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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9-19 02:42
[한국사] 조선의 갑옷 두정갑
 글쓴이 : 솔피
조회 : 12,708  

원본출처 http://m.bboom.naver.com/board/1-y994x

밑에 어떤분이 조선의 갑옷은 천쪼가리에 삼지창 말씀을 하시길래 참고하시라고 올립니다.

눈에 보이는것만이 진실이 아니죠...
조선 갑옷의 비밀

고종 황제의 투구

조선 갑옷의 비밀

고종 황제의 갑옷,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약탈 당했다

먼저 조선의 갑옷을 머리 속으로 떠올린다면 징만 박힌 천 또는 가죽 갑옷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아무래도 사극에서 비춰진 조선의 갑옷들이 일본 갑옷처럼 화려하지도 서양식의 갑옷처럼 튼튼해 보이지도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위 사진처럼 과연 천이나 가죽 위로 일정하게 부착된 저 징(리벳)만이 적의 공격을 제대로 막을 수나 있었을까? 하지만 이 생각은 큰 오해였다. 먼저 투구부터 살펴보자.

조선 갑옷의 비밀

러시아 표트르 대제 민족박물관에서 공개한 조선 투구, 녹색 어피가 특징/임금 투구 추정

조선 갑옷의 비밀

투구의 감투에 조각된 장식과 형상이 굉장히 화려하고 디테일하다

조선 갑옷의 비밀

또한 미국의 브루클린 박물관에서도 공개된 조선 투구

조선 갑옷의 비밀

조선 갑옷이 대량 발견됐는데 신미양요 때 미군에 의해 약탈된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의 투구는 보기만해도 동양풍의 화려한 음각과 장식, 서구풍의 수려한 디자인으로 서양인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결코 일본 갑옷의 화려함에 뒤쳐지지 않는 기품이 있다. 또한 중국과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서구식의 친근한 외형과 동양스러운 화려한 조각들로 서양인들을 매료시키기 쉬웠다. 하지만 조선의 투구는 디자인 외에도 그 실용성부터가 방호력이 뛰어났는데 그 비밀은 투구의 드림에 부착된 징(리벳)들에게 있다. 드림이란 귀와 목덜미 부분을 가리는 천(가죽) 덮개를 말한다.

조선 갑옷의 비밀

투구의 옆드림을 장식하고 있는 저 징들에게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조선 갑옷의 비밀

바로 징(리벳)은 외피 속에 숨겨진 철제 방호찰을 고정하는 못이었다

조선 갑옷의 비밀

조선의 갑주는 실제로 철제 방호찰로 겹겹이 중장비 된 갑옷이었다

한반도는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 탓에 한겨울에는 철제 찰이 몸에 닿을 경우 피부가 쉽게 상하고 한기를 느꼈다. 그래서 철제로 만든 방호찰을 목면이나 명주, 비단 따위로 감싸고 솜을 넣어 그 보온 효과를 높였다. 이러한 실용적인 효과는 쇠 갑주의 쇠독 방지와 함께 피부 마찰을 줄여주었고 기능적인 면에서도 활동성이 편리했었다. 또한 활을 사용할 경우, 투구의 옆드림이 걸리적 거리지 않도록 목 뒤로 넘겨 뒷드림과 함께 끈을 묶어 사격이 수월하도록 제작했었다.

조선 갑옷의 비밀

반면에 근접전 시 양쪽 옆드림을 턱까지 묶어 목을 보호할 수도 있었다

조선 갑옷의 비밀

그밖에도 쇄자갑(체인메일) 형태의 조선 투구. 서양 투구와 매우 흡사하다

조선 갑옷의 비밀

갑옷에 박힌 저 징들 속에는 철판들이 촘촘히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갑옷의 비밀

이렇게 찰갑 형태로 철제 방호찰이 옷감 속에 숨어있다

조선 갑옷의 비밀

심지어 팔 가리개와 각반도 철편을 넣어 몸을 보호했다

조선 갑옷의 비밀

반면에 일본 갑옷은 단갑이 원형이다(장수용 갑주)

