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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04 14:06
[한국사] 조선왕조실록의 의문점
 글쓴이 : 꼬마러브
조회 : 4,383  

모든 인용은 국사편찬위원회 -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 에서 발췌했습니다.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 5월 26일 무자 3번째기사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제가 알기로 이 기사에 언급된 책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책은 단 한권도 없는 걸로 압니다. 즉 위의 책들의 내용을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특히 위의『조대기』같은 경우는 고려초 발해유민이 발해역사에 대해 서술한 사서인데요. 발해 멸망의 미스터리와 맞물어 발해 관련 기록이 얼마 없는 현재 상황으로 보아 정말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당시 조선정부는 위의 책들을 금서로 지정했을까요? 위의 책 중 가장 처음으로 언급되는 사서인 『고조선비사』.. 제목만 보아도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고조선의 숨겨진 비밀이라..

혹 위의 책들을 금서로 지정한 게 아니라 국가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분 들이 있을까..

이어서 예종실록을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匹)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


예종실록을 보면 아시겠지만 이번에는 위의 책들을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고 하였습니다. 참형.. 칼로 목을 베는 형벌이요. 국가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명령이라고 하기에는 형벌이 과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금서로 지정했다고 볼 수 밖에 없지요.

또한 세조실록의 나온 책보다 가짓수가 적어졌는데요. 이에 짐작해 추측해보면 세조 때 금서로 지정했던 위의 책들을 불살랐고 아직도 남아있는 책들을 예종 때 다시 불사지르기 위해 수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에는 참형까지 처하면서요.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위의 책들이 한권도 남아 있지 않는지 이해가 됩니다.

불사질렀나는 기록이 어디있냐고요? 태종실록을 보면 이런 기록이 보입니다.


서운관(書雲觀)에 간직하고 있는 참서(讖書) 두 상자를 불살랐다. 풍속이 전조의 습관을 인습하여 음양 구기(陰陽拘忌)를 혹신하여 부모가 죽어도 여러 해를 장사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박은(朴訔)·조말생(趙末生)에게 명하여 서운관에 앉아서 음양서(陰陽書)를 모조리 찾아 내어 요망하고 허탄하여 정상에서 어그러진 것을 골라 불태웠다.


서운관은 고려의 행정기관으로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농사와 관련된 천문, 지리학 등의 사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이 책들도 현재 한권도 전해져 오고 있지 않습니다. 이방원이 전부 불사질렀기 때문이지요. 천문, 지리학과 관련된 사무를 하는 관청인 만큼 우리의 소중한 풍습들도 담겨져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안타깝지요.


예종이나 세조 때 위의 책들을 불사질렀다는 내용은 없지만 위의 책들이 현재까지 전해져 오지 않는 점과 특히 예종 때 위의 책들을 바치지 않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기사로 보아 불사질렀다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했냐하면 위의 금서로 지정된 책들 중 『규원사화』의 참고 사서인 『조대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그 규원사화요. 진본으로 확인이 된..


이 책의 <조판기>와 <태시기>에서는 환인()이라는 일대주신()이 천지를 개창하고, 환웅천왕(, 일명 )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정을 베푸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즉, 환웅은 신교()를 선포하고 치우씨()·고시씨()·신지씨()·주인씨() 등, 신하의 보필을 받아 366가지 일을 다스렸다는 것이다. 특히, 치우씨는 병기를 제조하고, 고시씨는 농업과 목축을 주관했으며, 신지씨는 문자를 발명하고, 주인씨는 혼인제도를 만들었다. 또한, 복희씨()는 팔괘를 만들어 음양과 역학()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단군기>에서는 환검()으로부터 고열가()에 이르는 47대의 왕명과 재위기간, 그리고 각 왕대의 치적이 서술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치적이 많은 것은 환검이다. 그는 환웅의 아들로서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박달나라 임금이 되어 수도를 길림()에 두었으며, 9개의 대국과 12개의 소국을 거느려 그 영토는 멀리 요서(西)지방에까지 미쳤다.

이 시기에는 문화도 더욱 발전하여 8가()의 관료를 두고, 제천()을 시작했으며, 8조의 가르침을 지어 백성을 교화하였다. 2대 임금 부루()는 큰 홍수를 다스리고 도산()에서 하()의 우()임금과 만나 화해했으며, 환인·환웅·환검을 제사하여 비로소 삼신()에 대한 제사가 확립되었다.

부루는 또한 중국의 순()임금이 차지하고 있던 중국 동북지방을 빼앗고,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여 옥저·비류·졸본을 거느리게 되었다. 부루 이후의 임금들은 그 치적이 간단히 처리되어 있는데, 47대 임금 고열가에 이르러 제후가 난립하면서 열국시대가 전개되는 것으로 <단군기>는 끝난다.

