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5-10-02 01:28
[일본] 日 아키히토 천황, 아베 총리와 4번의 ‘대충돌’ 내막
 글쓴이 : 유베알레
조회 : 5,373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08252


“종전 70주년 담화에 무라야마 정신 담아라!”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부편집장
아베 총리 부부 의례적 황궁 만찬 한 번도 초대 못 받아… 지난 4월 ‘세계 물의 날’日 황태자 방한 요청하자 아베 총리가 제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인 지난 8월 15일 열린 ‘전국 전몰자추도식’에서 추도사를 마친 뒤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뒤쪽으로 아베 총리와 최근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는 아키히토 천황이 보인다.
전후 70주년을 맞는 ‘일본 본연의 자세’를 둘러싸고, 일본의 최고 권력자인 아베 총리와 최고 권위자인 천황과의 사이에 올해 들어 수면 아래서 마찰이 계속되어왔다. 전자가 ‘미래지향’이라면, 후자는 ‘과거(전쟁)의 책임’을 계속해서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먼저 아베 총리가 누구보다 존경하고 있는 인물은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년)다. 기시 노부스케는 1936년 만주국의 국무원 실업부 총무사(관)장에 취임하여 ‘만주산업개발 5개 년 계획’을 책정했다. 그 후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 두 달 전인 1941년 10월에 발족한 도조 히데키 내각에 상공각료로 입각하여 태평양 전쟁의 일본군 물자동원조달 책임자가 됐다.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기시는 A급 전범으로서 스가모(巢鴨) 구치소에 수감됐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이 냉전에 돌입하면서 미국 측이 일본과 결탁, 3년 후 무사히 출소하여 1957년에는 총리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러한 기시 노부스케의 ‘미래지향적 삶의 태도’에 심취하고 있는 것이 외손자인 아베 총리다.

이에 비해 1933년 12월 출생의 아키히토 천황은 만 3세가 되던 해에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만 8세가 되기 직전에는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의 전투기가 일본 상공을 폭격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궁내의 방공호에 몸을 숨기다가, 폭격이 심해지자 궁에서 도망쳐 130㎞ 북동에 있는 도치기현 닛코시(日光市)로 피란을 떠나야만 했다.

“사적으로는 아베 총리와 교류 않겠다”


▎일본 황실의 나루히토(德仁, 왼쪽) 황태자와 마사코(雅子, 왼쪽) 황태자비. 나루히토 황태자는 한국 방문을 희망했으나 아베 정부는 그의 방한을 허락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하자 그 다음해부터 5년간, 미군이 파견한 여성 가정교사 엘리자베스 바이닝에게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을 받았다. 그것은 곧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전면 비판하는 교육이었다. 일본에서는 ‘가키하지메(書始め: 새해 첫날 자신의 다짐을 나타내는 단어를 붓글씨로 쓰는 습관)’라는 관습이 있는데, 아키히토 천황이 패전 다음해인 1946년 정월에 쓴 말은 ‘평화국가건설’이었다. 필자의 지인 중 아키히토 천황과 친한 인물이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아키히토 천황은 아버지인 히로히토 천황(1901∼1989) 시대에 일본이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일으킨 전쟁은 완전한 일본의 과오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보상이야말로 천황으로서의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아키히토 천황은 1989년에 부친을 이어 천황에 즉위하면서 과거로의 ‘순례 여행’을 시작했다. 1991년 타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를 방문한 것을 시초로, 1992년 중국을 방문했다. 2005년에는 사이판, 다음 2006년 싱가포르, 타이를 방문했다. 2009년에는 일본군이 1941년 진주만 공격을 감행한 하와이를 방문했고, 2015년 4월 8~9일에는 팔라우를 방문했다.

천황의 ‘순례 여행’의 특징은 현지에 있는 일본인 병사의 위령비뿐만 아니라, 상대국의 위령비에도 동시에 참배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일본은 앞으로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라는 강한 결의가 담아져 있다. 천황의 행동은 보통 공적인 국사행위와 사적인 개인행위로 나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천황의 친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황은 총리가 바뀌면 개인행위로서 사적으로 신임 총리 부부를 궁에 불러 환영 만찬을 여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아베 총리만은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이는 사적인 부분에서는 절대로 아베 총리와 교류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일 것이다. 그 대신 공적인 공사행위에서는 아베 총리와 행동을 같이한다.”

