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朝鮮)이 바로 천축국(天竺國)이었는가?
『산해경(山海經)』 중 해내경(海內經)에 따르면, ‘조선(朝鮮)’에 관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郭璞云, 朝鮮今樂浪郡也. 珂案, 朝鮮已見『海內北經』]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즉,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朝鮮) 천독(天毒)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며 남을 아기고 사랑한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진(晉) 대의 학자 곽박(郭璞, 277~324년)은 조선이 그 당시(진)의 낙랑군이라고 주석을 붙였다.
또 『산해경(山海經)』 중 『해내북경(海內北經)』에 따르면, ‘조선(朝鮮)’에 관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郭璞云, 朝鮮今樂浪縣, 箕子所封也. 列亦水名也, 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 郝懿行云, 『漢書』 地理志云, 樂浪郡朝鮮又呑列分黎山, 列水所出, 西至黏蟬入海. 又云, 含資帶水, 西至帶方入海. 又, 帶方列口幷屬樂浪郡. 『晉書』 地理志列口屬帶方郡.]"
즉,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해(海)의 북쪽, 산(山)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燕)에 속한다.'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진(晉) 대의 학자 곽박(郭璞)이 주석을 붙였는데, '조선은 지금(진)의 낙랑현(樂浪縣)이며, 기자(箕子)가 봉해진 곳이다. 또 열(列)은 강 이름인데, 지금의 대방(帶方)에 있으며, 대방에 열구현(列口縣)이 있다.'고 하였다.
또 이어서 상기 주석에 따르면, 청(淸) 대의 학자 학의행(郝懿行, 1757~1825년)은 『한서(漢書)』 지리지를 인용하면서 '낙랑군의 조선(朝鮮)과 탄열(呑列)·분려산(分黎山)에서 열수(列水)가 출원하는데 서쪽으로 점제(黏蟬)에 도달해서 해(海)로 들어갔다. 또 함자(含資)의 대수(帶水)가 서쪽으로 대방(帶方)에 도달해서 해(海)로 들어갔는데, 대방(帶方)과 열구(列口)는 모두 낙랑군에 속했다. 『진서(晉書)』지리지에 따르면, 열구가 대방군(帶方郡)에 속했다.' 고 주석을 붙였다.
그런데 상기한 주석들을 비교해 보면, 이상한 점들이 눈에 띤다. 즉, 곽박은 조선을 그 당시 낙랑군(樂浪郡)이라고 했다가 낙랑현(樂浪縣)이라고 주석을 붙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산해경(山海經)』 본문에서는 '열양(列陽)이 연(燕)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곽박은 '열수(列水)가 대방 열구현(列口縣)이 있다.'고 주석을 붙였다. 즉, '열양(列陽)'은 '열수(列水)'의 북쪽 지역을 의미하고 있는데, 열양(列陽)이 연(燕)에 속했다면, 곽박의 주석처럼 '열수(列水)'가 낙랑군에서 출원해서 대방군(帶方郡)에 있었다는 기록과 서로 상충하게 된다. 즉, 연(燕)의 땅과 대방이 중첩되지 않는가?
또 조선(朝鮮)·탄열(呑列)·분려산(分黎山)·점제(黏蟬)·함자(含資)·대방(帶方)·열구(列口) 등은 모두 낙랑군에 속했던 현(縣) 이름들인데, 『진서(晉書)』지리지에 따르면, 함자(含資)·대방(帶方)·열구(列口) 등은 대방군으로 분리되었다고 하므로, 『진서(晉書)』지리지에서는 '열구가 대방군(帶方郡)에 속했다.' 고 기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제(黏蟬)는 그대로 낙랑군에 속해 있었던 현이다.
즉, 곽박은 열수(列水)의 입구가 대방군 열구현(列口縣)이라고 했는데, 학의행(郝懿行)은 열수(列水)가 낙랑군 점제(黏蟬)현에서 해(海)로 들어갔다고 주석을 붙이므로써 열수(列水)의 입구가 대방군인지, 낙랑군인지 서로 기록이 상충하고 있다.
