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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4-16 01:14
[세계사] 식민사학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글쓴이 : RaMooh
조회 : 2,448  

식민사학의 뿌리를 뽑아 동국의 역사를 복원해야 합니다.

주류학계(강단학계)를 싹 갈아 엎어야 합니다. 아니, 태평양에 다 빠뜨려야 합니다.

역사학자라는 명함을 내밀고 다니는 인간들... 밥벌레 보다 못한 인간들입니다.

지금 동방 사람들은 한국의 역사왜곡을 말할 때 고대사가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한국의 역사왜곡은 고대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100년 전의 역사도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한국사의 왜곡을 해결하려면 동국과 중국의 관계를 올바로 세워야 합니다. 동국과

중국의 관계를 올바로 세우면 중근세사 뿐만 아니라 고대사까지 복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역사는, 중국이 종주국이고 동국은 속국이라 배웠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역사는 정반대입니다.


동국과 중국은 이웃나라가 아닙니다. 동국과 중국은 가족입니다.

동국이 부모의 나라이고 중국은 자식의 나라입니다. 이 관계를 왜곡하여 중국이

부모이고 우리 동국이 자식이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밥벌레 보다 못한 역사학자라는 인간들이, 사상 최대의 사기극을 연출하였습니다.

동국의 역사를 완전히 뒤집어놨습니다.


여기에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완벽한 증거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훈민정음은 중국어를 통일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 한자(중국어)의 발음을 표기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훈민정음은 한자의 발음기호입니다.

- 동국의 언문 27자에 '여린히흫'을 추가하여 28자로 만든 것이 바로 훈민정음입니다.

- 우리가 한글이라 부르는 것은 언문으로서, 최소 고려 때부터 이미 존재했었습니다.

- 언문을 이용하여 세 가지 정책을 펼쳤는데, 한자의 발음표기에 언문을 이용하는 것(훈민정음),

공문서에 이두 대신 언문을 사용하는 것, 한문서적을 언어로 번역하여 언문으로 표기하는 것(언해) 등입니다.

- 훈민정음은 중국인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본국인 동국에서 지나인 중국에 내려보냈습니다.


2. 삼전도에서 인조는 청태종을 황제로 임명하였습니다.

- 인조는 하늘에 두 번의 삼배구고두례를 행하였습니다. 청죄의 절과 유신의 절입니다.

- 인조가 청태종을 황제로 임명하는 즉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 삼전도의 예식은 중국을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하는 예식이었습니다.

- 인조는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인조가 절을 한 대상은 하늘입니다.

- [동방 = 동국 + 중국 + 외국] [조선천하 = 조선국 + 중국 + 외국]

[동방 = 조선천하] [외국 = 몽고, 여진, 일본 등]

- 동국은 중세유럽의 바티칸과 같습니다. 동국은 미연방의 워싱턴DC와 같습니다.



동국의 역사를 복원해야 합니다.


작게는 대한민국을 위하는 일이고, 크게는 인류를 위하는 일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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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좀와라 16-04-16 07:35
   
RaMooh님의 글을 언제나 즐겁게 읽은 사람으로서 이번 글도 상당히 즐겁게 읽었습니다.

이번글의 내용과 저의 의견은 약간 다르지만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기에 언급을 하지 않고 몇 가지만 집어 보려고 합니다.

바티칸이 교황청으로 인정되기 시작한것은 아틸라의 로마 침공에서 당시 교황인 그레고리(?)와 아틸라의 비밀접견 이후 부터 입니다. 훈족은 당연히 한국과 연관이 있고요. 바티칸의 아틸라에게서 무슨 인정을 받았는데 무순 인정을 받았고 어떤 지위를 받았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많습니다만 한가지 확실한것은 조선이 동방의 바티칸이 아니라 바티칸이 한반도의 통치자의 서방 연락소 내지는 전도관의 기능을 한것은 확실합니다.

현제는 물고기 자리이고 또 물고기 자리를 종교의 별자리 또는 시대라 합니다. 이 물고기 자리의 주인공들이 2마리의 물고기 인데 가야 범어사에는 쌍어문의 문양이 아직도 남아있고 인도난 중동 등에서도 쌍어의 흔적인 발견되며 때론 삼어문도 발견 됩니다. 이런 것을 보았을 때 현재의 종교는 쌍어 사상에서 유래 했고 한국 특히 가야는 이들 종교의 시원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쌍어는 보통 홍어와 청어로 불리며 영어론 Red와 Blue 사상으로 불립니다. 한반도를 기준으로 보면 서도가 홍어 계열이고 동도가 청어계열입니다. 이 쌍어가 다시 불교와 도교에선 홍예와 청하로 불리며 홍예는 무지개를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지개(솔롱고스) 또는 물고기 족으로 홍예  / 홍어 와 Red 계열의 사상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전통적인 지배계층은 서도지방 특히 서북(평안) / 기호(경기와 서울) / 호남(전라)임을 알 수 있고 지금도 이 들 지역의 향배가 한반도의 미래를 바꿉니다. 그리고 홍어 사상은 홍익인간의 사상과 같음을 알수도 있지요.

바티칸은 청교사상의 본거지 이며 청교는 홍교의 피 지배 계급이라 바티칸은 서울의 지배를 받던가 아님 서울로 부터 권한을 위임 또는 인정 받아야 하는 시스템 입니다. 미국은 청교(도)가 세운 나라 입니다. 그럼 미국의 대통령은 한국 서울의 지도자에게 취임 때 마다 인정을 받기위해 방문을 해야 한다는 공식이 됩니다. 인류의 사상과 종교와 문화를 부정한다면 안 해도 되지만 자신의 지배의 정당성이 이로 부터 발생되기에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을 공격해서 박살내야 진정한 독립이 이루어 지는 것 입니다. 미국의 페리제독이 흑선 4척을 이끌고 일본의 개항을 이끌어 냈고 또 3척의 흑선이 신미양요을 일으꼈습니다. 그럼 한척의 흑선은 어디에 갔을 까요? 대동강에서 침몰한 제너랄 샤먼은 제너랄이라서 상선이라 하는데 General은 장군이라 뜻도 있습니다. 그리고 샤먼은 장군의 이름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너랄 샤먼은 상선이 아니라 군함이며 샤먼은 흑무당을 말하기에 흑선과 같으며 이 제네랄 샤먼이 사라진 흑선 한척임을 알 수 가 있고 또한 기함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신미양요는 미국의 승리가 아니라 조선의 대승입니다.

서울은 원래 홍교의 성지 이었고 예수 그리스도 사상은 홍교사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한국인의 선조 누군가의 이야기지 절대로 유태인의 이야기가 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신약만이 아니고 구약도 박카스/ 디오니소스/오시리스와 고주몽 신화의 복사판이라 할 정도로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중국이 한 가족이 아니라 한국이 중국 그 자체이며 지금의 중국은 바타칸 / 일본 / 미국과 같이 한국의 지위와 위치를 도적질한 도적 일 뿐 입니다.
     
그노스 16-04-16 10:39
   
'바티칸이 아틸라에게서 인정을 받았는데 무슨 인정을 받았고 어떤 지위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많다?'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 둘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논란이 있지만, 교황이 아틸라에게 무슨 한반도의 권위를 대행하는 총독쯤(?)으로 인정받아서 바티칸이 교황청으로 인정되기 시작한게 아니라, 로마황제는 빌빌대며 기고 있는데 교황이 몸소 가서 아틸라에게 살려달라고 사정한 결과를 가지고 무슨 신의 구원을 받은 것처럼 바티칸이 과장했다는게 정설입니다.

님께서는 예전에도 한국계 아틸라의 로마제국 침공후, '아틸라' 라는 단어가 '이태리'의 어원이 되었다고 주장하셨는데, 아틸라가 로마제국에 오기 훨씬 전인 기원전 91년에 일어났던 동맹시 전쟁(Socii) 에서 반란을 일으킨 동맹시들의 나라(연합) 이름이 이태리, 이탈리아(Italy, Italia) 였다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아틸라가 로마제국에 오기 오래전부터 이미 이태리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었는데 거기에 대한 답은 안주시더니 여전히 한국=아틸라=로마공략 정도로 인식하시고 계시나 봅니다.

저도 우리 한민족과 훈족, 흉노와의 관련성은 어느 정도 믿지만 신라 김씨의 조상이라는 흉노 김일제는 기원전 1세기경의 인물이고, 훈족 아틸라는 기원후 5세기경의 인물입니다.
더욱이 훈족이 바로 흉노족이 아니라 보통 훈족을 흉노의 한 분파로 보는 설이 다수이고, 훈족이 우리 한민족의 일파라는 주장이 곧 한민족이 유럽을 직접 공략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지요.
아틸라가 한반도를 대표해 어떤 민족적 사명을 띠고 로마제국을 정복하러간 것이 아니라 부족민을 부양하기 위해 로마제국을 털러 갔다고 보는게 맞다고 봅니다.
그 당시 기마, 유목 민족이 느슨한 연맹체제라면 모를까, 대륙을 넘나드는 통일되고 강력한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시는건 공감할수 없네요.
님의 특기이신(?) 비슷한 단어들 연관짓기 외에 한반도=흉노족=훈족 이라는 통일된 제국체제를 증명하실만한 다른 근거가 있으시다면 혹 모르겠습니다만...