올해 들어서 아베 총리와 천황은 적어도 네 차례 충돌을 빚었다. 첫 번째 갈등은 정월에 있었다. 새해 첫날 아베 총리는 17명의 각료를 이끌고 궁을 방문해 천황에게 신년 인사를 했다. 이것도 천황의 국사 중 하나다. 그때 천황은 21세이나 손아래인 아베 총리에게 타이르는 듯한 ‘신년의 말’을 전했다.

“올해는 종전 7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를 맞습니다. 많은 분이 목숨을 잃은 전쟁이었습니다. 이 기회에 만주사변에서 비롯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워서 앞으로 일본 본연의 자세를 생각해가는 것이 현재 지극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4일 후인 1월 5일, 이세진구(伊勢神宮)를 참배한 후에 천황의 말과는 180도 다른 ‘신년의 말’을 진술했다.

“올해는 전후 7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를 맞습니다. 국제정세가 크게 격변하는 상황에서 더욱 힘 센 발걸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국민의 생명과 행복한 삶을 단호하게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안전보장법제를 정비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앞으로 80주년, 90주년, 그리고 100주년을 향해서 일본은 적극적 평화주의의 기치아래, 세계 평화와 안정을 위해 더욱 공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에 대한 명확한 의지를 이번 70주년에 즈음하여 세계를 향해서 선언하고 싶습니다. 양띠 해(未年)인 올해에는 미래의 ‘미(未)’라는 한자가 들어갑니다.”

“황태자 방한, 허락할 수 없다”


▎지난해 2월 서울을 방문해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강연하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 1995년 8월 15일 그가 발표한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의 전쟁책임을 확실하게 인정해 주변국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렇게 아베 총리는 ‘과거의 전쟁 책임’이 아닌 ‘미래지향’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8월로 예정되어 있는 ‘전후 70년의 아베 담화’를 둘러싼 마찰의 복선이 됐다. 두 번째 마찰은, 천황의 장남인 황태자의 방한을 둘러싸고 점화됐다. 2월 23일 55세를 맞이한 황태자는 생일 기념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아버지인 천황의 역사관을 그대로 추종하는 내용이다.

“나 자신은 전후 세대로서 전쟁을 체험하지 않습니다만,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는 오늘날 겸허하게 과거를 되돌아보는 동시에 전쟁을 체험한 세대부터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까지, 전쟁의 비참한 체험이나 일본이 걸어온 역사를 정확하게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4월 12일에서 17일까지 한국에서 ‘제7회 세계 물포럼’이 열렸다. 유엔의 물·위생자문위원회 명예총재를 맡고 있는 황태자는 지금까지 총 3번, 세계 물포럼에 참석했다. 그 때문에 한국은 전후 70주년과 6월의 일한 국교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로서 황태자의 방한을 극비리에 요청했다. 앞서 말한 천황의 친구가 들려준 내용이다.

“지난해 8월 25일 궁에서 신임 유흥수 주일대사가 박근혜 대통령의 신임장을 천황에게 전달했다. 유 대사는 일본어가 능숙하기 때문에 이날 두 사람은 비공식적 대화에 열중했다. 이 자리에서 유 대사가 황태자의 방한을 요청했다. 천황은 평생을 바친 위령의 ‘순례여행’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방문지가 한국이라는 감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아베 정권 아래에서 일한 관계가 좋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방한할 수는 없다. 그 때문에 본인 대신 아들인 황태자가 갈 수 있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아베 총리 관저가 좀처럼 OK사인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해 12월 23일의 천황 생일 파티에 출석한 유흥수 대사는 황태자에게 직접 참가를 요청했다. 황태자는 즉답할 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에 ‘추후에 회답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총리관저에서 황태자 방한 문제가 떠올랐다. 그러나 총리관저의 결론은 ‘불가’였다. 그리고 1주일 뒤 총리관저의 뜻을 받은 외무성은 정식으로 한국 정부에 거절을 통보했다.

