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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10-10 23:43
청군의 80만 학살 밝힌 ‘양주십일기’
 글쓴이 : q
조회 : 11,081  

청군의 80만 학살 밝힌 ‘양주십일기’

禁書(금서)에 숨은 역사

청군의 80만 학살 밝힌 ‘양주십일기’ 청조 타도 의식화 교재로
히틀러시대 금서 1호는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








‘국민가수’ 이미자씨가 데뷔 50주년을 맞아 10월에 전국 순회공연을 펼치고 있다. 그의 대표곡인 ‘동백아가씨’는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다. 박정희 정권과 5공화국 때는 금지곡뿐만 아니라 금서(禁書)도 적지 않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금서의 역사는
길다. 정권의 정통성이 약하거나 집권자의 권력욕이 강하면 금서 목록이 대폭 늘어난다.


서양의 대표적 금서로는 독일인 에두아르트 푹스가 쓴 ‘풍속의 역사’를 들 수 있다. 풍속의 핵심은 성풍속이며 성풍속의 변화 뒤에는 경제적 요인이 자리잡고 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이 책은 히틀러시대의 금서 1호 격인 책이다.


청나라 때의 대표적 금서로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라는 책이 있다. 청나라 초기 청군이 중국 강남의 양주성을 함락시킨 후
1645년 4월 25일부터 5월 5일까지 열흘간 양주 주민 80만명을 학살했다
. 당시 청군은 명나라 잔존 세력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양주에서 큰 피해를 입자 본보기로 양주성민을 모두 도륙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대대적인 학살을 감행했다. 이때 양주 주민
왕수초(王秀超)는 청군에게 가족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청군의 만행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 책이 ‘양주십일기’다.


일부 구절을 인용해보자. “이윽고 해가 저물자 청국 군사들이 사람을 죽이고 있는 아우성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성내 곳곳에서 불이 일어나 화염이 오르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시체는 산더미처럼 쌓이고 이날 나는 형과 형수 그리고 동생과 조카, 넷을 잃었다. 이제는 장형과 나 그리고 아내 세 사람만이 남았다.”


이 책에는 무자비한 도살은 물론 강간, 윤간과 간살(姦殺)에 대한 묘사가 무수히 많이 나온다.


양주대학살이 얼마나 심각한 사건인지 알려면 ‘난징(南京)대학살’과 비교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난징대학살은 지금도 중·일 간
극한 대립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사건으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학살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사건은 1937년 12월 13일부터
다음해 1월까지 40여일간 일본군이 중국 난징에서 약 30만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양주대학살은 불과 열흘이라는 짧은
기간에 약 80만명을 학살했으니 규모와 잔혹성 면에서 난징대학살을 훨씬 능가한다.



양주대학살은 청나라 초기의 대학살극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됐다. 청 초기 청군에 의한 대살상극을 흔히 ‘양주십일,
가정삼도(嘉定三屠)’라고 한다. 가정삼도는 다음과 같다.
1645년 청군이 남경을 점령함으로써 명나라 잔존 세력인 남명(南明)
홍광(弘光) 조정이 멸망했다. 이후 청조의 변발령에 반발해 강남 여러 곳에서 민중봉기가 발생했고 청조는 대대적인 살육을
자행했다. 지금의 상하이(上海)가 속한 가정성은 세 차례에 걸쳐 주민들이 학살을 당했다. 이것을 ‘가정삼도’라고 한다.
양주대학살을 생생하게 묘사한 ‘양주십일기’는 청나라 초기부터 금서 중의 금서로 지정됐다. 이 책은 중국 내에서는 잊혀졌으나
일본으로 흘러들어갔고 청나라 말기인 19세기 말에 일본에서 재발견된다.
당시 멸만흥한(滅滿興漢)을 꿈꾸던 한족(漢族) 지사들이
대거 일본에서 망명 중이거나 신학문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일본에서 ‘양주십일기’를 발견하고는 울분과 흥분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이후 이 책은 다시 중국으로 밀반입돼 청조를 타도하기 위한 한족 지사들의 의식화 교재로 널리 활용됐다.

