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 따위야,, 상술에 불과한거고-.-
여아이돌은 학교공부를 제대로 안해서 그런거고,,
이미지 똥망된건 뭐,, 어찌보면 당연한거죠.
정규 교육을 안 받았다는걸 만천하에 공개된거니까..
게다가,
안중근이 무도같은 프로그램 할 정도의 인물은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애초에, 프로그램이 되고 안 되고는 제작진이 결정할 문제지..
님 취향에 따라,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게 아니잖아요?
님이 뭔데요? ㅋㅋㅋ안중근보다 님이 더 유명한 사람이라도 됩니까?
지금보다 더 존경받던 분입니다 지금은 메갈 일베 일뽕 님같은 중뽕들이나 이런 소리하지
90년대 선생님께서 열변 토하시던게 기억나네요
이순신장군님 보다 더 위대한 분이시라고 쓰레기 쪽본 수장 처리한 위대한분 이시라고 당신같은 사람 때문에 일베 메갈에서 테러리스트니 어쩌니 하는겁니다
독립운동가중 최고로 치는분이 안중근 의사입니다 님은 한국에서 교육받지 않아서 모르는것뿐.. 초등학교를 꼴등으로 졸업했어도 안중근은 다 알죠 어떻게든 한국을 깎아내리고 싶은데 별로 꺼리도 많지 않고 한국 까고 양파 속껍질을 벗겨보니 결과적으로 한족이 더 욕먹을 일이라 곤혹스럽죠? 개인적으로 중국은 인정하지만 한족은 대단찮다고 생각합니다 애써 한족의 흑역사까지도 중국이라는 이름하에 통합하여 정신승리하려는게 그쪽 민족의 교육목표같은데 낯짝 참 두껍네요 역겨울정도로..
안응칠 역사는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작성한 자서전입니다.
자신의 자서전에 위에 열거한 내용을 스스로 적는다구요?
위에 열거된 것들은 모두 전후 사정이나 정황을 모두 생략하고 악의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당시 일제가 이런 짓을 했지요. 안 의사를 영웅으로 만들어 줄순 없으니까.
그러므로 어떤 사실을 인증할 때는 팩트를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기생 관련한 일화에 대한 다른 분의 독후감을 잠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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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사는 기생하고 놀 때에, 기생들보고 돈 소리만 들으면 침 흘리고 정신 잃고 이 놈, 저 놈에게 치마 벌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생이 이런 말에도 오히려 안의사를 미워하는 눈빛이거나 공손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 기생에게 욕을 퍼붓기도 하고 매질도 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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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이르러선 전후가 어떻든 욕하고 때리면 안되는 것이지만 시대상이 오늘날과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뭐 그렇다고 하더라도 썩 잘한건 아니지만, 안의사의 기질이
옳지 못한 것에 대해 다혈질적인 성격이였슴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 하나....다 비판해 보시기 바랍니다....안응칠역사 읽어보시면...지자랑 뿐입니다.
유부남인 안중근이...친구 만나면 기생집에 가요....잘한겁니까?
안중근은 황성신문 애독자예요....동양평화론도 다 거기서 표절한 겁니다.
이사람이 이토를 죽인 이유는....이토가 일본왕 말 안듣는다고 해서 죽인거예요.
일본왕이 대한민국의 독립을 보장할 거라고 철저히 믿은 사람입니다....착각도 보통 착각이 아니죠.
얘는....친일본왕파 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님은 안중근이 차분한 선비가 아니라는 것쯤은....알고 있는거 같네요.
세뇌는....님이 된거예요.
안중근의.....최후진술...보여드릴께요.
안중근이 일본왕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 지.....잘 보세요....뭐라구 그러는지.
이친구는 마지막 진술의 자리에서도...포로로 대우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죽이지 말아달라....그 말입니다.....이게 독립운동가의 자세입니까?
최후진술
재판장
변호인으로부터 이미 상세한 변론이 있었지만, 피고들이 마지막으로 할말 있으면 진술하라.
안중근
나는 검찰관의 논고를 듣고 나서 검찰관이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하얼빈에서 검찰관이 올해로 다섯 살 난 나의 아이에게 내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네 아버지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는데,
그 아이는 내가 고국을 떠날 때 두 살이었는데
그 후 만난 적도 없는 나의 얼굴을 알고 있을 까닭이 없다.
