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1-04-26 06:23
짱깨들의 고구려사 관점
 글쓴이 : ㄱㄱ
조회 : 5,846  

張 英(길림성 사회과학원)

중국학자들의 고구려에 대한 연구는 19세기 말로 소급될 수 있는데, 즉 1877년(淸, 光緖3년)에 고구려 제19대왕 광개토경평안호태왕(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묘비 발견부터 비롯되었다. 고구려에 관한 연구 중에서 중국 학자들은 고구려 귀속문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20세기 40년대 초에 저명한 역사학자인 김육불(金毓 )이 고구려 귀속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에 대해 저술한 이래 지속적으로 역사학자들은 그들의 저서에서 고구려의 귀속문제를 언급해 왔다. 20세기 80년대, 고구려의 귀속문제는 중국역사학계의 중대한 이슈 중 하나로 떠오르면서 이 방면에 대한 저술이 세간에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는 고구려에 대한 고고발굴사업과 유관할 수 있고, 또 부단히 출현한 고구려의 유적이 고구려에 대한 연구사업을 촉진할 수 있었다.
본 논문에서는 중국 학자들의 고구려 귀속문제에 관한 몇 가지 주요관점을 간략히 소개하고, 이런 서로 다른 관점이 나타나게 된 원인 등을 분석하고자 한다.


一. 고구려족은 중국 동북지역의 고대민족이며, 고구려는 중국 역사상의 소수민족 정권이다.

이는 당연히 절대다수의 중국학자들이 견지하고 있는 관점이며, 현재 중국 학술계가 고구려 귀속문제에 대해 견지해오고 있는 주류 인식이다. 이 방면의 대표적인 학자 및 그 주요논점은 다음과 같다.


손진기(孫進己, 심양동아연구중심 연구원)는 그의 저서 『東北民族史稿』에서, "예맥족이 건립한 부여국, 고구려국은 줄곧 漢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중국의 일부였다. 고구려는 기원 4세기 낙랑군을 공격하여 빼앗은 후에 한반도상의 한 국가로 건립되면서 오늘날 조ㆍ중 양국의 영토를 가로지르게 되었다. 고구려 멸망 후 중국 경계 내의 유민들은 한족,만주족,몽고족에 유입되어 중화민족의 일부가 되었고, 한반도 영토 내의 유민은 백제와 함께 신라에 의해 통일되면서 조선족에 흡수되었다." , "중국학자들은 고구려는 중국의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 영토경계에 근거한 것 일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고구려는 오랫동안 중국 중앙황조에 예속되었기 때문이며, 고구려인 후예들은 조선족일 뿐만 아니라 거의 대다수는 오늘날 중국의 각 민족 중에 유입되었다."고 지적했다.


양소전(楊昭全,길림성 사회과학원 연구원)은 "기원전 37부터 서기 668년 사이에 존재했던 고구려 정권은 당시 중국 역대 중원(中原)왕조와 예속관계를 유지했으며, 건국 초기에는 한반도의 신라,백제와는 전혀 관계를 갖지 않았다. 그 후에 고구려는 그 영역을 한반도로 확장함에 따라 신라,백제와 삼국정립 구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동북변방지역의 고구려족이 건립한 고구려는 건국에서 멸망에 이르기까지 시종 중국의 고대국가였고, 중국 역대 중원왕조에 종속된 소수민족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했다.


