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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0-25 18:12
[일본] 한국과 일본 그 사이의 역사 1
 글쓴이 : 해달
조회 : 3,075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096752
이 책의 내용입니다.

일본과 조일수호조규를 맺은 조선


 1875년 9월 20일, 강화도 해협에 270톤의 일본 군함 운요호 출현. 강화도 해협은 조선 방위상 중요 지역. 운요호의 선원 수십 명이 허가도 받지 않은 채 보트를 타고 해안 측량하면서 조선 수군의 진지로 접근. 진지의 병사들이 정체불명의 배를 향해 경고 사격. 운요호는 보복 공격으로 조·선군 진지 파괴, 근처 영종도에 상륙하여 주민들 살상하고 대포와 화승총 등을 약탈. (운요호 사건, 강화도 사건)

 운요호 사건 발생 전, 부산에 있던 일본 외교관이 본국으로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해서는 군함 한두 척을 파견하여 무력으로 위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보냄. 덴노의 측근인 사사키 다카유키는 "강화도 사건은 일본에게 더 바랄 나위 없는 사건이며, 운요호의 이노우에 함장은 출발 전에 '조선이 먼저 발포해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라는 일기글을 남김.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 이는 1854년 미국이 군함과 대포를 앞세워 일본과 조약 체결을 강요한 방식과 동일.

 1876년 1월 일본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다시 군함 6척과 병력 300명을 파견. 그리고 국가 간에 조약을 맺어 항구를 개방하고 무역하는 것이 세계의 흐름이라며 조약 체결을 강하게 요구. 게다가 회담장 주변에서 함포 사격 훈련을 하는 등 무력 시위.

 

부국강병 정책을 실시한 메이지 정부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교육받은 노동자와 병사가 필요했기 때문에, 1872년 학교 교육제도를 마련해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소학교 교육을 받도록 함. 그러나 당시 교과서 구입비나 수업료는 학부모가 부담.

 1873년 정부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징병력을 실시. 징병력에 따라 20세 남성을 징병 검사와 추첨으로 선발해 3년간 상비군(현역병)에 편입. 그러나 병역 면제 규정이 있어 징병으로 뽑힌 군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가의 2남, 3남. 당시 사람들은 "징병·징역 한 글자 차이, 허리에는 칼과 쇠사슬"이라며 징병제에 대해 불만을 드러냄. 징병령 시행으로 일본은 4만 6천 명의 정규군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게 됨.

 1873년 일본 정부는 개혁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토지세 제도를 고침(지조개정). 토지 소유자에게 토지 소유를 증명한 '토지증서(지권)'를 발행하여 토지 가격의 3%를 세금으로 내도록 함. 

 부국강병을 위해 실시한 교육제도·징병령·지조개정 등의 세 가지 개혁을 일본 국민에게 큰 부담과 고통을 안김. 그리하여 전국 각지에서 개혁에 반대하는 운동 발생. 일본 정부는 운동을 진압하고 참가자들을 처벌하는 한편, 국민들의 불만을 누그러드리기 위해 토지세를 토지 가격의 2.5%로 인하.


새로운 외교 관계를 구축한 일본 정부


 당시 일본에서는 국민의 불만을 딴 곳으로 돌리고 국력을 기르기 위해 주변 국가를 침략해야 한다는 세력과 국내 개혁을 우서내야 한다는 세력이 대립. 그런데 징병제가 이루어지고 지조개정으로 국가 수입이 안정되자 대립하던 두 세력은 점차 침략을 추진하는 쪽으로 뜻을 같이함. 먼저, 류큐 왕국을 일본에 편입시키는 작업부터 시작. 당시 류큐 왕국은 실질적으로는 사쓰마 번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국제적으로는 하나의 독립 국가로서 중국와 책봉-조공 관계를 맺고 있었음. 1872년 메이지 정부는 류큐 왕국을 류큐 번으로 삼아 일본의 행정구역에 편입. 그리고 1879년에 무력을 위협하여 류큐 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 현으로 바꿈.


