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6-01-05 23:45
[한국사] 일제와 몽골.
 글쓴이 : mymiky
조회 : 3,288  

몇일전, 자유게시판에서 일본과 몽골중에 어느 나라가 피해가 많냐?는 질문에
 
대몽항쟁기 피해가 컸으나, 옛날 일이라 관련자들이 다 죽고 없으며,
통치방식도 일본과 다른 면이 있다는 점을 썼는데,
댓글에 이런 글이 달렸더군요.
 
오해는 마시고,
전, 몽골통치를 잘했다고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몇가지 부분에서, 바로 잡을 필요가 있어서, 동아판에 좀 더 첨가하겠습니다.
 
 
[원나라화를 시키지 않았다.. 몽골에 의해 바지사장처럼 왕이 되고 왕은 몽골에 충성하라는 의미에 왕호에 충을 넣고 왕실과 관료의 복장 몽골식 복장을 하고 백성들도 변발과 몽골의복을 입도록 하였죠. 전근대의 뒤떨어지고 낙후된 통신과 체제의 중세시대에 이정도 까지 통제를 한건 충분히 병합에 가까운 일입니다.
실제로 세계사에선 몽골통치기에 고려를 몽골영토로 표기합니다. ]
 
(1.)몽골에 의해서, 왕이 바지사장이 되었다? ~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사실, 무인정권 뒤로, 백년간 고려 왕실은  걍.. 허수아비 신세였는데.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원나라 덕분에, 고려 왕실과 국체가 보존된 면도 있습니다.
실제로, 원종은 몽골의 도움을 받아 강화도 촌구석에서 개경으로 환궁 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뒤 원의 부마가 된 충렬왕, 외손자인 충선왕때까지는 실로 오랫만에 위신도 세우고, 왕권이 강했던 시기기도 합니다.  
 
(2.)충자-라는건 님의 말씀대로 충성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3.)왕실과 관료의 복장은 몽골식 복장을 했다- 맞습니다.

(4.) 백성들도 변발과 호복을 한다?- 이 말은 틀렸습니다.
변발과 호복은 귀족같이 고려 상류층들의 특권이였습니다.
 
마치 청나라의 만주족들이 한족들에게 순종하라는 의미로 돼지꼬랑지 변발을 강제로 시킨 것처럼,
원도 고려에게 그랬다고? 오해하는 분이 있다면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원나라는, 유목민족이 건설한 왕조라서 그런지?
매우 국제화적인 나라였기에,
이민족의 문화나 종교같은데 터치하는건 생각보다 적었습니다.

또한, 쿠빌라이의 세조구제 중, 가장 첫번째 항목이 -불개토풍-이였어요.
고려의 문화와 풍습을 존중하기로 한 항목이죠.

순전히, 귀족들에게 불었던 몽골풍이란 것도, 실제론 원의 강요가 아닌
고려 귀족들이 대국의 풍습이라며 너나 나나 따라한 것입니다.

그랬기에, 공민왕의 반원정책 중에 첫번째인 변발과 호복금지도
제일 쉽게 할수 있었던 부분이였기에, 그것부터 바로 잡은 것입니다.

거기에, 원나라가 뭐라곤 못 했습니다.
뭐, 애초에 몽골풍이란게 원측이 강요한게 아니였거든요.
니들이 우리 따라해놓고, 왜 저래 -.-? 뭐 이런 분위기..

또한, 관료의 복장은 원나라가 아니라도, 우리나라는 이전부터 중국의 양식을 따라한 부분이 많습니다.
원 이전에는 송나라나 당나라 양식 복장도 관료복으로 입었고,
조선에 와선, 명나라 관복도 받아들여 잘만 입었습니다.

오늘날로보면, 관복이란건 수트개념이라고 볼수 있죠. 