장박천(張博泉,길림대학 교수)는 "고구려가 요동군현(遼東郡縣)지역을 점거하기 이전에는 중국의 한 민족으로 중원에 신속되어 있었다. 군현지역을 점거한 후에도 중국 왕조를 벗어난 독립국가가 아니라, 여전히 중원과 신속관계를 유지하면서 중원왕조의 책봉을 받았다. 고구려 멸망 후에도 고구려가 점거했던 지역은 역대로 모두 중원 관할 하에 속해 있었고, 동시에 중원왕조는 줄곧 요동(遼東)을 군현(郡縣)의 옛터로 간주했다. 요하(遼河) 동쪽의 군현이 고구려에 의해 점거 당한 후에는 요동(遼東) 등 군(郡)의 교민을 요하의 서쪽으로 이주시키는 한편, 고구려왕을 요동군 개국공(開國公),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로 책봉하고 중원의 월력(正朔)을 따르도록 했다. 당 고종은 "고려 백성은 곧 나의 백성"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곧 고구려가 당과 신속관계에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고구려족과 그 정권은 역사 상의 민족과 정권이지만, 결코 하나의 민족으로 후대까지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족 대부분은 한족, 돌궐인, 말갈인 등과 융합하였고, 일부는 신라와 융합하였다. 이런 사실로 (고구려는) 중원의 관할을 벗어난 독립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유자민(劉子敏,연변대학 교수)는 "동북아지역의 역사 지리적 연혁변화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고조선(古朝鮮)과 고구려 영토는 모두 고대 중국에 속해있었다. 그러나 고구려 전기와 고조선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도 없으며, 고구려 건립 무렵에는 고조선은 이미 멸망하여 고조선족 대부분은 한족과 융합하였다." , "고구려는 고대 중국 군현 범위 내에서 발생하여 발전한 고대민족이며 고대국가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또한 고구려는 고대 중화민족이라는 대가족, 혹은 통일영토에서 분열 할거하여 나간 민족 혹은 국가로써 그 모국은 당시의 중국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고구려는) 신라, 백제와는 뚜렷이 구분된다. 고구려 멸망 후에도 대부분의 영토는 오랜 역사 동안 중국의 관할 하에 속해있었으며, 후에 고려와 이조가 점차적으로 잠식해감으로써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원래 고구려 영토를 상실했을 따름이다."고 주장했다.


경철화(耿鐵華, 통화사범학원 교수), 양춘길(楊春吉, 통화사범대학 교수)는 "고구려 건국 이전 동북의 행정관할 범위, 고구려 민족의 근원, 문화 기원 등 이 세 가지 측면에서 고구려 역사는 중국 고대 동북사의 범주에 속함을 논증했다. 솔직히 말해서 고구려 민족은 중국동북의 고대민족이며, 고구려 국가는 고대 동북의 민족 정권이다." 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을 견지하는 중국학자로는 손옥양(孫玉良, 길림성 사회과학원 연구원), 장벽파(張碧波, 흑룡강성 사회과학원 연구원) , 유후생(劉厚生, 동북사범대학 교수), 유영지(劉永智, 길림성 사회과학원 연구원), 서덕원(徐德源, 요녕대학 교수) 등 다수가 있다.
이런 관점을 견지하는 학자들의 주요논거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가 있다:

1. 고구려를 구성하고 있는 주류 민족인 고구려족의 기원은 중국 고대 소수민족이다.

양소전은 "고구려는 고구려족이 주류인 민족이고 부여족(夫余族), 옥저족(沃沮族), 한족 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다. 고구려족, 부여족, 옥저족, 한족은 모두 중국의 고대 민족이다." 일찍이 20세기 40년대 초에 고구려를 중국 고대국가에 귀속할 것을 제의한 유명한 역사학자 김육불(金毓 )은 그의 저서 『동북통사(東北通史)』 권4에서 "여기서 고증하는 고려(高麗)는 곧 전대의 고구려이며, 고구려족은 본래 부여에서 나왔고 우리 중화민족의 일부이다. 고구려는 중국의 동북영토 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건재했던 국가이며, 이후의 왕씨 고려,이씨 조선과는 종족 근원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경철화는 "부여왕은 고리(槁離)에서 나왔고, 고구려왕은 부여에서 나왔다는 전설을 고려한다면, 고구려와 부여는 밀접한 관계였음을 엿볼 수 있다.", "고구려족은 중국 동북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동북의 고대 민족 중 하나이다."고 주장했다.


이덕산(李德山, 동북사범대학 교수)은 고증을 통해서 "고려라는 명칭은 복합된 종족 호칭이며, 고려민족의 주체는 즉, 동일한 성씨 및 동일한 족계(族系)의 개(介), 래(萊) 두 종족으로 구성되었다. 고구려 왕족은 고씨(高氏)이며 개씨(介氏)이기도 하다. 그 종족 계보는 염제(炎帝)계에 속하고 혹은 강염(姜炎)계라고도 불리며, 종족의 발원지는 중국 동부의 산동(山東)지역."이라고 주장했다.
이 방면의 논증은 수없이 많기 때문에 여기서 일일이 인용 증명하지 않겠다.

2. 고구려는 중국 영토에 건립되었다.