마지막으로 <만설>에서는 우리 나라가 만주를 잃어버린 뒤 약소국으로 전락한 것을 개탄하면서,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그 첫째는 지리()로써 잃어버린 만주땅을 되찾는 것이고, 둘째는 인화()로써 당쟁을 버리고 단결하는 것이며, 셋째는 보성()으로써 우리 풍토에 맞는 고유문화의 장점을 지니면서 남의 장점도 받아들이는 일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고유문화는 바로 단군시대부터 내려오는 신교()이며, 주자학은 사대사상의 근원으로서 철저하게 매도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규원사화 [揆園史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정말 흥미롭지 않습니까? 참고로 규원사화는1972년 11월 3일 떄 숙종 때 쓰여진 진본임이 확인 된 사서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정말 흥미롭습니다.

왜 조선정부는 위의 책들을 금서로 지정했을까요? 정말 여러 생각이 나는군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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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국 16-07-04 14:26
   
규원사화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심의의원인 이가원(李家源), 손보기(孫寶基), 임창순(任昌淳) 3인이 귀중본 《규원사화》의 지질을 비롯한 사항을 심의한 결과, 조선 중기에 씌여진 진본임을 확인하여 인증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이병도, 조인성, 송찬식 등 한국사학계의 상당수 학자들은 여전히 위서라고 판단하고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7%9C%EC%9B%90%EC%82%AC%ED%99%94#.EC.A7.84.EC.84.9C.EB.A1.A0


일제도제식조폭식민 사관에 찌들은 이병도를 필두로한 식민사학자들이
일본놈들의 대를 이어 단군은 신화라는게 통설이라고 교육하는 실정에
규원사화 진본을 들어 반기를 들었다가는 결과는 자명하겠지요

“학계에서 매장” 그것입니다

왜냐면 규원사화가 진본임이 밝혀질 경우
전공하는 사람들의 대학교재 등 대부분의 상고사 관련 책자들이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조리 쓰레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뭐 쉽게 말하면 “밥그릇지키기”에 “민족혼”을 팔아먹은 자 들이라고나 할까요

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는 이 규원사화 진본의 존재를 알았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소장하고 있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달의왕 16-07-04 16:15
   
역사가 짧았던 몽골만 해도 우리보다 사서가 압도적으로 많이 남아 있는데 그보다 더 오래된 우리나라는 뭐가 어떻게 된건지
조선시대의 사대주의 또한 지금의 식민사관과 뭐가 다를까 싶기도 한 예네요.
왜 그 소중하디 소중한 자료를 불싸지르고 난리를 피웠는지 참 원망 스럽네요.
달의왕 16-07-04 16:21
   
또한 조선시대 이전만 해도 풍속이 매우 자유로왔다는 말이 있는데 조선시대와는 맞지 않는 내용들이 많았던 것도 한 이유일테고
숭유억불 하면서 불교 관련 내용들의 책들도 금기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바토 16-07-04 16:44
   
규원사화가 역사서면 성경도 역사서  응?
     
꼬마러브 16-07-04 20:02
   
규원사화같은 경우는 1972년 11월 3일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등 고서심의위원 3명이 심의를 하여 숙종 때 쓰여진 진본임을 확인했습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귀중본으로 보관되어 있고요. 이건 팩트에요

1.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도서열람번호 : 2121.3 1책
 
2.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도서열람번호 : 2105.1 1책

3.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권상노(權相老) 소장본을 필사

4.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
    방종현(方鍾鉉) 소장본을 등사

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 소장
    이선근(李瑄根) 소장본을 등사
          
바토 16-07-04 20:30
   
성경도  진본임 이건 팩트임
               
꼬마러브 16-07-04 20:39
   
성경은 현재 진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 사본을 가지고 번역한 겁니다.
물론 성경 또한 고서검증법에 의하여 사본과 진본의 내용차이가 별 없다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사본이 진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오래된 구약성경 사본은 기원 후 900년 경에 기록된 맛소라 사본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진본이라고 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아요.
하지만 규원사화같은 경우는 그 내용이 진짜든 가짜든 간에 고서심의위원회에 의해 숙종 때 지은 진본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만약 이 논증이 마음에 안드신다면 반박할 증거를 제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배우고 싶군요.

이 곳 동아시아 게시판의 공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2. 토론게시판이니 자신의 주장에 따른 이유를 적어주시면 되겠습니다.
ex.) "난 XX나라가 싫다. 그 이유는 ~~~~~때문이다."(O)      <<<  양호
      "난XX나라가 싫어! 이유? 그딴게 어딨어 그냥 싫어!!(X)  <<<  토론이 아니므로 잠금.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8073

최소한 규칙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모니터회원 16-07-04 21:55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3065&cid=41788&categoryId=41793
사해사본이 기원전 2세기로 가장 오래된 사본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사본이죠.
진본이라는게 존재할수 없습니다.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것처럼 10계를 세긴 돌판이라도 나오면 모를까...
                         