명말청초의 만주족에 의한 한족 대규모 학살

블로그명 :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명말청초 대학살의 기록들

[양주십일기],[가정을유기사],[강변기략] 등의
사서에는 청군의 만행이 기록되어 있어,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아래에 나는 청조의 관방자료 내지 제
삼자의 서술을 토대로 이러한 만행들에 대한 보다 종합적인 자료들을 모아서 서술했다.


1.청조의 관방학살기록자료

우선, 청조는 자신이 행한 학살에 대한 예고격인 자료를 발표하였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청세조실록] 17권 순치2년 6월 병인중의 기록이다.
“ 이 포고령을 공표한 이후, 북경성 내외와 직속 각성에서의 모든 백성은 10일 안에 변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이를 위반할 시, 어떤 변명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自今布告之后,京城内外,直隶各省,限旬曰尽行剃完。若规避惜发,巧词争辩,决不轻贷”。并宣称:)


이와 동시에,
“변발령을 지켜서 투항하는 지역은 기존의 지위와 부를 보존하게 될 것이다. 만일 반항하는 지역은 대군을 출동시켜,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고,살륙할 것이다.”
“所过州县地方,有能削发投顺,开城纳款,即与爵禄,世守富贵。如有抗拒不遵,大兵一到,玉石俱焚,尽行屠戮。


청조는 1649년 사천성에서 또 다른 포고령을 발하였고, 그 어감은 앞서와 유사하다.
일반 백성과 반란군이 혼재하여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성주민을 죽이거나, 혹은 남자만 죽이고, 여자는 남겼다.”(民贼相混,玉石难分。或屠全城,或屠男而留女)
청조의 다른 관방자료인 [동화록] 5권 순치원년조에는


본조의 명령인 변발과 만주복식을 따르지 않는 자는 용서없이 죽인다.” (不随本朝制度剃发易衣冠者,杀无赦)
진강지부의 포고에 의하면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변발을 하지 않으면 전가족을 몰살시킨다. 만일 한 가족이 변발하지 않으면 부락 전체를 몰살시킨다.”


(一人不剃发全家斩,一家不剃全村斩)고 하면서, 반항자의 머리를 잘라, 전체 백성을 공포로 몰아 넣었다.


순치 2년(홍광원년 1645년), 강년순무 토국옥은 “변발하고, 복장을 바꾸는 것은
새로운 왕조의 제일 중요한 정책이고, 모든 지역에 걸쳐서 실시되어야 한다. 만일 귀족, 군인,일반 백성 등이 자신의 머리를
보존하고자 하면 머리카락을 잘라야 할것이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으면 머리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남산은 옮길 수 있으나,
이 명령은 바뀔 수 없다.”
(剃发、改装是新朝第一严令,通行天下,法在必行者,不论绅士军民人等,留头不留发,留发不留头!南山可移,此令不可动!)


이상의 청조의 공식적인 자료에서 ‘전성을 도륙한다.’,’도륙을 실시한다.’,’죽이되 용서하지 않는다’,’전가족을 몰살시킨다’(“屠全城”、“尽行屠戮”、“杀无赦”、“全家斩”、“全村斩”) 등의 흉악한 위협을 찾아 볼 수 있다.


이하의 글에서 청조의 위협이 결코 입으로만 끝난 것이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청군 입관 전의 대학살

우선, 청군 입관 전, 요동지역 한족을 대상으로 한 대량학살의 기록이 초기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명9년 정월 , 누르하치는 9차 명령을 내려서, 소위 ‘무곡지인’이라 하여 곡식의 수확량이 5금두를 넘지 못하는 가난한 한족
인구를 적으로 삼아
사로 잡아서 관내로 돌려 보내게 하였다. 최후로 정월 27일 명령을 내려, 각지에서 조사된 이 한족인구들을
모두 살해하도록 했다. 즉, 공개적인 종족학살이었다.

