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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4-30 22:57
[한국사] 충무공이 죽인 왜군수(추정).jpg
 글쓴이 : 젤리팝
조회 : 6,442  

1.PNG


여담으로 세키가하라 전투때...

임진왜란때 뱃사공이 너무죽어서...

구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거듣고 갑자기 생각나서 글올립니다...

도요토미 3대던가 일본드라마보고있는데...

나왔던가 싶어서 올려봅니다...

여러분도 계산해보세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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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리팝 16-04-30 23:08
   
노가 40개네요 정정

안택선이 노20개에 2명붙었던가...

도요토미가 한번에 2000척 건조했기에

배스펙은 균일하겠죠...

그러니깐 계산하기 참편합니다...

어쨌던 한배에 동일한 균일한 스펙으로

뱃사공 40명씩 탑니다.. 이건머 거의 정확할듯...

일본 문헌 뒤져봐도...

5분만에 만드느라...

앞에 만단위 숫자설명 개판인데... 이해해 주시고...

한배에 66명으로 잡으면 사무라이 18200명으로

고니시 18700명과 거의 일치...

700척 x 한척당 총정원 66 - 뱃사공 28000 = 18200

첨에 넘어올때 숫자계산...

----------------------------------------------------------------------
이순신이 격파한 함선수 1000척으로 잡으면....

총죽은숫자는 70000명가량인데... 뱃사공이...

40000이고...

순수 사무라이는 30000이라는뜻...
흔적 16-04-30 23:37
   
엑박
     
젤리팝 16-04-30 23:39
   
익스플러로 크롬엑박
     
사랑투 16-05-01 00:45
   
엣지, 파이어폭스도 엑박 ^^
촐라롱콘 16-04-30 23:38
   
정유재란 시기에는 왜선의 격군 태반이 조선인이라
왜선에 탔던 조선인들도 상당한 희생을 치렀습니다.

특히 배가 침몰할 경우 배의 최하부에 배치된 격군들은
생존률이 희박했습니다.
     
젤리팝 16-04-30 23:40
   
생존률이 희박하니 계산하니 더편하지요...

조선격군은  최근 명량에서 묘사되서 그러신가본데...

감안해서...

최소 총 60으로잡음

여튼 적편에 서면 적입니다..

머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뱃사공이 거의 없었다하니...

제 계산도 틀리지는 않을듯...

그렇다 쳐도 사무라이 계산은 맞을겁니다...

배는 스펙처럼 뽑아줘서 계산하기 편합...

죽을때는 침몰하면 99% 거의 죽는거고...
          
촐라롱콘 16-05-01 00:06
   
그런데 격침된 왜선이 700척이라는 것은 어떤 근거인가요...??

설마 당시 조정에 올린 조선수군의 장계내용만을 근거로 합산한 것은 아니겠지요..!!

장계 내용대로만 따진다면 육해전을 막론하고 이미 왜란이 발발하고 1년여 안에
이 땅에 들어온 일본군들은 전부 씨가 말라야 정상입니다.

조선측 기록이나 일본측 기록이나 전과기록은 가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나마 가장 근접한 수치는 당시 명나라, 조선, 일본 가운데
명나라군-일본군이  주력으로 싸운 전투는 조선측 기록에서,
조선군-일본군이 주력으로 싸운 전투는 명나라측 기록에서 그나마
어느정도 근접한 전과나 수치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임진왜란에서는 조선에 들어온 전체 일본군 18만 가운데
대략 11만명 가량이 잔존했으니(소강상태 기간 중 조선에 잔류한 2만병력 포함)
대략 7만명이 전사-병사-행불-포로가 되었고....

정유재란에서는 일본군 14만 병력 가운데 7만 5천명 가량이 일본으로 복귀했으니
대략 6만 5천명 가량이 전사-병사-행불-포로가 되었습니다.

전체를 합산하면 대략 13만~14만명 가량의 일본군이 일본으로 복귀하지 못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일본수군은 각각 최대 2만병력 규모였습니다.
합이 최대 4만명 규모이고 물론 이 가운데는 육군에서 수군으로 변경한 병력까지
포함입니다.