또 열수(列水)와 대수(帶水)가 모두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서 해(海)로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낙랑군·대방군 등의 위치를 모두 현재의 한반도로 변이시키기 위한 위사(僞史)임을 알아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현재까지 춘추전국시대 연(燕)의 도읍지 연도(燕都)와 진·한(秦·漢) 대의 유주(幽州), 수(隋) 대의 탁군, 당(唐) 대의 유주, 요(遼) 대의 남경(연경), 금(金) 대의 중도 등이 모두 같은 지역으로서 현재의 북경시 인근 주변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 연(燕)의 도읍지 연도(燕都, 연경) 등의 본래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둔유(屯留)현 인근지역임을 알아챌 수 있다.(근거: 본 카페 「환도성(桓都城)과 안시성(安市城)의 위치에 관한 연구」참조.)
[그림 1] 연도(요 남경) 등의 본래 위치와 둔갑한 위치
아무튼 상기한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춘추전국시대 연(燕)과 조선이 동서로 나란히 붙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사기』 화식열전에 따르면, 연(燕)과 주변국 간의 배치관계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즉, 연(燕)의 동쪽에 예(穢)·맥(穢)·조선(朝鮮)·진번(眞番)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2] 『사기』 화식열전
또 『사기』조선열전에 따르면, 한(漢) 무제 유철이 서기전 109~8년 기간중에 조선을 공격했는데, 연(燕)과 대(代)의 군사들이 조선의 서북쪽에서 공격을 했으며, 제(齊)의 수군이 조선의 남쪽을 공격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 당시 연, 대, 조선, 제 등의 위치를 [그림 3]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근거: 본 카페 논문「주(周) 무왕의 분봉지와 기자 조선의 위치에 관한 연구」참조.)
[그림 3] 연, 대, 조선, 제 등 추정지역
그런데 정재서 역주『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곽박이 주석을 달기를, '천독(天毒)은 천축국(天竺國)으로서 부처가 태어난 나라.'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임희경 역 『천축(天竺)은 인도(印度)가 아니다. -법현(法顯)의 역유천축기전(歷遊天竺記傳)- 』에 따르면, 『수경주소(水經注疏)』 하수편(河水篇)을 인용하면서 천축제국은 은(殷)나라 백성들이 남쪽과 서역으로 가서 천축국을 이루었으며, 특히 중천축국(中天竺國)은 은(殷)나라 백성들이라고 적고 있다.
즉, 곽박의 주석이 올바르고 『수경주소(水經注疏)』의 기록이 틀리지 않았다면, 조선이 바로 천축국이었으며, 석가(釋迦)의 선조(先祖)는 은(殷)나라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더우기 한(漢) 무제 유철이 공격한 왕검조선의 위치를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인근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곳은 바로 은허(殷墟)가 발견되어 현재까지 은(殷)의 도읍지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또 상기한 『사기』 화식열전에 따르면, 조선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최소한 서기전 221년 이전에 연(燕)과 부여(扶餘) 등과 함께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사기』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 따르면, 주(周)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하므로 조선은 은(殷)이 망하기 전에 이미 건국되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단군이 서기전 2333년에 건국한 조선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던 곳에 있었다면, 단군조선은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낙랑(맥국)이 있었던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 주변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근거: 본 카페 논문「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 참조.)
그러나 여기서 한(漢) 무제 유철이 공격한 왕검조선과 단군이 건국한 단군조선이 과연 국호가 모두 조선이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또 은허(殷墟)가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에서 발견됨으로써 현재까지 은허가 은의 도읍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기』은본기(殷本紀) 에 근거하여 주(周) 무왕이 분봉한 지역을 토대로 은(殷)의 도읍지를 찾아보면 현재의 하남성 주구시 인근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근거: 본 카페 「주(周) 무왕의 분봉지와 기자 조선의 위치에 관한 연구」참조.)
따라서 한(漢) 무제 유철이 공격했던 조선이 과연 은(殷)과 어떤 관계였는지 명백하게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곽박의 주석에 근거한다면, 조선이 바로 천축국이었으며, 은허(殷墟)는 천축국의 유적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조선이 천축국(天竺國)으로서 부처가 태어난 나라로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출처] 조선(朝鮮)이 바로 천축국(天竺國)이었는가? (국학연구소) |작성자 광화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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