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6-08-11 02:09
[한국사] 검술에 관해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는게 있음
 글쓴이 : 새연이
조회 : 5,844  

한국이 일본보다 검술이 뒤쳐졌다라고 생각하시는분 있으신데요
그거 일제강점기 시대에때 일본이 세뇌시킨겁니다
절대 고대부터 우리나라 검술은 일본에 뒤쳐지지 않았습니다
현제 남아있는 검술이 본국검법 밖에 남아 있지 않고 모두 사장되어
복원이 불가능하지만 본국검법은 1대 다수를 상대할때 사용하는 가장 기초적인
검술이며 지금의 장교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익힌걸로 알고 있음
당시 활이 한중일 세나라중에 가장 위력있었고 보편화 되어 사용을 많이 헀던것뿐

한중일 세나라중 사인검의 제작기술은 우리나라 밖에 없음
그정도로 검제작의 기술을 보유한 나라가 검술이 별로 었다는것은
어불성설이고 일제시대에 모든 교본들이 불태워 없어져 수련이 불가능할뿐
지금 마상전투라던지 화랑도를 연구하고 복원을 할려고 하지만
그때 끈어진 맥은 어떻게 찾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저보고 뭘아냐고 하시는 분이 있을거 같은데요
저도 왕년에 선수생활도 하고 지금도 수련을 하고 있는 입장으로 이야기 해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인왕 16-08-11 02:36
   
뭐 그건 그때 안살아서 알 수 없지만 정조때 무예도보통지에 보면 조선세법(예도) 본국검(환도)가 소개되지만 정작 교전편은 왜검이지요. 다른 무기도 대부분 명의 절강병들의 무기나 용법이구요. 그리고 당시에도 조선의 검예가 쓸만한것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요? 조선이 중앙집권이 강화되면서 검을 들고 다니는 것은 바로 역도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발전이 없고 명맥이 끊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죠. 그까이꺼 편곤으로 후려버리면 되지 하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르지만...ㅎㅎ
     
새연이 16-08-11 02:44
   
조선에서 검의 명맥을 끈겼다는건 처음 들어 보네요
검은 들고 다닐수 있었지만 한성에서 들고 다닐수 없었던거죵
조선의 검술교본은 왕성에서만 있는게 아닐텐데요
     
G스마트SM 16-08-11 03:15
   
조선세법.인  고유의 검술은  존재 했던걸로  기억합니다.
검선  김광택의 아버지 이자.  당대  뛰어난 검호  였던  김체건은  강화도(?)에서  고씨 성을  지닌  무사에게 조선세법을  배웠던걸. . 기억되네요.  젊은시절에는  왜검술을 수습하고 훗날 관직에  올ㅇ랐을때는  사신단을 쫒아  중국도  다녀왔던걸  추측하면.  당시  동아시아 3국의  기예를  지녔을 가능성도  높았지  않나 싶네요.

이  맥이 전승되어.  김광택에서  백동수로  이어졌다면. .가히. .  아

폰으로  쓰는거  빡쎄.
     
스코티쉬 16-08-11 14:57
   
정조가 단순히 조선의 검예가 쓸만한게 없다고 한게 아니라,
무예도보통지 편찬 당시 예도총보의 근간을 조선세법에 두면서,
"우리의 것을 다른 나라(중국)의 기록(무비지)에서 되찾아온것"을 한탄한겁니다

오히려 명나라 장수 모원의가 중국의 역대 병법서를 총 망라해 240여권의
<무비지>라는 병법서를 만들때 기록된 유일한 검법이 조선세법의 검보였습니다
모원의는 교예편에서 이 검법을 일러 "중국에서는 이러한 예를 찾을수 없다"며
"귀인을 통해 조선에서 얻어온것"이라고 기록해둡니다.

