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6-08-26 18:29
[한국사] 여자치마를 벗기고 올라타는 놀이-백정각시놀음
 글쓴이 : 두리네이터
조회 : 8,952  

http://m.huffpost.com/kr/entry/9782642#cb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는 ‘백정각시놀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단오놀이를 하는데 구경꾼 속에서 백정이 딸 하나를 잡아낸 기라요. 한사 결단 달아날라는 거를, 아 그러씨 장정 몇이 덤비는 데야,치마가 찢기 달아나고 속곳이 벗겨지고, 지금도 생각이 나는데 고놈의 가시나 몸매도 좋고 얼굴도 이삐게 잘 생깄더마'

"볼 만했겄네"

"그 이삔 가시나를 엎어뜨리놓고 장정들이 번갈아서 올라타고 이랴! 이놈의 소가 와 안가노!함시로 엉덩이를 철벅철벅 때리는 기라요.뿐이겄소?목에다 새끼줄을 걸고 네 발로 기게 하고 구경꾼 앞을 돌아댕기는데,그 에미가 소개기를 가져와서 겨우 풀리났지마는 좀 안된 생각도 들고,"

"안되기는 머가 안됐단 말이오?백정은 사람이 아닌께,그 놈들을 오냐오냐 하고 내버려두었다가는 칼 들고 소만 잡겄소? 사람도 잡을라 들 긴데 옴작달삭 못하게 콱 기를 지이놔야지."



즉 백정각시놀이는 백정 집 여자들이 눈에 띄면 그야말로 짐승처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못된 풍습이었다. 이 일을 당한 여자 여럿이 목숨을 끊었다고 할 정도로 야만적인 횡포였다.



치마를 벗기고 올라타는 놀이…'백정 각시 놀음'

http://mnews.sbs.co.kr/news/endPage.do?newsId=N1003216868

<백정각시놀음>

.....백정의 아내와 딸이 마을행사등에 구경나와 있는게 보이면 끌어내어 재갈을 물리고 치마를 벗긴 뒤 소처럼 올라타고 끌고다니며 고기를 내어줘야 풀어주곤 했는데 이걸 백정각시놀음이라 했다.(백정 여자는 저고리 끝에 검은 표시를 해야 했고 사람들은 그걸로 누가 백정인지 구분했다.)

일제 초의 실화로 딸의 소학교 운동회를 보러갔던 어머니가 딸앞에서 백정각시놀음을 당한다. 딸이 보는 앞에서 입에 재갈이 물려지고 남자들이 올라타 온갖 모욕을 줬던거다. 결국 어머니는 집에 돌아와 xx을 하고 만다.


국가보훈처 사적관리센터

http://sajeok.i815.or.kr/i815/m7/page//?qs1=&qs2=&qs3=���사&mobile=yes&id=50

읽기자료 3번의 4에 내용

④ 백정에 대한 법적․사회적 차별은 일제시대까지 지속되었다. 1911년 일제가 한국인의 체격과 체질을 조사하는 데 일반인들이 거부하자 백정 남녀를 강제로 동원했다. 일제시대 신문 기사 중 학교 운동회에서 ‘백정각시 타고 달리기’라는 색다른 경주를 실시하면서 저고리 깃에 검은 천을 단 백정 각시를 찾아내어 소처럼 엎드려 기게 하여 치욕을 겪은 백정 여성이 xx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도 백정 호적에는 도한이라고 쓰거나 붉은 점을 찍어 일반인과 구분하였다. 일본 메이지(明治)대를 졸업한 장지필은 조선총독부에 취직하려고 했으나, 호적 등본에 '도한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고는 형평 운동에 뛰어들었다. 백정 자제가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거부하는 일들도 발생하였다.


백정 각시 타기의 진실 여부 논쟁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bestofbest&no=221009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total&no=11077668





========================================

조선시대 백정이 천대받는 직업이었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사실인지 포털에서 검색해봤는데 아마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보이네요.

백정신분해방운동인 형평사운동을 전개했던 강상호님도 이이제이같은 프로에서 한번 다뤘으면 좋겟습니다.충분히 역사적 위인이라 할만한 분인데 민족내부의 치부문제라서 그런지 쉬쉬되는것 같네요.미국같으면 화폐도안에 들어갔을건데..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줄리엣 16-08-26 18:57
   
화가나는 악습이네요
왜나라 16-08-26 19:18
   
소설 제외 기록에 있나요?
     
두리네이터 16-08-26 19:32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total&no=11077668

본문글 마지막 캡쳐사진에 보면 오른쪽 하단이 경상남도 교육청이 찍혀있습니다. 인권수업자료 교과영역3 193페이지라고..

교과서인걸로 추정됩니다.
스코티쉬 16-08-26 19:22
   
백정이 고려초 부터 넘어온 말갈/거란인, 파란눈의 타타르인으로 알려져있죠.
TVN에서 하던 시간탐험대에도 도축판매하는 백정이 파란눈의 서양인으로 나오고..

그나저나 다른 사이트에서 백정각시타기로 어그로 끌던사람 논파당하는거 본적있는데,
인권이 중요시되는 요즘의 인종차별 문제 보면, 그때라고 크게 달랐을까 싶긴 하네요.
     
두리네이터 16-08-26 19:34
   
네..왜 백정이 차별받게 되었냐 유래를 분석해놓은 곳도 있더군요. 조선전기까지는 이 백정이라는 집단이 꽤 말썽을 많이 부렸던 모양입니다.(오늘날 유럽의 집시와 비슷)

http://egloos.zum.com/hyukjunseo/v/3543542
문삼이 16-08-26 19:27
   
우리나라에서 백정은 일본 부라쿠민 대우에 비하면 양반이지요.
조선후기에 와선 백정들도 자신들 목소리도 냈어요.
예를들어 양반이 소도축을 백정에 맡기지 않고 사사로히 하면 찾아가서 뗑깡도 부리고 그랬어요.
일종의 길드를 형성한거지요.

반면에 부라쿠민은 현재까지도 일본사회에서 차별을 받는 존재이기도 하고요.
많은 부라쿠민들이 해외이민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두리네이터 16-08-26 19:35
   
네..일제에서도 방조했던건 사실입니다.부라쿠민의 전통이 있어서 그런지 그냥 대수롭지않게 생각함.


http://m.huffpost.com/kr/entry/9782642#cb

일본 경찰 또한 형평사의 적이었다. 진주경찰서장은 “일본에도 이런 천민집단이 존재하며 평민 대접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 중에 성공한 자도 없다. 그러니 농청 (형평사에 반대하는 농민 조직)이 간섭하지 않고 형평사가 잘못을 저지른다면 내가 형평사를 해산하겠다.”
          