이 일로만 미루어 봐도 검찰관의 심문이 얼마나 엉성한지,
또 얼마나 사실과 다른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번거사는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한일 관계와 관련해서 결행한 것이다.
그런데 사건 심리에 있어서 재판장을 비롯하여 변호인과 통역까지 일본인만으로 구성하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변호인이 와 있으니 이 사람에게 변호를 허가 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변론 등도 그 요지만을 통역해서 들려 주기 때문에 나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봐도 이 재판을 편파적이라는 비방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검찰관이나 변호인의 변론을 들어 보면,
모두 이토가 통감으로서 시행한 시정 방침은 완전무결한 것이며 내가 오해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부당하다.
나는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토가 통감으로서 시행한 시정방침의 대요를 말하겠다.
1905년의 5개조 보호 조약에 대한 것이다.
이 조약은 황제를 비롯하여 한국국민 모두가 보호를 희망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토는 한국 상하의 신민과 황제의 희망으로 조약을 체결한다고 말하며
일진회(一進會)를 사주하여 그들을 운동원으로 만들고,
황제의 옥새와 총리대신의 부서가 없는데도 각 대신을 돈으로 속여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이토의 정책에 대해 당시 뜻있는 사람들은 크게 분개하여 유생 등은 황제에게 상주(上奏)하고 이토에게 건의했다.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에는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인민들은 신뢰하며 일본과 더불어 동양에 설 것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이토의 정책은 이와 반대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최익현이 그 방책을 냈다가
송병준에 의해 잡혀서 쓰시마에서 구금돼 있던 중 사망했다.
그래서 제2의 의병이 일어났다.
그 후에도 방책을 냈지만 이토의 시정방침이 변경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황제의 밀사로 이상설이 헤이그의 평화회의에 가서 호소하기를,
5개조의 조약은 이토가 병력으로 체결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따라 처분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그 회의에 물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토는 한밤중에 칼을 뽑아 들고 황제를 협박해서 7개조의 조약을 체결시켜 황제를 폐위시켰고,
일본으로 사죄사를 보내게 되었다.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경성 부근의 상하 인민들은 분개하여 그 중에 활복한 사람도 있었지만,
인민과 군인들은 손에 닿는 대로 무기를 들고 일본 군대와 싸워 ‘경성의 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후 십 수만의 의병이 일어났기 때문에 태황제께서 조칙을 내리셨는데,
나라의 위급존망에 즈음하여 수수방관하는 것은 국민된 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점점 격분하여 오늘날까지 일본군과 싸우고 있으며 아직도 수습되지 않았다.
이로인해 십만 이상의 한국민이 학살됐다.
그들 모두 국사에 힘쓰다가 죽었다면 본래 생각대로 된 것이지만,
모두 이토 때문에 학살된 것으로,
심한 사람은 머리를 노끈으로 꿰뚫는 등 사회를 위협하며 잔학무도하게 죽였다.
이 때문에 장교도 적지 않게 전사했다.
이토의 정책이 이와 같이 한 명을 죽이면 열명, 열 명을 죽이면 백 명의 의병이 일어나는 상황이 되어,
시정방침을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의 보호는 안 되는 동시에
한일간의 전쟁은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토 그는 영웅이 아니다.
간웅(奸雄)으로 간사한 꾀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 간사로 꾀한 ‘한국의 개명은 날로 달로 나아가고 있다’고 신문에 싣게 했다.
또 일본 천황과 일본정부에 ‘한국은 원만히 다스려 날로 달로 진보하고 있다’고 속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동포는 모두 그의 죄악을 미워하고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을 즐기고 싶어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한국민은 십 수년 동안 도탄의 괴로움에 울고 있기 때문에
평화를 희망함은 일본 국민보다도 한층 깊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지금까지 일본의 군인, 상인, 도덕가, 기타 여러 계급의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내가 한국에 수비대로 와 있는 군인에게 ‘이같이 해외에 와 있는데 본국에 부모처자가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분명히 꿈속에서도 그들의 일은 잊혀지지 않아 괴로울 것이다.’ 라고 위로 했더니,
그 군인은 ‘본군 일이 견디기 어렵지만 어쩔 수는 없다’라며 울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동양이 평화롭고 한일간에 아무 일이 없기만 하면
수비대로 올 필요가 없을 것이 아니냐?’ 라고 물으니,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지만 필요가 있으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수비대로 온 이상 쉽사리 귀국할 수 없겠다’라고 했더니, 그
군인은 ‘일본에는 간신이 있어서 평화를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우리들도 마음에 없는 이런 곳에 와 있다는 것이다.