'침몰한 제너랄 샤먼은 제너랄이라서 상선이라 하는데...샤먼은 흑무당을 말하기에 흑선과 같으며?'

...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샤먼이 무당을 뜻하므로 제너럴 샤먼의 샤먼을 무당으로 해석하신것 같습니다만, 무당을 뜻하는 샤먼은 영어로 shaman 입니다. 제너럴 샤먼의 샤먼은 영어로 sherman 이지요. Sherman 은 보통 사람의 성으로 많이 쓰이는데 앵글로 색슨어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뜻은 무당과는 전혀 관계없는 대략 '양털 깍는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님의 평소 종교, 신화, 오컬트, 주술에 대한 관심사를 존중합니다.
그러나 님의 말씀대로 인류의 사상, 종교와 문화를 인정하기 위해 바티칸이 서울의 지배를 받던지, 미국의 대통령이 취임때마다 한국의 지도자에게 인정을 받기위해 한국을 방문해야 할지, 예수가 한국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님의 이런 글은 종교색이 다분해서 종교게시판인 이슈게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합니다.
카노 16-04-16 16:43
   
식민사학 타파 운운하면서 명백히 항복한 것이 분명한 인조가 청태종을 임명했고 항복한 것이 아니라는 헛소리는 식민빠들에게 "봐라. 환빠들이 이런 수준이다." 하는 식으로 그놈들이 커나갈 맛있는 자양분의 먹이감을 던져줄 뿐입니다.
     
RaMooh 16-04-16 17:06
   
증거를 보여주면 확인하고 나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지, 막무가내로 틀렸다고 우기면 진실이 거짓에 가려집니까? 정말로 틀렸다고 판단되면, 어떻게 틀렸다고 증명하십시오.

무엇이 '명백'하다는 말씀입니까?

현실적으로는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한 것이 맞지만, '형식상' 인조가 항복한 대상은 하늘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인조가 청태종 보다 신분이 높기 때문에, 청태종이 아닌 하늘에 절을 하면서, 하늘에 항복을 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인조가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면서 항복을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고전들을 확인해보니, 인조는 청태종에게 절을 하지 않고 하늘에 절을 하였습니다.

반론을 하고싶다면 실록과 승정원일기, 청실록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 반론을 하십시오. 그냥 막연히 제 주장이 틀렸다고 몰아부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인조가 청태종에게 조현해서 예신하고 찬례하였다 하였는데, 이것이 청태종의 즉위식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인조가 하늘을 대신하여 청태종을 황제로 임명한 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님이야 말로, 막연한 헛소리를 멈추십시오.
          
카노 16-04-16 17:49
   
청실록은 제가 안봐서 모르겠고 인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그어디에 인조가 청태종을 황제로 임명했지 항복은 아니다라고 나옵니까?
인조가 항복한 것이 아니라 청태종을 오히려 임명한 것이다라? 삼전도비가 기가 막혀서 웃겠군요.
헛소리도 이정도면 진짜 답이 안나오네요.
아래는 인조가 항복 직전 청태종에게 바친 국서의 내용중 앞부분입니다.

"조선 국왕은 삼가 글을 대청국 관온인성황제께 올립니다. 저희 작은 나라가 大國에 잘못을 저질러 스스로 병화(兵禍)를 초래해서, 몸이 외로운 성에 들어 위태로움이 조석(朝夕)에 임박하였습니다. 생각으로는 특사(特使)로 하여금 글을 받들어 올려 정성을 전하고 싶었습니다마는 병과(兵戈)에 가로막혀 스스로 통할 길이 없었는데, 어제 황제께서 궁벽한 두메 구석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는 의심과 믿음이 상반(相半)하고 기쁨과 두려움이 엇갈렸습니다."

이미 황제라고 부르면서 자신을 신하라고 조아리고 있는 판국에 인조가 청태종보다 신분이 높았고 황제로 임명했다라? 기가 막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RaMooh 16-04-16 18:05
   
안봐서 모르겠으면, 아무말 하지 마십시오. 보시고 말을 하시든가.

삼전도비가 어째서요? 왜 기가 막히는 데요?

제 아이디로 검색해서, 제 글을 다 읽어보고 나서 반론을 해도 늦지 않습니다. 글을 읽지도 않고 반론을 하는 것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황제라고 부른 것이 어떻다구요? 중국의 왕을 황제라 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동국의 왕이 중국의 황제 보다 신분이 낮다는 전제 하에 번역을 하고 해석을 하니, 저렇게 들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전제를 바꿔 놓고 번역을 하고 해석을 하면, 전혀 다르게 들립니다.

상대방의 말을 비웃기 전에, 상대방의 근거를 먼저 확인하십시오. 근거에 문제가 있거나 잘못이 있다면, 그 때 비판을 하거나 비난을 해도 늦지 않습니다.

무식한 티 내면서, 막무가내로 상대방의 주장을 헛소리라 폄하하면, 고운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카노 16-04-16 18:11
   
아 예예 모든 기록, 삼전도비같은 유물에서도 전부 인조가 청태종한테 항복의 예를 하고 항복을 했다고 나오는데 혼자서 항복이 아니라 오히려 신분이 높은 인조가 청태종을 임명했다고 우기시면서 저보고 무식하다 막무가내라고 하시니 참으로 할말이 없네요.
그리고 훈민정음을 세종대왕이 중국인을 위해서 만들었다니 이건 또 무슨 황당한 궤변입니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RaMooh 16-04-16 18:25
   
삼전도비의 어디에,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행했다고 나옵니까? 여기에 올려 보십시오.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행해야 하는데, 인조의 신분이 더 높기 때문에, 인조는 청태종 대신 하늘에 항복의 예를 행했습니다. 하늘에 항복의 예를 행한 후에(청죄), 다시 하늘에 유신의 절을 하고 천지개벽을 하는 제례를 행하였고, 청실록에서 인조가 조현예신찬례하였다 하였는데, 이는 인조가 청태종의 즉위식을 진행한 것입니다.

막말은 그만 하시고, 확인하십시오. 상대방의 주장을 확인하지 않고서 하는 말은 전부 다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상대방의 주장을 확인하는 수고도 없이, 반론을 하면 욕 말고는 들을 것이 없습니다. 그 정도의 수고도 들이지 않으려는 것은, 게으르거나 막무가내에 불과합니다.

식민사학의 말은 곧이 곧대로 믿으면서, 증거를 내밀고 말하는 제 주장은 황당한 궤변이라 험담하는 것은, 당신의 수준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카노 16-04-16 20:13
   
자기 주장에 안맞으니 이제 상대방을 식민빠로 몰아붙이시네요.
아래가 삼전도비의 내용인데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저걸 보고 인조가 항복한게 아니고 오히려 청태종을 황제로 임명했다고 해석하겠습니까?
어거지도 좀 부릴 것을 부리십시오.
차라리 일제시대는 우리가 일본을 지배한 시대라고 하시지 그러십니까?
식민사학 타파 운운하시는데 역사 축소 왜곡하기에 환장한 식민빠나 이런 황당한 역사 부풀리기를 하시는 님이나 도찐개찐아닙니까?

[ 1627년의 정묘화약 이후 우리(조선)가 화친을 먼저 깼음에 대방(청나라)이 노하여
군사를 이끌고 동녁에 들어오셨다 우리 임금(인조)이 위태로움에 처해 남한산성에
거하신지가 50 여일이 되었다 관온인성황제(청태종)가 위엄과 법을 베푸는 도다
황제의 공덕이 조화와 함께 흐름을 밝히니 우리 소방(조선)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뿐이로다
처음엔 미혹하여 이를 알지못하다가 황제의 명(命)이 있으니 잠을 깨었도다
이에 오직 황제의 덕에 의지하도다 황제가 군사를 돌이켜 다시금 우리에게 농사를
권하니 삼한(三韓) 말년에 황제의 아름다움 이로다 ]
                         
RaMooh 16-04-16 20:46
   
잘 설명할테니 똑바로 들으십시오.

1. 실제로는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을 하였다.

2. 인조가 청태종 보다 신분이 더 높다.

3. 원래는 청태종에게 절을 하면서 항복의 예를 행해야 하는데, 청태종이 아닌 하늘에 항복의 예를 행했다.

4. 항복의 예인 청죄의 절(삼배고두)을 하늘에 행했다.

5. 유신의 예인 삼배고두를 하늘에 행하였다.

6. 천지개벽을 상징하는 행위를 단에서 행하였다.

7. 인조가 청태종에게 예신과 찬례를 하였다. 즉,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올리신 삼전도비가 어쨌다는 것입니까? 거기에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행했다고 나옵니까?

삼전도비의 화자(話者)는 동국의 신하입니다. 인조가 아닙니다. 동국과 중국은 一家이므로, 동국의 신하도 중국의 신하가 됩니다. 그러니, 청태종에게 공손한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설명하겠습니다. 실제로 인조가 청태종에게, 실제로 동국이 청나라에게 항복을 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인조의 신분이 청태종 보다 높기에, 인조가 항복의 예를 청태종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항복의 예를 하늘에 행한 것입니다.