꼬마러브 16-07-04 21:59
   
제가 잘못 알고 있었군요. 감사합니다.
                    
바토 16-07-05 00:02
   
아놔 귀중본을 진본이라고 하는군요  첨알았네요
그럼성경도 진본인데요
                         
꼬마러브 16-07-05 06:27
   
《규원사화》가 일반에 공개된 것은 1925년 간행된 《단전요의(檀典要義)》에 일부가 인용된 것이 최초로 여겨진다. 그 내용은 1929년 간행된 《대동사강》에서도 인용되었고 전체 내용은 1932년 5월 이전에 등사되었다.[1] 1934년에도 그 내용이 직접 인용되었으며[2] 1940년에는 양주동이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후에 국립중앙도서관 측에서 해방 직후(1945~1946년)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을 구입하여 귀중본으로 등록하였다.[3] 이후 위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1972년에 고서심의위원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의 3인이 심의하여 조선 왕조 숙종 1년인 1675년에 작성된 진본이라 판정하였다.
               
뚜리뚜바 16-07-04 22:09
   
알고 좀 나불대요 ㅋㅋ
없습니다 16-07-04 19:12
   
우리나라의 주류였던 주자학은 주자학에 반대되는 일체의 사상에 대해 매우 적대적입니다. 사문난적이라는 단어가 괜히 나온게 아니죠. 특히 요언이나 참언류는 잘못하면 국가기강을 흐리는 위험한것으로 인식했죠. 그래서 나온 명령입니다.
     
꼬마러브 16-07-04 20:03
   
진사황시기 분서갱유랑 다를 게 없어보이네요. 법가사상에 적대적인 유가사상 관련 서적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지요. 후에 분서갱유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이 있나요? 음..
그리고 조대기가 왜 주자학에 반대될까요??..
당시 조선정부의 의도가 무엇이던 간에 사서들을 없애버린 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없습니다 16-07-04 20:17
   
당시 주자학 학자들에게는 기자조선, 삼국, 신라,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계통이 정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선시대에 발해를 한국사로 인식한 최초의 인물이 유득공인데, 그가 실학자라서 가능했던겁니다.
               
서라벌 16-07-05 00:04
   
억측이 좀 심하신 것 같은데요. 조선이 사대주의로 지나치게 기자를 맹신하고 떠받드는 경향은 있었습니다만 적어도 단군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발해는 애초에 우리 역사로 생각해본다는 시도조차 없던 시절이구요. 유득공이 밝혔듯이 발해인들 스스로가 자신들 역사서를 만들지도 않았고, 발해인들의 기득권계층이 고구려계이기는 하지만 발해인들 대다수가 말갈족인 것 또한 사실이죠. 신라와 그로부터 파생된 고려왕조에서 나온 우리 선조들 입장에선, 발해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왕씨 고려도 고려고, 위쪽 발해도 고려인데 왕씨 고려가 스스로를 고구려의 계승자라 일컫는 와중에, 발해라는 또다른 계승국가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수도 있구요.
          
서라벌 16-07-05 08:23
   
진짜 보면 볼수록 웃기는 사람이네.. 어떻게 분서갱유랑 동일시하는지.. 그냥 자기만의 세상 속에 빠져서 사는 사람입니까? 조선에서 진시황처럼 강제로 책을 불사르고 불교 믿는 승려들이나 도교 믿는 도사들이나 그런 사람들 강제로 파묻기라도 했답니까?
꼬마러브 16-07-04 20:12
   
이어서 성종실록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리성모(智異聖母)》·《하소량훈(河少良訓)》, 문태(文泰)·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삼인기(三人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와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도선참기(道銑讖記)》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收納)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下書諸道觀察使曰:

前者, 《周南逸士記》、《志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道證記》、《智異聖母》 《河少良訓》, 文泰、王居仁、薛業三人記一百餘卷, 《壼中錄》、《地華錄》、《明鏡數》及凡干天文、地理、陰陽諸書, 無遺搜覓上送事, 曾已下諭。 上項《明鏡數》以上九冊、《太一金鏡式道詵讖記》, 依前諭上送, 餘書勿更收納, 其已收者還給。
서라벌 16-07-04 23:52
   
