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시작
조선 시대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의 하나로는 중국의 왕조에 대해서 사대정책을 취하는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이전부터 친명책(親明策)을 표방하였으며, 개국(開國)하게 되어서는 즉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새 왕조의 승인을 청하고 국호도 화령(和零)·조선의 둘을 지어 보내서, 조선이란 국호를 선택 받아 사용할 정도였다. 그러나 명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권지고려국사 權知高麗國事」란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 朝鮮國王」의 금인(金印)을 받아 정식으로 왕(王)에 책봉된 것은 1401년(태종 1)에 이르러서였다.
그 뒤로 국왕의 즉위에는 반드시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되었고, 죽었을 때에는 이를 알려서 시호를 받았으며, 또 종속(從屬)의 상징으로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한편 성절사(聖節使)·천추사(千秋使)·정조사(正朝使)·동지사(冬至使) 등 정기적인 사행(使行) 및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형식적으로는 정치적인 종속관계를 맺게 되었다.
조선이라는 나라이름도 명나라가 골라준 것이다.
새로운 조선왕이 즉위할때도 반드시 명나라의 허가가 필요했다.
연도를 나타낼때도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국왕의 의복
조선의 왕의 의복은 빨간색 , 명나라 황제의 의복은 황금색.
의복에 있는 용의 수는 명나라 황제 9마리 , 조선 왕 4마리.
이는 곧 조선의 왕은 '명나라 황제를 섬기는 신하'라는 뜻을 갖는다.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꿇고 항복하는 조선왕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은 명나라가 망하자 자주독립국이 될수있는 기회가 왔으나 청나라에게 굴복하였다
청나라 황제는 조선왕에게 3배 9고두를 요구.
3배 9고두란
상복을 입고 3번 큰절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꽝꽝 박아 그 소리가 단 위에 앉아 있는 청 태종에게 들
리게 하는 것으로, 3배 9고두를 마친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철철 흘려내렸다.
조선은 명나라에 이어 릴레이로 청나라까지 황제국으로 섬겼다.
1602년 서양인 Matteo Ricci에 의해 만들어진 지도.
1602년 서양인 Matteo Ricci에 의해 만들어진 지도.
조선을 명나라의 속국으로 표기한다.
영은문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조선왕은 영은문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서쪽을 향해 서고 5번 절했다.
조선왕은 명나라 사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며 머리에 꽃까지 꽃았다고 한다wwww
훗날 이을 허물고 '중국으로부터 독립한다' 라는 의미로 독립문을 세우지만,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다'라는 의미로 알고있는w
청나라 관리에 머리박고 절하는 조선 사신
청나라를 섬기던 조선의 모습을 볼수있다.
태극기
한국의 국기인 태극기.
가장 오래된 태극기는 상단에 '대청국속', 즉, '청나라의 속국' 이라는 글자가 써있다.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애초에 태극기의 음양문양과 팔괘는 중국의 것을 그대로 가져다 쓴것이다.
조선의 왕 고종이 청나라에 보낸 서신
" 지금 이 나라가 천조(天朝)를 섬겨온 지 200여 년이 되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황
은(皇恩)을 입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근래에 와서 시국이 일변하면서 외교 관계가 더
욱 넓어져가나, 이 나라는 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면서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홀로
지냈습니다. 이런 때에 천조에서 이끌어주고 일깨워주며 친목을 도모하고 협약을 토의
체결하여 서로 의지하게 했으니, 여기에서 천지가 만물을 덮어주듯 지공무사(至公無私)
한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
조선왕이 스스로 중국을 천조로 섬겼다고 언급.
조선은 중국의 속국임을 국왕이 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