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비의 그림.( 블로그에서 사진인용)
금나라는 왜 북송의 수도라고 알려진 개봉까지 진주했을까? 송나라 악비는 본 하북인.
금나라의 마지막 남은 일족이 한 조금한 성에 갇혀서 몽골과 혈전을 벌이니 무려 3년간이나 버티어 내다가 마지막 황제가 먼저 xx하고 그 후에 장군마저 xx하고 나중에 모든 여진의 전사들이 xx하고 나서야 몽골은 그 성을 장악할 수가 있었다.
금나라가 그 3대 황제 해릉왕 때에 지금의 북경인 연경으로 나라를 옮길때 한 일파가 만주 땅을 떠나면 여진이 망하는 것이라 주장하면서, 황제를 따라가지 아니하니 해릉왕은 괘씸하게 여기나 그 뜻을 존중하여 그들을 남기고 연경으로 떠났다.
해릉왕은 송나라를 멸하려 하다가 4대 세종이 해릉왕을 폐하므로 쫒겨 다니다가 자기 부장에게 살해되었고 금나라는 그 세종 황제 때에 최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가 서서히 쇠락해 갔다.
몽골이 성장하여 몽골 민족의 최대 숙원인 금나라 침략을 시작하였는데 무카리로 하여금 금나라의 발상지인 만주지역 마져 쓸어버리게 하니 금나라에게 도망갈 곳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먼저 요동과 요서의 거란의 일족을 꼬드겨 지금의 만주와 금나라의 연경을 차단시키고, 무카리로 하여금 만주로 진격시키니 금나라는 나라가 세 개로 쪼개져 차례로 파괴되었다.
만주 지역의 여진족들은 조상들처럼 산악 지형으로 도주하였는데 몽골인들은 원래 고원의 유목민이어서 거란인과 다르므로 여진족들은 더 이상 도주하지 못하고 나와 항복하니 몽골인들은 역시 여진과 원수인 거란인이 아니므로, 여진인에게 표를 주고 몽골군에 합류시켰다.
몽골군은 당시에 금나라 정벌 중이므로 만주의 여진족들은 동쪽의 경계에 머물게 하고 나중에 거란이 반란을 일으킬 때, 이 여진족이 몽골을 도와 거란의 잔적을 쫒아 고려까지 추격하였다. 금나라가 몽골에게 쫒겨 개봉으로 나라를 옮겼다가 개봉이 몽골에게 망하자 그 중 한명의 황족이 몽골에게 잡혔는데 금나라 황제의 금패를 가슴에 숨기고 몽골로 압송되는 도중에 탈출하여 만주로 달아났다.
그가 만주에 도착하여 자기 부족에게 이르니 부족들은 울면서 이 사람을 맞아 들여 자기 부족의 대인으로 섬겼고 그 후 100여년이 흐른 시기에 그의 후손이 바로 이 이지란이다.
이지란의 본명은 퉁두란(豆蘭) 몽골식 이름은 쿠룬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아버지는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로 금패란 그가 금나라 완안씨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는 남송 악비(岳飛)의 6대손으로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의 아들이다.
나중에 퉁두란의 종형제의 가계에서 청 황실이 나왔으니 퉁두란의 청해 이씨 집안은 청나라 가계와도 이어진다. 그는 원래 "퉁두란"으로 불리다가 1371년(공민왕 20)에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하여 북청에서 거주하며, 이씨 성과 청해를 본관으로 하사 받게 된다.
그래서 이름이 "이두란(李豆蘭)" 또는 “이지란(李之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퉁두란은 이성계와 안다 관계였는데 원래 안다란 것은 10여세의 아이가 서로의 중요한 장난감을 교환하고 영원한 동지가 되는 것으로 이성계와 퉁두란이 이미 어릴 적에 이미 만난 적이 있음을 의미한다.
퉁두란이 안다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이성계를 따라 고려로 귀화하니( 공민왕 20년 1371년) 퉁두란은 황산 전투에서 왜장 아기발도를 죽이는데 공을 세우게 된다.이성계를 따라 동분 서주하여 공을 세우고 심지어 같은 동족인 여진족에게도 칼을 돌렸으니 이성계를 따르는 퉁두란은 이성계이라는 사람에게 어느 만 큼 미쳐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성계가 퉁두란을 평하기를 ' 지란과 같이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쓰는 자는 우리 군에도 무수하게 많다 그러나 전투에 임하여 믿을 만한 이는 이지란 만한 이가 드물다!!'
태종 이방원은 퉁두란을 친 삼촌이라 불렀고 언제나 아버지를 거역할 때에는 이 퉁두란의 이름을 팔아 정통성을 삼으려 한 것이 역사에 무수하게 발견되니 이는 이 퉁두란이라는 자가 이성계에게 어떠한 위치의 인물인지를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나중에 태조가 그 아들 이방원으로 인하여 실각하게 되자 은거하여 산속으로 숨어 버리니 이성계라는 이에게 건 기대가 물거품이 된 것에 대한 실망이 실로 컸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종형제 몽거 티무르가 태조를 다시 왕위에 올리기 위하여 군사를 빼어 조선을 침공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성계는 당시 여진족이 꿈꾸는 대제국의 희망이었던 것 같다. (네이버 블로그 인용)
심제 주> 개국공신 퉁두란이 산속으로 숨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아버지 이성계에 대한 많은것을 알고있는 그에 대해 태종 이방원의 숙청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당기록을 올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어저께 경들이 성을 쌓자는 의논은 어찌 그리 겁약(㤼弱)한가? 일의 위급함이 도성을 수비하는 데에까지 이른다면 어떻게 하여서 나라를 구하겠는가? 무릇 물(物)에는 성쇠가 있으니, 황제가 부왕(父王)의 명이 아닌데도 스스로 즉위하여, 남쪽으로 교지(交趾)를 정복하고 북쪽으로 사막(沙漠)을 공격하는데, 무슨 겨를에 동쪽을 돌아볼 수 있겠는가? 과연 난국(難局)이 온다면 장차 거병(擧兵)하여 바로 쳐들어갈 것이지, 어찌 마땅히 성을 지키고 기다릴 것인가? 평양(平壤)과 의주(義州)의 성이 견고한 것 같지는 않으나, 우선
태종 13년 계사(1413,영락 11) > 7월26일 (계묘) >
하륜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을 공격하자는 내용도 있는데 찾지를 못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