이분 저번에 댓글 달았던 분이시네.. 대체 얼마나 자기 생각에 확신이 강하신 건지 모르겠는데.. 결국은 그냥 님 개인적인 추측 아닙니까? 왜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한 정도로 '금서로 지정했음이 분명하다'고 못을 박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선이 사대주의 사상 때문에 자국 역사를 의도적으로 폄하하려는 의도로 고대 역사서를 수집해서 불살랐다? 물론 만에 하나라면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당시의 정확한 진상을 우리는 알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조선이 사대에 미쳤어도 자기 역사서까지 불지를 정도로 미쳤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고 보네요. 조선처럼 기록을 중시하던 나라에서, 상고사를 기록한 역사서를 불태워버린다? 그리고 그 근거라는게 겨우 바치지 않을 경우 참형에 처한다는 것과 오늘날까지 전하지 않는다는 그건가요? 오늘날까지 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죠.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버렸으니까. 실제로 실록 또한 안의와 손홍록 두 분 선비가 아니었으면 조선 전기 실록은 아예 소실될뻔했고, 승정원 일기 또한 조선 전기 절반의 기록이 임진왜란으로 불탔습니다. 오늘날까지 저러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전쟁의 참화로 소실된 것이라고 봐야죠.
그리고 조선이 자신들 역사서까지 불태울 정도로 사대사상에 미쳤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지도 않았을거며, 가장 중요한 단군에의 제사 또한 지내지 않았겠죠. 그러나 조선은 단군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국조로서 제사까지 지냈습니다. 게다가 단군을 제사지내는 단군묘 뿐만 아니라, 환인, 환웅, 단군을 묶어 삼성(三聖)이라 부르며 삼성사를 세워 제사지내기도 했죠. 그런데 환인, 환웅, 단군에 대한 제사는 지내면서 그들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는 불태운다?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꼬마러브 16-07-05 07:01
   
왜냐하면 세조와 예종이『도참』과 같은 천문.지리.음양 관련 책들도 금서로 지정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도참』이라는 책은 태종실록에 나오는데

내가 서운관 구장(舊藏)의 참서(讖書)509) 를 모조리 불살라 버리라고 했었는데 아직도 있다는 말인가? 내가 비록 불민(不敏)하지만 두루 제왕(帝王)의 행적을 보았더니, 참위(讖緯)의 설(說)을 논자(論者)들은 모두 취하지 아니하였다. 술수(術數)로 말하면 수(數)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지만, 참위 같은 것은 허탄(許誕)한 데에서 나온 것이라, 심히 믿기에 족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와 같은 총명을 가지고도 오히려 도참(圖讖)에 미혹되었으므로 논자들은 이를 비평하였는데, 이것은 광무제가 도(道)에 불순(不純)한 때문이었다. 우리 조정에 이르러, 참서(讖書)에 말한 바, 목자(木子)510) ·주초(走肖)511) 의 설(說)은 개국 초(開國初)에 있었다. 정도전(鄭道傳)은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호사자(好事者)512) 가 만든 것이다.’하였지만, 마침내 이 책을 따르게 되니, 조정의 대신들도 이를 믿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정안군(靖安君)으로 있을 때에는 이것을 믿지 않았는데, 천도(遷都)하는 날에,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심히 이 책을 믿어 도읍을 모악(母岳)513) 으로 정하고자 하였지만, 나만이 믿지 아니하고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정하였다. 만약 참서를 불살라 버리지 않고 후세에 전한다면 사리(事理)를 밝게 보지 못하는 자들이 반드시 깊이 믿을 것이니, 빨리 불살라 버리게 함이 이씨(李氏) 사직(社稷)에 있어서 반드시 손실(損失)됨이 없을 것이다."

기록에서 보면 아시다시피 태종은 도참과 같은 서책들을 불태울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세조와 예종의 금서목록에 도참이 또 등장한단 말이지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저는 선대에 행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을 하기 위해 금서로 지정한 것이라고 보이네요. 그리고 금서로 지정했음이 분명하지 않다면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서라벌 16-07-05 08:17
   
님 도참이 뭔지 모르죠? 대체 도참을 금서로 지정한 것과 역사서를 금서로 지정하고 불살랐다는 것을 왜 동일시하는지 이해가 안가네요. 게다가 태종이 그랬으니 세조나 예종 또한 그럴것이다 이게 고작 증거랍시고 제시하는 겁니까? 도참은 말 그대로 도참사상을 바탕으로 한 음양서죠. 조선은 그런것을 절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불교 도교 등을 허구라 치부하고 배척하던 것이 조선이었으니 도참을 금서로 지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그런데 도참이랑 우리 상고사를 기록한 역사서랑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꼬마러브 16-07-05 17:18
   
왜냐하면 그 도참과 역사서가 같은 금서목록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참을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역사서 역시 불태웠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였습니다만 님 말씀대로 기록은 없습니다.
요약하자면
도참과 역사서가 같은 금서목록으로 지정됐다.
도참을 불사질렀는다는 기록이 있으니 역사서도 불태웠지 않았을까?
책을 보호하려고 명령을 내린거라기엔 참형은 너무 과하지 않나?
왜 현재까지 책이 한권도 남아있지 않는가?
위의 이유로 추측한겁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서라벌 16-07-05 20:05
   
아니 그니까요.. 애초에 금서목록이라는 전제 자체가 님 개인적인 생각 아니냐구요.. 님이 말씀하시는 그 '같은 금서목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꼬마러브 16-07-05 21:42
   
그럼 제 생각이지 다른사람 생각이겠습니까?
                    