조선 갑옷의 비밀

임진왜란 시기(추정) 출토된 일본 갑옷. 흉갑이 판갑 형태다

조선의 찰갑은 그 방호력이 매우 뛰어났는데 일본의 단갑보다 기능성에서 우수했다. 일본의 갑옷은 판갑 형태로 화살이나 찌르기 형태의 창술 공격에는 취약했다. 그리고 전투시 기동성에도 제약이 많아 기병 체제는 유지할 수 없었으며 더욱이나 단갑이기 때문에 전쟁 중 갑옷에 구멍나거나 파손되면 보수할 수가 없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흉갑). 반면에 조선의 갑옷은 찰갑 형태로 능동성과 기동성이 좋아 움직임이 편했고 전투 중 훼손되거나 망가진 방호찰은 그 부분만 옷감 속에서 때어내고 새 방호찰을 달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전시 중에 갑옷을 빠르게 수리하고 보수할 수 있어 실용성이 좋았다.

조선 갑옷의 비밀

일본과 같은 판갑은 화살에 뚫리는데 반해 조선의 갑옷은 화살을 튕겨냈다

조선 갑옷의 비밀

이처럼 표면에는 징만 박힌 천 갑옷처럼 보이나 실상은 철판들이 숨어 있었던 갑옷이었다

조선 갑옷의 비밀

만약 외피를 벗긴다면 이런 형태로 이해하면 쉽다. 여기서 허벅지와 팔까지 모두 가린다

조선 갑옷의 비밀

위 사진은 수군의 복장이라기 보다는 평시 상황의 관졸 복장에 더 가깝다

조선 갑옷의 비밀

일본인이 그린 임진왜란의 조선전역해전도다. 모든 병사가 전립과 두정갑을 입고 나온다

조선 갑옷의 비밀

조선 전기 시절, 쇄자갑과 경번갑

조선 갑옷의 비밀

복원된 조선 갑옷들, 무게는 25kg으로 동시대 주변국들의 갑옷보다 가벼운 편이었다

조선 갑옷의 비밀

마지막은 김세랑 작가님의 성웅 이순신 장군 피규어

출처 - 네이버, 구글

조선의 갑옷은 결코 볼품없거나 방호력이 빈약했던 갑옷이 아니었습니다. 전투 상황에서 굉장히 실용적이고 기능성 또한 높았던 갑옷이었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갑옷은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쓰였던 양국의 갑주를 비교한 것입니다. 조선 두정갑의 찰갑, 일본 오요로이 판갑처럼 그 특징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왜 조선군이 약했는지는 당시 정치판도를 아셨으면 합니다. 무관을 배척하고 문관을 등용하며 안보를 무시했던 왕과 조정 관료들이 국방력을 등한시하였기에 벌어진 일입니다. '왜놈 따위'라는 안일한 생각과 율곡이이의 10만 양병설 묵살 등 그 자만심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두정갑은 조선 9대 성종 때(임진왜란 발발 100여년전) 채택되어 보급되기 시작됐고 지방의 하급 병사까지는 몰라도 5군영의 병사들에게는 두정갑이 지급됐습니다. 사람들이 꼭 '두정갑 = 장수용'이라는 인식이 강한 것 같아 말씀드렸습니다. 그외에 지방의 하급 병사들에게는 지갑이라고 해서 기름먹인 수백장의 창호지를 붙여 말린 갑옷이 지급됐고 마찬가지로 일본의 하급 병사는 죽편(대나무) 갑옷이 지급됐습니다. 그 외에 미늘 형태의 두석린갑은 장수용으로 의장 활동 때 많이 입었습니다.

두정갑=병사+장수 통용(투구 장식, 방호찰, 징의 갯수 차이)
두석린갑=장수(의장용)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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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 16-09-19 03:07
   
열심히 준비해서 올리신건 잘봤습니다만,
사극에서 천쪼가리에 펠트모자만 쓰고 나오는 것에 대한 비판들이었답니다.^^
사극에 나오는 조선병사의 복장이 문제다...게시자분과 같은 생각이라는 말이죠.
그노스 16-09-19 09:59
   
서긍의 고려도경에 따르면 3만 명에 달하는 고려의 용호중맹군이 모두 두루마기형 철제찰갑을 입었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를 보면 세종 15년 야인 정벌을 위해 동원된 3천명의 군사에게 조정이 갑옷 1천여부를 추가 지급한 기록이 있는데, 당시엔 원래 병사 각자가 자기 갑옷을 준비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 갑옷이 추가 지급되었다면 출정한 병사 대부분이 갑옷을 입었을거라고 보더군요.

