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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1-02 12:53
[일본] 서양인의 눈으로 본 조선 수군
 글쓴이 : 막걸리한잔
조회 : 7,360  




417년 전인 1592년, 15만 여명의 일본군이 “명으로 가는 길을 빌리겠다"(假道入明)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전쟁을 맞이한 조선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기도 하나 수군과 의병 등의 활약에 힘입어 전세를 역전시키고 결국 일본군을 완전히 패주시키는데 성공한다.

전쟁은 7년 간이나 지속되며 조선의 기존 정치ㆍ경제ㆍ사회체계를 파괴한다. 이러한 임진왜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이 전쟁의 전 과정을 지켜보고 작성한 징비록(懲毖錄)이나 충무공 이순신이 기록한 난중일기(亂中日記)와 같이 당시대인의 문헌을 참고하는 방법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반대로 임진왜란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장수인 오제키가 쓴 전기인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 가토 기요마사의 종군승이었던 시탁(是琢)의 ‘조선일기’(朝鮮日記),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조선 이야기’(朝鮮記) 등 일본인들의 문헌을 통해 우리와는 사뭇 다른 그들의 시각을 살펴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본 임진왜란은 어떤 전쟁이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을 해주는 서적이 남아있다.임진왜란1.jpg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를 묘사한 "부산진 순절도"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는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이다. 그는 천주교 포교를 위해 1563년 일본으로 건너갔고,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다 1597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사망한다. 일본 내부 사정에 정통했던 루이스 프로이스는 ‘포르투갈령 동인도 역사’를 편찬하던 포르투갈의 국가적 사업에 따라 1549~1594년까지의 ‘일본사’를 편찬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안에 서양인의 눈으로 바라본 임진왜란의 발발원인, 전개, 일본군의 패배 원인 등이 상세하게 기술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 되었다.

그럼 그는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주도적 역할을 한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그(히데요시)는 키가 작고, 또한 추악한 용모의 소유자로서 한쪽 손의 손가락이 여섯 개인 육손이였다. … 가신뿐만이 아니라 국외자에 대해서도 극도로 오만했으므로 누구나 싫어했으며 그에 대해 증오심을 품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2003. 국립진주박물관 -

상당히 부정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임진왜란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 이 계획은 해상으로 군단을 파견하게 되어 있으나, 바다로부터 떨어진 내륙 지방에 사는 군후나 무장들은 선박도, 수부도, 항해에 필요한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 많은 사람이 가인이나 친밀한 사람과 담화를 할 때 “이토록 끝없는 고난을 무릅쓰고 외국 땅에 함께 죽음을 구하러 갈 정도라면 차라리 일본에서 xx하는 쪽이 낫다”고 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내어 말하였다. …

일본 내부적으로도 임진왜란에 대해 많은 반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전국시대를 거치며 혼란에 빠져있던 일본을 통일하고 스스로 태합(太閤)의 자리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위세에 아무도 반기를 들 수 없었고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전쟁을 앞두고 루이스 프로이스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으며,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을까?

조선인은 달단인이나 오랑캐들과도 자주 접촉하면서 그들에게 용감히 대항하였다. … 이 나라는 풍요하여 많은 쌀과 보리가 나고 과일로는 배.호두.무화과.밤.사과.잣, 그리고 무진장한 꿀, 약간의 비단, 다량의 면화와 베를 생산하고 있다. ...
 많은 말과 소, 양질의 노새,당나귀, 게다가 전 국토에 걸쳐 수많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그 밖에 갖가지 다양한 동물이 있다 … 그들이 만든 공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들이 솜씨가 좋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조선 군사에 대한 평을 보자.

사람들은 피부색이 하얗고 건강하고 대식가들이며 힘이 세다. 그들은 터키 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 밖의 무기는 위력이 없고, 특히 칼은 짧으며 그다지 쓸모가 없다. … 내륙 쪽에 있는 몇몇 성채는 방비가 충분치 않으나 일본과의 경계에 해당하는 해변 일대의 성채만은 방비가 견고하며, 그곳에는 보유 가능한 많은 양의 탄약을 쌓아 놓았다.

임진왜란 2 조선수군의 항진도.jpg

조선 수군의 항진도((航津圖)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조선 군사들의 무장과 사뭇 다른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 병사들은 단단한 가죽 갑옷을 착용하였고 유럽인의 모자와 같은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강철로 되어 있었고 그 밖에는 무쇠로 되어 있었다.