이토 따위를 혼자서는 죽일 수 없지만 죽이고 싶은 생각이다.’라고 울면서 이야기 했다.
그리고 농부와의 이야기는, 그 농부가 한국에 왔을 당시에 만나서 한 이야기이다.
그가 말하기를 ‘한국은 농업에 적합하고 수확도 많다고 해서 왔는데,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안심하고 일을 할 수가 없다.
또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이전에는 일본도 좋았지만
지금은 전쟁 때문에 그 재원을 얻는 데 급급하여 농민들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기 때문에
농업은 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있자니 이와 같아 우리들은 몸 둘곳이 없다’라고 한탄하며 호소했다.
다음으로 상인과의 이야기를 말하겠다.
한국은 일본 제작품의 수요가 많다고 듣고 왔는데
앞의 농부의 이야기와 같이 도처에 의병이 있고 교통이 두절되어 살 수가 없다며,
이토를 없애지 않으면 상업도 할 수 없으니 자기 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죽이고는 싶지만,
어떻든 평화로워 지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덕가의 이야기라는 것은 예수교 전도사의 이야기이다.
나는 먼저 그 자에게 말을 걸어 ‘이렇게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는 일본인이 전도가 되겠는가?’라고 물으니,
그가 ‘도덕에는 나와 남의 구별이 없다.
학살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자이다.
천제의 힘으로 개선시키는 수밖에 없으니,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해서도 일본인이 동양의 평화를 희망하고 있는 동시에
얼마나 간신 이토를 미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일본인에게도 이런데 하물며 한국인에게는 친척이나 친구를 죽인 이토를 미워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나의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얻기 위해 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이토가 그 시정방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을
일본 천황이 들었다면 반드시 나를 가상히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이후 일본 천황의 뜻에 따라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을 개선한다면
한일간의 평화는 만세에 유지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희망하고 있다.
변호인의 말에 의하면,
광무3년에 체결된 조약에 의해 한국민은 청국 내에서 치외법권을 가지니
본건은 한국의 형법대전에 의해 다스려져야 할 것이며,
한국형법에 의하면 처벌할 규정이 없다고 했는데,
이는 부당하며 어리석은 논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인간은 모두 법에 따라 생활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가 벌을 받지 않고 살아 남을 도리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법에 의해 처벌돼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는데,
이에 대해 나는 한국의 의병이며 지금은 적군의 포로가 돼 있으니
당연히 만국공법에 의해 처리돼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판장은 이것으로써 심리를 모두 마칠 것을 알리고,
판결은 오는 14일 오전 열시에 언도하니 출정하라는 뜻을 명하고 폐정했다.
메이지 43년 2월 12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서기 와타나베 요이치.
재판장 마나베 주조.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불법적으로 점유되었고,
본인은 그에 불복하여 일제를 상대로 개전한 대한제국의 의병 중장으로서
일제를 상대로 교전중에 체포된 군인 신분이니 정당한 포로로서 적법한 절차와
대우를 하라는게 왜 비난 받을 문제인가요.
부당한 절차와 대우를 받았슴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을 가지고
"죽이지 말아달라"는 말로 해석하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자신의 최후 변론에 "그래 내가 이토를 죽였으니 처벌을 달게 받겠다" 이랬어야 했단 말인가요?
미친거 아닙니까?
당신 일본인 입니까?
안중근 의사가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가요?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에 수립되었고 안중근의사의 거사는 1909년의 일이었습니다.
한일합방 이전의 일이었다 이 얘기입니다.
이토가 군인의 신분이 아니었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조선통감의 지위에 있던 그가 그럼
민간인이었습니까? 일제는 당시 대한 제국을 삼키려고 오만가지 불법을 일으키는 상황이었는데
그 시대적 상황을 읽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가상히 여긴다"는 말이 어떻게 "가엽게 여긴다"는 말로 해석된단 말입니까?
