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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5-06 16:02
[한국사] 고려를 아주 우습게 보는 인간들이 있는데
 글쓴이 : 카노
조회 : 5,526  

비록 중기 들어서면서 무신 정권때문에 막장되고 거기에 지금으로 치면 미국같은 당시 전대미문의 슈퍼파워 몽골에게 침략당해서 결국 예속되기는 했지만 전성기 고려는 실로 대단한 나라였습니다.
아래글들을 참조하시길





고려시대는 외부 국가들을 포괄하는 영토개념인 '천하(天下)'를 사용했다. 고려에서 세계와의 관계를 규정짓는 천하관은 그 시대의 주요 외교, 국방문제 처리 방식의 토대가 되었다. 고려시대의 천하관은 군주의 호칭에서 잘 드러난다. 고려가 '천하의 중심국의 군주'라는 뜻의 '천자'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주변국과의 국제관계에서 고려의 자신감을 나타낸다.

 

고려가 군주의 호칭으로 황제와 천자를 사용한 것은 건국 때부터이다. 신라의 경순왕이 귀부를 요청하면서 올린 글에 고려 태조를 천자라고 했다.

 

본국에 화란이 장차 일어날 것 같고, 이미 나라의 운세가 다했는데 다행히 천자의 광채를 뵙게 되었으니 바라옵건대 신하의 예를 갖추고자 합니다. (『보한집』 상권)

 

여기서 천자는 경순왕의 임의적인 표현이 아니라 당시 고려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이 외에 태조 대에는 군주의 정령을 황제의 용어인 조(詔), 제(制) 등으로 했고, 군주의 공식복장을 천자의 색인 자황색으로 했다. 또한 고려사 악지에 실린 고려의 노래인 풍입송(風入松)은 고려 군주를 지칭하는 '해동천자'로 시작된다.

 

해동천자이신 지금의 황제에 이르러

부처와 하늘이 도우시니 교화가 널리퍼져

세상이 다스려지도다.

깊은 은혜, 원근과 고금에 드물어라.

외국이 직접 찾아와 모두 귀의함에

사방이 편안하고 깨끗하여 무기를 버리니

성덕이 요임금, 탕임금에게도 견주기 어려워라.

 

고려시대에 황제라는 호칭을 쓴 사실은 조선이 건국되어 고려사를 편찬할 때 사대의 예에 어긋난다하여 비난을 받았고 모두 고쳐지기도 했다. 논란 끝에 세종 대에 이르러 사실대로 기록하기로 결론이 났으나 본래 용어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누락된 것도 있다. 따라서 지금 전해지는 칭제 관련 자료는 이런 과정을 거쳐 남은 것이다.

 

고려는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 체제를 지향했으므로 군주의 칭호 이외에 궁중용어나 관부의 명칭도 황제가 쓰는 용어를 사용했다. 황제국과 제후국의 용어 차이를 몇몇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폐하(陛下) - 전하(殿下)

짐(朕) - 고(孤)

태후(太后) - 대비(大妃)

태자(太子) - 세자(世子)

황후(皇后) - 왕비(王妃)

태황태후(太皇太后) - 대왕대비(大王大妃)

 

관청 이름과 장관 명칭도 다른데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은 이조판서, 호조판서, 이조참판 등인데 비해 고려는 중국과 같이 이부상서, 호부상서, 이부시랑 등이었다.

 

태조 대에 시작된 칭제는 성종부터 현종 초까지 중단된 적이 있으나 고려 중기까지 이어졌다. 성종 초에 개혁적 사대주의자인 최승로가 고려 왕실의 가계를 가리켜 '황가(皇家)'라 한 것도 당시의 국가제도를 따른 것이다. 고려 전 ~ 중기에 작성된 글에서는 고려의 군주에 대해 공적인 글이나 사적인 글에서도 천자, 황제, 성황, 제(帝)라는 호칭을 사용했으며 폐하, 성상, 성상폐하(聖上陛下) 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고려의 군주를 황제로 인식한 것은 고려인뿐이 아니었다. 여진사회에서 고려의 군주를 천자나 황제로 지칭하는 관례는 뿌리깊은 것이어서 여진이 세운 금나라가 처음 고려에 보낸 국서에서는 "대금황제가 고려국 황제에게 글을 보낸다"라고 하여 고려의 군주를 "황제"라고 지칭했다.

(고려사에는 고려국 왕에게로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고려국 황제가 정확하다. 조선왕조에서 편찬한 고려사는 고려가 황제국을 칭하는 것을 사대의 예에 맞지 않는다 하여 고친 용어이다. 고려에 살던 이승휴는 제왕운기에 고려국 황제로 적은 바, 이는 이승휴가 직접 금나라의 국서를 보았기 때문이다.)

