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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1-14 22:47
[한국사] 부례구야국의 동진·설화·관모와 부여의 기원 (6부)
 글쓴이 : 비좀와라
조회 : 2,550  

부례구야국의 동진·설화·관모와 부여의 기원 (6부)
 
심제 이진우 박사  기사입력  2015/01/24 [19:33]


ⅰ) 부례구야국(不例拘邪,프리기아)의 동진과 설화 

  기원전 20-15C 지구적 기후변화로 인해 동아시아 요서 지역에서 하가점 하층문화가 막을 내리고 융족(戎族)계열이 주도하는 하가점 상층문화가 발생하는 시기에 요서 지방에는 강수량 부족과 한랭화의 영향으로 숲과 관목지대가 초원으로 변하여 농사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 지역에 정주하던 은(殷)족은 중원지방으로 내려가 상(商)왕조를 일으키는 시기와 맞물려 소아시아 및 지중해 지역에서도 가뭄과 한랭화로 인하여 반농-반유목(seminomad)을 하던 종족들은 전투적 유목민화하고 그중 스키타이(Scythia) 일부가 기원전 8C경 카스피해에서 흑해 북안(北岸)으로 이동하였다. 

이 지역 원주민이던 킴메르(Cimmer)가 쫓겨나면서, 소아시아에서 이미 멸망한 히타이트제국(帝國)의 공백을 메우며 철기문명 영향으로 번영하던 부례구야(不例拘邪,Phrygia)를 공격하자, 기원전 7C초 이들은 수도 고르디온을 버리고 일찌기 형성된 청동기 전파 루트를 따라 박트리아(大夏)지방과 더 동쪽인 신강지방으로 탈출과 동진(東進)을 감행한 것으로 추정 된다. 

   부례구야(不例拘邪, Phrygia)는 기원전 16-14C경 이란계 주민이 설립한 고대국가로 알려져 있으며 미타국(米它國) 혹은 미타니국으로 불렸고 히타이트제국(帝國)이 멸망한 지역에서 발생한 나라로 종교적으로 조로아스터교(拜火敎)를 신봉하였다. 초기에는 지역적으로 히타이트 문명의 수혜를 받아 철기와 농경문화를 향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청동전차와 청동기 전파 루트는 일치한다. (http://www.waa.ox.ac.uk)                                © 편집부

    이러한 역사를 개괄해 보면 기원전 6C 이전의 기록으로 여겨지는 『관자』에 기록된 발조선과 『사기』 및 『조선상고사』등에 기록된 부여의 활동시기인 기원전 6-5C는 동서양의 사서 기록으로 비교해 보면 시간적으로 유의차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부례구야(不例拘邪)는 어떠한 이유로 최종적으로 동아시아의 북쪽지방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진·한 시대에 개척된 것으로 알려진 실크로드 훨씬 이전에 동·서방 민족 간의 이동로와 무역통로로서 청동기 루트가 개척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아시아에서 중국 서안 지방 등에 이르는 그 중간지점에 신강(新疆) 위구르 지역이 위치하고, 이 지역에서는 이미 기원전 20C이전에 유럽계(Europoid)와 몽골계(Mongoloid)의 인류·문화적 교류가 일어났다고 보고되고 있다. 

지리적으로 본다면 알타이 남부를 지나 고비사막과 몽골고원을 통과하여 요서 지방 및 요하 평원에 이르는 동북 이동로를 통해 요하문명과 다른 한편으로 카자크스탄 남부 초원을 지나 녕하 지역으로 진입하여 내몽골과 산서, 섬서의 경계인 西河를 따라 황하중류에 도달하여 중원지역으로 진입하여 황하문명을 건설한 것으로 고찰된다. 