빨아대요? 안의사의 가치관을 당시 인사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시면 빨아댄다고
폄하할 내용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의병장이고,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의 주범을 처단한 영웅이 반드시 성인군자여야만 합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시대상이 일제가 대한제국 합병 전이라는 점입니다.
왜의 태황제를 시해한 이유가 이토를 죽인 원인중 제일 마지막에 나열됩니다.
그 이전의 항목은 눈에 안들어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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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 15가지.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상해임시정부는....제가 착각했습니다....상해임시정부가 아닙니다.
그 얘긴 제가 자료를 더 찾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상해임시정부가 아니라....정부관료 민...누구 입니다..
기억이 안나서 더는 말씀 못드리겠네요.
안중근이 댄 15가지 이유.....
이중에는 단 하나라도 이상하게 들어 있으면 안되는 겁니다.
제가 13가지 이유에 대해선 토를 안답니다....너무나 당연하니까.
그런데..
13. 15....뭐뭐 천황을 속인 죄...태황제를 죽인 죄....이 두가지는 아주 수상합니다.
안중근과 왜왕과의 관계는 뭘까?....안중근이 왜 왜왕을 끼워 넣었지?
아시다시피....왜왕은...한반도침략의 수괴 아닙니까?
왜 이런 이상한 게 들어 있는지....님 설명 가능합니까?
정부 각료 얘기는 하나마나한 얘기입니다.
당시 정부 각료중 제대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이가 얼마나 된다고...
당시 안중근 의사는 중국 의사와의 폭행 사건으로 쫒기던 중이었는데
별로 참조할만한 사안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시 시대상을 감안해야 한다고 제가 누누이 설명을 드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13, 15 항목이 뭐가 수상합니까.
동양 평화를 열망하는 안 의사의 입장에서 패악무도한 이토를 죽인 많은 이유를 열거하는 말미에
13. 이토가 자신의 수장을 속인 것이 죄의 하나다라고 선언한 것이고,
15. 이토가 태황제를 암살 사주한 범죄자임을 적시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대한제국인으로서만 아니라 만국공민의 자격으로도 이토는
죽어 마땅한 놈이라고 주장한 것에 다름 아닌데 이런걸로 안중근 의사를 폄훼해야 합니까?
일제의 만행에 치를 떤다는 분의 의견치고는 납득하기 어렵군요.
어찌 되었든 15가지 이유 중 몇 가지는....일왕 편에 서 있습니다.
나머지 이유도....다 일왕의 뜻은 이게 아닌데....이토가 그 뜻을 저버리고
다른 나라를 괴롭히면서 마치 아닌양 일왕을 속이므로....
일왕의 뜻을 위해 내가 처단한다.
이게 안중근 이토 저격사건의....본질입니다.
최후진술에서도 말하지 않습니까?.....일왕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했다고...
이말은 러일전쟁 참전시에 왜왕이 했다고 하는데...선전포고문에 그런 내용 없습니다.
잘못 알려진 사실을 철저히 믿고 있었던 거지요.
안중근이....일왕을 빨고 있었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청천백일...푸른 하늘에 밝게 빛나는 태양이래요.....웃기는 소리 아닙니까?
안중근...이사람은 우리가 보통 알고있는 그 안중근이 아닙니다.
자기의 신념이면 무슨 짓이든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항상 옳다고 하는 사람입니다....옳았던가요?
단순무식...말 많고 귀 얇고 술 좋아하고 주먹쓰기 좋아하는 사람....그게 안중근입니다.
그리고...무엇보다...이 친구...자기 동포를 많이 죽였습니다.
어느 독립투사가....자기 동포를 죽입니까?
자기 동포를 집단학살한 경력있는....독립투사 있으면...함 말해보십시요.
때는 1909년, 아직 대한제국이 국체를 보존하고 있었고 고종이 강제 폐위를 당하긴 했으나 멀쩡히 생존해 있던 시기입니다. 때문에 한, 일 양국을 막론하고 당시 사람들에게는 황제와 일황은 최고의 존엄이었을 것입니다. 1910년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의 상대에 대한 인식을 독립을 맞이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논리로 재단하려는 자체가 오류일 수가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최후 진술에서 러일전쟁에 대한 선전포고문에 대한 내용...
