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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4-28 21:21
[한국사] 임란때 일본군의 배의 수
 글쓴이 : 북명
조회 : 4,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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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왜놈의 배의 수를 잘못 알았네요. 수정합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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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랭이해 16-04-28 21:22
   
그림 안보여요~
     
북명 16-04-28 21:26
   
네 수정할게요
북명 16-04-28 21:25
   
총 9회로 계획했고 18700인이 건너오는데 700척이네요.
아래 나머지 8회의 인원수를 보면 평균700척 정도를 보면 될거 같습니다. 
그렇다면 총 6300척이 건너오기로 계획되었네요. 인원은 대충20만명 정도...

더 놀랍네요. 6000척이라... 이게 가능한건지... 일본배의 크기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세요.
판옥선과 별다르지 않아요.
     
mymiky 16-04-28 21:31
   
판옥선과 일본 후키부네?였나는 크기 차이 나는데요-.-;;
          
북명 16-04-28 21:44
   
그렇네요...탑승인원이 120대 70이니 반 조금 더 되겠네요...
               
구름위하늘 16-05-02 13:41
   
잘못 알고 계시는 군요.
옛날 배들이 규격화된 형태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판옥선의 평균 크기는 세키부네(관선)가 아니라
그 상위급인 아타케부네(안택선)과 비슷합니다.

일본은 안택선을 임란 후기에나 조금 사용했고요.
그 것을 부르는 별명이 바다위의 성입니다.

판옥선 vs 세키부네의 싸움은 공성전과 비슷한 정도로 크기와 높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조선해군이 압도적으로 싸울 수 있는 근본 이유 중에 하나 이지요.

임난 해전을 그린 일본 군화를 보면 공성전을 하듯이 아래에서 판옥선을 공격하는 그림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상선이라고 부르는 판옥선 중에서 대장선은 일반 판옥선 보다 상당히 더 큽니다.
북명 16-04-28 21:46
   
제목은 임란 당시...1차해전이지만, 실제로는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을 중심으로 올린것임을 알려드립니다.(본문은 글씨체를(?) 짧게 하겠습니다^^  1차 출동은 경상우수사 원균이 옥포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구원을 요청하여 이에 전라좌수영이 응하여 출동하게 된다. l차 출동시 총 전함수는 85척이지만, 전투함이라고 할 수 있는 판옥선은 24척에 불과하고 그 외는 협선 16척, 포작선(어선) 46척으로 이런 배는 전투에는 참가할 수 없었고 보급품 운반과 연락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에서 보듯 포작선(어선)을 다수 징발,동원한 것은 적에게 세력을 과시할 목적인것으로 추정.
     
북명 16-04-28 21:46
   
          
북명 16-04-28 21:48
   
이정도면 조선의 전함도 세키부네와 동일한 크기로 보고 계산해도 되겠군요... 포작선이 세키부네보다 작다면요... 일본은 전쟁 중간부터 아카네를 주로 이용했으므로...
하여튼 배의 크기는 양군이 동일하다고 보고 계산하면 뭐 크게 이상하지 않을거 같군요.
               
mymiky 16-04-28 21:51
   
포작선이란거 자체가, 위에 어선이라고 적여있듯이,  애초에 전함이 아닙니다.
뒤에 들러리용..
전함(戰艦)- 싸움할수 있는 배를 의미하는데..
무슨, 세키부네랑 동일한 크기로 보고 계산을 한단말인지?;;
                    
북명 16-04-28 21:52
   
총 전함수가 85척인데 판옥선이 24척 협선 16척 포작선 46척 아닌가요? 그렇다면 전쟁을 위해 출동한 전함 총 85척이죠...
                         
mymiky 16-04-28 21:55
   
아니죠-.- 위에도 적으셨잖아요.

 l차 출동시 총 전함수는 85척이지만, 전투함이라고 할 수 있는 판옥선은 24척에 불과하고 그 외는 협선 16척, 포작선(어선) 46척으로 이런 배는 전투에는 참가할 수 없었고 보급품 운반과 연락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에서 보듯 포작선(어선)을 다수 징발,동원한 것은 적에게 세력을 과시할 목적인것으로 추정

본인이 복사해 붙이고, 내용 확인 안 하시나;;

판옥선 외 나머지 배들은, 뒤에 들러리용이라고 위에 쓰여져 있잖습니까?
실질적인 전투싸움은 판옥선이 한거죠.
               