올해 2월 23일 황태자의 생일 기자회견에서는 4월에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 물포럼 참석에 대해서도 질문이 있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저의 참석에 관해서는 정부 쪽에서 검토돼야 하는 사항이기 때문에 코멘트를 삼가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이었다.

아베 총리와 천황의 세 번째 마찰은 4월 팔라우 방문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팔라우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군이 점령했고, 1922년 이곳에 남양청을 설치하여 1943년까지 3만3천 명이나 되는 일본인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민간인이 피란한 다음 해인 1944년 9월에서 11월에 걸쳐 일본군과 미군의 육지전이 발발, 미군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일본군은 총 1만1천명 가운데 생존자가 불과 34명이었을 만큼 괴멸했다. 이곳에서 미군은 오키나와를 향해서 노도와 같이 진격했고 다음 해인 1945년 8월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천황은 오래전부터 지금도 일본인 병사들의 유골이 사방에 흩어져 있는 팔라우를 방문해 그들을 위령하고 싶다는 강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81세의 고령을 감안하면 전후 70주년에 맞는 올해야말로 팔라우 방문의 적기이며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천황의 계획에 난색을 내보인 것이 아베 총리관저였다. 아베 총리와 가까운 인물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베의 등 뒤에 날아온 천황의 총알


▎지난 8월 14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전후 70년을 맞아 담화를 발표했다. 식민 지배와 침략을 언급했지만 이를 일본이 저지른 사실로 직접 명시하진 않았다.
“아베 총리는 8월 ‘전후 70주년의 아베 담화’를 앞두고 있었다. 담화의 주된 목적은 일본과 아시아의 미래지향적 관계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전후 70년간 한결같이 평화의 길을 걸어 왔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자위대를 자유롭게 세계로 이동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새삼 과거의 역사 문제를 도마 위에 올리는 것은 극히 삼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천황은 아베 총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팔라우에 위령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아베 총리는 ‘팔라우에는 천황이 묵기에 합당한 숙박시설이 없다’는 이유로 재고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천황은 ‘숙박시설이 없다면, 노숙을 하더라도 상관없다’라며 팔라우 방문의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천황의 해외방문은 당연히 국사 행위다. 그런데 헌법 제3조의 규정에 의해 “천황의 국사에 관한 모든 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을 필요로 한다”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아베 총리가 OK하지 않으면 천황은 팔라우에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아베 총리는 마지못해 천황의 팔라우 방문을 허락했다. 허락하지 않았을 경우 자신에게 쏟아질 국내외 비판을 두려워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실현된 천황의 팔라우 방문이었다. 방문 당일인 4월 8일 아침, 천황은 궁으로 배웅인사를 하러 온 아베 총리 앞에서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올해는 전후 7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지난 전쟁에서는 태평양 각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서 이름 없는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습니다. 종전 직전(1944년)에는 이 지역(팔라우)에서 심한 전투가 발발, 여러 섬에서 일본군이 전사했습니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은 약 1만 명, 미군은 약 1700명의 전사자가 났습니다. 태평양에 떠있는 아름다운 이곳 섬에서 이러한 슬픈 역사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베 총리는 천황의 담담한 말을 침울한 표정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천황 부부의 팔라우 방문은 1박2일의 짧은 여행이었다. 결국 숙박할 곳이 마땅치 않아 최초로 자위대의 순시선인 ‘아키츠시마(秋津洲)’의 선내에 숙박하는 이례적인 일정의 여행이었다. 그렇지만 천황과 황후는 이번에도 일본 병사와 미국 병사의 위령비를 모두 참배하고 궁내에 심어져 있던 국화(국화는 천황가의 상징)를 바쳤다. 앞서 말한 천황의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황후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주위가 무척 걱정했다. 그러나 황후는 ‘모든 의식에 참석하겠다’며, 천황 옆에서 맡은 바 역할을 다했다. 천황과 황후는 일본의 과거 전쟁 책임에 대한 인식도 완전히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4월 9일 밤 9시19분, 천황 부부를 태운 일본정부 전용기가 하네다 공항에 내려섰다. 트랩에서 내려온 천황 부부에게 먼저 천황의 장남인 황태자와 차남인 아키시노노미야 왕자가 축사를 전했다. 이날은 천황 부부의 56번째 결혼기념일이었기 때문이다. 천황과 황후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상냥한 미소를 떠올렸다. 계속해서 옆에 서 있던 아베 총리가 무사귀국에 대한 축사를 전했다. 그러자 천황은 순간 입을 다물고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네 번째 마찰이 표면화된 것이 8월의 ‘전후 70년의 아베 담화’를 둘러싼 문제였다. 아베 총리와 가까운 지인이 들려준 얘기는 이렇다.