천명10년 10월 3일, 누르하치는 한족을 비판하여 ‘간첩을
숨기고,굴욕을 겪는 데 익숙하며, 반란이 끓이지 않는다’며 팔기의 각 패륵과 총병관으로 하여금 병사를 대동하여, 촌락에 한족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곧장 사살하도록 했다.


제삼자인 조선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3년 5월조에 요동인구의 참상에 대해 이렇게 써있다.

비록 청이 요양을 획득했지만, 이 지역 주민중 이들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많이 변경을 넘어 왔다. 적이 크게 이르자 주민 중에는
변발을 원하지 않는 의로운 자는 거의 압록강에 투신하여 죽었다”(时奴贼既得辽阳,辽东八站军民不乐从胡者,多至江边……
其后,贼大至,义民不肯剃头者,皆投鸭水(鸭绿江)以死)

3. 청조 입관 이후의 대학살

1) 청조관방자료 및 제삼자의 자료

청조는 입관 이후, 자신들의 대학살을 적나라하게 인정하였다. 이것은 순치 7년 2월 청의대산서총독 동양량이 이르길,
대동, 삭주, 훈원 삼성에서 이미 대학살로 인해 백성이 존재하지 않음


조의 자료 <명청당안>에 의하면, 순치 7년 11월 21일 모든 성주민을 도륙하여 겨우 5명의 범인만이 남아서 이들을
석방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삭주지>에 따르면, “성을 도륙하여 마주치는 것은 모두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대학살은 중립적인 제삼자의 자료가 있다
. 이태리소속 예수회 수도사 마르티니(1614~1661)가 기록한
<달단전기>에 따르면, “대학살은 11월 24일부터 시작하여 12월 5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여,
일률적으로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 그들은 다른 말은 결코 하지 않고, 단지 ‘죽여라, 이 반란자들을 모두 죽여라’고만
외쳤다
.”(두문개:<청대서인견문록>53페이지, 중국인민대학출판사, 1885년 6월판)

네덜란드의 사신
요한 니어호프는 <중국달단대한황제조정에 대한 동인도회사 파견원의 보고>에서 “달단의 전군은 입성직후, 모든 성내는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다. 모든 병사는 파괴를 시작하고,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부녀, 아동, 노인의 울음소리는 끓이지 않았다
.
11월 26일부터 12월 15일까지 각지의 거리에서 들리는 것은, ‘반란자들을 살해하라’는 소리였다. 도처에서 비명소리, 도살,
약탈이었고
, 부자들은 목숨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고, 저 무도한 학살자로부터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사도림 저, 이영칭 역
<남명사>131페이지, 상해고적출판사, 1992년 12월판)

2) 속세로부터 떨어져 있던 출가인이 기록한 대학살의 규모

<광주시종교지>에 따르면 청 순치7년(1650), 청군이 광주를 정벌 죽은 자가 70만명에 이르렀다. 교외의 오룡강에 진수화상이 사람을 고용하여 시체를 수습하여 화장하였다.
주의할 만한 것은 광주의 70만명 사망 기록은 당시 직접 시체를 수습한 스님이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기록이고 사료적인 가치가 높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다 가치 있는 것은 이 숫자가 지금에 광주시 대불사 홈페이지에도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출가인은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다.
청조의 대학살을 경험한 후, 그는 “모든 현에 촌락이 없고, 촌락에는 집이 없고, 집에는 사람이 없다.사람은 모두 사라졌다.”고
적었다.