구름위하늘 16-05-02 13:47
   
동일 하지 않아요. 정말... 참....

아타네부네는 일본 애들의 대장선 급입니다. 판옥선은 우리의 일반 전함이고요.
그 두 개가 크기 비슷합니다.

아타네부네에 해당하는 판옥선의 상선(절도사나 통제사가 탑승하는 더 큰 판옥선)은 아타네부네 보다 더 크고요.

정상적으로 두 함선의 크기가 같다면 임란의 해군 전과는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이순신 장군의 준비와 정찰이 대단한 것이여 그 전과를 확대했지만요.

세키부네와 판옥선의 크기가 같다는 것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극적인 설정이지요.
북명 16-04-28 21:54
   
일단 10미터 정도의 배 6000척이라고 보면 되겟네요... 근데 이게 부산항에 다 들어올 수가 있나? 과거에는 항만이라는거도 없을거고 포구정도 수준이었을텐데...
     
mymiky 16-04-28 21:57
   
걍.. 대다수는 인근 바다에 떠다녔거 같은데요.
          
북명 16-04-28 21:59
   
봤나요? 10미터 배가 인근 바다에 떠다니면? 그 배가 온전할 거로 보시나요?
7년이나 전쟁했는데 여름과 겨울을 생각하면 그게 말이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북명 16-04-28 22:04
   
l차 출동시 총 전함수는 85척이지만, 전투함이라고 할 수 있는 판옥선은 24척에 불과하고 그 외는 협선 16척, 포작선(어선) 46척으로 이런 배는 전투에는 참가할 수 없었고 보급품 운반과 연락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총 전함수는 85척... 판옥선 24 협선 15 포작선 46 ... 요거 다 합하면 85잖아요...
즉 포작선까지 전함 수에 넣은거 잖아요... 글 좀 제대로 이해하세요...

님 말대로라면 전함24척이 출동한거죠...
     
mymiky 16-04-28 22:10
   
네- 맞아요.
실질적으로 싸운건 판옥선 24척이죠.
     
구름위하늘 16-05-02 13:49
   
협선 까지는 전투에 참여 가능해도
그 이하는 연락선 역할이지 전투선이 아닙니다.

대충 판옥선이 구축함이고 협선은 고속정 쯤이지요.
일본 해군의 세키부네는 호위함 쯤이고요.
mymiky 16-04-28 22:08
   
한창 명량이 흥행하던 시절에, 동아판에 왜란에 관련된 글들 많이 올라왔습니다.
거기서, 조선배랑 일본배 비교하는 글들도 있고요.
뭐,, 뒷쪽 페이지 계속 가셔셔  한번 찾아 보시던지요..
또는
http://gwonart.blog.me/220115992551
 
이 싸이트에 배크기 비교해논 cg가 있군요. 참고하시길.
북명 16-04-28 22:12
   
그 당시의 부산항에 배를 댈 수 있는 크기를 알아야 하겠군요... 그럼 일본군이 10미터짜리 배 6000척을 가동할 계획을 수립한거하고 모순되는 점을 발견하면 되는거고요.. 일단 일본에서 떠난 배는 모두 부산항으로 입항했다니깐..
     
촐라롱콘 16-04-28 22:36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수군은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조선의 지휘부의 우려와는 달리
다행스럽게도 수륙병진정책이나 제해권확보에는 비교적 무관심했습니다.

임란 초기의 일본수군의 주요작전범위는 일본군의 출발지인 규슈 나고야-일기도-대마도-부산
으로 이어지는 병참선을 확보하는데 주력하였고,  개전 후 한 달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서서히 서진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명확한 전술-전략목표가 부재한 상황에서 서해방면으로의 서진도 이순신의 조선수군의
벽에 부딪히게 되자 우왕자왕하게 됩니다.

또한 조선과 같이 지휘계통이 일원화된 것이 아니라 여러 영주들의(비록 일본영내에서의
영지규모와 생산력의 차이는 있지만) 연합체이다 보니 지휘계통도 모호하여(이는 일본육군도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한 마디로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마냥 총대를 메고 난황을 극복하려는
의지도 부족했습니다.