  이러한 고고학적 사실로 미루어 보면 부례구야(不例拘邪)인들 역시 발달된 청동-철기문화를 소유하고 천산북로(天山北路)와 유사한 루트를 이용하여 이미 발달된 전차(戰車) 등을 이용하여 빠른 시간 안에 동북지방으로 진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삼국지』부여전 위략의 내용에서 부여의 기로(耆老)와 부여왕이 구전하는 망명인(亡命人) 의미는 기원전 690년 부례구야(不例拘邪,프리기아)의 왕족 혹은 귀족들이 선진적 철기문화를 가지고 동방으로 망명길에 오른 사건을 일컫는 기록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우리나라 고대설화 속에서 신라 48대 경문왕(景文王)과 관련된 「임금님은 당나귀 귀」와 같은 내용의 설화가 부례구야(不例拘邪) 즉, 프리기아의 미다스왕(Midas)의 설화와 동일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약 이천여 년을 뛰어넘는 시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라와 부례구야(不例拘邪) 사이에 문화적 관계설정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이 밖에, 고대 아나톨리아 지방인 터키에서는 거대한 적석목곽무덤(Kurgan)안에 존재하던 미다스의 목곽(木槨) 안에서 그의 추정 유골과 흉노유물의 대명사로 불리는 동복(銅鍑) 그리고 황금장신구 등이 발굴되었다. 이는 소위 시기적으로 흉노의 시초이자 스키타이 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사실로서,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에 기록된 부여인에 대한 습속과 외모(外貌) 관련 기사에서 “거칠고 크며(粗大) 용감하다”는 기록은 북방계뿐만 아니라 인종적으로 서양계와 혼혈 관련성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실크로드 상 타림분지 등에서 발굴된 수 천년된 미이라의 평균 신장이 1미터 80센티미터 이상인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한국인의 체질인류학적 분석자료에 의하면 두개골의 형태에서는 지역적으로 가까운 중국, 일본인 보다 카자크스탄인, 몽골인과 가장 근접한 결과를 보인다. 이로서 부여에서 파생된 고구려, 백제, 신라계의 후손인 현대 한국인들의 북방적 요소를 고고인류학적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ⅱ) 부례구야국(不例拘邪) 유래 冠帽

 『삼국지』 변진전에 의하면 진국(辰國)과 동일하게 신지(臣智)라는 수장을 두고 그 다음 품계를 험측이라 하는데, 진국의 두 번째 관직명 읍차가 변진에서는 하위 품계로 변화가 있지만 변진국(弁辰國)의 벼슬체계 역시 진국과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부여국과 동일하게 변진의 사람들도 체격이 큰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유전학적으로 동일계통의 사람들로 미루어 짐작된다. 진국과 변진(弁辰)국 등의 국가명으로 고찰할 때, 고깔 변(弁)과 관련 있음을 암시적으로 나타낸다고 짐작된다.

변진의 의속(衣俗)과 관련하여 『신당서』와 『한원』등의 기록에는 고구려 대가(大加)는 뒤 없는 모자에 소가(小加)는 절풍변 (折風弁)을 썼고, 귀족과 왕은 금으로 된 절풍과 조우관을 썼으며 백제 또한 조우관을 착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증명하는 고고학적 자료로서 경주 천마총의 유물로 금제 절풍(折風)과 입식관모가 발굴되었는데,

「양직공도」에 그려진 백제와 고구려 사신의 절풍과 천마총 발굴된 금제 절풍간의 변형 형태를 보여주어 이를 연대적으로 추정해보면 기원전으로부터 이미 소아시아의 부례구야(不例拘邪,Phrygia)로부터 습속된 모자의 변형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변형된 형태의 관모 등의 기원이 동북아보다 서쪽으로 진출할수록 발굴되는 유물의 연대가 오래된 것이 발굴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신강 롭누르(Lopnur)등에서 발굴된 수천 년 전 유럽계 인종(Europoid)이 착용했던 모자는 양털을 가공하여 천으로 직조한 펠트(Felt)를 재료로 하여 고원의 추위와 바람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반목 혹은 유목형태의 생활풍습에 맞도록 환경과 문화에 습합된 유물로 보이는바, 이러한 형태의 모자 또한 현재 신강성 등 위구르족(동투르케스탄)의 전통 모자에서 또한 볼 수 있어 문화 이동의 중간 지점이 이 지역에 있었음을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  


▲ 신강 롭누르 발굴 펠트 모자와 천마총 금동제 절풍                                                                             © 편집부

 Ⅵ. 맺음말 

  부여의 기원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술은 『고기』의 내용을 취했지만 이보다 앞서 저작된 중국의 사서를 참고하여 북·동부여 개국과 관련된 신화형식으로 간결하게 묘사하였고, 『삼국사기』에는 무력한 부여의 모습이 기술되어 있다. 중국 사서에서 부여라는 국가명이 나오는 최초 기록은 『사기』화식열전으로 부여가 연나라 북쪽에 있음을 기록했다. 또한,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된 부여 관련 기록은 『관자』의 발조선으로 발(發)은 부여를 나타내는 여러 이칭 중에 하나로 고조선과 연합된 형태의 부여로 판단되며, 관자의 저술 시기를 기원전 6세기로 보면 이미 부여는 그 이전에 존재하던 국가로 추정된다. 

