 말은 주어담고 싶냐?
그럼 머더러 지도 그려서 5만이 230만 어떻게 상대하냐고 나불대..
병자야..

언제 한족이 요동 지배한 적 있냐..
한나라때로 가야 한다니까..
최영 장군이 요동 보낼 때는 명나라도 요동이 지꺼다는 확신 못 갖을 때여..
너같은 "중국은 어뜬 나란데 최영 따위로" 이런 족속들이
당시 요동상황을 뭐를 안다고..

오죽했음 다른 분이..
"최영이 명을 치러갔냐.. 요동 치러갔찌" 이러 소리 하겠죠..

최영이 마치 명을 치러갔다는 식으로 230만 어쩌고 5만으로 되냐고..
최영을 들 떨어진 사람 만든게 너 아니야..

"황제폐하 만세"하고 얼른 니 조국으로 가
               
Centurion 16-09-28 03:02
   
어물쩍 딴 말 말고
빨리 "최영 따위가!!" 나 찾아 오라고. 구라치고 쫄리면 뒈지던가. ㅋㅋㅋ

내가 디바2한테 댓글에도 달아뒀지만,
최영 장군은 최영 장군의 몫을 한거야. 인간아.

어짜피 주원장 이 인간이 야욕에 불타서
고려에 이것저것 시비걸고 갈구던 판에..
국력이 쪼달려도 궁지에 몰려서 한판 싸움 하려다가..

이성계랑 신진사대부 세력한테 밀려나면서, 명나라도 철령위 뒤로 물리고,
조선 건국까지 한동안 전쟁 안하고 국력 정비할 시간 벌었다고 인간아.

즉, 고려로썬 액션 취하는 시늉만 해서, 전쟁도 막고, 소기의 목적 달성했으니.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을만큼 극적인 효과를 얻은거야. 인간아.

다만, 그 상태로 전쟁했으면 고려 당시 상황으론 안된다고.
근데 인간아, 존나 양아치가 갈구는데 궁지에 몰려서,
힘 없어도 나라 망할 각오로 전쟁 하려는 그 의지는 대단하지만..
실제론 뒷감당 못하는거라고.

그리고 병자야. 5만으로 230만 이길 수 있어?
빨리 46배의 물량을 이기는 방법 한번 제시해봐라니까.

마린 1마리 컨트롤 해서 마린 46마리 잡던가.
니 실력에는 주둥아리만 중2병이지. 아마 어디서 1:1 해도 깨지는 약골 중2병이겠지. ㅋㅋ

명나라군 전선형성 여기선 미필 티를 팍팍 내더니..
이건 뭐 도장에서 1:2, 1:3도 못해본 티도 내고.. ㅋㅋㅋ
에혀~ 집에 컴퓨터 성능후져서 스타크레프트 1도 안깔아봤냐.
어째 저런 무개념 발언을 하고도 부끄러운 지를 모르지?

고려는 최영 장군이 요동정벌 하기 한참 전부터..
친명 정책 펴면서 공민왕이 명나라 책봉 받고, 원나라 공격했던 나라다. 병자야.

그 와중에도 주원장이가 공민왕보고 불교에 빠져 있다고 갈굴정도로 무개념이었는데..
툭하면 고려에 시비질 거니까 우왕이 명나라 연호 사용중지하고 국력이 딸리는데도..
죽기로 달려든거다만.. 이건 왜구에 나라가 마비될정도로 피폐해진 당시 고려로썬
진짜 나라 망할 테크였고..

명나라 놈들이  외교로도 안먹히는 놈들이라..전쟁까지 결심한거야.

근데 위화도회군 이후엔 명나라 이 놈들도 유화적으로 바뀌어서,
철령위 뒤로 물리고, 이성계가 집권한 고려랑은 전쟁 안하고 넘어갔으니..
이게 결국 고려가 비록 왕씨에서 이씨로 '레짐 체인지'는 되었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거야.

너 같은 단세포 두뇌로 손자병법을 알겠나?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걸 고려-조선이 달성했으니, 잘한건데~

이 인간은 단순하게 그걸 또 트집잡네.. 빡대가리 티 내나. ㅋㅋㅋ

최영과 이성계 두 사람이 전쟁 안나고도,
명나라를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으니.. 이게 진짜 환상의 콤비지.
물론 권문세족이 강과 산을 경계로 백성들 노비 만들던 고려 말기 망국적 상황도..
조선 건국과 더불어 토지개혁으로 정리되었으니. 백성들 입장에서도 좋고,
그러다 국력도 정비되니까, 비로써 한판 싸워볼 국력이 쌓인거란다. 병자야.

하여튼 이 인간은 전략은 커녕 간단한 상황 체크도 못하는 빠가네.
          
전략설계 16-09-28 02:33
   
1593년인지도 모르고, 정유재란 타령한게.
내가 알려주니까.. 인제 병력 타령하고 자빠졌네..

