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조선 태종이 겉으로라도 명에 대해 저자세로 나온 대가로 조선에 엄청난 무역특혜를 제공했다.
황제국은 조공을 바치는 국가들에게 조공의 물량보다 더 많은 회사(回賜)를 내리는데,
태종은 이를 이용해 파격적인 실익을 얻어낸 것이다.
태종: 내가 저자세로 나왔던 것은 조공 특혜를 얻기 위함이었다!
당시 명은 조선과 베트남 그리고 태국은 3년에 1회,
일본과는 10년에 1회, 류큐 왕국과는 2년에 1회 조공무역을 하였다.
그런데 명은 태종이 친명노선을 천명하자 파격적으로 1년에 3회 조공무역을 허용하였다.
그 후에 명나라는 수시로 조공무역을 줄이자며 조선에 요청했지만, 조선은 강하게 거부하였다.
게다가 안 그래도 강한 명나라가 실질적으로 더 강한 파워를 구가했을 뿐 아니라
황제가 정화의 대원정이나 몽골 정벌 등 초대형 이벤트를 거리낌없이 내지르는 인물인데
감히 조선이 대들었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태종이 명에 호의적인 정권이었기도 했지만,
태종이나 영락제나 모두 머리가 비상한 명군들이었고 무엇이 양국 간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알았기 때문에
조명관계는 정도전이 버티고 있고 매우 꼬장꼬장했던 태조 이성계 시기에 비해 매우 우호적으로 변화하였다.
양국간의 이런 관계는 명의 멸망까지 계속되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만동묘까지 지어 기릴 정도로 아주 좋았다.
그리고 태종은 우리 국토만큼은 지킨다는 방침을 세웠고, 재위기간 내내 이 방침을 고수했다.
특히 명이 조선의 동북지역까지 살고 있던 여진족을 직할로 통치하겠다는 소식을 듣자
태종은 즉시 관련 역사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토대로 명의 주장을 반박했으며
심지어는 마지막에 "폐하 아버지께서도 이건 인정한 거니까 태클 걸지 마셈."이라는 말까지 덧붙여
결국 동북지역 여진족을 계속 조선이 관리하라는 말을 받아냈다.
그리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북방 국경의 방비에도 힘을 기울였다.
많을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그저 저자세로만 나가지는 않은 것이다.
이 상황은 영락제 치세를 살았던 세종대왕대에도 더욱 강력한 대여진 정책과 함께 그대로 유지된다.
그리고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당시 명나라는 2~30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자기 공신을 수만명을 죽일 정도로 포악했던 명 태조 주원장이나,
북경, 요동을 관할하던 연왕 주체가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의 제위를 찬탈하고,
명나라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며, 몽골도 박살을 내던 최전성기 시절이었고..
이 와중에 고려가 꼴랑 5만 병력으로 요동정벌을 한다거나..
훗날 조선이 대충 30~40만 군사력을 보유한 국력으로 요동을 정벌한다 이건데..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요동정벌을 내세운 정도전이 피살되고,
명나라에 사신을 다녀와 명나라 황실과 관계를 닦은 태종 이방원이 즉위해서..
친명 외교를 펼쳤고, 그래서 명나라 군사력 최전성기에 전쟁 안하고,
오히려 무역으로 이득까지 봤으니.. 이만한 실리외교도 어려운겁니다.
주원장이 건국 이전에 자기 병력 20만명도 동원 못할 때
주변 라이벌 30~40만 격파하고 다녔는데..
조선 이성계가 암만 날고 기어서 30~40만 동원한다고 해서
명나라 건국 이후의 200~300만 대군 격파한다는건 솔까 난이도가 극악임.
우리가 흔히 아는 조선사회의 모습은 이때부터 만들어진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유교라도 사상적 폭이 굉장히 넓었죠. 심지어 근대의 마르크스적 사상도 유교에 있었고, 그 과격함은 조선초 토지개혁을 단행한 정도전이 울고 갈 정도로 과격했습니다.
또 개중에는 '공자 맹자? 그래서 뭐? 개들 한말 다 틀린 말이다 내 말이 맞다.'라고 하는 유학자도 꽤 되었습니다만, 송시열이 권력을 잡은 후 사문난적이라는 미명하에 다 가지치기 당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송시열도 "설혹 공맹이 살아돌아오더라도, 주자의 해석이 옳다." "그리고 주자의 해석의 해석은 내가 하지~" 이 부류입니다. 사실 송시열은 제 평가에서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 아주 강하고, 학문을 곡해해서 권력에 이용한 자입니다. 심지어 그는 제자 윤증에게도 말빨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힘으로 죽였죠.)