문삼이 16-08-26 20:07
   
지금 포인트가 잘못됐어요.

우린 과거에 백정이란 천민집단이 있었고 차별이 심했지만 현잰 모든게 혁파되었다이고 일본도 과거에 부락민이란 천민집답이 있었고 차별이 심했다 그런데 현재도 그런 차별은 진행중이다라고요.
               
두리네이터 16-08-26 20:22
   
한국이 기존신분차별이 타파되기에는 일본보다 유리한 조건이었죠.6.25전쟁을 통해 여러차례 대학살과 산업화를 통한 인구이동이 벌어지면서 전통적사회의 기반이 완전히 붕괴되어 완전히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었죠.그런데 최근에 다시 부를 기반으로 하는 신계급제가 형성되는중;;
                    
문삼이 16-08-26 20:24
   
맞는 말씀이예요.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일본은 아직도 부락민에 대한 차별이 있고 이는 언론에서도 거론되지 않는 내밀한 일본의 문제이지요.
일본의 후진성이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문제이기도 하고요.
                    
순대천하 16-08-27 00:25
   
그 정도의 조건은 일본도 있었어요. 오히려 우리보다 유리하면 유리했죠. 대한제국 말기에 미국에서 민주주의 개념을 들여와 진정한 의미의 계몽을 하려던 노력이 컸다고 봐요.

일본같은 경우 역사적으로도 뿌리깊게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별이 있었던 점과 근대화를 빨리 이루었지만 의식적인 부분에선 이루지 못한점이 원인이겠지요.
shrekandy 16-08-26 23:52
   
http://m.clien.net/cs3/board?bo_style=view&bo_table=park&page=1&wr_id=48827802

이 글도 본인 글이세요? 내용이 완전 일치하네요

보아하니 이미 반론 다 되어있는데 본인 글이시면 이거 보시고 아니라면 참고하세요
     
왜나라 16-08-27 00:41
   
좋은 반박이군요. 특히 그런 풍습이 있다면 백정의 아내와 딸이 그런 자리에 가는 게 말이 되냐는 것이 그럴 듯하군요
     
꼬꼬동아리 16-08-27 01:00
   
링크타고 가니까 벨리댄서 라는 사람 두리네이터님 하고  동일 인물 맞네요
반박해놓은 글에는 답글 아예 안다는 센스를 지니고 계시네요 ㅋㅋㅋ
그냥 제가보기엔 우리나라 있지도 않은 조그마한 마을 하나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나라 전체에서 한것마냥 치부를 꺼내서  여거나라는 이랬던 나라다 어쩌고 하는 어그로댄스네요
     
shrekandy 16-08-27 01:13
   
네 링크타고가면 Drum님이란 회원뿐께서 다 반박해 놓으셨네요 ㅎㅎ
          
두리네이터 16-08-27 06:09
   
제대로 된 반박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깐요.교과서에 실린것조차도 우리나라 교과서는 못믿는다는 식으로 나오는데 그게 무슨 제대로된 반박인가요?

drum님이 제시한건 최근에 와서 새롭게 주장되는 학설이다 차별받고있는데 백정의 자식들이 어떻게 학교에 가냐등인데 6.25때 미군이나 국군학살도 최근에 와서 밝혀지는것도 많고 형평사운동때 불가촉천민취급을 당하던 백정의 자식들을 학교에 다니게한(강상호라는 선각자분이 희생해줘서 가능했지만) 증거가 남아있는데.그럴리가 없다는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만 들어 반박하고 있을 뿐입니다.
               
꼬꼬동아리 16-08-27 13:39
   
아주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6.25이후 나온 학설들은 전부
일제시대때 식민사관으로 형성된것들입니다 그증거들 보면 우리나라 전체에서 시행됬던 것들이 아닌데 자꾸 님은 우리나라 전체에어 시행됬던것 마냥 자꾸 아니라하는데도 적고있네요  일뽕이나 중뽕으로 밖에안보입니다 님은
두리네이터 16-08-27 06:01
   
국가보훈처에서 관리하는 독립운동 사적지관리 소개사이트입니다.
(링크가 안걸리는군요.주소 그대로 긁어 붙여넣기해서 보세요)

조선형평사총본부터 읽기자료 3의 4번입니다.

http://sajeok.i815.or.kr/i815/m7/page//?qs1=&qs2=&qs3=평사&mobile=yes&id=50

④ 백정에 대한 법적․사회적 차별은 일제시대까지 지속되었다. 1911년 일제가 한국인의 체격과 체질을 조사하는 데 일반인들이 거부하자 백정 남녀를 강제로 동원했다. 일제시대 신문 기사 중 학교 운동회에서 ‘백정각시 타고 달리기’라는 색다른 경주를 실시하면서 저고리 깃에 검은 천을 단 백정 각시를 찾아내어 소처럼 엎드려 기게 하여 치욕을 겪은 백정 여성이 xx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도 백정 호적에는 도한이라고 쓰거나 붉은 점을 찍어 일반인과 구분하였다. 일본 메이지(明治)대를 졸업한 장지필은 조선총독부에 취직하려고 했으나, 호적 등본에 '도한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고는 형평 운동에 뛰어들었다. 백정 자제가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거부하는 일들도 발생하였다.

====================================
일제신문기사를 토대로 학교운동회에서 일어난 백정각시놀음때문에 백정아내가 xx하는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이정도면 날조된 사실로 치부하기 어렵지 않겟습니까?
     
shrekandy 16-08-27 15:02
   
그니까 이게 어떻게 조선시대 내내 있었던 풍습임?
mymiky 16-08-27 08:54
   
2000년인가?
sbs [백정의 딸]이란 드라마가 있었어요, 추상미가 여주인공으로 나오는..

이게 명절 특집극? 장편드라마는 아니라서, 못 본 사람들도 많을수 있는데..

하여간, 전 그때 봐서 기억납니다.
추상미 엄마가 이휘향씨 였는데, 백정의 아내로 나왔음.

백정신분의 일가족이 모욕당하고, 나이 어린 애들도
백정보고 네발로 기는 소타기 시키고. 이럇- 어서가자..빨리 기어라고- 뭐 그런 장면 있긴 했어요.