양소전은 "고구려는 중국 한(漢) 현도군(玄 郡) 경계 내에 건립되어 현도군 관할에 직접 귀속되었다. 한나라 때에 한의 고구려 현령이 명적(名籍)을 주관했다."고 지적했다.


서덕원은 "고구려는 원래 중국 경내의 소수민족이 건립한 지방정권이며, 장기적으로 중원왕조가 설치한 군(郡)과 현(縣) 관할 하의 지방왕국이다. 고구려의 관할 영역 범위인 현도(玄 ), 요동(遼東), 낙랑(樂浪), 대방(帶方) 등의 군은 한(漢), 진(晉) 중앙정부의 주(州), 군(郡)에서 관할하던 지방이다. 또한 중원 황조로부터 이런 지방을 관할할 행정관직과 관할권을 획득하였다." , "고구려왕국은 의심할 여지없이 오랫동안 고대 중국 역사상에 존재한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며, 고구려의 역사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고, 영토범위는 역사상 모두 중국 영토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유자민은 "고구려는 고대 중국과는 분열과 통합, 통합과 분열을 거듭한 관계였다. 고구려가 한반도까지 세력을 확장하기 이전까지 중국 군현 지역을 제외하고 고구려만큼 분열과 통합관계를 거쳤던 통일국가는 없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손진기는 "예맥족이 세운 부여, 고구려도 줄곳 한의 속국이었다. 이로 인해 일찍부터 중국의 일부분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방면에 대한 논술도 너무 많기 때문에 일일이 열거하지 않겠다.

3. 고구려는 줄곧 중국 중원왕조의 신복으로 책봉을 받았다.

양소전은 "고구려 역대 제왕들은 모두 중국 중원왕조정권의 책봉을 받았으며, 중국 중원왕조정권의 관리의 일원으로 중원왕조정권을 대신해 고구려족을 직접 관리했다.", "고구려 역대 제왕들은 모두 대대로 중원왕조정권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받치고 신하로서의 예절을 다했으며, 중원왕조의 하사와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왕이군(王利群,통화사범대학 교수)은 "고구려의 705년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줄곳 중원왕조에 봉호(작위와 호칭)를 요청하여 중앙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아 중앙왕조의 지방관리로서 충당됐다. 또한 오랫동안 중앙왕조에 조공을 받쳐온 전형적인 예속관계를 유지했었고, 그 영토 역시 자연히 중앙왕조의 판도(관할 영역) 내에 속해 있었다."고 주장했다.


손진기는 "고구려가 존재했던 전체 역사를 보면, 고구려는 주로 중국 역대 중앙정권의 지방정권에 귀속되었고, 고구려의 할거(독립) 기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고구려가 정권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서한(西漢) 때이며, 주몽(朱蒙)이 기원전 1세기에 고구려국가를 건립한 것보다 앞선 시기인, 기원전 2세기에 고구려는 이미 당시의 중국 한나라 현도군 고구려현의 관할 범위 내에 속해 있었다." 고 주장했다.


경철화는 "고구려는 漢 元帝 建昭 2년(기원전 37년)에 졸본(卒本) 흘승골(紇升骨)에 도읍을 건립하여, 唐 總章 元年(서기 668년)에 멸망까지 705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고구려는 동북 소수민족이 건립한 국가로서, 중원정권에 있어서는 줄곧 지방정권의 성질을 띄고 있었다. 고구려는 건국 전후로 한의 현도군 경내에 자리했으며, 漢 정권이 줄곧 이 지역에 대해서 주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고구려를 통치했었다는 주장은 이치에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술은 아주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지 않겠다.

4. 고구려족 후예의 대부분은 중화민족에 융화되었다.