너는 그냥 황제폐하 만세나 해

니 국뽕 친구 아몬드가,

전쟁발발 1년 뒤 왜군은 모조리 남해안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전선이라 할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명군이 그때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그냥 하는 일없이 밥만 축낸겁니다
<-- 이런 헷소리를 해서..
      남원-대구-상주면
      진주성을 조선군이 점령한 상황을 보면,
      명군이 조선군과 함께 경남, 부산 일원의 왜군을 카바하는 전선을 형성한 것이야..
      진주성 칠 때 명군이 뒤로 가서 부산을 칠 까봐.. 왜군이 부산쪽 병력을 강화하기도
      했어.. 전선을 형성 안 했음 먼 걱정을 하냐..
      그 시절에 연락수단도 없는데, 적 성 앞에 병력을 상주시켜야 전선이냐??
      최소한 대규모 기습을 사전에 알고 준비할 시간은 벌어놔야지..
      전쟁 기본도 모르는게..

그러고 니 친구 아몬드는 1593년에는 전투가 없었대..
너나 아몬드나 여기 국뽕들은 왜 이 모냥이냐..

1593년에 전투가 있었는 지도 모르는 것들이..
이게 와서 병력 1만이 어쩌고 저쩌고..
에라이 집어쳐라..
수준 안 맞아서 못 놀겠다..

그만큼 망신 당햇으면 찌끄러져.
남원 - 대구 - 상주 명군 배치가 1593년인 것도 모르는 것이
먼 더 할 얘기가 있다고 1만이 어쩌고 타령하고 자빠졌냐


그니까 내가 널 두고 병자란거야
               
Centurion 16-09-28 03:08
   
병자가 또 발작을 했네.

************************************

전멸설계 어록

"역사에 21세기 니 존심 넣어서 오합지졸이네 하지 말고 지발 있는 그대로 보자.
명나라 군대 없으면 조선군 울산성 근처도 못 간다. "

**********************************************************************

개소리 좀 작작해.

명나라군 없을 때 이미 경주성 탈환하고, (1592년 음력 9월 8일)
이치, 웅치 전투(1592년 음력 7~8월)로 전라도 침공하려던 고바야카와 군을 격파해서
전라도 지키고 있는 상황이야. 병자야. ㅉㅉ

명나라군이 4차 평양성전투(1593년 음력 1월), 벽제관전투(1593년 음력 1월)에서야
남하하는데 뭔 명나라군 때문에 울산성 근처까지 진격한다고 개소리냐.

춘장 티내냐? 전선형성은 명나라군 이전에 이미 되어있어. qt야.

어차피 일본군이 행주대첩 이후 철수해서 남해안으로 제발로 내려갔는데..
벽제관에서 깨진 명나라 군 덕분에 전선형성했네~ 헛소리하는게 니 병맛 주장 ㅇㅋ?
          
전략설계 16-09-28 02:34
   
"역사에 21세기 니 존심 넣어서 오합지졸이네 하지 말고 지발 있는 그대로 보자.
명나라 군대 없으면 조선군 울산성 근처도 못 간다. "

<--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1%EC%B0%A8_%EC%9A%B8%EC%82%B0%EC%84%B1_%EC%A0%84%ED%88%AC

조선군 11,500    가토군 15,000

11,500으로 15,000을 공성하냐?
세상에 그런 공성도 있어..

병자야 객기로 전쟁하냐..
너같은게 지휘하면 다 죽겠다.. 지휘할 리도 없겠지만

명군 36,000이 같이 가도 공성에 실패했는데.
조선군 11,500만 딸랑 가서 공성해?

다 죽는 미친 군대 만들래..
               
Centurion 16-09-28 03:38
   
암만 그래도,
입으로만 46배 군사력를 한큐에 이길 것처럼 떠드는
숫자계산도 못하는 아큐보단 내가 낫지 ㅋㅋㅋ

넌 일단 유치원 돌아가서 산수나 다시 배워.

글고, 울산성 전투는
니가 쳐빠는 명나라 원군이 대가릿수만큼의 밥값도 못하고 쳐밀려간 싸움인데..
꼭 예를 들어도 그딴걸 드네. ㅋㅋㅋ

일본군이 어디 명나라군에 밀려서 저기 남해안으로 철수했냐?
벽제관에서 이여송이 친위기병대가 몰살을 당하고, 이여송까지 죽을 뻔 했어.

그 다음에 명나라군하고 합류하려고 북상하던 권율의 조선군이 행주대첩에서..
일본군 와장창 깨버리고, 부상병도 많고, 후방의 조선수군에 수로가 막히고,
조선의병들의 게릴라전에 육로 보급로 유지도 안되니.. 철수한거라고.

무슨 명나라군이 전선형성을 해? 뭐 평양성 전투 때랑 직산전투때는 인정해도..
울산성까지 내려간게 무슨 명나라군 덕분이라는 개소리는 정말 웃겼다. ㅋㅋㅋ

뭐, 물론 직산전투의 소규모 충돌 이후에
일본군이 전의 상실해서 다시 제발로 남해안으로 내려간건 맞는데.