(5.) 세계사에서, 고려를 몽골 영토로 표기하는건, 순전히 우리나라가 외국에 인지도가 떨어지고, 잘못된 내용도 많이 떠돌아다녀도, 그것을 시정하려는 노력도 없었고, 정부도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한류다 뭐다 코리아가 알려졌지,
그 전에는, 우리나라가 중국어 쓰는 나라,
또는 일본어 쓰는 나라라고 외국책에 잘못 써있다던지,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몽골의 영토였다면,
고려에서 여러차례 입성론(몽골과 정식으로 합병하자)는 말이 나올리가 없죠-.-
 
이미, 합병당한 나라에서, 또 합병하자고 나온다?
이 무슨 모순법임?ㅋㅋㅋ
 
원간섭기간 중, 고려에서 입성론이 네다섯번 정도 나왔는데, 다 실패했습니다.
 
기황후 드라마가 유행했을때, 기황후가 고려의 민족혼? 때문에,
그녀가 입성론을 저지시킨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론, 고려왕이 황제의 친척이였기에, 황실 행사등에도 참여하고, 서로간에 얼굴도 다 아는 사이에,
그런 말 오가는게 꼬롬하기도 했고
 
고려는 변방인데, 뭐 그 땅까지 꼭 먹어야 되나? 돈 많이 들텐데;;
라는 현실적인 원나라 조정의 여론도 있었고
 
고려측도 일부 콩고물 얻어 먹으려는 부원배들이 선동하는 것일뿐, 대다수는 반대함.
그리고, 세조구제를 잊으면 안됨! 이라고 했기에, 입성론 자체는 번번히 실패합니다.
 
그리고, 공민왕이 입성론 나불거리는 부원배들 조져버린 뒤로는,
다신 그런말 하는 사람들도 안 나왔고.
뭐,, 그때쯤이면, 원도 민란과 자연재해로 제 코가 석자였던 상황이라, 고려에 신경도 못 쓸 형편이였음.
 
+ 덧붙여,  일제가 조선인 학생들에게 일본어 교육시키며, 조선어 쓰면 벌 받던거에 비해
몽골은 고려인에게 몽골어 강요도 없었고요.
 
이런 점에서,
전 조선인의 일본화 정책을 쓰던 일제와
몽골 간섭기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mymiky 16-01-05 23:47
   
양녕대군 쓸려고 했는데, 별로 좋아하는 인물이 아니라서, 쓰기가 귀찮넹;;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여말선초때니까 ㅋㅋㅋ 조만간에 써야지~
     
두부국 16-01-06 01:27
   
고려 부원배들이 고려땅 자체를 원나라에 받치겠다고 했는데 원나라 측에서 거절한적이 있지않나요?
          
mymiky 16-01-06 02:12
   
{입성책동(立省策動)}
- 고려 후기 부원배들이 원나라로 하여금 고려에 행성(行省)을 세우도록 획책한 사건.

배경:

당시 고려에는 일본정벌을 준비하기 위해 정동행성(征東行省)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이는 원나라의 다른 행성들과 같은 지방행정기관이 아니었고, 오히려 고려 국가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형식적인 기관이었으므로 이를 폐지하고 다른 행성들과 같은 새로운 행성을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입성 책동은 충선왕 복위 이후부터 약 30년 동안 4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모두가 원나라에 가 있던 고려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고려의 왕위계승과 관련되어 일어났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새로운 행성의 설치는 정동행성의 폐지 뿐 아니라 고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으므로 고려의 모든 정치세력이 맹렬히 반대하였다.
원나라로서도 그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아 논의에 그쳤을 뿐 실행에 옮겨진 적은 없다.