손진기는 "고구려족 후예는 고구려가 패망한 후에 일부분은 중원으로 유입되었고, 일부분은 돌궐에 투항했으며, 일부분은 발해에 의탁하여 최후에는 이들 모두가 중국의 각 민족에 융합, 흡수되었다. 단지 대동강 이남의 일부분 고구려인들은 당시 신라에 유입되었고, 그 이후에 소수의 고구려인이 당과 발해로부터 신라로 옮겨왔으며, 이런 고구려인들은 이후에 오늘날의 조선족으로 융화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덕산은 "고대 고구려족의 호칭은 介, 萊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고, 그 족속은 염제족계(炎帝族系)에 속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고구려민족은 동북지역의 다른 고민족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동북변방지역의 개발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고구려가 패망한 이후에 고구려인의 일부분은 돌궐, 말갈 등에 융화되었지만 대다수는 또다시 한족에 유입되었다. 물론 돌궐, 말갈에 의탁한 유민들도 최후에는 한족에 융합되어 중화민족의 발전에 큰 공헌을 세웠다. 소수의 신라로 유입한 유민들은 한반도의 다른 고대민족과 융합하여 최후에는 오늘날의 조선민족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왕이군은 "정치, 경제, 문화 방면에서 볼 때, 고구려족은 그 자신 뿐 만이 아니라 동북지역을 신속히 중화민족과 일체를 이루도록 선도하여 중화민족의 일부분이 되게했다. 또한 고구려의 영토확장은 중원과의 각 방면의 교류를 확대하여, 민족간의 교류와 융합을 촉진함으로써 고구려족의 중화민족에 대한 내속성(內屬性)을 강화했다."고 주장했다.


이외에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고구려 문화 특성, 문화 연원 및 형성의 특징, 누적된 문화전통 등 방면에서 상술한 논점에 대해 논증을 덧붙여서, "고구려족 문화는 중화문화에 그 기원을 두고있으며, 중화의 다원화문화 구성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삼한-신라, 백제 문화와는 서로 전혀 관계가 없으며, 소위 삼국사(三國史)에 속하지 않고, 한국사 혹은 조선사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등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二. 고구려사는 중국역사에 속하며 또한 조선(한국)역사에 속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을 지닌 중국학자들은 서기 427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평양 천도 이전의 고구려는 중국 동북의 지방 소수민족 정권이었고, 평양 천도 이후에는 곧 조선(한국)의 국가로 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강맹산(姜孟山,연변대학 교수)은 "고구려사는 우선적으로 중국 역사에 속하지만 또한 조선 역사에 속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한반도의 북부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으며, 4세기에 이르러 남진(南進)정책을 실시했고 5세기초에 이미 한반도의 중북부지역을 점령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수 백년 동안 중국 동북지역에서 활동했을 뿐 아니라 한반도의 중북부지역까지도 활동했다. 오늘날의 국가 경계를 기준으로 볼 때 고구려사는 양국 판도(관할 영역)에 모두 속하는 역사이다. 둘째, 고구려는 서기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고구려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 한반도로 옮겨 갔다. 서기 427년 평양 천도에서부터 668년 고구려 멸망까지 240여 년 동안, 즉 고구려 역사의 1/3의 기간 동안에 고구려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발전한 국가가 되었다. 셋째, 민족의 혈연관계와 문화 계승성을 기준으로 본다면, 많은 고구려족이 신라족과 융합됨에 따라 오늘날의 조선족과 혈연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일정 정도의 문화 계승성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담기양(譚其 ,복단대학 교수): "역사상에서 압록강 이북에 있던 시기의 고려(고구려)를, 우리는 중국 경내의 일개 소수민족이 건립한 국가로 간주한다. 그러나 5세기에 이르러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부터의 고구려는 더 이상 중국 경내의 소수민족정권이 아닌 주변국가로 처리해야 한다. 또한 고구려의 압록강 이남의 영토 뿐만이 아니라 압록강 이북의 요수(遼水) 동쪽의 영토 역시 주변국가의 영토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담기양 선생의 1981년 중국 민족관계사 세미나 중에서 강연한 일부분으로, 당시 담기양 선생은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의 주편이었고, 이런 발언은 그가 『중국역사지도집』 편집을 책임지면서 중국 역사에서 동시기에 존재한 수많은 국가의 지역과 민족을 어떻게 중국과 외지(다른 나라)로 구별할 것인가에 대해 소개한 것이다.