관방자료에 의하면,

북경지역“눈을 들어 보면, 논과 밭이 황량하다”(위주원, 통진민고소,
황청조의, 권1),하남성 “온통 황량한 풍경이고, 사람은 극히 적다”(이인룡, 간황의관미력소, 황청조의, 권4),
호광지역”천리를 둘러 보니, 인적이 끓기었다.”(류여모, 간황흥둔소,황조경세문편권34)


청조 최고위 통치자의 대학살 참여 증거

순치2년 11월 15일, 양주십일대학살의 실행자였던 예친왕 다석은 학살 중 미모가 빼어난 여인 103명을 획득하였다. 이들을 각각의 청조 최고위층에 헌납하였는 데,
순치제에게 10명, 섭정왕 도르곤에게 3명, 부정정친왕 치얼합랑에게 3명, 숙친왕 호격에게 2명, 영랑왕 아제격에게 1명을 바쳤다
(<청초내국사원만문당안석편>중 197페이지).

3) 서로 다른 시기 인물들의 기록과 지방지의 기재

곤산대학살 : “모두 합해 성중 인물들 중 도살당한 사람이 10명 중 4명에 달하고, 침하에 떨어져 죽은 사람이 10명 중 2명, 도망친 자는 10명 중 하나이다.”<곤신양현속수합지>권 51,

살륙이 끝나자, 성문으로 도망쳐서 물에 빠져 죽은 자, 부녀,어린이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곤산 정상에 중 료중이 부녀 천
명과 어린아이들을 숨겼으나, 수색하여 모두 죽이니, 피가 강처럼 흐르고, 폭포처럼 떨어졌다.”
<연당견문잡기>

남창대학살 : “부녀는 각 팔기군으로 분배되어 졌고, 밤낮으로 병사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칼에 맞아 죽는 자, 물에 빠져 죽은 자, xx한 자, 10명 중 7,8명이 되었다.”(서세박<강변기략>)

광주대학살 :”광주에서 학살이 일어나 살아 남은 자가 드물었고, 도망친자는 바다에 빠져 죽었다.”(어재전<속명기사본말>)

남웅대학살 : “집집마다 제비집이 비워졌고, 시체는 산과 같이 되었다. 죽은 자는 머리가 잘려졌고, 산자는 포로가 되었다. 피는 땅을 덮어, 어미잃은 아이는 젖을 찾았다.”(청군문서 진잔규,<웅주점가가>)


정대학살
: “시민들 중, 목을 매달아 죽은 자, 우물에 빠져 죽은 자, 강에 빠져 죽은 자, 피범벅이 된 자, 사지가 잘린 자,
수족이 잘리어졌으나 아직 죽지 않은 자, 뼈와 살이 찢겨진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 청병은 집 위를 달려서, 통행에 제지를 받지
않았다. 성내의 난민은 거리에 돌을 쌓아 막고자 했으나, 도망칠 수 없었다. 모두 강에 투신하여 죽었고, 강물은 시체로 넘쳐
제대로 흐르지 못했다. 대낮에 길에는 강,간이 스스럼없이 행해졌고, 반항하는 자는 양손을 나무판에 못을 박아 강,간했다. 청병은
마주치는 사람마다 재물을 바치라 했고, 그 획득한 재물을 허리에 둘둘 감아, 만족하면 백성을 석방했다. 다른 병사를 만나면 또
다시 똑같은 일을 당한다. 바치는 재물이 부족하면, 즉시 칼이 휘둘려지고, 재물이 다하면, 곧 죽음을 당한다
.”([가정을유기사])


주대학살: “병사들의 학살로 인해 시체가 십여만에 이르렀다.
” 게양현 관음당 해덕화상 등이 시체를 수습해서 서호산에 화장해서,
유골을 서호남변에 묻었다. 복건성 동안현 학살 당한 자가 5만명에 달했다. 범천사 주지 석무의는 시체를 수습하여 절 동북쪽
1리밖에 묻었다. ‘무사정’이라는 정자를 지어서 ‘만가지 선이 함께 귀의한다’고 새겼다.

