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습니다. 기원전 7000년 경에 요서지역에서 신석기문화(홍산문화)가 시작될 때 당시 요하문명은 기후의 혜택을 받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정도로 땅이 비옥했습니다. 당시 지금보다 기온이 3도 정도 높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죠.. 홍산문화 이후 기온이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해 하가점상층문화시기가 되면 요서는 유목민의 땅이 됩니다. 정착문화를 영위하기 어려운 땅이 되었다는 것이죠.
(실제로 고고학 적으로 이시기.. 약 BC 3500년경부터 양소문화와 홍산문화가 서로 상호작용을 미치면서 장성지대에 새로운 고고학문화가 생깁니다.. 즉 융합문화가 생겨난 것이죠)
이에 따라 홍산문화 지역에 살던 주민들이 대거 남하하는데 이 때 염제, 황제, 치우의 충돌이 이 때 일어난 것으로 짐작이 갑니다.
또한 이 시기 홍산문화 지역에서 지금의 황하 땅으로 남하한 종족이 바로 동이족으로 이들은 황하문명의 주인공입니다.
1. 동이족이 황하문명의 주인공이라 하는 말은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발언이 아닌지요? 학계에서 인정받는 내용입니까?
2. 황제헌원과 염제신농, 치우천황은 각각 어느쪽의 대표입니까? 헌원과 신농은 중국이고, 중국으로부터 모독과 숭배를 동시에 받는 모순적인 신 치우는 묘족이니 동이족의 대표라 부르더라도
본래 헌원과 염제 역시 동이족에서 비롯되었다는 만능동이족설이 치우동이족설을 지지할 시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니
헌원 염제 치우가 서로 양소강 황허 홍산 등등을 대표하기보다
아예 홍산문화에서 세 세력으로 분화되어 서로를 치고박고 싸운건지?
아 염제는 제외대상이군요. 헌원과 치우가 탁록전을 치뤘으니.
4천년전의 만주가 비옥했다함이 고조선이 만주를 점유했었다는 것을 뒷받침할 중요한 이유가 되겠죠. 그러지않고서야 현대에 정체된 관점으로서만 보면 고조선은 유목민의 나라라고 판단할 뿐이니...
그런데 과연 삼황오제와 치우천황이 모두 동이에서 유래된걸까요? 그러하면 하상시대의 왕과 귀족은 모두 북방알타이어계의 발음으로 중국말을 말했겠지요??
동이족이 황하문명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주장은 학계에서 인정받는 내용입니다. 확신할 수 있어요. 그냥 정설입니다.
하지만 저는 동이족이 현재 한국과는 관련이 없다는 생각하는 사람입니다만.. 민족주의적이라는 말은 아닌 듯하네요. 당시 동이족 대부분은 화하족이 한족으로 확장될 때 대부분이 한족으로 편입됩니다. 따라서 당시 동이족은 지금의 한국과는 큰 관련이 없습니다.
2번과 같은 경우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북경대학 젠보짠교수의 말을 인용하면..
중국대륙에서 활동하던 여러 종족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인종적+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질 때 하(夏)족들은 동남쪽으로 이주했고 묘족들의 선조들은 서남쪽에서 중원으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두 종족은 중원에서 충돌하는데 이것이 탁록대전이며 결국 황제계가 승리 황제계가 중원 지역의 중심세력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국학원 출처
중국의 기록에서 찾은 동이족 역사의 증거들
1) 중국민족의 조상은 바로 동이족이다 - 중국 고사변 -
2) 3황 5제의 8대 임금들이 숙신(주: 조선의 옛 이름)에서 나왔다. - 중국 산해경 -
3) 태호복회의 성은 풍(風)씨이며, 고대 동이족이다 -1989년판 중국 상해 출판사, 역대 제왕록 -
4) 황제는 백민(白民)에서 났고, 동이족에 속한 사람이다 -중국 초사: -
5) 은나라의 (건국)시조 설은 동이족이다. 은나라는 이(夷:동이족)의 나라이고, 주나라는 화(華: 중국 漢:족)의 나라이다. -중국 사마천 史記 -
7) 요임금은 황제헌원의 5세손이다 - 중국 사마천 史記 -
8) 순임금은 0에서 태어났고 00으로 이주하였으며 00에서 죽었다. 풍. 부하. 명조는 모두 동이족의 땅이며 순임금은 동이족이다. - 맹자:
9) 주나라를 세운 문왕(文王)은 기주에서 태어났고 필영에서 죽었다. 그곳은 서이(西夷: 동이족의 한 지파)의 땅이다. -맹자:
