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6-07-11 16:54
[한국사] 서양문명의 뿌리
 글쓴이 : 스리랑
조회 : 3,752  

01.jpg
서양사는 아시아 문명이 모태

20세기 초중반 미 컬럼비아 대학의 유명 철학자였던 윌 듀런트(1885∼1981)는 1930∼50년대 지식인들에게는 중요한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 지식인들은 그를 통해 철학과 역사의 교류에 눈을 떴다고 평자들은 풀이한다..... 그는 유럽과 미국은 아시아 문명의 응석받이이자 손자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조상인 동양의 풍요로운 유산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꼬집는다.
 
종래 서양사 중심의 서술 행태를 지적한 것이다. 듀런트는 “서양의 이야기는 동양에서 시작된다. 아시아가 가장 유서 깊은 문명의 장으로 유명해서가 아니다. 동양의 문명들이 서양의 시작인 그리스 로마문화의 배경과 토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이어 “그리스와 로마가 현대 지성의 모든 원천은 아니다”면서 “서양 문명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발명품들, 예컨대 서양의 정치 기구 및 경제 과학 문학 철학 종교의 뿌리가 이집트와 동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라울 따름”이라고 했다.....출처: 세계일보 - 2011년7월15일 

 
IMG_137827142202.jpg
서양 중심의 세계사는 가짜다. 

리 오리엔트 = 다시 동방으로 !!!
저자 프랑크는  유럽중심주의의 잘못된 시각을 수정하고 세계사에 관한 사고의 틀을 완전히 재정립할 것을 요구한다. 2000년 미국사회학회로부터 ‘올해의 책’으로 선정 된 바 있는 이 책은 서구의 발전과 세계체제의 기원에 관하여 근본적인 재인식의 기회를 제공하는 혁신적이고 흥미진진한 프랑크의 역작이다......
 
" 오리엔트" "빛은 동양에서".
세계 문명의 근원은 동양이었고 동양 역사의 시작이 곧 세계 역사의 시작 이었다.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는 이러한 "엄연한 사실"을 강조하며 유럽 중심주의에 빠져있는 역사관과 세계사를 수정 하기를 요구한다.  우선 프랑크는 유럽 중심주의에 대해 거세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0년 남짓이다. 그 이전, 그러니까 1800년 이전까지는 아시아가 세계를 주도 하고 있었다.
 
1800년 이전 변변한 자원도, 풍부한 자본도 없었던 유럽은... 자원과 자본뿐만 아니라 기술 역시 1800년 이전 유럽은 아시아의 기술에 미치지 못했다.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계기는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발전한 기술 때문이었다.... 출처: 경향신문 - 2003년 03월 07일

 
200505cult_20803.jpg
존 M. 홉슨 저 / 정경옥 역 / 에코리브르 / 2005년 1월/ 18,000원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아니라 동도동기(東道東器)
동양과 서양의 문명적 특징을 축약해 흔히 동도서기(東道西器)란 말을 쓴다. 그러나 이 책을 보고 나면 이 말은 동도동기(東道東器)로 바꾸어야만 할 것 같다. 정신문명은 물론이고 기계문명마저도 그 발원지는 동양이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동양이 서양과의 문명발달 경쟁에서 근소한 시간적 우위를 점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역사의 전 과정을 통틀어 ‘숙련된’ 동양에서 ‘미숙한’ 서양으로 ‘모든’ 인문적 지식이 ‘전수’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이 전수목록에는 원천기술뿐만 아니라 거의 완제품 수준까지 아우르고 있다. 저자가 참조하고 인용하는 사료와 자료들은 충분히 치밀하고 방대하다. 따라서 구태여 저자가 존 M.홉슨이라는 전형적인 서양인 혈통이란 걸 내세우지 않아도 된다. 이 책의 진정한 목적은 그러한 문명발달의 원조 논쟁에 있지 않고, 인류문명에 있어서 동양의 명백하고 압도적이었던 문명사적 역할이 얼마나 축소되고 은폐되어 왔는지를 밝히려는데 있다. 그 과정에서 서양이 자기기만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부터임도 알게 된다.
 