[제1차] 최초의 입성책동은 1309년(충선왕 1) 경에 요양행성 우승상 홍중희(洪重喜)에 의해 제기되었다. 홍중희는 일찍이 몽고와의 전쟁 중에 몽고에 투항해 고려침략을 향도했던 홍복원의 손자로서 요양 지방에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심양왕(瀋王)에 봉해지고 요양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자, 이에 위협을 느껴 충선왕을 탄핵하는 한편, 고려에 새로운 행성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충선왕은 고려왕에 복위한 직후부터 단행했던 개혁정치의 일부를 철회하는 등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1309년에 홍중희가 조주(潮州)로 유배됨으로써 입성 논의도 잠잠해졌고,  고려에 새로운 행성을 두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제2차] 1323년(충숙왕 10)에는 유청신·오잠 등에 의해 제2차 입성책동이 전개되었다. 이보다 앞서 1320년에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실각하고, 토번(吐蕃 티벳)으로 유배되었다.
다음해, 심왕 왕고(暠) 등이 충숙왕을 참소하는 가운데 고려에서는 심왕옹립운동이 일어났는데, 유청신과 오잠은 심왕 고의 편에 서서 입성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2번째 입성논의는 상당히 진전되어 행성의 이름을 삼한행성(三韓行省)으로 정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에 머무르고 있던 이제현(李齊賢) 이 원나라의 조정에 과거 원의 세조, 곧 쿠빌라이 칸이 약속한 '불개토풍(不改土風)' 등의 '세조구제(世朝舊制)'를 들어 입성론이 부당함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원나라의 승상 배주(拜住), 왕약(王約), 참의중서성사 회회(回回) 등이 반대함으로써 실행되지 않았다. 1325년 공식적으로 철회되기에 이르렀다.

[제3차] 제3차 입성책동은 1330년 충혜왕이 즉위한 직후에 장백상(將伯祥)에 의해 추진되었다. 장백상은 중국의 강남(江南)사람으로 충숙왕 때 정동행성 낭중(郎中)을 지낸 바 있었다. 이 해에 충숙왕이 퇴위되고 충혜왕이 즉위하자 원나라에서 입성책동을 일으켰다. 그가 충혜왕 측과 불화한 것이 입성책동의 원인으로 추측되나,정확한 것은 알수 없다. 충혜왕이 직접 원나라의 우승상 연첩목아(燕帖木兒, 엘테무르)에게 요청함으로써 곧 입성논의가 중지되었다.

[제4차] 1343년 원나라에서 이운·조익청·기철(奇轍) 등이 제4차 입성책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충혜왕이 탐음부도(貪淫不道)하므로 고려에 행성을 세워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 원나라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충혜왕을 퇴위시키는 조처를 취하였다.

[의의] 부원배들의 책동에 의해 제기되었던 4차례의 입성문제는 실행되지 않고 모두 좌절되었다. 따라서, 고려는 국가의 면모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입성문제가 제기되고 논의되는 과정에서 원나라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증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새로운 행성을 두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정동행성이 원나라의 다른 행성들과는 다른 형식적인 기관이었음을 말해주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두부국 16-01-06 02:21
   
좋은지식 감사합니다
전략설계 16-01-06 01:26
   
일본식민지도 쓰라린 부분이 많지만..

어차피 침략당하고 정복당해서 좋은 꼴 보기는 어렵고.
병자호란때 청에 끌려간 사람만 서울 이북에 몇명에 하나 꼴이라..

피해보다 우리 민족의 기상이나 나갈 바에 끼친 영향을 보자면..
몽골침입이 더 컸다고 봅니다.

통일신라, 고려시대때 동북아에서 나름 중원에 눈치 많이 보지 않고, 나름 목에 힘 주고 살아왔는데.
몽골 침입으로 민족의 기세가 꺽인 순간으로..
이후 이성계가 쉽게 사대로 나가는 계기가 되었죠.

당도 신라한테 내쫓기고..
땅댕이 줄었다고 거란이 쉽게 보고 고려에 쳐들어왔지만.. 재미 못보고 지들 국력만 쇠해져..
주변에 한반도 넘어와서 재미 못 본다는 옛 고구려 공식을 되찾아가는 중에..
그래서 금나라도 고려에 사렸는데..