서라벌 16-07-05 20:08
   
그리고 왕조시대에는 참형이라는 형벌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지요. 상고시대에는 소수의 지식인들(예컨대 사기를 쓴 사마천 같은)이 주로 사서를 편찬하는 사찬사서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점차 역사편찬의 체계가 잡히면서 나중에는 국가가 주도하는 관찬사서로 바뀝니다.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삼국사기나 실록이나 승정원일기라던가 의궤라던가 많은 역사서들이 국가 주도로 편찬되었습니다. 그러하니 저런식으로 사서를 수집했을 수도 있지요. 적어도 불태웠다는 기록도 없이 자신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불태웠다고 주장하는 것 보다는 합리적인 추론이라고 생각하네요.
                         
꼬마러브 16-07-05 21:41
   
확실히 님의 의견을 듣고 나니까 제가 잘못추론했음을 인지했습니다. 다만
너무 공격적이시네요. 저는 이부분과 더불어 규원사화에 관해 다른사람의 의견이 듣고 싶어서 글을 올렸을 뿐 싸우러 올린 게 아니거든요..;
제가 글을 쓴 부분에 관해서 조선정부가 왜 금서령을 지정했는지 이유가 명확하게 나와있지 않습니다.
즉 이유를 추론해야 되는데 있어 착오가 있을 수 있겠다 생각합니다.
특히 규원사화의 내용을 보면 아시겠지만 성리학의 사대주의를 비판하는 부분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 부분과 금서령을 이어서 추론해보았습니다만 음..
                         
서라벌 16-07-05 23:54
   
제가 약간 공격적으로 댓글을 달게 된 건 말도 안되는 같은 주장을 계속 반복하니 답답해서 그런 겁니다. 남의 의견을 듣고 싶어한다기보다는 전형적인 답정너처럼 느껴졌다고나 할까요? 이미 님 생각에서는 위에 언급된 사서들이 전부 금서로 지정된 거고 조선 정부에서 금서로 지정된 책들을 폐기처분한 것이 확실하다는 뉘앙스가 글에서 계속 느껴지니까요.
서라벌 16-07-04 23:57
   
아무래도 이러한 견해는 우리 역사가 식민사관에 의해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사대주의 때문에 우리 민족사가 축소된 부분 또한 크다는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견해인것 같은데, 저는 이러한 견해야말로 일제시대 식민사관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조성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일제가 식민사관으로 조선사를 왜곡할 때 가장 잘 써먹었던 논리가 무엇이죠? 바로 중국에의 사대입니다. 너희 조선은 사대하다 망한 것이다. 어차피 중국에 사대하던 너희들이니 오늘날 우리 일본에 지배당하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논리죠. 결국 꼬마러브님의 주장 또한 사대주의로 자신들 역사서까지 태워버린 조선, 곧 조선을 의도적으로 비하하게 되는.. 과거 일제 식민사학자들 논리에 그대로 따라가는 주장 아닙니까?
     
꼬마러브 16-07-05 07:05
   
저도 일명 '조선까'는 아닙니다만 어느 동전이나 앞면과 뒷면이 있듯이 조선의 뒷면에 해당하는 부분을 글로 쓴 것입니다. 이것을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논리라며 동일시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사대주의에 비판하는 것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논리가 아닙니다. 신채호 선생도 많이 비판하셨던 부분 아닌가요?
특히 저는 신채호처럼 성균관 박사로 임명될 정도로 성리학에 능통했던 자가 조선.. 성리학의 사대주의에 대해 비판한 것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서라벌 16-07-05 08:19
   
사대주의를 비판할 점은 비판해야겠지만 님과 같은 논리는 너무 비약이 심하고 뭐든지 사대탓을 하니 문제입니다. 신채호 선생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분의 연구와 그분의 학설은 존중할 만한 것이 많습니다만 그분 역시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당시 시대상이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한 시기기에 그러한 경향에 대해 이해할만은 합니다만.
서라벌 16-07-04 23:58
   
어찌되었건 현재는 전하지 않는 사서들이고 저 사서들에 관련된 기록 또한 많지 않으니 현재로서는 명확하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혹여나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추가적인 증거나 정황 등이 나오고 설득력있는 논리가 나오지 않는담에야.. 그저 빈약한 추리를 바탕으로 한 자기 주장에 지나지 않지요.
     