 
동양은 ‘창조’ 서양은 ‘모방’
“서양 사람들은 독일의 발명가 구텐베르크가 문명에 혁신을 가져온 인쇄기를 최초로 세상에 소개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그림자 뒤에 숨은 진실은 이동형 인쇄기에 사용하는 최초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것보다 적어도 50년은 먼저 한국에서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 중)
 
흔히 인류의 3대 발명을 화약, 나침반, 인쇄술이라고 한다. 이 발명품들은 모조리 동양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서양으로 전수되었다. 앞서 저자의 서문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구텐베르크는 인쇄기술을 독자적으로 연구해낸 것이 아니라 동양에서 입수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고정관념의 먼지를 털어 내어야 한다. 그것은 동양과 서양은 훨씬 오래 전부터, 아니 역사의 전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교류를 지속해왔다는 것이다.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교류는 일방통행이었다는 점이다. 즉 서양은 늘 문명의 수혜자였다. 동양은 ‘창조’하고 서양은 ‘모방’했다. 사실상 근대까지도 유럽인들의 기술수준은 모든 분야에서 동양에 비해 아주 조악했다.
 
한 유럽 지식인은 그의 저서 『위대한 우(禹)임금과 공자(Yu le Grand et Confucius)』에서 ‘유럽이 17세기에 이르러 마치 ‘유전자 대혁명’을 겪는 것처럼 일대 변신을 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뉴턴 등을 비롯한 대과학자들의 세기가 열린 것이다. 이와 동시에 동양은 더 이상의 ‘창조적 지식’의 출현이 없는 까닭 모를 정체기로 빠져들게 된다.
 
케플러(1571∼1630) 1619년 《우주의 조화》 출간
뉴턴(1642∼1727) 1687년 《프린키피아》 출간
데카르트(1596∼1650) 1637년 《방법서설》 출간
파스칼(1623∼1662) 16세에 《파스칼의 정리》 발표
보일(1627∼1691) 1662년 ‘보일의 법칙’ 발표
라이프니츠(1646∼1716) 1663년논문 《개체의 원리》 발표
페르마(1601∼1665) 17세기 최고의 수학자
 
 
서양인들의 모방과 착취
문제는 서양인들이 주도권을 쥐자마자 그것을 남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비약적인 발흥은 단순히 동양에 대한 지적인 부채에만 기인했던 것이 아니다. 서양은 식민지화를 통해서 무상의 노동력과 자원, 무엇보다도 독점에 가까운 시장확보라는 이중 삼중의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저자는 영국의 산업혁명 또한 동양으로부터 이러한 경제적인 이득뿐 아니라 기술적인 모방까지 동원되었다고 말한다. 현대문명을 말함에 있어서 수학(數學)의 중요성을 빼놓을 수는 없다.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진 오늘날의 십진법 수 체계 그 외에도 항해술, 조선술, 천문학, 도로망 등 세계를 이미 하나로 만들었던 교통수단은 그 어느 것도 동양인들의 지적산물이 아닌 것이 없다. 콜롬부스가 신대륙이라고 착각하고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작명하기 훨씬 이전부터 동양을 비롯한 소위 제3세계인들은 전세계를 누비고 다녔다.(이하 생략)  
 
 
lov4ever_141810_1[166006]04.jpg
※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가 쓴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가람기획)는 로마 사람들이 왜 “빛이 동방에서 왔다”고 생각하였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프린스턴대학 교수로 그 동안 메소포타미아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보였다.직접 유적 발굴에 나서 큰 성과를 이룩하였는가 하면 유적의 내용을 자세히 분석하여 그 동안 학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최근 120여년 동안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약 5,500년전에 오늘의 서양문화의 뿌리인 수메르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연구가(울리,크래머,EH 번즈)들의 결론은 수메르 민족이 고산족의 특성을 가지며 동방에서 왔다는 말을 한다. "하늘 산을 넘어왔다"의 기록은 천산 산맥을 넘어서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 영국의 『대영백과사전』은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동일한 교착어(膠着語)로서 어근(語根)을 같이 한다고 하였다. 교착어는 단절어(單節語)의 단어에 각종의 접사(接辭)가 붙어있는 언어라는 뜻으로서 교착어에는 접두사(接頭辭)ㆍ접미사(接尾辭)가 밀접히 붙어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히브리대학 조철우교수도 한국 언어학회 논문 [수메르語·國語古語文法 범주 對照分析]에서 같은 주장을 했다.
 
※ 수메르 민족은 머리털이 검고  체구가 적으며 후두부가 편편하다. 지구랏이라는 제천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사용한 설형문자는 태호복희의 8괘부호와 흡사하다. 동이족처럼 태음력과 60진법(60갑자)을 사용했다.
 
