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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2-27 01:07
[기타] 중국, '축구공한증' 말고 '전쟁공한증'도 있었다
 글쓴이 : 두부국
조회 : 7,193  

고구려 전사의 모습. 출처: <한국생활사박물관> 3권.
ⓒ 사계절

과거에 한민족이 중국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경제적·문화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타 분야에서까지 그러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두 민족이나 두 국가의 역량을 비교하는 가장 확실한 기준은 전면전이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군사력·경제력·외교력·기술력·정치력이 총동원된다. 그렇기 때문에 두 국가의 실력을 비교하는 데에 있어서 전면전만큼 확실한 기준도 없을 것이다. 

'한민족과 중국의 전면전 실적이야 뻔한 게 아닌가? 한민족이 주로 패배하지 않았겠나?'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아니다.

유라시아대륙 곳곳이 몽골제국에게 정복될 때에도, 한민족은 끝내 패전하지 않았다. 한민족은 근 30년간 몽골군을 막아냈다. 양국의 대결은 1260년에 화친조약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몽골제국이 중국을 점령한 것은 1279년이다. 한국·중국 역사학계에서는, 원나라라는 중국식 국호를 채택한 1271년 이후의 몽골제국을 중국왕조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몽골 전쟁은 한민족과 중국의 전쟁이 아니라 한민족과 몽골족의 전쟁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을 한민족과 중국의 전면전 기록에 넣을 수는 없다.

병자호란(1637년) 때에 청나라에 패배를 당했다는 증거가 서울시 송파구 잠실동의 삼전도비에 남아 있지만, 이 경우에도 전쟁은 조선 측의 '기권'에 의해 종결되었다. 한·중 역사학계에서는 병자호란 당시의 청나라를 중국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중국 본토를 점령한 1644년 이후의 청나라를 중국왕조로 간주할 뿐이다. 그나마 여진족(만주족)은 고구려·발해의 지배 하에 있었던 말갈족의 후예가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이 경우에도 한민족이 '중국'에 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삼전도비.
ⓒ 김종성

중국과의 전면전, 한민족의 성적은?

그럼, 정통 중국과의 전면전에서 한민족은 어떤 성적을 거두었을까? 이 대목에서, 고구려·백제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된 사건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패배한 게 아니었다. 배후의 신라가 당나라를 돕지 않았다면, 당나라는 결코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킬 수 없었다. 근 30년 가까이 질질 끌던 고구려-당나라 전쟁이 신라의 가세에 의해 손쉽게 종결된 사실, 또 20년 가까이 유지되던 백제-당나라 긴장관계가 신라의 가세에 의해 수월하게 끝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당나라는 결코 자기 혼자 힘으로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킬 수 없었다.

당나라는 신라를 끌어들여 2:1의 수적 우위를 확보한 뒤에야 비로소 고구려·백제를 각각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례들을 통해서는 한민족과 중국의 진짜 실력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한민족과 중국이 일대일로 맞붙은 전면전은 여러 차례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경우에 주로 한민족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수양제와 당태종의 참패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1:1 전면전에서 한민족이 패배한 적도 물론 있었다. 그런 사례가 1차례 있었다. 기원전 109년부터 108년까지 벌어진 고조선과 한나라의 최종 승부가 바로 그것이다. 이 승부에 관한 내용이 중국측 역사서인 <한서> '조선열전'에 생생히 기록돼 있다. 이것을 읽어보면, 그나마 그 대결도 중국의 '득점'이 아닌 한국의 'xx골'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서> '조선열전'에 따르면, 이 전쟁은 한나라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한나라의 조선 원정군은 양방향으로 출발했다. 양복(楊僕) 장군이 이끄는 5만 병력은 산둥반도에서 함선을 타고 발해(渤海, 서해 위쪽의 바다)를 지나 왕검성(평양)으로 진격했다. 순체(荀?) 장군이 지휘하는 병력은 요동(만주)에서 출발하여 육로를 거쳐 왕검성으로 진격했다.