이게 무슨 명나라군이 일본군 방어선 때려 부수고 전진한 걸로 보이냐? 병자야.
일본군이 제 발로 내려가서 왜성에 짱박히니 슬슬 내려간 준 거라고. ㅋㅋ
          
전략설계 16-09-28 02:34
   
평양성 3차 전투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3%EC%B0%A8_%ED%8F%89%EC%96%91%EC%84%B1_%EC%A0%84%ED%88%AC

위키가 다 맞는건 아니겠지만.. 위치 내용대로 결과를 보면

조선군 단독으로 2만 가서 7천 죽고
소서군  16,600중 딸랑 100명 죽었다

조선군이 더 많아도 공성에서 이런 결과가 나오는데.

조선군 11,500으로 가토군 15,000을 공성해?

이 병자는
말 꺼내는 족족 나한테 털리고도 쪽 팔린지를 모르네..

계속 지껄이믄 안 지는거냐??
그만큼 깨졌으믄 찌그러져
내 시간이 아깝다. 계속 이렇게 털리믄 너 Pass한다
엉아하고 말 섞을라믄 수준이 되야지

남원-대구-상주가 1593년인지를 모르고 정유재란 타령해..
요동이 한족껀줄 알고 최영보구 5만으로 요동 안 갔냐 그러고..
11500으로 15000 수비하는 성 공성하라질 않나..

말하는 족족 너는 지적당할 모자란 소리만 하냐..
불쌍타
               
Centurion 16-09-28 03:28
   
이 인간 진짜 무식하네.
밀알못, 역알못도 정도가 있지. 입만 열면 무식이 좔좔 쏟아져.

인간아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군이 활약한건
저기 왜구 척살하던 척계광의 남병이 활약해서야.
18반 무예 원앙진에 대포 갈겨서 때려잡는 왜구 전문부대가 남병이야.

*****************************
이후 조명 연합군은 2일 동안 탐색전을 하여 일본군을 관찰하다가 2월 8일(음력 1월 8일) 대공세를 가했다.

명군의 대장군포, 위원포, 자모포, 연주포, 불랑기포 등 수많은 대포들을 평양성에 집중사격하고
외성 서남쪽 함구문은 명군의 조승훈과 조선의 이일, 김응서의 8000명 군사가,
칠성문은 장세작이, 보통문은 양호가, 모란봉은 오유충과 사명대사의 승병 2200명이 공격에 나섰다.

양측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오유충은 적의 탄환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들을 독려하고 이여송도 타고 있던 말이 적의 탄환에 맞아 죽자 다른 말로 갈아타 군사를 지휘해 사기를 올렸다.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4%EC%B0%A8_%ED%8F%89%EC%96%91%EC%84%B1_%EC%A0%84%ED%88%AC
************************************************************


물론, 당시 조선군도 상당히 훈련이 안된 급조된 오합지졸이라 병맛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평양성 전투 끝나고 나서, 조선군이 이여송(요동 군벌)이 이끄는 명나라 북병(만주, 몽골 등 기마병 중심) 대신에..
얼마 안되는 남병 좀 더 파병해달라고 한게 괜히 그런게 아니란다. 화기 사용 비중이 높은게 남병이야. 인간아.

그래서, 불멸의 이순신이나, 징비록 같은 드라마에서도 나오지만,
명나라군이 대포 뻥뻥 쏴대서 왜구들 작살나는데..
왜구들도 전국시대엔 대포 쓰는 인간들이 그닥 잘 없어서 멘붕이었거덩.

그  척계광이가 활약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구 꼴랑 몇십명한테 주원장이 도읍삼았던 첫수도 남경성이 포위되서..
꼼짝도 못했다고 내가 예전에도 몇번이고 적었을낀데.
이 인간은 학습능력이 얼마나 떨어져서 모르는건가?

맨날 명나라군이 왜구한테 깨져서, 돈 왕창 주고, 대신에 원앙진 중에 앞에 등패수 뒈지면
같은 팀원은 몽땅 참수로 다스리던게 남병이다. 이런 규율로 단련된 애들이니 싸움을 악착같이 하니 잘할 수 밖에.

병자같은게.. 그런 역사적 배경을 모르니, 명군이 그냥 잘난 건 줄 아나보네.
물론 명군 대부분이 징병제도 아닌 모병제 스타일로 나라에서 돈받아먹던 직업군인 급이니 농사짓다 끌려온 조선군이랑 훈련도가 다르지.

갑자기 징집해서 끌려온 농민병에,
아예 훈련이고 장비고, 전술이고 없이 밀어넣던 당시 조선군이 이길턱이 있냐. ㅉㅉ

물론 그나마 조선의 북방군은 여진족이랑 실전경험이 풍부해서,
명나라군도 인정할만큼 정예군이었다지만.. 이 병력들 상당수도 병맛 지휘로 날려먹은터라..

글고 이건 저기 선조가 달고 다니던 조선군 상황이고..
저기 전라도나 경상도에서 쌈질하던 관군, 의병들은 달랐지. 인간아.

뭔 평양성 전투에서 깨져나간 조선군하고, 행주대첩에서 일본군 박살낸 조선군하고,
가는 족족 일본수군 파토낸 조선수군하고 다 같은 조선군인데, 이 인간은 "조선군" 딱지만
달면 다 오합지졸인 줄 아나.. 정신나갔네 ㅉㅉㅉ
                    
전략설계 16-09-29 00:49
   
뭐래냐?