제 주장이 틀렸다면, 왜 인조가 하늘에 절을 하였는지 설명을 해보십시오.
                         
카노 16-04-16 20:53
   
아니 님도 인조가 항복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 무슨 인조가 청태종에게 절을 안하고 하늘에 했다고 우기면서 청태종을 황제로 임명했다고 하십니까?
아니 그러니까 님의 주장의 요지는 도대체가 뭡니까?
인조는 청태종에게 항복을 하기는 했는데 절은 안하고 청태종을 황제로 임명했다는 겁니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신도 말이 안되는 것 같으니 인조가 항복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슬그머니 마지못해 인정하시는데 올리신 님의 글을 보십시오.
인조가 항복했다는 말도 없이 인조가 청태종에게 절도 안하고 하늘에다 절을 하면서 오히려 황제로 임명했다고 하니 이게 말이 됩니까?
                         
RaMooh 16-04-16 21:24
   
그렇게 이해력이 떨어져서 어쩝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어떤 일로 서로 싸웠을 때,

아들이 아버지에게 졌다면, 아들은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호되게 혼을 냈을 것이구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졌다면, 아버지는 아들의 뜻에 따르게 될 것이지만 아들에게 무릎을 꿇는다든지 잘못을 비는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아들도 아버지에게 그러한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인조가 청태종 보다 신분이 더 높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정녕 모르겠습니까?

명분상, 천명을 받은 청태종을 인조가 거스른 것은, 인조가 하늘을 거스른 것입니다. 그래서, 청태종에게 절을 하지 않고 하늘에 절을 한 것입니다.

항복하는 절을 청태종에게 하여야 하는데, 인조의 신분이 더 높아서, 하늘에 항복하는 절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항복한 다음에 청태종을 황제로 임명하는 즉위식을 거행했다는 말입니다.

같은 말을 얼마나 하여야 하는지...
                    
촐라롱콘 16-04-17 00:38
   
청태종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이전에 자국에서 이미 황제즉위식을 거행했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말씀이신지.....???

그리고 삼전도비의 정식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입니다.

그리고 병자호란 이전의 정묘호란에서 이미 홍타이지가 형, 인조가 아우가 되는
내용으로 강화조약을 맺었는데........

결론적으로 병자호란 일어나기 근 10년 전에 이미 홍타이지가 인조보다 명목상
서열이 높았다는 결론입니다...!!!
                         
RaMooh 16-04-17 03:58
   
1636년 4월(?)에 청태종이 자기 마음대로 황제에 즉위하였는데, 동국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동국의 사신이 두들겨 맞고 국경을 넘으면서 국서를 열어보고 버렸으며, 동국에서는 국서를 열어본 것만 가지고도 사신들을 벌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청나라는 1636년 12월에 병자호란을 일으켰습니다. 원래는 동국의 임금이 직접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하는 경우가 없었는데, 청태종이 욕심을 부려 직접 즉위식을 거행한 것입니다.

삼전도비의 정식명칭이 '대청황제공덕비'인 것을 누가 모르나요? 그래서 그것이 어쨌다는 말씀인지?

조선(천하)과 후금이 형제의 관계를 맺은 것이지, 청태종과 인조가 형 아우를 정한 것이 아닙니다. 왜 명나라를 적대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붙여서 강화를 맺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노스 16-04-17 11:03
   
혹시 RaMooh 님께서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혼동하시고 계신거 아니신가요?
제가 알기론 조선이 명나라와 단교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붙인것이나 형제의 의를 맺은 것은 정묘호란때의 합의이고, 삼전도비를 세우게 된 병자호란때의 화약에는 '명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과 교통을 끊고, 명에서 받은 고명과 책인을 헌납하라', '조선은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행하라' 라고 합니다.

삼전도비를 말씀하시다가 왜 '조선이 명나라를 적대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붙여 강화를 맺었는지', '청과 형제의 관계를 맺은 것인지' 에 대해 말씀하시나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간에 대략 10년이나 차이가 납니다.

일단 군신의 예를 맺게된 병자호란 이전을 보면, 춘신사 박노가 조선에 돌아와 올린 후금의 서신 중에,

'...내 생각에 귀국은 남조(명나라)와는 부자가 되고 우리와는 형제가 되오...그러므로 왕은 부모형제 사이에서 서로의 사정을 알려 화해를 힘써 주장하여도...'
(왜 조선이 명나라와 단교(적대)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붙여 강화를 맺을수 있었는지는 홍태조가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를 어떻게 인정하고 있었는지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1627년 3월 3일 정묘호란 합의 내용,

'조선은 후금을 형의 나라로 섬길 것을 맹약한다.'
(형제의 의를 맺자고 모호하게 한것이 아니라 분명 형의 나라로 섬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조 13년 후금의 사신 마푸다가 가져온 청태종의 국서,

'왕은 어째서 지난날 보내던 글에서는 모두 '봉(바칩니다)' 자를 쓰더니, 근년에는 '봉'자를 쓰지 않고 '치(보냅니다)'자 만을 쓰는 것이오. 이는 나를 미미하게 여겨서 왕이 나를 가볍게 여김을 드러내는것 아니오...당초 형제의 의를 맺어 하늘에 맹세하고 우호를 다짐할 때에는...'
(형이 아우에게 바치는 경우도 있나요. 분명 형과 아우를 정했는데 약속을 어긴 인조를 책망하는 글입니다.)

인조 14년, 1월 13일 인조가 청태조에게 보낸 국서,

'모든 것이 다 저의 천성이 유약하여 잘못을 저지르고, 모든 신하가 어리석어 잘 살피지 못하여 오늘의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형의 아우에게 대한 생각으로 잘못이 있음을 보면 노하여 꾸짖는 것이 물론 마땅합니다.'
(인조 스스로 형과 아우를 분명 밝히고 있습니다.)

이미 알려진 기록들마저 왜 이렇게 부정을 하시는지요.
덕분에 불유쾌한 역사를 상기해 일일이 올리는 저는 괴롭습니다. 그만 하시지요.
삼전도 치욕이 우리가 생각했던 만큼의 굴욕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더라 라는 정도로 주장하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RaMooh 16-04-17 11:57
   
1. 정묘호란의 목적도 병자호란의 목적과 같습니다. 단지, 정묘호란 때 후금이 양보를 한 것입니다.

2. '삼전도비를 말씀하시다가 왜 ...'은 촐라롱콘님의 댓글에 답한 것입니다. 윗 댓글과 비교해 보십시오.

3. 동방의 세계관에서, '조선'이 '동국'을 말하는 것인지 '중국대륙'을 말하는 것인지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동국이 중국에 사대할 때, 조공을 중국에 보낼 때, 한반도에서 거두어 들인 것만을 가지고 중국에 보낸 것이 아니라, 중국대륙 전체에서 거두어 들여 중국에 보내는 것입니다.

4. 우리가 일상에서 사람을 사귈 때, 초면에 상대방을 아우라 칭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형씨, ... '라고 말을 합니다. 동방의 예절에서는 그렇습니다. 상대방을 높게 대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5. 동국과 중국의 관계와, 동국의 임금과 중국의 임금과는 별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동국이 중국을 상국으로 대하더라도, 동국의 임금이 중국의 임금 보다 반드시 아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 미연방의 대통령이 주지사 보다 높지만, 미연방이 주정부를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주정부를 위해 힘을 씁니다.

계속, 저의 설명에 반하는 내용을 가져 오시려 하시는데, 저도 저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계속 가져 와볼까요?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이 확인 되었으면, 그에 대한 반성이 먼저 이루어지고, 왜 그러한 것인지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합니다. 제 설명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노스 16-04-17 16:18
   
Ramooh 님께,

1. 청태종의 정묘호란때의 목적도, 병자호란때의 목적도 같다는 말씀에 동감입니다. 그러나 정묘호란때 후금이 양보를 한게 아니라, 현실에 따른 것이라 생각됩니다.
화의를 맺게되는 결과가 서로 완전히 다르지 않나요?
정묘호란 때는 병자호란 때와는 다르게 인조가 청태종 앞에 나가서 항복(절을 했든 안했든)을 해야 할 상황이 아니었는데, 정묘호란때 후금이 조선에 양보했다니요.
임금이 적의 군주 앞에 나가 항복을 해야 하는 상황이 어떤 의미인지 아실텐데요.

2. 님께서 촐라롱콘님께 '삼전도비의 정식명칭이 '대청황제공덕비'인 것을 누가 모르나요? 그래서 그것이 어쨌다는 말씀인지?'

...라고 말씀하신 직후,

'조선(천하)과 후금이 형제의 관계를 맺은 것이지, 청태종과 인조가 형 아우를 정한 것이 아닙니다. 왜 명나라를 적대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붙여서 강화를 맺었는지 살펴보십시오.'

...라고 하시길래 순서가 틀리지 않나 했습니다.
삼전도비가 세워졌을때는 이미 형제의 의가 아니라 군신의 의를 맺었으니까요.