자유민권운동과 '대일본제국헌법'의 제정


 1870년대 일본에서는 서양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헌법을 제정하고, 국민의 대표기구인 국회를 열어 정치에 의견을 반영시키려는 자유민권운동이 일어남.

 자유민권운동은 처음에는 정부에 불만을 가진 사족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나 차츰 많은 사람에게 퍼져나감. 사람들은 각지에서 연설회나 집회를 열어 자신들이 바라는 헌법안을 스스로 만듬. 그러나 일본 정부는 신문 발행과 집회를 제한하며 자유민권운동을 탄압. 그래도 운동이 진정되지 않자, 1881년 메이지 정부는 10년 후에는 국회를 열 것이며 이를 위해 필요한 헌법은 덴노가 결정한다고 약속. 그리하여 국회 개설에 대비하여 많은 사람이 저당을 만들고, 제각각 헌법 초안도 작성. 그러나 이 초안들 가운데 받아들여진 것은 하나도 없었음. 대신 이토 이로부미가 중심이 되어 군주의 구너한이 강화된 독일 제국의 헌법을 모델로 삼아 은밀하게 작성한 헌법 초안이 1889년에 '대일본제국헌법'으로 발포. 그날 도쿄에서는 헌법 발포를 축하하는 축포가 올려퍼지고 화려한 행렬이 펼쳐짐. 그러나 이 헌법의 내용을 알고 있는 국민은 거의 없었음.

 대일본제국헌법에 따르면, 덴노는 입법·사법·행정에 관한 통치권과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권한을 갖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없었음. 이렇듯 덴노 위주로 구성된 헌법은 국민의 인권을 존중하고 국민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자유민권운동의 요구 내용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음.


위로부터의 갑오개혁, 아래로부터의 만민공동회


 1894년 조선 정부는 정치·경제·사회 여러 방면에서 개혁을 추진(갑오개혁). 정치 면에서는 청의 연호 사용 폐지하고 청으로부터 독립 선언. 나랏일과 왕실 일을 나누고 내각의 권한을 강화. 관리를 선발하던 과거제 폐지.재판소를 설치하고 법관을 양성하는 등의 근대적인 사법제도 마련. 

 경제 면에서는 국가 재정을 하나로 통합하여 여러 기관이 직접 세금을 거두는 폐단을 없애고자 했으며, 지역별로 차이가 있던 각종 측량 단위의 기준(도량형)을 통일. 세금을 화폐로 납부하게 하고 이를 위해 신식 화폐제도 도입.

 사회 면에서는 신분제를 없앴으며, 고문화 조혼을 금지하고 여성의 재혼을 허용하는 등 인권을 크게 개선. 이후 이어진 개혁에서는 근대식 교육제도를 마련하여 각지에 소학교를 설립하고 사법학교, 외국어학교를 세워 근대 교육을 실시. 이러한 일련의 개혁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개화파와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일부 수용한 것이었음.

 그러나 갑오개혁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친일 인사와 일본인 고문을 내세워 간섭한 개혁이었기 때문에 군대제도는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수 있을 여건이 만들어짐. 농민들의 고통을 덜어줄 조세제도나 토지제도의 개혁도 이루어지지 않아 농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오히려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킴.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의의견을 모아 정치에 반영시키려는 활동이 일어남. 1898년에 독립협회가 주도한 만민공동회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주요 문제를 논의하여 해결하려고 함. 여기에는 정부 대신들이 참석하기도 함.

 한성에서 개최된 만민공동회에서는 외국 세력의 간섭을 막아내고 신체의 자유과 재산권 보호,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해줄 것을 요구. 그리고 민주적인 의회를 만들기 위한 운동도 펼침. 만민공동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부정한 정부 관리들을 고발하여 쫓아내기도 함.