이는 당시 조선에 출전한 육군-수군지휘관에 해당하는 거의 대부분의 영주들이
자기재산이라 다를바없는 자기영지에서 병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상당한 출혈이 뻔히 예상되는
전투는 회피하려는 경향을 나타냈습니다.
Har00 16-04-28 22:12
   
6000여 척이 필요할까요?
6000여척이 있다면 한번에 넘어오지 굳이 9번으로 나누어 넘어 올 이유가 없겠죠?
     
북명 16-04-28 22:14
   
전쟁은 그게 아니죠... 선발대 ... 본진... 후발대 이렇게 하는게 상식이잖아요.
그리고 그건 제가 말한게 아니고 책에 일본군의 계획서가 나왔으니까 말하는거잖아요...
          
Har00 16-04-28 22:20
   
2차 대전 상륙 작전을 보죠.
단번에 전 병력을 수송하나요?
선발대를 수송한 상륙선이 되돌아 오면 연이어 그 배에 다시 싣고 투입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단번에 모든 병력을 수송 가능하다면 단번에 조선 삼면을 동시에 침략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굳이 교두보를 장악하려는 방법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 계획서는 일본이 보유하고 또 지속적으로 생산 가능한 건조 함수를 고려해서
9번으로 나누어 침공하겠다는 계획일 뿐이겠죠.

보다 정확한 것은 각 대가 언제 조선에 도착햐했느냐를 보면 대략 짐작 가능할 겁니다.
mymiky 16-04-28 22:17
   
그 배들은 조선에 상륙하면 군인들 내려주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태워오고 그랬던 것일까요? ㅋ
북명 16-04-28 22:17
   
음... 왔던 배가 다시 돌아가 군인을 싣고 올 수도 있겠네... 육군은 배가 필요없으니... 그래도 불멸의 이순신보면 수천척이라고 하던데... 좀 어렵네...
북명 16-04-28 22:20
   
그럼 현재까지는 문제되는 점은 카톨릭깃발만 남은거로군...
북명 16-04-28 22:31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로 추정됩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왜장의 멘토였던
세스베데스 예수회신부의 기념비입니다.
세스베데스 예수회 신부는
임진왜란때 왜군에게 세례를 베풀고 미사를 드렸습니다.
     
북명 16-04-28 22:32
   
어떻게 로마카톨릭 십자가 깃발을 들고
왜군들은 조선 양민들을 잔인하게 죽였고
조선을 침략했는지 살펴보아야 하며,
그 의문점에 대해 답을 해야 합니다.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합니다.
임진왜란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다양한 해석을 하겠지만,
간과되고 있는 소수 의견은
동북아지역의 십자군 침략전쟁 입니다.
아시다시피 유럽중세 십자군전쟁은
로마카톨릭과 연관이 높습니다.
마찬가지로 임진왜란은 로마카톨릭과 연관이 있으며
예수회와 연관이 있습니다.
          
북명 16-04-28 22:32
   
기리시단 성화(切支丹聖畵)에 나타난 십자가이며,
흐릿하게 IHS 예수회 이니셜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그들을 기리시단으로 불렸고,
조선침략 실패로 그 여파로
천주교 박해의 단초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16세기 중반 예수회 신부들에 의해
일본에 로마가톨릭 신앙이 유입되었는데
일본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기리시단’이라 불렸으며
처음 50년 동안 기리시단은 크게 유행하였으나
일본의 통치자 토요토미와 도쿠가와가 잇달아
기리시단 금압령을 발표하고 선교사를 추방한 후
기리시단을 박해, 수천 명의 기리시단 순교자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북명 16-04-28 22:33
   
북명 16-04-28 22:41
   
이글만 보면 임란실패가 천주교박해의 원인이었던거 같군요...
mymiky 16-04-28 22:44
   
천주교 박해는 왜란 일어나기 이전부터 있지 않았나요?
뭔가 앞뒤가 이상한데-.-;;

대륙정벌을 실패해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다?
     