치마를 벗겼느니, 어쨎다느니 하는건
좀 원색적이고 자극적인거 같습니다만.. 뭐,, 케바케인거 같고

아무래도, 가축 도살업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다보니, 천하고 인간취급을 못 받는 면이 있었죠.
그건, 부정할수 없는거고,,
julie 16-08-27 10:30
   
예전에 고기사러갈 때 즉 백정을 대할때는 무조건 집에서 가장 어린이가 심부름을 갔다고합니다. 그리고 반말을 했다고합니다. 이건 돌아가신 저희 할머니가 직접 얘기해주신거니 맞을거에요. 1923년생이셨음
     
두리네이터 16-08-27 10:39
   
저도 어릴때 할머니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어요.백정같은 상놈들이 갓쓰고 다니면 즉각 갓 빼앗어서 찢어버렸다고..1914년생이셨네요.사드배치된 경북 성주출신이셨죠.주로 영남권에 이런 이야기가 많더군여.
          
julie 16-08-27 10:44
   
아 정말 그런가보네요?  저희 할머니는 근처 현풍출신, 안동김씨 꽤 규모있는 중간급종가(?) 출신이세요.
조신하게 16-08-27 11:12
   
문제는 그 풍습이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전국적으로 행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 백정 각시 놀음이 행해졌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신문에도 났고 구체적으로 경북 예천이라고 지명까지 나오니까요.

근데, 대충 자료를 검색해보니 경북 예천 지방은
1. 반상의 차별이 아주 심했던 지역이고
2. 하층민이 백정을 특별히 더 괴롭히고 조직적으로 수탈했으며
(아마도 본인들도 먹고 살기 힘들어서, 신분제의 악습을 악용한듯)
3. 형평사 운동과 마찰이 심했던 지역
이라고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조선팔천 이외에 일차사료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저 풍습이 일반적으로 행해졌슴을 보여주는 문서라든가 기록이 있나요?
그런 자료가 없다고 해서 저 풍습이 일반적으로 행해졌음이 반증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문제는 충분히 인권과 관련하여 흥미롭고 중요한 주제고
그 중요성만큼 객관적 자료(공문서, 사문서, 여행기 등)로 보충이 된다면 좋을 것 같아서요. 

좋은 하루 되세요.
북창 16-08-27 12:18
   
1910년...왜구들이 왜곡하기에 딱 좋은 시절이었네요~ ㅋ
물론, 차별 대우는 받았겠지만...그런 놀음?이 예사로 벌어졌는지의 여부를 저 에피소드로만 판단하긴 힘들듯...
제 생각엔 어쩌다 저런 일이 있었고 xx을 한거 때문에 저 사건이 크게 보도가 되었을 거고...왜구들이 이때다 싶어 풍습으로 조작을 했을 가능성이 농후...
의로운자 16-08-27 12:32
   
역시 쓰레기같은 국가네요..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난나야 16-08-27 13:20
   
이 내용 예전에 스브스뉴스로 제작되었다가 개 욕먹은 내용임니다...

저 위에 사실나열에서 보면 일제시대때의 이야기인데.....

마치 조선시대에서부터 내려오던 전통(풍습)이라고 왜곡한사례죠...

그때 역사전공자의 말을 들어보아도 일제시대전에 그런 기록은 없었고 일제시대때에도 정확한 기록은 없는 그렇다더라라는 카더라통신 내용으로 일제시대 신문에 언급된 내용밖에 없다고 했었죠

그후에 스브스 뉴스에서도 삭제 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직 그내용이 살아있나 보네요
     
shrekandy 16-08-27 13:23
   
그 일제시대 신문도 뭔 신문인지 알고싶네요...제가 놓친것인지 정작 신문 이름도 못 봤어요
     
꼬꼬동아리 16-08-27 13:43
   
그냥 저인간  나라 까고 싶어서 환장한 놈으로 밖에 안보입니다
정확한 증거도없거니와 일부 시행됬던 자료들고와서 전체에서 행했던 것마냥 글 쳐 싸지르는데 답이없는 인간이네요 일제시대 이후로는 식민사관 박힌거  모를리가없는데 서희강동6주도 교과서에서  식민사관 그대로 실려있는데 답이 없는 인간입니다
          
두리네이터 16-08-27 14:13
   
진실을 알아보려고 이야기하는게 일뽕 중뽕 식민사관이 되는구려~ 껄껄
               
꼬꼬동아리 16-08-27 14:30
   
이게 진실이라고?  일부사건이면  일부에 이런일이 있었다 라고 쳐적던지 마치 우리나라에서 행했던 풍습처럼 쳐 말하는데  이게 팩트고 진실이가?  참 어이가 없네 니글이나 쳐고치고 진실 이라 말을하던지 그따위로 쳐 써놓고 진실이니 어쩌니 ㅋㅋㅋ 답도없다  이해능력이 떨어져서 덜떨어졌냐?  가서 이해능력이나 쳐 기르고 오던지
               
shrekandy 16-08-27 14:47
   
걍 답정너히는게 뭔 진실을 알아보는거죠...
왜나라 16-08-27 13:59
   
일제 신문이라는 데서 딱 사이즈 나오지 않나 ㅋ
     
두리네이터 16-08-27 14:09
   
일제에서 발간한 신문이 아니라 일제시대 신문입니다.이걸 근거로 들고있는곳이 국가보훈처구요.
          
꼬꼬동아리 16-08-27 14:11
   
일제시대 발간한 신문 ㅋㅋㅋ 아주 일뽕 오지네요 많이 드셨어요?
          
왜나라 16-08-27 14:11
   
그거 하나로 증거가 되나요?
               