참고로, 저명한 국내 역사서에서 양복 장군이 7천 병력을 이끌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는 <한서> '조선열전'을 잘못 읽은 결과다. '조선열전'에는 양복 장군이 5만 병력을 이끌고 상륙한 뒤에 7천 병력만 선별하여 왕검성으로 먼저 진격했다고 적혀 있다.

고조선 임금 위우거(衛右渠)는 양복의 병력이 5만에서 7천으로 '찢어진' 틈을 타서, 왕검성 밖으로 병력을 급파해 양복의 군대를 대파했다. 한편, 순체 장군은 패수(압록강 혹은 청천강) 서쪽에서 조선군과 격돌을 벌였으나,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전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한나라 황제 한무제는 전략을 급히 변경했다. 특사 위산(衛山)을 파견해서 고조선에 항복을 권유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경우에, 고조선을 포함해서 역대 한민족 왕조들이 취한 대응전략 중 하나는, 중국의 항복권유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것이다. 위우거도 그런 방식을 취했다.

위우거는 중국 특사 위산에게 "항복하고 싶었지만, (한나라) 장수들이 나를 죽일까봐 무서웠다"며 엄살을 부렸다. 그러고는 사죄사절로 태자를 파견하면서, 그에게 5천 필의 말을 조공하고 오라고 명령했다.

물론 조공을 하면 반대급부인 회사(回賜, 답례)를 받아오는 것이 관행이었다. 하지만, 태자는 패수 앞에서 발길을 돌려 그냥 되돌아왔다. 한나라 측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결국 위산은 빈손으로 귀국했고, 격분한 한무제는 위산을 죽여 버렸다.

한나라의 고조선 침공 방향. 출처: 고등학교 <역사부도>.
ⓒ 신유

한나라의 승리는 고조선의 xx골 때문

고조선 태자의 돌출행동으로 화친 무드가 깨지자, 한나라 군대는 총공세를 재개했다. 순체 장군은 패수 유역에서 고조선군을 깨뜨리고 왕검성으로 진격했다. 양복 장군도 왕검성으로 진격하여 순체 장군과 더불어 왕검성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적의 위협이 가중되자, 왕검성 안에서는 분열이 생겨났다. 이주민 세력인 친왕파(親王派)와 토착민 세력인 재상파(宰相派) 사이에서 항전이냐 화친이냐를 놓고 알력이 생긴 것이다. 위우거를 둘러싼 친왕파는 항전을, 토착세력으로 형성된 재상파는 화친을 택했다.

한나라 군영에서도 의견 대립이 발생했다. 패수에서 고조선을 격파한 경험이 있는 순체 장군은 전쟁의 계속을 희망했고, 고조선에게 대패한 경험이 있는 양복 장군은 화친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기를 희망했다. 화친파인 양복 장군은 고조선 재상파와 은밀한 접촉을 가졌다. 그는 고조선 재상파가 위우거를 죽여주면 재상파의 정치적 기득권을 보장해주기로 합의했다. 물론 이것은 밀약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한무제는 공손수(公孫遂)라는 특사를 현지에 파견했다. 한나라 진영의 문제점을 시정하고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장에 온 공손수는 순체 장군을 지지했다. 그는 "양복 장군이 고조선과 손을 잡고 한나라를 배반할 가능성이 있다"는 순체 장군의 말을 신뢰했다. 그래서 양복 장군을 억류한 상태에서 양복의 군대를 순체의 휘하에 편입시켜 버렸다.

양복의 힘을 꺾어버린 공손수의 조치는, 좀 더 손쉽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버린 것이었다. 공손수가 현장의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였다. 공손수가 본국으로 돌아가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양복을 억류했다"고 보고하자, 한무제는 이번에도 격노하여 공손수를 죽여 버렸다. 공손수의 보고를 들은 한무제는, 양복 장군과 고조선 재상파의 밀월이 한나라를 배반하기 위한 게 아니라 고조선을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지지부진한 상태로 시간이 좀 더 흘렀다. 결국 이 전쟁은 명확한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 고조선 측의 내분으로 종결되고 말았다. 고조선 재상파가 위우거를 죽이고 항복을 선택한 것이다.