※ 수메르 인들은 검은 머리의 용모에 한국어 같이 교착어인 수메르어를 썼다. 또 종교 신앙 가운데 지구랏이라는 제천단과 한문화의 흔적들이 그들이 남긴 유적 유물들에 뚜렷이 남아있다.(전,한신대교수 김상일,[인류 문명의 기원과 한])
 
 
※ 수메르 문명의 진면목을 밝혀주는 무수한 점토판은 영국 대영박물관과 프랑스 루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 주인인 인디언이 동북아에서 베링 헤협을 건너 북아메리카로 건너갔다는 사실은 언어,혈액형, 체질, 치아 모양등의 과학적 연구 방법을 통해 이미 밝혀진 것으로서 미국인 고고학자나 인류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모세의 5경인 구약의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에 쓰여진 제사음식.性행위.종족번식.사회규율 등의 율법은 그 제정 유래 및 각 법조(法條)의 형식과 내용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이 함무라비法과 같다고 한다. 함무라비法의 기원은 바로 인류최초의 법전인 수메르법전이다. 수메르의 길가메시라는 족장이 기록한 길가메시 서사시는 그 내용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거의 같다.
 
IMG_142936282605.jpg
대한민국 태극기의 유래는 태호복희(太昊伏犧,BCE 3528~ BCE 3413)씨가 송화강에서 하도(河圖)를 계시 받아 지금의 태극기의 팔괘를 최초로 그으신 분이다.
태호복희씨는 배달국 5세 태우의(BCE 3511~ BCE 3419) 환웅천황의 12번 째 막내 아들이다. 태극·음양·오행·팔괘의 창시자이다.
 
1에서 10까지의 수 체계를 하도河圖로서, 이 지구촌 인류문화사상 처음으로 1에서 10수의 자연수를 발명을 한 것이다. 이게 무슨 아라비아인들 또는 중동 인도 유럽에서 처음 나온 게 아니다.
 
 
지금의 동지,소한,대한,입춘,우수,경칩..24절후와 해시계 규표를 태호복희씨가 처음 발명한 것이다. 따라서 주역周易은 뒤에 역학을 계승 발전시켜 나간 성인들이 문왕, 주공, 공자, 소강절, 김일부 인데 모두 동이족 혈통 출신이다. 주역周易이라 불리게 된 것은 복희 8괘가 후일 신농씨를 거쳐 주周나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용봉문화원류』의 저자 왕대유는 “태호 복희(太昊伏犧)는 인류문화(人類文化)의 태일신(泰一神)이다”라고 말했다. 강택민 주석이 천수시에 ‘희왕고리(羲王古里)’라는 글을 써준 이후 천수시를 복희씨의 고향으로 정해 버렸다.
 
중국에서는 '태호복희'씨를 '인문지조,人文之祖'(인류문명의 뿌리,조상)이라 존칭한다.
이맥(李陌1455~1528, 중종 14년(1519년) 찬수관撰修官)의『태백일사太白逸史』에 의하면 태호 복희씨는 배달 신시에서 태어나 송화강에서 팔괘를 그으시고 산동성 어대현(현재 미산현)에 묻히셨다고 하였다.
 
59042_5345606.jpg
「제왕세기」에 따르면,
복희씨는 ‘구이에서 태어나 성기(成紀)에서 자라고 어대현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신락시에 황제헌원의 손자 제곡고신(帝嚳高辛, BC 2435 ~ BC 2365)께서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세운 최초의 복희묘(墓)’가 있다.

 
배달의 동방 9족(九夷) 가운데 풍이(風夷)족 출신.
제5대 태우의 천황의 12대 막내아들(「태백일사」의「신시본기」에 기록)
하도(河圖)를 계시받아 한민족의 국기인 태극기의 팔괘를 최초로 그은 동양 역철학(태극·음양·오행·팔괘의 우주관)의 창시자이며, 우주의 변화원리를 음양논리로 처음 밝힘. 따라서 주역은 중국이 아니라, 우리 민족에서 시작된 것이다. 뒤에 역학을 계승 발절시켜 나간 성인들(문왕, 주공, 공자, 소강절, 김일부)도 모두 동이족 혈통출신. 주역이라 불리게 된 것은 복희 8괘가 후일 신농씨를 거쳐 주나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동양 한의학의 시조, 염제신농(炎帝神農, BCE 3218 ~ BCE 3078)
염제신농씨는 백가지의 약초를 맛보아 동양의학을 창시하여 경농과 의학의 창시자로 불리었다. 그는 중국의 농업 ·의약 ·음악 ·점서(占筮) ·경제의 조신(祖神)이며, 중국문화의 원천으로 알려져 있다.
 