정한론을 주장한 사람들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 후반에 국학(國學)이라는 학문이 발달. 국학은 유교나 불교의 영향을 받기 전 고대의 일본을 최고로 삼는 학문. 국학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일본이 청과 조선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이 강해짐. 이러한 우월감으로 인해 바쿠후와 조선의 외교관계에 대한 비판과 조선통신사에 대한 성대한 접대를 비난하는 여론이 일어남. 이런 식으로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이 나타남.

 조슈 번 출신의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며,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침. 그는 일본의 강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실존 인물이 아닌 일본의 진구 황후가 신라를 공격했다는 전설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것 등을 거론하며, 서양 열강에 굴복한 바쿠후를 신랄하게 비판. 그리고 조선을 공격해 복종시키자는 등 다른 나라를 침략해야 한다고 주장. 이후에 메이지 정부는 그가 주장한 바를 실행에 옮김.

 요시다 쇼인의 영향을 받은 조슈 번 출신의 기도 다카요시는 메이지 정부에서 일찍부터 정한(征韓)을 주장. 그는 에조치의 영토를 확정하는 일보다 정한이 우선이며, 다수의 무사와 농민이 정부에 대해 불만이 강하므로 그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서라도 조선을 침략해야 한다고 주장. 그는 1868년에 조선을 일본의 지도에 넣고 싶다는 편지를 이와쿠다 도모미 등에게 보냄. 짧은 기간이었지만 쇼인에게 배운 이토 히로부미도 정한론자였음.


정한론을 비판한 사람들


 정한론을 비판한 이들로 요시오카 고우키와 다야마 세이추가 있음. 요시오카 고우키는 메이지 정부의 외교관으로, 조선과 국교 수립을 논의할 당시 최초로 교섭을 맡았던 인물. 그는 외무성을 퇴직했으나 정한론이 들끓자 이에 반대하는 애용의 건백서(建白書)를 정부에 제출. 그는 건백서에 정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조선이 일본의 국서를 찢고 무례한 답서를 들이밀었다"라고 하는데, 그런 일은 실제로 없었다고 적음. 또한 조선이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는 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데에는 일본의 책임도 있다고 했음. 메이지 정부가 조선에 보낸 국서에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문구가 있었다는 것임. 만약 국교가 맺어지지 않는 것을 이유로 조선을 정벌한다면 서양인이 일본의 쇄국을 이유로 침공해온 것도 비난할 수 없다며, 자신이 당하기 싫은 일은 타인에게도 해서는 안 되다며 정한론을 비판.

 다야마 세이추 또한 "조선 사람들이 속이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으며 기질이 아름다운 것은 아시아에서도 출중하다"라며 정한론을 비판. 그는 "국내의 싸움을 회피하기 위해 조선에서 사건을 일으켜 사람들의 눈을 돌리려는 자가 있다. 그렇게 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조선에서 사건을 일으켜 일본인을 분기시키려는 자가 있다. 일부러 사건을 일으켜 약소국으로 깔보며 침범하려 한다. 그렇게 하면 세게의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음.



경복궁 점령에서 지작된 전쟁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일본은 청에 비해 군사력이 뒤떨어진다고 판단. 그래서 청과 러시아의 윟벼을 이유로 해군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기름. 1884년까지 국가 예산의 20%도 안 되던 군사비 예산을 해마다 늘려서 1890년에는 25%를 넘어섬.

 1890년 수상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의회 연설에서 다른 나라의 침입을 막고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주권선(主權線, 국경)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국경을 넘어선 이익선(利益線, 세력권)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 야카가타가 말한 이익선이란 바로 조선을 뜻함.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정부군이 농민군에게 패배하자 조선 정부는 청에 군대 파견을 요청. 조선의 정세를 살피던 일본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이익선인 조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청과 전쟁을 하여 승리해야 한다고 판단. 그래서 조선 정부가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일본군의 작전본부인 대본영(大本營)을 도쿄에 설치. 그리고 톈진조약에 따라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다는 청의 통보를 받자마자 바로 청이 파견한 군사보다 많은 7천 명의 병력을 1진으로 배치해 히로시마의 우지나 항에서 조선으로 출발.

