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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06 13:06
[한국사] 해동천자의 나라 고려
 글쓴이 : 한산대첩
조회 : 4,087  

해동천자의 나라 고려 - 잊혀진 고려 역사의 재조명

 

3차례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고려는 위상이 달라졌다. 당당히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의 한 축을 담당하는 강소국 반열로 들어선 것이다. 거란과의 전쟁 승리로, 동여진의 많은 부락들이 고려로 귀부를 하였다. 특히 많은 여진족들이 거란을 버리고 고려를 택할 정도였다. 고려는 귀부한 여진족들에게 책봉을 내리는 등 황제국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거란의 침공을 물리친 고려에 당시 중원을 지배한 송은 유화의 체스처를 보냈다. 거란의 침략에 전전긍긍하고 그들에게 막대한 양의 물품을 조공으로 바친 송은 고려와의 동맹을 강력히 원했다. 거란 역시 형식적으로나마 고려와 사대관계를 두었지만 고려와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거란 역시 고려를 적으로 삼지 않으려고 고려를 자극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는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우리 역사에서 이토록 자긍심이 있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고려 9대 임금인 덕종 시기 거란이 강동6주 반환을 구실로 고려의 사신을 억류하고 압록강에 다리를 놓자, 덕종은 고려 사신을 풀어줄 것, 압록강의 다리를 철교할 것을 요구했다. 만약 이 두 가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교를 단절하겠다고 위협했다. 더욱이 고려는 거란과의 국경지대에 군사 시위를 하는 등 거란의 도발을 좌시하지 않았다.

 

1044년 송나라 관료 부필은 송 황제에게 하북 지방 방어책 12가지를 제시하면서

 

"고려는 그 시서예의(詩書禮義)가 중국 못지 않으며, 거란이 무력으로 제압하려 하자 이에 대항해 싸웠다. 비록 고려가 거란을 섬기고 있지만 거란은 고려를 두려워하고 있다. 고려를 큰 근심거리로 여기고 있는 거란은 감히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해 남쪽으로 내려올 수 없다. 그러므로 고려를 잘 대접해 거란이 우리나라(송)를 침범하려 하면 고려로 하여금 거란을 치게 해야 한다"

 

고 건의했다. 그만큼 고려의 국력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현재 중국, 일본, 러시아, 북한, 미국 등에 둘러쌓인 현 우리나라 상황과 대비된다.

 

송나라 조정은 여러 차례 고려에 사신을 보내 대 거란 전쟁에 나서 달라고 요청했다. 심지어 "좋은 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니 거란을 물리치고 나서 얻는 인물, 우양, 재보 등을 전부 고려에 주어 싸움에 이긴 고려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이도록 하겠다"는 조건까지 제시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는 나약한 이미지일 것이다. 하지만 위의 기록은 군사강국으로서의 고려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10-11세기 동아시아 3강 구축체제

 

고려11대 문종 시기, 문종 12년인 1058년 왕이 송나라와 국교를 재개하려 하자 신하들이 입을 모아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禮樂)이 번성한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장삿배가 줄을 이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진귀한 물자가 날마다 들어오고 있습니다. 중국과 교통하여도(국교를 재개해도) 실제로 도움을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이는 당시 고려인들의 자부심을 나타낸 기록이다. 우리 역사 상 중원 왕조를 이렇게 무시한 적은 고구려 이후 처음일 것이다. 고려는 자부심과 자존이 넘치던 그런 시기였다.

 

그리고 고려-송의 국교 재개에 목말라 있던 쪽은 고려가 아니라 송나라였다. 송나라는 문종 22년(1068)과 문종 24년(1070) 두 차례에 걸쳐 고려 조정에 통교를 청했다. 그리고 송은 문종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이 불교를 공부하고자 몰래 송에 왔을 때 황제가 나서서 그를 대접하며 고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을 했다.

 

당시 고려가 국제사회에서 어떤 위상을 점유했는지 알수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송의 노력으로 단교80여년 만인 1077년 고려-송의 국교가 재개되었다. 형식적으로 고려는 요를 사대했지만, 요의 적국이라 할 수 있는 송과 통교를 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고려의 힘이 막강했기에 가능한것이 아니었을까?

