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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1-07 10:41
[한국사] 일제에 의해 조작된 ‘한사군漢四郡’
 글쓴이 : 스리랑
조회 : 2,998  

일제에 의해 조작된 ‘한사군漢四郡’
우리역사가 중국의 식민지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역사말살의 학설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한사군漢四郡 대동강설’이다. 한나라 무제가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라는 4 개의 식민 구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어떠한가?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이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 지역에 있었고 나머지 삼군이 한강 이북에 있었으므로 한강 이북이 고대 중국의 식민지라는 주장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한 무제는 고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에게 5만7000명의 대군을 주었다. 두 장군은 1년이 넘는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귀국했다. 그러자 한 무제는 좌장군 순체는 사형시킨 후 시신을 조리돌리는 기시(棄市)형을 내렸고, 누선장군 양복도 사형선고를 내렸다가 막대한 속전(贖錢)을 바치자 목숨은 살려주되 귀족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위산(衛山)은 고조선과 강화협상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이미 사형 당했으며, 제남(濟南)태수 공손수(公孫遂)도 마음대로 군사형태를 바꾸었다는 이유로 사형 당했다.
 
그래서 사마천은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라는 사평(史評)에서 “양군(兩軍)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열후(列侯)가 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라고 혹평하고 있다. 게다가 기시형을 당한 좌장군 순체는 “본시 시중(侍中)으로 천자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는 인물이어서 한무제가 이 전쟁 결과에 얼마나 분개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전쟁에 나갔던 장수가 승전하고 돌아오면 제후(諸侯)로 봉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제후는커녕 모두 사형 당했다. 사마천(서기전 135년~서기전 90년)은 이 전쟁의 목격자였음에도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정벌하고 사군(四郡)으로 삼았다”라고만 적고 사군의 개별적 이름도 적지 않았다.
 

 
사마천은 왜 한사군의 이름도 적어 놓지 않은 것일까? 한사군의 이름은 고조선과 한漢나라의 전쟁이 끝난 200여 년 후에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漢書)> ‘무제(武帝) 본기’에 처음 등장한다. 낙랑·임둔·현도·진번이란 명칭이 이때 나타나는 것이다. 전쟁의 목격자 사마천이 적지 않았던 이름을 200여 년 후의 반고는 어떻게 적을 수 있었을까? 반고는 흉노 정벌에 나섰던 두헌(竇憲)을 따라 종군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중화(中華)사관이 강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반고의 <한서漢書>와 같은 고대 역사서가 의문투성이로 기록하고 있는 한사군을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확고하게 각인시킨 세력은 물론 일제 식민사학이었다. 한국사의 시작을 중국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이를 한국 주류 사학계가 현재까지 정설로 떠받들자 중국은 ‘이게 웬 떡이냐’하고 동북공정에 그대로 차용해 ‘한강 이북은 중국사의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과 일본은 예로부터 역사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 전통이 깊은 나라들이다. 중국은 고대로부터 춘추필법이란 미명 아래 다른 민족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서술을 해왔다. 낙랑군에 있었다는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 창려현에 있는데 진시황과 조조가 올랐던 유명한 산이다. 낙랑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쓴 중국 사서는 하나도 없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에 걸쳐 있었고 그 치소(治所:낙랑태수부)는 대동강변의 토성동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중국은 이 논리에 따라 한강 이북을 중국사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은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고 이들의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 그리고 한국 주류 사학계는 낙랑군의 위치에 관해서는 삼위일체 한 몸인 것이다.
 
 

 
먼저 서기 1세기 말경 반고가 편찬한 <한서>의 ‘설선(薛宣)열전’은 “낙랑은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나라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 일대였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는 “낙랑군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는 만주를 가로지르는 요하(遼河)를 기점으로 요동과 요서(遼西)로 나누지만 과거의 요하는 현재보다 훨씬 서쪽이었다. 현재의 요하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만주 요동이 평안남도나 황해도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후한서(後漢書)> ‘최인 열전’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요동에 있다”고 쓰고 있다. 고대의 어떤 사료도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이라고 쓰지 않았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주는 사료는 <사기> ‘하(夏) 본기 태강지리지’이다.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는 기술이다. 이 사료는 낙랑군에 대해 수성현, 갈석산, 만리장성이라는 세 개의 정보를 준다. 이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이 낙랑군 지역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이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병도가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다. 이병도의 황해도 수안설은 현재 한국 사학계가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으로 비정하는 핵심 이론이기 때문에 그 논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군색함 자인한 이병도 ‘황해도설’
이병도: “수성현(遂城縣)…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 산천조에 요동산(遼東山)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關防條)에 후대 소축(所築)의 성이지만 방원진(防垣鎭)의 동서행성의 석성(石城)이 있고, 또 진지(晋志)의 이 수성현조에는 -맹랑한 설이지만- ‘진대장성지소기(秦代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 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이병도, ‘낙랑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승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뜻하는데 이 책의 황해도 수안조에 ‘요동산’이 나오는데 이것이 갈석산이고, 방원진의 석성이 만리장성이라는 것이다. 요동산이 왜 갈석산으로 둔갑했는지 또 벽돌성인 만리장성과 전혀 다른 방원진 석성이 어떻게 만리장성이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논리가 군색하기 때문에 ‘자세하지 아니하나’라는 수식어를 넣은 것이다. 진지(晋志)는 당 태종이 편찬한 <진서(晋書)> ‘지리지’를 뜻한다. 황해도 수안을 설명하다가 느닷없이 중국의 <진서>를 끌어들인 것은 그가 ‘수(遂)’자가 같다는 것 외에는 수안을 수성이라고 비정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맹랑한 설이지만’이라는 비학문적 수사를 쓴 것이다.
 