조선과 병립했던 부여국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으로,『관자』 소문편에 제와 고죽 그리고 부여간의 위치, 『제태공세가』에 기록된 제나라 위치, 그리고 「중국사회과학원지도」 등을 종합하면, 부여는 고죽국 북쪽에 그리고 그의 남쪽에 제나라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대청광여도」 등에 근거한 지리비정 결과 제는 하남에, 고죽은 산서 남단, 그리고 그 북쪽에 부여가 있었음이 증명된다. 부여의 도읍은 사서와 신채호의 추정 근거에 의하여 산서 북부지역인 대(代)지역으로 보인다. 
 
   한국 고대어의 언어계통 고찰에 의하면 고대 삼국 등 역시 터키계 언어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는데, 일례로 『단기고사』 서문에는 돌궐에서 역사를 찾은 기록을 보면, 발해 동조(同祖) 고구려 역시 터키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터키계어를 사용한 위만조선의 급변으로 인해 재상과 백성들이 망명한 진국(辰國)의 언어 역시 터키계 언어로 볼 수 있다. 

동일 언어계통은 문화적 정치적으로 예속되어 있지 않으면 체계적인 어휘군은 좀처럼 교체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미루어 언어계통이 같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현상으로 보인다. 이로서 고대국가에 언어적 영향을 준 터키계어의 연원 추적에 『삼국지』부여조에서 기로들 스스로 망명인(亡人) 이라는 기록이 핵심으로 판단된다.
 
부여족의 망명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한전 진국(辰國)조의 옛진왕(古辰王) 관련 기록인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구절에서, 부례구야라는 단어가 부여와 연관된 국가명임을 찾아낼 수 있다. 한어음차인 부례구야(不例拘邪)는 기원전 7세기경 소아시아에서 탈출하여 철기문화를 보유하고 동진한 터키어를 사용하는 프리기아(Phrygia)인들로 추정된다. 즉, 그 망명인이 기원전 6세기경 중국기록에 발(發)조선국으로 등장하고, 3세기에는 『삼국지』에서 망명인(亡人)으로 기록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시공간을 넘어 신라 경문왕과 미다스왕의 「당나귀 귀」 설화는 문화적 일치성을 설명하는데 충분하며, 아울러 고구려 신라 백제 등에서 복식화 된 절풍과 관모 형태는 연원적으로 부례구야(不例拘邪,Phrygia)에서 진국(辰國)의 일파인 변한(弁韓)에 전달되고 시기적으로 삼국에 변형된 형태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체질인류학 연구결과 한국인의 두개골지수와 카자크스탄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것은 그 지역이 고대 민족이동경로의 중간지점으로 상기 결론의 내용들을 뒷받침 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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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좀와라 15-11-14 22:56
   
지금 부여의 기원을 프리기아로 보는 학설이 많은 지지를 받고 있지요. 거기다가 신라의 다른이름이 계림으로 카파도키아를 초기신라 지역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프리기아는 헤파이토스(불칸/발칸)의 후손이 세운나라고 최초의 유럽인이라고 불리는 종족입니다. 프리기아에서 프리가 불이란 뜻으로 페르시아의 페르가  불이란 뜻과 같은 의미입니다. 프리기아에서 프리덤/프리라는 단어가 나왔고 헤파이토스의 부인이 아프로디테로 프랑스가 미국에 보낸 자유의 여신상은 아프로디테의 여신상입니다.

그럼 부여족은 백인종 일까요? 아닐까요? 부여의 적통후예인 한국인의 원래 인종은 무엇 일까요?
저는 한국인은 백인종과 몽골인종의 혼혈인종으로 보는데요.
밥밥c 15-11-14 23:47
   
이진우박사가 말하는 부여의 위치는 산서성 태원입니다 ;;;

 현재의 한반도와는 꽤 떨어져있죠.

 이것이 오리지널 환빠이론이죠 ^^;;
     
세끈한펭귄 15-11-15 00:40
   
그러는 님은 오리지널 일빠라 말할 수 있겠군요 ㅎㅎ
반박을 못하고, 트집만 잡으니까요.
밥밥c 15-11-15 00:44
   
바탕에 깔려있는 이론은 꽤 충격적일정도로 많죠.

 현재 25사지리지 분석하는 강단사학자 단 한명도 없는데 , 이것은 실제 지명을 하나하나 분석 대입한 이후

 거리 확인한 다음 , 시뮬레이션처럼 지명이동에 대해서 계산해서 나온겁니다.
밥밥c 15-11-15 01:16
   
즉, 지명을 역추적방식으로 하나하나 쫒아서 조사, 분석한 것입니다.

 물론 현장의 지형확인 , 유적지, 그리고 그 지역의 지역지지명이 일치하고 있는가를 우선으로 하는 것이죠.

 생각보다 꽤 오래걸려 만든 것 입니다.

  혹시 상단 한씨(韓) 들어보셨나요?

  그에 대한 분석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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