<무비지>의 기록이, 이후 모든 중국 검법의 이론적 근간이 되면서
중국 어느 문파의 검법도 기본에서는 조선세법의 24세를 벗어나지 않게 되죠.
칼을 쓰는 기본은 여기서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대 일본검도의 형성에도 조선세법이 영향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교전편의 왜검은 우리나라의 총검술이 북한의 창격술을 상정해서 만들어진것과
같은 이유라고 봅니다. YTN사이언스의 조선의 도검을 다룬 다큐에서 처럼,
도검의 외형에서도 왜도를 상정해 조선의 칼 역시 검신의 길이가 길어지고
전통적인 조선의 도검과 중국과 일본의 도검의 장점과 단점을 분석해
조선만의 새로운 일면평조형도신이 만들어지기도 하죠.

대부분의 동아시아사가 그렇듯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했던겁니다.

아래는 신성대의 무예이야기
http://www.dailian.co.kr/news/view/89859
꼬꼬동아리 16-08-11 03:50
   
김명순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큰 활약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시대라는 특성과, 전란의 시대라는 악재가 겹친 결과이다. 김명순의 본관은 절치(絶値), 자는 염계(染界), 호는 천호(泉湖)이다. 기록에 따르면 김명순은 키가 5척 정도에, 자기 키만한 장검을 주로 썼다고 전해진다. 무관 집안의 맏아들이었던 김명순은 선조 때에 무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마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후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피난하자, 5월경 금강산 언저리에서 자기 마을의 장정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김명순은 주로 지리를 활용한 기습 공격을 하였는데, 전승에 따르면 '3일 밤낮을 말을 타고 주위를 둘러본 끝에야 비로소 그는 전략을 세우고 병사들을 배치하였다' 라고 적혀 있다.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대부분의 기습 공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서술에 있어 놀랄 만한 부분은 그의 신기(神技) 라고까지 칭해지던 검술이다. 작전에 있어서의 신중함과는 달리 그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검을 들고 선두에 서서 돌격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여주에서의 패배 이외에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서술에 따르면, '그의 검은 유려한 나비처럼 지나가며, 초생달 같은 호를 그리며 적을 베었다... 적은 신기와 같은 그 검술에 속수무책으로 떨어져 나갔고, 마치 표범 같은 그의 움직임에 적은 총을 맞추지 못했다...' 라고 쓰여 있다.



그의 의병대는 이후 응단(鷹團)이라 불리며 각지에서 소규모 기습 전투만을 감행했고, 그로 인해 커다란 전투에는 김명순의 이름은 올라 가지 않게 된다. 병사들에게서 불패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 불리던 김명순은 이후 그 공적을 인정받지만, 전쟁 동안에 겪은 아들의 죽음 때문에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고 홀로 산 속에 들어가 은거하게 된다. 그리고 김명순의 이름은 그의 은둔과 함께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된다.

개개인의 역량은 최고였다 보여집니다 원앙진 창기술에의해서 일본검술같지도 않은 검술은 전부 파악되어 격파됩니다
이정도 실력에도 무과에 낙마 했다면 두가지입니다
무과에 있던 장군급이 정말 무에 달관하신 분들이 많았거나
실력을 제대로 볼수없는 평가관들이 배치되었거나
제생각은 일본처럼 유파를 만들지 않아서 그렇지 개개인으로 자식에게만
전승되어오던 검술같은건 발군이였던걸로 보여지네요
현재도 지리산에서도 검술이 내려오고 있던데 이번대에 끊어진다하던데
많이 아쉬운 대목들입니다
Centurion 16-08-11 04:11
   
윗분들이 설명하셨듯이..
본국검(신라검술)은 님 말씀대로 다수를 상대하기 위한 검법으로,
이를 설명하는 영상도 있었죠.

다만, 임진왜란 시절이 되면,
이미 조선조정이 심각성을 느낄만큼 백병전 무예,
특히 검술이 심각할만치 무너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역사를 보더라도, 삼국시대나 고려까지만 해도
백병전 무예들이 전혀 떨어졌다는 느낌을 받지 않죠.

