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그런데 사대관계는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이런 관계는 보통 두 나라 사이에서만 유효했다. A국가가 B국가의 신하국이라고 하여 A가 모든 국제관계에서 신하국이었던 것은 아니다. A는 C국가에게는 황제국이 될 수도 있었다. 조선은 명나라의 신하국이었지만, 여진족이나 대마도에게는 황제국이었다. 또 C가 A의 신하국이고 A가 B의 신하국이라고 하여, C가 B의 신하국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별도의 외교관계가 체결되지 않는 한, B와 C는 남남이었다. 예컨대, 조선 전기의 여진족 속에는 조선과 사대관계를 체결하고 명나라와는 사대관계를 체결하지 않는 그룹이 많았다. 명나라의 신하국인 조선과 사대관계를 체결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명나라의 신하국이 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대관계는 상대적이었다. 이것은 두 나라 같의 개별적 관계에서만 작동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이 중국의 신하국이었다고 해서 한국이 모든 국제관계에서 신하국의 입장에 있었던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것은 한국이 황제국의 입장에 있는 경우도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점은 앞 장에서 설명한 여진족의 사례는 물론이고 대마도의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고려와 조선의 대마도와의 관계에서는 황제국이었다. 대마도는 일본도 황제국으로 받들고 한국도 황제국으로 받들었다. 역사학에서는 이것을 양속兩屬으로 표현한다. 하나의 국가가 두 개 이상의 국가를 황제국으로 받드는 것을 표현하는 용어다. 섬 대부분이 산지라서 농업이 힘들었던 대마도는 한일 양국과의 교역이 반드시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양속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고려 후기부터 대마도는 일본보다 한국 쪽으로 기울었다. 왜냐하면 이 시기 한반도는 통일 상태이고 일본은 분열 상태였으며, 이런 까닭에 양국의 국력만을 본다면 한반도가 더 강했기 때문이다.
13세기 초반에 대마도는 지배자의 성씨가 유종維宗에서 종宗으로 바뀐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대마도 지배자의 성씨가 일보닉이 두 글자에서 한국식인 한 글자로 바뀐 것은 대마도의 친親한반도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대마도가 한반도 쪽으로 완전히 기운 것은 아니다. 대마도는 한일 양쪽과 관계를 동시에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마도 지배자는 한일 양쪽으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것을 근거로 대마도는 양쪽과 무역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한국은 여진족뿐 아니라 대마도로부터도 사대를 받았다."
(후략)
- 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김종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