조선 전기 갑옷은 찰갑이 일반적이었으나 쇄자갑, 경번갑 등 여러 종류의 갑옷이 사용되었으며, 세조 13년에 명나라가 합동작전을 위해 조선군 갑옷 형태, 색깔들에 대해 물어왔을 때, 세조는 조선군이 입은 갑옷의 이름, 모양, 색상이 모두 제각각이어서 뭐라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으므로 전군이 통일된 갑옷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두정갑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성종 실록 8년에 국왕이 찰의 길이가 두 손바닥 정도 되는 철갑옷을 50보 앞에 두고 겸사복으로 하여금 활을(당연히 성능이 뛰어난 조선활) 쏘게 했는데, 발제글의 내용대로 화살이 갑옷을 꿰뚫지 못했다고 하네요.
만기요람에 따르면 두정철갑의 가격이 16석 10두이고 쇠투구의 가격은 4석 5두라고 했는데 현재의 가격으로 치면 갑주 한 벌이 대략 400만원에 달했다 하니 전 장병에게 입히기에는 무리가 따랐겠네요.

임진왜란때 왜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왔던 포르투칼 신부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군이 철제 투구와 가죽제 가슴받이를 착용했다고 합니다.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 에서는 임진왜란시 양국 보병 모두 쇠사슬과 철판을 조합해 만든 갑옷(조선의 경우 경번갑)을 입었다고 합니다.
증언들로 미루어보아 전시이다보니 병졸들도 대부분 갑옷을 갖춰 입었고 천쪼가리(?)를 입는 것이 더 희귀했었을수도 있다고 생각해봅니다.

영조가 열병시에 장수들이 쇠를 쓰지 않고 비단으로 모양만 꾸민 식양갑(의장용 가짜 갑옷)을 입은 것을 보고 말하길,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창,칼을 잡는 것은 장차 사졸과 더불어 기쁨과 괴로움을 같이 하려는 것이다. 사졸은 쇠갑옷을 입고 있는데, 장수는 비단 갑옷을 입고 있으니, 어찌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뜻이겠는가? 이후로 다시 이렇게 하는 사람은 마땅히 군율을 시행하겠다.'

조선 후기의 만기요람에 따르면 중앙군의 대부분은 철갑 내지 목면갑을 착용한 것으로 보이며 대다수가 직업군인인 훈련도감 병사들은 모두 갑옷을 착용했고, 지방군의 군사는 대부분 벙거지에 전복 차림으로 싸웠고, 갑옷은 소수의 지휘관이나 선봉에 선 병사들만이 착용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에 따르면, 보병은 야전을 하므로 가죽 갑옷을 입고, 기병과 공성군은 모두 철갑을 사용해 적의 화살을 막는다 라고 합니다.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 에서 조선의 지제배갑(두텁고 질긴 한지를 10~15선 두께로 누벼 만든 것)이 현대식 총알에는 견딜수 없지만, 옛날 화승총 정도는 견딜수 있다고 했듯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원리도 오늘날의 방탄복(여러 장의 특수 섬유를 겹쳐 만든)과 비슷합니다.

대원군이 서양식 라이플에 대항하기 위해 면제배갑(목면을 13번 겹쳐 만든 조상의 지혜)을 만들었는데 확실히 효과가 있었지만 단점은 한여름에는 더워서 입고 있는 병사가 초주검이 되었고, 화포 공격을 받으면 삼국지의 등갑처럼 금새 불이 붙었다고 합니다.
당시 미군이 남긴 기록에서는 '40겹의 무명을 겹쳐 만들어 칼이나 총알로도 뚫지 못해 원추형 탄환만이 뚫을수 있는 갑옷과 투구' 였다고 하고, 사진에 두께가 4cm 가 넘는 면갑이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 스미스 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에 조선 면제배갑이 보관되고 있는 중(반환해라)
http://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24009


아무튼 많은 분들께서 이미 내리셨지만 결론은... 드라마에서 역사왜곡 그만 합시다~~
아스카라스 16-09-19 11:46
   
조선군이 전쟁 때마다 천쪼가리 옷을 입었단 것은
미군이 이라크에서 2차대전 때 군복을 입었다는 격이네요.