특히 고려 무인들만 하더라도,
여진족 추장들을 검과 방패로 쓸어버린 척준경이라던가.
도끼나 기타 무기를 활용했던 고려 무신 정권의 인물들..

이렇게 백병전 스킬이 무너지게 된게..
저는 고려 후기, 조선 초기로 보고 있습니다.

조선태조 이성계가 명궁이었고,
몽골 원나라 군사 문화 속에서 성장했던 집안이었죠.

몽골은 아시겠지만, 몽골기병으로 유명한데..
몽골도 물론 창을 쓰는 중기병과 궁기병으로 나눠져 있었지만,
활의 이미지가 강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조선은 보병 위주의 고려와는 달리,
몽골 기병을 모델로 한 기병위주의 군사력을 갖춘 나라였구요.

이게 다시 세조 시절로 넘어가면,
중기병/궁기병으로 나눠진 기병체계가 대부분 궁기병 스타일로 바뀌게 됩니다.

조선인들은 선비들도 활쏘기를 즐겼고,
활의 위력에 흠뻑 취한 원거리 덕후들이 많았기 때문에..
굳이 칼을 맞대는게 필요한가? 이런 생각이 많이 퍼져 있었거든요.

그러니, 무과를 치뤄도, 말타기와 활쏘기 위주였으니..(전형적인 몽골기병 스타일)
사람들의 피지컬은 좋긴 한데, 백병전 스킬이 딸릴 수 밖에 없었던거죠.

일본 전국시대를 보면..
백병전 스킬에는 능한데, 활은 그 습기 많은 기후로 인해 크게 발달을 못합니다.
일본식 활은 사람키만 하죠. 근데 사거리가 조선 복합궁에 비해 훨씬 떨어집니다.
그래도 나름 자기들도 오래전부터 활의 장점을 잘파악했었으나, 육성하기가 쉽지 않았죠.

일본은 또한 말타기 기술 즉, 마상무예가 많이 발달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일개 사신단에 있던 사람들이 마상무예를 선보이며 일본 무사들이 놀래곤 했다죠.

(일본 전국시대 만화 센고쿠를 보면 만화 초반에 주인공이 마상창을 하니까
상대편 적군들이 다들 까무러치듯 놀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거 할 줄 아는 기마무사가 그만큼 드물다는 얘기였죠. 이거 나름 고증이 꽤 잘된 만화입니다)


이게 결국 국가별로 군사문화의 취향의 차이인 것이죠.
신라시대 김유신만 하더라도 검술을 연마하려고 산속에서 수련하며,
바위를 칼로 베었다는 그런 전설이 내려오기 까지 하는데.. 조선에선 그런 인물들이 잘 없었습니다.

어쨌든 고려후기, 조선초기가 기존의 검술이 좀 맥락이 끊어진 시기로 보입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시즌이 되면,
이를 조선 조정에서 백병전 스킬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좀 기울이게 되는데,
원군으로 온 명나라군에서 척계광의 기효신서, 원앙진과 무예들을 배우기도 하고 그러지요.

어쨌든 훗날 이런 바탕 위에 무사 백동수란 드라마에도 나오듯..
사도세자와 정조에 걸쳐서 만들어진게 무예 18반 + 마상무예 6반 해서 총 24반 무예지요.

지금도 대한민국에 각종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여러 분야에 걸쳐 존재하지만, 배우고 기술을 계승하려는 사람이 없으면,
전통이 있다한들 확산되지 않고, 심지어 단절될 수 밖에 없는것과 마찬가지죠.
영웅문 16-08-11 06:26
   
사인검과 검술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사인검을 만든다고 검 제작기술이 뛰어나다는 의미도 아니고요.
     