고구려가 중국사에 속하며 또한 조선(한국)사에도 속한다는 관점에서 유자민은 "비록 고조선과 고구려 영토는 모두 고대 중국에 속한다 해도 각각의 역사를 소개할 때는 韓(朝)中은 고구려 역사를 朝中 양국의 공동역사로 인정할 수 있다. 이 같은 문제를 토론할 때는 응당 현재에 근거하여 과거를 정확히 인식해야 하는 기본원칙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중국 판도 내에 있는 고대 민족 혹은 국가는 모두 중국 고대의 민족 혹은 국가로 간주되어야 하며, 오늘날 한반도 판도 내의 고대민족 혹은 국가는 모두 조선 고대의 민족 혹은 국가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 양국의 경계에 걸쳐져 있는 고대민족 혹은 국가는 양국의 공동역사로 인정해야 할 것이며, 다만 양국의 공동역사를 서술할 때에는 역사의 진실에 근거하여 전후관계와 인과관계를 분명히 다루어야 할 것이다."고 언급했다.


유자민 선생은 여기에서 역사상의 민족 혹은 국가의 표준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제의했다.
고대민족사와 고대국가사의 귀속에 관한 문제에서 강맹산(姜孟山) 선생은 다음과 같은 4가지 표준을 제시했다. 즉, "첫째, 양국은 평등호혜의 원칙에 입각하여 국제법이 확정한 현재의 국가 경계를 기준으로 하며, 즉 오늘날 국가 경계선을 기준으로 그 경계 내의 고금(古今) 역사는 곧 해당 국가의 역사에 속한다. 둘째, 고대국가의 정치,경제,문화 중심의 소재는 곧 오늘날 국가 경계를 기준으로 그 귀속을 결정한다. 셋째, 민족의 혈연관계와 문화의 계승성, 즉 고대민족과 오늘날 민족 간의 혈연관계와 문화의 승계성 유무. 넷째, 역대 중앙왕조와 변방 혹은 지방왕조의 관계, 즉 중앙왕조와 지방왕조의 종속관계 존재 여부이다."


상술한 4가지 기준에 의거하여 강맹산 선생은 고구려사는 중국 역사이며 또한 조선(한국) 역사에 속한다는 결론을 도출해내는 한편, 一史兩用의 관점을 제시했다. 물론 이런 一史兩用은 강맹산 선생만의 독창적인 견해가 아니라, 중국 사학계의 일부 학자들도 이런 관점에 찬성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 역사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일부 학자들은 一史兩用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은 一史兩用에 대해, 특히 고구려 역사의 一史兩用에 대해서 중국의 일부 학자는 반대입장을 지니고 있으며, 심지어 어떤 학자는 저서에서 공개적으로 반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벽파는 그의 저서에서 一史兩用사관(史觀) 혹은 사학(史學) 원칙론은 사실은 사학영역의 절충주의일 뿐이다. 고구려는 우선은 중국사이다. 즉, 고구려는 서기 427년 평양 천도(평양은 한의 낙랑군 영역 내에 위치하며 한조의 외신(外臣)으로 간주됨) 위씨조선(衛氏朝鮮) 영역 내의 종속국이었으며, 주(周),진(秦) 시대 지방 제후였던 기자조선(箕子朝鮮) 영토 내에 속해 있었다. 말하자면, 중화 역사 범주 내에서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중화 역사 영역 내에서의 고구려 정치,문화의 중심이 동쪽으로 이전되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민족속성, 정치성격에는 변함이 없었고 최후에는 그대로 중화민족의 지방지역정권에 귀속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一史兩用 사관은 역사 사실에 결코 부합되지 않거나 혹은 완전히 부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손진기는 "서기5세기 전후의 고구려를 양국으로 분류 귀속시킴으로써 서기 5세기 이전의 고구려는 중국의 것이고, 서기 5세기 이후의 고구려는 조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는 오늘날 영토 경계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인데, 당시의 경계를 근거로 볼 때 서기 5세기 전후의 고구려는 모두 중국 영토 내의 중국 지방정권이다." 고 주장했다.


지금까지도 논쟁이 이어져오고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고구려사는 중국사임과 동시에 또한 조선(한국)사이다는 관점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으며, 一史兩用 역시 일부 중국 학자들이 인정하는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三. 고구려는 고대 조선(한국)의 국가이다.