저 몽골만 아니었으면.. 명 한족이 그렇게 쉽게 우리를 보지도 못하고.
지금보다 끝발있게 후손들이 동북아에 살지 않나 싶네요.

괜히 저 몽골이 중원의 주변을 싹 털고 기 죽여놔서,
동북아에서 후대의 명, 청 입김만 쎄지고 중화를 강화시킨 맛이 있네요.
 
그래서 얼굴 닮았다고 친근해하는데, 이런 역사적인 것 때문에 갠적으로 몽골 싫어합니다.
     
mymiky 16-01-06 02:18
   
거란족도 막아낸 고려가, 몽골에게 탈탈 털린데는,
당시 무신정권의 개삽질도 한 몫했죠-.-
뭐, 동시에
몽골족들이 한순간에 동서로 막 팽창하는 속도도 놀랍지만요.
     
전략설계 16-01-06 02:37
   
몽골이 고려를 정 타겟 했으면 남아나기 어려기는 매 한지였죠.

거란뿐 아니라 금 정도였다면 고려 쳐들어와서 별로 재미 못 봤을겁니다.

몽골은 워낙에 동북아에서 일어난 어떤 군대보다도, 또 세계 어떤 군대보다도 강력한 기세라..
피해가지 못하고 몽골을 만난게 여러모로 아쉽네요..
우리민족의 이후 나갈 방향에 대단히 영향을 미쳤고요.

몽골의 피해를 본 중원도 후대에 수혜자요..
서하니.. 몽골이 싹 정리해버리잖아요..

심지어 몽골에 점령된 러시아까지 몽골제국을 통해 후대에 동쪽으로 뻗어나가는 노하우를 전수받은 셈이 되는데.

몽골이 물러난 후 중국의 파이를 키우고 큰 나라는 더 키운 반면,
작은 나라 작은 민족은 없어지거나.. 생존이 어렵게 한 측면이 있네요.

몽골이 그렇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역사의 가정도 해봅니다.
흑요석 16-01-06 16:13
   
제가 올렸던 질문이네요 ㅋㅋㅋㅋ

마이미키님의 디테일한 차이점 비교 잘 읽었습니다.
mymiky 16-01-06 16:45
   
외국인들의 무지가 아니라 원나라에 의해 만들어진 명목왕실만 남아있고 고려의 모든 국정권한이 몽골에게 넘어갔기에 그렇게 기술한게 맞는 겁니다. 자치권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고려는 하나하나 몽골관리의 통제를 받았습니다.
외국관리에 의해 통치된다는건 이미 해당영토가 통치하는 관료의 국가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고려 각지와 수도에 몽골관리와 총독 다루가치가 들어가 고려를 통치하였는데 이게 과연 자주권과 독립성을 가진 자주독립국가라 부를수있을까요?
왕실은 몽골황실입맛대로 왕도 지멋대로 임명하고 주물럭거리며 아무런 정통성과 권위 위신이 처박혔고 다루가치에 고려의 내정을 통치하는 시스템에 세계 사가들이 몽골에 병합되었다고 기술한건 사실 매우 타당한 겁니다.


{~라고 어느 분이 또 답변을 올리셨기에, 동아판에 마저 답변하겠습니다.}
     
mymiky 16-01-06 16:52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원과 강화하고 통혼을 맺으며 고려왕실의 입지는 이전보다 올라갔습니다.

물론, 후기로 갈수록 고려왕실 뿐만 아니라.
다른 집안에서도
또 다른 황실친척이 된 부원배들이 설친건 있습니다.

더구나, 고려왕실보다 더 윗 신분인 기황후가 나타나면서
그 부모가 영안왕- 연안왕 대부인으로 추증되고,
오빠들이 갑질이 하늘 높은줄 모르고 설치게 됨으로써,
고려왕실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건 있죠.

딸이 아유시리다라 태자비가 된 권겸도 유명하구요.