횡설수설하냐.. 밀릴 땐 횡수가 전법이냐?

니기 : 1593년에 전투가 없었다  <---  나 : 1593년에 진주성 2차싸움 있었다
니기 : 깨갱후 아닥

니기 : 명군은 전선이고 뭐고 없다  <--- 나 : 남원-대구-상주에 명군이 배치됐다

니기 : 남원에서 진주성까지 60킬로다
<--- 나 : 명군이 수가 부족한데 부산 앞에다 배치해야 전선이냐..
            연락이 어려운 중세 전쟁에서 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틀 정도 거리에
            두고 주둔해야 적의 대군 급습에 방어할 수 있는거여.
            (부산 앞 김해에 주둔해야 전선이냐.. 그건 다 죽는 전선이여)
            (적진 앞에서 퍼자다 전멸한 칠천량해전의 원균같은 짓이여)
            (지리산에라도 주둔해야 전선이냐..)

니기 : 깨갱한 후 아닥

니기 : 명군 1만이 군대냐??

니가 입질 여기까지 해놓고 횡수하냐? 여진족 북방이 어쩐다고?? 병자 맞네
내가 답변할 차례지.. 횡수하는 병자는 이렇게 정리해줘야돼

1만이 아니야.. 1만5천 가까이 되는 병력이야..
1만5천이 군대가 아니면,
탄금대 신립이는 군대냐? 아니면 임진강 막던 조선군이 군대냐?
울산성 치던 조선군이 군대냐?

말좀 해봐.. 니는 개논리야..

말 꺼내는 족족 다 깨지고 화제 돌린다고 딴 소리하지마
                         
Centurion 16-09-29 00:55
   
이제 아예 창작의 영역으로 넘어갔냐? 뭔 개소리야.

니기?? 이건 또 무슨 조선족 용어냐? 중국어냐? 말귀를 못알아먹겠다. 짜장아.

한국사람인 척 하려면 좀 조선족 용어는 적당히 써라. ㅋㅋ
                         
Centurion 16-09-29 01:49
   
병자가 또 발작을 했네.

************************************

전멸설계 어록

"역사에 21세기 니 존심 넣어서 오합지졸이네 하지 말고 지발 있는 그대로 보자.
명나라 군대 없으면 조선군 울산성 근처도 못 간다. "

**********************************************************************

개소리 좀 작작해.

명나라군 없을 때 이미 경주성 탈환하고, (1592년 음력 9월 8일)
이치, 웅치 전투(1592년 음력 7~8월)로 전라도 침공하려던 고바야카와 군을 격파해서
전라도 지키고 있는 상황이야. 병자야. ㅉㅉ

명나라군이 4차 평양성전투(1593년 음력 1월), 벽제관전투(1593년 음력 1월)에서야
남하하는데 뭔 명나라군 때문에 울산성 근처까지 진격한다고 개소리냐.

춘장 티내냐? 전선형성은 명나라군 이전에 이미 되어있어. qt야.

어차피 일본군이 행주대첩 이후 철수해서 남해안으로 제발로 내려갔는데..
벽제관에서 깨진 명나라 군 덕분에 전선형성했네~ 헛소리하는게 니 병맛 주장 ㅇㅋ?

*************

춘장아.내가 언제 1593년에 전쟁 없다고 했냐?

전멸짜장이가 정신이 나가서 말 지어내는 거 보소.

고의적 난독이냐? 멘탈붕괴로 헛것이 보이는 것이냐? ㅋㅋㅋㅋ
               
Centurion 16-09-28 06:08
   
자, 이쯤에서 너랑 나랑 요약 정리를 해보겠다.


전멸설계 왈: '조선은 중국 속국이다'

나 : '조선은 표면상 책봉은 받았으나, 외교, 국방, 조세 등이 독립된 실질적 자주국. 수틀리면 책봉을 준 중원제국과 맞짱도 불사. 책봉은 오늘날로 치면 중원국가와 평화, 외교, 무역 관계를 상호인정하는 국교 성립과 같음.'



전멸설계 왈: '조선은 위화도회군으로 세워졌으니 사대주의 개쩌는 정신적 속국. 중국 속국임'

나: '고려 말기는 오랜 전란으로 고려 전체가 피폐해졌고, 권문세족의 횡포로 나라꼴도 엉망임. 그 상황에서 파죽지세로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랑 맞짱 뜨는건 당시 고려 상황으로 어려움. 위화도회군을 통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섰으나, 조선도 국력 재정비 후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추진. 왕자의 난으로 백지화되지만, 명나라 최전성기 군사력과 정면충돌하지 않고 임진왜란까지 200년 평화를 누림. 외교적으로나 결과론적으로나 현명했슴.'