일부 중국학자들은 고구려는 고대 조선(한국)국가이며, 고구려사는 응당 조선(한국)의 역사 범주에 편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연변대학의 박진필(朴眞奭), 강맹산(姜孟山), 박문일(朴文一), 김광수(金光洙) 등 4명의 교수는 "조선노예제 국가인 고조선과 진국(辰國) 멸망 이후에 차례로 출현한 고구려, 백제, 신라 3개국을 역사에서는 三國이라고 일컫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이런 관점은 한 시기에 , 즉 20세기 50년대에서 6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중국학자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했었다. 마대정(馬大正,中國社會科學院 邊疆史地中心 교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20세기 50년 대 (중국) 중학생 세계사 교과서 내의 조선에 대해 언급한 부분에서는 예외없이 고구려는 조선의 고대 왕국 중의 하나이며, 한반도 조선 고대사 내의 三國은 바로 三國時期를 말하는 것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고구려가 고대 한국의 국가라는 관점은 이때부터 중국에서 발원했다. 1956년, 서덕원(徐德源)이 편집하고 요녕대학 교재과에서 발행한 『世界中世史』(1956년)는 대학의 역사과 교재로써 만들어졌는데, 여기에서 기씨조선, 위씨조선, 한사군, 삼국시기의 신라, 고구려, 백제의 기본구도를 채택하고 있다. 이것은 기자조선, 위씨조선, 고구려시기의 삼국 정권을 모두 조선 역사상의 왕조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제사화(齊思和)의 『世界中世史 講義』(1956년), 손병영(孫秉瑩)『世界中世史 講義』(1956년), 동북사범대학 역사과 세계 고대 중세기 교과서 연구실의 『世界中世紀史』등에서도 모두 위의 관점과 동일하게 고조선과 고구려 제문제를 처리하고 있다. 그리고 착안점을 모두 사회발전 정도에 두고 있으며, 그 외 종족 호칭, 풍습, 습관, 고고학문화, 이동경로 등 문제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1962년에서 1963년에 걸쳐 고등교육부는 국가 조직 주관으로 편집한 고등교육기관 세계사 교과서를 선보였는데 바로 주일양(周一良),오우근(吳于 )의 4권으로 구성된 『世界通史』이며, 여기에서도 고조선과 고구려의 문제 처리에 있어서는 별 달라진 내용이 없었다.


고구려를 고대조선(한국) 국가로 간주하는 관점은 일부 중국학자들이 저술한 저작에서도 엿보이는데, 범문란(范文瀾)의 『中國通史』, 전백찬( 伯贊)의 『中國史綱要』, 여진우(呂振羽)의 『簡明中國通史』, 상월(尙鉞)의 『中國歷史綱要』 등이 있다.


이런 저서 및 저자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첫째, 이런 저서는 출판 시기가 비교적 이른 편으로 모두 20세기 50년대에서 60년대이다. 둘째, 저서의 저자는 대부분이 유명한 역사학자이지만 한국(조선)의 역사 문제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한명도 없다. 셋째, 저자들은 모두 현재 중국의 판도를 근거로 역사상의 강역을 획정하고, 역사상의 정권 및 민족의 귀속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마대정은 "20세기 70년대 이후에 중국에서 출판된 일부 역사 서적들, 예를 들면 1978년 교육부의 주관으로 14개 단과대학과 대학교가 공동 편찬한 『世界古代中世紀史』, 1985년 손의학(孫義學)이 편집 주관한 『世界中世紀史』등에서는 고구려에 대한 언급에 변화가 있었다. 즉, 고구려는 중국에서 흥기했고, 두 국가의 영토경계에 걸쳐 있는 고대민족이며, 길림 집안(集安)을 중심으로 요동과 압록강 유역에 건립된 고대정권이라고 서술했다. 1997년에 이르러 인민출판사가 각 단과 대학과 대학교의 교재를 종합 편찬하여 6권본의 『世界通史』교과서로 출판했는데, 그 안에서 기자조선,위씨조선,고구려를 중국 동북지역의 제후국으로 간주하고, 수(隋) ,당(唐) 두 왕조의 고구려 정벌을 통일 유지를 위한 전쟁으로 여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가 심화됨에 따라 중국학자들의 고구려 귀속 문제에 대한 관점에도 역시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원래 고구려는 응당 조선(한국)의 역사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학자들의 관점도 변했다.