 청군뿐 아니라 일본군까지 조선 땅에 들어오자, 동학농민군은 청과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남아 있을 구실을 없애기 위해 정부와 협상을 벌여 개혁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고 해산(전주화약). 그 뒤 조선 정부는 일본과 청에 군대 철수를 요구. 하지만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찾고 있던 일본은 철군을 미루며 청에게 양국이 참여하여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는 제안을 함. 그러자 청은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이라며 일본의 제안을 거부. 이에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 정부에 개혁안을 들이밀었고, 조선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자 군대를 움직여 1894년 6월 21일(양력 7월 23일) 경복궁을 기습 공격. 조선 수비대는 치열하게 싸웠으나 패배하여 부자 해제됨(경복궁 점령사건). 일본군은 고종을 포위한 채 새 내각을 구성하고,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무효화하고 청군에게 철수를 요구하라고 강요. 그리고 일본은 이를 명분 삼아 6월 23일(양력 7월 25일) 청 함대를 기습 공격하고, 육상 전투도 시작. 이어 7월 1일(양력 8월 1일) 청에 선전포고.


청과 일본이 맺은 시모노세키조약


 일본은 황해에서 청의 북양함대를 물리치고, 평양전투에서도 승리.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없애는 것이 일본이 전쟁을 벌인 표면적인 이유. 그러나 일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청의 영토를 빼앗기 위해 압록강을 넘어 량오둥 반도의 뤼순을 침략. 뤼순을 점령한 일본군은 청군을 소탕한다는 구실로 포로와 일반인을 학살. 이 사건은 미국과 영국의 각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국제적으로 문제가 됨. 하지만 나일본에서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음.

 1895년 1월(양력 2월), 일본군이 청의 북양함대 기지인 웨이하이웨이를 점량하여 큰 타격을 입힌 뒤 전쟁 종결. 같은 해 3월(양력 4월), 일본과 청을 시모노세키조약을 조인. 조약 체결 결과, 청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하고,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 등을 일본에 양도하게 됨. 그리고 청은 일본에 2억 량(당시 일본 국가 예산의 4.2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배상금으로 지불.

 타이완을 획득한 일본은 타이완총독부를 설치하고 주민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식민통치를 실시. 청의 배상금을 자본으로 삼아 근대적 제철소인 야하타 제철소(지금의 신일본제철)를 건립하여 군수산어의 기초를 마련. 새로운 영토를 차지하고 많은 배상금을 손에 쥐게 된 일본은 전쟁에 대한 자신감과 군국주의가 더욱 강해짐. 일본인으로서 우월감이 높아진 반면 아시아인들에 대한 멸시감도 그에 비례하여 널리 퍼짐.


군수 물자 운반에 징발된 조선인


 전쟁 초기 일본군은 황해를 오나전히 지배하지 못한 탓에 선박을 이용해 군수 물자를 수송하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음. 일본에서 부산까지 배로 옮긴 군수 물자를 일본군 인부를 비롯해 소, 말과 함께 조선 농민을 징발해 육로로 북쪽 전선까지 옮김.

 일본군은 조선 농민들을 가혹하게 부림. 심지어는 일사병에 걸려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까지 쉬지 않고 물자를 옮기게 함. 그 때문에 농민들은 '차라리 죽이라'고 저항하기도 했음. 실제로 일본인 지휘관은 '군대 규율의 엄중함을 보인다'며 죽이는 경우도 있었음. 농민들은 겨울인데도 방한복을 지급받지 못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다 심한 동상에 걸림. 부근에 일본 육군병원이 있었으나 조선인들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서 많은 이들이 손발을 잘라내는 고통을 겪음.