당시 일본수군 지휘관들은 일본국내에서 석고 1만석~7만석 규모의 비교적 소규모
다이묘들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각각 거느리고 온 병력 수도
최소 수 백명에서~최대 2,3천명을 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임진-정유재란을 통틀어 일본수군과 선박의 희생율이 1/3 정도 수준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최대 1만 5천명을 상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젤리팝 16-05-01 00:14
   
글을 똑바로 읽고 좀 댓글 답시다...

위에 익스플로러로 들어가면... 총격파 함선수 적어놨고...

1200척 가까이 되여...

가감해서 보수적으로 1000척으로 계산한거고

더보수적으로 900척으로 잡아도...

저정도 나와여....

700척은 고니시 배

계산하려고 예시로 든거에요...

님계산은 순수사무라이 계산이고...

비전투 요원인 수부를 뺀걸로 보이네요...

위에  순수사무라이 최소 20000이라 썼는데...

그래도 님하고  비슷하네요....

하 그리고... 노량해전당시...

시마즈가 해군이었나요??ㅋㅋㅋ

시마즈는 육전이 특기인데....

일본수군 어쩌고 저는게 웃기지요??

고니시는 해군입니까?? ㅎㅎㅎㅎ

걍수송선을 습격해서 죽여도...

한척당 40명 뱃사공 깔고시작하죠...

죽는겁니다...

순수하게 해군하고만 싸우나요 바다에서....ㅋㅋㅋ

그리고 말씀드렸잔아요...

일본측 기록에...

일본 전국에 뱃사공이 씨가말랐다고...

거의 뱃사공이 다뒤졌으니....

세키하가라때...

이런 표현이 나오는거 아닙니까??

건조한게 2000척이고...

기존에 있던거 까지해서...2800에서 3000척

언저리로 계산해서 1/3이라해도 저정도 나오지요...

일본측 기록에...수군이라함은

전문적 수군  신분이 사무라이

아시가루이상을 말하는거고...

뱃사공은 뺀수치겠죠...

뱃사공은 사무라이가 아니니....

당연히 적게 잡히죠...

뱃사공은 조선에서 조차 신량역천인...

천인취급받는 양인이에여

도요토미의 병농분리정책을 아신다면

이해가실텐데...

정확히는 오다노부나가부터...

병농분리 정책을 취해서

군대의 전문화를 지향했습니다...

이건 일본애들이 엄청 자랑하는건데...

일본애들 교과서에 나옴...

수군에 수군이 적게잡힌건...

진짜 사무라이만 적어서 그럴겁니다...

일본역사서에

고니시 700척에 고니시 18700명만 달랑적어놨습니다...

수부까지표현하면... 28000명이 더적혀야하는데...

이게 멀 의미하신는지 알겠죠???

사무라이 신분 이상만 군대로 적은겁니다...

이렇게 된 배경도 적어드렸고...

오다노부나가 도요토미히데요시의

병농분리정책...

사무라이신분의 고착화...

그리고 임진왜란 15만명도...

전부 아시가루 이상만 잡은거지요...

설마 뱃사공을 아시가루로 집어넣었을까요???
                    
촐라롱콘 16-05-01 01:39
   
저는 고니시나 시마즈가 원래 수군이었다고 언급한 적이 없는데요...??

설마 노량해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고니시는 시마즈군이 조명연합수군과
교전하는 사이에 별 손실 없이 빠져나갔고....

시마즈군에 의해서 조선수군총사령관 이순신과 명나라수군 부사령관격인 부총병 등자룡
을 비롯하여 조선과 명나라의 지휘관급들만 10여명이 전사하고 조선과 명나라수군은
각각 수 백명의 사상자를 냈던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물론 시마즈군도 최대 수 천명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큰 손실을 입었지요.....

시마즈군으로서도 큰 손실이 확연히 예상되는 전투에 고니시군을 구원하기 위해서
출전했다는 것이 임진-정유재란 전반을 통틀어 이례적인 일이긴 합니다.