꼬마러브 16-07-05 07:05
   
빈약한 추리를 바탕으로 한 자기 주장 인정합니다. 그냥 잡설 정도로 받아주세요. 그냥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어떨까 싶어 글을 쓴 겁니다.
          
서라벌 16-07-05 08:22
   
단순한 자기 주장치고는 아예 확신을 담아서 말씀하시네요. 아주 기정사실화를 하시던데. 위에 님 또한 언급했듯이 세조와 예종이 책을 모아서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태웠으면 태웠다는 기록이 있어야 되는데 전혀 그런 기록이 없죠. 전국적으로 사서를 모아서 그걸 싸그리 불태웠다면, 오늘날 그 기록이 남지 않았을리가 없습니다. 제발 억측은 자제해주세요.
밥밥c 16-07-05 00:53
   
사실 불태웠을 가능성도 높죠.

 이성계조선은 처음 '조선'이라는 국명의 의미를 기자조선에 두고 있었으니, 단군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껄끄러웠을 가능성도 큽니다.

 게다가 말이 사대주의지, 실제로 명나라에 대한 사대는 상상을 초월했죠.

 삼국사기 지리지만 보더라도 미상지명이 300개가 넘어요.

 그런데 이중 상당수는 , 모른다면 절대 사서를 쓸 수 없는 지명입니다.

 생각해보면 삼국사기조차 지명으로 추적조사 자체를 못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라벌 16-07-05 08:28
   
이분도 되게 웃기는 분.. 대체 뭘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거죠? 가생이 참 대단한 곳인거 같습니다. 어디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잡글을 바탕으로 이상한 논리를 내세운다던가 본인 생각만으로 주장을 한다던가 역사를 되게 자기 멋대로 판단 내리는 사람들이 진짜 많네요? 조선이 기자조선에 국명을 두고 있다? 당장 실록에 단군으로 검색만 해도 수두룩 하게 뜹니다. 대부분이 국조 단군에 대한 제사 내용입니다. 단군을 개국 시조로서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기자를 신봉했다고 하나 잘해봐야 단군과 동일상에 놓는 정도였지 결코 기자를 단군보다 앞에 놓은적이 없습니다. 조선에서 단군은 천명을 받아 나라를 개국한 개국시조로서, 기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팔조법을 만들어서 교화를 한 교화의 군주이자 중흥시조로 보며 단군조선을 전조선, 기자조선을 후조선으로 봅니다. 그리고 분명히 언급하기를 기자는 단군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말합니다. 님 논리대로라면 단군을 부정하고 기자부터 내려왔다고 해야 정상이죠.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서라벌 16-07-05 08:35
   
다음은 조선에 중국의 사신으로 왔었던 동월이라는 사람이 쓴 '조선부'에 나와있는 내용을 발췌한 겁니다. 사행길에 평양에 들러서 기자의 사당과 단군묘를 배알한 부분이죠.

'동쪽에 기자의 사당이 있는데, 예에 맞게 나무 신주를 모셨다. 적기를. "조선 후대 시조"라고 하였다. 대개 단군을 높이는 것은 그 나라를 세우고 땅을 열었기 때문이니 의당 기자가 그 대를 이어 왕통을 전하였다고 여겼다. 단군은 요임금 갑진년에 이곳에 개국하였다가 뒤에 구월산에 들어가 마지막은 알 수 없다. 국인이 대대로 종묘를 세워 제사지내는 것은 그가 처음으로 개국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종묘는 기자 사당 동쪽에 있는데, 나무 신주를 모셔 조선 시조 단군 위라고 적었다.'

위에 보시는 바와 같이 중국 사신 또한 언급하기를 기자는 단군의 왕통을 계승하였다고 하였고 대대로 제사까지 지낸다고 하죠. 이래도 조선이라는 이름이 기자조선에서 나온거고 사대부들이 단군을 껄끄럽게 여깁니까? 국가적으로 제사까지 지내는 마당에?
아스카라스 16-07-05 08:18
   
음... 책을 한데모아 불태우려했다기보다
모종의 연유로 모두 극비에 붙여 보호하려 한 게 아닐까요?
어딘가로 유출이 되는 것을 막고자, 뭐 예를 들어 명나라의 눈초리를 사지 않기 위해서라던가
그리하여 모두 궁궐에 모아두려한게아닐까요?

결국 그게 일제시대 때 다 타버리거나 강제회수당했지만
     
서라벌 16-07-05 08:20
   
명확한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는 님과 같은 해석이 자연스러운 해석이죠. 대체 빈약하기 그지없는 자기만의 논리로 왜 자꾸 금서로 지정해서 불태웠다느니 헛소리를 기정사실화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꼬마러브 16-07-05 17:17
   
너무 발끈하시네요. 제 글을 다시 보시길 금서로 지정한 것은 분명하다고 했습니다만 불사질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했지 제가 언제 가정사실화 했습니까; 진나라의 분서갱유와 비유한 것은 좀 심했을 수 있겠네요.