상숙대학살 : “길을
걸으면 다리 밑 하천을 말랐고, 퇴락한 집에 우물물도 말랐다. 곳곳에 시체만 쌓여 있으니, 오천여 구가 넘었다. 남녀 중 포로가
된자는 수를 세기도 어렵다. 연못 옆 나무에는 사람 목이 걸려 있는 데, 모두 마을 주민의 몸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주대학살
: 이 일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명한 <양주십일기>이외,
<양주성수기략>에도 이 일이 기록되어 있다. “처음 고걸의 병사가 양주에 이르렀을 때, 주민들은 호수주변으로
피난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적에게 해를 입었다. 북쪽은 경계가 엄했으니, 성밖주민들은 모두 성안이 의지할 만하다 여겨, 성안으로
몰려 들어 갔다. 들어 가지 못한 자는 그 머리를 조아려 입성을 탄원하여, 애끓는 소리가 대지를 진동시켰다.공은 마침내 문을
열어 그들을 받아 들였다. 성이 함락당하여, 예왕의 지휘하에 학살이 행해졌고, 7일이 지나서야 마침내 멎었다. 겨우 공의 시체를
수습했으나, 날씨가 더워서 시체가 변질되어 알아 보기 어려웠다.
”([명계남략])


지에서 변발에 반항하는 자는 분산하여 학살이 행해졌다. “가을이 되어 새 명령이 발포되어, 변발하지 않는 자는 참형에 처해졌다.
명령 발표 후 마을에 변발하지 않는 자는 모두 군대로 이끌려 와, 아침에 끌려온 자는 아침에 죽고, 저녁에 끌려온 자는 저녁에
죽었다.”(<진확집>권 30)


유명한 <강음성수기>에는
모든 성내 주민의
살해가 끝나자 칼로 성문이 봉해 졌다. 성 내에는 어떠한 것도 남지 않았다. 절의 탑에 숨어 있던 승려 등 53명만이 남았다.
성을 지키기 81일, 성내에 죽은 사람은 9만 7천명, 성밖에서 죽은 사람은 7만 5천명에 이르렀다.


4) 청군의 성폭행([양주십일]과 [강변기략] 중 항시 볼 수 있는 자료는 열거하지 않음)


치 2년 7월 30일, 청군이 사진에 이르러 “보이는 자 마다 금은을 찾아 내어 노략질한 후 칼을 휘둘러 죽였다. 여인은 음행을
위하여 배로 보냈다.”,”주민을 마주쳐 끌고 가서, 숨긴 물건이 발견되면 배를 갈라 죽였다
.”(<연당견문잡록>)

순치2년, 청군은 양주대학살을 행한 후, 무석에 이르러, “배안에는 모두 양주로부터 얻은 여인들이었다. 모두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하고, 화장을 했다.”(<명계남략>권4)


치 원년(1644) 4월, 청병이 산서성 주질현에 이르렀을 때, 생원 손문광의 처 비씨가 사로잡혔다. 부인은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내가 금은을 마른 우물에 숨겼으니, 그것을 취하자” 청병이 기뻐하여, 우물주위로 데려가 물속을 살필
때, 부인은 몸을 던져 죽었다. 금도 부인도 잃은 청병이 화가 나 큰 돌을 던져 버리고 가버렸다.(민국
<주질현지>권6)

청의 흥안총병은 부녀를 강탈하여 수가 100명에 이르렀고, 음란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큰 침상을 만들어서 처첩 십여명을 함께 침상에서 차례로 탐했다. 다시 땅에 나무 말뚝을 박아, 첩들 하나 하나씩 음문을
그 뾰족한 말뚝에 박는 놀음을 한후, 시체는 강에 버렸다.
”(<평관지> 권12)

청군이 강음에서 대학살을 한 후, 청에 반항한 부녀는 강간한 후 죽였다. 지방지에 의하면 그 수는 101명에 이른다.(도광 <강음현지>권 20 <열녀>)

5) 청이 노획한 한족 노예

숭정 11년 동지에서 12년 봄까지 청군이 기부에서 산동에서 획득한 한족 포로가 46만 2천 3백여명에 달한다. 숭정 15년 동지에서 16년 여름까지 청군이 획득한 포로는 36만 9천명에 달한다.(<청태종실록>)