말이 안 되죠.. 관졸복이 미스릴도 아니고, 왜구 화살을 다 막나...

보면볼수록 조선이 얼마나 대단한 선진국이자 강대국이었는지 가생이를 통해 알게됩니다.

판금갑옷과 철제갑옷이 서양과 일본에 팽배했던 반면, 조선은 그 철제갑옷 하나하나에 면을 덮고 징을 박을 정도로 앞선데다, 군자금도 빵빵했었군요! 각종 과학적 신무기도 뛰어났고..
최초의 미사일 발사대, 행글라이더, 연노까지.
추리의세계 16-09-19 12:18
   
사극에서처럼 온리 천떼기는 아니지만, 병사들의 갑옷이 대다수였다고 보기도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너무나 오래동안 전쟁도, 전쟁 대비도 없었죠. 허구헌날 전쟁의 연속이었던 삼국시대나 고려와 비교하는 건 무립니다.  게다가 고려까지는 귀족과 호족의 사병이 일반화되서 각 단위로 무장시키기도 좋았고요.

 개인적으로는 임진왜란 전후를 기준으로, 여진과 늘 맞섰던 북방 쪽에는 갑옷이 일반화되었다고 믿고요. 남쪽 해안은 갑옷 사용과 천쪼가리가 혼용되었을 거라고 봅니다. 특히 수군 같은 경우 궁병 정도는 천쪼가리만 입었을 지도 모른다고 봐요. 판옥선의 무게도 감안해야하고요.(저 판옥선 전투 그림은 후대에 그려진 것이죠.) 한양과 평양을 제외한 내륙은 더 허술했을 것으로 보고요.

 조선시대 갑옷 무장이란 게 나라에서 지급하는 게 아니라, 백성들 개개인이 감당해야하는 거라서 조선처럼 200년동안 전쟁이 없었던 나라에서 백성들이 자비로 제대로 무장했을 확률을 적다고 봅니다.

 또 무기가 진화되는 과정을 보면 갑옷은 쇠퇴하고 공격 무기는 강해지죠. 무거운 갑옷보다 빠른 움직임이 중요해지기도 하고요. 서양에서 소총이 일반화되면서 무거운 갑옷은 차츰 사라지니까요. 그래서 조선 후기의 갑옷들은 의장용, 또는 간부용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구름위하늘 16-09-19 12:40
   
맞는 말이지만, 상황이 매우 안맞네요.

그 당시 조총의 관통력은 갑옷을 무시할 정도가 아니었고,
개개인이 감당해야 할 갑옷이라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천옷을 가져오는 것을 허락할 정도로 군대가 망가진 상태도 아니였습니다.

나름 조사를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한 임진왜란 소설 상의 "사관을 논한다..."에서 글을 가져 옵니다.