염제신농은 배달국 제8세 안부련(BCE 3240 ~ BCE 3167)환웅의 신하로서 웅씨족의 후손이었던 소전(少典)의 아들이다. 중국 섬서성 강수(姜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을 강(姜)씨로 정하였다. 소전少典의 아들 중에 첫째가 염제신농씨이고, 둘째가 '욱勖'이다. 욱勖의 10세손이 황제헌원(BCE 2692 ~ BCE 2592) 이다(사마천의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강감금단(綱鑑金丹)에 따르면 고시씨(高矢氏)는 초대 거발환(BCE 3897~ BCE 3804)환웅 때의 주곡관(主穀官)으로 농업을 주관하였다. 그후 고조선 시대에도 고시라는 분이 농사일을 주관하였다. 이후 수천 년 동안 들에서 농사짓고 산에서 나무하던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는 항상 음식을 던지며 "고시례" 또는 "고수레" 하고 고시씨高矢氏에 대한 은혜를 잊지 못하여 형성된 풍습이 면면히 전해 내려온 것이다. 고시씨高矢氏의 방계 후손인 소호금천少昊金天(BCE 2598 ~ BCE 2514)은 황제헌원의 맏아들로 황제를 이어 임금이 된 오제五帝 중의 한 사람이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 소호제(少昊帝)의 자(字)는 청양(靑陽)이며 성(姓)은 희(姬)씨이다. 이가 곧 현효(玄효)이며 궁상(窮桑)을 다스리다가 제위(帝位)에 올라 곡부(曲阜)에 도읍하였다"라고 하였고,

사마천의 사기에도 황제헌원의 맏아들이 현효, 청양靑陽 이라 했으며 그 주석에서도 현효(청양)가 곧 소호(少昊)라 하였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에는 오제(五帝)에서 빠져 있어 황제의 계통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소호는 황제헌원의 계통을 이은 전욱고양과 대립 관계에 있었고 태호 복희의 다음 가는 사람이란 뜻에서 소호(少昊)라 하고, 금덕(金德)에 의해 임금이 되어 금천(金天)이라 하였다(중국고금 지명 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소전(少典,염제신농의 아버지) → 공손씨(公孫氏,소전의 후손) → 황제헌원)"황제(黃帝)는 백민(白民)에서 태어나고...그는 동이東夷족에 속한 사람이다." -중국: 초사-
 
성씨의~1.JPG

갈홍(葛弘)의 포박자(抱朴子)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昔有黃帝 東到靑丘 過風山 見紫府先生 受三皇內文 以劾召萬神
황제가 청구에 와서 풍산을 지나다가 자부선생을 만나 삼황내문을 받아 만신을 부렸다. 부연하자면 일찍이 황제는 14대 자오지 천황(치우천황;서기전 2707-2599) 때, 배달국의 수도인 청구(靑邱: 오늘날의 요령성)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삼청궁(三淸宮)에 들러 치우천황의 국사(國師)인 자부선사(紫府仙師)를 뵙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음부경(陰符經)이라 불리우는 삼황내문(三皇内文)을 전수받았다. 이것은 황제 학문의 맥 자체가 우리 동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공자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하였다. '나는 기술을 한 것이지 창작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면 공자는 누구의 사상을 기술했느냐, 중용 30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仲尼 祖述堯舜 憲章文武 ', 즉 중니(공자)는 요순의 가르침을 기술했으며 문무의 도를 법으로 삼아서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자가 요순의 도를 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말하는 요임금은 황제헌원의 고손자로서, 황제헌원이 현효를 낳고 현효가 제곡고신을 낳았다. 이 제곡고신의 아들이 바로 요임금이다. 황제헌원은 사기 13권을 보면, '黃帝生於白民 自屬東夷'라 해서 동방의 백민에서 출생을 했다고 되어있다. 황제헌원은 배달국 8대 안부련 환웅 때 이복형인 신농씨와 함께 동이족에서 분파해 오늘날 중화족의 정신적 시조가 된다.
쟀~1_1~1.JPG

 

순임금에 대해서는 맹자가 말하기를 '舜生於諸風 遊於負夏 卒於鳴條 東夷之人也', 즉 순은 제풍에서 태어나 부하에서 살다 명조에서 죽었으니 동이인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나오는 지명인 제풍, 부하, 명조는 모두 동이족의 땅이었다.
 