11) 진(秦)나라의 선조는 황제. 전욱. 고양씨이며, 묘족의 후예다. 진나라와 조(趙)나라는 모두가 모계혈통이나 그 모계의 어버지는 전욱이다. 소호(小昊)씨는 영씨성을 가진 족으로, 진나라 조상의 할아버지가 소호씨이다. -사기(史記) 진 본기(秦 本記)-
12) “중구의 고대사는 모두 동이족의 역사다” - 중국 북경대학교 고고학과 엄문명 주임교수의 증언 -
13) 천자의 호칭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으니,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예로부터 천자라 한 것이다. - 중국의 학자 채옹이 저서 독단에 남긴 기록
14)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 이는 곧 뿌리이며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한다고들 한다. 모든 것은 땅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도로써 다스리기 쉬워서 군자의 나라이자 죽지 않는 나라(不死國)이 된 것이다. - 중국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15) 이는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며, 활 궁(弓)자와 큰 대(大)에서 따온 글자로, 그 사람들은 어질고 오래살며, 죽지않는 군자가 있는 나라이다. -중국 설문(設文) 자해(字解)-
16)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순리(順理)를 따르는 성향이 있으나, 오직 동이(東夷)만이 큰 것을 따르니 대인이다. 이(夷)의 풍속은 어질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살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곳은) 죽지 않는 군자가 있는 나라이다. 살펴보면 그 곳은 하늘도 크고 땅도 크며 사람 역시 크다. -중국 설문(설문): 대부(大部)-
17) 동이족은 체격이 크고 용감하다. 그러면서도 남의 것은 빼앗는 일이 없다 - 중국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18) 동방의 사람들은 남자는 전부 허리에 요대를 차고 모자를 쓴다. 여자는 전부 색옷을 입고 항상 공손하게 앉는다. 그들은 상대방 명예를 존중하여 훼손하는 일이 없으며 사람이 환란을 당하는 것을 보면 죽을 곳이라도 뛰어들어 도와준다. -중국 동방삭 신이경-
19) 중국인들은 서남북 사람들이 버러지. 동물과 같다고 보았다. 오직 동방인에 대해서만 “천성이 유순하고 서로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으며 가르치기를 좋아한다. -중국 예기禮記 왕제 편-
20) 치우(천황)는 옛천자의 이름이다. -중국 사마천 사기 -
21)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 - 古天子之名이다.
-중국 이십오사(二十五史)
22) 삼묘족(三猫족)의 나라를 구려(九麗)라 하고. 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 -중국 민족사: 왕동령 -
23) 동이사람인 신농과 황제헌원의 시대에, 동이족의 갈래인 여묘족이 중국의 남부 땅까지를 차지하여, 대저 한 옛적에는 양자강과 한수지역에 여(黎)의 땅이 있었다. - 일본학자 조거룡장, 출전 : 겨레역사 6천년
24) 세석기 시대의 문화부족이 맨처음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근반에 살았는데, 그들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염제신농의 본족이다. 그런데 이 문화부족이 서전 우공편에서 말한 동이겨레의 갈래인 도이. 조이. 내이. 회이와 은0나라의 갑골문자로 적은 이방, 토방,길방, 귀방. 강방과 주나라 때 이(夷), 적(狄), 험윤(獫允), 진한 때 호(胡), 맥(貊), 흉노(凶奴), 위, 진 때 오환(五桓), 선비(鮮卑)등의 원종족이다. -중국학자 서량지 -
즉 삼황오제는 동이족이 맞고
고대 중국은 어딘가에서 남하한 동이족이 주도한 역사임이 맞지만
현 한국인은 동이족과 큰 관련이 없다??
그런데 삼황오제가 숙신에서 나왔다는데
숙신은 조선계아닙니까?
동이가 중국 동부지방과 동북부 요동, 요서, 요하, 만주, 연해주, 한반도를 지칭하는 것일텐데
삼황오제가 연해주와 만주쪽의 숙신으로부터 나왔다는것은
그들이 중국의 신화적인물로 자리잡을 시대에 벌써 숙신엔 어느정도 고도화된, 그 당시기준으로 고도화된 사회 아니었나요?