 일본은 조선 정부에 '이 전쟁은 조선의 독립을 위한 전쟁이다.'라며 선전 강요. 하지만 징발을 원치 않았던 대부분의 조선 농민은 징발을 피하려고 마을 전체가 소와 말을 데리고 사라져버리는 일도 있었음.

 일본군은 징발한 농민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곤봉과 채찍으로 엄중히 감시함. 그럼에도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일들이 있었음. 농민들이 소 400여 마리를 끌고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책임을 맡은 일본인 장교가 xx했다는 기록도 존재. 

 일본군은 전쟁 상황을 신속히 전달하기 위해 조선 정부 소유의 전신선을 이용. 한성과 대구 등지의 주요 전신국을 점거하여 군용 전신국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추가로 필요한 군용 전신선은 조선 농민을 징발하여 새로 가설. 농민들은 공사를 방해하거나 가설된 전신선을 절단하며 일본군에 저항.

 전쟁터가 된 조선 북부 지역과 만주에서는 수많은 전사자가 매장도 되지 않은 채 방치. 당시는 위생 상태도 나빨기 때문에 이질과 콜레라 등의 전염병이 쉽게 퍼짐. 전쟁 말기에 만주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조선에 퍼져 약 30만 명의 조선인이 숨짐.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일본 정부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조서과 러시아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을 막으려 함.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외교관 경력이 전혀 없던 군인 출신의 미우라 고로를 일본 공사로 조선에 파견. 미우라는 일본의 조선 침략에 방해가 되는 명성화후를 제거하기 위해 조성네 와 있던 일본의 대륙 낭인들을 이용.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 낭인, 일본인 교관이 가르치던 조선 훈련대 한 무리가 경복궁에 잠입. 그들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불태움(을미사변).

 미우라 공사는 사건을 모의하면서 이를 조선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위장하기 위해 조선 훈련대를 앞장세우고, 일본인 가담자들에게도 조선 옷을 입힘. 그러나 현장을 직접 목격한 미국인과 러시아인의 증어능로 일본이 왕비 시해 사건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알려짐. 국제적인 비난이 일자 일본 정부는 미우라 공사를 해임하고 사건 관련자 전원을 일본으로 소환. 조선은 왕비가 시해당했음에도 조일수호조규의 치외법권 조항 때문에 이들을 직접 처벌하지 못함.

 사건에 관련된 일본군과 민간인 60여 명은 히로시마에서 재판을 받음. 그러나 그들은 감옥에서 영웅 대접을 받으며 지내다 재판에서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전원 무죄 석방. 이후 관련자 대부분은 일본 정부의 중요한 직책에 등용되는 등 상당한 대우를 받음.


러시아에 대한 강경론이 불거진 일본


 만주를 점령한 러시아가 한반도까지 지배할 것을 우려한 일본은 러시아에 대항해 대한제국에서 일본의 권익을 확보해야 한다고 판단. 그리하여 일본은 러시아가 대한제국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막기 위해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음(제1차 영일동맹).

 일본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국가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 '국가주의'이념 교육을 강화하고, 국민에게 '충군애국'정신을 주입.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자 대한제국은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중립을 유지하고자 함. 전쟁이 임박하자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국외중립(國外中立, 교전국 가운데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는 상태)을 선언. 영국·프랑스·청은 이 선언을 승인했으나 일본과 러시아는 승인하지 않음.

 국외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에서는 전쟁은 물론이고 군대 통과, 항구 사용 등 전쟁과 관련된 어떠한 행위도 할 수 없었음. 하지만 일본은 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선전포고 전에 한성에 군대를 파견하여 경운궁을 점령. 그리고 개전 직후에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전면적으로 협력할 것을 강요하는 '한일의정서'를 체결. 의정서 조인에 끝까지 반대했던 이용익은 일본군에 납치되어 열 달 동안 일본에 연금됨.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근거로 대한제국으로부터 일본군 주둔과 철도 건설에 필요한 토지를 빼앗고 노동력을 징발함.