 

고려는 국내와 자국의 세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는 천자, 황제를 자칭했으나 외부의 송과 거란에 대해서는 왕을 칭했다. 이러한 면에서 외왕내제(外王內帝)라 할 수 있으나 주변의 강대국인 거란과 송이 고려의 내부적인 칭제를 알고도 문제 삼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는 인정했다는 점에서 베트남의 경우와는 차이가 난다. 고려의 군주를 천자로 설정한 팔관회에 많은 수의 송나라 사신이나 여진족이 참석하여 고려의 칭제가 널리 알려졌다. 고려 스스로가 황제국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설정한 것이 주변 여러 나라와 교류하거나 대외정책을 결정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참고 : 이윤섭, 역동적 고려사




송나라가 섬긴 대황제국 고려


고려는 건국부터 명실상부한 황제국을 표방하였으며 광종은 개경을 아예 황도(皇都)라고 불렀다.
고려의 궁궐은 황궁을 의미하는 5궁궐이었으며, 고려 황제가 집무하는 회경전에 새겨진 봉황 무늬는 바로 황제의 문양이었다.
특히 송나라의 고려 섬김은 애절하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네들이 꼼짝도 못하고 짓밟혀서 조공을 바치던 거란의 요를 상대로 3차례나 큰 전쟁을 치러 실질적으로 전부 승리하고 특히 3번째는 당시 요나라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궤멸 수준의 대참패를 안겨주었으니 그 얼마나 거룩하고 위대해 보였겠는가?

그들로서는 고려에 매달려야 요를 그나마 견제, 요에 격멸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당시로서는 유일한 대안이었기에 즉, 국가의 존망이 달린 문제였으므로 고려를 섬김에 필사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송나라는 고려 사신 접대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재정이 흔들려서 이것을 비판하는 시인(소동파)도 등장했고, 고려 사신을 접대하는 예법을 적은 책만 3000여 권에 달했다고 한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 도경에서 고려를 찬양하는 글을 많이 남겼는데 "고려 사람들은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민가에서도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우리 송은 목욕을 자주 하지않아 일 년에 고작 몇 번이지만 고려인들은 남달리 청결하여 냇가에서도 수시로 목욕을 했다."라는 기록도 있다.

송나라의 고려 섬기기가 얼마나 극진하였는가는 짱개 숭배의 사대주의에 젖어 있던 조선의 기록에서조차 나온다.
예종 실록에 보면 어떤 신하가 올린 상소문에 "우리나라는 주나라가 신하로 예속시키지 못하고 수나라의 대군이 대패하였으며 당나라가 빈국(賓國)으로 대접하였나이다. 한족의 송나라가 섬겼고 금나라가 부모의 고향이라 했으며 원나라가 조카와 장인의 나라로 삼았나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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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 16-05-06 19:31
   
잘 봤습니다.
krell 16-05-06 22:34
   
유익한 글 잘봤습니다~~
전략설계 16-05-07 00:12
   
거란의 침입을 외세의 도움 없이 고려 자체로 막아낸 것은 대단한 업적입니다.

여진기병 좀 넘어왔다고 50만, 60만이 끌려간 병자호란에 비교하면.

고려 현종때,
병자호란때 넘어온 청나라 군대 정도 군세라면,
집으로 못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추정이 가능한 것은.. 거란의 정예 기병 10만이 넘어온 3차 침입때..
고려군은 초전부터 거란군의 이동경로를 미리 예상해 기습해서 피해를 줍니다.
실제 거란기병 10만을 몰살시킵니다.

병자호란때 인조를 남한산성에 묶은 청군 기병 선발대 같은 경우는..
어느 지점에서든 고려군에 타격되었을 것으로,
10만 병력 정도 가지고 부대가 뭉치지 않고 고려땅에 들왔다가는 아작나죠.
10만이 뭉쳐서 다녀도 몰살당하는데..

당대 세계 최강 거란군대를 자력으로 막아낸 고려를,
누가 무시한답니까..
그 시절 유럽은 1만도 안 되는 병력에 잉글랜드가 정복되던 시절입니다.
일본은 뭐 하고 살았나 모르겠고, 미국은 있지도 않고..

동북아 군대가 세계 최강이던 시절이었습니다.
     
남궁동자 16-05-07 10:57
   
임진왜란으로 여진족 솎아내기가 중지되지 않았다면, 후금은 성립할수 없었고, 인조반정, 이괄의 난으로 북방군이 궤멸되지 않았다면 병자호란이 일어나지 않았겠죠.
          
ddggth 16-05-07 11:07
   
역사를 봐도 뭐를 봐도 옆집 섬나라는 참 민폐만 끼치는 것 같습니다.
          
촐라롱콘 16-05-07 11:43
   
이괄의 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괄의 난 3년후에 발생한
후금이 3만병력 규모로 침입했던 정묘호란에서는 어느 정도 선전하며,
적의 진군을 지연시킬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10만대군의 규모로 침입한 병자호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입니다.

이미 이괄의 난 5~6년 전에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에서는 정예병들이었던
1만3천병력이 후금의 2만 기병과 맞붙어 불과 1시각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절반 이상이 전사하고 이후 나머지 병력은 포로로 억류되었을 만큼
후금-청의 전투력은 가공할 수준이었습니다.
               
남궁동자 16-05-07 14:37
   
또 거짓말

거짓말좀 그만해요 어떻게 동아게에 쓴 글중 거짓말 아닌게 없어?

조선 북방군 절반만 재건됐어도 막을수 있었다는게 후평이고

사르후 전투는 평야에서 수도 더 적은 보병으로 기병을 상대한다는게 처음부터 무리수고, 주력인 명군은 혼자 나대다가 전멸해 버렸는데 왜 제일 중요한걸 쏙 빼놓고 말함?

금방 들통날 거짓말 보기만 해도 짜증나네.
                    
국산아몬드 16-05-07 16:26
   
그리고 결정적으로 후금군과 맞붙었을 때 난데없이 강풍이 불어 조총에 붙은 불을 다 꺼버렸죠. 그래서 기병의 공격에 속절없이 당해버렸습니다
전쟁에서 운은 매우 중요한데 진짜 조선은 지지리도 운이 없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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