전멸설계: '고려가 망할지라도 5만으로 명나라치러간 건 눈물나게 감동적'

나: '고려가 들이박았으면 5만 병력이 소모된 후, 차후를 장담못함. 대몽항쟁 이상의 피해발생 가능. 베트남도 20년에 걸쳐 독립전쟁을 벌였다는데, 당시 고려는 원나라와의 항쟁, 홍건적, 왜구 등 거듭되는 전란으로 국력 피폐. 특히 왜구한테 삼남지방 곡창지역, 인구밀집지역이 유린당한 상태에서 국력을 회복하고 재정비하지 않은 이상, 명나라와의 전면전은 국가 멸망과 외세지배를 부르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슴'




전멸설계: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모두 책봉받았으니 속국. 조선은 특히나 사대주의 찌든 정신적 속국'

나:'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모두 무늬만 책봉을 받았을 뿐, 실질적 지배나 간섭을 당하면, 중원제국과 맞짱도 불사. 조선 역시 명나라가 장난질치자, 요동정벌 계획 세움. 책봉국=속국이란 전멸설계의 논리로 볼 때, 이런 속국이 종주국을 들이박는 행태는 "사대주의"란 말이 성립되지 않음. 애시당초 "사대주의"가 성립되려면, 정신적으로 예속화 되서 명나라가 시키는대로 곧이 곧대로 다 받아들이고 이의제기도 안하는게 당연함.'



전멸설계: 'Centurion이 명나라 230만 대군 앞에 최영따위가!!'라고 왜곡 날조.

나: '최영 장군이 요동정벌론 내세울 당시 고려 국력과 군사력은 피폐해져서 밑바닥 수준이었으나, 명나라가 공민왕 때부터 친명정책을 써온 고려에 대해서 막무가내 양아치짓을 벌여왔고, 철령위를 일방적으로 선언함으로써 고려 최후의 자존심까지 건드림. 그래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고려가 택한 요동정벌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슴. 최영 장군의 요동정벌계획이 있었기에, 이성계의 위화도회군도 빛을 보아, 명나라가 철령위를 뒤로 물리고, 고려 말, 조선 초기 우호적 관계로 돌아설 수 있었슴. 즉, 최영과 이성계는 반대편에 서있었지만, 기막힌 적대적 파트너쉽으로 명나라에 강온 양면의 외교전략을 통해, 명나라의 야욕을 뿌리치고, 고려땅에 평화와 안정, 내정과 군사력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줌.'




전멸설계: '명군 없었으면 조선군은 울산성 근처도 못감. 명나라가 전선 형성함'

나: '명군 없을 때 이미 경주성 전투, 이치, 웅치전투로 경상도 의병,관군이 후방에서 활약하고, 전라도 방어선을 형성함. 이순신 함대와 경상도, 충청도 관군, 의병의 활약 등으로 수로 보급로는 단절, 육로 보급로 또한 위협받아 일본군의 남해안으로의 철수를 불러옴. '

명군은 평양성 전투에서 활약하지만, 벽제관에서 깨지고 소극적으로 변신, 이후 4년간 밥충이 모드로 변신.

선조가 의병, 조선관군 해산시켜 농사지으러 보내거나, 명나라군 쌀배달시키고, 명나라군은 정유재란 때 명군이 주력이 되어 남하해서 왜성 공략을 하지만, 모조리 실패.

명군이 그나마 이겼다고 하는게 직산전투 정도인데 이것도 고작 수천명끼리 싸운 전투라 규모 자체가 작았고, 그냥 일본군 입장에서 북쪽에 명나라군, 바다엔 이순신함대 양쪽이 존재한다는 것에 왜장들이 의논해서 그냥 뒤로 빽함.

명군의 존재가 심리적 효과는 있으나, 무슨 일본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야전에서 연전연승해서 일본군을 몰아낸것은 아님.'




전멸설계: '일본군은 명나라군과 조선군에게 깨져서 조선하나 못잡아삼킨 허약한 군대. 세계적 강군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몽골군, 팔기군, 프랑스군 등등.. 시대구별없이 그냥 전멸설계 본인 머릿속에 쎄다 싶은 군대만 세계적 강군.'

나: '일본군은 1592년 당시 기준으로 세계적으로 군사력 top 10안에 들어갈만큼.. 병력과 장비, 실전경험이 풍부했던 군대. 이것을 200년 평화속에 농사만 짓고살던 조선이 나라 안뺏기고, 물리친 것 자체가 대단한 일.'

(이에 전멸설계는 일본군은 과대평가한다고 나를 왜빠로 몰기도 하다, 다른 구경꾼 유저들한테 욕쳐먹음)




전멸설계: '기병이 주력이 아닌 군대는 강군이 아님. 몽골군이나 팔기군처럼 보급없이 존나 달리고, 약탈로 현지보급하는 군대가 강군. 일본군이 못삼킨 조선을 청나라 팔기군은 잡아먹음.'

나: '꼭 기병이 아니라도, 대영제국 레드코트나 나폴레옹의 프랑스 그랑따르메(대육군),  로마제국 군단병들같은 강군들이 즐비함. 꼴랑 보급의 현지조달 같은 한가지만 갖고 강군 타령하는 인간이 또라이임.'


전멸설계: 'F-16 같은 전술기보다 A-10 같은 대전차공격기를 많이 사와야됨.'