러일전쟁이 발발하다


1903년, 세출 총액 : 315,969,000엔, 총 군사비 : 150,910,000엔(47.76%)

1904년, 세출 총액 : 822,218,000엔, 총 군사비 : 672,960,000엔(81,85%)

1905년, 세출 총액 : 887,937,000엔, 총 군사비 : 730,580,000엔(82.28%)


 1904년 2월 8일 일본 해군은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러시아의 해군기지가 있는 뤼순 항과 인천 바다에 정박 중인 2척의 러시아 군함을 기습 공격. 육군 선발대는 인천에 상륙해 한성을 점령. 일본은 2월 10일이 되어서야 러시아에 선전포고.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소비한 전쟁 비용은 18억 엔이 넘음. 그중 8억 엔은 영국과 미국이 지원해준 외국채로 조달. 나머지 10억 엔은 국채 발행(6억 7천만 엔)과 세금으로 충당. 일본 정부는 소득세와 주세, 설탕 소비세와 같이 주로 개인이 부담해야 할 세금을 올림. 공무원관 경찰관이 집집마다 방문해 국채 매입을 반강제적으로 '권유'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국채를 구입. 국민이 감당해야 할 전쟁 비용이 나날이 늘어 한계에 이름. 일본이 동원한 벼사는 약 109만 명이었는데, 적어도 22만 명 이상의 병사가 죽거나 다침.

  

다시 전쟁터가 된 대한제국


러일전쟁 발발 후 러시아와 일본 군대가 대한제국 영토 안으로 들어와 전투를 벌이자 대한제국은 또다시 전쟁터가 됨. 한국인은 피란을 떠나야 했고, 약탈과 질발의 고통을 겪음. 적국에 정보를 준 스파이로 몰려 처벌되는 경우도 종종 존재. 러시아 궁인이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별하지 못해 상투를 자른 한국인은 일본 군인으로 오인해 살해하는 경우 존재. 한반도 북부(함경도) 지역은 러시아 세력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일본군이 직접 통치.

 대한제국에 들어온 일본군은 자국 군대가 주둔한 한성의 용산이나 평양, 대구 등지에 장기적인 사용을 목적으로 군인 숙사와 창고, 사격 훈련장 등을 튼튼하게 건설. 한국인들은 일본 군대의 부지로 사용된 약 2천만 평(6,600만 제곱미터)의 토지를 헐값으로 팔아야만 했음. 또 일본군 기지를 만드는 공사에 수십만 명의 한국인이 동원되었으나, 하루 임금은 한 끼 밥값에도 미치지 못했음.


전쟁에 동원된 일본 국민


 1890년 일본 정부는 "국가에 어려움이 있으면, 국가를 위해 모든 힘을 바쳐라"라는 정신이 담긴 '교육칙어'를 발표. 교육 목표는 국가, 곧 덴노를 위해서는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마음을 기르는 것. 모든 학교에서 덴노와 황후의 사진에 대한 경례와 교육칙어 낭독이 이어짐. 1903년 일본 문부성에서는 국정 교과서를 제작해 전국의 소학교에서 일률적으로 사용하도록 함.

 '국가에 봉사하는 인간을 육성'하는 데 중점을 둔 교육으로 인해 '전쟁을 긍정하고, 전쟁 수행을 위한 희생은 참는 것이 미덕'이라는 국민 의식 확산. 소집 영장을 받은 아버지가 자신이 전쟁터로 떠난 뒤 혼자 남겨질 세 살배기 딸을 걱정하다가 결국 딸을 죽인 사건도 존재. 구마모토 현의 기록에는 이 사건을 "상식을 벗어난 행동이지만, 나라에 이바지하려는 그 마음은 매우 강하다."라며 미담으로 소개.