청군은 입관이후 계속해서 백성들을 사로 잡아 포로로 삼았다. 순치 2년 8월 병부에 명하길,포로들을, 이전 예에 따라 성을 공략하다 부상당한 병사들에게 하사하라고 했다.
(<청세조실록>)


족 노예들은 주인의 학대를 받았을 경우, 대량으로 xx하였다. 강희 초년, “팔기병 집안에서 매년 xx하는 자가 2천명이
넘었다.
”([청사고]),이를 보건대, 청군의 입관이후,몇 십년간 xx한 한족의 수는 10만명을 넘었으리라 본다.

만주
인의 혹독한 학대로 인하여, 대량의 한족 노예는 도망쳤다. “수개월 동안, 수만명의 노예가 도망쳤다.”<청세조실록>,
청의 통치자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1626년 <도인법>을 제정, “도망친 노예를 은닉하면 참수형에 처한다. 그
이웃의 10집, 100집, 지방관도 처벌을 받을 것이다.” 이로 인해, 청조에 투항한 유명한 배신자인 정남왕 화종명조차, 도망친
한족 노예를 숨긴 이유로 강제로 xx했다
.


4.대학살의 규모에 대해 추정

필자가 명청교체기 인구변천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명대 중국 인구는 최후로 행해진 공식 통계에 의하면, 51,655,459명이고, 조사시기는 명 광종 태창 원년이었다. (명 가종실록 4권)

청조 최초의 전국적인 인구조사는 청 세조 순치제 8년에 실시되었는 데, 이 때 인구수는 10,633,326명이었다. (청 세조실록 61)

청조가 전국을 완전히 통제한 청 성조 강희제 21년 (1682년, 입관후 48년) 전국 인구는 19,432,753명이었다. 이는 명 광종 태창 원년 인구의 단지 36%이다.


상의 인구 숫자는 당연히 정확한 것은 아니다. 당시 인구에 따라 세금을 납부해야 했으므로 많은 인구수가 조사되지 못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명대 실제 인구를 대략 1억에서 2억 사이로 추정한다. 비록 청조에서도 이러한 인구은닉현상이 있었지만,
청군의 입관이후, 인구 감소는 최소로 잡아도 5천만이상이다. 48년 동안 새로운 세대들이 계속 태어난 것을 고려하면, 청조 입관
직후 수년 간 인구 감소는 5천만명을 휠씬 상회할 것이다. 즉, 인구감소가 1억을 초과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수천만명이 청군의 입관 후에 학살당했다고 추정해도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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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10 23:45
   
이런 무지 막지한

한족도륙과 강압적 통치를 한 정복왕조인 만주족 청을

짜장들이

지들 역사라고 개소리하고

뭔 우수한 짜장에게 동화되었니 어쩌니 개소리하는 걸보면


현 짜장 독재 공산당고 정말 무개념.꼴통들하며..
ㅎㅎ 10-10-10 23:47
   
예나 지금이나


짜장 공산당은 대화 불가능

남의 문화부터 이제는 한글도 조선족 사용하니 지들 거라네 참..

미국에서 짱개 소수민족 있으니 짜장 역사와 글 언어는 다 미국 건가??

캐족속들..

공산당 이넘들은 그냥 만주족 처럼 자근 자근 쳐 밟아 줘야

끼소리 못하가 세계가 평화롭다.
zz 10-10-11 13:58
   
인간의 흉폭함은 그 어떤 동물보다도 더한 듯  ... 전쟁은 역시 일어나면 안 됨
그게 10-10-11 18:34
   
청이 수천만의 한족들을 바퀴벌레 잡듯이 죽였고,
청이 수억을 한족들을 돼지취급하며 노예로 삼았다는건, 온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
짱개공산당 세뇌교육받은 짱개들만 모르지. 아니, 눈감고 부인하지.