앞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고구려를 응당 한국(조선)의 역사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강맹산은 저서에서 공개적으로 "고구려사는 우선적으로 중국 역사에 편입시켜야 하며, 또한 고구려 역사는 조선의 역사에 속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일찍이 고구려는 조선(한국)의 三國중의 하나라고 주장하던 서덕원 역시 그의 저서에서 "한반도 고대 역사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해 나는 이미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본 입장을 명확히 취하는 바이다. (1) 기자조선은 선진시기 분봉제(分封制) 지방행정관리체제 하의 지방 제후국이고, 위씨조선은 서한 초기의 지방왕국이며, 고구려는 서한에서 당조시기까지의 소수민족 지방왕국으로 그들의 당시 영역은 모두 고대 중국의 영토이며, 이것이 역사 본연의 모습이다. (2) 기자조선, 위씨조선의 기본 영토와 고구려의 일부 구거주지는 신라, 고려 및 이씨조선의 발전으로 인해 점차적으로 한반도 국가 관할 영역에 합병되었으며 이는 역사의 계승이다."라고 언급했다.


四. 에필로그

상술한 내용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요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고구려 귀속문제에 있어서 중국학자들의 관점은 일치할 뿐 아니라 연구과정의 심화에 따라 점차적으로 학술 공인을 이루는 한편 중국학자의 주류인식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귀속문제 연구가 심화되는 과정 중에서 중국학자들 간에는 여전히 의견 차이와 다양성이 존재하고 있다.


둘째, 고구려 귀속문제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서로 다른 관점의 형성 원인은 다양하지만, 가장 주된 원인은 귀속을 확정할 수 있는 통일된 기준이 없다는데 있다. 물론 서로 다른 시기의 정치요인에 따른 제약 및 국제 사학계의 영향 등에도 그 원인이 있다.


셋째, 중국학자들은 고구려 문제의 연구에 있어 줄곧 분산적이고 개별적인 논쟁을 벌이는 상황이며, 통일되고 조직적인 계통적 연구가 결핍되었다.


넷째, 고구려 문제 연구를 지속적으로 심화해야 하며, 어떤 문제는 분석과 정리가 한층 더 필요하다. 고구려 문제의 연구 심화에 있어 주의해야 할 문제는 역사와 현실 관계,정치와 학술의 관계를 정확히 구분하여 취급해야 하며, 특히 학술문제의 정치화는 막아야 한다.


다섯째, 고구려 귀속에 관한 문제에서 一史兩用의 관점은 여전히 논쟁 중에 있으며 통일된 인식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계속적으로 깊이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이며, 간단하게 긍정 혹은 부정을 부여하기보다는 논쟁 중에 합리적이고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해내야 한다.

1. 마대정·이대용·경철화·권혁수, 『고대 중국 고구려역사 속론(續論)』, 중국사회과학출판사, 2003년 10월.
2. 양춘길·경철화 주편, 『고구려 귀속문제연구』, 길림문사(吉林文史)출판사, 2000년 12월.
3. 양소전 주편, 『중조변계연구문집(中朝邊界硏究文集)』,길림성 사회과학원, 1998년.
4. 박진석·강맹산·박문일·김광수 편집, 『조선간사(朝鮮簡史)』(대학 교재), 연변교육출판사, 1986년.
5. 마대정,「중국학자적고구려귀속연구평석(中國學者的高句麗歸屬硏究評析)」,길림성 사회과학원주관,『東北史地』,2004년 1월.
6. 손진기,「高句麗歷史硏究綜述」, 길림성 사회과학원 주관 『社會科學戰線』, 2001년 제2기.
7. 한충부(韓忠富),「국내 고구려 귀속문제 연구종술(綜述)」, 길림성 사회과학원 주관 『社會科學戰線』, 2001년 제5기.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쁘늉 11-04-26 06:46
   
중국이 주장하는 것은 다 엉터리
한시우 11-04-26 07:01
   
세계도 지들이 만들엇다고 주장하지 그러냐?

후고구려가 어째서 일어났을까? 왜 후 삼국시대가 다시 전개되었을가?

고려는 뭘 계승한 국가인지 벌써 까먹었냐?

한심한새키들..
je 11-04-26 08:06
   
중국인들은 역사와 영토를 [현대 중국]에 맞춰놓고 소급시켜 적용한다는 것이 가장 큰 잘못-.-;;
미친도끼 11-04-26 08:15
   
..결국 순리대로 흘러가게 되겠지요..

