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어이가 없는게
요즘 사람들 생각하는 것들 중에
만일 고려 조선시대때 조상들이 여진족을 야만시하지 않고 동족으로 대우해줬으면
지금쯤 만주 연해주는 우리땅 아니었냐 하는게 있습니다.
이는 금나라 청나라를 건설했던 여진족이 우리와 방계이거나 매우 가까운 종족 내지
심지어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동족아니었냐는 추측에 기반하고 있죠
그러나 고려시대 숙종 예종조때 윤관의 여진정벌이 이루어질 정도로
여진을 이질시한것이 단지 그당시 조상들이 소중화주의에 찌들어 있어서였을까요?
그렇다면 참으로 옹졸하고 혜안이 부족한 우물안개구리같은 조상님들이었겠죠.
그러나... 당시 고려인들은 여진족들을 매우 많이 자주 접했고 심지어
고려 북방지역에 수만명의 여진족이 이주해 들어와 살고 있기도 했습니다만
고려인들이 여진족을 동족으로 여기진 않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동족의 개념이 성립하려면
우선 혈통적으로 뿌리를 공유하거나 말이 통해야 하고 어느정도 풍습 문화 등도 비슷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진족은 여러면에서 당시 고려인과 상당히 이질적이었습니다.
여진족이 이삼백년간 발해인과 함께 발해의 구성종족이되었음에도 고려인 입장에서
여진족을 이질시했다는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러나 고려인은 후삼국시기부터 대동강 지역에 출몰하는 여진족에 대해서는 무력을 통한 정벌 내지 축출로
발해인에 대해서는 쌍수들고 환영하거나 긴밀한 외교관계를 견지해왔는데
발해인들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고려와 전투한번 벌였다는 기록이 전무하고
어떻해서든지 고려조정에서 그 유민들을 흡수하려한 노력과 흔적 기록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여진족에 대해서는 발해유민과 달리, 아무리 고려로 귀화하고자 하는 여진족이라 할지라도
이것저것 따져가며 이주를 허용했죠.
고려사에는 여진족과 거란족에는 '역어'라 하여 통역사를 두었던 반면, 발해인에 대해서는 통역사를 두었다는 기록이
한줄 없습니다.
발해는 동만주와 연해주일대에 존재했던 국가였지만 발해5경을 중심으로한 발해인들은 농사를 주사업으로 했을 정도로
(물론 목축과 수렵도 성행했죠. 농경을 주산업으로 했다고 발해인의 기마민족 기상을 무시한다고 개소리하는 인간은
없길 바랍니다) 고려와 크게 식생활면에서 차이가 난다고 볼수 없었습니다.
예전에 만주 라마동에서 발굴된 수백점의 고인골의 주인공이 선비족이냐 부여인이냐를 두고 학자들끼리 갑론을박을 벌일때
부여인임이 증명된 결정적 증거가 고인골에 곡류를 주로 섭취한 흔적이 발견됬기 때문입니다.
수천년전부터 고조선을 필두로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할것없이 예맥족의 주산업은 바로 농경입니다.
오해하기 쉬운게 부여 고구려는 만주에 있던 기마민족이라 농경과는 거리가 먼 유목민이었을꺼라 착각들 하는데
부여 고구려는 목초지를 찾아 유랑하는 유목민도 아니었고 정착생활을 하며 주산업으로 농경과 돼지 말 등을 키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변 선비족이나 거란족과 같은 전형적인 유목민과도, 농경기술이 형편없고 수렵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 살아가던
물길 읍루 숙신과도 상당히 달랐습니다. 더군다나 이들과 언어조차 달랐다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언급되있죠.
광개토태왕릉비에도 동부여 백제 신라 등에 대해서는 속민이라는 개념으로 고구려 천하의 일원이라는 당대 고구려인의 인식이
엿보이지만 거란 숙신(식신) 왜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천하를 침범하는 외부세력 내지 오랑캐쯤으로 여기는 것을 엿볼수 있습니다.
저는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이 그토록 남하정책을 중시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우선 고구려인과 가장 문화 언어 혈통적인 면에서 비슷한 남쪽을 손아귀에 넣고 싶은건 인지상정이었을테니까요
아무튼, 동이족이라고 다 우리와 동족으로 여기면 안됩니다.
최소한 고조선 시대 이후 예맥족과 주변민족과는 생활풍습면에서부터 상당히 이질화되어있었습니다.
물론 역사시대동안 피가 섞이고 교류도 있었지만 엄연히 구분되는 이민족들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해선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