3. 조선이 '동국' 인지, '중국대륙' 인지를 정해놓고 말씀하시는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님의 견해가 님께는 당연한지 몰라도 소수에 속하는 독창적인 견해로 보이고 다수의 학자들의 토론을 거쳐 정설로 인정받고 있지는 않는것 같은데, 거기에 기반해서 인조가 청태종을 황제에 책봉했다고 단정지을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동국(조선?)이 중국에 조공을 보낼때, 한반도에서 거두어 들인 것만을 가지고 중국에 보낸 것이 아니라, 중국대륙 전체에서 거두어 들여 중국에 보내는 것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사례는 어떤 것이 있는지 님의 견해를 설명해 주시겠어요?
제가 알기론 중국과 사대한 나라들은 각기 재량껏 중국과 따로 조공무역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4. 동방 예절을 말씀하시며, 초면에 상대방을 아우라 칭하지 않고, 상대방을 높게 대하는 것이 기본이라 하시는데...

제가 인용한 국서들의 내용을 잘 읽으셨는지 의문입니다.
청태종은 인조에게 국서를 보내며 말하길 '봉(바칩니다)' 자를 쓰더니, 근년에는 '봉'자를 쓰지 않고 '치(보냅니다)'자 만을 쓴다' 며 인조에게 따지며 님께서 말씀하시는 동방 예절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에 인조는 청태종에게 '형의 아우에게 대한 생각으로 잘못이 있음을 보면 노하여 꾸짖는 것이 물론 마땅합니다.' 라며 혼자 동방 예절을 과하게 지키는 것을 보면, 양자간의 신분이 동등해 보이지 않네요.
더욱이 왕 간의 신분, 위계질서를 동방 예절에 비유하시다니요-_-
한 나라의 군주가 다른 나라의 군주에게 형이라 부르고 스스로 동생을 자칭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실리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5. 동국, 중국과의 관계를 논하며 미연방 대통령과 주정부간의 문제가 궁금한게 아니라, 제가 궁금한건 인조가 진정 청태종을 황제에 책봉했냐는 것입니다.
미연방 대통령과 주정부간의 예를 드시는 것이 제 궁금한 점을 증명해주진 않지요.
님 개인적으로 비슷한 사례라고 생각하시며 예시를 들어주시는 것이지 그건 근거는 아니라고 봅니다.

님께서 발제글 제목을 '식민사학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라고 잡으시며 반론을 제기하는 저같은 사람은 그것의 옹호자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 오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동게에서 활동하시는 님의 목적을 전 모르지만, 저의 목적은 제가 듣고 읽은 것을 다른 분들과 나누고, 또 그 분들께 제가 부족한 것을 배우기 위함 입니다.
식민사학(?) 알바가 아닙니다.
만나뵈지도 예전엔 글을 서로 나눠보지도 못한 님의 설명을 제가 괜시리 물고 늘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님의 견해가 흔한 주장도 아니고, 그 흔하지 않은 주장을 제가 배워 제 것으로 만들기 전에 우선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별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요.
계속 말씀드리지만, 청태종이 정묘호란 이후부터 인조보다 상위의 신분이 되었다는 기록이 적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기록들에 대한 님의 반론들이 충분치 않게 들리거든요.
님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계속 가져와 볼까 하고 제게 물으시는데 그럼 전 감사히 받겠습니다.
제가 지금 님과 무슨 키배질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님의 주장이 옳다면 그건 혁신적인 것이겠지요.
제가 님께 그만 하시라고 위에서 말씀드린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혼동하시고 위의 주장을 계속 하시고 계신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님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충분치 않아보여 좀 더 구체적인 근거를 여쭤보는 저를 너무 공격적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신가 합니다.
이런 논조의 토론은 동게에서 흔하지 않은가요??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이 확인 되었으면, 그에 대한 반성이 먼저 이루어지고, 왜 그러한 것인지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합니다.'

...라는 님의 말씀은 옳지만, 제가 님께 계속 댓글을 다는건 물고 늘어지려는(?) 것이 아니라 님 말씀대로 역사가 왜곡되서 인조가 청태종에게 황제 책봉을 했다는 사실이 역사에서 지워졌다는 것이 아직 확인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록들을 소개해주신다면, 감사히 배우겠습니다.
                         
RaMooh 16-04-17 18:54
   
1. 그냥 양보했다고 표현한 것이지, 현실에 따른 것이 맞습니다. 청나라의 명분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두 호란의 목적이 같은데, 청나라가 중국이 되고 동국의 사대를 받기 위함입니다. 병자호란 때는 군사적으로 일방적인 상황이라 인조의 항복을 받아냈던 것이고, 정묘 때는 그렇게 하지 못할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3. 아직은 저의 주장일 뿐입니다.

‘동방(조선천하) = 동국(조선국, 하늘나라) + 중국 + 외국’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들이, 원문을 읽어보게 되면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면, 中國과 中華와 華夏와 中朝 등을 강단학계는 같은 뜻으로 번역하지만, 엄연히 서로 뜻이 다릅니다. 원문을 읽어보면, 사대는 동국만이 한 것이고 다른 나라는 사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중국대륙을 동국과 중국이 함께 다스립니다. 이른바 미국이라는 나라에는, 연방군이 있고 주방위군이 있으며, 연방경찰이 있고 주경찰이 있습니다. 미국처럼 동아시아는 연방제의 나라였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4.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글자나 단어들에 대해, 애초에 그 뜻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사대(事大)를 기존의 지식에서는 ‘약소국이 강대국을 떠받드는 것’이라 하지만 ‘동국이 중국을 크게 하는 것’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朝見’도 ‘신하가 조정에서 임금을 뵙는 것’이라 하지만 ‘어떤 사람이 조정에서 임금 앞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봉’이나 ‘치’가 서로의 관계에서 단순히 높낮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어떤 의미를 지닌 단어들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5. 오해가 있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오해할 행동을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여러 사람을 상대로 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님께 오해를 산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해하시게 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제가 조선왕조실록 전체를 다 읽어보고 다 해석한 것이 아니고, 모든 고전을 다 읽어보고 해석한 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근거가 충분치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혼동하고 있다고요? 다른 분과의 댓글에서, 그 분의 댓글 내용에 그대로 따라가면서 반론을 한 것입니다. 둘을 혼동하고 있지 않습니다. 혼동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요?
그노스 16-04-17 07:30
   
님께서 어떤 틀의 의미에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이해하겠으나, 님의 발제글은 마치 병자호란에서 청태종이 조선 임금에게 황제로 책봉받는 것이 그의 가장 큰 목적으로 오해되기 쉬워 보입니다.
또 님의 견해가 옳다고 해도, 님의 견해와 반대로 해석되는 기록이 더 많아 보입니다.
조선과 청국(후금) 사이에 오갔던 국서 내용으로 보아 청태종은 그 아비와 비교해서 반조선 기질이 좀 더 강했던 인물로 보이는데 기껏 조선임금에게 항복 받아놓고 조선 임금에게서 황제로 책봉받았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더욱이 삼전도 이전에 인조가 계속 청(여진족)을 무시하는 행태를 취하자, 청태종이 그 옛날 금나라(여진족)와 고려간의 관계를 상기시키며 인조가 청태종을 대하는 예가 온당한 것인지 따지는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금나라 황제도 고려임금에게 책봉을 받았었나요?
금나라 시절처럼 조선도 청나라에 사대하라는 것이지 조선임금으로부터 황제 책봉을 받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가 되지는 않네요. 다시 여진족이 강성해진 이상 청태종은 금나라, 고려 시절처럼 조선이 청국보다 아래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해보입니다.

'명분상, 천명을 받은 청태종을 인조가 거스른 것은, 인조가 하늘을 거스른 것...그래서 청태조에게 절을 하지 않고 하늘에 절을 한것'

...이라 하시는데, 님의 해석이 옳다고 해도 청태종이 조선임금의 아랫 사람이어서 조선임금에게 황제 책봉을 받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청태종이 조선 임금의 체면을 살려준 것으로  제게 해석이 됩니다만.
청태종의 조선 침략은 처음부터 완전 정벌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삼전도에서의 조선 항복 이후에도 여전히 그의 가장 큰 목적이었던 명과 조선간의 사대관계 완전한 단절을 이끌어내지 못했으므로 장차 있을 청국의 대명전쟁을 앞두고 여전히 조선이라는 배후 견제 세력이 남아있게 되었음을 상기한다면, 청태종이 인조를 달래서 그의 체면을 살려줄 여지가 충분한 것으로 보입니다.

청태종 실록 천총 원년 1월 병자,
'조선은 대대로 우리 후금에 죄를 지었으므로 마땅히 정토해야 한다.'
(님 말씀과는 다르게 분명 조선이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후금(청)'에 죄를 지었다며 단죄해야 한다고 합니다. 말투도 자식이 아비,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말하는 어투로 보이지 않네요. 이방원이 이성계에 칼을 들이대며 이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지요.)

인조 5년 4월 정유,
조선이 청국에게 '명나라는 200년 이상 섬겨온 사대의 상국이므로 단교할수 없으며, 임시로 머물고 있는 모문룡(명나라 무장) 군도 의리상 거절할 수 없다' 라고 합니다.
(보통 자기보다 아랫 사람에게 체면상 이런 말을 하진 않지요. 자기 아랫 사람에게 구구절절 이런 핑계를 대나요?)