이런 글이 짱개들에 눈깔에 들어갈지 모르겠구만 ... ㅋ
ㄴㅇㄹ 10-10-12 00:46
   
청이니 똥이니 한족이니 왕서방이나 죄다 똑같은 야만인일뿐. 그나저나 만주족이 없어지다시피 한 이유를 알수있겠네. 잔혹하기 그지없는 야만족이었구만,
333 10-10-12 01:19
   
이건 마치 신대륙에서 미국인들이 인디언 전멸시킨 것과 같은 규모의 대학살이네.
만주에 있던 청나라 사람들이 신대륙인 중국으로 건너와 중국의 원주민인 명나라 한족을
몰살시킨 것과 같다고 할까.
 한족을 다 죽이고 땅만 차지한 것은 아닐까 할 정도이다.
     
팬더롤링어… 10-10-23 03:48
   
여기서 잘못알고 있는 상식 하나...미국인이 인디언을 학살한건 맞지만

거의 대부분의 인디언은 백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에 의해 대부분이 죽었음..

인디언은 그 전염병에 항체가 없어서 속수무책으로 사망.....
d 10-10-12 11:48
   
지금 만주 일대는 만주족이 천만명 이상 살고 있다.

저 당시

만주족이 고작 30여만명이 짜장 1억 5천만명을 굴복 시켰서.

양주성에서 저향이 거세지차 본보기로 씨를 말려 버린 것이지.

적은 숫자로 짜장들이 전국에서 들고 일어나면 피곤해지니 사전에 아예 강경책으로 쳐 발라 버린 것이지.

지금 북한 봐라.. 거지 같아도 배포하는 미국이상이잖아.

그리고 강남일대는 짜장들 영역이지만 북경일대는 어찌보면 만주족 더 정확히 말하면 고구려인들이 건설한 도시이다.

발해 이후 신라인 황제와 만주일대 5대의 대도시에서 여전히 살고 있던 고구려인들이 연합해서

금을 세우고 반요 사상에 요나라 무너뜨리고 이후 송까지 무너뜨림

이에 짜장들이 다시 내려가서 남송을 세우는데

짜장들은 대대로 서안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지 북경은 지들 본토 문화권이나 생활권은 아니거든

이걸 고구려인 장호가 대수로와 도시를 설계하고 금나라가 100여 년을 다스리며 북방의 패자로 군림하면서

도시 기반을 만들어 놓자 이후 몽골이 들어와서 북경일대를 다시 수도로 이후 명나라가 이런 기반위에서

수도를 서안에서 북경일대로 옮기게 된다.

어찌보면 고구려 후신인 만주족은 다시 옛 땅을 회복했다고 볼수도 있슴..
역사퇴보 10-10-12 20:46
   
저 시대의 역사를 현재의 시각으로, 잣대로 평가하기엔 좀 무리지.
저 시대에는 목숨값이 현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쌌으니..그저 파리목숨.
닉슨 독트린이 선포된 이후에 자행한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야말로 비난받아야 마땅하지.

근데도 가끔씩 보면 서양의 역사 시류와 같은 인식을 하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는 느낌이다.
한국만 21세기를 살고 있을 뿐이지...중국,일본,북한은 19세기를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서양을 동양이 넘지 못하는 이유가 정치적 발전을 비롯한 의식이 21세기를 살지 못하는게
아닐까...물론 한국의 몇몇 정치인들 보면 19세기에 머물러 있기도 하지만 말야...
     
닉슨아니라… 10-10-26 15:02
   
닉슨 독트린이 아니라 윌슨 선언 이겠지..닉슨 독트린은 70년대 닉슨이 주장한 각나라의 안보는 자국들이 알아서 지키라고 선언한것..
^^ 10-10-13 02:43
   
만주족들이 한족들을 80만명을 죽인건 안타깝다...800만정도를 죽였어야~하는데...