좀 서열이 꼬였다고 해야하나 -.-;;

양국의 왕가가 통혼하다보니, 상류 귀족들 또한 매우 복잡하게 통혼을 하면서
고려후기에 기득권 층을 형성했는데,

원의 고관대작들과 사돈관계를 맺는 고려귀족들도 많아지게 됩니다.
원에서 파워에 따라, 지위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입김이 쎄지게 되죠.

뭐, 그게 원과 얽히게 된 고려말 정치상황의 특징이기도 한데,

단, 몽골이라고해서, 막무가내로 고려왕을 지멋대로 임명하고 바꾸고 한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종통(宗統)은 왕씨 집안에서, 배출되었으며
왕위 계승자 순서대로 바뀌었습니다.

원종-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이까지 모두 부자관계 그대로 이어왔고)
충정왕- 공민왕 이 순서는 조카와 숙부 사이.

그 중간에 퇴위와 복위가 반복된 경우가 있긴한데,
형식상, 왕위를 아들에게 양위한 부분도 있구요.

충혜왕 퇴위는  그분이 워낙 개막장이라 -.-
고려의 권문세족들까지 나서서, 저런 싸이코가 왕이라니!
쫒겨나는걸 반기기도 하고, 백성들도 만세를 부르는 시츄레이션을 연출하기도 했죠;;

충정왕에서 공민왕으로 바뀔때도, 충정왕이 어려서 정치를 잘 못하니까
고려 내부에서 먼저 왕 바꿔야 한다고 들고 일어나서 바꾼겁니다.
어린 충정왕보다, 숙부 강릉대군(공민왕 19세)가 더 낫다는 고려의 여론을
원에서도 정동행성이문소를 통해 수렴이 되어, 왕이 바뀌었죠.

덧붙여, 기황후가 공민왕한테 복수한다고 덕흥군 밀어줬다가 개쪽당한 부분이 있는데.
그건, 순전히 기황후의 무리수였던거고-.-;;

왠만하면, 원도 고려에서 반대가 심한데, 막 바꾸거나 한건 아닙니다.

야심많은 심왕 왕고가 사촌인 충숙왕 밀어내고
지가 고려왕 되겠다고 길길히 날뛰었으나,

고려 대신들이 - 우린 충숙왕 전하 편입니다!- 충성맹세해서 좌절된 적도 있고요.

사실, 원도 고려가 이리 강경하게 나오면, 뭐라고 못하죠. 명분도 없고..
그래서, 명분없이 덕흥군 밀어주던 기황후도 나가리 신세가 된거지만..
          
mymiky 16-01-06 17:29
   
고려의 모든 국정권한이 몽골에게 넘어갔기에?
자치권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고려는 하나하나 몽골관리의 통제를 받았습니다?

 {고려 각지와 수도에 몽골관리와 총독 다루가치가 들어가 고려를 통치하였는데
이게 과연 자주권과 독립성을 가진 자주독립국가라 부를수있을까요?}

이 부분은 정말 황당한 말입니다;;

고려가 원과 강화하면서,
제일 중요한게 생각한 부분이

-왕실과 고려국체를 지켜내는 것-을 가장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다루가치 운운이 나오는데,
이 무슨 일제시대 일본총독이 총독부에서 조선을 다스린양 쓰시는지 -.-?

[엄밀히 말해, 이 부분이 일제시대와 차이가 제일 크게 나는 부분인데 말이죠;;]

고려가 부마국이 되기로 한 까닭도,

고려에 호의적인 쿠빌라이가 죽은뒤, 그의 후손들인 다른 황제들은
고려에 계속 호의를 보내줄지 말지? 불확실하다는게 이유였습니다.

그럴바에는, 확실한 관계로 묶어두는 편이 고려에게도 이익이 되겠다는 판단하에
양국이 정략결혼이라는, 동맹중에 결혼동맹이 최고였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고로, 부마국이 된 이후, 쿠빌라이는 고려는 계속 고려왕실이 통치하게 했고,
자연스럽게 다루가치는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대몽항쟁기에 고려본토에 주둔했던 몽골군과 다루가치들도 귀국하기로 했구요.

