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의 용도가 중요하죠.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상업국가입니다.
물류가 중요하죠. 국가가 안 하더라도 돈 좀 있는 동네 유지들도 자기 동네 도로 보수 할 정도로 물류가 중요한 시기였지만,
잘 알다시피 조선은 상업을 천시하죠.
물류가 발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조선시대 물류란 거의 대부분이 조운선..
어차피 일년에 몇번 쓰지도 않을 도로를 위해 안 그래도 빡센 백성을 동원해서 욕먹을 필요없으니 안 하는거고요.
사람 삶의 가장 기본은 농업이죠.
사실 농업이 잘 만 되도 적당히 풍족하게 사는데는 지장없다는게 이미 역사적으로 충분한 근거가 있으니깐요.
조선시대 이전 고려시대까지 국가를 지지해왔던 세력은 모두 상인 세력입니다.
상업은 문화의 유통과 발전도 시키지만 반대로 끊임없이 권력의 사유화를 부추기기도 하고 국가의 불안정을 자극하기도 하죠.
대표적인게 장보고죠.
고려도 상인의 힘이 보통이 아닌 나라였습니다.
전라도 한 지역의 도자기 수출액이 고려 정부의 일년 세입을 능가할 정도였으니 말 다한거죠.
고려시대의 혼란상의 궁극의 원인은 왕권의 지난친 약화에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피난 갔을때도 왕을 보호하기 보다는 왕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겠다는 호족들의 공격에 크게 혼쭐이 난적이 있죠.
이후 무신정권은 뭐..
결국 사적 권력의 핵심은 돈(상업)이란 점을 조선은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업을 압박한 것이죠.
도로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건설하는 것이 아니고 군사와 정치적인 관점에서 건설 하는 것 입니다.
따라서 굳이 내륙으로 군사력을 투사 할 필요가 없거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날 염려가 없으면 도로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럼 왜 근세조선시대에 육상도로를 만들지 않았나 하면은 내륙으로 군대를 투사할 이유가 없어서 라고 보면 되는 것 입니다. 반면에 조운등의 해상운송 수단은 발전 하였으니 근세 조선은 해양 국가이고 육군보단 해군이 강한 국가 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여기서 이해가 안되는 것이 바로 임지왜란인데 근세 조선은 허준의 동의보감에서 베트남의 약제가 최고다 라고 할 정도로 임진왜란 전 후 까지 동남아 해상 무역권을 장악한 강력한 해상 국가 이었는데 왜 사전에 일본이 도해 하는 것을 막지 못했냐는 것 이지요. 조선은 앞에서 말했듯이 해상국가로 해군이 육군보단 훨씬 국가로 만일 일본이 상륙하면 굉장히 곤란을 겪는 가는 것을 예상 했을 터인데 왜 도해를 허용 했냐 하는 것이 의문이라는 것 입니다. 한마디로 선조가 무능한것이 아니라 당시 사대부가 무능하고 부패 했다는 말입니다.
조선은 육군을 키우질 않았기에 도로가 필요 없었던 것 뿐 이며 당시대 모든 나라가 경제적이 관점에서 도로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인 이유로 도로를 건설 하였던 시기 입니다. 그리고 군사와 정치적인 이유로 도로를 건설하는 것은 지금도 마찮가지 이고요. 한일해저터널을 건설하면 그냥 그대로 끝으로 착각하는데 도로는 이해 당사자의 영토로 간주 되기에 만일 일본이 한일 해저 터널의 안정이 심히 손상을 입을 것 같아서 한반도에 출병 해도 아무런 국제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도로란 군사적인 목적과 정치적인 목적으로 건설하는 것이고 도로가 건설되어서 경제에 영향을 주는 것인데 이는 주요소가 아닌 부가적인 요소란 말입니다.
지형적 요소 크다고 봅니다. 고조선, 고구려 시대에는 유물, 유적 및 벽화에서도 수레가 발견되는게 심심치 않습니다. 바로 만주지대가 지평선이 보일만큼 산지보다는 평지가 많았고 도로를 만드는 것에 지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편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반도 특히 남부까지 내려가면 산이 안보이는 곳이 없죠. 산을 피해 돌아가는 도로를 만든다고 해도 바퀴로 지나가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 발이 산지를 뚫고가기엔 수레보다 부피나 이동력에서도 훨씬 수월합니다. 이동수단의 퇴보가 아닌 이동수단의 선택이라 여겨집니다.
조선을 설계했던 기초가 국민들의 상공을 누르고 즉, 욕구와 충족자체를 억제하기 위해 일종의 공산주의적 공동생산 공동분배로서 민중을 기중 평준화시켜 내부적 분쟁을 억제하고 문화적 정신적으로 성리학을 통해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이였습니다.
즉, 삼봉이 생각했던 조선의 베이스는 물류나 상공조차도 억제된 자급자족에 만족하는 나라였습니다. 더 강하거나 발전되기를 바란게 아니라 애초에 나쁜것 욕심은 막고 성리학적 교화를 하겠다는 사상이었죠. 더불어, 조선은 건국초기 명과의 교역이 대대적으로 활성화된 상태도 아니고 명확하게 상하관계라든가 평화상태라든가 아직 부정확한 상태였습니다.
남으로든 북으로든 도로를 정비한다는 것이 자칫 군사적인 준비를 하는 모양새로 보일수도 있었고 반대로 그 도로를 역으로 두들겨 맞기 쉽다고 판단했죠. 실제로 초기에는 군권장이던 정도전이 고려조의 분권화된 군사를 왕직할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군사훈련과 사건들을 빌미로 조선이 명에 대한 도전을 준비하는 것이 아닌가란 의구심에 외교적 마찰이 있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