조선과는 달리 일본의 다이묘급 지휘관들은 자기 영지내의 병력과 물자를 동원했기
때문에 혁혁한 전공이나 전리품이 예상되지 않는 전투는 회피하는 경향을 보였고
더구나 커다란 병력손실이 예상되는 전투는 더더욱....

그러나저러나 좀전에는 일본선박 손실이 700척이라 하시더니 이제는 1,000척으로
수정하셨군요...^^ 300척이 고무줄처럼 왔다갔다하네요...^^

그리고 임진왜란에 동원된 일본선박이 3,000척이라는 근거는 또 어딥니까..??
또한 세키가하라전투에서 일본뱃사공을 구하기 힘들었다는 근거는 또 ...??
 
님 말씀대로라면 당시 조선과 일본의 총체적인 국력은 실제보다도 몇 배나 더욱
격차가 벌어지겠네요!

일개 소영주들의 연합체(수군지휘관 영지 모두 합산하여 석고 수 십만석 가량)인
님 말씀대로라면 일본수군이 이시가루만 수 만대군에 격군들은 이시가루의 2배 가까이를
동원할 능력이니....

게다가 3,000척이 바다 건너 원정을 떠날 정도의 막강한 보급능력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란 종전후 불과 2년만의 일본내전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서군 통틀어 무려 15만명 이상을 동원할 수 있었으니....

님 말씀대로라면 당시 일본의 국력이란 조선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는 넘사벽의
존재이고.... 명나라와 비교해도 꿀릴 것 없는 어마무시한 국력을 보여주고 있네요...^^
                         
젤리팝 16-05-01 01:55
   
고려시대때 호족들 군대끌어모아서

923년

정종때 모은것만 30만입니다....

고려는 정말 막강 대국이었겠네....

원래부터 1000척으로 적었는데...ㅋㅋㅋㅋ

700척을 1000척으로 이해한건 님이딸려서....

선그어 줬어요ㅋㅋㅋㅋㅋ

2000척 건조한거는 징비록에 나오죠...

지금도 인터넷 쳐보면 2000척 건조한거 나와요

격군이 아시가루라...

대가리 비었다고 봐야죠

격군  [格軍] 
국어 뜻일을 하는 사람의 곁에서 그 일을 거들어 주는 사람이라는 뜻의 ‘곁꾼’을 이두식 한자로 쓴 말

노젓는 인간을 군대로 보시는거요?? 아하

위에 사진봤어여 안봤어여 ㅋㅋㅋㅋ

도요토미때... 30만 군세중

15만 참여했죠

도쿠가와는 참여도 안했고...

님은 일단 사무라이 신분개념조차 이해를 못하고 있네요 ㅋㅋㅋ

우리나라는 농병일치로... 농민조차 수군에 포함시켜서...

일본보다 높게 잡힌거 이거 이해못하시나요??

사무라이 수를 가지고 국력을 논하는건 아니지요...

농업생산능력은 조선이 일본을 상회했고....

일본뱃사공 이야기는 도쿠가와 3대

일본드라마에서 나와여...

시간나면 쳐보시던가...

명나라에 꿀리니깐

쳐발리고 일본으로 찌그려 졌겠죠?? ㅋㅋㅋㅋ

그리고 드라마 보면

조선원정으로 돈을 다써가지고...

세키가하라당시 어려웠다고도 나오니깐....

전쟁을 지탱하는데는

돈도 필요함을 이제 아시겠죠???ㅋㅋㅋㅋ

전쟁을 대가리수로만 하고

대국이니 어쩌고 하는 초딩같은

생각은 어디서 나왔을꼬....

군대가 있었도 재정력에시 밀리니깐....

개찌그려졌겠죠 ㅋㅋㅋㅋ
                    
촐라롱콘 16-05-01 02:05
   
징비록의 수치를 그대로 인용하신다니...^^

징비록에서는 일본군 규모도 70만 대군의 규모가 되 버리고~~~
탄금대전투에서의 신립이 거느린 조선군 규모도 8만명 수준으로 뻥튀기되어 있지요!