서경(書經)에 '東巡望秩 肆覲東后'라 해서, 순임금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산천에 제사지내고 '동방의 임금을 뵈었다'는 구절이 있다. 사근동후(肆覲東后)에서 근(覲)은 강희자전(康熙字典)에 하현상(下見上), 즉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뵙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동후(東后)는 단군왕검을 말한다. 즉 고조선의 제후 순은 동방의 천자인 단군왕검을 찾아뵈었다는 뜻이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上)]을 보면, "나(공자)는 은(殷)나라 사람이다"는 내용이 나온다. 공자가 태어난 곡부(曲阜)지역의 산동성 일대에서 살던, 흰옷을 입고 백색을 숭상한 은족(殷族)이 전형적인 동방조선족 계열의 동이족이라는 사실은, 중국학자 서량지나 임혜상도 말하고 있다.

※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은 그의 저서《고조선(古朝鮮)》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대(漢代) 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 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燕)나라나 주(周)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 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 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또 "중국의 역사가들은 연나라가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연나라의 역할을 과장해서 표현해 왔다."고 하였다.
 
※ 일본학자 고교 기요히코는 사마천의 사기 25권은 단군조선이 중원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벌인 것이다. 한나라의 漢이라는 국호자체도 옛날 삼한조선의 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간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 세계적인 석학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독일,1889~1976)는 프랑스를 방문한 서울대 철학과 박종흥 교수에게 내가 당신을 초대한 이유는 당신이 한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유명해진 철학사상은 바로 동양의 무(無) 사상인데, 동양학을 공부하던 중, 아시아의 위대한 문명의 발상지는 한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역사상 가장 완전무결한 평화적인 정치를 2천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동안 아시아 대륙을 통치한 단군시대가 있었음을 압니다. 그래서 나는 동양사상의 종주국인 한국인을 존경합니다."라고 하였다.
 

1963년 6월28일 주은래周恩來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경백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 였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모욕하면서…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 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중국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여러분들 과학원 분들이 중국'조선관계사 문제에 대해서 공동으로 연구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중략
 
배달국(倍達國,B.C 3,898~ 2,333년)은 신시배달(神市,1~ 13대 환웅)과 청구배달(靑丘,14대~ 18대 환웅)로 나누어지는데, 신시(神市)배달은 제1대 배달(倍達) 환웅(桓雄)께서 B.C 3,898년에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건국이념을 가지고서 백두산 신시(神市)에 개국한 것을 말한다.
 
18대 환웅
재위기간
수명
신시배달(神市1~13대 환웅)
 
1대 거발한 환웅(居發桓, B.C 3897)
      (일명 배달 환웅, 온밝누리 한)
 2대 거불리 환웅(居佛理, B.C.3803)
 3대 우야고 환웅(右耶古, B.C.3717)
 4대 모사라 환웅(慕士羅, B.C.3618)
 5대 태우의 환웅(太虞儀, B.C.3511)
 6대 다의발 환웅(多儀發, B.C.3419)
 7대 거련 환웅    (居連,   B.C.3320)
 8대 안부련 환웅(安夫連, B.C.3239)
 9대 양운 환웅    (養雲,   B.C.3166)
 10대 갈고 환웅(葛古,     B.C.3070)
 11대거야발 환웅(居耶發, B.C.2970)
 12대주무신 환웅(州武愼, B.C.2878)
 13대사와라환웅(斯瓦羅, B.C.2773) 
  
  
청구배달(靑丘14대~18대 환웅)
 14대자오지 환웅(慈烏支, B.C.2706)
        (일명 치우천황)
 15대치액특 환웅(蚩額特, B.C.2597)
 16대축다리 환웅(祝多利, B.C.2453)
 17대혁다세 환웅(赫多世, B.C.2452)
 18대거불단 환웅(居弗檀, B.C.2380)
        (일명 단웅(檀雄) 천황)

94년
f
86년
99년
107년
93년
98년
81년
73년
96년
100년
92년
105년
67년
 
 
109년
f
89년
56년
72년
48년

120세
f
102세
135세
129세
115세
110세
140세
94세
139세
125세
149세
123세
100세

 
151세
f
118세
99세
97세
82세
 
ourhistory_nation02_ti0209.gif
그리고, 청구(靑丘)배달은 제14대 치우(蚩尤) 천황께서 B.C 2,707년에 재위에 오른 후, 청구(靑丘) 즉 지금의 만주산동반도 태산(泰山)아래로 도읍을 옮긴 것을 말한다. 신시(神市)는 서불로도 불리다가 서라벌(서불의 사투리)로 바뀌다가 오늘날의 서울이란 말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중국이 우리나라를 예로부터 청구(靑丘)라고 불렀는데, 배달국의 청구(靑丘) 시대의 영향 때문이다. 