임진왜란3.jpg

당시 이런 평을 바탕으로 아마도 ‘조선역해전도’(朝鮮役海戰圖) 에서와 같은 조선군의 무장이 그려진 듯 하다. 이 그림이 공개된 후 역사적 진위여부를 두고 다소간의 논쟁이 있었지만 물에서 전투를 해야하는 수군이 이렇게 무거운 갑옷을 착용하면 활동성면에서 큰 제약을 받기 때문에 후세 일본인의 과장으로 봐야할 것이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전쟁의 초기 진행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묘사한다. 조선의 육군은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하며 쉽사리 서울까지 내어준다. 일본군은 빠른 속도로 진격을 해나가지만 제1진의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보급 문제로 고민에 빠진다.

… 대원정을 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필요한 식량 및 모든 군수품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며 … 나의 계획으로는 서울은 바다에 가까이 위치해 있고 강을 1리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다다를 수 있기 때문에, 해상으로 식량을 수송하고 부근을 흐르는 강을 통해서 서쪽으로부터 서울을 포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하겠다. …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원활한 보급을 위해 수륙병진작전을 계획한 것이다. 하지만 거침없이 진군하던 일본군은 바로 여기서 커다란 장애물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었다.

… 일본군이 부딪친 난관은 조선군이 서로 단결하여서 연합군을 편성, 수많은 배에 승선하여 공격해 온 사실이었다. 조선군은 일본군보다도 해전에 훨씬 익숙했기 때문에 일본군에게 많은 손해를 입혔는데, 이러한 일본군의 재난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판옥선.jpg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板屋船)

그리고 이어서 조선 수군과 일본군의 첫 번째 해전(옥포해전)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 이전부터 조선인은 일본 배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조우하자 큰 소리를 지르고 기뻐하며 배를 몰아 일본의 함대를 공격했다. 조선의 선박은 높고 튼튼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본 배를 압도하였다. 우선 조선 수군 쪽에서 화기에 의한 공격이 있었는데, 이것이 일본인을 몹시 애먹이고 괴롭혔기 때문에, 일본인은 조선인들의 이 성가신 접근 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바다 쪽으로 멀리 나아가는 전술로 응전했다. … 이 싸움에서 조선인들은 70척의 일본 배를 빼앗고 병사 대부분을 살해하였다. 나머지 병사들은 겨우 목숨만 건지고서 도망쳤다.

80321.jpg

돌격선인 거북선 / 사천포해전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옥포해전은 충무공 이순신과 원균이 연합하여 판옥선 27척 등의 함대를 이끌고 도도 다카도라가 지휘하는 일본 함대 50여 척을 맞아 승리한 전투이다. 해전의 전개과정이나 조선 수군의 공격 전술 등을 살펴볼 때 상당한 신빙성을 가진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 수군에게 연전연패하는 일본군을 보며 루이스 프로이스는 어떤 평가를 내릴까? 대답은 간단하다.

여타의 많은 일들을 열거하는 것은 그만두겠는데, 일본군은 해전에 대한 지식이 너무 짧고 적을 격퇴하기 위한 화기가 부족하여 바다에서는 언제나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임진왜란4.jpg

조선 수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일본군

루이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에 직접 종군한 선교사는 아니다. 그는 일본 내에 머무르며 간접적으로 접한 소식을 통해 이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천주교도였던 고니시 유키나가 등 유력 영주들과의 관계,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권력자와의 친분 등을 고려했을 때 루이스 프로이스는 전쟁을 주도하는 일본 권력층의 시선이 투영된 상당히 정확한 정보를 접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친 조선 수군은 전술, 전략, 함선, 무기 등 모든 면에서 일본군이 따라올 수 없는 당대 최고의 군이었다. 그리고 루이스 프로이스가 남긴 기록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당시 조선 수군을 이끌었던 인물이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 역시 당대 최고의 군사 지휘관이라 할 수 있다. 충무공 탄신일 464주년을 맞이한 오늘, 서양인의 시선을 통해 400여년전 조선 수군과 충무공 이순신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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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옹 15-11-02 13:30
   
본문에 "(전략) ... 수군이 이렇게 무거운 갑옷을 착용하면 활동성면에서 큰 제약을 받기 때문에
후세 일본인의 과장으로 봐야할 것이다. ... (후략)"
이 글의 글쓴이도 당연하다는 듯이 자국 비하를 하네요.

