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三國志하면 모두 소설을 생각하거나 누구처럼 일본 모게임회사의 전략게임시리즈 연속물이 가장 먼저 머리 속에 떠오를 것이다. 물론 다 해본 사람들의 외침은 한결같이 재밌다였지만...
그러나 원래 三國志란 연의(演義)가 아니고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 중 하나이며 이 책의 작가는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이 아닌 진수(陳壽:233∼297)라는 사마씨의 진(晋, 정확히 西晋)나라 관리였던 자가 주관이 되어 이 세상에 나왔다.
우리가 흔히 보는 삼국지는 후대에 나관중이 자신의 의도적 목적을 담은 소설책이다. 물론 진수가 처음 쓴 정사인 삼국지 또한 진나라와 진수의 성향이 물씬 담긴 책이지만 둘 다 공통점이라면 삼국시대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가치관에 맞게 적어놓아서 우리가 원하는 게임 속에서의 시나리오대로는 역사가들이 안 움직여준다는 점이다.
진수가 쓴 삼국시대의 이야기들은 대체로 책 속에서 물씬 풍기는 주된 냄새가 바로 위나라의 찬양이다. 조씨(曹氏)가 잘나서 한나라가 망해 나갔고 그 조씨를 사마씨가 멋지게 천하를 위해 천명을 이어받았다는 찬란하고도 화려한 스토리를 적고 있다고 생각하면 무난할 것이다. 이 진수의 삼국지 본 사람들이라면 아마 타칭 우리의 영웅 劉,關,張과 子龍, 公明은 대체 어디에 끼어 있나 책을 털고 찾을 것이다. 정사의 순서는 위서, 촉서, 오서로 되어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진수가 유비와 유선의 치하에서 태어나고 자란 蜀나라 출신이라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진수의 부친은 유씨 밑에서 벼슬까지 했지만 공명의 엄격한 규율 앞에서 목이 달아났다고 하는데 그래서 진수가 쓴 삼국지 속의 제갈공명은 별 능력없는 인물로 취급받고 있다고도 한다.
우리가 잘 아는 그런 공명이 아닌 재주도 없으면서 지잘났다고 잘난 채 한 그런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연의 속에선 촉나라의 위대한 승상이며 제후였던 그가 정사에서는 열전(列傳)의 한 구석을 겨우 차지하면서 여하간 정사에는 공명에 대한 평은 썩 훌륭하지 않다.
진수의 삼국지에서 본기(本紀)는 오로지 조조의 후손들 차지이다. 유비와 유선은 단지 세가(世家)의 구석 자리에 그나마 진수의 양심인지 뭔지 몰르겠으나 과거의 주인이었던 유씨를 선주(先主)와 후주(後主)라는 너무나도 애매하고도 모호한 명칭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론 오나라의 손권은 스스로 황제로 참칭한 역적 놈에 가까운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무난할 것이다.
모두 승자(勝者)가 역사를 쓰기 때문에 생긴 일종의 폐단이다. 우리의 게임 속 영웅들은 대부분 A4 용지 한 장 정도 아님 두 장 정도의 기록만이 남겨져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정사에서의 영웅은 단연 조조이다. 조조에 대해서는 수명의 마누라에 수없이 많은 첩에다 그 어린 자식들까지 상세히 기록되고 있다.
진수가 쓴 정사 속의 삼국지는 자신의 군주인 사마씨가 유씨의 한나라 대통을 이어받은 위나라로부터 정통성이 온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런 식의 글이 쓰여진 것이다. 그래서 삼국지연의부터 본 사람들은 같은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정사를 정사 같이 보고 있지 않은것 같다. 모두 나관중이가 세뇌시킨(?) 삼국지연의란 소설로서 정사를 덮어버린 너무나도 놀라운 역사적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옷에다 몸을 맞추는 격이라고 할까?