두리네이터 16-08-27 14:15
   
교과서도 있고 국가보훈처 사적사이트에도 있죠

http://sajeok.i815.or.kr/i815/m7/page//?qs1=&qs2=&qs3=���사&mobile=yes&id=50


조선시대 백정의 처지

백정은 가축잡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알려져 있으나 버드나무 가지로 바구니를 엮는 고리 백정, 가죽으로 신을 만드는 갖바치, 칼로 죄인의 목을 자르는 망나니도 모두 백정에 속했다. 고려시대에는 화척이라 불렀는데, 이들에 대한 차별이 심하여 조선 세종 때 일반 백성들을 지칭하던 ‘백정’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노비 외의 천인들을 양인으로 취급해 군대나 토목 공사에 동원할 인력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이 점차 백정이라 불리기를 꺼리면서 결국 백정은 도살업자 등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백정은 의복과 복장에서부터 차별을 받았다. 남자는 일반인처럼 갓이나 망건, 털모자를 써서는 안 되고 상투도 틀지 못했다. 이 때문에 산발을 하거나 일반인이 부모 상을 당하였을 때 쓰는 패랭이(평량갓)를 써서 백정임을 드러내야 했다. 패랭이의 끈도 구슬이나 베 조각을 쓰지 못하고 종이 꼰 것만 써야 했다. 여자는 비녀를 꽂을 수 없었다. 가죽신을 만드는 것이 직업이었으나 가죽신을 신을 수 없었고 짚신이나 헝겊신을 신어야 했다. 백정은 두루마기를 입을 수 없었고, 돈이 있어도 비단옷을 입거나 지붕에 기와를 올릴 수 없었다. 백정은 이름에 인·의·효·충과 같은 고상한 글자를 쓸 수 없었고, 석(石)·피(皮)·돌(乭) 등 좋지 않은 뜻의 글자를 사용해야 했다.

사는 곳도 제한을 받았다. 백정은 일반 백성과 섞여 살지 못하고 특정 지역에 모여 살았으며 통행증 없이는 이동할 수 없었다. 일부 지역은 백정의 마을 출입을 막기 위해 저고리 깃에 검은 천을 달고 다니게 했다. 일반인과 나란히 걷지 못했고, 일반인 집에 갈 때는 무릎을 꿇고 들어가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백정은 어린아이라 해도 평민에게 ‘생원님, 서방님, 도련님, 아기씨’ 하는 존댓말을 써야 했고, 일반인은 나이에 상관없이 백정에게 반말로 대꾸했다. 평민과 백정의 결혼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백정끼리 혼인하였으며, 결혼식에서 백정 신랑과 신부는 안장 놓인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없었다. 장례 때 상여를 이용하지 못하고 부모상을 당해도 삿갓이나 베옷을 착용할 수 없었으며 묘지도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백정들은 호적이 없어서 벼슬도 못하고 서당도 다닐 수 없었으며, 국가 구성원의 일원으로 대우받지 못한 탓에 납세나 국방의 의무도 없었다. 그러나 적이 쳐들어오면 병사로 징집되는 경우가 많았고, 평소에는 지방관이나 양반에게 고기를 상납하도록 강요받았다.

이러한 각종 차별에 저항하여 어기거나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백정은 일반 평민보다 훨씬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일반 백성들은 마을의 규율 조직을 통해 백정을 사적으로 처벌했고, 지방 관청은 사회 질서를 깨뜨렸다는 죄로 처벌하였다. 관청의 처벌 방법도 달라 일반 죄수는 곤장대 위에 올려놓고 때렸지만, 백정 죄수는 곤장대 없이 맨땅 위에서 곤장을 쳤다.

갑오개혁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백정의 생활

①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어 백정들도 평민처럼 갓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00년 2월 경상남도 진주군 등 16개 군의 백정이 관찰사에게 호소하는 일이 발생한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백정이 그동안 쓰지 못하던 갓을 쓰게 되었으나, 1896년이후에 전처럼 천대를 받아 갓도 쓰지 못하게 되었으니 다시 갓을 쓰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백정의 제소를 받은 진주 관찰사는 갓을 쓰되, 백정들의 갓끈은 일반인과 달리 소가죽으로 하라고 답했다. 이에 백정들이 항소하였으나 관찰사에게 같은 대답을 듣고 쫓겨났다. (『황성신문』, 1900년 2월 5일․17일)

② 1896년 ‘포사규칙(庖肆規則)’이라는 것이 발표되었다. 포사는 푸줏간을 뜻하는 한자로 포사규칙은 곧 푸줏간에 대한 법령이다. 이 규칙은 가축을 잡을 때 소 마리당 80전 씩 세금을 내어 정부의 허가를 받게 하고, 허가장(영수증) 없이 도살하면 벌금․자격정지․추방에 처하며, 백정들을 소속 관청에 항상 대기하게 하는 등의 강제 조항들로 구성되었으나, 임금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정이 없는 백정에게는 매우 불리한 법령이었다. 이 규칙으로 정부는 푸줏간 주인에게 걷은 세금으로 재정을 확충하고 백정을 정부 관리 아래에 두게 되었으나, 백정은 도살업이라는 천대받던 직업에 고정되었다. 그나마 백정이 푸줏간을 열려면 세금을 내고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 했는데, 비용도 만만치 않았고 지방관의 영향력도 크게 작용하였다. 부유한 일부 백정을 제외하고 대다수 백정은 고용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백정들도 호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과 같은 호적에 등재되지 못하고 따로 도한(屠漢)호적에 기재되었으며, 직업란에 ‘도한’이라고 붉은 글씨로 썼다. 도한은 ‘소잡는 놈’을 뜻하는 말로 백정을 직업적으로 천시하고 경멸하는 명칭이었다. 즉 백정은 갑오개혁으로 법적인 차별은 벗어난 듯 했으나, 포사규칙이나 도한 호적 등으로 모욕적 칭호를 들으며 차별을 여전히 겪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관습적인 백정 차별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05년 호주 장로회 소속 의료 선교사인 카를 목사가 옥봉리 교회(지금의 진주 교회)와 백정 집단 거주지역인 옥봉에 예배소를 따로 세워 의료와 교육 활동을 했다. 1909년 카를 목사의 후임으로 온 리알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는 귀하고 천한 이가 없이 모두 똑같다고 강조하면서 백정 신도들과 일반 신도들이 같이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녀 백정들이 일반인 신도들과 함께 예배드리기 위해 옥봉리 교회당 안으로 들어오자, 200여명의 신도들이 모두 일어나 밖으로 나가 예배를 거부했다.