나: '한국공군에 전술기가 부족한 판에 매버릭 셔틀로 전락한 A-10 사올 바에 다른 전투기를 사와야됨)



전멸설계: '핵잠수함은 필요없다. 디젤잠수함이나 많이 뽑아라'

나: '우리나라는 장기적으로 전략원잠이 있어야, 핵전쟁이나 외세의 침공에서 안전을 장담할 수 있다. 그 가치에 비하면 전략원잠 도입과 핵무장 비용은 아주 저렴한 투자다.'




위 내용은...
전멸설계의 Stone + kid (똘x이)  짓을 수없이 지켜본 동아게 유저들은 다 익히 아는 내용..

요약..

본인은 한반도 왕조의 자주성을 이야기하고,
군사력, 국력에서 불리한 시점에서의  다소 겉보기엔 별로 멋지지 않은
약간 비굴하지만 현명한 외교에 대해서도 지나친 폄하는 하지 않음.

반면 전멸설계는 주구장창 한반도 왕조를 중국 속국이라 부르짖고,
책봉받았으니 제후국이고 속국이다 기를 쓰며, 짱개속국으로 만드려고 애씀.
나라가 자칫 역으로 망국으로 치닫을수 있는 성공확률이 희박한 군사적 모험에 대해서
눈물나게 감동적이라며 찬탄을 하며..본인의 중2병 성향과 일치시키는데...
(뭔가 나라 망치려는 간첩마냥 수상한 냄새를 풍김)

(본인도 맨날 밀게, 동아게 등을 오가며,
 "일당백", "평정" 이딴 용어 써가며, 과도한 중2병 나르시스트 모습을 보임.
 현실은 유저들에게 돌멩이 쳐맞는 다굴 신세. 어디가도 줄줄 무식이 새는 깨진 쪽박신세.)

이런 것을 볼 때. 전멸설계는 본인 같은 치기어린 중2병짓하다 나라가 망해도 좋다.
한반도 왕조들은 분명히 중국의 속국이다를 강변하고, 조선이 일본을 물리친 것도..
그딴 조선군에 깨진 허약한 일본군 물리친게 대수냐?라는 순환논리를 사용...
일관되게 한국사 비하. 폄하. 반복.

댓글마다 말을 지어내서 유저들의 과거 언행을 지 멋대로 꾸며내어 중상모략..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다라는 논리를 강변하다,
이에 반론을 제기한 사람들을.. 사대주의자로 몰아가려고 하는 병맛 프레임을 만듬.
(상대방들은 대부분 군사력,국력차이를 직시하는 현실주의적 입장.
 그러나 본인은 한국사가 중국 속국의 역사라며 짱개국 대변인마냥 부르짖음.)

이런것을 종합적으로 볼때..
중2병, 내뇌망상과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등.. 여러 행태를 볼 때.. 병자가 확실함.
게다가, 한반도 역사를 중국 아래 집어넣으려 애쓰는 걸로 보아, 분명 짜장임..

그 외 밀게에서의 행각을 보더라도..
이 인간은 대한민국 군사력 약화를 꾀하는 짜장 우마오당 삘이 남..
이렇게 한결같이 한국을 망치고 엿먹이고, 비하하는 인간이 한국인일리가 없슴.

니가 중공 전략설계 팀 말단 시다바리 우마오당 요원 정도라면 니 행각에 이해는 간다 ㅋㅋㅋ

글고, 너 하는 짓 보니.. 예전에 옆동네에서도 제법 설치고 다녔고, 여기서도 설치던 짜장같은데..
혹시 화X 김도X이냐? ㅋㅋㅋ 그 못생긴 돼X가 붉은상어인가 뭔가라던데.
다중이 아이디 수십개 돌리고, 딱 보니, 가생이에서도 그 짓하나벼..

오투X, 컴플X, 타X, 나가XX, 인디X, 이것들 싹다 아이피 까발려져야 다중이짓을 안할낀데.
맨날 쳐발리면 2렙 캐릭 만들고, 어디선가 포인트 왕창올려서 고렙만들고, 쪼렙으로 어그로 끌고, 고렙으로 자문자답 다중이질..
딱 하는 짓이 옆동네 화교 넘들 하는짓이랑 똑같네.

이래서 동아게도 아이피 부분 공개로 가야 되는데..
                    
전략설계 16-09-29 01:00
   
내가 속국에 대한 정리를.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5306&page=2
A4 5~6페이지 분량으로 정리했는데..

 '조선은 위화도회군으로 세워졌으니 사대주의 개쩌는 정신적 속국. 중국 속국임'
<-- 딸랑 이걸로 정리하냐?

위 주소 글에서,
동양에서 속국의 의미는 군신관계 맺고 조공책봉 했으면 속국이고,
거란 전쟁 이후 고려는 속국에서도 자주국에 거의 근접한 최고등급 9등급 주고.
자주국 같은 속국이라고 친철하게 써놨구만

저 글 올린 지 한 10일 뒤쯤
나한테
"조선이 속국이면, 고려 고구려는 뭐냐? 고려 고구려는 왜 속국이 아니고 조선만 속국이냐?"

나한테 이렇게 묻는건 글 읽기도 못하는 병자나 하는 짓이지.
근데 니가 저렇게 해.