일본은 아예 선전포고 자체를 안했지요. 그러니 일본의 선전 선동에 놀아났다는 말은사실로 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철저하게 정보가 통제된 상황에서 어떻게 본말을 파악한단 말입니까. 안 의사가 무슨 전지전능한 초인이라도 됩니까?
청천백일은 안의사의 동양평화론에서 나온 걸 말하나 본데, (일제의 선동 책략에 속아) 그 명분이 (동양평화를 지향하고 동서대결의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내용이므로) 그 취지가 옳았었다고 표현하는 와중에 나온 용어인데, 진실을 알게되는 후대에야 그 말이 터무니 없는 것임을 알게되는 것이니 이것은 후세의 편협한 말꼬리잡기에 다름 아닙니다.
동포를 죽였다는 말은 안 의사가 조부를 따라 동학군 진압에 참여한 것을 말하는 모양인데 이 점은 안의사 일생에 있어 큰 오류로 남겠죠.
조선이 임진왜란때는 의병항쟁의 성과에 힘입어 국체를 존속하지만 구한말에는 대규모 동학농민운동이 있었슴에도 실패하는 원인은 서민과 권력층의 반목 때문이죠. 즉, 동학군의 투쟁상대가 양반과 지주계층이었고, 가진자의 방어 기전이 외세를 끌여 들여서라도 진압을 하는 방향으로 흐른 슬프고 부끄러운 역사의 한 장면입니다.
동학에 대한 얘기는 너무 범위가 크니 안 의사 직접적인 관련 있는 부분만 얘기한다면,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안의사의 동학군 토벌 참여는 분명 일생의 오점이지만, 그 때가 안 의사가 16살이었을 때의 일이고, 그 시대의 흐름이 특권층과 서민층의 대립이었다는 점 등은 참고할 사항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무결점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학교설립, 항일투쟁, 이등박문 사살로 이어지는 그의 생애와 사상으로 세상은 그를 영웅이라 평합니다. 그의 동학군 토벌 참여를 세상사람들이 몰라서가 아니라.
보통은 대한의병 중장으로 옳은 일을 했으니....쓸데없는 짓 하지말구....나를 죽여라.
뜻있는 독립투사라면....그렇게 말해야 하는 거죠?
안중근이...그렇게 말한 건...아닌거죠?
이에 대한 대답은...어머니 조마리아가 했습니다.
잘한 일이니...목숨 구걸하지 말고 죽어라.....다음세상에선 착한 천부의 아들로 태어나라.
어머니는...안중근이 어떤 애인지...누구보다도 더 잘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재판에 임하면서....안중근이 어떻게 나올지....어머니는 알고 있었다고 봅니다.
구차하게 목숨 구걸하지 말아라.
선량한 천부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라....이건 뭔말로 보이십니까?
어머니에게...안중근이 어떤 아들이었는지...눈에 안보이십니까?
착하게 태어나라...
이것도....시대상을 따져야 합니까?
나참 이거....이봉창 검색하다....열 받는 일...또 하나 생겼읍니다.
기대를 저버리네요...이 자식도.
이 자식....오늘부로 독립투사에서....제낍니다....아주 지랄이 창궐이네.
최후진술 보세요.
[문] 피고인은 올해 1월 8일의 흉행을 현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답] 나는 형무소에 수용된 후
불교 이야기를 듣거나 불교 책을 읽거나 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한 결과
나의 사상은 내가 사바 세계에 있을 때와 아주 다르게 변했습니다.
나는 김구로부터 부추김을 받아 결국 그런 마음이 생겨
천황 폐하에 대해 난폭한 짓을 했습니다만
오늘에는 굳이 김구를 원망하지는 않으나
그 사람의 부추김에 놀아난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나의 어리석음으로 엄청난 짓을 해
참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 조선 독립 문제에 대해 현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답] 형무소에 들어가고 나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조선의 독립이라는 것은 전혀 실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독립 문제에 대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 그렇다면 조선인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가?
[답] 조선인은 대체로 미신적이지만 진정한 신앙은 없고
또 이해력도 낮다고 생각합니다.
생활 상태, 문화의 정도도 아직 내지(일본) 사람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나는 종교로 조선인을 이끌고 정신 수양과 인격 양성 방면으로 힘써 간다면
조선인도 점점 발전해 내지인과 서로 이해하고 융화하여
피차 일본 국민으로서 유쾌하게 생활해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이건 또 뭐야!!