북명 16-04-28 22:47
   
일본의 기독교 역사는 16세기 예수회 신부인 에스파냐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의 전도로 시작 되었다. 기리시단은 일본의 카톨릭 신자를 부르는 이름이다. 처음 50년 동안은 번성 하였으나 도요토미, 도쿠가와 시대에 핍박으로 수천 명의 순교자를 낳았다. 이후 19세기까지 숨은 기리시단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는데 이때 지방의 기리시단들은 불교도로 위장하여 혼합적 종교로 살아남게 되었다. 이 그림 역시 불교의 보현 보살(십자가 바로 아래 그림)에다 십자가와 예수의 라틴어 머리글자 "IHS" 를 새겨 놓고 예배시 사용 하였다. 십자가 부분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이 그림은 일본 남부 시고쿠 지방 츠시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명 16-04-28 22:48
   
               
북명 16-04-28 22:48
   
이 글은 임란하고는 상관이 없는 글입니다...

히데요시가 탄압을 했다면 고니시의 선발대가 카톨릭깃발을 들게 하지 않았을겁니다. 물론 이에야스는 충분히 가능하지만... 히데요시가 죽기 직전쯤에 일어났을 수는 있지요

꼭 그렇게 만은 볼 수는 없는게 민심회복용으로 천주교저격을 할 수는 있지요... 냄새는
나지만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으니 머...
                    
mymiky 16-04-28 22:55
   
일본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들어 온 것은 1549년이다. 예수회 소속 신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스페인 출신으로 인도에서 선교하다 일본행)가 큐슈 남단 가고시마에 상륙해 당시 세력가인 오다 노부나가의 승낙을 받으면서 크게 전파돼 나갔다. 기독교도의 수가 70년 간 80만 명으로 불어나 일본 전체 인구의 5~6%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직전인 1587년 기독교가 서양세력 침략의 통로로 이용되고 일본의 통치이념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텐렌(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다. 일본의 정체성과 전통문화가 와해되고 국가지배 체재가 붕괴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면에는 다케다 신겐,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으로 이어지는 군벌 세력들의 오랜 전쟁과 권력다툼으로 인한 국정혼란을 덮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mymiky 16-04-28 22:58
   
이미, 왜란이 벌어지기 이전부터 토요토미는 기독교 세력을 견제하였습니다.

드라마 징비록에서도 나오는데요-.-;;

고니시보고 너 아직도 기리시단이냐?
고니시가 아니라고 하면서 핑계대는 장면 나옵니다.
고니시가 퇴장하고, 가토보고, 고니시가 거짓말이 많이 는거 같다면서
고니시를 다 믿지 않지만, 조선과의 일이 있으니 지금은 쟤를 밀어준다는 식으로 대사칩니다.

제가 알기로도, 왜란전에 일본에 기독교가 썩- 좋은 대접은 아니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님이 갑작히 그리 말씀하셔셔;;
                         
북명 16-04-28 22:58
   
그럼 고니시의 깃발은 지맘대로 들었다 이말씀인가요?  두 가지 경우가 있다면 그 당시의 상황을 보고 판단해야죠... 일단 고니시가 카톨릭깃발을 들고 성전을 내세웠으니 히데요시도 당근 알았겠죠... 물론 그 전에 잠시 박해는 있을지언정 전쟁시에는 허용했다고 봐야겠죠... 그리고 임란 실패 후에는 19세기까지 계속 박해로 이어지니까요...
                         
mymiky 16-04-28 23:03
   
님의 말씀처럼 일단은, 당장 조선 먹는게 중요하니, 눈감아 준건 있겠죠.

근데, 그리스도교가 탄압받는 이유는, 뭐,, 동양권과 문화차이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모두가 하느님 아들딸들이고, 평등하고 어쩌네 저쩌네..

하는 말들이, 봉건제적 사회의 신분제를 뒤흔드는 발언이였는데다

왕도 백성과 평등하고, 뭐 이런게 당시엔 거의 반역죄? 같은 느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역시, 뭐 명목상 일왕이 있지만, 통치자는 쇼군이였고-
그러니까 토요토미 본인이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딴 소리를 기리시단들이 하니까 아니꼽게 보는 면은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북명 16-04-28 23:01
   