 

공식적으로 국교가 재개되자 송은 고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송나라 조정은 고려 사신의 격을 다른 나라 사신과 같은 조공사(朝貢使)가 아닌 국신사(國信使)로 높여 대우했다. 고려 사신을조공 바치러 오는 사신이 아니라 손님의 예로 맞아들인 것이다. 중화사상에 빠져 주변국을 오랑캐라 본 거만한 중국인들이 고려를자신들과 동등하게 대우한 것이다.

 

더군다나 사신 접대도 거란 사신과 마찬가지로 추밀원에서 하도록 하였고, 고려 사신의 서열을 서하의 위에 두었다. 이는 송이 고려를 거란과 동등하게 취급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 시절, 북위가 고구려 사신의 자리를 남제의 사신과 같은 자리에 두자 남제 사신이 항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 고려는 그 옛날 고구려와 같은 위상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송 조정에서 고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하자 일부 대신들이 "고려 사신에게 베푸는 대접은 너무나 과분해다른 나라를 훨씬 넘어선다. 이는 합당치 않다"고 지적하였을 정도였다.

 

『자치통감』의 저자인 사마광은 실익 없는 고려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하였고, 동파육을 만든 사람으로 유명한 송의 대문호 소식(소동파)은 고려 사절을 접대하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기밀누설, 진서의 유출 등 5가지 이유를 들어, "우리가 받은 조공품은 노리개 같은 불필요한 물품인데 백성들이 고생하며 번 돈으로 그것들을 사고 있다. 고려 사절단이 가져온 물품들이 시장을 어지럽힌다. (우리에겐)조그마한 이익도 없는데 고려는 큰 이익을 얻는다"고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당시 송은 고려와의 무역역조, 적자현상에 시달렸었다. 하지만 이러한 신하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송은 고려와 국교를 단절하지 않았다. 강대한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선 고려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은 무역적자의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고려에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이다.

 

고려의 황금기를 이끈 문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거란과 송나라 모두 조문사(弔問使)를 보내 정중하게 애도의 뜻을 표했다. 『고려사』 권9 이제현이 문종에 대해 남긴 사평을 보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송나라는 매번 왕을 칭찬하는 글을 보내왔고, 거란은 매년 왕의 생신을 축하하는 의례를 치렀으며, 바다 건너 동쪽에 있는 왜국에서는 보배를 바쳤다. 북쪽에 있는 여진들도 관문에 들어와서 토지와 주택을 받았다

 

고려의 문종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고려 문종은 재위 37년동안 고려의 세종 이라 칭해도 좋을만큼 눈부신 업적을 많이 남긴 임금이었다. 그는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내정을 안정시키고 군사력 강화와 대외팽창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고려만의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게다가 불교, 유교를 비롯하여 미술과 공예에 이르기까지 고려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고려의 최전성기가 바로 문종, 그의 시대였다.

 

거란과의 전쟁 이후 고려의 국력이 뻗어나가자 여진족의 고려로의 귀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는데 여진족의 고려귀부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가 바로 문종 시기였다. 여진족의 여러 부족들이 앞을 다투어 고려에 귀화해 고려의 호적에 편입되었을 뿐 아니라 거란으로부터 받은 관작을 버리고 고려의 관작을 받는 경우가 늘어났다.

 

당시 고려와 거란은 여진 지배를 놓고 경쟁했는데 서여진은 거란이 동여진은 고려의 영향력이 강했다. 고려는 귀부한 여진에게 관작을 수여했고, 그 지역에 기미주를 설치해 간접 지배하거나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해 지배하기도 했다.

