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고학계가 '겉에 검은 색 염료를 칠한 옥돌 조각상'으로 떠들썩하다. 인류 문명사를 바꿔놓을 수도 있는 수수께끼의 유물 흑피옥(黑皮玉)이 바로 그것이다. 흑피옥이 진짜라면 1만년 전, 또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초고대(超古代)문명이 동양에 실존했다는 뜻이 된다.
중국당국은 학계에서 전혀 연구된 적이 없는 흑피옥에 대한 조사를 결정했다. 베이징과기보(北京科技報)와 상보(商報) 같은 언론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우란차부시(烏蘭察布市)박물관의 후샤우눙(胡曉農) 관장은 지난 13일 본지에 이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1월 말까지 이어지는) 춘절(설날) 연휴 이후 흑피옥 출토 현장에 대한 본격 조사에 들어갈 것이고 이후 발굴 여부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후 관장은 "현재 발굴지 일대에 국가의 허락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도록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을 들쑤셔놓은 사람은 한국의 유물 수집가 김희용(金喜鏞·60)씨다. 그는 중국 현지에서 흑피옥을 520여개나 수집해 소장하고 있다. 12일 광주광역시 북구 매곡동 김씨의 집을 찾았다. 아파트 한쪽 방에 '문제의 유물'들이 있었다. 높이 10㎝에서 60㎝, 큰 것은 180㎝나 됐다.
대형 흑피옥은 성인 남자가 겨우 들어 옮길 정도로 무거웠다. 옷을 입지 않은 인물과 동물, 고대 신화에 나올 법한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모습들을 표현한 이 조각상들은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유방·둔부를 과장되게 드러내거나 성생활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들도 있었다.
흑피옥들은 원시사회와 가까운 초기 문명의 산물처럼 보였다. 대부분의 조각상들이 무릎을 굽히고 있다는 점도 특이했다. 그 때문에 김씨는 "미직립(未直立) 상태의 인류가 만들어 낸 문명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전남 영암 출신으로 고졸 학력인 김씨는 서울 인사동의 골동품 가게 주인이었다. 1990년 일본 도쿄(東京)의 책방 골목에서 만난 일본 노인이 뜻밖의 얘기를 해 줬다고 그는 회상했다. "1940년대 초 내몽골에서 검은 색 조각상이 나왔는데 고대 문명의 산물인 것 같았지만 관동군까지 동원됐는데도 출토지를 찾지 못했다." 그 노인은 만주국에서 근무하던 고고학자였다.
- ▲ '고대 유물 수집가' 김희용씨가 광주광역시 매곡동 자신의 집에서 그동안 모은 흑피옥 유물들을 꺼내 놓고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이 유물들이 '최소한 1만년 전 초고대문명의 유산'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진품 여부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그 후 김씨는 흑피옥을 찾기 위해 16년 동안 중국을 유랑하며 전 재산을 쏟아 부었다. 북쪽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남쪽 하이난성(海南省)까지 샅샅이 누비며 "이렇게 생긴 유물을 찾아 달라"며 닥치는 대로 부탁한 끝에 수백 점의 흑피옥을 손에 넣었다.
여권에 출입국 도장이 800번 가까이 찍혔지만 세관원들은 정체불명의 미술품에 대해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 정작 의심을 한 것은 "왜 그렇게 자주 중국을 드나드느냐"며 다그친 우리
국정원 쪽이었다. 그는 다시 도쿄의 책방 골목에 매일같이 나타나던 그 노인에게 유물을 보여 줬다. 노인은 "내가 말했던 바로 그것"이라며 "정확히 어디서 나왔는지를 알아내야 한다"고 했다.
출토 지점을 찾기 위해 수소문하는 동안 사기도 많이 당했다. 물건만 건네고는 도망가는 일도 많았다. 그가 최초 도굴꾼 두 명과 함께 출토지를 찾아낸 것은 2006년 8월 22일이었다고 한다. 내몽골 우란차부시 인근의 초원이었다는 것이다.
"자정 넘어 무덤을 파 보니 지하 2m에 커다란 석실(石室)이 있었다. 그곳에 전신 인골이 누워 있었다. 주변에는 31점의 흑피옥이 네 줄로 정렬해 있었고 발 아래선 높이 62㎝의 태양신 조각상이 나왔다."