조선 수군은 조선군체계에서 유일한 상비군입니다.
당연히 중장갑. (육군이야 기동성의 문제로 설왕설래가 있다지만, 수군이야 안입을 이유가 없죠)

수많은 중국과 일본측 사료에 조선 수군의 갑옷이 그림과 함께 나오는데 (우리측 사료를 봐도 마찬가지고)
오직 한국인들만 '그럴리가 없어!!!' 를 부르짖으며 수군에게 포졸옷을 강요하네요...
     
막걸리한잔 15-11-02 14:07
   
그러게요.. 일본인의 상상이라고 치부하긴 너무나도 그림이 상세하다는거죠..
     
비좀와라 15-11-02 16:10
   
한국에 임진란때 수전의 기록화가 없고 기록도 부실합니다.

그럼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는 일본쪽 기록을 인정해서 해석해야 하는데 자신만의 생각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오투비 15-11-02 17:44
   
그렇다면 일본측에선 적에 대한 과장을 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높이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는 거네요.
               
세끈한펭귄 15-11-02 18:40
   
일본에선 진 전투를 과장해서 명예를 드높이는군요
보통 전쟁에서 승리하면 적을 매우 강한 존재로 드높여 승리를 과장하는데....
정말 부끄러운 민족인듯합니다.
               
막걸리한잔 15-11-02 18:52
   
역시 일본인들의 왜곡정신을 잘 아시는 분인가봐요 ㅋ
모든게 왜곡 소설인 니뽕..
하긴 뭐 일본인은 자기가 전생에 외계인이라서 세종대왕에게 한글을 만드는법을 알려줬다고 하는 사람이 있고 그 신도들도 많다는데 놀랍긴 하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패닉호랭이 15-11-02 16:09
   
두정갑은 필수입니다.사극은 돈이 없어서 모든배우에게 입히지 못하죠.
세끈한펭귄 15-11-02 18:29
   
수군의 갑옷같은 경우, 바다에 빠졌을 때 갑옷이 물에 불어서 물에 빠져죽거나, 활동에 큰 제약을 받습니다. 갑옷을 입은 경우도 있었겠지만, 이런 점을 고려해서 입히지 않았을 경우도 있었을껍니다. 그림에 갑옷으로 전부 중무장한 형태로 그려져있는데, 여러가지 그림으로 확인해 보아야합니다. 모든 그림이 저런 중무장인지 아닌지 말이죠. 임진왜란에서 조선과 일본의 수군의 대결은 조선이 승리자고 우위에 서있었습니다. 패배자인 일본의 경우, 자신의 패배를 조선의 수군의 모습을 높여 표현해서, 패배에 명분을 만들고, 명예를 지킬려했다는 점도 고려할만 합니다.
     
구름위하늘 15-11-02 18:38
   
그게 말도 안되는 상상이라는 것을 여러 사람들이 논증해주셨죠.
물에 빠진 후에 문제는 2차적이고,
물에 빠지기 전에 전투를 어떻게 했을 것인지를 생각하면 ....
          
세끈한펭귄 15-11-02 18:47
   
제 생각에는 당시 일본군의 공격 방식이 조총 사격과, 갈고리를 걸어 육박전을 했기 때문에 조총의 상대와 육박전을 위해선 중무장한 군대를 배 위에 주로 배치했을 것이고, 보급부대나, 노를 젓는 등의 적으로부터 거리가 떨어진 활동을 하는 경우가 주로 갑옷으로 무장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배에서 전투인력이 부족했을 때 이들이 전면에 투입되는 경우도 있었겠죠
다만 수군전의 경우, 대체적으로 이순신의 지휘 하에 있었고, 대부분의 전투에서 조선 수군함대가 침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대부분의 전투는 중무장한 부대가 담당했을 겁니다
     
구름위하늘 15-11-02 18:44
   
참고로 임진왜란의 작가인 김경진 씨의 관련글을 링크합니다.

http://ulanbatu.cafe24.com/zeroboard/zboard.php?id=imjin&page=1&sn1=&divpage=1&sn=off&ss=on&sc=off&keyword=%B0%A9%BF%CA&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863