 일본 사람들은 생활의 모든 면에서 전쟁을 위한 인내와 봉사를 강요당함. 특히 군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장시간 노동을 강요당함. 1904년(메이지 37년) 2월 14일자 <헤이민신문>은 히로시마 현 구레 시 해군 공장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

 "시간이 없다면서 우리 노동자들에게는 단지 3시간의 수면만 허용되었다. 그리고 2주간 휴일도 없이 일했다. 그 때문에 6명의 노동자가 공장 안에서 즉사했다."

 이렇듯 당시 노동자에게는 위험한 작업을 안전을 무시한 채 철야로 강행하는 일이 일상.

 일본 농촌에서는 젊은이들이 전쟁터에 동원되는 바람에 농사지을 일손이 부족. 동북 지방의 농촌에서는 젊은이뿐 아니라 농사에 필요한 말까지 식용과 군마로 징발. 그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에도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어, 논밭은 황폐. 게다가 1905년에는 기상이변까지 닥쳐 쌀 수확량이 전년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흉작.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먹지 않는 나무 열매와 풀잎을 먹었으며, 먹을 거을 마련하기 위해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팜. 마지막에는 마을을 버리고 홋카이도나 도쿄로 감. 도쿄의 우에노 역에는 이렇게 상경한 실업자가 넘쳐났음.

 

청일·러일 전쟁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


 전쟁이 시작되자 정당은 정부에 대한 비판을 중지하고, 2억 엔에 달하는 전쟁 비용을 승인.

러일전쟁 전에 유력 정치가 모임인 대 러시아 동지회와 도쿄제국대학 교수들은 러시아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 신문 가운데서 유일하게 전쟁 반대를 주장하던 <요로즈초호>까지도 주전론을 펼침. 그러나 <요로즈초호>의 기자였던 고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도시히코느 끝까지 전쟁 반대를 주장하며 신문사를 그만두고 나와 주간지인 <헤이민신문>을 창간. 고토쿠 슈스이는 논설 <오호라! 세금인상에서 "정부는 전쟁 때문이라는 한마디로 의회·정당을 이용하여 세금을 인상했고,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국민이 고통을 받고 있는가! 국민의 행복과 진보에 공헌하지 않는 정부는 필요없다!"(<헤이민신문> 제20호, 1904년 3월)라며 정부를 통렬하게 비판. 이 때문에 제20호는 발행 금지 처분을 받음.


한반도에서 만주까지 이어진 철로


 대한제국을 거쳐 만주까지 침략하려는 일본에게 대한제국에 철도를 건설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시책. 일본 기업가는 대한제국과 만주에서 이루어질 상품 판매와 식량 수입, 일본이 이민을 위한 동맥으로서 철도를 인식. 청일전쟁 때 물자와 병력을 수송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일본 군부는 대외 전쟁을 수행할 때 가장 시급한 사안이 대한제국에 철도를 건설하는 일이라고 주장. 이와 같은 정치·경제·군사적 목적으로 일본은 부산에서 한성을 거쳐 신의주까지 연결되는 철도를 건설하여 관리하려고 함.

 일보은 이미 대한제국이 부지를 측량하고 있던 경의선(한성-신의주)을 군용철도로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곧바로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건설권을 빼앗음. 러일전쟁 중이었지만 군인까지 동원하면서 공사르 서둘러 1905년에는 경부선(한성-부산)을, 1906년에는 경의선을 완공. 그러나 철도 개통을 서두르다 보니 완공 후 운행에 문제가 많이 생김. 이후 10여 년 동안 전면적인 개량 공사가 계속됨.


강제로 징발한 노동력과 토지


 일본은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력을 대부분 현지에서 조달. 철도 건설을 서두른 일본은 처음에는 모집이란 형태를 취했지만 의도한 대로 사람이 모이지 않자 곧바로 강제적인 징발로 방법을 바꿈. 일본이 대한제국 관리에게 필요한 인원수를 요구하면 관리는 마을마다 적당한 인원수를 할당했고, 일본 헌병과 경찰이 농민을 징발함. 모내기철과 추수철같이 농사일이 바쁜 시기에도 징발은 계속됨.