 
 

 
현재 중국사회과학원에서 편찬한 <중국역사지도집(전8권)>은 이병도의 주장대로 만리장성을 한반도 내륙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만리장성 관광단을 모집해서 외화 획득에 나서야 할 일이지만 지난 2천년 동안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만리장성을 보았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낙랑군 수성현을 수안 근처로 표시했으면 갈석산도 그 부근에 그려놔야 하는데 갈석산은 중국에서 한국의 설악산이나 금강산처럼 유명한 산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만리장성은 한반도 깊숙이 그려놓고도 갈석산은 본래 위치대로 하북성 창려현 부근에 표기해놓았다. 중국측 동북공정 논리의 파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서기전 1세기에 편찬한 <사기> ‘진시황 본기’ 32년(서기전 215)조는 “진시황이 갈석산에 가서…석문(石門)에 비를 새기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 ‘몽염(蒙恬)열전’은 ‘시황이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요동까지 이르렀다’고 썼고, 고대 역사지리서인 <수경주(水經注)>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갈석까지 이르렀다”라고 적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갈석산을 요동지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갈석산 부근의 산해관(山海關)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사실은 일종의 상식이다.
 
 
 
 
‘수성현·갈석산·만리장성’이라는 세 조건에 부합하는 지역은 황해도 수안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창려현이다. 창려현에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있다. 그런데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군으로 비정하기 위해서 인용한 <신증 동국여지승람>의 ‘수안군 건치연혁’에는 “고려 초기에 지금 이름(今名:수안)으로 고쳤다”고 적고 있다. 고려 초에 수안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뜻이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고려 태조 23년(940)에 수안으로 고쳤다”고 쓰고 있다.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으로 비정한 유일한 근거가 수(遂)자인데 그마저 고려 초기에 생긴 이름으로서 아무리 빨라도 10세기 이전에는 ‘수(遂)’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병도는 황해도 수안현을 낙랑군 수성현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의도는 한국사의 시작을 중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1915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발간하면서 이 지역을 낙랑군 태수가 근무하던 치소로 확정지었다. 그런 대동강변 토성은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에서 보듯이 한국 주류 사학계에 의해 오늘도 ‘올바른 역사’로 주장되고 있다.
 
 
 
 
주류 사학계는 고구려 미천왕이 재위 14년(313) 낙랑군을 공격해 2천여 명을 사로잡아옴으로써 낙랑군과 한사군이 모두 멸망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무신년은 동진(東晋) 영화(永和) 4년(348)이다. 한사군이 망한 지 35년이 지났지만 황해도 지역은 여전히 대방군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장무이 무덤은 포로이거나 망명객이었다가 황해도에서 죽은 전직 대방태수 무덤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중국 고대 사서는 대방군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은 “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 연간(196~220)에 공손강(?~209)이 둔유(屯有)현 남쪽 황무지를 대방(帶方)군으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방의 위치에 대한 최초의 기사는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의 “후한 질제·환제 연간(서기 146~167)에 (고구려가) 다시 요동(遼東)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해 대방 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구절이다. 고구려가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대방 현령을 죽이고→낙랑태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전과를 고려하면 대방은 황해도에 있을 수가 없다.
 
‘군국지’(郡國志)에서도 “서안평현과 대방현은 모두 요동군에 속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구려가 공격한 서안평, 대방, 낙랑이 모두 고대의 요동에 있었던 것이다. 대방현이 요동에 있다는 ‘군국지’의 기사 하나로도 황해도로 비정한 주류 사학계의 정설은 설 곳을 잃는다. 출처: 세종기획 출판물 요약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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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 16-01-07 10:45
   
중국이 밑돌 깔고 일제가 못박은 ‘평양’의 한사군
현재 주류 사학계는 일제 식민사학의 구도에 따라 평양 일대를 한사군 낙랑군 지역이라고 비정하지만 일제도 처음부터 그렇게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통감부가 도쿄대 공대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게 평양의 석암동을 비롯한 전축분(벽돌무덤) 조사를 의뢰할 때만 해도 ‘고구려 고적조사 사업’의 일환이었다. 이런 ‘고구려 유적’이 ‘한(漢) 낙랑군 유적’으로 바뀌게 된 데는 도쿄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역할이 컸다.
 