③ 백정들은 ‘포사규칙’으로 가축을 잡을 때 내는 세금 부담에 더하여, 지방관의 고기 상납 요구나 양반의 수탈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도축 세금의 증가로 백정들은 그나마 천대받던 생업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전라남도 백정들이 해마다 영업 세금이 늘어 전에 100여 냥을 내던 것이 700~800냥을 내게 된 원통함을 청원하기도 했다. 충남 태안군에서 여유있게 살던 백정들이 양반들에게 잡혀가 몇 백냥씩 강제로 빼앗긴 후 집을 철거하고 마을을 떠난 사례도 있었다. 백정들이 불법으로 도살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의 생계가 몹시 어려웠던 상황을 반영한다.
러․일전쟁 이후 ‘포사규칙’이 재정비되어 푸줏간의 관영화와 허가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조선에서 소가죽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여 피혁산업의 발달을 도모한 일본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개항 후부터 소가죽은 조선의 수출품 중 4위를 차지했으며, 조선산 소가죽은 일본 소가죽 수입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식민지화의 심화와 함께 일본인의 불법적인 도살장 영업도 점차 늘었으며, 일본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던 정부는 일본인의 직접적인 푸줏간 운영을 합법적으로 보호하였다. 관습적인 차별이 남아있는 가운데 식민지 경제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백정들은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수탈의 심화라는 이중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④ 백정에 대한 법적․사회적 차별은 일제시대까지 지속되었다. 1911년 일제가 한국인의 체격과 체질을 조사하는 데 일반인들이 거부하자 백정 남녀를 강제로 동원했다. 일제시대 신문 기사 중 학교 운동회에서 ‘백정각시 타고 달리기’라는 색다른 경주를 실시하면서 저고리 깃에 검은 천을 단 백정 각시를 찾아내어 소처럼 엎드려 기게 하여 치욕을 겪은 백정 여성이 xx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도 백정 호적에는 도한이라고 쓰거나 붉은 점을 찍어 일반인과 구분하였다. 일본 메이지(明治)대를 졸업한 장지필은 조선총독부에 취직하려고 했으나, 호적 등본에 '도한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고는 형평 운동에 뛰어들었다. 백정 자제가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거부하는 일들도 발생하였다.


백정들의 형평운동

신분 차별에 개별적으로 저항한 백정들도 있었다. 박성춘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에서 대중 앞에 나와 연설을 했고, SBS 드라마 <제중원>의 모델이 된 박서양은 제중원 의학교에 입학하여 최초의 백정 출신 의사가 되었다.
백정 전체의 해방을 위한 조직적인 움직임은 형평사에서 시작되었다. 1923년 4월 25일 장지필, 이학찬 등을 비롯한 70여 명의 백정과 신현수, 강상호, 천석구 등 사회운동가들이 진주에서 조선형평사 발기회를 개최한 것이다. ‘형평(衡平)’은 백정들이 고기를 잴 때 사용하는 저울을 뜻하는 말이니, 조선형평사는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 건설을 지향하는 단체임을 이름에서부터 명확히 드러낸 셈이다.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라. 이에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 기약함이 형평사의 주지이다. 우리도 조선 민족 2천만의 1인이라. 애정으로 서로 도와 생활의 안정을 꾀하며 공동의 번영을 위해 40여만이 단결하여 본사의 목적과 그 주지를 간명히 표방코자 한다.  -창립식에서 발표한 형평사 중심 취지(主旨)-
같은 해 5월 13일 진주에서 개최된 형평사 창립 축하식은 당시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천대받는 백정들을 해방시키자는 운동이 진주 최대의 공공장소에서 벌어졌다는 상징적 의미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형평사가 전국 규모의 사회운동 단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형평사는 백정의 인권 해방과 권익 옹호, 공평한 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백정의 호적 기록을 삭제하는 등의 활동을 펼쳐 창립 1년 만에 지사 11개소와 분사 67개소를 갖춘 대규모 전국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형평사가 전국 단체로 발전하면서 지도부 중심 세력에 변화가 생겨 창립 1년 뒤부터 본부를 진주에 두자는 진주파와 서울로 옮기자는 서울파로 나뉘었다. 결국 1924년 3월 천안에서 열린 조선형평사 혁신 대회에서 형평운동의 혁신과 본부의 서울 이전을 결정하였다. 다음 달 서울 도렴동 144번지에 조선형평사 본부를 설치하였고, 1926년 운니동 23번지로 조선형평사 총본부를 이전하였다.
형평사 총본부는 백정 호적 기록 삭제, 공동체 성격을 지닌 상호부조, 백정의 임금 개선, 정규학교 입학 권장, 정규 교육기관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던 형평사원과 사원 자녀를 위한 야학이나 사설 강습소 설치, 신문․잡지의 구독 권장, 상식 향상을 위한 강연회 개최, 합리적 사회 건설을 위한 일반 사회단체와 연합 등의 활동을 펼쳤다. 별동 기관으로 각지에 형평청년회를 조직하고, 아동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형평학우동맹과 형평여성단체를 운영하는 한편,

형평운동과 민족운동

백정들의 형평운동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형평운동을 반대한 일반인과 백정들의 충돌이 자주 신문에 보도되었다. 예를 들어, 1923년 충북 제천에서 형평운동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형평분사 창립 축하식장을 습격하여 형평사원 백정들을 폭행하고 강제로 패랭이를 씌우고 목에 줄을 매어 시내 거리를 끌고 다녔다. 천안 입장 등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백정 자제에 대한 교육 거부가 교직원과 일반 학부형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진영〔김해〕에서는 행상들이 한 정육 상인에게 “지금까지 백정은 백정이고, 양반은 양반이다”라고 말하여 다툼이 일어났는데 이를 중재하던 형평사원에게도 폭행을 가하였다. 김해에서 백정과 일반인의 결혼 문제를 두고 농민들이 백정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을 거부하여 형평사원들의 집 70여 채를 파괴했으며, 익산에서 ‘도한’이라고 기재된 차별 호적이 발견되어 삭제된 사건도 있었다.

형평사원과 일반민들이 대립했을 때 일제 경찰은 “일본에도 에타(穢多, 사람이 아니라는 뜻의 히닌(非人)이라고도 불렸던 불가촉천민인 부락민)라 하여 일반민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들이 있으며, 그들은 그 어떤 것에도 성공한 적이 없다. … 형평사도 이와 같으니 … 백정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우리가 즉시 해산시킬 것이다”라며 일반민들을 옹호하여 다툼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제천에서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백정들을 폭행하고 평량립 착용을 강요했지만 일제 경찰은 이러한 사건들에 무관심하여 업무 태만을 보여주었다. 일제는 형평사의 활동을 감시하기도 했다.
 