원동중의『삼성기(三聖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환국(桓國)의 말기에 환인(桓仁)이 환웅(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 3종을 주어, 환웅(桓雄)은 3000명을 이끌고, 백두산(白頭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니, 신시(神市)라고 불렀다.”

 
요하3_~1.JPG

『신불역대기(神市歷代記)』에는 더욱 상세하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배달국(倍達國)은 환웅(桓雄)이 정한 나라 이름이고, 도읍은 신시(神市)이다. 뒤에 배달국(倍達國) 14세 치우(蚩尤)환웅이 청구(靑丘)로 도읍을 옮겼다.” 라고 적혀 있다. 환웅 천황께서는 상기 3대 이념을 토대로 민중들에게 신교(以神設敎)의 경전이었던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설하고 하늘의 진리로 교화하였다.
 
 
배달국 시대는 교화의 시대로서 초대 배달환웅은 화백(고대의 민주주의 제도)으로 선정을 베풀면서 역법(달력)을 만들어 1년을 365일로 정했으며, 신지(神誌=사관)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鹿圖)문자’를 만들게 했다(BC 3898년, 사슴 발자국의 흔적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녹도문자라고 불렀다). 또한 음양, 오행, 팔괘, 십간십이지 및 청동기와 불을 발견하였다.
 
 
※ 스탠포드 대학의 조세, H. 그린버그 교수와, 애리조나 대학의 스티븐 제구라 교수, 그리고 애리조나 주립대학의 크리스티 G. 터너 교수팀이 신세계의 선사역사에 대한 언어, 혈액형, 현존하는 고대 인디언들의 치아(齒牙)형태 등을 연구한 결과, 세 개의 추측을 이루는 이주자들이 아시아에서 신세계로 이주해 들어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북미의 오리건 주에서 발굴된 짚신 75켤레는 동이족의 짚신과 흡사한데 방사선 탄소 측정에 의하면 이것은 약 9천년 전의 것이라고 한다.
 
 
 『신시본기』에 우리나라에는 신시시대부터 옛 글이 있었는데 신지씨가 이 글자를 발명하였다고 나온다.
배달국의 제1세 배달 환웅(B.C 3,898~3,804년, 94년 재위)께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자(鹿圖文字)를 만들게 하고, 환국때부터 내려오던 천부경(天符經)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다.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았던 것인데, 이유립씨의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의 신지 전자를 소개해 놓았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 선생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 (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다. 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낭하리 암각화이다.
 
 
IMG_1340594206.jpg
『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사를 삼신께 드렸다"고 했다.
이 문자는 5세 환웅이신 태우의 환웅천황의 막내아들 태호 복희씨께서 육서(六書)의 원리로서 개량, 이것을 용서(龍書)라고 하며 이것이 널리 통용되던 신지문자이다. 주로 중국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다가 14세 치우천황 때 태호복희씨의 신하 창힐이 배달국의 자부 선생으로부터 배워 중국에 널리 보급했다. 그 전에는 주로 결승문자(結繩文字: 노끈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는데 결승문자는 남미 인디언, 잉카제국에서 통용된 것이다.
 
창힐이 중원에 유통시킨 신지문자는 훗날 동이족인 은나라 사람들에 의해 한문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로 개량되었다. 한글과 한자를 만든 민족이 우리 선조들 이었다. 이 녹도문자(鹿圖文字)는 이집트 상형문자(B.C 3,000년경), 수메르 설형문자(楔形文字, B.C 3,000년경)보다 몇 세기 앞서는 세계최초의 문자이다. 배달국의 녹도문자는 고조선에 이르러 가림토 문자로 계승 발전되고, 고조선 시대의 가림토 문자는 조선 시대의 세종대왕에 의해 훈민정음(한글)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단군세기』의 기록에 고조선 시대 3세 단군이신 가륵(嘉勒)단군 2년(B.C 2,181년) 때의 일이다. 아직 풍속은 하나 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전하는 녹도문자(鹿圖文字)가 있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100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신하인 삼랑(三郞, 삼신상제께 천제 지내는 관직)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셔서 정음 38자(字)를 만들고 이를 가림토(加臨土) 문자라고 하니 그 글자는 다음과 같다.”
 
