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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2-04 18:06
[한국사] 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 - 고대사 왜곡에 미쳤다
 글쓴이 : 스리랑
조회 : 3,219  

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 - 고대사 왜곡에 미쳤다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일본은 역사를 조작하기 위해 모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나라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의 조작이 대표적인 사례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대륙 진출을 위해 일본육군 참모본부가 파견한 사코이 가게아키(酒勾景信) 중위로부터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을 받아들었다. 일본은 이 비문을 변조해 마치 일본이 우리나라를 고대부터 지배한 것 같이 변조해서 한·일 역사를 왜곡시켰다.
 
오늘은 이와 관련한 사실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사실 일본은 33대 천황 ‘스이코(推古) 이전은 역사학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의 고대사가(古代史家)와 고고학자(考古學者) 간에 잘 언급되는 말이다. 그것은 고사기(古事記)나 일본서기(日本書紀) 등 고 문헌에서는 7세기 이전의 일본에 관해서 확실한 것이 없어, 4~5세기로 올라가면 천황의 즉위나 죽은 연도도 분명치 않은 이유에서다. 이런 탓에 일본은 조작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왜곡한다. 우리같이 역사기록이 있거나 기록이 없으면 세년가(歲年歌)로 전해오는 것 같은 것이 없어서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든 유물이 발견 되면 일본의 관심은 우리보다 몇 배 더 촉각을 곤두세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가 일본에 유학 중일 때 70년대 일본에서는 일본의 고대사와 고대 한·일관계사에 관한 국민의 관심이 대단히 높은 것을 봤다. 이유는 고대 일본에 건너간 유력한 우리 유민의 무덤인 다카마스 쓰가(高松塚)가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다카마스 쓰가는 일본 고대문화가 어떻게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는가의 단서를 결정적으로 제공했다. 아름다운 벽화와 출토된 유물에 일본은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다카마스 쓰가의 벽화는 필자가 봐도 고구려의 의상으로 우리나라 사람인 것을 직감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는 중국의 의상이라고 하는 등 진실을 왜곡하려는 것을 보며 냉소한 적이 있다. 일본은 ‘고대에 있어서 조선출병과 조선남부의 경영’이라는 당치도 않은 고대역사를 조작하고 가르치고 있었다. 따라서 다카마스 쓰가(高松塚)의 발굴은 일본인들에게 대단한 뉴스였고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가설(假說)을 앞세워 조작하는 일본의 역사
 
일본 고대역사는 확실 한 것이 없기에 일본의 많은 학자들은 여러 가지 각도로부터 역사의 실상에 접근하려고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문에 이도국(伊都國.=邪馬臺國) 소재(所在)의 문제라든지, 야마도 정권(大和政權) 성립과 그 발전이나, 아스카분가(飛鳥文化)의 성격 등 일본 고대사의 골격을 이루는 문제가 잘 해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건이나 인물상(人物像)에 까지 연구의 메스가 가해졌다.
 
 
일본에서 고대사 붐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일본 고대시기의 문제가 잘 해명되고 있지 않은데서 가설(假說)을 세워 여러 방면으로 보며 조작하는 것이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설(假說)이 아무리 훌륭해도 가설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일본은 여러 가지 가설을 쌓이게 하고 이를 통해 학계의 통설(通說)을 만들어 사실(史實)로 굳히려 한다. 일본은 이 같은 날조된 사실을 중학교나 고등학교의 교과서에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다. 야마도 정권(大和政權)이 조선에 출병해서 조선남부를 경영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도 그 중 하나다. 
 