사관은 논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에서 군관급 아래 일반 수졸들이 갑옷을 어느 정도 비율로 입었을까? 임란 5년 전인 1587년 3월 2일 정해왜변 직후에 경상도 암행어사 이정립이 ‘병력은 출동준비를 갖췄고 궁시, 총통도 확보했고 철갑과 철환이 부족하나 현재 만들고 있다’고 보고하는 실록 기사도 있고, 조선 전후기를 통틀어 두정갑 등 갑옷을 대량으로 제작한 기록이 종종 나오니 임란 당시 장수나 군관이 아닌 일반 수졸들도 상당수가 갑옷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명백히 상반되게 예나 지금이나 조선 군사들은 갑옷을 거의 입지 않는다는 실록 기사도 있으니 조선 수군이 100% 갑옷을 입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또한 임란 당시 전투가 아닌 조선 후기 수군의 훈련 상황을 그린 삼도수군조련전진도를 보면 상장의 전투원이나 하갑판의 격군이나 관계없이 대부분 장수와 병사들이 갑옷을 입지 않은 것으로 명백히 판별된다.
그런데 조선 후기 전선 1척과 사후선 1척을 운영했을 당시에 작성된 함평현 읍지에서 <수군기물 목록>에는 함평현이 수군용으로 철갑과 투구 50벌씩을 보유했다고 적혀 있다. <영암읍지> 진보鎭堡 편에는 당시 영암현 관할구역에 위치한 이진진과 어란진에 각각 철갑과 철 투구 47벌씩 비치돼 있다고 기록됐다. 어란만호진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을 운영하고, 이진만호진은 여기에 방선 1척이 더해졌는데도 철갑과 투구 보유량은 함평현보다 오히려 더 적다. 그런데 어란진은 피갑주皮甲冑, 즉 가죽찰갑으로 만든 갑옷과 투구 20벌을 추가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진도군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을 운영했는데 철갑과 철 투구 69벌에 종이로 만든 엄두, 엄심갑 각 4벌을 보유했다.
철갑 47벌에서 69벌이라면 판옥선 상장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수졸이나 병선 등 소형 함선, 혹은 사후선에서 노를 젓는 격군 대부분이 입을 수 있는 수량이다. 여기에 피갑주 20벌이나 엄심갑 등이 추가되면 기라졸과 사공 등 비전투원을 빼면 거의 100% 착용 가능한 셈이다. 참고로 판옥선 상장 안에서 충분히 보호받으며 노를 젓는 격군 같으면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
반면 함평현에 수군보다 육군 병력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육군기물 목록>에 기록된 철갑주는 7벌에 불과하다. 왜선에 비해 높은 상장과 여장, 그리고 방패판으로 충분한 방어력을 제공 받는 판옥선에서 싸우는 수군은 철갑을 입는데 적과 칼날을 직접 맞대는 육군은 갑옷을 입지 않는다는 모순된 결론에 도달한다. 여러 가지 연구할만한 소지가 많다.
이 문제를 해결해보자. 가야시대 판금갑옷은 통짜 쇠로 만들어졌는데, 엄청나게 무거워 보병이 입으면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학자들은 처음에 이것을 의식용이거나, 아니면 기병이 착용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나중에 이 판금갑옷은 보병이 성곽을 방어하면서 입은 것으로 결론이 났다. 조선 육군이 아닌 수군이 다른 갑옷도 아닌 철갑을 입는 것도 전투 중에 움직일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 아닐까?
화승총 등 개인용 화약무기가 발달한 이후 세계 모든 나라의 육군은 점차 갑옷을 버리게 된다. 총알을 막을 수 있는 갑옷은 거의 없고 혹시나 그런 갑옷을 만들더라도 너무나 무거워 차라리 갑옷을 안 입고 빨리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조선도 후기에 들어 육군은 무거운 철갑을 입지 않았고, 두정갑에서도 철 찰갑을 빼 갑옷이 단순한 유니폼으로 전락한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경제적 이유 외에도 화약무기가 발달하면서 갑옷의 효용성이 많이 떨어진 탓이다.
반면 수군은 육군에 비해 빨리 움직일 필요가 적고, 제자리에서 활이나 포를 쏘기만 하면 된다. 방어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테니 무거운 철갑도 입을만하다. 판옥선 상장에서 싸우는 수군은 성곽을 방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동할 필요성이 적기 때문에 철갑이 무거운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판단할 경우 상충되는 사료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사실 사관은 논한다 바로 밑에 나온 첫 번째 문단에 나온 여러 인용문들은 수군과 육군을 구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철갑이 충분하다, 즉 임란 5년 전에 철갑이 부족하나 만들고 있다는 실록 기사는 수군과 바닷가 고을 이야기였고, 조선군이 예나 지금이나 갑옷을 별로 입지 않는다는 실록 기사는 육군 이야기였다. 