“아베 총리는 당초 담화 내용은 ①일본의 과거 전쟁 책임 ②전후 70년의 평화의 발걸음 ③앞으로의 일본, 이라고 하는 3가지 내용으로 구성했다. 그리고 ① ② ③의 비율을 1대 2대 3 정도로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완전히 미래지향적인 아베 담화로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베 총리는 이웃나라인 한국과 중국이 이러한 미래지향형 담화에 대하여 항의해 올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밀어붙일 각오였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등 뒤에서도 총알이 날아 온 것이다.”

아베 총리, 결국 천황에 굴복하다


▎지난 4월 팔라우를 방문 중인 아키히토(明仁) 천황 부부가 9일 2차 세계대전 격전지였던 페릴류섬의 전몰자 위령비에 헌화한 후 또 다른 전투가 벌어졌던 앙가우르섬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등 뒤란 ‘천황=궁내청’이다. 이러한 미래지향의 아베 담화에 대해서 ‘잠깐만!’을 외친 것이다. 이 인물이 그 속사정을 들려줬다.

“궁내청의 핵심 멤버는 외무성에서 좌천된 조다. 즉, 외무성의 비주류파다. 아베 총리의 8월 담화의 뒤에 있던 것은 외무성의 주류파다. 그 때문에 이 문제가 외무성의 주류파와 비주류파의 싸움이 되었다. 궁내청에 있는 외무성 비주류파는 아베 총리가 ‘무라야마 담화’의 정신을 계승하지 않는다면 이 정신을 계승한 ‘천황 담화’를 발표하겠다며 총리관저에 위협을 가했다.”

‘무라야마 담화’란 전후 50주년을 맞았던 1995년 8월 15일 당시 무라야마 토미이치(村山富市) 총리가 발표한 담화를 말한다. 무라야마 총리는 과거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 명확히 밝혔다. 특히 ‘침략·식민지배·사죄·반성’이라는 소위 ‘4점 세트’를 집어넣었으며, 한국어와 중국어로도 번역해 발표했다. 그 때문에 ‘무라야마 담화’는 한국이나 중국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얻고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즉 2005년 8월 15일에는 당시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전후 60주년의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도 역시 ‘무라야마 담화’를 답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베 총리도 당초는 ‘전후 70년의 아베 담화’를 종전기념일인 8월 15일에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날은 천황도 치도리가후치공원(千鳥ヶ淵公園)에서 열리는 전국전몰자 위령제에 출석하여 전후 70주년 연설을 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때문에 ‘아베 담화’와 ‘천황 담화’가 같은 날에 발표되고 게다가 두 담화가 상이한 내용이 되어 버릴 위험이 컸다. 이것은 일본 정부, 특히 아베 총리에게 대단히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다. 총리 측근의 말은 이렇다.

“그래서 아베 총리는 천황보다 먼저 ‘아베 담화’ 발표를 하루 앞당긴 8월 14일로 정했다. 즉 ‘천황 담화’보다 먼저 발표하는 것으로 ‘천황 담화’를 견제한 것이다. ‘아베 담화’가 먼저 나왔는데 ‘천황 담화’가 ‘아베 담화’의 내용과 다르다면 ‘천황 담화’ 쪽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게 만들려 한 것이다.