대대로 여진족이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섬겼다는 점을 상기해도 왕이 황제를 책봉했다는 전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분명 청국 시대에 들어서서 조선과 여진족과의 관계는 금나라 시기때처럼 재역전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청태종이 인조가 내려주는 황제 책봉을 받아들였다고 말씀하시는건 님께서 너무 나가신게 아닌가 하네요.
님에게 의심스러운 문구 하나를 님의 견해대로 해석하신다 하여도, 그에 반하는 다른 많은 기록들, 주변 정황 등등을 고려한다면 님의 주장은 주변에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독창적인 해석이신것 같습니다.
     
RaMooh 16-04-17 11:22
   
*** 제가 주장하는 것들은,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태종이 아닌 하늘에 절을 했다'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제 나름대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즉, 저의 설명이 맞았느냐와는 별개로 인조가 하늘에 절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저의 설명이 맞느냐에 대한 토론 보다는, 반성을 먼저 하고 '왜 인조가 하늘에 절을 한 것인가'에 대한 추론이나 연구가 뒤따라야 함에도, 저의 설명이 틀렸다는 것에만 시비를 하고, 저의 설명이 틀렸으니 인조가 하늘에 절을 한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논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마치, 강단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으로서의 옳은 자세입니까?

1. 병자호란에서, 청태종의 목적은 황제로 즉위하는 것입니다. 청나라의 칸이 황제로 즉위하는 것은, 중국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중국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는 것은, 명나라에 사대하는 것을 청나라에 사대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청태종이 인조에게 요구한 것은, 인조가 청죄하고 유신하는 것이었습니다.

- 청죄는,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을 해야 하는데, 인조의 체면이 있으니 하늘에 항복을 한 것입니다. 유신은, 동국의 법제를 바꾸는 것인데, 명나라에게 사대하는 법제를 청나라에게 사대하는 법제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2. 누루하치는 감히 황제가 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고, 청태종은 황제가 되려는 욕심을 품었던 것입니다. 반조선 기질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병자호란과 같은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군사적으로 조선국을 반드시 침략하려 한 것이고, 그것이 반조선 기질로 보인 것입니다.

3. '금나라 황제도 고려임금에게 책봉을 받았었나요?' 맞습니다.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사대事大는 중국에게만 하는 것이지,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하는 것을 사대라 하지 않습니다. 사대교린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여러나라에게 사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 동국이 후금을 무시하니, 옛날의 일을 거론하여 후금이 얼마든지 중국이 될 수 있으니 무시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며, 나아가 후금을 중국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후금이 항상 말하는 것은, 명나라에 사대하면서 후금에도 사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명나라에는 사대하지 말고 청나라에만 사대하라는 것입니다.

4. 맞습니다. '조선 임금의 체면을 살려준 것으로  제게 해석이 됩니다만.'이 맞습니다.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청태종에게 절을 하지 않고 하늘에 절을 한 것입니다. 체면을 살려주는 것은, 인조의 신분이 청태종 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 삼전도에서는 두 가지의 예식이 있었습니다. 청죄의 예식과 유신의 예식입니다. 즉, 인조가 청태종이 아닌 하늘에 죄를 청하는 예식과 인조가 청태종을 황제로 임명하는 예식은, 서로 별개입니다. 황제로 즉위하고 싶은데, 동국의 임금이 허락을 안해주니, 군사를 일으켜서 인조의 행위(청태종을 황제로 허락하지 않은 것)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한 것이 청죄이고, 인조가 청죄를 해야만 청태종의 군사(軍事)가 명분을 얻는 것입니다. 인조가 청죄를 하지 않으면, 청태종의 군사는 반역이 되는 것입니다. 군사를 일으켜 인조가 청죄를 하게 하고, 인조가 청태종을 황제로 임명하는 유신의 예식을 이어서 행한 것입니다. 군사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5. '동방의 세계관에 의한 명분'에 대해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후금에 죄를 지었다는 것'은 '중국이 되라는 천명을 받은 후금에 죄를 지었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즉, 인조가 청태종에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인조가 천명을 받은 청태종에게 죄를 지은 것입니다. '청태종이 황제가 되는 것'을 하늘이 허락했는데, 인조가 청태종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하늘의 뜻을 거스른 것이 되고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이 됩니다. 만약, 인조가 청태종 보다 신분이 낮았다면, 어쩌구저쩌구 할 것 없이, 그냥 인조가 청태종에게 절을 하면서 항복을 하면 됩니다. 인조의 신분이 높기에, 하늘에 절을 하며 항복을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을 거스렸다가 하늘의 뜻을 받아 들이는 것이 청죄입니다.

6. '의심스러운 문구 하나'가 아닙니다. 1월 30일의 승정원일기와 청실록의 기사 전체가 '문구 하나'입니까?

님 말씀대로 주변 정황 등까지 전부 고려하면, 인조가 청태종을 황제로 임명한 것이 분명합니다.

고전을 해석할 때, 애초부터 동국의 왕이 신분이 낮다는 전제를 하고 있으니, 그에 반하는 기록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전제를 바꾸어놓고 해석을 하면, 전부 다 들어 맞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촐라롱콘 16-04-17 12:58
   
인조의 신분이 청태종보다 높았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물론 병자호란 발발 직전까지도 조선이 후금-청을 낮추어본 것은 사실이며
후금-청에 보내는 사신도 명에 보내는 사신에 비하면 훨씬 격이 떨어지는
사신을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대부분 조선내부에서의 관념적인, 그리고 주로 국내용에 해당하는 사항이었지,
후금-청을 향해 대외적으로 드러내놓고 표현할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조선과 교린관계에 있었던 여진-만주와 일본에 대해 조선인들 스스로가 관념적,내부적
측면에서 조선보다 아래에 위치한다고 여긴 점은 사실이지만.....
실제 대외관계에서는 주변국과 오고간 대외문서 등을 감안할때, 형식적인 부분에서도
동격의 상호평등관계였습니다.
               
RaMooh 16-04-17 13:22
   
우리가 배웠던 역사에서는, 하늘에 절을 하는 제천은 중국의 황제만이 갖는 권한이고 속국인 동국은 하늘에 절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일상에서 하늘에 기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행사에서 하늘에 절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1. 그런데, 분명히 삼전도에서 인조는 청태종의 앞에서 하늘에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청태종은 그 누구에게도 절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항복을 하러 온 패자(敗者)가, 그것도 황제가 지켜보는 앞에서, 속국의 왕이 하늘에 절을 하는 예식을 행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즉, 기존의 역사지식이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승정원일기와 청실록을 확인하시면 됩니다.

2. 그 외에 자잘한 근거들이 넘칩니다.
          
그노스 16-04-17 15:08
   
님의 발제글을 다시 보시면,

2.삼전도에서 인조는 청태종을 황제로 임명하였습니다.

...라고 타이틀을 거시고 부제들을 쭉 나열하시며 그 중에 '인조가 하늘에 절을 올렸다' 가 들어가 있는거 아닌가요?
즉, 인조가 청태종을 황제로 임명했다는 주장이 더 큰 명제이지요. 제가 반론을 제기하는건 그 문제에 관한 것이지 딱히 인조가 절을 하늘에 올렸는지, 청태종에게 올렸는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게 아닙니다.
다른 학자분들의 해석이 모두 틀렸고 님의 해석만이 옳은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님이 옳다면 인조의 체면을 세워주려 그런것 같다는 제 위의 댓글을 읽으셨지요.
제가 궁금한건 님께서도 발제글에 올리셨지만, 인조가 하늘에 절을 올렸다는 작은 명제가 인조가 청태종을 황제에 책봉했다는 더 큰 명제를 증명할 연관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병자호란후 인조에게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행하라는 합의가 맺어졌는데 인조가 도리어 청태종을 황제로 책봉했다는 것이 이해가 안간다는 것이지요.
중국 황제만이 아니라 종종 한반도의 왕들도 하늘에 절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온 역사를 님께서도 아실텐데, 인조가 하늘에 절을 올린 것이 청태종을 황제에 책봉한 것이라고 증명이 되나요??

조선 초기에 하늘에 절을 올리는 제사를 드리는 제천의식 폐지론이 대두해서 조선을 제후국으로 자처하는 입장에서는 황제의 제천의식을 행하는 것이 그릇된 것이므로 폐지해야 한다며 논란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세종때 '오례의' 가 완성되며 제천의식이 중단되었으나, 세조때 고증을 거쳐 다시 제천의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사림파의 활발한 활동과 함께 제천의식이 소멸 되어버리고 맙니다.
즉 조선 시대에도 분명 제천의식의 전례가 있었습니다. 횟수가 적고 했다 안했다 반복이 계속 되어서 그렇지요.

덧붙이자면, 님의 견해에 반하는 견해를 올린다고 식민사학(?)을 옹호하는 것처럼 단정지으시는 비난은 좀 듣기 그러네요.
서로 견해가 틀리다고 식민사학이니, 반면에 환x 이니 하는 비난 역시 님 말씀처럼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으로서의 옳은 자세는 아니라고 봅니다.

1. 인조가 하늘에 절을 했다고 해석하는게 옳은 일인지 모르겠으나, 조선임금에게 황제 책봉을 받기 위함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금나라 황제도 윤관의 여진정벌후 맺은 고려와의 예전 맹약을 철회하고 사대를 받고자 했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는데, 왜 청태종은 조선임금의 황제책봉을 필요로 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오히려 청태종은 금나라하고는 다르게 직접 한반도의 왕에게 항복을 받을 정도로 강성했는데 말입니다.