가림토(加臨土) 문자는 자음과 모음을 합하여 38개를 가지고 운용하였고, 지금부터 4,199년 전(2016년 현재)의 일이었다. 놀랍게도 과거 우리민족의 활동무대였던 만주에는 지금도 가림토 문자 비석이 우뚝 서 있다. 
 
 
 
동방 한민족의 3대 경전
경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유대교라든지 힌두교, 유·불·선, 기독교 등, 동서 각 종교와 지역문화에 고유한 원전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보다 수천 년이나 앞서서 인류 문화의 시원시대를 연 경학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우리 동방 한민족의 뿌리역사 시대인 환국, 배달, (고)조선의 삼성조 시대에 만들어진 경전들이 그것이다. 먼저 환국 때 만들어진 우리 한민족 시원문화의 성전聖典, 『천부경天符經』이 있다.
 
『천부경(天符經)』에는 우주론을 바탕에 깔고 하늘과 땅과 인간의 일체관계에 대한 인성론의 문제가 담겨있고, 배달국의 개창자 배달환웅이 열어주신 우리 한민족의 신관, 신학의 원전『삼일신고三一神誥』가 있다. 그리고 고구려 재상 을파소를 통해 내려온 366가지 인간이 지켜야 될 윤리덕목을 기록한 내려주신『참전계경(參佺戒經)』 이것이 우리민족의 3대 소의경전이다.
 
『 태백일사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 88쪽을 보면 ‘『천부경(天符經)』’ 의 유래가 나와 있다. 천부경은 “천제환국구전지서야(天帝桓國口傳之書也)”라. 천부경은 환국(桓國)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한 글이다. 환웅천왕의 배달국 때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해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하게 하셨는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이 신지(神誌)가 남긴 전고비문(篆古碑文)을 보고 작첩(作帖)을 복원해서 傳於世者也라. 세상에 전하게 된 바다.
 
 
불교의 <화엄경>에 "해중(海中)에 금강산(金剛山)이 있는데 옛적부터 모든 보살들이 그 산 중에 살고 있다. 현재도 법기(法起)라는 보살이 1,200명의 보살의 무리를 거느리고 금강산에서 상주하며 불법을 강설하고 있다." 라는 기록이 있고, 불교의 대웅전(大雄殿)은 본디 환웅천왕(桓雄天王)을 모시던 대시전(大始殿)이었다. '대웅(大雄)'이란 뜻은 큰 스승이란 뜻이다. '환웅(桓雄)은 광명의 스승'이란 뜻이다.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중에서 五帝說(오제설)에 '환웅을 일러 대웅(大雄)'이라 하였으니 불교의 대웅전(大雄殿)이란 본래 환웅전의 별칭으로 환웅을 모셨던 곳이다. 그러므로 대웅전은 본래 우리나라 밖에는 없는 것으로 아주 극소수 존재하는 외국의 대웅전은 근대에 이르러 우리 한국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이런 한민족의 시원경전들은 모두 동방 한민족 고유의 뿌리 문화인『신교(神敎)』의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다. 삼신 상제님과 조상 선령신을 모시는 한민족의 사상과 정신세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대대로 행해오던 제천의식, 도천(禱天) 무천(舞天) 제천(祭天) 교천(郊天) 영고(迎鼓) 동맹(東盟)등은 본래 "하느님에 대한 제사"에서 유래한 문화이다.

유교의 『서경』이나 『시경』이 상제님을 노래하는 내용이다. 유교의 원형, 원시 유교는 상제님에게서 천명을 받아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이 상제문화가 희석되면서 성리학이 나오고, 그러면서 유교가 망한다. 사실은 조선도 그 때문에 망해버린 거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에서는 理를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존재론적 天으로 한정시키고, 그러한 천리(天理)가 인성(人性)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아 수양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하늘을 공경하며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사라짐으로써’ 주재자로서의 上帝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성리학은 점점 공리공담(空理空談)에 빠지게 되었고, 이 고착된 이념의 둑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산 정약용선생은 간절히 상제님을 외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산은 ‘지천知天, 상제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상제님이 내려주신 천명을 깨닫는 것’,‘사천事天, 상제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며 섬기는 것’, 그리고‘격천格天, 올바른 예법과 정성으로 상제님께 제사 드리는 것’의 방법으로 상제님을 섬길 것을 주장하였다.
 
