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용은 국사편찬위원회 -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 에서 발췌했습니다.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 5월 26일 무자 3번째기사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제가 알기로 이 기사에 언급된 책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책은 단 한권도 없는 걸로 압니다. 즉 위의 책들의 내용을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특히 위의『조대기』같은 경우는 고려초 발해유민이 발해역사에 대해 서술한 사서인데요. 발해 멸망의 미스터리와 맞물어 발해 관련 기록이 얼마 없는 현재 상황으로 보아 정말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당시 조선정부는 위의 책들을 금서로 지정했을까요? 위의 책 중 가장 처음으로 언급되는 사서인 『고조선비사』.. 제목만 보아도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고조선의 숨겨진 비밀이라..
혹 위의 책들을 금서로 지정한 게 아니라 국가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분 들이 있을까..
이어서 예종실록을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匹)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
예종실록을 보면 아시겠지만 이번에는 위의 책들을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고 하였습니다. 참형.. 칼로 목을 베는 형벌이요. 국가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명령이라고 하기에는 형벌이 과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금서로 지정했다고 볼 수 밖에 없지요.
또한 세조실록의 나온 책보다 가짓수가 적어졌는데요. 이에 짐작해 추측해보면 세조 때 금서로 지정했던 위의 책들을 불살랐고 아직도 남아있는 책들을 예종 때 다시 불사지르기 위해 수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에는 참형까지 처하면서요.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위의 책들이 한권도 남아 있지 않는지 이해가 됩니다.
불사질렀나는 기록이 어디있냐고요? 태종실록을 보면 이런 기록이 보입니다.
서운관(書雲觀)에 간직하고 있는 참서(讖書) 두 상자를 불살랐다. 풍속이 전조의 습관을 인습하여 음양 구기(陰陽拘忌)를 혹신하여 부모가 죽어도 여러 해를 장사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박은(朴訔)·조말생(趙末生)에게 명하여 서운관에 앉아서 음양서(陰陽書)를 모조리 찾아 내어 요망하고 허탄하여 정상에서 어그러진 것을 골라 불태웠다.
서운관은 고려의 행정기관으로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농사와 관련된 천문, 지리학 등의 사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이 책들도 현재 한권도 전해져 오고 있지 않습니다. 이방원이 전부 불사질렀기 때문이지요. 천문, 지리학과 관련된 사무를 하는 관청인 만큼 우리의 소중한 풍습들도 담겨져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안타깝지요.
예종이나 세조 때 위의 책들을 불사질렀다는 내용은 없지만 위의 책들이 현재까지 전해져 오지 않는 점과 특히 예종 때 위의 책들을 바치지 않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기사로 보아 불사질렀다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했냐하면 위의 금서로 지정된 책들 중 『규원사화』의 참고 사서인 『조대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그 규원사화요. 진본으로 확인이 된..
이 책의 <조판기>와 <태시기>에서는 환인(桓因)이라는 일대주신(一大主神)이 천지를 개창하고, 환웅천왕(桓雄天王, 일명 神市氏)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정을 베푸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즉, 환웅은 신교(神敎)를 선포하고 치우씨(蚩尤氏)·고시씨(高矢氏)·신지씨(神誌氏)·주인씨(朱因氏) 등, 신하의 보필을 받아 366가지 일을 다스렸다는 것이다. 특히, 치우씨는 병기를 제조하고, 고시씨는 농업과 목축을 주관했으며, 신지씨는 문자를 발명하고, 주인씨는 혼인제도를 만들었다. 또한, 복희씨(伏羲氏)는 팔괘를 만들어 음양과 역학(易學)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단군기>에서는 환검(桓儉)으로부터 고열가(古列加)에 이르는 47대의 왕명과 재위기간, 그리고 각 왕대의 치적이 서술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치적이 많은 것은 환검이다. 그는 환웅의 아들로서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에 박달나라 임금이 되어 수도를 길림(吉林)에 두었으며, 9개의 대국과 12개의 소국을 거느려 그 영토는 멀리 요서(遼西)지방에까지 미쳤다.
이 시기에는 문화도 더욱 발전하여 8가(八加)의 관료를 두고, 제천(祭天)을 시작했으며, 8조의 가르침을 지어 백성을 교화하였다. 2대 임금 부루(夫婁)는 큰 홍수를 다스리고 도산(塗山)에서 하(夏)의 우(禹)임금과 만나 화해했으며, 환인·환웅·환검을 제사하여 비로소 삼신(三神)에 대한 제사가 확립되었다.
부루는 또한 중국의 순(舜)임금이 차지하고 있던 중국 동북지방을 빼앗고,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여 옥저·비류·졸본을 거느리게 되었다. 부루 이후의 임금들은 그 치적이 간단히 처리되어 있는데, 47대 임금 고열가에 이르러 제후가 난립하면서 열국시대가 전개되는 것으로 <단군기>는 끝난다.
마지막으로 <만설>에서는 우리 나라가 만주를 잃어버린 뒤 약소국으로 전락한 것을 개탄하면서,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그 첫째는 지리(地利)로써 잃어버린 만주땅을 되찾는 것이고, 둘째는 인화(人和)로써 당쟁을 버리고 단결하는 것이며, 셋째는 보성(保性)으로써 우리 풍토에 맞는 고유문화의 장점을 지니면서 남의 장점도 받아들이는 일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고유문화는 바로 단군시대부터 내려오는 신교(神敎)이며, 주자학은 사대사상의 근원으로서 철저하게 매도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규원사화 [揆園史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정말 흥미롭지 않습니까? 참고로 규원사화는1972년 11월 3일 떄 숙종 때 쓰여진 진본임이 확인 된 사서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정말 흥미롭습니다.
왜 조선정부는 위의 책들을 금서로 지정했을까요? 정말 여러 생각이 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