그리고 또 기껏 인용했다는 것이 일본드라마입니까...!!
또 인터넷 검색에 의한 신뢰할 수 없는 믿도 끝도 없는 자료가 인용대상이라니.... 

이제 그만 댓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젤리팝 16-05-01 02:12
   
일본애들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도 적어드렸는데...

하나 사서보세요..

kbs드라마에서는 15만명으로 나오던데...

조선왕조실록도 정확히 일본군 14만으로 파악하는데..ㅋㅋㅋ

도대체 징비록 드라마 어디서 70만이라는건지ㅋㅋㅋㅋ

내가아는 징비록 드라마와 님이아는것과는 다르나....ㅋㅋㅋ

아무리 kbs좆막장이라도... 님한테 설명하는데는 충분한듯



nhk에서 제대로 지들이 고증해서 지네 역사책 인용해서

만든 드라마니깐....

쳐보시든지요...

님이 깔수있는 수준은 아닌듯

도요토미 농병분리정책도 모르고... 수군이 적었네

드립치는거 보니..

내가 찾아줄수는 있는데 한없이 귀찮아서리...

5분만 투자하려 했는데...

댓글달다 시간다보내네..
                         
자기자신 16-05-01 02:31
   
젤리팝//네이버백과사전에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158,700명으로 나와요 수군까지 합하면 약200,000명정도 합니다
                         
젤리팝 16-05-01 02:32
   
네 고맙습니다.

나는 애초부터 추정이라 적었으니...

이의있으신분들은 따로계산해 보삼...

대충준비했더니 태클이 심한네,..
                    
촐라롱콘 16-05-01 09:14
   
징비록도 드라마 징비록이었군요.... -.-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드라마에서 역사적 출처를 인용하시다니.....

상상의 산물인 드라마를 아주 신봉하시는군요~~~

님도 그렇겠지만 저 역시 어제밤에는 시간낭비한 꼴이 되었네요~~~
                         
젤리팝 16-05-02 21:29
   
신봉이 아니고 출처줘도 못알아 쳐먹을거 같네요.. 징비록만 있을까요 ㅋㅋㅋㅋ
젤리팝 16-05-01 01:01
   
아시가루의 변화는 오다 노부나가 이후로 진전되었기에 점진적으로 아시가루는 농민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에서는 아시가루의 지위가 고정되었고 200년 이상 징병이 폐지됐다. 아시가루는 몇 몇 번(영지)에서는 사무라이 계급으로 여겨졌다.

여기서 뱃사공은 농민이하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량역천인....

신분은 양인인데 천민대접을 받았죠...

우리나라는 사농공상인데...

일본은 사무라이 농공상이에요... 도쿠가와때...신분이...

우리랑 비슷해요...

당시 일본수군 지휘관들은 일본국내에서 석고 1만석~7만석 규모의 비교적 소규모
다이묘들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각각 거느리고 온 병력 수도
최소 수 백명에서~최대 2,3천명을 넘지 못했습니다.

이게 사무라이만 표현한거라고 아실거라 믿습니다...

노젓는 인원은 여기에 절대 안들어갑니다...

벤허에서보면 노예들이 배젓는거 못보셨어여???
Centurion 16-05-0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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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부들은 따로 일본 본토에서 징발하여 선박에 태워 보낸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것을 보아,
비전투원(선원,노꾼)들을 합쳐 대단위 병력을 동원했다는 설도 있다.

https://namu.wiki/w/%ED%95%9C%EC%82%B0%EB%8F%84%20%EB%8C%80%EC%B2%A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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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는..
당시 일본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큐슈정벌과 호죠씨 정벌을 통해.. 공포를 남겼고..

임진왜란 때에는..
주로 일본 큐슈, 시코쿠, 츄코쿠 등 서부, 중서부지역의 다이묘들이 1군~9군으로 참전했다만..
그 외에도 10~16군에 이르는 후방 예비대가 존재했고, 이 예비 병력만 사실 10만이 넘어갑니다.