그래서 하족이 중국인이고 묘족이 동이족인데
두 민족이 서로의 길에 마주치며 탁록전을 벌였을 때에 치우와 헌원이 싸웠다는 것은
묘족, 즉 동이족의 치우와 하족, 즉 중국인의 헌원이 싸웠다 이거죠?
숙신족과 동이족은 처음에는 같은 민족이였을 겁니다. 이들은 요서지역에 있는 홍산문화에서 발원한 민족으로 본래는 한 민족이었는데 BC 3500년 경부터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하면서 현재 황하지역으로 남하한 요하문명인(동이족) 남하하지 않고 요서에 존치한 요하문명인(숙신족)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남하한 동이족들은 대부분이 이후 한(漢)족으로 편입되었고 숙신족들이 바로 고조선인으로 이들이 분화된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정도는 지난 일이라 현재 한국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고 봅니다
마지막 빙하기시절 빙하로 인해 사방이 막혀 수천년간 바이칼호 근방에서 갖혀 머물던 인류(현재 몽골리안등의 작은 눈은 빙하에서 반사되는 빛으로 인한 실명을 막기위해 자연적으로 진화된거였죠)는 간빙기로 빙하가 물러나며 기후가 온난해지자 몽골, 만주와, 한반도, 중국북부등으로 남하했죠.
그 증거로 8~9천년전 몽골, 만주등에서 대규모 농사를 지었던 유적들이 여럿 발견되었습니다. 지금은 척박하고 추운 황무지이지만 그때는 농사를 지을수 있을정도로 물이 풍부하고 토지나 기후도 온화했다는 증거인거죠. 그 이후로도 조금씩 기후가 점점 내려가자 몽골이나 북만주등에 있던 부족들은 남하하며 서로 결합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우게 됩니다.
4~5천년전 당시 중국이라고 해봤자 황하이남은 미개척지에 문명과는 거리가 먼 야만민족들의 영토였고 황하근방에서나 문명이라고 할만한 곳이 있을정도였고 우리 고조선과 간간히 교류하는 정도였으니까니요.
처음으로 돌아가서 8~9천년만해도 몽골과 북만주등에서도 농사를 짓던것이 수천년간에 걸쳐 온도가 떨어지며 부족들이 남하하고 남아있는 부족들도 농사보다는 부여와 같이 반농반목을 하거나 하면서 점점 목축중심으로 이동해가죠.
부여족이라 일컺는 처음에는 고조선 북부의 머물던 부족들이 고조선 패망이후 몽골, 북만주등에서 북부여를 세우고 동부여를 세우고, 졸본부여와 고구려, 남부여(백제)를 세우며 만주와 한반도로 점점 남하하는 이유는 다른 이유때문에 아닌 기후때문이었죠.
간단히 적어 그런거지 바이칼호 빙하기에 갖혀있다 농경으로 접어드는 기간만해도 수천년의 걸친 기간이죠. 바로 영감을 얻어 농경사회로 진입했다는게 아닙니다. 아직은 씨족이나 부족사회에 더 가까울때이죠.
농경이라고 해봤자 지금같은 벼를 이용한 농경은 아닌 '조'와 '팥'등의 원시농경에 가깝습니다. '조'와 '팥'등은 이미 '벼'이전부터 인류의 주식중 하나였을정도로 오래된 작물이죠.
8~9천년 몽골의 농경유적은 어느 다큐에서 본건데 지금은 제목을 기억을 못하지만 내용은 몽골국립박물관의 인사중 한명이 소개를 하고 외국인 학자들과 몽골인 학자들이 발굴중인 유적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주발굴단은 일본이었고 우리나라도 일부 참여한다는 내용이었죠.(다른 기사에서 보았더니 일본이 몽골과 중앙아시아등 유적 발굴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지금은 그 다큐제목은 기억은 못하겠고 그냥 기사로는 찾아보니 5~6천년전 몽골의 농경유적지에 대한 기사만이 하나 나오네요. 이건 우리나라와 몽골의 합동발굴단이 발굴한 내용인듯 합니다.
그리고 이미 아메리카 대륙등에서는 7000년전 농경의 흔적이 발견된 발굴도 있고 우리나라 또한 7,000년전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팥'흔적등이 발견되어 한반도 농경시작이 7,0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유적이 발굴되어 있습니다.(몽골등의 유적은 농사를 지은 농경의 흔적등이 발견된 유적이고 우리나라는 농사를 지어 '팥'을 생산한 증거가 있는 차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