뭐라 답하냐?
글 읽기부터 안 되는데..

죽겄지?
지기는 싫고.. 진거 인정하기는 죽기보다 싫지~잉?
근데 어쩌냐??

계속 깨지는건 넌데..

이번 기회에 니 인생에서 깨지는 경우도 있다 깨끗히 인정하고 배워..
나는 논쟁해서 져본게 기억에 없어. 언젠지를 나도 몰것어

뒤에는 쓰느라 욕봤다. 수고했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enturion 16-09-29 01:12
   
이게 멘붕해서 정신이 아주 가출을 했구나 ㅋㅋ

니 내뇌망상으로 속국 9등급 이 GR하면 누가 알아줘? ㅋㅋ

결국 니 말은 즉슨,
죄다 한반도 왕조는 책봉받았으니 속국이라고 니 입으로지껄였잖아.

1등급 속국이고, 9등급 속국이고.. 니가 말하는게 다 속국이란 소리잖아. 병자야. ㅋㅋㅋ

이게 어디서 말돌리기를 해. ㅋㅋㅋ

니 녀석 글을 읽는 눈이 몇개인데,
아직도 이 인간이 유초딩 수준의 저급한 드리블로 빠져나갈 궁리를 하네.

**************************************

전략설계 16-09-26 04:22 

"고구려가 속국아니다" <-- 이거 찾아와

새벽 4시다. 니 헷소리 듣는거 보면 토나와.. 찾아와 빨리 병자야
너는 밥이라니까.. 헛다리만 집자나.. 나는 니처럼 빈틈이 많지 않어..
니같은 것들 트럭째 덤벼두 파고들 빈틈이 없다니까..

"고구려가 속국아니다" <-- 이거 빨리 찾아와 병자야

나: 조선은 중국 속국 아니다. 중국이 허용하는 외교관계가 그것 뿐이라 그렇지.
      책봉 받은건 표면적인 것일 뿐 실제적으론 자주국이자, 서로 다른 외국 관계다.
      명나라의 군사력이 워낙에 차이가 많이 나서 평화를 추구한게 속국이란 전멸설계
      니 논리는 헛소리다.
<-- 너? "명나라가 어뜬 나란데 최영 따위가" 이거잖아?
    패전한 임란왜군도 세계최강이구.
    조선이 속국이라 한 것은 조선왕이라니까.. 내가 아니고.. 니가 뭔데 아니래..
    니가 조선왕보다 상징성이 있어?
    제후국이니까 황제만 하는 천제 못한다고 했잖아..
    조선왕은 황제국과 제후국 차이를 알고 현실에 반영을 했다니까..
    세조 다음에는 아예 천제도 안 하잖아.. 원구단 천제 얘기하는거다..
    원구단도 태종이 천제 할라고 지은거여..

명나라랑 전쟁할려고 했다, 안했다 이거 하나 차이로
<-- 그거 하나가 아니라니까 병자야.. 내가 몇가지를 얘기했냐.. 멍청한거냐
      고구려는 속국 아니냐? 이러는거 보믄 국뽕질 하다 정신도 이상해..
      고구려 속국 아니다 라는 사람이 없고, 명나라 전쟁 이걸로 속국이다는 사람 없어..
      중세 동아시아는 군신관계 맺고 조공책봉 다녔으면 속국이라고 몇번을 얘기해야 돼
      멍청아~

이어서.. 조선이 정신적 속국인 이유

**********************************

=> 책봉받았으면 죄다 속국이라고 떠드는 전멸설계 니 댓글이야. qt야. 이것 좀 보고 기억을 되살리렴.



그리고.. 니 주제에 무슨 논쟁을 해서 깨진적이 없어..??
밀게고 동아게고 가는 곳마다 쳐발리고, 다굴 쳐맞는게 불쌍할 지경이던데 ㅋㅋㅋㅋ

세상에 너같이 허술한 인간도 잘 없겠다. 우기기 대마왕 정도라고 해두자. ㅋㅋㅋ
나도 인터넷 오래 하다보니 간혹 집착 개쩌는 정신병자들이 키배 잘한다고 부심 부리는건 간혹 본다.ㅋㅋ

옆동네 있을 때 '미친개'라고 한명 있긴 있었는데.. 뒤끝이 아주 그냥... 몇년짜리여. ㅋㅋ
넌 걔 따라가려면 한참멀었다. ㅋㅋ

걔 말고도 병자들이 좀 있긴 했다만.. 별명이 4천왕이었지.
거의 맨날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연예인 팬덤 녀석들이라 참 피곤한 놈들이었는데..

그 시궁창에 비하면,
가생이가 워낙 클린한 사이트라 멘탈붕괴가 뭔지 보여주지 않은걸 진짜 축복인 줄 알아라.
내가 미친개 스타일도 많이 때려잡아본 사람이거든. ㅋㅋ

솔까, 좀 실명제 사이트였으면,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들고 다니게 만드는것도 쉽긴한데..
워낙에 이런 비실명 게시판이 너같이 개쪽 팔고도, Power overwhelming 무적치트 쓰고, 계속 개기는 하수 애들이 많아.