 

여진의 고려편입은 문종 27년(1073)에 두드러졌다. 문종 27년 2월 동여진 귀순주의 도령 대상 고도화, 창주의 도령 귀덕장군인 고사, 전성주 공주 복주 온주 성주의 도령들이 무리를 이끌고 고려 안으로 붙어 군현이 되기를 요청하였다. 동북 변방 15주 바깥 동여진이 고려의 군현으로 귀속된 것이다. 같은 해 5월에는 서여진의 여러 부족이 고려의 주군에 편입되기를 원해 그들을 받아들였다. 7월에는 흑수 역어(통역관) 가서로가 동여진을 설득해 고려의 주현이 되도록 만드는데 공로를 세웠다며 그를 고려의 무반인 산원에 임명하고 고맹이라는 성명을 하사했다. 이는 흑수 즉 북만주의 흑룡강 일대까지 고려의 영역으로 편제되었음을 시사한다. 9월에는 동여진의 대란촌 등 11개촌을 빈주, 이주, 복주 등 11개 주로 삼아 귀순주에 예속시켰다.

 

잣나무 분포도(잣나무는 장광재령 지역에 집중분포) - 흥미롭게도 고려의 동북계 영토와 일치한다.

 

거란과의 전쟁 이후 고려는 전쟁에 대비하여 신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북방경영에 관심을 보여 지속적으로 고려의 영토를 북쪽으로 확장하려했다. 이는 왕건의 유지이기도 한 고구려 옛 땅을 다물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고려 중기 동북계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쓴 허인욱씨의 연구에 의하면 고려의 북동쪽 영역은 만주 장광재령까지 뻗었다고 한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가 있던 지역인 현재의 길림성 일대, 송화강 유역을 포함하는 넓은 땅이었다. 거란의 요나라 조차 발해의 옛 수도인 용천까지는 고려의 북쪽 국경으로 인정했다.

 

12월 계사일에 요나라에서 야율사제(耶律思齊), 이상(李湘) 등을 시켜 왕에게 옥책(玉冊), 옥인(玉印), 면류관, 수례, 장복(章服), 안마(鞍馬), 피륙 등등 물품을 보내왔다. 책문(冊文)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하늘의 도움과 조상의 유훈으로 천하를 통치한 지가 이미 43년이나 되었다. 안으로 백성을 편

안하게 하고 밖으로 제후(諸侯)를 무마하여 다 옳은 길로 나아가게 하였다. 귀국은 동방에 사직(社

稷)을 세워 그 지역이 북쪽으로 용천(龍泉)에 다다르고 서쪽으로 압록강에 접하여 있다. 우리의 연호를 물어 가고 공물을 보내왔다. ......"  고려사 숙종 정축 2년(1097)

 

고려의 지속적인 북방경영으로 인해 문종 시기에 이르면 고려는 백두산 북쪽 너머 저 멀리 장광재령에 이르는 광활한 만주벌판을 고려의 영역으로 편입하여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게 되었다. 그 옛날 만주를 호령하며 막북세력과 중원세력과 더불어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을 담당한 고구려의 영광을 이제는 후예인 고려가 송, 거란과 더불어 동아시아 평화를 담당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거란, 송, 고려가 삼각 세력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고려는 거란 및 송과 실리외교를 펼치면서 여진족을 지배했다. 우리민족이 국제관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때가 없을 정도로 11세기~12세기 초반 이 시기는 국제, 국내적으로 고려에 있어 황금기였다. 

 

고려 만주지배설에 입각한 고려영토

 

이러한 치세를 이끈 문종에 대해 이제현은 다음과 같은 사평을 남겼다.

 

"창고에는 해마다 묵은 곡식이 쌓이고, 집집마다 살림이 넉넉하여 당시 사람들은 이때를 태평성세라 일컬었다"

 

조선 전성기인 세종시대만 해도 흉년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은 것과 비교하면 당시 문종의 치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우리의 기록에는 태평성세라 기록된 것이 고려 문종 시기가 유일하다. 그리고 이 태평성세라는 문구에는 당시 고려의 자부심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고려의 자부심은 12세기에도 이어졌다. 고려 중기 시인 진화는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길에 지은 시 봉사입금(奉使入金)에 이렇게 노래한다.