그건요 세스페데스가 조선에서 선교할동을 할려면 얼마든지 그런 핑계를 댈 수 있는거죠... 만약 세스페데서가 앞장서서 깃발을 들었다고 한다면 나중에 전쟁에서 승리해도 선교활동은 자유롭지 않을테니까요.. 즉 유성룡에게는 고니시의 개인일탈이라고 설명해줘야 세서페데스의 명분이 서는거죠...
아메리카에서 선교사들이 한 행동은 앞에서 웃고 뒤에서 칼을 겨누었으니까요...충분히 가능성 있죠. 그러니까 우리는 상황을 봐야하는거죠... 유성룡이 잠시 목격하는 장면보다는 실제 벌어지는 일이 더 신빙성이 있겠죠.
     
mymiky 16-04-28 23:08
   
고니시 가문의 문장 자체가, 나팔속에 십자가 문장인데.
당시, 일본 장군들은 저마다 자기 집안 문장을 내걸고 싸우는게 일상이라..
고니시도 그랬던거죠.

http://blog.naver.com/braveattack/220080251706

고니시 유키나가 집안문장입니다.
          
북명 16-04-28 23:12
   
님 카톨릭 믿으세요? 저건 유형이 비슷하다하나 모양이 다르잖아요... 그런데 카톨릭문양과 깃발의 문양은 아주 똑같습니다... 정확히 일치해요...
               
mymiky 16-04-28 23:13
   
저의 종교는 불교고

모양이 다르다니요?
어차피  십자가 문양은 여러가집니다만?

http://blog.naver.com/acoloje/220558978389
다양한 모양의 십자가들..
     
촐라롱콘 16-04-28 23:34
   
1만 8천 규모였던 고니시 유키나카가 수장인 제 1군 가운데
고니시 영지에서 동원한 병력은 7천 규모입니다.

나머지는 대마도주를 비롯한 몇몇 소영주들의 병력들이고,
비록 고니시군에 배속된 소영주들이라 하더라도 일본내에서는 염연히 석고 1만석 이상의
다이묘이기 때문에, 조선군의 경우처럼 지휘계통이 완전히 일원화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1만 8천 전병력이 카톨릭의 기치아래 움직인 것은 아니며,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땅을 밟은 시기도 왜란 초기가 아니라 이미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철수한 이후에 조선땅을 밟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을 침략했던 여러 다이묘 가운데 그나마 고니시는 비교적 온건파에 속했고
또한 조선-명나라와의 협상의 끈을 계속적으로 지속시키려 노력했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조선군민 학살로 악명이 높았던 가토오 키요마사, 쿠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나오시게
깃카와 히로이에 등과는 달리, 코니시군은 평양까지의 왜란 초기 진격로 상에서의 전투들을
제외하고는, 대량으로 조선군민을 학살한 사례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북명 16-04-28 23:10
   
우리도 그렇잖아요... 개인 간에 일어나 일은 그 벌어지는 상황이 중요하지 한 쪽이 변명하고 핑계대는 것이 중요하지 않잖아요... 선발대 19000명이 카톨릭 깃발을 든다는 것은 이미 히데요시가 성전으로 인정하고 했다는 것이 더 믿음이 가죠...  고니시 개인이 방안에서 뭔가를 했다면 몰라도 이건 군대입니다. 후에 서양에서 그렇게 조작할 수 도 충분히 있죠...
     
mymiky 16-04-28 23:13
   
도요토미는 애초에 기독교 신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기독교적 의미의 성전으로 인정하고 말고가 없죠.

걍. 무조건 전쟁에서 이기는게 중요할뿐이지..
자기 부하의 개인 종교취향을 잠시 묵인한 것일뿐입니다.
          
북명 16-04-28 23:16
   
아메리카에서 선교사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세요... 원주민들 죽이는데 정찰병역할을 했어요... 유럽에서 십자군전쟁도 교황청에서 주도한거고요... 그들은 전쟁이라면 환장을 해요 아주... 천년간이나 그랬는데 무슨 개인의 일탈이라니...
               
mymiky 16-04-28 23:19
   
아주 잘 알죠-.-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영화 미션 안 보셨나요? ㅋㅋㅋ

근데, 왜란은 교황청에서 하라고 한 전쟁이 아닙니다.
걍. 세스페데스 신부가 고니시랑 친하다보니, 조선까지 종군신부로 온거지.

게다가, 개인 일탈이라니요? 전 그런 말 한적 없습니다만?
뭘 말하고 싶으신건지?
               