이와 같이 일본은 있지도 않은 임나일본부가 고대부터 우리나라를 지배한 양 둔갑시키고 있으나 이는 모두 허위이며 거짓이다. 일본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들은 일부 일본 학자들이 말하는 그들의 선대(先代)에 조선의 남부지방의 가야를 다스린 양 말하는 것에 고무돼 1880년대 정한론(征韓論)으로 구체화 된다. 일본은 이를 통해 더욱 집요하게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며 한국을 강점(强占)한 것 같이 역사왜곡에 박차를 가했다. 필자는 1968년 일본에 유학을 가서 먼저 일본 역사교과서를 살펴봤다. 필자는 교과서에 쓰인 왜곡사실에 놀랐다. 그것은 야마도 정권(大和政權) 성립에 관해서 논한 다음 ‘조선반도에 진출’이란 제목의 내용이었다.
 
 

“중국이 어지러워지니 주위의 민족은 그 지배로부터 떠나서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조선반도에서는 4세기가 되니 북에는 고구려, 남에서는 백제·신라의 두 나라가 세워졌다. 유사 이래 중국의 지배하에 있던 조선이 중국의 내란상태를 이용해서 겨우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야마도 조정(大和朝廷)은 국토 통일을 함과 동시에 조선반도에도 세력을 넓혀 마지막으로 뒤떨어져 있는 남쪽 끝의 미마나(任那)를 제압해 이를 발판으로 백제를 누르고 따르라 하고 고구려와 싸웠다”
 
 
 

일본은 이 같은 날조도 부족한지 왜곡을 계속했다. 5세기경 고구려가 남쪽으로 압력을 가하자 조정은 중국의 남조(南朝)에 사신을 보내 일본이 조선 반도의 남부를 지배 할 것을 중국이 인정 하게끔 하려고 했다는 식이다. 또 광개토대왕의 비석사진과 중국 지도를 올려 임나에 대해서 주를 달았다. 야마도 조정(大和朝廷)은 미마나(任那)에 일본부(日本府)를 두어 그 곳을 중심으로 해서 진출했다는 설명이 그것이다. 이러한 날조와 변조는 일본의 중학생이 조선에 관해서 배우는 최초의 역사에 나오고 있었다.
 
 
일본이 이렇게 하는 데는 이웃나라 조선이 ‘역사적으로 자주성을 잃은 나라’라는 것 밖에 안 되는 국가로 묘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은 이런 나라이니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참으로 천인공노할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내용이 꾸준히 계속해서 나오는 것이 일본 역사왜곡의 실상이다. 일본이 미마나(任那)를 합리화하기 위해 어떻게 광개토대왕의 비석을 변조했는가. 그 사실을 보면 가관이다.
 

 
일본 군 참모본부도 역사조작에 적극 참여
 
미국 페리제독에 의해 개항한 일본은 이후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대결이 불가피해진 상황을 맞았다. 당시 일본 군부는 만주 침략을 기도하며 만주의 지형지물을 탐사하기 위해 조사요원을 파견한다. 이 때 일본 군 참모본부가 파견한 사코이 가게아키(酒勾景信) 중위는 한학에 조예가 깊은 것이 인연이 돼 중국에 파견된 정찰병이었다. 그는 1880~1884년 5년 동안 주로 만주에서 정찰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1875년부터 사학에 노출되기 시작한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를 1882년 접할 수 있었다. 이 희귀한 광개토대왕비를 본 사코이 가게아키 중위는 이를 탁본해서 상부에 보고한다.
 
 
조선침략 음모를 획책하고 조선의 고대사 까지 연구하고 있던 명치 10년대의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고대에 있어서 조선 지배를 증명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이 때 등장한 광개토대왕 비문의 출현은 어두운 밤에 등대같이 비춰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바로 편찬과(編纂課)가 중심이 돼 저명한 한학자를 모아서 비문의 해독과 해석을 하게 한다. 
 
이 탁본을 접수한 일본군참모본부 소속 요코이(橫井忠直)와 오하라(大原里賢) 소좌(少佐)가 이를 탐구하던 중 신라와 일본의 고대관계(古代關係)에 관한 부분에서 일본에 불리한 부분이 있음을 발견했다. 일본은 1899년 이전의 어느 시점에서 다시 한학(漢學)에 유능한 장교를 파견해 1900년 몇몇 글자에 석회를 바르고 일본에 유리한 내용으로 변조한 다음 새로운 탁본을 만듦으로서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를 조작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광개토대왕의 비문을 보자.
 