2. 청태종에게 누르하치보다 반조선 기질이 있었다고 제가 표현한 이유는, 제가 책에서 읽은 기록에선 조선을 지나치게 저자세로 대하는 누르하치에게 청태종이 불만을 토로했다고 합니다. 군사적으로 강한 여진족에게 무례하게 구는 조선에게 청태종이 불만이 많았다는 일화가 있더군요.

3. 금나라 황제도 고려임금에게 책봉을 받았다고요?
그렇게 해석할수 있는 기록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추정이신가요.
여러 나라에게 동시에 사대하는 일은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하시는데 여진족은 명과 조선에 동시에 사대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누르하치의 기록을 보면, '우리 조상은 대대로 명에 순종하면서 살았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죄없이 명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이것은 도저히 씻을수 없는 한이다' 라는 기록을 보면 상황을 알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마도인들은 조선에도, 중국에도, 일본에도 동시에 사대를 하지 않았던가요?

4. 청태종이 인조의 체면을 살려줬다고 볼수 있다는 견해에 대한 해석에서, 님께서는 인조가 청태종보다 위의 신분이어서 그렇다고 보시지만, 삼전도 이전에 이미 정묘호란 이후로 청태종이 형이고 인조가 아우라고 협약을 맺었지요. 양자간에 보낸 국서들을 봐도 도저히 인조가 청태종보다 신분이 높았다고는 보아지지가 않네요.
인조를 아우라 칭하며 공공연히 인조의 죄를 묻겠다고한 청태종이 삼전도에 와서는 인조에게 황제 책봉을 받았다?
사적인 편지들도 아니고 벌써 10년넘게 청태종이 인조를 하대하는 국서들을 보내놓고 이제와서 자신이 아랫사람이니 인조에게 황제 책봉을 받았다?

양국간에 국서는 양자의 서열을 가리는 책봉의식 만큼이나 중대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조선만해도 전쟁 위험을 감수하며 일본의 국서 문구가 무례하다고 접수를 받지 않은 경우도 있고 정묘호란 이전에도 후금의 국서가 무례하다며 받지 않은 적이 있지요.
서열을 중시하는 시대에서 공식적으로 형과 아우를 칭하는 국서를 수차례 보내고 접수했다면 그 서열관계는 이미 정해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하물며 이미 정묘호란때 형제 서열을 정하기로 공식적으로 합의를 보았는데 말입니다.

5. '천명을 받은 청태종을 인조가 거스른 것은, 인조가 청태종을 거스른게 아니라 하늘을 거스른 것이며 그래서 청태종에게 절을 하지 않고 하늘에 절을 한 것이다.'

...라고 해석하시는데, 청태종의 '조선은 대대로 우리 후금에 죄를 지었으므로 마땅히 정토해야 한다.' 라는 문구를 보시면 '대대로' 라는 단어가 있듯이 천명을 받은 청태종을 인조가 거스른게 아니라 대대로 역대 조선왕들이 여진족들에게 무례했던 것에 대한 죄를 묻는거 아닌가요?
천명을 대변한 청태종을 거스른 인조의 죄만을 묻는다면 왜 '대대로' 라는 문구가 들어갔을까요.

님의 견해를 존중해서 인조의 신분이 더 높아서 청태종에게 절을 하지 않고, 하늘에 절을 한 것일수도 있지만, 청국이 앞으로 대명전쟁을 치뤄야 하는데 병자호란 뒤에도 조선의 실질적이고 완전한 복속을 바라기 어려웠던 청태종이 인조의 체면을 세우고 달래서 조선과 합의하에 굴욕적인 직접적인 절을 요구하지 않을 것일수도 있지요.
이건 님과 제가 서로 해석하기 나름인것 같습니다.

6. '의심스러운 문구 하나'가 아니라고 하시며 주변 정황 등까지 전부 고려하면, 인조가 청태종을 황제로 임명한 것이 분명하다고 하시는데, 그럼 여진족이 반기를 들기 시작한 정묘호란 전후부터 병자호란까지, 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록들을 몇가지만이라도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RaMooh 16-04-17 17:39
   
삼전도에서 있었던 모든 일의 목적은 ‘청태종의 황제 즉위’에 있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 여러 가지 예식을 행했는데,

(1). 제일 먼저 병자호란의 책임을 가리는 일인 청죄의 절을 하늘에 행했습니다.

(2). 유신을 하기 위한 예식인 두 번째 절을 하늘에 행했습니다. 청태종을 황제로 임명하는 것을 하늘에 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제가 ‘방위놀이’라 이름 붙인 행위를 인조가 제단에서 행했습니다. 이것이 중국을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하는 예식으로 해석됩니다.

(4). 청실록에서 ‘於是令李倧朝見禮臣贊禮(이에 이종으로 하여금 조현하여 예신하고 찬례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인조가 청태종의 황제 즉위식을 진행한 것, 즉 인조가 청태종을 황제로 임명한 것이 됩니다.

청죄의 절을 하늘에 행한 것이, 인조가 일국의 왕이라서 인조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으나, 그렇게 하려면 애초에 청죄의 절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군사력으로 상대의 목숨과 지위를 위협하는 입장에서, 항복하는 자의 체면을 세워주려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며,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자신이 아닌 하늘에 절을 하게 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에게 절을 하면 체면이 깎이고 하늘에 절을 하면 체면을 세워준다는 것인데, 청태종이 그렇게 할 이유가 딱히 없으며, 양국이 함께 행하는 국가행사에서 황제인 자신은 아무것도 안하고, 항복하러 온 패자가 뜬금없이 하늘에 절을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항복하는 절은 체면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라 쳐도, 두 번째 절은 어떻게 설명이 됩니까?

동국이 중국에 사대하는 것이, 동국이 신하가 되는 것이, 동국의 임금이 중국의 임금 보다 신분이 낮다는 것을 반드시 증명하지 않습니다.

'닷붙이자면, 님의 견해에 반하는 견해를 올린다고 식민사학(?)을 옹호하는 것처럼 단정지으시는 비난은 좀 듣기 그러네요.
서로 견해가 틀리다고 식민사학이니, 반면에 환x 이니 하는 비난 역시 님 말씀처럼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으로서의 옳은 자세는 아니라고 봅니다. '

님에게 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상대방이 그렇게 보이도록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1. 1636년 4월에 청태종이 황제로 즉위했고 그것을 동국에서 인정하였다면, 동국이 명나라가 아닌 청나라에 사대하였을 것이고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국이 인정하지 않았고, 두 사신이 두들겨 맞으면서도 인정을 하지 않고 국경을 넘으면서 청나라의 국서를 버렸습니다. 동국에서는 청나라의 국서를 개봉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두 사신을 처벌하려 하였습니다.

동국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동국의 임금에게 황제로 임명을 받지 못하면, 중국이 될 수 없고 동국의 사대를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동국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인조가 청태종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으니, 청태종이 군사를 일으켜 강제로 인조에게서 황제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2. 당연합니다. 누르하치의 후금은 중국이 아닌 외국이므로 동국에게 저자세로 대하는 것이고, 청태종은 군사적으로 강하니 얼마든지 중국이 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 불만이 있는 것입니다. 동국은 중국에게 깍듯이 대하는데, 후금이 중국이 되면 동국이 자기들에게 깍듯이 대할 것이기에 군사를 일으키기를 바란 것입니다.

3. 추정입니다.

사대(事大)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습니다. 사대라는 단어의 뜻을 강단학계와 제가 다르게 쓰고 있지만, 여진이나 일본 등이 동국이나 중국에게 ‘사대하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순종’과 ‘사대’는 다른 것입니다. 사대라는 단어는 동국만이 사용한 단어입니다.

4. 그래서 저도 어려움을 느낍니다. 이쪽에서는 분명하게 동국의 임금이 더 높다고 해석되는데, 저쪽에서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하니까요. 앞으로 역사학계의 숙제입니다. 왜 그러한 호칭이나 관계가 형성되고, 변화되는지 연구가 필요합니다.

청태종과 인조가 형 아우로 맺은 것이 아니라, 조선과 후금이 형 아우로 맺은 것이겠죠. 그리고, 처음부터 일관되게 관계가 쭉 이어진 것이 아니라, 중간 중간 관계를 새로 정립하려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군사력이나 상황에 의해 변화가 있었습니다.
               
RaMooh 16-04-17 17:40
   
5. 무엇을 하기 위해서 명분을 세우면, 대외 명분이 있고 자신만의 작은 명분들도 있습니다. 저 구절은 작은 명분을 나열한 것에 해당합니다. 또, 청태종이 황제에 즉위하는 당시에, 동국의 왕이 인조이고 청나라의 왕이 청태종이었던 것이니, 인조가 하늘(청태종)에 죄를 지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인조는 동국의 왕이므로, 자신의 행위만이 죄가 되는 아니고, 동국 대대로의 죄를 수렴하여 짊어지는 것입니다.