그네히메 16-04-29 13:05
   
님이 무슨 얘기할려고 하는지 짐작은 되지만 이번 사안은 무리네요,
고니시 집안 문장에 십자가 넣은 단초 하나로 임란이 십자군전쟁으로 바뀌다니...
고니시가 조선 출병한 것은 기독교 전파하러 간 게 아니잖아요.
약탈이라는 측면에서야 십자군원정과 임란이 비슷하나,
피에르의 독려와 십자군 결성을 세스페데스와 고니시 가문의 출병으로 대치하다니 참..
               
구름위하늘 16-05-02 13:54
   
일본에서 기독교가 환영받는 종교도 아니었고,
고니시가 기독교 신자는 맞는데
나머지는 모두 반 기독교 (정확하게는 반 종교) 성향이 강했습니다.

물론 종교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저 즈음에 종교를 빙자한 반란이나 세력들이 많아서 대부분의 영주들이
토착 종교 집단과의 싸움을 많이 했거든요. 종교집단을 대부분 좋아하지 않음.
(당시 종교 집단이 일종의 정치군사집단화 상태라서 ...)

혹시 관심있으면 대망이라는 일본 소설을 한번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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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 [한국사] 강단과 언론의 추악한 학언 커넥션을 폭로하다 (6) 징기스 06-11 976
1199 [한국사] 강단 독재의 둑이 무너지다 (3) 징기스 06-11 1078
1198 [한국사] 고구려 평양의 진실 징기스 06-11 1011
1197 [한국사] 낙랑국 과 낙랑군의 경계선 (3) 도배시러 06-11 912
1196 [한국사] 삼국사기로 본 낙랑과 대방의 성격과 위치 (30) 감방친구 06-11 1867
1195 [한국사] 사학과를 가야 하는가 (3) 감방친구 06-11 1094
1194 [한국사] 험독현의 위치? 과연 대륙 요서 요동일까? (26) 고이왕 06-11 1101
1193 [한국사] 세종 대왕도 식민사학자입니까? 세종실록지리지에도… (15) 고이왕 06-11 1664
1192 [한국사] 대륙설 북한 단군릉 다 가짜입니다... (1) 고이왕 06-11 942
1191 [한국사] 남한 주류 고대사학계 유감 (25) 꼬마러브 06-11 1120
1190 [한국사] 단편적인주장은하지만. 글(역사서)은 못쓰겠다 (2) 바토 06-11 721
1189 [한국사] 낙랑은 누구의 역사인가? (10) mymiky 06-10 975
1188 [한국사] 지들도 평양 유역 낙랑군 유물이 다 고조선 계통이란… (1) 카노 06-10 881
1187 [한국사] 주류사학의 학문적 무능력 (3) 꼬마러브 06-10 990
1186 [한국사] 동이족의 정체는 도데체 뭡니까? (16) coooolgu 06-10 1216
1185 [한국사] [역사책 추천]우리시대의 한국 고대사 1,2 (25) mymiky 06-10 1313
1184 [한국사] 도종환과 이덕일 같은 유사역사학자로 인해서 망가… (1) 고이왕 06-10 919
1183 [한국사] 식민매국사이비종교단체 vs 바른역사수호 (5) 고이왕 06-10 914
1182 [한국사] 중국 광서자치구 백제향의 진실 (18) O2b1b1L682 06-10 1845
1181 [한국사] 원사료 삼국지 후한서 한서에 나오는 한사군 위치 (13) 고이왕 06-10 1189
1180 [한국사] 낙랑군 낙랑군 문제? 무엇이 문제인가? (6) 고이왕 06-10 864
1179 [한국사] 기원전 3세기 연나라와 고조선-기타 토착 세력의 경… (5) 고이왕 06-10 1054
1178 [한국사] 실학자들이 본 한사군의 위치 (27) 고이왕 06-10 1400
1177 [한국사] 도올 김용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가?(펌) (7) 고이왕 06-10 836
1176 [한국사] 낙랑군을 한반도로 비정하지 않게 되면 생기는 모순 (11) 고이왕 06-10 862
1175 [한국사] 역사서 하나 쓰실 생각없나요? (5) 바토 06-10 784
1174 [한국사] 돌궐에 대해 알아보자. (15) 북명 06-10 1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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