새연이 16-08-11 06:30
   
읽어보시면 사인검 같은 검 제작기술이 있는 나라인뎅
검술에 약하다는건 어불성설이라고 헀을건데요

검술이 약한 나라에서 검무늬를 넣는 기법을 사용하는곳이 있을까요~

사인검을 제작할수 있다는 소리는 일반적 검의 내구도가 뛰어 났으니

검의 치장에 신경을 쓸정도의 기술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새연이 16-08-11 06:31
   
검술이 약한곳에서 검제작 기술이 발전할수 있을까요??
          
mmoo 16-08-11 09:17
   
사인검이 실전용 검도 아니고 그냥 주술적인 의미에서 제작한 검입니다. 거기에 무늬를 넣던 아예 구멍은 내던 그것이 검술이 뛰어났을거라는 반증은 전혀 못됩니다.
          
mmoo 16-08-11 09:28
   
물론 조선 중기 이전에는 뛰어난 검술이나 검술의 달인들이 존재했겠지요. 세조가 무과를 궁시중심으로 재편하면서부터 검술은 거의 시망상태가 되어버리지만.
          
영웅문 16-08-11 22:51
   
사인검에 대해서 너무 잘못알고 계시는 거 같네요.
사인검은 호랑이해에 호랑이 달에 호랑이 날에 호랑이 시간에 만들어진 검이 사인검입니다.
이것을 철로 만들기엔 무리가 있기에 나무로 만들죠.
즉, 칼싸움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호랑이의 기운으로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 진 주술적인 의미의 칼이죠.
길잃은농부 16-08-11 07:03
   
어디 다큐에서 봣는데 동북아 최강 검술이라던 무예보통지16편? 이런 검술 교본도 있던차라..
검술로만 본다면 일본이 우리를 상대로 게임이 안돼었죠..
그런데 일본과 우리의 진형을 보면 일본은 도적때들 출신들이라.. 일반 사병까지 검을 기본으로 하는 백병전에 능했던건 사실같고.. 우리는 창을 주로 쓰는 방어형 체계라는겁니다.. 그도 그럴게 성에서 공성전을 위한 무기 체계라.. 일반 보병들은 검보다는 창을 더 많이 가지고 있던걸로 보여집니다..
     
아뒤도업네 16-08-11 09:42
   
무예도보통지는여러 군사무술교본들을 종합해서  만든 군사훈련용 교본일 뿐입니다. 검술 뿐만아니라 창,편곤, 마상무예,권법,격구등이 들어가있구요.
애초에 무예보통지는 임진왜란 한참 후인 정조때에 만들어졌고, 만든 이유자체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경험한 조선의 취약한 단병접전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에서 들여온 [기효신서]와 이 책을 본 떠 만든
[무예제보],그외에 [무예신보],[무비지]등을 기초해서 만들어진겁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병사들이었던 아시가루들의 주무기는 장창(야리)이었습니다.
단순한 도적패였다면 조선이 임란 초반에 그렇게 허망하게 뚫리지는 않았겠지요.
          
길잃은농부 16-08-11 16:02
   
저도 본적이 있는거 같은데 야리라는게 긴막대끝에 긴창 즉 칼을 장착해서 쓰던 병기였던걸로 압니다..
               
Centurion 16-08-11 20:31
   
그건 아마 나기나타일겁니다.
나기나타가 여자들이 배우기도 쉽고 상당히 위력적이라서 좀 무시당하는 그런 게 있었죠.

쇼군토탈워 2 해보면 주로 승병들이나 여자로 만들어진 부대가 들고 나옵니다.
보통 일본군들은 날이 일직선 형태나 십자창 형태를 많이 썼죠.