 

서쪽의 꽃은 이미 쓸쓸히 시들어가고

북쪽의 성도 아직 어둡고 캄캄하네

조용히 앉아서 문명이 밝아오는 아침을 기다리니

하늘 동쪽에 붉은 해가 솟으려 하네

 

위 시에서 '서쪽의 꽃'은 남송을, '북쪽의 성'은 몽골을, '동쪽에서 떠오르는 붉은해'는 고려를 의미한다. 이 시는 고려가 해처럼 떠올라 문명을 꽃피운다는 의미로, 당시 고려인들의 자긍심이 어떠했는지 한눈에 보여주는 기록이다. 실제로 중원왕조는 고려를 '문물과 예의를 갖춘 나라'라 칭송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자존심과 자긍심은 고려 초기부터 있어왔다. 이는 태조 왕건이 남긴 유훈인 훈요십조 제4조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 동방은 옛부터 중국의 풍속을 볻받아 문물과 예악을 다 그대로 따라해왔다. 그러나 지역이 다르고 사람의 성품도 각각 같지 않았으니, 반드시 억지로 따르려 하지 말라.

 

이러한 자부심은 고려 임금을 천자, 황제라 칭한데서 잘 보여준다. 고려 고종 41년(1254), 최자가 지은 『보한집』에는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며 바친 글에 태조 왕건을  "천자" 칭한 기록이 보인다.

 

본국에 창차 환란이 일어날 것 같고, 이미 나라의 운세가 다했나이다. 그러나 다행히 천자의 빛나는 모습을 뵙게 되었으니, 바라옵건대 신하의 예를 갖추고자 합니다.

 

고려사 악지에 실려있는 궁중 연회곡의 가사 풍입송은 고려 군주를 해동천자라 부르고 있다.

 

해동천자이신 지금의 황제에 이르러

부처와 하늘이 도와주셔서 교화가 널리 퍼져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있다

그 깊은 은혜 먼 나라나 가까운 나라, 예나 지금이나 드물어라

사방이 편안하고 요나라 임금, 탕나라 임금보다 높구나

 

고려 군주를 황제로 인식한 것은 고려인뿐만 아니었다. 여진인들도 고려의 군주를 천자, 황제라 불렀다.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가 고려 예종에게 보낸 국서 머리말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대금 황제가 고려국 황제에게 글을 보낸다" 大金皇帝寄書于高麗國皇帝

 

정치체제에 있어 고려는 황제국 답게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 등 3성과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 등 6부를 두었다. 성(省)과 부(部)는 천자국에서 쓰던 것으로, 제후국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명에 사대를 한 조선은 부 대신 그보다 격이 낮은 조(曹)를 사용하였다.(6조)

(단, 고려는 중원과 차별을 두고자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쳐 중서문하성을 두었다. 엄밀히 말하면 고려는 3성 6부가 아닌 2성 6부를 사용하였다)

 

고려의 만경대 복원도

 

고려의 제천의식인 팔관회에서는 고려 군주가 천자라는 의식이 성대하게 펼쳐졌다. 고려 황제들은 천자만이 입는 황포를 입고 중앙과 지방관료는 물론 송나라인, 여진인, 탐라인, 일본인들의 인사를 받았다. 게다가 하늘에 대한 제사는 황제만이 지낼 수 있었는데, 고려는 원구단을 만들어 제천의식을 치렀다.

 

고려인들은 개경을 황성(皇城) 또는 황도(皇都)라 불렀다. 황제국 고려는 대도시의 행정단위를 경으로 불렀다.(개경,서경,남경,동경)

하지만 제후국 체제를 따른 조선은 부가 가장 큰 행정 단위여서 한성부, 평양부, 계림부로 불렀다.

 

궁궐 주위를 둘러싼 궁서와 황성 사이에는 중앙 관청과 별궁들이 있었다. 별궁은 왕의 종친들에게 내려준 궁으로, 고려는 왕족들에게 공작, 후작, 백작이라는 직위를 주고 각각 다른 이름의 궁을 하사한 것이다. 이처럼 국왕이 거처하는 곳을 황성(황제가 사는 성)이라 칭하고, 왕족과 종친이 거처하는 곳을 궁이라 한 것은 고려가 황제국 체제를 지향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된다.