이후, 사신으로, 다루가치가 오는건 있는데,
고려를 직접 통치를 위한 행정관으로써 오는 다루가치는 없습니다.

그리고, 다루가치보다 고려왕이 신분이 더 높았어요.

다루가치는 걍. 몽골귀족일뿐이지만,
고려왕은 본인 스스로가 부마왕으로 고려의 왕족이자, 원의 황족 신분으로 이중 작위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다루가치 따위가 나대다간, 국물도 못 건집니다 -.-
               
흑요석 16-01-06 23:34
   
마이미키님의 동아시아 역사 지식의 깊이에는 항상 감탄하면서 읽습니다. 이 많은 게 다 머리속에 계시다니 허얼...

암튼 또 잘 읽고 갑니다. 동아게에서 활동 좀 활발하게 해주세염 ㅋㅋㅋㅋ

몽골-고려의 관계와 일제시대 조선-일본의 관계는 비교 불가군요...

일본 개객기들 -_-
                    
mymiky 16-01-07 01:45
   
고려 후기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당시 몽골제국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일수밖에 없습니다.

고려와 몽골족이 처음 마주치게 된  1218년(고종 5년)부터 시작하면 약 150년.

몽골과의 강화 협상이 이뤄진 1259년부터 공민왕의 반원운동이 성공한 1356년까지 보면 약 100년의 시기를 한국사학계에서는 원간섭기-라고 부르는데,

이 동안에, 여몽관계는 보기에 따라,
여러 다양한 면이 함께 공존하고 있지요.

책봉- 조공관계( 중화적인 부분)
우리 왕조가, 그간 중국 왕조들과 맺은 익숙한 시스템을 따르면서도,

한편으론, 국왕의 친조(親朝)나 왕실통혼이 있었고,
이를 부마국이라 일컬어지며

앞서 말했듯이
중화적인 부분과,
몽골적인 부분의 영향이 골고루 나타납니다.

고려는 원제국의 동쪽 방어를 맡아, 일본정벌에 나서기도 했으며,
동북(현 만주일대) 몽골 제후왕들인 동방왕가를 견제하는 역활도 했습니다.

학계에서는,

원간섭기 고려왕을
몽골황실의 일원(부마, 쿠레겐)/ 원나라 정부의 고급관료/ 독자적인 왕국의 군주로써 상당히 다면적인 속성을 함께 띤 존재로 규정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충선왕의 경우,
고려국왕+ 요양의 심왕+정동행성 승상+원나라 내무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태자태부(원 태자의 스승)

걍. 할수 있는건 다 해보신듯?

고려사회,문화적인 영향으로는
교초를 가지고, 저기 멀리 일칸국과 교역도 하였고,
티벳불교가 고려사회에 널리 퍼지기도 하던 시대기도 한데,

모든게, 동서로 뻗어간 팍스 몽골리카의 영향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겁니다.

물론, 유목민족이라 경제에 대한 개념이 개망이고, 유교식 적장자제를
채택하지 않아, 왕위쟁탈로 짧게 말아먹은 원나라기도 하지만요ㅋ;;;

전, 타임머신이 있어, 고려말에 살라고 하면 못 살았을거 같습니다만? -.- 하핫..

(부원배들한테 땅 뺏기면 억울해서 못 살거 같고,  고려말 흉흉했던 왜구들은
또 어쩔것임? ㅜㅜ)

그래도,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여말선초 시기는 항상 흥미진진 하더군요.

난세에 인물이 많이 나오는 법이라서 그런가?
그래서, 드라마도 여말선초 배경이 많은 것이 아닐런지요? ㅋㅋㅋ
                         
흑요석 16-01-07 20:36
   
님 글 진짜 재밌게 잘 쓰시는 듯 -_-

님 댓글이 제일 흥미진진하고 재밌어요 ㅋㅋㅋㅋ

팍스 몽골리아가 대단하긴 했지만 너무 짧았죠..