그러니 조선의 중앙군과 함경도 6진의 병사, 그리고 지방군 기병이나 보병 등 병종이나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육군은 대체로 두정갑, 면갑, 지갑紙甲 같은 비교적 가벼운 갑옷을 입거나 아예 입지 않은 반면, 수군은 판옥선 상장이나 소형 함선에서 활동하는 전투원 및 소형 함선 격군 대부분이 무거운 철갑을 입고 철 투구를 썼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 전후에 사용된 철갑이 어떤 종류의 갑옷인지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조선 중기나 후기의 여러 사료를 살펴보면 철갑은 단순히 철로 만든 일반적 갑옷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특별히 구분된 갑옷의 한 종류라는 식으로 기록됐다. 조끼 모양의 옷 안에 무쇠 통판을 덧댄 흉갑이나 조선 전기에서 중기까지 기록에 종종 등장하는 종이로 만든 엄심갑과는 확실히 다른 종류로 사료에 나온다.
<세종실록 오례의 군례서례>에 기록된 철갑에는 수은갑과 유엽갑 두 종류가 있다. 수은갑水銀甲은 별칭이 백철갑白鐵甲이었고, 쇠로 만든 미늘札에 수은을 덧칠하고 가죽으로 엮어 만든 찰갑이다. 삼국시대 찰갑과 만듦새가 비슷하며 빛을 반사해 번쩍번쩍 화려하다. 유엽갑은 수은갑처럼 쇠로 만든 미늘을 그을린 녹비로 엮어 검은 옻칠을 한 것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편 제5권> 부록을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두정갑은 철 찰갑 조각들이 옷 안쪽에 달려있는 반면 철갑은 철 찰갑이 바깥에 드러나 있고 또한 찰갑끼리 가죽으로 직접 연결됐다는 차이가 있다. 수은갑은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나가는 신립 장군에게 임금이 하사한 예나 국왕 호위병인 내금위가 착용한 사례로 볼 때 고급 갑옷이었다. 결국 수군 각 진포에서 보유한 철갑은 수은갑이 아니라 겉 칠만 달리한 유엽갑 혹은 유엽갑에서 개량된 좀 더 저렴한 갑옷으로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여러 읍지에 기록된 철갑 수량은 각 수군진포에서 자체 보유한 것이고 장수나 군관, 수졸들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것이 아니다. 정공청 장군이나 류성룡의 갑옷 유물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지휘관인 장수들과 신분이 높은 군관들은 개인 소유의 갑옷을 따로 입었다. 그러니 상장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수졸들에게 더 많은 몫이 돌아간다.
물론 임란 기간 중 수군이 크게 증강됐으므로 이와 동시에 철갑을 추가로 생산하더라도 소요를 맞췄을지는 약간 의문이다. 그러나 전시에 군수품 생산이 급증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임란 당시 수졸들이 착용할 철갑이 크게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아 원균이 수사를 맡은 경상우수영도 개전 직전인 3월 하순에 경상감사가 수영과 경상우수영 예하 19개 수군진포를 빠짐없이 돌며 검열했으니 최소한 개전 당일에는 철갑이 부족할 이유가 없다.
마지막으로 <난중일기> 임진년 3월 6일자를 인용한다.
<맑았다. 아침을 먹은 뒤 출근해 군 기물을 점검했다. 활, 갑옷, 투구, 통아, 환도가 깨지고 헐은 것이 많고 기준에 미달하는 것들이 매우 많았다. 색리, 궁장, 감고 등을 논죄했다. 晴. 朝食後出坐. 軍器點閱 弓甲兜鍪桶兒還刀 則多有破毁之物 不成樣者甚多 色吏弓匠監考等論罪.>
우리는 여기서 임진왜란 직전 전라좌수영에서 갑옷과 투구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난중일기>를 조금이라도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읽었을 만한 임진년 초반 기록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기록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갑옷을 입었느냐는 논제와 연결 짓는 경우가 없었다.
지금까지 여러 기록을 살펴봤다. 조선 전기에도, 후기에도, 그리고 임란 직전에도 수영과 수군 각 진영에서 갑옷을 보유했다. 그렇다면 조선 수군이 전투 중에 갑옷을 입었다는 소리지 그저 창고에 보관만 했겠는가?
결론을 내리자면 이렇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전투원 대부분이 갑옷, 특히 철갑을 입고 해전을 수행했고, 육군은 대부분이 벗고 뛰었다.
출처 : 김경진, 안병도, 윤민혁 공저 <임진왜란>
          