6. 1637년 1월 30일의 승정원일기와 청실록을 다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또,

(1). [...짐의 내외 여러 왕과 문무의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의 칭호를 권하여 올렸다. 너는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우리 군신이 차마 듣고 참을 수 있는 말인가" 했다는데 이는 또 무슨 까닭이냐. 무릇 황제의 칭호를 올리고 안올리는 것은 너에게 달려 있지 않다. 하늘이 도우면 평범한 지아비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도 한 이름없는 사내가 되는 것이니, 네가 한 말은 심히 방자하고 망령스럽다...]
(병자록)

“현재의 시각으로는, 인조의 말은 내정간섭에 해당하고 주제넘은 짓이다. 청태종도 굳이 이렇게 반응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세계관으로는, 인조의 말은 당연한 것이고, 청태종 역시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하에 천자가 둘이 있을 수 없고, 천자의 중국에 사대하여 천하를 다스려야 하는 동국의 입장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혹자는, 동국에게는 두 배로 힘든 일이 되겠지만, 명과 청 두 나라에 함께 사대하였다면 호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지만, 두 나라에 사대한다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일로서,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황제의 칭호를 올리고 안올리는 것은 너에게 달려 있지 않다’고 청태종이 말하였는데, 이는 ‘너에게 달려 있다’는 말과 같다. 황제라 칭한 청태종에 대해, 동국의 군신이 참지 않는다는 것은, 할 수만 있다면 군사력으로 정벌할 수도 있다는 말과 같다. 즉, 동국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동국의 군사력이 강했다면, 청태종은 감히 황제라 칭할 수 없었다는 말이 된다. 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청태종은, 군사력이 강했던 청태종은, 군사력을 믿고 ‘너에게 달려 있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하늘이 도우면 ~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이라고 부연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동국이 천자를 인정해야만 천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늘이 어쩌고저쩌고 하며 변명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2). “일기의 29일자 기사를 보면, 청나라에서 500으로 한정한 이유에 대해 추정하는 장면이 있다. 김류가, 호위군(衛士, 牽馬位)만 수백 명이고 문무백관이 각 한명의 노비만 거느려도 1,2백이고, 도감 및 금군도 1만인데다가 내관도 있으니, 500을 추리려면 매우 어렵다 한다. 또, 동국인을 싫어해서 인원을 줄인 것이라 한다. 최명길은, 청나라가 예식을 간략히 하는 것은 동국도 간략히 하기를 원하는 것이라 한다. 또, 동국은 백관이 모두 따르는데 청나라는 그렇지 못하니 모양새가 떨어져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또, 의물(儀物)을 모두 갖추어 만나면 청나라가 동국인을 접대하는 데에 불편함이 있기에 간략히 하려는 것이라 추측한다. 결국,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김류의 농간과 끌려갈 것에 겁을 내어, 중요 대신들도 많이 따르지 못하였다 한다. 즉, 실록의 기사대로 50여명이 맞다고 할 것이다. 또, 이 날의 예식에 사용될 소와 쌀을 요구했는데 많이 요구하지는 않았고, 최명길에게 군신(君臣)의 예인 삼배고두를 가르쳤다 한다.

청나라의 입장은, 전쟁터라 꼭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생략하기를 바라여, 의물과 면박여츤 등을 없애고 인원도 줄인 것이다. 동국은 500의 인원이 참석할 수도 있었는데, 내부 사정으로 인해 겨우 50여 명만 참가한 것이다. 이것이 과연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을 하는 예식인가? 이것은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 예식이며, 삼배고두는 신하인 인조가 임금인 하늘에게 행하는 예식이다. 청나라가 중국이 되는 예식이니, 중국인 청나라의 예법 중에 최고의 예절인 삼배고두를 동국에게 강요한 것이다.”

(3). 1636년 4월에 청태종이 황제로 즉위하였는데, 동국의 두 사신이 예를 취하지 않으면서 청태종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국경을 넘으면서 청나라의 국서를 열어보고 바로 버렸는데, 동국에서는 열어본 것만으로 처벌을 하려 하였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다 청태종을 인정하였는데, 동국만이 인정하지 않았고 병자호란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군사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문을 걸어 잠그면서 버티면 해결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즉, 청나라가 섬멸전을 전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목적이지, 멸절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4). 홍익한과 청태종의 대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승정원일기 영조 때의 기록일 것입니다. 홍익한이 청태종은 명조의 반적(역적)일뿐 황제가 될 수 없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청나라가 왕자들을 인질로 삼은 것은, 인조가 말을 안 들으면 왕자 중에서 하나를 대신 보위에 올리겠다는 협박입니다. 왕자들을 죽이겠다는 협박이 아니라, 왕위를 바꾸겠다는 협박입니다. 그러한 청태종이, 인조의 체면을 생각한다면 다른 방법을 썼겠죠. 항복하는 절을 자신이 아닌 하늘에 하게 함으로써, 인조의 체면을 세워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 들이기 힘듭니다.

또한, 동국에서는 ‘청죄’ 자체를 아주 꺼려합니다. 청태종이 아닌 하늘에 절을 하였다고 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청죄라는 단어를 지워버리기도 하고, 첫 번째 절에 대해서는 기록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카노 16-04-17 20:49
   
인조가 청태종에 항복을 하고 이후로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 된 것은 사실인데 청태종한테 절은 안했고 하늘에 했고 황제로 임명했다식의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정신승리하면 항복한 인조가 달리 보이기라도 합니까?
님보니 아큐정전의 주인공 아큐가 딱 떠오르네요.
                    
그노스 16-04-17 22:40
   
삼전도에서의 예식에 대한 님의 설명 잘 들었습니다.
인조가 하늘에다 대신 제를 올렸다라는 님의 견해를 아시다시피 제가 부정하지 않았지만,

'이에 이종으로 하여금 조현하여 예신하고 찬례하게 하였다'

...가 인조가 청태종을 황제로 임명한 것이라 하시는데, 황제를 암시하는 비유도 없고 전 님의 개인적인 해석이시라 생각됩니다만, 님께서는 항자였던 인조가 왜 직접 나서서 예식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이는지 의문을 제기하시는 것 같은데, 솔직히 동아시아 항복 예식에 대해 제가 아는게 없어서 이게 옳은지 그른지 의심이 들어야 하는 것이지도 모르겠네요.
님께서 지적하시니 무언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구나 생각해봅니다.
혹시 다른 항복 예식에 대해 알고 계시면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만, 군사력으로 상대의 목숨과 지위를 위협하는 입장에서, 항복하는 자의 체면을 세워주려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 하시지만(더 큰 상대인 명나라와의 전쟁을 앞두고?), 역으로 생각해보면 금나라 황제처럼 스스로 황제에 등극했으면 끝난 일일텐데 상대의 목숨과 지위를 위협하는 입장에 있는 청태종이 굳이 항복하는 자의 체면을 더럽혀가며 책봉을 받아야 겠느냐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금나라 여진족도 황제에 스스로 오른 전적이 있는데 왜 굳이 청태종은 책봉을 원해야 하나요?
인조에게 책봉을 받지 못하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조선에 와서 살인, 강간, 약탈을 저지르고 납치까지 자행한 청국 군사들이, 조선임금이 자국 황제를 책봉안해준다고 자국 황제에게 반기라도 드나요?
한반도인들과 여진인들 사이에 역사적으로 그런 선례가 있었나요?
아님 평소에 청태종이 조선을 상국이라 칭하며 남모를 충성심을 보여주기라도 했나요?
그럴 근거라도?
님의 동국, 중국 패러다임을 잠시만 제쳐두고 한번쯤 여쭤보고 싶네요.
님께서 상식을 말씀하시나, 죄송하지만 님의 주장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님께서 중요한 근거라고 생각하시며 말씀하시는 이번 것들도 솔직히 기대했던 만큼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님의 주장은 파급이 큰 대단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진실일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제가 아무래도 뼛속까지 식민x 인가 봅니다 ㅋ
제가 더 열린 마음으로 노력해야 할텐데...

1. 1336년 3월에 청태종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청태종이 황제로 즉위하는 것에 조선이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신하의 예(!)'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는 것은 언급 안해주시는군요.
그런 이유 덕분에 조선에서 척화론이 거세지면서 청태종의 사신을 연금하고 국서를 접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쟁을 대비하자는 절화방비의 교서를 전국에 내리고, 이 교서 내용이 청태종에게 알려지면서 그가 다시 조선 침략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삼전도 항복 전에, 아니 병자호란 이전에 이미 청태종이 인조에게 신하의 예를 요구했는데, 병자호란 승리 후에 청태종이 인조에게 황제 책봉을 받았다?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다고 보시지 않나요?

2. 동의하신다니 생략합니다.

3. '사대하다" 는 약자가 강자를 섬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나요? 보통 사대를 의미할때 사대한다고 문구를 남겨야 사대가 아니라 책봉을 받는다던지 조공을 받는다던지 하면 사대한다고 표현하지 않나요?
대마도는 조선, 일본에서 책봉의 인장을 받고 조공을 했습니다.
'대명일통지'의 기록을 보면 랴오둥 지역, 184개 구역 중에 79개 구역이 조선의 책봉을 받고 있었는데, 이 중에 상당수가 동시에 명나라의 책봉도 동시에 받았다고 합니다.