※ 전 미국 부통령 엘고어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했다고 말했지만 서양의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뒤 얻어 온 기술"이라며 "이런 면에서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혁명은 역사적으로 보면 두번째로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기술 발전 기여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5년 5월 19일 서울디지털포럼 개막식 연설에서 -
 
※ 25시의 저자 게오르규 신부는 프랑스 망명시절에 지은 '장편소설 25시에서 ‘빛은 동방에서 온다. 그 빛은 작은 나라 한국에서 온다’고 썼을 정도로 한국에 특별한 애정을 보인 인물이다. 그는 홍익인간이란 단군의 통치이념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법률이며, 가장 완전한 법률이다"라고 하였다.
 
※ 송호수 교수는 1982년 10월 7일에 현지 조사를 하여 미국 워싱턴 인디언 박물관에는 이외에도 나무절구, 소쿠리, 광주리, 베틀, 어망, 물레등 우리 선조들이 쓰던 생활도구와 동일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고 지적하였다.[(한민족의 뿌리 사상).26쪽)
더욱 놀라운 것은 미 대륙의 인디언이 사용한 빗살무늬 토기는 그 모양과 무늬가 한국의 중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대 환국의 신석기 토기와 구분 할수 없을 정도로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1만 여 년 전 당시에는 베링 헤협이 가교 역할을 하여 이곳을 타고 동방의 선조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갔음은 동서학자들의 공통된 결론이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은 '밝(불함)'은 전 세계에 퍼져있는 가장 오래된 개념이라고 지적하면서 한 나라, 한 민족속에 '밝(광명)'의 순수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나라는 오직 한국 뿐이라고 했다.[불함문화론]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Total 5,276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1253 [한국사] 낙랑군 교치설에 대한 반박 (6) 감방친구 06-13 1715
1252 [한국사] 학계 통설과 전근대사의 새로운 밑그림들 (1) 감방친구 06-13 1143
1251 [한국사] 한사군 요서설 주장하려면 결국 중국 역사도 하나하… (11) Marauder 06-13 1286
1250 [한국사]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에 대해서 질문드립니다. (9) 흑요석 06-13 1110
1249 [한국사] 식민사학자들이라고 욕하지만 사실 해외에 나가게되… (6) Marauder 06-12 1237
1248 [한국사] 제가 왜 독해를 못하냐고 말했는지 다시한번 찬찬히 … (6) Marauder 06-12 840
1247 [한국사] 강단 친일파들의 딜레마 (6) 징기스 06-12 1256
1246 [한국사] 조선일보도 그 사이에 슬쩍 도종환 장관 줄에 끼었네… (7) 징기스 06-12 1346
1245 [한국사] 도장관에 대한 강단의 소모적인 논쟁 자제되어야 (6) 징기스 06-12 1045
1244 [한국사] 충격! 도종환은 강단 마녀사냥의 피해자였네요 (8) 징기스 06-12 1049
1243 [한국사] 참 가지가지 한다 (3) 징기스 06-12 795
1242 [한국사] 역사채널e 청동거울의 비밀 레스토랑스 06-12 844
1241 [한국사] 역사채널e 신라의 얼굴 레스토랑스 06-12 887
1240 [한국사] 역사채널e 어떤 전시회 레스토랑스 06-12 687
1239 [한국사] 역사채널e 비밀의 방 레스토랑스 06-12 709
1238 [한국사] 역사채널e 조선의 무예 종합교본 레스토랑스 06-12 645
1237 [한국사] 역사채널e 어느 살인범의 눈물 레스토랑스 06-12 691
1236 [한국사] 역사채널e 503번의 승리 레스토랑스 06-12 682
1235 [한국사] 역사채널e 승자 없는전쟁 레스토랑스 06-12 649
1234 [한국사] 역사채널e 하늘을 달리는 불 레스토랑스 06-12 666
1233 [한국사] 역사채널e 판옥선 레스토랑스 06-12 659
1232 [한국사] 역사채널e 조선의 비밀병기 레스토랑스 06-12 647
1231 [한국사] 역사채널e 작전명 독수리 레스토랑스 06-12 647
1230 [한국사] 역사채널e 역사를 바꾼 한 통의 전화 레스토랑스 06-12 833
1229 [한국사] 역사채널e 윤봉길 레스토랑스 06-12 691
1228 [한국사] 지식채널e 안중근 레스토랑스 06-12 699
1227 [한국사] 만석재산 쏟아붓고 꿂어 사망한 이석영 (1) 마누시아 06-12 1104
 <  141  142  143  144  145  146  147  148  149  1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