재상파는 한나라에 항복하는 대신,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장받았다. 휘하에 있던 토지와 백성에 대한 통치권을 그대로 인정받은 것이다. 한나라가 고조선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고는 하지만 토착세력의 지배력이 그대로 보존되었으므로, 한사군은 유명무실한 기구였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그러므로 이 전쟁에서 실질적으로 승리한 것은 한나라가 아니라 고조선 토착세력이었다. 그들은 손해 본 게 없었다. 이에 비해 한나라는 고조선이란 나라만 멸망시켰을 뿐, 고조선 땅에 대해 실질적 지배력을 갖지 못했다. 한나라 입장에서는 실익 없는 승리였던 것이다.

한무제 역시 그런 판단을 했다. 고조선을 무력으로 제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고조선의 'xx골'로 전쟁이 끝난 데에다가 한나라가 실질적으로 얻은 것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나라 장군들을 처벌하기로 결심했다.

한무제는 순체장군을 소환해서 참수한 뒤에 그의 목을 일반에 공개했다. 그리고 양복에게도 사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양복은 속죄금(벌금)을 물고 사형을 피하는 대신, 작위를 뺏기고 평민으로 전락했다. 특사 위산·공손수를 포함해서, 이 전쟁과 관련된 한나라 고위인사들이 모두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 셈이다. 이 같은 조치는 한나라의 승리가 한나라 군대의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고조선 재상파의 주역들은 한무제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제후의 지위를 받은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한나라 장수들은 사형선고를 받고 전쟁에서 패배한 고조선 고위층들은 도리어 포상을 받았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고조선의 패배가 실력이 아닌 내분 때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민족, 중국과의 전면전서 결코 밀리지 않았다

위와 같이, 한민족과 중국의 1:1 전면전에서는 한민족이 결코 밀리지 않았다. 수양제·당태종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1:1 전면전에서는 한민족이 중국을 압도한 예가 더 많다. 그나마 유일한 패전이라 할 수 있는 고조선-한나라 전쟁도 한민족의 xx골로 승부가 가려졌다.

이는 중국의 군사력이 한민족의 군사력을 압도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안시성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고 돌아간 당태종이 죽으면서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긴 사실은, 한민족과의 전면전 경험이 중국인들의 뇌리에 '공한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런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한나라가 모든 군대를 총동원했다면 고조선을 손쉽게 멸망시키지 못했겠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거대한 제국이라도 특정 전쟁에 파견할 수 있는 군대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다. 모든 군대를 특정 전쟁에 다 투입하면 보급문제가 생길 뿐만 아니라 제3국의 기습 침공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한나라는 고조선에 파견할 수 있는 병력을 다 보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고조선과의 전쟁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민족은 중국과의 1:1 전면전에서는 결코 밀리지 않았다. 경제나 문화에서는 뒤처진 게 사실이지만, 군사력에서는 절대로 뒤지지 않았다. 고구려·백제가 각각 패배한 것은 신라가 중국 쪽에 가세하는 바람에 1:2 구도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국은 1:1 대결에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승리를 거둔 적이 없는 셈이다. 축구 공한증보다 더 무서운 전쟁 공한증을 느꼈을 만도 하다.

이 같은 역사적 사례들을 관통하는 이치는 이것이다. 민족 차원이든 국가 차원이든 간에 내부의 분열이 없는 한, 한민족은 그 누구와 싸워도 당당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외세와 손잡고 칼끝을 동족에게 돌리는 세력, 민족 내부의 긴장과 분열을 초래하는 세력. 그런 세력만 없다면, 한민족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이 땅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1976098



잘보고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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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아몬드 16-02-27 02:08
   
사실 중국 한족과 한민족이 전쟁을 거의 안했습니다. 수,당도 5호 16국 시대의 북방민족의 국가인 북제가 기원이니 한족 국가가 아니죠. 한민족은 거의 북방민족과 전쟁을 치뤘고 대부분 이겼습니다 . 한민족이 북방민족과 전쟁을 치를 당시 한족은 북방민족의 피 지배민족이었죠. 따라서 한족은 한민족과 직접 전쟁을 한이 고조선과의 전쟁외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한사군의 위치도 만주로 비정되는 상황이고 한나라 장수들이 가혹한 처벌을 받았으니 진짜 전쟁에서 한나라가 이겼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아마 상처뿐인 승리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동방불패 16-02-27 10:22
   
치우천황이 원조쯤 되겠군요
오자서 16-02-27 13:52
   
동감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무슨 청나라가 중국의 조상이라느니 청나라때처럼 우리가 굴욕을 당한다느니 하는데 완전히 틀린 얘기입니다.