"전조선 형평학우대회, 천안에서 성황으로 개최"

학문의 세계에 푹 빠진 조선 각지의 형평 학생으로 조직된 형평학우 정기 총회가 8월 9일 오전 11시 반부터 천안 형평사에서 개최되었다. 이 정기 총회에는 전라, 강원도 등지에서도 참가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정각이 되자 천안 경찰서 고등계 주임 이하 4~5명  경관의 참석 아래 경찰 고등계 주임으로부터 몇 가지의 주의의 말이 있은 후, 학우동맹  이선동군의 의미 깊은 개회사로 개회식이 시작되었다. 각지에서 보내 온 축하글 중 군산과 원주를 비롯한 다수에서 온 축하문은 내용이 불온하다하여 경찰에게 압수당하고, 나머지는 전부 낭독했다. 대회 진행 중에 일어난 경관의 문서 압수는 본 형평사 정기 총회를 무시하는 행동이라며 김용택군이 저항하였는데, 경관을 무시하는 말과 행동을 범했다며  말다툼이 있었다. 이후 2~3인의 내빈 축하가 있었고 뒤를 이어 회원들이 소감을 말했다. 이 중 군산에서 온 13세의 이분례는 “우리도 인생이다. 우리는 이 계급을 벗어나기로 굳세게 노력하자”는 말에 일반인도 많은 찔림을 받았다. … 오후 3시 반에 만세삼창으로 폐회하였는데 회원들은 8월 10일 개최할 입장 형평사 제4회 기념 총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쏟아지는 폭우를 무릅쓰고 입장을 향해 출발했다. …  『중외일보』(1927년 8월 11일)-
 
심지어 일제 당국은 사건을 조작하여 형평운동의 주요 세력 중 일부에게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대거 검거하였다. 일제는 특히 일본에서 불가촉천민으로 갖은 차별을 받던 부락민들의 인권 단체인 수평사와 형평사의 연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당시 신문은 일반인과 형평사 백정들의 충돌을 보도하면서 일제 경찰의 대응을 비판하고 형평사 출범과 전국적인 조직 확대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왜나라 16-08-27 14:19
   
들어가니 에러 나옴. 님이 말하는 교과서나 국가보훈처도 신문을 근거로 말하는 거 아닌가요?
                         
꼬꼬동아리 16-08-27 14:23
   
신문근거 맞아요 일본신문 국가보훈처 보관하고 있는걸 사실이라 믿고 있는 일뽕어그로입니다
                         
두리네이터 16-08-27 14:25
   
왜나라//링크가.안되니 주소 복사 븥여넣기해서 보세요.읽기자료에 보면 있는 내용들입니다.
                         
꼬꼬동아리 16-08-27 14:25
   
일제시대 가혹한 통치속에 국민들이  불만을 표출할 대상은 없고하니 저런일이 생긴걸 일뽕놈들이 아주 크게 부풀려 놓은거죠 그나마 저래 부풀려 적은글들도 결국 일부 사건일뿐이고
                    
꼬꼬동아리 16-08-27 14:21
   
당신글이나 다시읽고 댓글 다세요 아주 오지네요 오져 ㅋㅋㅋ
우리나라 염전노예사건 일어 났다고 우리나라에서 노예제도 시행하고 있습니까?  당신글 잘보세요 말하는게 딱 한가지입니다 그리고 어그로꾼들 일뽕들 하는짓을 그대로 하네요 논리적으로 반박한글을 완전 회피 쌩까고 다른논리로 돌려서  그글에는 반박안하고 다시 다른논점으로 가는거 당신 딱 그꼬라지입니다
두리네이터 16-08-27 14:41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total&no=11073913

★이츠이스(가입:2015-06-28 방문:102)
2015-10-17 06:12:46추천 1
저도 검색하다 발견했는데 ....

독립운동관 발행물중 한국동립운동의 역사라는 책중 형평운동 부부에서
백정들의 형평운동에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예천 사태에 관한 이야기에서 예천 형평분사의 활동으로 이런 이야기가 나오긴 나와요 ....

매년 7월 백중에는 농부들이 놀이를 열곤 했다. 이때 농악놀이를 하며 춤추던 농부들은 백정 부녀자 한 사람을 볼모로 잡아다 놓고 그를 풀어주는 대가로 고기나 소머리를 요구하는 풍습이 있었다. 만약 백정가족이 이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불모를 집단으로 폭행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악습철폐를
위한 노력도 다양하게 강구되고 있었다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jsp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1074

저술하신 분이 형평운동 쪽으로 가장많이 연구하신분 같은데 관련 논문은 유료라서 읽지 못했어요 ....
     
조신하게 16-08-27 14:57
   
그러니까 경북 예천 사건 말고 다른 기록이나 일차 사료가 있냐고 물어보는 겁니다.
shrekandy 16-08-27 15:07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sisa&no=617673


조선 초기


1. 백정의 아내를 발로 차 죽인 자를 교수형에 처함 ;
세종 33권 8년 8월 2일 (계해) 5번째기사

2. 백정 살인범을 아버지를 봉양하도록 형을 감함 ;
세종 34권 8년 12월 15일 (갑술) 5번째기사

3. 관군을 향해 활을 쏜 백정들을 치죄하되, 그 처자들에게 연좌하지 않음 ;
세조 5권 2년 8월 12일 (기유) 3번째기사

4. 백정을 구타하여 죽인 현감을 벌함 ;
세조 37권 11년 12월 28일 (신축) 2번째기사

5. 무고한 백정을 강도라며 억지로 취조한 현감을 벌함 ;
세조 45권 14년 3월 7일 (정묘) 7번째기사

  - 조선 초기에는 백정에 대한 기사가 많습니다. 특히 강도, 도적행위를 한 백정을 처벌한 기사도 많죠.
  - 반면, 위와 같이 나름 [신분제 질서의 밑바닥] 이지만서도,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를 보장한 내용들도 있습니다.


 



조선 중기

1. 백정을 고문,구타한 승려들을 사면함 ;
명종 31권 20년 5월 20일 (을묘) 3번째기사
사면한 사건이긴 하나, 백정을 구타/고문한 건을 경기 감사가 직접 챙기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공을 세운 백정에게 관직을 줄 것에 대해 논함 ;
선조 44권 26년 11월 5일 (을묘) 1번째기사
  천인이 군공으로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에 대해 논함 ;
선조 51권 27년 5월 8일 (을유) 7번째기사
왜란 중의 일이란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습니다만, 백정 등의 천인이 관직에도 오릅니다.