 

고려 수도 개경성 지도

 

실제로 고려임금은 황제였다. 의종 24년 의종이 직접 쓴 글에 "일본이 보물을 바치며 의종을 황제라고 불렀다"는 대목이 있다. 또한신하들은 황제에게나 하는 만세 삼창을 외쳤으며, 의종 또한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했다. 경기도 하남시 선법사에는 고려시대 불상인 마애약사불 좌상이 있는데 불상 옆에 "태평 2년(977)에 황제의 만세를 기원하기 위해 불상을 고친다"는 명문이 있는데 여기서 황제는 고려 경종을 의미한다고 한다. 고려 왕은 궁궐을 나갈 때 다섯 개의 문을 지났는데 이는 황제의 문은 다섯 개라는 황제국의 원칙이었다. 참고로 조선은 제후국 체제로, 근정문, 흥례문, 광화문까지 세 개의 문을 지녔었다. 고려사 개성부 지리를 보면 "광종 11년 개개경 위황도(改開京爲皇都)"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려 수도 개경을 황도로 고쳤다는 뜻이다.

 

고려시대 개경 인구는 어떠했을까? 고려사의 기록을 근거로 한 리당 마을 평균 가호수가 300호 정도 된다고 한다. 개경의 행정 편제를 살펴보면 외성을 중심으로 5개의 부로 나뉘고, 부는 다시 방과 리로 나뉜다. 개경에는 총 5개의 부에 35개의 방이 있었고 가장 작은 행정 단위인 리는 모두 344개가 있었다. 이를 토대로 개경의 인구를 계산하면 최소 300호가 거주하는 리가 344개이므로 300x344= 103,200이니, 개경에 적어도 10만호 이상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한 가호 당 평균 인구수를 다섯 명으로 잡는다면 개경의 총 인구는 50만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수도 개경은 최소 50만 인구가 모여사는 인구 밀집 도시였다. 비슷한 시기인 13세기 초 유럽의 대도시인 이탈리아 피렌체의 인구가 10만 명인 것과 비교하면 개경이 얼마나 번성한 도시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번화한 개경의 거리

 

고려는 주변국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뛰어난 고급문화를 창출해냈다.

지금 한류 열풍이 불어 우리나라의 가수와 연예인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제품이 동남아, 중국, 일본 등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있는데 , 천년전 고려 역시 고려풍이 불어 주변국에서 고려 문화와 고려 제품에 흠뻑 빠져 들었었다. 한류는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 초기 후진이 고려에 보낸 국서를 보면 고려 문화의 우월성이 잘 나타나 있다.

 

"(고려의) 무기는 단단하고 강하며, 문장은 아름답고 곱다. 모시와 삼베옷은 눈같이 희고, 아주 묘한 약은 신기하고 불가사의하다. 손으로 만든 물건들은 보기 드물게 귀하고 기이하거니와, 여러 종류의 과실에서도 향기로운 명품이 눈에 띄어 칭찬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였다"

 

중국에서 인기가 높았던 고려 수출품은 비단이었다. 고려 2대 임금 혜종 대에는 금사, 은사와 오색실로 해, 달, 용, 봉황 등을 수놓아 만든 화려하고 정교한 명품 비단을 후진에 수출히였는데, 이러한 고려의 비단은 후진의 왕이 입는 정복의 옷감과 왕후의 침대요감으로 사용되었다.

 

『고반여사』를보면 송나라 선비들이빙 둘러앉아 천하의 명품을 논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때 그들이 천하의 모든 차(茶) 가운데 최고로 친 명차가 바로 고려 무등산에서 생산된 차였다 게다가 송나라 선비들은 차 뿐만 아니라 고려의 문방도구도 천하명품으로 여겼다. 특히 고려의 종이와 먹의 명성이 높아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송의 선비들은 어렵게 고려의 먹을 구하면 애지중지하며 아주 중요한 일에만 사용했다고 한다.

 

고려를 대표하는 물품인 고려청자는 극찬을 받았다. 12세기 초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은 자신이 지은 책, 『선화봉사도경』에 고려청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도기의 빛깔이 푸른것을 고려인들은 비색(翡色)이라 하는데, 근년에 만드는 솜씨가 좋아졌고 빛깔도 더욱 좋아졌다"

 

 

 

고려청자의 독자성은 영롱한 빛깔에서 나타난다.  