안응칠 역사(安應七 歷史)는 안중근(安重根)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哈爾賓)에서 이토(伊藤博文)를 저격한 뒤, 여순감옥에 수감된 그 해 12월 13일부터 적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910년 3월 15일 탈고한 자서전적인 옥중 수기로 《안중근의사 자서전》이라고 흔히 말하기도 한다. 안응칠은 안중근의 어릴 때의 이름(아명)이다.[1]
목차
원본 편집
책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그 동안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등초본 등이 차례로 일본에서 공개되어, 1970년과 1979년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 《안중근의사 자서전》이라는 제명으로 번역·간행하였다.
내용은 목차 구분없이 1879년 7월 16일(음력) 탄생에서부터 가족의 일화, 생장과정, 동학당 퇴치, 천주교 입교, 지방관의 학정과 부패에 대한 저항, 교육구국운동, 의병전쟁 참여, 이또우 저격, 검찰과 재판관의 심문과 공판과정, 그리고 1910년 2월 1일(음력) 마지막 천주교성사에 이르기까지의 일생을 기록하였다.
이 책에서는 애국계몽적인 차원에서 시작하여 민권의 자유가 실현되는 문명 독립국으로의 개혁을 염원하는 사회의식과 민족주의적 애국사상으로 변모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2]
이와는 별도로 1914년 중국 상해에서 발간한 안중근의 전기로 박은식(朴殷植)의 안중근전(安重根傳)이라는 책자가 있는데 대동편집국(大同編輯局)에서 발간하였다. 한문으로 저술되었으며 저자는 창해노방실(滄海老紡室)이라는 필명을 쓰고 있는데, 그 내용이 『한국통사(韓國痛史)』의 해당부분 내용과 거의 같은 점이 특색이다.
원고 자체는 1912년에 완성되었다. 이 저술은 1920년 상해의 『독립신문(獨立新聞)』에도 4회에 걸쳐 일부가 연재된 바 있고, 그것은 『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 중에도 실렸다. 『안중근전』은 관련사진과 나남산(羅南山)과 주호(周浩) 등 중국인 6인의 서문에 이어, 서언과 28장의 내용 그리고 결론으로 안중근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1]
평가 편집
안중근에 대한 전기는 1920년 이전에만도 박은식, 김택영, 계봉우 및 중국인 정육(鄭淯) 등에 의해 편찬되었으나, 《안응칠 역사》는 본인이 직접 기술한 자전이라는 점에서 그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는 평가이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 《안응칠 역사》와 《동양 평화론》을 지었다. 그중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는 완성되었지만, 논문형식의 논설 《동양 평화론》은 '서문'과 '전감 1'만 지어졌고 나머지 '현상 2', '복선 3', '문답'은 목차만 제시된 채 미완성으로 남았다. 당시 안 의사가 이를 집필하기 위해 사형집행 날짜를 한 달쯤 늦추도록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에게 청하여 그의 약속을 받았으나 결국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동양 평화론》의 서문에서 안 의사는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지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 황인종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의론이 한국·청국 두 나라 사람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위ㆍ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若政略不改 逼迫日甚則 不得已寧亡於異族 不忍受辱於同種 議論湧出於韓淸兩國人之肺腑 上下一體 自爲白人之前驅 明若觀火之勢矣. 然則…)이라 하여 일제의 침략정책을 경고하여 안중근 의사의 생각과 뜻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세계정세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논리가 엿보이는 내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1]
민비는 민씨 일파의 상징일 뿐이고,
실제 문제를 일으킨 사람에 민비가 포함되는지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으로 봅니다.
청나라에 대한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타의에 의해서 즉위하고 마지막 황제가 되는
푸이가 청나라 말기의 부패와 멸망에 대한 책임을 벗어나기는 힘들지 몰라도
푸이가 망국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요?
이건 의자왕의 3천궁녀 때문에 백제가 망했다고 이야기하는 일부 식민사학자와 똑같은 태도 입니다.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차례대로 떨어졌다는 것이 신빙성이 별로 없는 이야기인 것 처럼
민비가 민씨 일가의 전횡에 앞장 선 나쁜 여자라고 하는 것도 신빙성이 별로 없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