사관은 논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에서 군관급 아래 일반 수졸들이 갑옷을 어느 정도 비율로 입었을까? 임란 5년 전인 1587년 3월 2일 정해왜변 직후에 경상도 암행어사 이정립이 ‘병력은 출동준비를 갖췄고 궁시, 총통도 확보했고 철갑과 철환이 부족하나 현재 만들고 있다’고 보고하는 실록 기사도 있고, 조선 전후기를 통틀어 두정갑 등 갑옷을 대량으로 제작한 기록이 종종 나오니 임란 당시 장수나 군관이 아닌 일반 수졸들도 상당수가 갑옷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명백히 상반되게 예나 지금이나 조선 군사들은 갑옷을 거의 입지 않는다는 실록 기사도 있으니 조선 수군이 100% 갑옷을 입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또한 임란 당시 전투가 아닌 조선 후기 수군의 훈련 상황을 그린 삼도수군조련전진도를 보면 상장의 전투원이나 하갑판의 격군이나 관계없이 대부분 장수와 병사들이 갑옷을 입지 않은 것으로 명백히 판별된다.
그런데 조선 후기 전선 1척과 사후선 1척을 운영했을 당시에 작성된 함평현 읍지에서 <수군기물 목록>에는 함평현이 수군용으로 철갑과 투구 50벌씩을 보유했다고 적혀 있다. <영암읍지> 진보鎭堡 편에는 당시 영암현 관할구역에 위치한 이진진과 어란진에 각각 철갑과 철 투구 47벌씩 비치돼 있다고 기록됐다. 어란만호진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을 운영하고, 이진만호진은 여기에 방선 1척이 더해졌는데도 철갑과 투구 보유량은 함평현보다 오히려 더 적다. 그런데 어란진은 피갑주皮甲冑, 즉 가죽찰갑으로 만든 갑옷과 투구 20벌을 추가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진도군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을 운영했는데 철갑과 철 투구 69벌에 종이로 만든 엄두, 엄심갑 각 4벌을 보유했다.
철갑 47벌에서 69벌이라면 판옥선 상장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수졸이나 병선 등 소형 함선, 혹은 사후선에서 노를 젓는 격군 대부분이 입을 수 있는 수량이다. 여기에 피갑주 20벌이나 엄심갑 등이 추가되면 기라졸과 사공 등 비전투원을 빼면 거의 100% 착용 가능한 셈이다. 참고로 판옥선 상장 안에서 충분히 보호받으며 노를 젓는 격군 같으면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
반면 함평현에 수군보다 육군 병력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육군기물 목록>에 기록된 철갑주는 7벌에 불과하다. 왜선에 비해 높은 상장과 여장, 그리고 방패판으로 충분한 방어력을 제공 받는 판옥선에서 싸우는 수군은 철갑을 입는데 적과 칼날을 직접 맞대는 육군은 갑옷을 입지 않는다는 모순된 결론에 도달한다. 여러 가지 연구할만한 소지가 많다.
이 문제를 해결해보자. 가야시대 판금갑옷은 통짜 쇠로 만들어졌는데, 엄청나게 무거워 보병이 입으면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학자들은 처음에 이것을 의식용이거나, 아니면 기병이 착용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나중에 이 판금갑옷은 보병이 성곽을 방어하면서 입은 것으로 결론이 났다. 조선 육군이 아닌 수군이 다른 갑옷도 아닌 철갑을 입는 것도 전투 중에 움직일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 아닐까?
화승총 등 개인용 화약무기가 발달한 이후 세계 모든 나라의 육군은 점차 갑옷을 버리게 된다. 총알을 막을 수 있는 갑옷은 거의 없고 혹시나 그런 갑옷을 만들더라도 너무나 무거워 차라리 갑옷을 안 입고 빨리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조선도 후기에 들어 육군은 무거운 철갑을 입지 않았고, 두정갑에서도 철 찰갑을 빼 갑옷이 단순한 유니폼으로 전락한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경제적 이유 외에도 화약무기가 발달하면서 갑옷의 효용성이 많이 떨어진 탓이다.
반면 수군은 육군에 비해 빨리 움직일 필요가 적고, 제자리에서 활이나 포를 쏘기만 하면 된다. 방어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테니 무거운 철갑도 입을만하다. 판옥선 상장에서 싸우는 수군은 성곽을 방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동할 필요성이 적기 때문에 철갑이 무거운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판단할 경우 상충되는 사료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사실 사관은 논한다 바로 밑에 나온 첫 번째 문단에 나온 여러 인용문들은 수군과 육군을 구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철갑이 충분하다, 즉 임란 5년 전에 철갑이 부족하나 만들고 있다는 실록 기사는 수군과 바닷가 고을 이야기였고, 조선군이 예나 지금이나 갑옷을 별로 입지 않는다는 실록 기사는 육군 이야기였다. 