 
“백제와 신라는 (우리 고구려의) 오랜 속민으로서 전부터 조공해 왔다. 왜가 신묘년(辛卯年에 침입해오니 (우리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서 이를 파했다. 그런데 백제가 왜를 불러들여서 신라를 침략해 자기들의 신민으로 했다. 거기서 대왕은 6년 병h신년(丙申年)에 스스로 수군을 몰아 백제를 토벌해서 승리했다”
 
일본은 이 내용을 석회도부작전(石灰塗付作戰)으로 파놓고 이를 가리기 위해 비 점면에 석회를 바르고 글자를 조작한 것이다. 일본은 6년 후 1889년 6월 회여록(會餘錄) 제5집으로 출판하기까지 한다.
 
일본 참모본부가 이렇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침략을 합리화 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대의 조선출병과 조선 남부경영설’을 합리화 하려는 흉계였다. 그들이 말하는 조선 출병은 391년 왜가 바다를 건너서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여 북방의 고구려와 싸웠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변조한 광개토대왕 비문(廣開土大王碑文)을 일본서기(日本書紀) 신라정벌 등의 기사와 결부시켜서 도출(導出)시키려 했던 것이다.
 
 
일본은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를 보고 이 비에 새겨진 내용의 해석에 따라서는 고고학적 입증이 어려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것이라고 봤다. 아울러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의 개전이유로서 한반도에 대한 연고권을 입증 할 수 있기에 그들에게는 비석 변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나일본부설은 이처럼 허구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기에 일본 학자도 이를 믿지 않는다.
 
임나일본부는 분명히 없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를 도회(塗灰)와 변조(變造)까지 하며 역사를 날조하는 일본의 초라함에 동정을 금치 못하겠다. 당시 일본은 미개하고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조선을 침략할 힘이 없었다. 4세기 후반 야마도 정권(大和政權)이 조선에 출병해서 임나일본부를 두고 2세기 이상 ‘조선남부를 경영’했다면 그곳으로 추정되는 김해나 그 주변으로부터 그것이 존재한 것을 나타내는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돼야 한다. 하지만 그런 유적은 나오지도 않았고 나올 수도 없다. 임나일본부는 허구의 극치인 것이다.
 

메이지(明治)정부는 처음부터 조선을 식민지로해서 사족(士族)의 불만을 해소하고 구미제국에 압박돼 온 불리한 상태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침략 작전을 준비했다. 1878년 12월 육군참모본부가 설치되면서 관서국장(管西局長)에 가쓰라 타로(桂 太郞=후에 대장, 수상이 된 자)가 임명됐다. 가쓰라 타로가 각 진대(鎭臺)로부터 소좌·대위·중위 각 1명씩 유능한 인물을 선발해서 본부 원을 구성한 후 조작도 감행한 것이었다.
 

 
한국 학자들의 분발이 요구되는 오늘이다
 
우리의 위대한 역사유산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변조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역사학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일이다. 이 같은 일본을 우리는 똑바로 눈을 뜨고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한심한 것은 이 원고를 쓰는 날도 방송대학에서는 서울대 사대교수와 사회를 보는 방송대 교수가 아무 거리낌도 없이 ‘단군신화’를 진지하게 대담하는 것을 보며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작태를 보이려 하는 것인지 한심했다.
 
 
이를 주도했던 이병도 박사도 우리의 근원을 제대로 찾는 북애(北崖)의 규원사화(揆園史話)와 세종실록에 나와 있는 세년가(歲年歌)와 동국세년가며 표제음주동국사략(標題音註東國史略)의 기록들을 보고 단군이 실재인물임을 실토했다. 오늘의 학자들도 단군역사와 환국을 기록한 단군세기(檀君世紀)와 삼성기(三聖紀), 삼성비밀기(三聖(秘)密紀), 조대기(朝代記), 고조선비사(古朝鮮秘史) 등이 비장돼 있는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연구하고 말을 했으면 한다. 학자라는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일제가 조작한 역사의 틀에서 못 벗어나고 일본인이 조작한 역사만을 고집하고 있으니 한심한 지경이다.