추리의세계 16-09-19 12:52
   
아 그렇군요. 좋은 내용 배워가네요. 육군은 오히려 갑옷 장착이 느슨한 반면, 수군은 아니었을 확률이 높군요. 제가 반대로 알고 있었네요.
 저는 지갑을 많이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지갑이 제작비용이 비싸다고 하네요. 종이값이 높아서 그런 거 같습니다.

 어떤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오더군요(책 이름은 기억이 안나네요.)
조선 후기 장수가 쓴 글이었던 것 같은데 (물론 병자호란 이후일 겁니다.) 병사들이 갑옷을 안입으려 한다는 내용이었죠. 무겁기만하고 실제로 상용 무기(아마도 발전된 조총)에 대해 몸을 모호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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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9 [기타] 조선(朝鮮)왕조 의장용 갑주 맛보기(재업) (14) 한국경제 02-24 11353
19758 [대만] 어떻게 봐도 이건 쉴드가 불가능해 보이는데? (32) 똑같진 않… 11-21 11347
19757 [기타] 오유에서의 근대화허상과 식근론 비판 (16) 크크로 10-03 11346
19756 나이지리아전 중국번역글을 보면서 찾아본 한국기원… (14) 환쟁이 06-23 11323
19755 한국인을 바라보는 중국인은 어떻죠? (36) 화두 06-12 11320
19754 [몽골] 몽골 한국과 국가연합 모색 주장 (26) 심청이 07-26 11319
19753 [일본] 대화재와 전염병으로 신음하던 에도의 백성(닭장주… (7) 굿잡스 08-21 11308
19752 [일본] [시론]주눅든 일본의 대중국 공포증 (9) su3218 11-12 11280
19751 [일본] 아베히틀러 - 해외용 짤빵으로 만들었습니다. 많이 … (7) 제다이트 04-27 11256
19750 한국인의 자긍심을 살린 해병대 (11) 중국 10-17 11241
19749 [기타] 조선시대 사진 (6) 친일척결 09-07 11238
19748 [베트남]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은 보길 바랍니… (81) 바람꽃 01-14 11226
19747 [일본] Japanese Nazi in Seoul Korea ( Hakenkreuz 욱일승천기 ) (6) 유툽방팀 11-07 11223
19746 [다문화] 이태원 흑인 패싸움... (6) 뿍엑스 10-13 11206
19745 [중국] 대륙의 효자, 아버지께 큰 선물을. (1) 휘투라총통 04-19 11195
19744 [통일] 한국어는 요상한 고립어?? 최고로 진화한 종합어!! (14) 굿잡스 11-14 11174
19743 [기타] 한국의 콜로세움 - 고려 격구장 (2) shrekandy 09-24 11171
19742 [일본] 메이지 시대 근대화된 일본 자화상(사진) (21) 굿잡스 06-26 11165
19741 [일본] 일본 쓰나미 이재민... 이재민 수용소 화장실에서 … (6) ㄴㄴㄴ 04-27 11113
19740 [베트남] 다문화 대책 꼭 세워야 겠네요 .. 베트남 연예인 하이… (9) 정상인임 10-18 11095
19739 [기타] 조선의 동양 최초+최고의 유량악보: 정간보 (10) shrekandy 02-12 11065
19738 [홍콩] 영국의 홍콩 식민 지배에 대해서 (32) 터틀 09-14 11057
19737 [중국] 중국 만주족도 독립을 원하나요? (14) 지징 07-23 11045
19736 롯데는 한국기업 인가? 아님 일본기업 인가 ? (10) TRUTH 10-23 11035
19735 [북한] 일제시대 조선인의 평균키에 대해 궁금한게있는데요 (18) 김시누크 11-23 10991
19734 [일본] 일본 정권 실세 일본 천황가는 한국에서 왔다 (60) 풍림화산투 05-17 10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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