翡와 秘... 옛부터 동양 사람들은 옥을 가장 신비스러운 보석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은 청자를 옥색으로 띠게 하려고 고심을 해왔다. 10세기 경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청자 색깔이옥색에 가까운 것으로 믿고, '너무도 아름답고 귀해 궁중에서만 사용하는 비밀스러운 색깔'의 의미를 지닌 秘色(비색)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고려는 비(秘)라는 글자를 사용하지 않고 물총새 비(翡)를 사용해서 청자 색깔을 구별하였다. 이는 고려에서 만든 청자의 색이 진짜 옥색이라 해서 초록색 경옥을 나타내는 비색(翡色)이라 불렀던 것이다.

 

송나라 지식인 태평노인이 저술한 『수중금』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쓰여있다.

 

"백자는 중국의 정요백제가 천하제일이지만 청자는 고려 비색이 제일이다. 다른 곳에서도 만들려고 했지만, 도저히 만들 수 없었다"

 

고려의 자긍심과 자부심... 그것은 강대국 거란을 물리친 군사적 자부심, 뛰어난 고급문화를 창출한 문화적 자부심, 삼한을 통일했다는 민족적 자부심 등이 한데 어우러진것이었다. 그리고 주변국들 역시 그러한 고려의 위상을 인정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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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러한 고려의 위상은 동아시아에 국한되지 않았다. 고려의 배는 중국을 넘어 서쪽으로 향했다. 베트남, 타이,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교류를 맺었을 뿐 아니라 저 먼 대식국(이란)까지 고려의 선박이 활동하였다.

 

고려시대 그 이서의 동남아와 인도, 대식까지 내왕과 교류가 확대된 사실이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사적에 기록되어 있다. 11세기 전반에 하선, 보나합 등의 회회족, 즉 아랍-무슬림 상인 수백명이 세 차례나 집단적으로 개경에 와서 수은, 몰약, 소목(蘇木:외과용 약재) 등 방물을 바치고 후대 속에 비단을 하사받았다. 25대 충렬왕 때는 인도 동해의 코로만델 해안에 있는 작은 나라 마팔국(馬八國: 모바르) 의 왕자 패합리가 침향, 면포(일명 서양포) 등 공물을 보내왔다.

 

"고려는 문화와 예악이 융성하고, 상선들이 끊임없이 출입하여 날마다 귀중한 보화가 항구로 들어오니 중국으로부터는 도움받을 것이 없다"고 한 11대 문종 12년의 『고려사절요』 기록은 고려의 당당한 자신감과 활기찬 기상을 말해주고 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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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대첩 16-07-06 13:07
   
고려가 왜와 같은 거지들과 비교할 국가는 아니죠..ㅎ
두부국 16-07-06 13:16
   
     
한산대첩 16-07-06 13:58
   
그쵸 발해를 흡수 했는데..
지금 교과서의 강역으로는 설명이 잘 안되죠.
전쟁망치 16-07-06 19:48
   
한국인들이 착각하는것이 중국땅덩어리 보고
송나라, 명나라들이 하나의 왕아래 통일된 나라라고 착각들 많이 하시는데 아닙니다.

옛날 대륙에는 지금의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각자의 땅을 가지고 있었고 제후국 또는 왕국으로 있었습니다.
다만 힘의 밸런스가 무너져 하나의 왕에게 집중되어 황제라는 어느 사람에 의해서 충성 서약을 하게 되어서
저렇게 커진겁니다.

대륙의 각 제후국 지방의 왕국들도 서로 무역을 하고 교류를 했습니다.
로마제국 비슷하게 이해 하시면 됩니다. 동맹 왕국들의 충성으로 만들어진겁니다.

당연히 그런 상황에서 동쪽에 거의 하나의 민족으로 이미 통합이된 고려라는 나라는 엄청난 압박이였겠죠
특히 대륙의 내부 정치가 불안할경우는(왕권이 약화될경우)  입장에서는 ,  고려가 스스로 황제라 칭할만 했죠
서라벌 16-07-06 23:37
   
역사적으로 중국 대륙이 분열되어 있었을 때는 우리 민족이 기를 펴고 살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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