4. 인조가 청태종에게 보낸 국서를 보면 '저의 천성이 유약하여 잘못을 저지르고...형이 아우에게 대한 생각으로 잘못이 있음을 보면 노하여 꾸짖는 것이 물론 마땅합니다.' 라고 하는 문구로 봐서 후금과 조선이 형 아우로 맺어진 것만이 아니라 청태종과 인조가 형 아우로도 맺어졌다는 것에 더 신빙성이 갑니다.
단, 조선의 척화파들의 불만으로 중간에 조선 내부에서 관계를 새로 정립하려는 행위들이 있었다는 것에는 공감합니다.

5. 다시 말씀드리지만 청태종이 말하길, '조선은 대대로 우리 후금에 죄를 지었으므로 마땅히 정토해야 한다.' 라고 하는건, 천명을 받은 청태종을 거스른 것은 청태종을 거스른 것이 아니라 하늘을 거스른 것이라고 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반론의 근거가 여전히 된다고 생각됩니다.
정말 청태종이 인조의 황제 책봉을 원했다면, 아랫 사람이 윗사람의 죄를 물을수 있을까요?
님께서도 말씀하신 아비와 자식간에 말입니다.

6. (1) '무릇 황제의 칭호를 올리고 안올리는 것은 너에게 달려 있지 않다?'

...청태종이 인조한테 하는 말로 여겨지는데, 같은 문구가 님과 저는 다르게 해석되는군요.
분명 너에게 달려 있지 않다 라고 하는데 너에게 달려 있다 라니요??
제겐 결국 청태종이 황제가 되는건 인조에게 달려 있지 않다 라고 해석됩니다만.
더욱이 저기 위에다가 청태종이 그의 황제 등극 인정과, '군신의 예(!)' 를 인조에게 동시에 요구했다는 글을 제가 올렸지요?
그것과 종합하면 '나의 황제 등극이 네 허락을 필요로 하는건 아니지만, 인정하고 내게 신하의 예를 취해라' 라고 들립니다.
군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에는, 상국의 책봉이 필요로 할지 모르나, 동시에 신하들의 추존과 충성도 필요로 하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하없는 군주는 없으니까요.
'나를 어서 황제로 책봉해달라' 가 아니라, '황제의 체면이 걸렸으니 어서 빨리 신하의 예를 취하고 나를 받들어라.' 라고 해석이 되네요.
예를 들어 소국인 조선이 대국인 명나라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지 않는다면 명황제는 체면을 구기는 것이고, 군주가 체면을 잃는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일까요.

'하늘이 도우면 평범한 지아비도 천자가 될 수 있고...' 라며 청태종이 구구절절 외운건 어쩌면 당연합니다.
정묘호란 이전에 여진이 조선에게 책봉을 받아왔고 조선이 여진의 상국이었다는건 다 아는 사실이듯이, 자신의 출신을 기억하는 청태종의 당연한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이성계가 군주의 자리에 올랐으나, 예전엔 같은 신분이었던 고려 유신들이 그를 거부하며 '성계야, 성계야' 하고 불렀다면 이성계도 '하늘이 도우면 평범한 지아비도 천자가 될 수 있고...' 라며 구구절절 외웠겠지요.
그러나 중요한건 그것이 현재(!)의 신분을 드러내는건 아니라는 것이지요. 청태종이 인조보다 현재 신분이 낮아서가 아니라, 과거 조선을 섬겨온 여진 출신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이라고 봅니다.
인조로부터 황제 책봉을 요구하는 마음으로 말한 것처럼 들리지가 않습니다.

(2) '청나라에서 500으로 한정한 이유에 대해 추정하는 장면이 있다. 김류가, 호위군(衛士, 牽馬位)만 수백 명이고 문무백관이...'

...라무님
제겐 이것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조선측에선 수치스러운 현장에서의 증인을 줄이고 싶었던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상식적으로 수행군을 500으로 한정한 것은, 군주가 자국민 앞에서 항복 현장을 보이는 것이 싫은 것이 당연하였다고 해야 겠지요.

청국 입장에서 보면,
홍서봉, 김신국, 최명길이 잉굴다이와 항복 절차를 논의 했습니다.
인조의 항복 절차는 제일등 절목(손을 결박짓고 구슬 물고 관을 짊어짐) 얘기가 나왔으나 제이등 절목으로 절충되었으나 곤룡포는 허락이 안되었다고 합니다.
저런 절충안을 보듯이 대명전쟁을 앞두고 청태종으로서도 인조를 달래고 체면을 세워줄 필요가 있었으니
결국 500이란 숫자도 이런 절충 합의 결과로 볼수 있지 않을까요?

게다가 지금까지의 님의 주장대로라면 이 부분이 이상하네요.
청태종에게가 아니라 대신 하늘에 절을 올리는 제천의식을 치루면서 인조가 곤룡포도 못입었다?
더욱이 인조가 청태종에게 황제 책봉의식을 거행하면서 곤룡포도 못입었다?
차라리 패자로서 항복의식에 참여해서 곤룡포도 못입었다가 더 설득력 있지 않나요?

(3) '청태종이 황제로 즉위하였는데, 동국의 두 사신이 예를 취하지 않으면서 청태종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병자호란 이전에는 조선이 형제의 예를 따랐지 군신의 예를 따르지 않았고 조선의 척화론 분위기상 당연히 반발한 것일텐데, 이것을 왜 말씀하시는지요?
이것이 인조가 청태종을 황제 책봉했다는 근거가 되나요?

'동국만이...군사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문을 걸어 잠그면서 버티면 해결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님께서 무언가 잘못 아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조선의 군제를 보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군사를 상시 배치하는 조선의 진관제의 약점이 임진왜란에서 드러났지요. 다수의 적이 공격해오면 소수로 나눠진 진의 군사들이 당해 낼수가 없었기 때문에 쓸모 없다고 판단, 청국과의 전쟁전에 이 진관제가 폐지되고 맙니다.
문제는 이 진관제가 폐지되고 나니 청국 기병들이 전략 요충지들을 아무 저항없이 통과해 버렸다는 것이지요.
성문만 걸어 잠그면 해결될거라가, 청국이 섬멸전을 펼치지 않을거라 믿은 것이 아니라(그럼 의병들은 왜 싸우다가 섬멸되었는지?), 조선군이 진들을 포기하고 의미없는 산성들이나 지키고 있을때 청국 기병들이 최단거리로 도성을 노리고 왔다가 맞습니다.
즉 조선군의 방어체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 '우릴 안죽일거야' 하며 대책없이 성문만 걸어 잠그고 버틴게 아니지요. 잘못된 전법을 행했다가 빠른 청군 기병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입니다.

(4) 청태종이 조선 왕자들을 볼모로 삼은건 맞지만, 그런 그가 항복하는 절을 자신이 아닌 하늘에 하게 함으로써, 인조의 체면을 세워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 들이기 힘들다고 하시는데, 역으로 생각하면, 황제로 책봉해주는 인조의 아들들을 볼모로 삼는다? 상식적으로 이상하지요.

그리고 인조가 청태종이 아니라 하늘에 제를 올렸다는 님의 해석이 옳다고 저도 가정해서 님과 토론을 했지만, 인조의 체면을 세워준 것도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니라면, 하늘에 제를 올린게 아닐런지...
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전 님의 비문 해석을 존중해서 지금까지 토론한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님께서 지금까지 말씀해주신 것들은 인조가 청태종을 황제 책봉했다는 중요한 근거들로 보기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부분 님의 개인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하시고 계시지 않으신가요?
(제 반론들도 제 개인적인 해석이 적지 않지만)
전 님께서 청실록을 인용해 주신다길래, 님 께서 중요한 근거를 제시해 주시길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님의 인용글은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다를수 있는 구절이 많으며, 인조가 청태종을 황제 책봉했다는(조선 역사를 완전히 뒤집을) 근거로는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삼전도 항복(청태종을 위한 황제 책봉?) 이전의 국서들을 소개합니다.
(저도 별짓 다하는군요. 줄줄이 적고 싶지 않았는데 ㅋ)

1637년 1월 18일 인조의 국서 첫글,
'조선 국왕 이종은 엎드려 대청국 관온인성황제께 글을 올립니다.'

1637년 1월 20일 청태종의 국서 첫글,
'대청국 과온인성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조서를 내려 깨우치게 한다.'

1637년 1월 21일 인조의 국서 첫글,
조선 국왕 臣 이종은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인조가 이 때 처음으로 신하로 칭합니다)

1637년 1월 23일 인조의 국서 첫글,
조선 국왕 臣 이종은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1637년 1월 27일 인조의 국서 첫글,
조선 국왕 臣 이종은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위를 보시듯이 삼전도 항복 이전에 이미 인조는 자신을 신하라, 청태종을 황제라고 국서를 통해 수 차례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신하인(?) 인조가 청태종을 황제라고 칭해놓고 이미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청태종을 황제로 책봉했다... 글쎄요.
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님의 견해를 존중하겠습니다. 님께서도 제 견해를 부디 존중해 주시길요.
답변 주시면 제가 감사히 읽고 저는 이만 마칠까 합니다(제가 한계가 있는지 비슷한 반론을 계속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님의 견해가 사실이라면 우리 민족에게 좋은 일이니 연구에 성과가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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