게다가,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동부지역 다이묘들에게도..
전쟁에 참전한 서부지역 다이묘들을 지원하기 위해, 식량, 자금, 무기, 인원을 동원하게 했고,
각지에서 군선 건조를 하게 했습니다.

게다가 군선이 완성되면,
여기에 노젓는 인원을 징발하거나, 고용해서 채워넣어서
히데요시가 머물던  큐슈의 히젠 나고야성 앞으로 보내게 했습니다.

요즘같이.. 거제도나 울산의 조선소에서 몇개의 도크에서 연속적으로 배를 건조하는게 아니라..
각 지방에서 할당량 채우는 형식으로 건조하는 것이었죠.

이건 조선도 마찬가지인데, 칠천량 이후.. 13척 밖에 없던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서..
인구가 부족한 읍은 여러개 뭉쳐서 한 척 내지 그 이상을 건조하게 하고..
인구가 많은 읍은 몇척씩 건조하게 하는 등.. 할당량을 줘서 감독관을 파견해서 건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노량해전 때엔 그 정도 규모라도 재건이 된 것이죠.

어쨌든, 일본 수군은 전투병만 계산한것이고...
특히 알 수 있는게..

한산대첩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경우엔..
사실 병력이 1500~1600명 정도 수준의 히데요시의 가신 출신인 군소 다이묘였는데..

대략 대선 73여척(대선 36척, 중선30척, 소선10척)을 끌고 나타납니다.
이걸 1500명으로 나누면 척당 20명 밖에 안돌아가게 되는데,

와키자카가 한산도 출동 이전에 추가 병력 보충을 받거나,
다른 소규모 영주와 합세했거나 해서.. 전투병력을 대략 2천~3천 정도로 늘린 상태에서,
본래 배에 배치된 노젓는 인원이 있어야만, 그만한 선단을 운용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일본수군 9450명은.. 순수 전투병력이고.. 와키자카는 그 명단에서도 1500명으로 나와 있을 뿐입니다.
일본 기록에도 노젓는 인원은 별도 징발인게 드러나있고, 얘네들 죽은건 솔직히 일본 기록에 포함도 안된거죠.

일본 수군 다이묘들 입장에서야,
어차피 배에 배속된 노젓는 인원들은 자기 병졸이 아닌...
다른 다이묘들이 할당량 채우느라, 배에 소속시켜 보낸 인원들이니.. 관심 밖... 아웃 오브 안중..
     
국산아몬드 16-05-01 19:03
   
중국식으로 군대수를 계산하면 임진,정유재란 포함해서 30만이 아니라 거의 70만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수군에 수부를 빼듯이 육군에는 공병대나 수송대, 잡역부를 뺀 수치가 30만이니까 70만 정도 될 것 같고 그중에 병사가 15만 정도가 죽었으니 실제 사망한 왜군은 30~40만 정도 되겠네요. 게다가 원균 휘하 소수 병사들이 나무 베러 일본 잡역부를 덥쳤다가 역공당해서 전멸 당한 사례도 있으니 그 들의 무술실력도 수준급인 것 같으니 당연히 군사수에 포함시켜야죠. 생각보다 일본이 대규모로 쳐들어 왔고 그 것을 막아낸 조선이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히데요시가 더 이상 징발할 병사가 없다고 한탄했다는데 충분히 이해가 가네요. 조선에서 30~40만이 청년들이 죽어갔으니 말입니다
동방불패 16-05-02 15:36
   
임진왜란 훨씬전부터
일본은 우리 때문에 많이 죽었조
고구려 백제 패망후
일본으로 건너가고 일본 의 핵심세력이 되서
한반도에서 하던 집안싸움이 일본으로
가서는 본격적으로 일본사람 장기말삼아
집안싸움 했조  그때  자국의 명분없이  한반도 신들의 장기말로 거룩하게 죽은  일본사람 따지면
임진왜란때 죽은 일본인보다 많지 않을까요
일본이 지금이야 머리가 많이컸지만
옛날 땅파먹고 살던 아이들 인간 만들어준게
바로 우리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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