http://www.orctown-store.com/web/product/big/bootchim_822.jpg
     
아뒤도업네 16-08-11 09:52
   
조선은 주변환경이 정상적이라면 검술이나 무예를 발전시킬 수 있는 환경을 가진 국가가 아닙니다. 고려시대 때나 일본처럼 지방영주와 사병이 존재하는 사회라면 모를까,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인 조선에서 국가차원이 아닌 개인이나 지방차원에서의 무술의 발전을 꾀한다는것은 지방세력의 자치화나 지방관들이 사병을 육성한다는 걸로 보일수가 있으니까요. 중국만큼 국토가 거대해서 지방컨트롤이 어렵다면 모를까 맘먹고 발걸음을 옮긴다면 수도에서 한달안에 어디든 이동이 가능한 조선에서는 무리였습니다. 이런 조선의 사회는 내부적으로 전시대의 고려나 삼국시대보다 훨씬 더 안정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만큼 외부의 침략에는 상당히 취약해졌습니다. 애초에 일본이  땅덩이나 인구에 비해 기형적으로 무술이 많이 발전했다는 것은 그만큼 전쟁이 많았고 사회가 불안정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영웅문 16-08-11 22:56
   
무예도보통지엔 외도, 쌍수도등이 있는데요..
이것은 일본의 검법을 참고해서 만든 겁니다.
쌍수도의 경우 동북아 중에 왜구만이 사용한 것으로 나오는데요.
중국해변에 출몰한 왜구들이 휘두르는 칼이 중국의 장수가 쓰는 창의 길이와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예도보통지는 조선시대에 정조때 만들어 진 것이고 총 24편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스카라스 16-08-11 08:04
   
말씀들인 즉슨,
일대다수를 상대하는 신라검술이 그러하듯이 본래 한민족은 검술에 능했다.
그러나 몽골의 지배 이후 조선의 이성계가 몽고군식 기마무사를 양성하기로 했다.
그로서 야인들이 벌벌 떠는 조선기마병이 탄생했지만, 검술은 쇠퇴하여 왜정 때 회복불능수준의 소실이 됐다.

허나 일본은 활도, 기마전술도 발달시킬 수가 없어서 검술이 발달하여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본래 한민족의 검술은 일본검술에 절대로 지지않는다.

인데요...
궁금점이 있습니다. 고구려는 북방기마민족과 맞닿거나 섞여 사는 사람들이었고, 기마전술에 강했습니다.
그렇다면 통일신라나 고려 때도, 고구려의 기마전술이 그대로 내려오지않았을까요? 제생각에, 기마전술과 검술, 궁술이 비등하게 전해내려오다가 이성계에 의해 검술빼고 전부 계승한 거 같습니다.
남아당자강 16-08-11 12:57
   
군대의 훈련병 시절에 상무에 배치 받기전의 태권도 청대출신 훈련병과 같이 내무반 생활 했었습니다. 태권도 수업을 받는데 교관이 품세를 해보라니까 다 까먹고 기억을 못한다네요. 그친구 말이 시합에 나가면 오로지 앞차기 옆차기에 속임수 동작만 빠르고 정확하게 구사하기 위해 죽어라 연습한답니다. 앞돌려차기 마저도 동작이 커서 수준차가 많이 나는 선수에게나 쓸수 있지 어느정도 수준의 선수에겐 반격당하기 쉽상이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더군요. 검술이라 해봤자 실전에는 빠르게 베기와 찌르기 외에는 다 쓸모 없는겁니다. 뛰어난 검술..... 이런건 무협지에나 나오는 것이고요. 보여주기 위한 쑈일뿐 쮜어난 검사란 빠르고 정확하게 베고 찌를는 검사이지 뛰어난 검술을 익힌 검사가 아닙니다.
     
인왕 16-08-11 15:53
   
정답!
     
Centurion 16-08-11 20:35
   
일본 서남전쟁에서 메이지 정부군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사쓰마 시현류 검술이 무척이나 단순하죠.

나무 하나 세워놓고 닳아 없어지도록 그냥 죽어라 내려치기, 옆치기만 익히는데..
실전에선 막아도 별 소용없었다고 할만큼 강력했다죠.
페닐 16-08-11 16:32
   
진짜 대부분의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건데.. ....

평화를 사랑한 종족은 이미 다 멸망당했음
지금 있는 나라들은 최소한 동네 골목 대장이라도 했던 나라들임.