그는 그런 무덤들이 무수히 많았고 근처 산꼭대기에선 '고대 문명 대신전(大神殿)'의 흔적을 봤다고도 말했다. 그가 보여 준 사진에는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쌓은 지대석(址臺石)들처럼 보이는 유적이 있었다.
김씨 스스로 인정하듯 그것은 분명한 도굴이었다. "하지만 초고대 유적지 발견의 증거를 만들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두 도굴꾼이 유물을 묻어 놓은 뒤 속임수를 쓴 건 아닐까? 김씨는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넓은 초원에서 유독 그곳만 자신이 파 보라고 지시했다는 얘기다.
학계의 반응은 냉정했다. 2006년 김씨의 흑피옥 50점을 감정했던 임영진 전남대 교수(고고학)는 "진짜라면 세계적인 사건이 될 정도로 수준 높은 작품들이었다"면서도 "1만년 전 기법으로 볼 수 없고 김씨가 열정에 취해 잘못된 사람들을 만난 게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실물을 보지 않은 미술계 인사들은 "중국과 동남아에 범람하는 가짜 중 일부"라는 반응을 보였다.
기원전 4500~3000년 랴오허(遼河) 일대의 '홍산(紅山) 문화'를 한국사의 원류로 보는 우실하 항공대 교수(문화사회학)는 "흑피옥의 일부가 홍산 문화의 옥기(玉器)와 색만 다를 뿐 모양이 같다"며 "흑피옥 문명이 우리 민족의 선조와도 직접 연결돼 있다는 것을 입증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진품 여부에 대해선 유보적인 입장이다.
유일하게 '진품이 맞다'는 입장에 서 있는 학자는 정건재 전남과학대 교수(동양사학)다. 그는 "흑피옥은 한국의 단군, 중국의 신농·복희 같은 신화가 역사적 사실이었다고 입증할 수 있는 단서"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2007년 11월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원에 흑피옥의 연대 측정을 의뢰했다. 그 결과 '1만4300년±60년'이라는 놀라운 수치가 나왔다. 그러나 이것은 흑피옥 표면에 달라붙은 유기물을 측정해 나온 수치이기 때문에 아직 유물 제작 연대에 대한 확증은 될 수 없었다.
2007년 초 김씨는 "소장하고 있는 흑피옥 조각상 520여점을 모두 중국 정부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세계의 인류·고고학자들과 함께 자신이 발굴 현장에 동행해 유물을 확인한 뒤 전 세계에 순회 전시하는 조건이었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에게도 편지를 썼다.
중국 학자들은 "이런 건 지금까지 중국 역사에서 본 적도 없는 유물"이라며 의아해했다. 지난해 11월 중국 국가문물국 사회문물처는 "전문가를 동원해 흑피옥 출토 현장을 조사하도록 네이멍구자치구 문물국에 지시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그동안 철저히 숨겨 왔던 흑피옥 출토 현장이 어디인지를 최근 중국 당국에 알려 줬다고 말했다. "그곳은 우란차부시 화더현(化德縣) 다징거우(大井溝) 일대다." 네이멍구자치구의 수도인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서 북동쪽으로 340㎞, 압록강에서는 서쪽으로 900㎞ 정도 떨어진 곳이다.
김씨는 왜 애써 모은 유물을 대가 없이 기증키로 한 것일까. "확신이 없이 이렇게 일생에 걸쳐 목숨을 걸고 미친 짓을 하겠는가?
중국에서 만든 가짜라면 내가 더 잘 안다. 인류 전체의 문화 유산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돌려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발견자의 국적과 이름을 분명히 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그래서 한국인이 찾았다는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만을 남기려는 것이다. 으핫핫."
초원을 덮은 눈이 녹고 땅이 풀릴 올 5월이면 다징거우 일대에 대한 발굴이 시작될 것이고, 그렇다면 흑피옥은 물론 그 자신이 이름 붙인 '정천(井泉) 문명'의 실체가 나타날 것이라고 김씨는 말했다. 우물(井)과 샘(泉)은 문명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가 가진 흑피옥이 진품이라고 볼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는 지금까지 아무 것도 없다. 아마도 곧 드러나게 될 흑피옥의 결론은 '인류 역사의 대발견'이거나 '희대의 사기극이자 국제적 해프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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