청나라는 지나족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와 같은뿌리였던 만주족이 세운나라죠.
그들은 고조선,고구려,발해의 구성원이며 유민들이고
청이전 금의 시조역시 신라인김함보고 왕들의성은 김씨이고 성산은 백두산이고 청황실에서 쓴 역사책에 만주족의 뿌리를 부여,신라,백제,읍루등등으로 적고있는데다

청나라말기에 자신들을 식민지배한 원수인 만주족을 멸하자는 멸망흥한의 기치를 내걸고 지나족이 만주족을 몰아내고 세운나라가 현재의 중국인게 현실입니다.
물론 현재의 만주족은 중국인의 정체성으로 살고있겠지만 그들이 우리뿌리인것은 변하지않습니다.

우리민족이 약하다고 착각을 하는데 결코아닙니다.
지나를 포함한 중원의 여러민족이 거의 전부 멸망하고 정체성을 잃었지만 세계최강인 몽골,강성한 청과의 전쟁이후에도 나라와 정체성을 유지한 거의 유일한 나라가 다름아닌 우리민족입니다.
xSDcsafaf 16-02-27 15:56
   
이렇게따지면 말과 풍습이 달랐던 고구려-백제랑 신라는 전혀 다른민족이고 다른나라가 되죠. 고구려의 승전또한 통계에서 마땅히 제외해야 맞는거구요 정말 무의미한 정신승리나 다름없는 기사입니다
     
국산아몬드 16-02-27 16:16
   
고구려-백제-신라가 말과 풍습이 달랐다고?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나요?
신라는 고조선의 유민이 세운 나라고 고구려-백제는 선조가 부여인데 서로 말과 풍습이 다를리가 있었겠어요?
설사 서로 다른 민족이라고 해도 전혀 이번 주제에 맞지 않는 주장으로 정신승리라고 오도하다니 조현증이신가?
     
sonicyouth 16-02-27 18:52
   
짱개가 사람말을 다쓰네... 근데 하는짓은 아직도 개.....
     
뚜리뚜바 16-02-28 00:57
   
저녁에 똥을 드셨나 ㅡㅡ
     
캣피 16-02-29 15:22
   
ㅋㅋㅋㅋㅋㅋㅋ 더해라~ 더해라~
꼬꼬동아리 16-02-27 17:20
   
이런 무슨 개같은 소리가..
먼저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 언어가 같았습니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장수왕 편에 보면 고구려의 첩자인 승려 도림이 백제로 잠입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 도림은 죄를 짓고 도망쳐 온 것으로 위장하고 백제로 잠입했다.'

만일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다면 도림이 백제로 잠입하기 전에 백제어를 익혀야 했겠지요?
하지만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이 사용하는 언어가 같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 백제 하층민 언어와 신라 언어 동일

다음으로 백제 하층민의 언어와 신라의 언어가 같았습니다. 이것은 앞의 이야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백제의 가난한 청년 서동은 신라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서 부르게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두나라의 언어가 같았음을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와 백제 사이에 왕래가 활발했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요. 왕래가 없었다 보니 사용하는 단어에도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산'을 말할 때 신라와 백제에서는 '모리'라고 말한 반면, 고구려에서는 '달'이라고 발음했다고 합니다. 또한 '바다'의 경우 신라에서는 '바랄'이 '바다'의 옛말이지만 고구려에서는 전혀 다른 '나미'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지금 우리 나라 안에서 사용되는 사투리나 혹은 남한과 북한에서 쓰고 있는 단어의 차이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일상적인 의사 소통에서는 문제될 바가 없었지요. 그래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언어 때문에 빚는 마찰은 없었던 것입니다.
꼬꼬동아리 16-02-27 17:21
   