자뻑과 나르시즘적 착각 속에 살면서..
맨날 쳐발리고도 지가 "일당백", 밀게를 "평정"한 줄 아는 거 보면.. 내가 너 때문에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 ㅋㅋㅋ
                         
Centurion 16-09-29 03:36
   
그리고 니 상황을 니가 병자라서
객관적으로 '인지'를 전혀 못하는 것 같아서..
내가 비유를 해서 설명을 해줄께..

본래 게임에는 "룰 Rule"이 있거든.
장기를 둘 때는, 졸은 한칸씩 움직인다.
포는 앞에 뭐가 있어야 뛰어넘어 움직일 수 있다.
차는 직선으로는 갈 수 있으나 대각선으로는 못간다.

그런데, 지금 전멸짜장 니가 얼마나 하수인지 가르쳐주자면..
장기두다가, 상대방이 "장군" 불러서 이미 졌는데..

"사"를 무슨 "차"처럼 궁 밖으로 막 움직이고,
왕을 "포"나 "차"처럼 막 움직이며 피해다니는 수준이랄까.

개초보가 프로게이머한테 쳐발릴 거 같으니,
"Power overwhelming" 무적치트쓰고, 난 이제 데미지 안받음~ 내가 이겼슴.. ㅋㅋㅋ

이게 지금 니 꼬라지야.

상대방이 한적도 없는 말 막 지어내고,
남들이 죄다 너한테 혀를 끌끌 차면서, 비판해서..
밀게, 동아게 대다수 유저들이 다 널 qt로 생각하는 중인데..

본인은
"으허허허. 난 일당백이다. 난 무적이야. 거짓말 꾸며내서 상대방 엿먹이며 버텨야지."
이 정도로 추락한거란 말이지 ㅋㅋㅋ

본인 딴에야.. 게릴라전이라도 하는것마냥 뿌듯하겠다만.ㅋㅋㅋ
이미 정규전에서  압도적으로 쳐발리고,
패배한거 인정하기 싫어서 끝까지 정신승리하는건데...

실제 전쟁 상황이었으면.. 게릴라전까지 다 발본색원되어 이미 뒈졌을 녀석이..
그냥 인터넷이니까, 패배는 인정안하고 정신승리로 버티는 형국이란 말이지.

즉, 게임의 룰이 정해져 있는 장기에서 두뇌싸움에서 쳐발린 개초보가..
상대방 상대로 거의 장기 게임이 아닌 "알까기" 수준의 망발로 버티고 있다? ㅋㅋ

이러면서 자신은 장기의 초일류 고수다!라고 자뻑하는 상황이 니 꼬라지야.
               
촐라롱콘 16-09-28 18:03
   
1593년 시기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철수하고, 2차 진주성전투 이후에는
일본군 상당수 병력이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합니다!

뒤이어 남하한 명나라군도 주력군 상당수는 명나라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고
남원-성주-대구-경주 축선을 방어선격으로 삼아 각각 부총병급의 지휘관이 지휘하는
각각 4,000명씩 도합 16,000명의 명나라군이 주둔하면서 정유재란 발발 이전까지의
소강상태기간을 유지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한 가지 오류를 지적하자면 위의 명군배치지역가운데 상주가 아니라
성주가 명군배치지역입니다. 상주는 남원-대구축선과 비교하여 상당히 북쪽에 치우쳐
있습니다.
                    
전략설계 16-09-29 00:39
   
남원-대구-상주가 맞네요.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6일 무진 5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6월 29일 함락된 진주성 싸움의 자세한 경과

당초에 적추(賊酋)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제추(諸酋)의 군대를 합치면 30만이라고 하였는데 어떤 자는 7∼8만 명이라고 하였다. 왜적이 수륙(水陸)으로 함께 나아가 진주를 공격하려 할 때 총병(總兵) 유정(劉綎)은 유격(遊擊) 오유충(吳惟忠)과 함께 대구(大丘)에 있고,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는 유격 송대빈(宋大斌)과 함께 남원(南原)에 있고, 유격 왕필적(王必迪)은 상주(尙州)에 있고, 유격 심유경(沈惟敬)은 평행장(平行長)의 영중(營中)에 있으면서 왜적과 강화(講和)하여 왕자를 돌아오게 하기를 도모하고 있었는데, 경략이 유경에게 이문(移文)하여 꾸짖기를,
고이왕 16-09-27 11:04
   
명군은 일본에게 심리적 부담감이었지 직접적인 위협이라고 여겨지지 않았고 명나라가 육군의 전장을 비율상 차지하게 되도 정유재란에 대다수 전투를 치른 것은 조선군이었습니다 그리고 명군이 참여한 전투는 제대로 된 경우가 없었습니다 승리했다고 자위하는 직산전투도 일본측 울산성 전투도 명군이 승리하지 못하고 철수한 경웁니다.. 반면 조선군 혼자서 작전한 경주성전투에서 승리하고 탈환하죠...순천 전투도 이순신 말 안듣고 멋대로 야습하다가 일본군 역습받아서 패하고 애궂은 조선병들은 죽고.. 이런 경우 많습니다...명군은 임진왜란 주역이 아니라 방관자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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