 
사코이 가게아키(酒勾 景信)는 일본군 참모본부 소속 청년 장교인 군인인 신분이면서도 자국 일본을 위해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를 조작한 행위자이다. 그는 역사학자나 금석문(金石文)의 대가(大家)도 아닌 일개 육군중위였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육군중위가 이역만리의 오지(奧地)에 들어가 1천500여 년 전에 세워진 고비(古碑)를 찾아 그것을 판독한 오하라(大原里賢) 소좌(少佐)를 중심으로 한 무리들이 자기민족에게 유리하도록 변조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 볼 때 그들은 우국적 열정을 가진 자들이었다.
 
 
우리나라 일부 학자들이 갖지 못한 역사에 대한 열정과 애국심 측면이 있다. 이들 모두는 일본군 참모본부 소속 청년 장교들로 역사가도 학자도 아니었다는 것이 더욱 주목된다. 우리나라 학자들 중에는 자기나라의 역사도 바로 연구하지 않으며 일본 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왜곡된 역사만을 역사로 아는 자가 아직도 많은데 참으로 비통한 일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이병도 박사도 역사왜곡 뉘우치고 타계했다
 
조선역사를 왜곡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병도 박사도 최태영 박사와 공동연구하며 위의 책을 보고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입각한 일본의 역사왜곡을 뉘우치고 이것이 잘못이었음을 말하고 타계했다. 러시아 학자로 역사를 심층적으로 연구한 U.M 푸틴은 “고조선은 고대에 어느 나라에도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나라였다”고 말하고 한국학자라는 자들이 왜곡된 역사만을 가르치는데 대해 개탄해 했다.
 
 
그는 “동북아 고대사에서 단군 조선을 제외하면 아시아 역사는 이해 할 수가 없다. 그 만큼 단군 조선은 아시아 고대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데 한국은 어째서 그처럼 중요한 고대사를 부인하는지 이해 할 수가 없다. 일본과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 내는데 당신들 한국인은 어째서 있는 역사도 없다고 그러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나라다”고 말했다. 외국의 학자에 비춰진 우리나라 강단파 사람들의 실상은 참으로 부끄럽기 한량없다.

 
지난날 우리의 지배를 받던 중국과 일본이 열등감에서 우리 역사를 거꾸로 조작 변조 왜곡하는데 이를 바로잡으려는 의지도 용기도 없는 우리들 아닌가. 우리 역사에 대한 애착, 자존심도 없는 우리나라 학자들이라면 이는 일본의 앞잡이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왜곡된 역사만을 고집하며 가르치는 것은 수치요 매국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역적과 진배없는 일이다.
 
우리역사의 진실과 정체성도 모르며 도둑맞은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조차 없이 방관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도 용납이 안 되는 일이다. 조상에게 큰 죄를 짓는 일임을 어찌 모르는가. 이러한 무사안일한 자들은 깊이 각성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다 같이 역사를 되찾아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너나없이 모두 분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찬란한 역사는 빛을 발할 수 없다. 우리의 국사학계는 일부 소수의 정예학자를 제외하고 사실 정상이 아닌 것으로 사료된다.
 
출처: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7293&keyWord=%C0%CC%C0%BB%C7%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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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섹 16-02-04 18:23
   
광개토대왕비문을 조작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저 분도 글에 적어 놓았지만, 역사학자나 금석문의 대가도 아닌 일개 육군중위가
그 내용의 가치를 알아서 조작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을 제대로 해석하면 우리에게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할 것이 없습니다.