내 기가차서 말이 안나오네요
중국의 동북공정이 1차에서 멈출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삼국의 언어가 같았던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시작하였던 중국측의 오류를 수정하고자하는 이유였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꼬꼬동아리 16-02-27 17:37
   
우리말 뿌리 연구에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북한의 대표적 국어학자인 유열씨는 <세나라 시기 리두에 대한 연구>와 <조선말의 역사>로 유명하다. 세나라 시기란 삼국 시대를 말하며, 그는 삼국 시대의 이두(吏讀)를 통해 우리말의 뿌리를 확인했다. 그는 각종 역사서에 남아 있는 삼국 시대 이두 자료, 즉 사람 이름, 땅이름, 벼슬 이름 등 모두 8백여 가지 표기를 하나씩 풀어 비교하는 실증적 방식으로 1500여년 전 우리말의 모습을 찾아냈다.

그의 연구 성과가 남쪽에 알려 지면서 상대적으로 우리말의 뿌리 찾기 연구 성과가 적었던 학계로부터 "거의 완벽한 연구 결과"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 쪽에서 기록한 역사서에도 마한, 진한, 변한의 말에 차이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부여, 고구려, 백제는 부여 계통이란 기록이 있는 점등은 의사 소통이 원활했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 준다.



또한 삼국 시대에는 많은 인구를 서로 확보하기 위해 다투었고 변경의 주민들이 삼국을 서로 가리지 않고 왔다 갔다 했던 점과 수백년 간 전쟁을 통해 영토적으로 서로 겹친 경우가 많았던 점등을 고려해 볼 때 삼국이 서로 상대방의 언어에 대해 의사 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였다고 보기는 어렵고, 일상적인 의사 소통에서는 문제될 바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꼬꼬동아리 16-02-27 17:43
   
정신승리는 당신나라 짜장국 가서 하십시요
역사에 반을 이민족 지배당한 한족은 인정하지않습니다
얼마나 멍청하면 역사에 반을 이민족 지배당했을까요
아주 멍청하다 못해 띨빵한 민족이 한족이라고 밖에는
말하지 않을수가  없네요
돌개바람 16-02-27 20:36
   
몽골항쟁은 정확히 알고 나면 자랑스워 할 일은 아닌데 최우가 지배층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간 뒤에는
항쟁이 아니라 그냥 방치했습니다. 덕분에 힘없는 민초들만 죽어났죠  몽골 정예병도 아닌 북송출신
한족들 위주의 5000명 정도 되는 병력이 왔을때도 전혀 막지 않아서 전 국토를 흽쓸고 다니고 황룡사 9층
목탑이 불탄것도 저때입니다. 강화도로 들어간 인간들은 지들끼리 흥청망청 하느라고 바빳고요
근데 역사교육은 아주 처절히 항쟁한것 처럼 포장하죠 진실을 알고 나면 참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이
저 시절 역사입니다.
     
국산아몬드 16-02-27 22:58
   
고려와 몽고는 강화한 겁니다. 항복을 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몽고와 고려는 국가대 국가의 관계였지 남송처럼 완전히 점령당하거나 멸망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강화 후 고려의 위상은 몽골에서 비교할 수 없이 높아져서 황제의 옹립에 관여할 정도로 권한이 막강해졌고 순수 징기스칸 가문만 참여할 수 있는 황금씨족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2등급 민족인 색목인의 지위와는 비교가 안되는 막강한 지위가 고려국민에게 주어졌던 겁니다
고려여자가 원나라에 끌려가기도 했지만 그 보다 더한 숫자의 몽고여자가 고려로 왔습니다
고려정부가 몽고에 항복했다면 이러한 권리가 주어졌을까요?
이러한 고려의 권리는 국가대 국가로서 강화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비슷한 예로 소위 자치권이 주어진 키에프공국은 키에프군주는 세자때부터 왕이 되기전까지 몽고에 와서 말사육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처녀들의 초야권을 다루가치에게 바쳐야 했고 세금도 몽골인이 직접 징수했습니다
고려는 몽고에 항복한 것이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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