예를 들어, 흔히 황진이와 로맨스로 유명한 서경덕은 급진적 유학자 중 하나이고, 웃긴것이 북한에서 유일하게 찬양하는 조선의 유학자입니다. 마르크스가 할 법한 말을 조선시대때 해서 북한에서 아주 높게 평가 받습니다. 마르크스가 가지는 국가관이 어떤거진 대충은 배워서 아시겠지요? 당장 만민의 농민들이여! 대동 단결하여 조정을 뒤엎고 농민 해방을 이루자. 누가 서경덕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런 결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인조로써는 특히 자신이 반정을 한 인물이기에 더욱 송시열의 손을 들어줄수 밖에 없었죠.
안그래도 호란때문에, 욕먹고 한쪽에서는 광해군을 그리워하는 판인데,
최극단적으로 가면 무정부주의까지 주장하는 유학자들 교통정리하자고 송시열이 말할때
혹 안하겠습니가?
역도가 반역을 일으켜 왕이 되더니 나라를 망하게 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트렸다. 그가 가장 두려워한 말이죠. 특히 광해군의 청에 대한 외교정책과 비교하여 말이 나오고 지방에서 반란이라도 나온다는것은 큰 사단입니다. 그것을 진압한다해도, 후유증은 쉽게 사그러 들지 않습니다. 반란이 일어나면 반란군쪽에서 명분을 세울것이고 곧 말이 돌것이고 이는 지방의 일반 촌부도 명확히 인지 하게 된다는 뜻이죠. 또한 당시 최강국인 청이 내심 좋아 할 인물이 광해군이겠습니까? 인조겠습니까?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해야 될 판입니다. 또 다른 잡설로는 인조가 광해군을 살려두고, 그리 건강에 신경써준것이 그가 착해? 아니면 광해군의 죽음이 청에게 다른 제스쳐로 보일까 두려워서일까요?
윤증의 죽음 이후, 사제간의 논쟁은 사라졌습니다. 대신 사제간 권위적 형태의 학맥이 강화되고 이런 학맥을 통해서 하나의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는 전통이 강화된것이 중앙이라면, 지방은 사원으로 그 형태를 띄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원은 지방의 백성들을 성리학적 윤리관으로 통제하기 시작하고, 또 그때까지 잔여한 지방세력을 억압하게 됩니다.(아이러닉하게도, 조선 말기 이런 사원들이 지방통제력을 상실함으로써 지방 관리와 토호들의 가렴주구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또 잡설로 예전에 방영된 드라마 정도전에 그들의 사제간에 그리고 사형간에 얼마나 피바람이 불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이런 사제간 논쟁이 송시열-윤증 논쟁을 끝으로 사라집니다. 학문적 논쟁과 정치적 대결에서 권위에 복종한 같은 학맥끼리의 정치적 연대로 성격 변화는 조선사에서 중요한 흐름입니다)
다시, 송시열로 돌아가서 그가 한말 "설혹 공맹이 살아돌아 오더라도 주자의 말이 옳다, 그리고 주자의 해석의 해석은 나의 말이 맞다." 를 음미 해 보시길 바랍니다. 방점이 어디에 있는지..
(대개 공맹 주자가 같은 류일거라 흔히들 생각하지만, 그 성격이 다릅니다.. 주자 이전에 공맹에 대한 학문의 주류는 훈고학입니다. 예를 들어 몇백년전의 고대어로 된 로마어가 있다합시다. 완결된 내용이 아니고 띠엄띠엄 있고 중간중간이 빠져있습니다. 학자들이 이를 해석 합니다.
각자 다른 해석이 나오고, 어떤 사람은 파랑이다 하고 어떠 사람은 빨강이라 합니다. 이게 훈고학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가면 무정부주의자도 나옵니다. 반면 주자는 이런 여러 해석가들 중 한명 즉, 여러명의 의견중 보수적 한명의 의견에 불과합니다. 한마디로 훈고학이 각자의 자유가 있는겁니다.)
중화가 중화인 이유는 성리학이 발원했기 때문이고 이런 질서(인조와 송시열의 질서)를 개인간 또 국가간에 유지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조 반정(역모에 대한)의 정치적 명분이기도 합니다. 중화 사상의 핵심은 공맹에 대한 다른 이견을 죽이고(정치적으로 광해군을 지지하던 유학자들, 또 재야의 다양한 의견을 가지 학자들 등의 의견을 억압하는) ,주자의 견해 즉 이를 전파하는 송시열등 당대 위기에 몰린 인조와 집권층의 권위를 성역화 하는 작업의 결과물입니다. 고려말 조선초까지의 유교를 숭모하는 학문적 기풍과 송시열때 이르러 나타나는 교조적 분위기와 구분하여야 합니다. 이런 흐름이 조선의 중화사상을 이해하는데 빠져서 안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말이 길어 이만 줄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