글 -中-

....고려의 행정기관으로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농사와 관련된 천문, 지리학 등의 사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이 책들도 현재 한권도 전해져 오고 있지 않습니다. 이방원이 전부 불사질렀기 때문이지요. 천문, 지리학과 관련된 사무를 하는 관청인 만큼 우리의 소중한 풍습들도 담겨져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안타깝지요.
예종이나 세조 때 위의 책들을 불사질렀다는 내용은 없지만 위의 책들이 현재까지 전해져 오지 않는 점과 특히 예종 때 위의 책들을 바치지 않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기사로 보아 불사질렀다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했냐하면....
               
서라벌 16-07-05 20:10
   
불태운것으로 보입니다나 불태웠다나 그게 그거 아닙니까? 교묘하게 말장난 하지 마세요. 분명 글의 뉘앙스가 거의 확신을 담아서 말을 했으면서 왜 이제와서 발을 뺍니까. 그리고 금서로 지정했다는 것은 님이 일단 반박의 여지 없이 확실하게 기정사실화해서 언급하셨죠? 금서로 지정했다는 것도 님의 망상일뿐 사실로써 증명된 바는 없는데요?
                    
꼬마러브 16-07-05 21:26
   
흐음..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도록 명한 것이 금서령이 아니라 뭡니까?

예종실록 중에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匹)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이 부분에 대해선 님의 의견을 잘 모르겠네요

책을 바친 사람에게는 두 품계를 올려주며 상을 받겠다고 지원하는 사람과 관청노비, 개인 노비에게는 무명 50필을 상으로 준다고 했습니. 그리고 감추고 바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선 다른사람이 신고하게 하고 신고한 사람은 위 사항에 따라 표창할 것이며 감춘 사람은 참형에 처한다.. 이게 금서령이 아니라 뭐란 말입니까?

태종실록 -中-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사처에서 간직하게 못하게 한다.. 이게 줄여서 금서 아닙니까?
                         
서라벌 16-07-05 23:59
   
님은 애당초 금서의 정의를 잘못 내리고 있는 사람이네요. 금서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읽는 것을 금지한 책을 말하는 거죠. 읽지도 말고 소지하지도 말라. 금서로 지정했다는 주장을 하려면 국가에서 이 책은 나쁜 책이다. 읽으면 안 된다 그러니 전부 불태워라 라는 등 금서로 지정하고자 하는 어떤 책에 대해서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님이 주제로 내건 사건은 위에 열거된 사서들에 대해서 개인이 소지하지 말고 중앙 정부에 갖다 바치라고만 했지, 그 사서들의 성격을 부정적인 쪽으로 읽어서는 안 되는 책으로 정의내리지도 않았고 사서들을 모아서 공식적으로 폐기를 하거나 한 것도 아니죠. 님 말대로 금서로 지정한 거라면 국가에서 당당하게 금서로 지정하고 폐기처분 또한 당당하게 했을 겁니다.
                         
서라벌 16-07-06 00:07
   
그리고, 전부 다 떠나서 가장 원론적인 부분으로 돌아가서 생각을 해보세요. 님이 이 글을 쓰신 주제는 결국 이거 아닙니까.
'조선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때문에 단군 등 자신들의 조상을 부정하고자 하였으며 그를 위해 우리 역사를 기록한 상고사서들을 금서로 지정하고 폐기처분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세요. 조선이 사대를 하고 중국을 섬기고 자시고 그 이전에, 조선은 유교국가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중에서도 성리학을 신봉하던 조선에 있어서 가장 우선하는 성리학적 가치가 무엇입니까? 바로 '효'입니다. 효는 단순히 바로 윗세대 부모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대대로 내려오는 조상과 가문 전체로 확산되죠. 조선 사회는 효의 일환으로 지극정성으로 조상을 숭배했습니다. 국가 행사 중에 가장 중요한 행사는 바로 제례이고 각 가정에서도 때마다 제사 지내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조상을 끔찍이 숭배하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고작' 사대주의 때문에 자신들의 조상들을 폄하하고 그 행적을 기록한 역사서들을 금서로 지정하여 폐기처분하려 한다? 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곧 자신들의 통치 이념을 자신들 스스로가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요.
                    
꼬마러브 16-07-06 00:06
   
음 알았습니다. 제가 국어쪽에는 능통하지 못하네요.
다만 위키백과 -금서-를 보면 한국의 금서 조선시대 편에 위의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뭐 물론 위키백과가 신뢰성이 떨어지는 점이 있으니까요

https://ko.wikipedia.org/wiki/%EA%B8%88%EC%84%9C

표준국어대사전에 금서를 치면 이렇게 정의가 나옵니다.

