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요시는..
당시 일본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큐슈정벌과 호죠씨 정벌을 통해.. 공포를 남겼고..
임진왜란 때에는..
주로 일본 큐슈, 시코쿠, 츄코쿠 등 서부, 중서부지역의 다이묘들이 1군~9군으로 참전했다만..
그 외에도 10~16군에 이르는 후방 예비대가 존재했고, 이 예비 병력만 사실 10만이 넘어갑니다.
게다가,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동부지역 다이묘들에게도..
전쟁에 참전한 서부지역 다이묘들을 지원하기 위해, 식량, 자금, 무기, 인원을 동원하게 했고,
각지에서 군선 건조를 하게 했습니다.
게다가 군선이 완성되면,
여기에 노젓는 인원을 징발하거나, 고용해서 채워넣어서
히데요시가 머물던 큐슈의 히젠 나고야성 앞으로 보내게 했습니다.
요즘같이.. 거제도나 울산의 조선소에서 몇개의 도크에서 연속적으로 배를 건조하는게 아니라..
각 지방에서 할당량 채우는 형식으로 건조하는 것이었죠.
이건 조선도 마찬가지인데, 칠천량 이후.. 13척 밖에 없던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서..
인구가 부족한 읍은 여러개 뭉쳐서 한 척 내지 그 이상을 건조하게 하고..
인구가 많은 읍은 몇척씩 건조하게 하는 등.. 할당량을 줘서 감독관을 파견해서 건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노량해전 때엔 그 정도 규모라도 재건이 된 것이죠.
어쨌든, 일본 수군은 전투병만 계산한것이고...
특히 알 수 있는게..
한산대첩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경우엔..
사실 병력이 1500~1600명 정도 수준의 히데요시의 가신 출신인 군소 다이묘였는데..
대략 대선 73여척(대선 36척, 중선30척, 소선10척)을 끌고 나타납니다.
이걸 1500명으로 나누면 척당 20명 밖에 안돌아가게 되는데,
와키자카가 한산도 출동 이전에 추가 병력 보충을 받거나,
다른 소규모 영주와 합세했거나 해서.. 전투병력을 대략 2천~3천 정도로 늘린 상태에서,
본래 배에 배치된 노젓는 인원이 있어야만, 그만한 선단을 운용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일본수군 9450명은.. 순수 전투병력이고.. 와키자카는 그 명단에서도 1500명으로 나와 있을 뿐입니다.
일본 기록에도 노젓는 인원은 별도 징발인게 드러나있고, 얘네들 죽은건 솔직히 일본 기록에 포함도 안된거죠.
일본 수군 다이묘들 입장에서야,
어차피 배에 배속된 노젓는 인원들은 자기 병졸이 아닌...
다른 다이묘들이 할당량 채우느라, 배에 소속시켜 보낸 인원들이니.. 관심 밖... 아웃 오브 안중..
중국식으로 군대수를 계산하면 임진,정유재란 포함해서 30만이 아니라 거의 70만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수군에 수부를 빼듯이 육군에는 공병대나 수송대, 잡역부를 뺀 수치가 30만이니까 70만 정도 될 것 같고 그중에 병사가 15만 정도가 죽었으니 실제 사망한 왜군은 30~40만 정도 되겠네요. 게다가 원균 휘하 소수 병사들이 나무 베러 일본 잡역부를 덥쳤다가 역공당해서 전멸 당한 사례도 있으니 그 들의 무술실력도 수준급인 것 같으니 당연히 군사수에 포함시켜야죠. 생각보다 일본이 대규모로 쳐들어 왔고 그 것을 막아낸 조선이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히데요시가 더 이상 징발할 병사가 없다고 한탄했다는데 충분히 이해가 가네요. 조선에서 30~40만이 청년들이 죽어갔으니 말입니다
임진왜란 훨씬전부터
일본은 우리 때문에 많이 죽었조
고구려 백제 패망후
일본으로 건너가고 일본 의 핵심세력이 되서
한반도에서 하던 집안싸움이 일본으로
가서는 본격적으로 일본사람 장기말삼아
집안싸움 했조 그때 자국의 명분없이 한반도 신들의 장기말로 거룩하게 죽은 일본사람 따지면
임진왜란때 죽은 일본인보다 많지 않을까요
일본이 지금이야 머리가 많이컸지만
옛날 땅파먹고 살던 아이들 인간 만들어준게
바로 우리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