그러니 조선의 중앙군과 함경도 6진의 병사, 그리고 지방군 기병이나 보병 등 병종이나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육군은 대체로 두정갑, 면갑, 지갑紙甲 같은 비교적 가벼운 갑옷을 입거나 아예 입지 않은 반면, 수군은 판옥선 상장이나 소형 함선에서 활동하는 전투원 및 소형 함선 격군 대부분이 무거운 철갑을 입고 철 투구를 썼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 전후에 사용된 철갑이 어떤 종류의 갑옷인지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조선 중기나 후기의 여러 사료를 살펴보면 철갑은 단순히 철로 만든 일반적 갑옷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특별히 구분된 갑옷의 한 종류라는 식으로 기록됐다. 조끼 모양의 옷 안에 무쇠 통판을 덧댄 흉갑이나 조선 전기에서 중기까지 기록에 종종 등장하는 종이로 만든 엄심갑과는 확실히 다른 종류로 사료에 나온다.
<세종실록 오례의 군례서례>에 기록된 철갑에는 수은갑과 유엽갑 두 종류가 있다. 수은갑水銀甲은 별칭이 백철갑白鐵甲이었고, 쇠로 만든 미늘札에 수은을 덧칠하고 가죽으로 엮어 만든 찰갑이다. 삼국시대 찰갑과 만듦새가 비슷하며 빛을 반사해 번쩍번쩍 화려하다. 유엽갑은 수은갑처럼 쇠로 만든 미늘을 그을린 녹비로 엮어 검은 옻칠을 한 것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편 제5권> 부록을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두정갑은 철 찰갑 조각들이 옷 안쪽에 달려있는 반면 철갑은 철 찰갑이 바깥에 드러나 있고 또한 찰갑끼리 가죽으로 직접 연결됐다는 차이가 있다. 수은갑은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나가는 신립 장군에게 임금이 하사한 예나 국왕 호위병인 내금위가 착용한 사례로 볼 때 고급 갑옷이었다. 결국 수군 각 진포에서 보유한 철갑은 수은갑이 아니라 겉 칠만 달리한 유엽갑 혹은 유엽갑에서 개량된 좀 더 저렴한 갑옷으로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여러 읍지에 기록된 철갑 수량은 각 수군진포에서 자체 보유한 것이고 장수나 군관, 수졸들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것이 아니다. 정공청 장군이나 류성룡의 갑옷 유물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지휘관인 장수들과 신분이 높은 군관들은 개인 소유의 갑옷을 따로 입었다. 그러니 상장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수졸들에게 더 많은 몫이 돌아간다.
물론 임란 기간 중 수군이 크게 증강됐으므로 이와 동시에 철갑을 추가로 생산하더라도 소요를 맞췄을지는 약간 의문이다. 그러나 전시에 군수품 생산이 급증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임란 당시 수졸들이 착용할 철갑이 크게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아 원균이 수사를 맡은 경상우수영도 개전 직전인 3월 하순에 경상감사가 수영과 경상우수영 예하 19개 수군진포를 빠짐없이 돌며 검열했으니 최소한 개전 당일에는 철갑이 부족할 이유가 없다.
마지막으로 <난중일기> 임진년 3월 6일자를 인용한다.
<맑았다. 아침을 먹은 뒤 출근해 군 기물을 점검했다. 활, 갑옷, 투구, 통아, 환도가 깨지고 헐은 것이 많고 기준에 미달하는 것들이 매우 많았다. 색리, 궁장, 감고 등을 논죄했다. 晴. 朝食後出坐. 軍器點閱 弓甲兜鍪桶兒還刀 則多有破毁之物 不成樣者甚多 色吏弓匠監考等論罪.>
우리는 여기서 임진왜란 직전 전라좌수영에서 갑옷과 투구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난중일기>를 조금이라도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읽었을 만한 임진년 초반 기록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기록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갑옷을 입었느냐는 논제와 연결 짓는 경우가 없었다.
지금까지 여러 기록을 살펴봤다. 조선 전기에도, 후기에도, 그리고 임란 직전에도 수영과 수군 각 진영에서 갑옷을 보유했다. 그렇다면 조선 수군이 전투 중에 갑옷을 입었다는 소리지 그저 창고에 보관만 했겠는가?
결론을 내리자면 이렇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전투원 대부분이 갑옷, 특히 철갑을 입고 해전을 수행했고, 육군은 대부분이 벗고 뛰었다.
출처 : 김경진, 안병도, 윤민혁 공저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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