그런데 궁내청은 “아베 담화가 먼저 나오고, 게다가 내용이 다르면, 국민은 천황 담화 쪽에 더욱 무게를 두고 이해할 것이다”라면서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헌법 제3조를 방패로 해서 천황을 막을 수 있지만, 만약 그런 일을 하면 아베 정권은 단숨에 국민의 지지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 명확했다. 아베 관저는 다시 곤란을 겪게 됐다.”

이 시기에 아베 정권의 지지율은 급락하고 있었다. 2020년 도쿄올림픽의 메인스타디움이 될 신국립경기장의 건설은 당초 1300억 엔의 예산을 크게 오버하여 2520억 엔이나 걸릴 것으로 밝혀졌는데, 아베 정권이 이를 억지로 추진하려고 했기 때문에 국민의 반발을 샀다. 더욱이 7월 16일에는 ‘전쟁 법안’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안전보장 관련 법안을 중의원에서 강행 채결하여 국민의 거센 비난을 받고 있었다.

이런 악재가 겹치자 <마이니치신문>이 7월 18일에 ‘지지율 33%’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일본의 역대 내각 가운데 대부분이 지지율이 30%을 밑돈 후, 반년 이내에 붕괴됐다. 그 때문에 아베 총리는 지지율 회복의 길을 외교에서 추구한 것이다.

외교로 가장 지지율을 울릴 수 있는 길은 북한과의 외교에서 성과를 올렸을 때다. 2002년 9월 17일, 당시 고이즈미 총리는 북한을 전격 방문한 것으로 불과 하루 만에 지지율이 15%나 급등했다. 그러나 아베 총리의 경우 2015년 여름의 시점으로 대북 외교가 암초에 걸려 있었다.

대북 외교 다음으로 지지율을 올릴 수 있는 것이 대(對) 중국 외교다. 중국의 시진핑 정권은 9월 3일에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군사 퍼레이드’를 앞두고 아베 총리도 초대했다. 이 이벤트를 이용해서 방중하게 되면 총리의 지지율이 회복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더구나 이 방중은 9월로 예정되어 있는 참의원에서의 안보법안의 강행채결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을 덜어낸다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관료적 표현’으로 일관한 전쟁 사죄

그런데 만약 ‘아베 담화’에 대해 중국이 강하게 반발했다면 아베 총리의 방중은 실현되지 못한다. 이처럼 ‘천황’과 ‘중국’ 양측에서 ‘무언의 압력’을 받고 있던 아베 총리는 ‘전후 70년 아베 담화’의 내용을 수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앞서 언급한 아베 총리의 측근은 이렇게 설명했다.

“최종적인 문안이 결정된 것은 발표에 임박한 시점이었다. 우수한 관료들이 지혜를 짜 모아서 어떻게든 ‘4점 세트’를 문장 안에 집어넣었다. 8월 14일 오후 3시, 혹은 15일에 있을 ‘천황 담화’의 문안이 입수 가능했기 때문에 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아베 담화’의 발표를 14일 오후 6시로 정했다.”

결국 일본뿐 아니라 세계가 주목한 ‘아베 담화’는 대단히 길고, 동시에 복잡한 문안이 되어버렸다. 특히 아베 총리가 최후까지 저항했던 ‘과거의 전쟁에 대한 사죄’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간접적 표현을 사용했다.

“일본에서는 전후 세대가 현재 인구의 80%를 넘고 있습니다. 전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우리 자식들과 손자, 그리고 그 뒷세대 어린이들에게 사죄를 계속하게 하는 숙명을 떠맡겨서는 안 됩니다.”

이 같은 ‘아베 담화’에 대하여 일본 언론은 ‘가스미가세키 용어의 정밀함으로 아로새긴 담화’라 빈정거렸다. ‘가스미가세키(霞關) 용어’라는 것은 중앙관청이 밀집한 도쿄도 치요다구(千代田區) 가스미가세키에서만 사용되는 ‘관료적인 표현’이라는 의미다. 이에 대하여 다음날인 15일 정오, 천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를 돌이켜보고 지난 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이후 전쟁의 참화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분들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부터 깊은 추도의 뜻을 표하며 세계 평화와 우리나라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천황은 긴장감 때문인지 발언 중 한번은 틀린 발음이 나오기도 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아베 총리와 천황의 마찰은 어떻게든 마무리됐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목전의 지지율 때문에 방침을 바꾸는 아베 총리의 역사관에 대하여 크게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베 총리의 한계가 여실히 느껴졌던 일련의 사태를 바라보는 뒷맛이 씁쓸하다.