도리이 류조는 만철(滿鐵)의 의뢰로 남만주 일대에서 ‘한(漢) 낙랑시대 고적조사 사업’을 수행했던 인물이다. 남만주 유적조사를 마친 그는 대동강변에서 중국식 기와를 발견했다면서 이 일대를 낙랑군 지역이라고 주장했으나 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유적들이 고구려 유적이라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뀐 후 도리이 류조가 ‘고구려 고적조사 사업’을 ‘한 낙랑시대의 고적조사 사업’으로 개칭하자고 제안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훗날 조선사편수회를 주도하는 이마니시 류(今西龍)도 처음에는 평양 일대의 유적을 고구려 유적으로 보았으나 총독부의 방침을 알고는 태도가 달라졌다. 이후 이마니시 류는 가는 곳마다 2000년 전 한나라 시대의 와당과 봉니(封泥)를 발견하고 2000년 전에 세웠으나 그간 아무도 보지 못했던 ‘점제현 신사비’를 최초로 발견하는 ‘신의 손’이 되었고 평양 일대는 낙랑군 유적이 되어갔다. 한국사의 식민지성을 강조해 일제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해방 7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눈이 아니라 타자의 눈으로 그린 것을 한국사의 시작이라고 가르친다면 후세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삼국사기 “낙랑군 등 포로 2만명”
봉니(封泥)란 대나무 죽간(竹簡) 등의 공문서를 상자에 넣어 묶은 끈을 봉하고 도장을 찍은 진흙 덩이를 뜻한다. 봉니는 진흙이란 성격상 위조설이 끊이지 않았으나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당시로서는 거금인 100~150원을 주고 매입했다. 일제강점기 평양 일대에서만 200여기에 달하는 봉니가 수습되었는데, 북한의 박진욱은 <락랑유적에서 드러난 글자있는 유물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95년 제4호)에서 “1969년에 낙랑토성에서 해방 전에 봉니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하는 곳을 300㎡나 발굴하여 보았는데 단 1개의 봉니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운성리 토성·소라리 토성·청해 토성 발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가 100원에 구입한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 봉니는 위조품이라는 결정적 증거다.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개국한 왕망은 ‘낙랑군’을 ‘낙선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라는 관직명을 ‘대윤’으로 고쳤다. 왕망 때 만들어진 봉니라면 ‘낙선대윤장’이어야 하는데 ‘낙랑대윤장’인 것은 위조품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신의 손’을 거친 모든 유적·유물은 의문투성이다. 이런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해석할 때 중국계 포로의 존재가 중요하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고구려’조는 고구려 태조 대왕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침범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 태수 처자(妻子)를 사로잡았다”고 전한다. 낙랑 태수 처자뿐 아니라 다른 많은 포로와 여러 문서를 비롯한 노획물도 있었을 것이다. 낙랑군의 호구 수가 기록된 낙랑 목간도 이런 경로로 획득한 문서일 것이다.
 
<삼국사기>는 미천왕이 재위 3년(302) 현도군 사람 8천여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고 전하고 있고, 재위 14년(313)에는 낙랑군 남녀 2천여명을 사로잡아 왔으며, 재위 16년(315)에도 “현도성을 쳐부수어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천왕이 잡아온 포로만 최소한 ‘1만명+α’이다.
 
<삼국사기> 고국양왕 2년(385) 조는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고”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포로들은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중국에서 가장 먼 평안남도나 황해도에 집단 거주시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에는 많은 망명객도 있었다.
 
<삼국사기>고국천왕 19년(197년) 조는 “중국에 대란(大亂)이 일어나서 한인(漢人)들이 난을 피해 내투(來投)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산상왕 21년(217)조에는 “한나라 평주(平州) 사람 하요(夏瑤)가 백성 1천여 가(家)를 이끌고 와서 의지하므로 그들을 받아들여 책성(柵城)에 살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에는 동수(冬壽)라는 인물에 대한 묵서명(墨書銘)이 나온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진기’(晉記)에 따르면 동수는 연(燕)나라의 왕위 계승 전쟁에 가담했다가 패배하자 곽충(郭充)과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다. 이 명문 기사가 없었다면 안악 3호분도 한사군 유적으로 둔갑했을 것이다.
 
평남 강서군 덕흥리(현 남포직할시 강서구역 덕흥리) 무덤에서는 요동·현도태수를 지낸 동리( 冬利)라는 인물의 기록도 있다. 장수왕 24년(436)에는 북연(北燕) 왕 풍홍(馮弘) 등이 망명했는데 그 행렬이 전후 80리나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세계 제국의 성격을 갖고 있던 고구려에는 많은 중국인 지배층들이 망명했다. 고구려 강역에서 중국계 유물이 나온다고 무조건 한사군 유물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한국 사학계는 조선사편수회의 주요 논리가 그대로 한국사의 정설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식민사학의 진정한 교주는 이병도의 와세다대 유학 시절 스승이자 만철(滿鐵)과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다. 일제는 가야를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라고 주장했으나 거꾸로 가야가 고대 일본을 지배했다는 물증이 속속 드러나면서 현재는 일부 국수주의자를 제외하고는 그런 주장을 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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