나관중이 살았던 시대는 원나라 말에서 명나라 건국시기의 너무나도 혼란한 사회상을 가지던 때였다. 쿠빌라이칸이 중국을 재통일하는 형식으로 점령한 후 몽골족은 최상류의 계층으로 해서 남송의 구성원이었던 남인(南人)들을 거의 개돼지에 가까운 노예 취급하였다. 그 이유는 마지막까지 그 위대한 대몽골제국에 마지막까지 저항한 이른바 꼴통세력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무자비한 보복의 100여년간 한족(漢族)들은 그들 고통 속에서 분노의 칼을 갈아야했다.
몽골족(여기서부터는 元朝 1271∼1368)이 중국을 통치한 기술은 바로 너무나도 뚜렷한 계급제였다. 계급을 네 단계로 나누어서 최상층에 국인(國人)이라 불리는 몽골인, 그 다음에 색목인(色目人:西域人) 그리고 한인(漢人:女眞人, 契丹人, 渤海人, 華北의 中國人, 高麗人)과 마지막을 남인(南人)으로 구성시키는데 이 남인이 남송의 지배를 받았던 중국인 즉 漢族을 말한다.
몽골인들은 그들이 가장 먼저 접했던 중국인 즉 금나라 치하의 중국인들은 한인(漢人)이라 부르면서도 유독 강남의 한족들은 남인이라 불렀는데, 우리의 시각으로는 약간 의아하겠지만 당시의 몽골인들은 중국인이라고 하면 화북사람들만을 생각했다. 강남의 한인은 중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민족 지배자들로부터 그런 취급을 받던 남인들은 마르코폴로가 남긴 기록에서도 나타나듯이 그들은 인간이 아닌 세금이나 바치는 개돼지 짐승 같은 노예일 뿐이었다.
칭기즈칸이 대륙을 정복할 때 정복지의 원칙은 항복한 도시나 마을 전체의 주민을 한줄로 눕혀놓고 말 달리면서 목을 잘라 그 목의 개수로서 공을 표시했다고 한다. 사마르칸트 같은 도시는 전 도시민 수십만이 몰살되었는데 남녀와 노소를 구분해서 줄지어 놓고 목을 잘라 가지고 갔다고 한다.
한마디로 몽골족이 지나간 자리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것을 한자어로 도성(屠城)이라고 하는데 屠란 짐승을 찢어 죽이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글자이다.
그나마 그 아들 오고타이칸이나 손자 쿠빌라이칸은 중국에 와서도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는데 먼저 몽골족에 항복했던 사람들(이들이 이른바 色目人과 漢人)이 고관이 되어서 이 도성 행위를 말리는 통에 간신히 漢族들의 참화를 막았다고 한다. 즉 중국문명에 먼저 동화된 이민족들이 또 다른 이민족인 몽골족의 이런 관습을 조금이나마 변경시켜 준 셈이었다.
남인은 이러한 무지막지한 관습을 지닌 몽골족에게 엄청 당할 수밖에 없었고 뿌리 깊은 중화민족(中華民族)이라는 자부심만으로 몇 천년을 버틴 한족의 체면은 이미 땅에 떨어지고도 지하 속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이 고색 찬란한 한족의 자존심으로 주희(朱喜, 朱子)는 화북의 고토를 금나라 이민족(女眞族)에게 빼앗겨서 억울한 심정으로 성리학(性理學)이라는 정통성에 목을 맨 희안한 사상을 만들어 냈고, 나관중은 이런 미개하다 못해 짐승만도 못한 몽골족에게 당하는 同族 한족들의 억울한 처지를 비통해하며 분노의 심정으로 삼국지연의라는 잼나는 걸작을 완성시킨 것이 아닐까?
원래 역사에서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고 역경 속에서 걸작이 탄생한다는 진리 아닌 진리가 여기서도 통하는 순간인 것 같다. 나관중이 살았던 시기는 중국의 정통성은 누구의 것인가에 대해 의문에 엄청 목말랐을 것이다.
중국의 땅은 원래 한족의 땅이며 이 땅의 주인은 오로지 한족이 아닌가?