  - 슬슬 신분제 사회가 고착되어서일까요, 백정에 대한 기사가 매우 적습니다.
  - 1번 항과 같이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경기 감사가 사건을 다룰 정도의 일로 여겨졌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1. 혼인식에 관복을 입고 일산을 받친 백정을 가벼이 처벌하여 백성들이 관부(개성부)에 돌을 던짐 ;
순조 12권 9년 6월 5일 (갑오) 1번째기사

  - 신분질서를 어지럽힌 나름 엄청난 사건입니다.
    백성들이 관복을 빌려준 사람을 구타하고 백정의 집을 철거하였으나
    개성부에서 그 죄를 엄히 다스리지 않는다고 시위를 벌인 점을 고려하면
    해당 백정을 죽이는 등의 행패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사회가 백정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한들 저 짓을 국가가 두눈뜨고 방관했을것 같지는 않네요
     
두리네이터 16-08-27 15:16
   
http://m.huffpost.com/kr/entry/9782642#cb


그러나 수백년의 세월이 사람들의 몸에 새긴 습관의 벽이란 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었다
3.1항쟁의 폭풍이 온 조선을 휩쓸고 간 뒤의 어느 날, 진주 어느 동네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젊은이들 몇이 백정을 끌고 와 개를 잡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백정은 고개를 저었다. “못잡겠소.”

그때껏 백정을 사람 취급하지 않던 혈기방장한 젊은이들은 분기를 참지 못한다. “백정노무 자슥이 사람 말을 뭘로 알고.” 그들은 백정에게 사정없는 주먹질과 발길질을 퍼부었다. “어뜨노 인자 개 잡을 거재?” 하지만 백정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좌우로 흔들었다. 몽둥이찜질까지 퍼부어진 끝에 백정은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피가 거꾸로 솟은 백정의 이웃들이 일본 경찰에 달려가 범인을 잡아 처벌할 것을 호소했으나 일본 경찰은 백정들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부락민’이라고 해서 오늘날까지도 차별의 대상이 되는 천민 집단을 보유한 일본 경찰은 백정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한다. “백정은 호적이노 없으니 살인이 성립하지 않는다데스. 살인이라면 죽은 사람이 입증돼야 하는데 호적이 없으니 누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지 않소까.”

아마 백정들은 피울음을 삼키며 물러갔을 것이다. 백정을 죽인 사람 백정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shrekandy 16-08-27 15:49
   
이걸 지금 반박이라고...참...일제가 그지같은건 잘 알겠네요.

이게 도대체 조선시대 내내 백정각시놀음이란 유흥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함?
난 조선시대 기록을 들고왔더니 그쪽은 들고올게 일제시대 기록말곤 없죠?
페리닥터 16-08-27 15:37
   
백정이.....원래 사제계급이었지....최고계급인 제사장급....소는 함부로 잡는게 아님.
신라의 화랑들이....백정이라는 생각은 해 보셨는지?
백정들이...인종자체가 다름....백인들....저친구들이 백의민족이었지....샤먼들....지배층.
이게 고려.조선의 불교.유교에게....씹혀서 저렇게 된 것임.
두리네이터 16-08-27 15:55
   
     
shrekandy 16-08-27 16:06
   
이쯤 되면 말을 말아야겠네요.. 들여다 보니.이미 drum님께서 클리앵에 다 반박해놓으신거네...
     
조신하게 16-08-27 19:34
   
그러니까 백정에 대한 신분차별이 심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데요, 백정 각시 놀음에 대한 조선시대의 기록이나 문서 등의 일차 사료가 조선팔천 말고 존재하냐고 물어보는 거에요.
있다/없다로 답변하면 될 것을 계속 엉뚱한 답변만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논쟁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님 말대로 강상호 라는 분을 존경하려면, 그분의 업적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하잖아요, 그쵸?
          
두리네이터 16-08-27 20:18
   
저야 관련연구를 전문적으로 한 사람도 아니니 당연히 모르죠.하지만 경남도교육청 교과서나 국가보훈처 자료에 그런악습이 있었다고 하니 과거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수 밖에요.백정에 대한 차별이 일제시대에 일본의 영향으로 갑자기 생긴일은 아니잖아요?
               
조신하게 16-08-27 20:38
   
그러니까 님께서는 백정 각시놀음이

1. 일제시대 말고 조선시대초기부터 행해졌다라든가
2. 다른 지방에서 저런일이 있었다

라는 기록이나 일차자료가 있는지는 모른다는 거죠?
                    
꼬꼬동아리 16-08-28 00:51
   
임마 하루종일 다른 글은 반박조차 못하고 하루종일 댓글다는 짓이 일제시대 신문들고 와서는 이거봐라 하면서 댓글놀이 하는 덜떨어 진인간인데 덜떨어진 인간하고 말 하고있으니 같이 덜떨어 질까봐 저는 그만 댓글 달랍니다
이놈은  관심종자중에서도 특출나네요 일제시대 기사들고와서는 ㅋㅋㅋ
                         
조신하게 16-08-28 01:05
   
우리말 고운말로 대화하는게 이렇게 힘들줄은 몰랐네요^^
자료 보여달라하니 자신의 추측과 상상만 들이대니 참...
순대천하 16-08-28 00:49
   
융통성 없고 획일적이라는 군대를 예로 들자면 바로 옆부대랑도 문화가 다름. 심지어 예하부대랑도 군문화가 다름. 내가 훈련병때 그렇게 경례 연습을 했건만 막상 자대 배치 받으니 경례 금지. 

조선 왕조 500년간 없었던 기록이 일제 때 한 지역에 대해서 기록으로 나왔다고 조선 일반화시켜 폄하하는 수준ㅋㅋ 조선시대 기록들 보면 백정들을 동화시키려는 노력도 있었음. 아예 그런 악행이 없었다는게 아니라 제발 일뽕님들은 일반화의 함정에 빠지지 말길..
     
두리네이터 16-08-28 01:58
   
같은 해 5월 13일 진주에서 개최된 형평사 창립 축하식은 당시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천대받는 백정들을 해방시키자는 운동이 진주 최대의 공공장소에서 벌어졌다는 상징적 의미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형평사가 전국 규모의 사회운동 단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형평사는 백정의 인권 해방과 권익 옹호, 공평한 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백정의 호적 기록을 삭제하는 등의 활동을 펼쳐 창립 1년 만에 지사 11개소와 분사 67개소를 갖춘 대규모 전국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형평사가 전국 단체로 발전하면서 지도부 중심 세력에 변화가 생겨 창립 1년 뒤부터 본부를 진주에 두자는 진주파와 서울로 옮기자는 서울파로 나뉘었다. 결국 1924년 3월 천안에서 열린 조선형평사 혁신 대회에서 형평운동의 혁신과 본부의 서울 이전을 결정하였다. 다음 달 서울 도렴동 144번지에 조선형평사 본부를 설치하였고, 1926년 운니동 23번지로 조선형평사 총본부를 이전하였다.