..조선족..몰아내자는 분들 많은데..그렇게 되면 글쎄요..
  고구려 역사의 정통성(?)을 중국이 주장할 수 있는 근거에 한 수저 얹어주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조금씩..한걸음씩..풀어갔으면 합니다..
응? 11-04-26 08:23
   
웃긴거죠...고구려경우가 대대로 한의 예속되어서 중국역사라면 신라,백제,조선또한 마찬가지인데 그건 아니라고하죠...
     
je 11-04-26 10:08
   
웃긴건 예속되었다는 고구려가 700년 갈동안, 중원엔 한뿐만 아니라 떨거지들 천하임
ㅋㅋ 대체 고구려가 어느 나라에 예속되어 있었단 말임??-.-;;
한은 흉노에 예속되어 있지 않았음? ㅋㅋ 한도, 중간에 망했다가 다시 후한생김..;;
dfdf 11-04-27 08:51
   
http://www.youtube.com/user/xinyiquan666

고구려가 중국인거라고 하는 중국인 유투브 주소
 
 
Total 19,94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3856
2723 [기타] 당태종과 연개소문 (4) 붉은kkk 04-22 4623
2722 [일본] 일본 대학교수와 이야기하다 맨탈 붕괴... 7 (15) 바람꽃 04-22 3928
2721 [일본] 독도, 일본 지도에는 없다!! (한국인 교양 필수!!) (5) 어리별이 04-22 3212
2720 [기타] 슈퍼파리약님 (2) 大민족주의 04-21 2553
2719 [중국] 이어도 짱개 땅? 산동반도 전횡도가 조선땅이었다니. (15) 슈퍼파리약 04-21 7564
2718 [기타] 다무놔 가정 지원 사업들 검증 작업-80%완료 (2) 슈퍼파리약 04-21 3871
2717 [일본] [독도문제] 독도 논쟁 종결자 : 독도영유권 문답 - 프… (5) 아저씨아님 04-21 3589
2716 [필리핀] 인종에 따라 사회적 계급이 형성되는 필리핀 (6) dexters 04-21 9120
2715 [기타] 전세계에 방영된 ‘베트남 매매 결혼’ (6) 슈퍼파리약 04-20 4764
2714 [기타] 동남아인들끼리의 인종차별. 끝장입니다. (8) 컬러머니 04-20 4623
2713 [기타] 푸틴딸이 한국 들어와서 살면... (13) 블루이글스 04-20 4382
2712 [기타] 네이버의최악의친일파블로그 (10) 자기자신 04-20 5912
2711 [기타] 태국의 식인풍속 (29) 슈퍼파리약 04-19 9607
2710 [필리핀] 필리핀의 여성들 그리고 네그리또 축제 (6) 슈퍼파리약 04-18 4879
2709 [필리핀] 흔한 다문화가정 국회의원의 거짓말 (12) 부왁 04-18 3543
2708 [일본] 이게 실제 있엇던 cf 였군요. 일본원숭이 소니 cf, (15) 마다가스카 04-18 7393
2707 [중국] 이어도 관련 좋은 소식 (19) hanen 04-17 4335
2706 [기타] 용기 있는 방송사의 외국인 범죄 보도 (9) 슈퍼파리약 04-17 4186
2705 [중국] 중국출장 중 조선족 직원들과의 일화 (17) 적색츄리닝 04-17 7649
2704 [기타] 중국 고고학계 연구결과, 형질유전학적으로 부여, 고… (3) 숭구리당당 04-17 3972
2703 [기타] 개인적으로 다문화 반대이지만 (3) 무명씨9 04-17 2476
2702 [기타] 이자스민과 김용과의 비교 기사를 보고 (6) 무명씨9 04-17 3012
2701 [기타] 다문화사회에서 '극우'의 탄생은 필연이다. 사노라면 04-17 2483
2700 [일본] 호구 다무놔 안해도 칭송받는 니뽕 (13) 슈퍼파리약 04-16 3238
2699 [일본] 일본 대학교수와 이야기하다 맨탈 붕괴... 6 (26) 바람꽃 04-16 4401
2698 [필리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필리핀만큼만 합시다. (4) 슈퍼파리약 04-16 3233
2697 [필리핀] 필리핀인들 - "우리는 왜 아이큐가 이리 낮은가?" (12) 슈퍼파리약 04-16 7105
 <  631  632  633  634  635  636  637  638  639  6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