그리고 금속 문명을 거쳐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
특히 근대이전에 건국해서 현대까지 이어져온 모든 나라는 저마다 고유의 무술이 있고 검술이 있고 체계화된 훈련 체계를 갖고 있었다고 봐야함..
루리호 16-08-11 17:09
   
전쟁에서 검술이야기를 하는것만큼 멍청한게 없습니다.  무슨 소드마스터도 아니고요    일본은 200년가까이 전란중이였어요 각번에 칼질좀하고 사람좀 죽여본놈이 수천명입니다.    우리나라는 그 200년동안 공자왈맹자왈했구요    검실력 상위 1% 한 수백명정도는 일본놈보다 검술좀할줄아는 사람있을지도모릅니다.  근대 임진왜란떄 일본 병력이 10만에 달하고 대부분 무기는 조총위주였는대  검술이 뛰어나다 그런이야기가 웃기는거죠 애초에 전쟁초기 일본군에게 밀린게 일본애들 칼떄문이아니고 조총때문인대말이죠
     
구름위하늘 16-08-11 17:36
   
조총은 우리나라 활 만큼 (또는 그 보다) 더 비싼 무기 입니다.
일본군의 조총수 비중은 10% 이내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머지는 90%의 대부분 장창수 였고,
아주 적은 소수의 특수조(특공대?)들이 도검을 들었죠.

임진왜란 때를 보여주는 드라마나 영화의 문제는 일본군 대부분이 조총으로 무장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과 검을 들고 날뛰는 모습을 주로 보여준다는 것이죠.

전쟁 초기에 일본에 밀린 것은 조총 때문만이 아니라,
양국 병사의 훈련 수준이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돌격해오는 적의 장창 방진의 기세에 눌려서 자멸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조총 소리와 위력에 익숙하지 못한 점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조총에 비하여 크기는 크지만 소리와 위력이 더 높았던 총통을 많이 사용했던
조선군이 그 소리와 위력에 당했을 것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조총은 활에 비하여 무기로서의 잇점은 있지만,
그 차이가 아주 크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일본이 조총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본의 기후와 제작 기술이 활과는 안 맞았다는 거죠.

전후 조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조선의 기록에 쓰여있는
전투 시 조총과 활의 적정 사거리는 100보와 90보로 그리 차이가 없습니다. (총통은 200보)
냉면제국 16-08-11 17:29
   
검술은 전쟁용이 아니라 대결용 왜인 특화 학살용이죠. 다만 당시 왜도가 명과 조선에 영향을 미친건 사실. 긴 길이의 검. 그나마 전쟁에서 써먹을 수 있게...
머리 하나 작은 왜인들이 2m 내외의 칼을 들고 설쳐대는걸 보면 아무리 왜인이라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먹을 수 밖에.. 이순신 장군의 칼들중 쌍수도가 왜도 영향을 받은 칼이죠. 물론 실전에서는 안 썼다는게 정론.
유수8 16-08-11 19:09
   
비홍검만 실전되지 않았어도.... 쨉들은 이기어검술로 죄다 싹둑 싹둑 잘라버리는건디..... 쩝....;;
국산아몬드 16-08-11 19:15
   
조선이 백병전에서 밀렸나요? 전쟁초기 4개월간 밀린 것 외에는 항상 왜군을 압도했습니다. 백병전에 밀렸다면 어떻게 1년만에 왜군을 남해안까지 밀어냈을까요
영광의 16-08-12 13:06
   
사무라이하면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숑몽이 떠오르는데ㅋㅋ
칼리 16-08-12 15:01
   
골 때리는 논쟁이네.

애당초 실전에서는 검술이란 게 딱히 소용없기에, 검술을 중히 여기지 않은게 보편적임.

가장 중요한 건 궁술(총 이전)이고, 그 담이 창같은 장병기임. 검술은 딱히 중요시 할 이유도 없었슴.