왜 우리 한족은 저 미개한 북방의 이민족에게 정통성은커녕 뿌리박을 땅조차 잃어버렸는가?
한족의 역사적 문화적 정통성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런 등등의 의문점이 나관중의 내면 깊이 자리잡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원래 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를 남에게 빼았겼을 때의 심정을 어디다 표출할 것인가를 지식인으로 고민했을 것이다. 분명...
결국 나관중은 자신의 재능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신나게 역적 놈을 깨부수는 삼국지의 일반적 영웅들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마치 글 속에서의 대리만족을 글 읽는 사람들에게 느끼게 해주는...(이걸 아마 학문적 차원에서 뭐라고 할 터인데... 잘 모르겠네요)
원래 중국의 역사서에서 원나라 때까지 역사의 정통은 조조의 위나라였다.
남송 말기 원나라 초기에 저 멀고 먼 하나라부터 송나라까지 기술된 십팔사략(十八史略)을 지은 증선지(曾先之) 조차도 삼국시대의 정통성은 위나라에 있다고 기술하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이런 분위기는 180도 변해 조조의 위나라는 그 정통성은 커녕 역적의 대명사로 낙인 찍히게 된다. 바로 원나라 치하 속에서 발현한 이른바 한족의 정통성 찾기에 불이 붙은 것이다. 정통성은 빼앗은 자가 차지하는 것이 아닌 유구한 혈통을 가지는 자야말로 진짜 정통성을 가지는 사람이라는 그런 인식이다.
생각해보자. 원나라 몽골인들은 무력을 이용하여 중국의 전 영역을 지배했고 그 덕에 한족들은 노예보다도 못한 시대를 살아야했다. 너무나도 가혹한 시대에 살았던 한족들은 아마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다른 어떤 이민족들이 중국에 왔어도 이리 가혹하지 않았고 도리어 자신들의 문화에 동화되어 사라지곤 했는데 몽골족은 앞선 역사 속에서 나타난 이민족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결국 漢族이라는 핏줄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힘의 논리 앞에서 뭉개지는 것에 대한 회의를 느끼지 않았을까?
힘만으로 정통성을 유지한다는 것에 대한 모순을 몽골인들의 무력 앞에서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아무리 승자가 역사를 차지한다고 하지만 이건 뭔가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강남지방의 한족들이 최초로 중국을 재통일하는 역사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明나라가 건국되면서 이제 다시 중국 땅의 주체가 된 한족들은 자기네 역사책을 몽땅 바꾸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즉 힘의 논리보다도 혈통적 우위야말로 漢族의 논리 정연한 정통성으로 인식시켜야한다는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고를 나관중의 작품에서도 내면 깊숙히 깔려있지 않았을까? 나관중이 자신의 소설 속에서 바라는 바는 바로 한나라의 劉氏 혈통을 자랑하던 유비가 천하를 다시 얻었으면 하는 바램이었고 그 간절함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劉關張에다 子龍에다 公明이 합쳐진 그야말로 게임 속의 무적들로 탄생하였다.
삼국지연의 속에 등장하는 유비는 문제 많은 등장인물이다. 그의 혈통계보 조차도 후일 사람들이 의문을 표시하고 있고 더구나 관우나 장비 조운 등은 이른바 당시엔 별볼일 없는 가문으로 태어나 武力 하나로 제후가 된 우리 역사사극 "武人時代"에 나오는 이른바 벼락 출세한 무부(武夫)에 불과한 사람들이다.
아마 진수가 쓸 당시 만해도 이들을 별볼일 없는 무장들로 밖에 대접받지 못했다. 그런 푸대접을 천년 이상이나 받았던 그들이 나관중의 소설 속에서 화려하게 부활하여 종국엔 관우는 민간신앙 속에서 神이 되었고 공명은 신출귀몰한 위대한 능력자가 되었으며 유비는 의리있고 온화하고 부드러웠던 명군주로서 남게 되었다.
나관중의 소설은 중국의 명나라 뿐만 아니라 현대의 우리나라까지 그 영향력을 파급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