칠지도도 상납한 것이다 하사한 것이다라며 남북한 학자와 일본 학자들이 수십년을 논쟁해 왔지만, 칠지도 문구가 하행문으로 되어 있고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안 일본이 요즘은 잠잠해졌습니다.
바람꽃 16-02-04 22:11
   
광개토 대왕비 조작에서 저 교수는 역사를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일본은 조작한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고대한문을 해독할 학자가 없어서 무슨뜻인지 잘 몰랏는데 조작을 어찌합니까? 또 나중에 일본인이 발견하기전 중국에서 탁본뜬게 여러장 확인됫는데 조작은 없었습니다. 일본까는것에 미쳐서 없는말까지 지어내는게 한국학계입니다. 연구자들의 열정이나 수준이 일본에 미치지 못하는데 무작정 욕만하고 국민들은 그걸또 믿고 무한반복 ㅠㅠ
     
스리랑 16-02-04 22:57
   
일본 참모부가 밀파한 군사 스파이 사꼬오 중위는 1884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공식화하였는데, 이에 대해 정인보선생은 해석상의 모순을 지적하였고, 1972년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李進熙)선생은, 일제가 사꼬오가 위조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비문을 파괴하고 3차의 석회도부(石灰塗付)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문제의 비문 중 왜(倭) 이하 도(渡)·해(海)·파(破) 등 4자가 위조된 것임을 밝혀냈습니다.


또한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고, 이어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박사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 來渡海破 '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아울러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은 열제(烈帝)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지 왜를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비문에 나오는 많은 간지(干支)에는'신묘년'과 같이 년(年)자가 붙어 있는 예가 없을 뿐 아니라, 신묘년 기사와 앞뒤 문장의 내용이 연결되지 않고 모순되고 있어 변조가 가해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버섹 16-02-05 14:12
   
당시는 일본의 군국주의가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던 때라 광개토대왕비문을 가지고 남선경영과 연관시키던 그런 주장이 많이 나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하고부터는 시각이 좀 바뀝니다. 일본 고대국가의 성립 과정을 푸는 실마리라는 관념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죠...
황국사관이 지배하던 당시엔 일본서기의 역사 내용을 의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쓰다라는 사람은 일본서기 신화나 설화는 후대에 조작한 것이 많고...등등을 운운하다 법원에서 금고 판결을 받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패망 후에는 사정이 달라져 다양한 주장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패망 후에는 일본서기, 고사기 등이 허망한 역사책으로 전락했다는 자조가 나올 정도로 일본내에서의 비판도 혹독했으니까요...

판독의 문제는 1972년 이진희씨가 일본군 참모본부에 의한 비문변조설을 제기한 이후,천관우, 이형구, 박로희 등 여러 주장들이 제기 되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탁본이 1882년 일본군 참모본부 사코우에 의해 처음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청나라 동치(1862-1874) 말년에 탁본이 북경에 전해지기 시작해 중국 금석학자들이 먼저 알고 조사 연구를 진행한 원석탁본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청천 16-02-05 09:40
   
솔직히 천왕이 이천년동안 맥이 끊기지 않고 내려왔다는게 더 허구 같습니다.
그러니 일본사 자체가 허구일지도 모릅니다.
세계사에서 한 왕가가 이천년을 내려온건 일본밖에 없을듯...
환쟁이토벌 16-02-05 20:47
   
저 유사역사쟁이 교수 왜이렇게 풀발했음?
적어도 일본학계가 니들보단 나음^^
하늘나비야 16-02-16 17:58
   
이게 웬난리 .. 저기 광개토 대왕비 조작된거  탁본 확인해 봄  확실하다는 군요  일본이 중국 점령했을 때 뜬 거랑 그 이전에  뜬거랑  몇 개 되는데 ..  글짜가 틀리다고 하더군요  이건 그 탁본  가지고 계신 재일 역사 학자 분을 아신다는 분께 들은 겁니다  그 탁본  몇번 공개 된걸로 압니다 .. 년도 에 따라 글자가 달라져 있더군요 ...  이건 논쟁꺼리가 안됀다고  당시 이미  난리 치는 일본 어용역사학자들  앞에 내 보이면  입다문다고 하시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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