금서03(禁書)[금ː-] 
「명사」
출판이나 판매 또는 독서를 법적으로 금지한 책. ≒금지본.

사처에서 간직하게 못하게 했으니 독서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출판이나 판매는 금지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부분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논쟁하는 것과 비슷하다 생각함 의미 없어 보이는군요.
                         
서라벌 16-07-06 00:10
   
조선 사회에서, 책을 출판하고 판매한다는 개념은 없습니다. 책은 철저하게 학문적인 용도로 사용되었지 돈으로 사고 판다는 개념은 희박했죠. 물론 책을 살 수 있는 서점은 있었지만 서점에서 파는 책은 사서삼경같은 기본적인 책들이고.. 위에 열거한 바와 같이 사료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책은 필사해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거나 국가에 바치거나 했죠.
                    
꼬마러브 16-07-06 00:18
   
죄송합니다만 저는 말을 빙빙 꼬는 그런 타입의 사람은 아닙니다.
글의 핵심은 그냥 글에 나온대로
조선은 위의 책들을 금서로 지정했고 이 금서들을 불태웠을 추측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다면 왜 조선정부는 위의 책들을 금서로 지정했을까? -규원사화 인용-
이겁니다. 특히 규원사화는 조선의 사대의식을 비난한 대표적인 사서이기도 하고 논란이 많은 책이니 흥미롭다는 겁니다.
그냥 그게 다에요. 만약 님의 말대로 글의 주제가
'조선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때문에 단군 등 자신들의 조상을 부정하고자 하였으며 그를 위해 우리 역사를 기록한 상고사서들을 금서로 지정하고 폐기처분했다.'
였다면 제가 확신을 가지고 이에 대해 증거를 더 썼겠지요. 하지만 님도 아시다시피 명확한 기록이 없지 않습니까? 그냥 '의혹'정도는 될 수 있으나 님이 말한 주제처럼 단정짓는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다른사람 몸으로 들어갈 순 없으니 그렇데 느껴졌을지 모르겠으나; 그 부분은 잘 모르겠고요.
댓글에 가서 조선정부가 금서들을 불태웠다는 의혹을 님이 말씀하신건 처럼 '가정사실화'하여 분서갱유에 비유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는 제가 봐도 비약이 심해보이네요.
님과 토론하면서 이런 의혹이 어느정도는 풀린 거 같네요. 의견 감사합니다
                         
서라벌 16-07-06 00:26
   
꼬마러브님 말고도 비슷한 논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그 사람들의 대다수는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잣대를 가지고 비약을 좀 심하게 합니다. '우리의 고대사는 찬란했는데 오늘날 이 역사가 잊혀진 것은 이씨 조선이 세워지고 사대주의에 빠져 자신들 스스로의 역사를 숨기고 왜곡했기 때문이다.' 대충 뭐 이런 논리죠. 저는 이런 논리를 아주 싫어합니다. 일제시대 식민사학자들의 논리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중국에 사대하던 나라 라는 등식을 일방적으로 세워놓고 결국 끝에가서 결론은 조선은 나쁘다, 조선은 우리 역사에 있어서 해악이다, 조선이란 나라는 있어서는 안 되는 나라였다. 라는 식으로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결론이 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대중에 영향을 미쳐 흔히 조선 하면 부정적인 인식부터 떠올리게 되죠. 저는 꼬마러브님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인 줄 알았습니다. 그저 조선은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보려고 하고 맞지 않는 억지와 비약을 통해서 본래보다 사실을 크게 왜곡시키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다만 본인이 말씀하셨듯이 정말 순수하게 남의 의견이 듣고싶어서였다면 글을 작성함에 있어 조금더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심이 좋을 것 같다 생각합니다. 제가 달았던 몇몇 댓글들이 공격적이고 지나쳤다고 생각하신다면 사과 드립니다.
꼬마러브 16-07-06 00:24
   
답글이 안써지네요.

조선 사회에서, 책을 출판하고 판매한다는 개념은 없습니다. 책은 철저하게 학문적인 용도로 사용되었지 돈으로 사고 판다는 개념은 희박했죠. 물론 책을 살 수 있는 서점은 있었지만 서점에서 파는 책은 사서삼경같은 기본적인 책들이고.. 위에 열거한 바와 같이 사료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책은 필사해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거나 국가에 바치거나 했죠.

ㄴ 제가 그 부분을 모르지 않습니다. 위의 금서의 정의의 전제가 최소한 출판하고 판매하는 개념이 생긴 조선후기 때 부터나 대입할 수 있는 정의이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금서와는 정의가 다르겠지요. 만약대입한다면은 출판과 판매는 금지했다고 볼 수 있진 않을까하는 겁니다.
더 가면 사람의 '말'로 그 사물의 가치를 다 표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 라는 철학적인 문제로 갈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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