저도 마이미키님처럼 고려말에 살라고 하면 절대 못 살 것 같네요 ㅋㅋ 차라리 임진왜란 때 살면 몰라도 ㅋㅋㅋㅋ

역사시간이 재밌으셨으니 역사 지식도 싶으신 듯~ 전 지금은 역사에 나름 흥미를 가지고 공부하려고 하는데 학창시절 땐 진짜 역사는 거들떠도 안 봤네요 ㅋㅋㅋㅋ
 
 
Total 5,275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334 [한국사] 밑에 왕후장상님이 올린 글이네요. (2) 아날로그 06-22 1648
333 [한국사] 조선 수군은 패배할 것이다. (23) 왕후장상 06-21 3149
332 [한국사] 조공무역으로 강성했던 시기와 쇠퇴하던 시기의 기… (17) 아스카라스 06-21 1593
331 [한국사] josun will fall down (3) 왕후장상 06-21 1852
330 [한국사] 백성 모두가 군자가 되어사는 대동의 세상을 만들자 (4) 왕후장상 06-20 2073
329 [한국사] 조선이 쇠퇴의 길을 걷게된것은 이질문화 금지령 때… (6) 왕후장상 06-20 1906
328 [한국사] 한국이 물부족국가이면서 물부족을 안느끼는 이유 (27) 객관자 06-20 4743
327 [한국사] 티벳인의 O3하플로와 한국인 O3하플로의 비교 (3) 비좀와라 06-20 4291
326 [한국사] 고조선의 후예.. (8) 고독한늑대 06-19 3651
325 [한국사]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역사 (3) gjzehfdl 06-19 2898
324 [한국사] 근데 사실상 고조선의 직계 후예는 부여 고구려 백제… (10) 베재어 06-19 3208
323 [한국사] 북핵이 위협 입니까? (4) 현리전투 06-17 1323
322 [한국사] 유럽학자들, 훈족의 원류로 신라, 가야를 지목하다 (22) 펀치 06-16 6698
321 [한국사] 왜 우린 흉노족과 맞짱은 커녕 기록 자체가 전무한가… (7) 아스카라스 06-16 4178
320 [한국사] 고려의 무신정권이 만약 붕괴하지 않았다면? (3) 허브민트 06-15 2337
319 [한국사] [퍼옴]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1) 객관자 06-14 1542
318 [한국사]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 고려 충선왕 (4) 허브민트 06-14 2899
317 [한국사] 고구려 연개소문 vs 고려 최충헌 (9) 허브민트 06-14 1999
316 [한국사] 막상 외국나가면 한국인은 몽골인보단 (6) 베재어 06-14 3632
315 [한국사] 우리 역사 혹은 신화시대에 관한 잡다한 생각들 (7) 관심병자 06-13 1628
314 [한국사] 대한은 서자 단군[君]의 죠션이 아니라. 장자국 됴션[… (2) 텬도대한 06-13 1388
313 [한국사] 대한은 성상제[HOLLY GOD]의 나라다. 대왕대비, 대비, 왕… (2) 텬도대한 06-13 1124
312 [한국사] 조선은 황인종이 아닌 백인종의 역사다. 출전 규원사… (24) 텬도대한 06-13 4521
311 [한국사] 대한에서는 단 한번도 용을 임금의 상징으로 사용한 … (3) 텬도대한 06-13 1930
310 [한국사] 대한의 수도이름은 경성[京城]이다. 한자문화권 유일… (13) 텬도대한 06-13 2782
309 [한국사] 나라의 역사가 주작됬다고 하닌 이유는, 송두리째 주… (2) 텬도대한 06-13 1359
308 [한국사] 고려라는 이름의 의미, 하늘의 고운 광명이 지상에 … 텬도대한 06-13 2286
 <  181  182  183  184  185  186  187  188  189  1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