바퀴벌레 박멸에 1등공신인 누르하치는 역시 신라의후손답군...음...
wlfkf. 10-10-14 13:43
   
모택동의 뻘짓으로 억단위로 굶어 죽은 현대사도 제대로 인식못하는 애들이 무슨 1645년 일을 대단한 일인듯 말하는게 우습죠.....
아직도 모택동 만세밖에 모르는 애들보면 저것도 별거 아니죠.
ㅁㅇㄻㅇㄻ… 10-10-16 10:57
   
중국인을 당나귀처럼 죽일려던 칭기즈칸도 영웅으로 모시는 노예새끼들이 짱개들인데요 뭘...

구라 아니라 유학중에 짱개한테 칭기즈칸을 진짜 중국인이라 생각하냐고 물으니까

YES~하던데요..... 노예근성이 대단한 짱개들..
답글내려본… 10-10-16 17:42
   
80만명 죽인건 아타깝다 800만정도 죽였어야 하는데 라고 말하시는분
이런답글 있을줄 알았다 ㅋㅋㅋㅋ
총통 10-10-19 17:28
   
만주족은 고구려의 후예인 우리형제인셈인데.. 글쎄요..저시대 전쟁은 원래
그런겁니다.  한족왕조때인 명이 만주,몽고, 신장, 윈난성에서 저지른걸보면
한족들도 떳떳할수없읍니다.
지금이야 저런게 전범이지만. 저당시엔 동,서양 가리지않구, 전쟁에선 의례
히 수반되는 일조의 절차였죠.
..
몽고,청 모두 한족의 1/100~ 1/200밖에 안되는 인구로 중국정복에 성공한
대단한 친구들인데.. 그런 엄청난 숫적열세에서 정복사업을 했다면, 저건
어쩔수없이 수반될수밖에 없죠..  저건 심리전술입니다.
즉, 투항하면, 이전삶에 변화없이 터치하지않지만. 저항하면 절대 용서못한
다는,  몽고는 저거보다 더했구요..
실제로 투항했을때는 이전 명때보다 더 살기좋은 나라로 만든게 청입니다.
..
중국은 역사를 보면 98%한족이 다스릴때보다. 몽고, 청같은 이민족에
지배를 받았을때 국토도 더 넓어지고 전세계가 알아주는 강국이 되었어요
근데 재밌는게 우리도 몽고,청에 오히려 한족들보다 엄청난 저항을 했음에도
몽고,청은 한반도에 대해선 다른곳에 했던것만큼의 학살,보복이 없었다는
겁니다. 아마 같은 형제라는 것이 좀 작용했는지는 몰겠짐나.
그 무자비한 몽고가 60년이나 항쟁한 고려를 그렇게 순순히 봐준건 역사학
자들 사이에서도 의아한 일이거든요.  오히려 이후로 고려를 색목인과함께
제국통치의 조력자로 활용했죠, 당시 고려는 한족들보다 신분인 높은 극소
수 몽고담의 2등계급이었읍니다.

만약 원이 지속되었더라면, 조선으로 바뀌었어도 5백만 조선백성들은
2억 중국인들보다 상류층대우를 받았을겁니다. 물론 30~50만 몽고가
최고계급을 형성했겠지만요
애신각라 10-11-05 06:20
   
여진, 거란, 말갈등 우리는 잘못된 교육으로 오랑캐라고 명칭하나,

모두 "훈"족의 우랄알타이계통이다.

서쪽으로는 돌궐로부터 티벳, 위구르, 몽고, 만주, 조선을 아우르는 "훈국"의 일원이다.

보다 큰 범위로 보면 핀란드로부터 헝가리(훈가오리) 열도(니혼) 아메리카 인디언까지이다.

지나족은 역사이래 "훈"의노예로서 그들을 두려워해 "흉노"라 부른다.

아이러니 하게 이글에 나오는 靑은 후금으로서,

말그대로 금나라를 계승하는 국가로 "아이신지료"의 국가이다.

즉, 우리 "훈"의 계통인것,

그러나 지금 현재 자칭한족이라 부르는 중궈들은 그 역사를 자신의 역사라 간주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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