검이란 무기는 의례용일 정도로 딱히 실전에서 선호되지 않았고요.
끵끵이 16-08-13 09:43
   
경쟁이 없는 무술은 발전할수 없습니다
자기들끼리의 경쟁이 아닌 여러 유파, 무술들과 경쟁하고 스스로도 대련을 활성화해야
비로소 발전이 되죠. 이는 현대의 각종 투기종목들에서 고스란히 증명되고 있는 실정이구요
지속적인 내전 및 도장문화 등에서 많은 유파가 생겨나고 계속해서 경쟁과 대련을 거듭하면서
발전해온 일본의 검술이 폐쇄적인 일인전승식의 한국 무술보다 못하다는건 거의 판타지죠
이걸 사실이라고 믿으려면 어느정도로 도수높은 국뽕을 들이켜야 가능할런지.......
 
 
Total 19,97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5399
2665 [중국] 환상의제국 고조선 (3) 홍익인간 01-08 5134
2664 [필리핀] 이자스민, 죽은 남편과 올해 8월 31일 혼인신고 (12) doysglmetp 04-11 5134
2663 [중국] 조선족이 아예 존재 자체가 중국인에 흡수되는 것이. (8) 현실론 01-05 5135
2662 [기타] 우리가 몰랐던 한글 (12) 정헌대부 01-20 5135
2661 [기타] 한국친일파들과 일본우익들의 공통점. (3) ade 03-18 5136
2660 [중국] 중국이 미국을 넘는다면 한국을 중국에 속국으로 살… (32) 피지컬러링 09-03 5137
2659 [일본] 저명 핵물리학자 고이데 "일본 여행 자제를" (2) 굿잡스 02-01 5137
2658 [일본] 노상방뇨와 똥 천국이였던 19세기 일본 (4) 햄돌 11-24 5137
2657 [세계사] 약 2천년전 유럽의 건축기술 수준.jpg (26) 레스토랑스 10-19 5137
2656 [북한] 북한은 차라리 중국품에 안기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17) 미르 01-14 5138
2655 [다문화] 조선족 보이스 피싱 고백 (14) 토수니 06-04 5138
2654 [기타] 독립군 때려죽이던 매국노 찬양한 이병도!!! (33) 정의의사도 03-29 5138
2653 [중국] 중국이 일본에 본토 다 먹혔을 때 외세의 도움이 없… (12) ewd3374 08-16 5138
2652 [세계사] 아랍제국 군대 모습 (3) 두부국 05-21 5139
2651 [다문화] 외국인 노동자와 원조교제 소녀들 (4) 이지스 11-10 5140
2650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선생님 (9) rina 01-13 5141
2649 [기타] (충격)중국도 알고, 일본도 아는데..한국인들은 아직 … (10) ㄴㄱㄹ 05-17 5141
2648 만약 OO만 아니었다면 산업혁명은 한국에서 일어났을… (27) 야비군 07-05 5141
2647 [기타] 대조영은 그저 난세가 만들어낸 영웅? NO!! 고구려 경… (2) 예맥사냥꾼 08-02 5141
2646 [중국] 실망이다 중국 !! (댜오섬 관련) (21) 불꽃 09-21 5141
2645 [일본] 日 '한국전쟁 경제효과' 보도 (25) doysglmetp 04-21 5141
2644 [기타] 고구려가 당나라를 선제공격한적이 있나요? (13) 대은하제국 08-09 5141
2643 [기타] 중국이 그렇게 고구려를 목숨걸고 자기네꺼라고 이… (7) 대은하제국 04-29 5142
2642 [기타] 일본만화가 만도 못한 한국사학자들 (6) 두부국 02-09 5145
2641 [몽골] 서양인들이 우리나라에 대해서 한말중에 (17) 보조도조도 04-25 5145
2640 [기타] 라텍스군 오랜만이네 (6) 라텍스방가… 05-08 5146
2639 [중국] 중국이 오로지 남한만을 한국이라고 부르는 이유 (23) 정상인임 12-14 5146
 <  641  642  643  644  645  646  647  648  649  6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