================================

일부지방만의 악습이었는데 저항운동이 전국 수백개지회에서 수만명이 참가해 일어났었군요?
          
순대천하 16-08-28 05:33
   
신분제도의 타파를 위한 움직임 만으로도 그정도 인원은 당연히 모일수 있죠. 그게 전국적으로 저런 악습이 있었기 때문이다로 어떻게 귀결되는지 궁금. 대한제국 시절조차 신분을 따지지 않는 만민공동회라는게 있었고 당연 백정도 참가하였으며 심지어 대표적인 연설자가 백정 출신이었는데?
wjs76 16-08-29 14:53
   
지금 인권잣대를 옛날에 가져다 대고 잘했니 못했니 하면 안됩니다.

옛날이 잘했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당시엔 그게 전혀 욕먹을일도 지탄받을일도 아니었기 때문이죠.
세종대왕이 마누라만 수십명 데리고 살았다고 욕먹을일이 아닌것처럼요.
그당시 사고방식으론 그게 자연스러웠던 겁니다.
Centurion 16-08-30 00:05
   
흐음.. 저 시대보다 훨씬 뒤쪽인
일제강점기 때 광주에서도 왜인들이 조선 여학생들 성희롱했었죠.

요즘도 왜인들 툭하면 자기네 나라에서 성희롱, 성추행하면서..
길가다 여자들 치마 올리고 팬티 벗겨 가고 그러는 판이고..
모델시켜준다고 속여서, 유인해 여성을 집단으로 성폭행하고 촬영한 AV로 돈버는 야쿠자들이 활개치죠.

뭐.. 조선 사회의 미개함을 예시로 들자면, 요즘 일본은 거의 야만 오브 야만국???

세계 어딜가나  민족, 인종, 계급 차별이나 성추행, 성희롱, 집단성폭행 이런 미개한 부분은 많죠.
21세기에도 인도 같은 나라에선 그런 일이 많고..

근데, 조선 비하하려고 성진국 백성들이나, 짱개국 백성들이 그런걸로 지적하면 웃긴 일이지요.

그나마 성진국보다야 짱개국이 좀 집단성폭행 이런건나을 수도 있겠다만.
툭하면 들려오는 탈북녀들 인신매매, 성폭행 뉴스..
게다가 불륜했다고 길거리에서 상대방을 벌거벗기고, 조리돌림하는거 보면 기가 차던데요.

짱개국 자칭한족들은 특히 몽골족한테 초야권 뺏기고,
저것보다 심하게 능욕당하던 족속들이라 좀 불쌍하긴한데..
그러면서도.. 징기스칸은 위대한 중화인 이런 드립치며 정신승리 망상하는 애들이라. 더 웃기죠..

아 물론 이 글 쓴 분이 일본인이나, 중국인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소위 일뽕이나 중뽕, 혹은 저기 일본, 대만, 중국인들이
한국의  과거사를 비하하려고 저러는거 보면.. 가소롭다는 소립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Total 19,97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5320
19486 [기타] 파견형 매춘 클럽 OPPA...... (7) 뿍엑스 10-26 8967
19485 [중국] 알기쉬운 중국사 (20) 바토 07-09 8954
19484 [한국사] 여자치마를 벗기고 올라타는 놀이-백정각시놀음 (60) 두리네이터 08-26 8953
19483 [기타] 러시아 선제공격 합시다!! (42) 한국남자! 12-21 8951
19482 [통일] 고구려,백제,신라 리즈시절 최대 영토 (12) 슬러잼 10-13 8937
19481 명성황후? 명성왕후? (12) 프로메테우… 01-15 8930
19480 [기타] 중국 홍산문화와 양사오 문화, 랑주문화, 그리고 고… (16) Centurion 02-28 8927
19479 [기타] 고구려 정릉사 3D 복원 ㅎㄷㄷ 깝놀 (4) shrekandy 11-11 8924
19478 조용한 산골 온천 유후인 (7) 딩그 05-19 8919
19477 [일본] 일본 만화가 몰락하는 진짜 이유들 (10) mist21 06-24 8914
19476 [중국] 중국의 우리문화 잡아먹기.mp4 (11) Minitea 11-04 8912
19475 [통일] 지도)고구려의 주세력권이 마냥 압록강 이남이라는 … (4) 굿잡스 07-01 8909
19474 1편 好友의 시련 (3) shantou 09-21 8902
19473 [기타] 식민사관과 역사왜곡이 남긴 한국인의 분열과 지역… (2) 객님 11-27 8885
19472 요즘 중국이 한국8강 떨어진거 고소해한다는 얘기들.… (13) 5555 06-29 8874
19471 미국이 일본과 FTA하지 않는 이유 (19) anasq 12-09 8874
19470 롯데는 일본기업인가? 한국기업인가? (10) 바다 11-10 8866
19469 [중국] 중국 언어 지도.jpg (17) 한시우 06-12 8863
19468 [통일] 자금성(紫禁城)의 성(城)과 경복궁(景福宮)의 궁(宮)… (5) 굿잡스 09-03 8857
19467 [기타] 신라, 진한과 진나라의 관계.. 그리고 서이徐夷, 예맥… (10) Centurion 03-21 8840
19466 [중국] 한몽 연합은 사실상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15) 칼빈 05-22 8827
19465 [기타] 임진왜란과 혼혈 (14) 뽈큰 07-11 8826
19464 [중국] 중국 공청단 태자당 상하이방 (1탄) 내란의 원인! (12) 천하무적 03-26 8825
19463 일본 교과서에 후지무라 신이치 써있나요?? (2) 쪽바리꺼져 05-17 8820
19462 [중국] 여진족역사, 한국사편입주장에 사학계파장 (21) gagengi 07-02 8814
19461 [중국] 중국원주민 - 와족 gagengi 03-07 8810
19460 [기타] 신라 기마인물토기와 몽골족의 전통모자 상당히 닮… (8) 예맥사냥꾼 08-13 8804
 <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