 경부선과 경의선을 합쳐 약 1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구간에 철도를 건설하는 데 2천만 평이 넘는 토지가 사용됨. 일본은 토지 소유자에게는 반강제로 토지를 내놓도록 함. 보상금액도 턱없이 낮았는데 이마저도 제대로 지불되지 않음. 두 노선의 철도 공사에는 연인원 1억여 명의 노동력이 동원되었지만, 징발된 사람들은 밥값에도 못 미치는 낮은 임금을 받음.

 일본은 철도역을 건설하기 위해 부지를 마련할 때에도 필요 이상의 넓은 터를 차지. 철도역 부지에 철도 업무뿐 아니라 상업용·군사용 시설과 주택까지 지어 일본인이 집단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 대구역을 지을 때도 처음에는 20만 평을 요구했다가 대구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반대하여 대폭 줄임. 그런데도 약 3만 평(10만 제곱미터)이라는 광대한 땅을 일본에게 빼앗김.

 철도 공사 지역에서는 주민과 노동자들이 토지와 노도역의 강제 징발에 저항하여 종종 폭동을 일으킴. 의병은 선로와 전신선을 일본 침략의 상징으로 보고 공격 대상으로 삼음. 철도역 건물, 선로, 전신선에 대한 공격과 파괴가 끊이지 않자 일본군은 의병 공격에 나서기도 함.


강압적으로 체결된 을사조약


 러일전쟁 후, 미국과 일본은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것을 서로 인정한다.'라는 밀약을 맺음(가쓰라-테프트 밀약, 1905년 7월). 이어 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영국으로부터 한국 지배를 인정받음(제2차 영일동맹, 1905년 8월). 러시아와도 포츠머스조약(1905년 9월)을 통해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는 것을 인정한다.'라고 서로 확인. 이러한 국제적 승인 아래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한성에 파견.

 1905년 11월 한성에 도착한 이토는 일본 공사 및 일본군 사령관과 함께 한국 댓니들을 회유·협박하는 공작을 벌이는 한편, 고종을 만나 보호 조약의 승인을 강요.


이토 : 지금 중요한 것은 오직 폐하의 결심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승낙하든 거부하든 그것은 폐하의 마음이겠지만, 만약 거부할 경우 제국 정부는 이미 결심한 바가 있어 그 결과는 아마 귀국의 지위는 조약을 체결함보다 더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고, 더한 불이익을 당하는 결과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고종 : 일이 중대하여 짐이 혼자서 이를 결정할 수 없다. 짐이 정부 신료에게 자문하고, 또 일반 인민의 의향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이토 : 폐하는 책임을 정부에 돌리고, 정부 또한 그 책임을 폐하에게 돌리고 군신이 서로 채임을 피해 양보하니 이는 짐짓 결정을 지연시키려는 의도로, 귀국에 손해가 될 뿐 이익되는 바가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일한외교자료집성> 중에서

 

 고종이 순순히 응하지 않자 11월 17일 완전무장한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한 가운데 대신회의가 열림.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회의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지만 결론을 내릴 수 없었음.

 회의에서 내각을 이끌던 한규서이 강력하게 항의하자 그를 옆방에 감금하고, 이토는 한 사람씩 별실로 불러들여 조약안에 대한 찬반을 분명히 하라고 강요. 그는 찬성·반대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대신의 의견까지 찬성이라고 간주하여, 8명 중 5명이 찬성했다고 결론을 내림. 이토는 이것을 근거로 삼아 양국의 합의로 조약이 성립되었다며, 대한제국의 외부대신과 주한 일본 공사가 양국 대표로서 서명한 조인서를 만듬. 이렇게 1905년 11월 18일 새벽 1시, 강요에 의해 조약이 체결(을사조약,을사늑약).


다음 편에 이어짐.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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