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즉위, 본즉위는 말도 안되는 억측입니다. 님이 든 단편적인 추측 말고 제대로 된 근거를 가져와 보세요.
- 백제본기 近肖古王 24年, 冬十一月, 大閱於<漢水>南, 旗幟皆用黃. (한수 남쪽에서 대열병을 하는데 모두 황색기를 사용하였다)
바로 깃발을 통일하는 것입니다. 중세 일본 전쟁영화를 보면 다들 깃발을 휘날리고 또 가지고 다니는데 우리가 보면 참 이상합니다. 일본은 이것을 계승한 것입니다.
--> 이 기록이 의미하는 것은 깃발을 통일했다는 것이 아니라, 근초고왕이 황색기 즉, 황제와 같은 깃발을 사용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황색은 중앙을 상징하는 색이기 때문에 근초고왕은 백제가 세상의 중심임을 선언했던 겁니다.
근초고왕은 성씨를 부여씨로 삼을 정도로 부여의 기마민족 기질이 강했던 왕입니다.
"근초고왕 24년(369년)에 왕이 태자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태자는 곧장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군을 재빨리 공격하여 깨뜨리고...잡은 포로들을 장군과 병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는 친정과 약탈, 반사를 행하는 유목형 군주들의 군사행동이며
개로왕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올린 표에 " 우현왕 여기, 좌현왕 여곤..." 이라고 해서 백제 부여씨 왕조에 좌우현왕 제도가 백제에 있었는데, 이 또한 북방유목민족 통일 군주의 하부조직 제도입니다.
후한서 흉노전에 "그 대신은 가장 높은 자가 좌현왕이고, 다음이 좌곡려왕, 다음이 우현왕..."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근초고왕 당시 백제가 진왕 체제의 굴레(본즉위)에 허덕이던 나라가 아니라 얼마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이고 세상의 중심 황제국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나라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 근구수왕이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북진을 명령하는데 병사들이 안 갑니다. ‘당신이나 가시요.’ 입니다. 왕이 직속군대가 없는데 어떻게 갑니까? 신라였으면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진격할 것입니다.
--> 당시 백제는 고구려에게 대등한 군사력을 지니고 승전도 자주 했는데, 이런 오합지졸 군대가 어떻게 고구려를 이깁니까?
당시 고구려 군인이던 사시가 근구수에게 귀뜸을 해 주는데,
그 내용은 고구려의 군사가 겉으로 보기에는 많은 듯하나 숫자만 채운 가짜 병사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남침이 원래 의도가 아니라 성동격서, 즉 남침을 가장한 남옥저(광개토대왕 비문의 동부여) 공격이 주목적이었던 겁니다.
백제와 고구려는 진왕 체제 때문이 아니라 남옥저의 주도권을 위해 전쟁을 벌였던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