-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부편집장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짱뚱어 15-10-02 01:41
   
천황이라는것을보니 부일 매국노 후손인가요?
     
눈꼽낀하마 15-10-02 01:46
   
일본인이 쓴 것도 있고, 아마 편집을 안 한 건 천황을 고유명사로 본 듯 하네요.
     
ahaWkd7 15-10-02 12:46
   
내이름이 부일인데 매국노 아닙니다 ㅡ,.ㅡ;
편집을 안하고 그대로 옮긴가부죠. 그래도 일왕이 아베보다는 100배 나은듯
백제후손이라 그런감
예채은 15-10-02 06:00
   
글이 너무 길다ㅠ포인트 못 잡겠음ㅠ
비좀와라 15-10-02 17:16
   
길이 너무 길고 단편적인 내용만 나와서 그런데요 왜 일왕이 아베와 사이가 나쁘답니까?
인텔리 15-10-02 18:49
   
일본의 총리는 총리대신이고 형식상으로는 일왕의 부하인데 말 좀 듣지?
     
구름위하늘 15-10-07 13:03
   
형식 상으로는 일왕은 신이고, 총리는 신을 대신하여 인간을 다스리는 교주 쯤 입니다.
부하는 말을 듣지만
교주는 말을 듣지 않죠 ^^
 
 
Total 1,626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1626 [일본] [펌, 긴글] 해방 후 “미쓰야 작전” 또공돌이 10-09 2009
1625 [일본] 일본, 1951년 제작 지도에 '독도 한국령' (10) 블루하와이 10-08 2466
1624 [일본] 일본에서 빛나는 살아있는신 일왕의 위엄 (1) 두부국 10-07 2091
1623 [일본] 80년 만에 뿌리 뽑힌 일제 잔재 (2) 성시리 10-07 1945
1622 [일본] 日, '한국 압박' 카드 쥐고 있다...'아베노… (3) 블루하와이 10-07 2936
1621 [일본] 일본조폭의 실상... 도다리 10-02 4504
1620 [일본] 日 아키히토 천황, 아베 총리와 4번의 ‘대충돌’ 내… (7) 유베알레 10-02 5374
1619 [일본] 日 15억 달러 '돈 풀기'...상임이사국 진출 '… (9) 블루하와이 10-01 3177
1618 [일본] 그냥 잡설입니다. 환빠식민빠 09-30 1085
1617 [일본] 日 방위장비청 신설...방위산업 부활 '노림수' 블루하와이 09-29 1661
1616 [일본] 해방후 한반도의 일본인들 (4) Irene 09-29 6613
1615 [일본] 일본을 미워한다면 이글을 한번 읽어주시기 바랍니… (7) 바운티아키 09-28 3688
1614 [일본] 제국주의 일본의 대표 수출 상품. "카라유키상" (1) 왜라면 09-22 2209
1613 [일본] "방사성 오염 지하수 수시 방류"...불안감 증폭 (3) 블루하와이 09-21 1903
1612 [일본]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 '식민 지배·침략' 삭제 (7) 블루하와이 09-20 2526
1611 [일본] 日 안보 관련법 후폭풍...소송·낙선운동 움직임 블루하와이 09-20 1924
1610 [일본] 이덕일박사 1차공판후기 (4) 밥밥c 09-17 2858
1609 [일본] 근대 서양의 일본문화 강풍 자포니즘 (9) 지문지 09-17 6162
1608 [일본] 日 안보법안 진통…반대 여론 80% '진통 불가피 (3) 블루하와이 09-17 2190
1607 [일본] 일본이 2차대전 당시 무조건 항복한 이유 (12) Irene 09-16 5913
1606 [일본] 일본 폭우로 후쿠시마 오염물 포대 최소 240개 유출 (3) 블루하와이 09-14 1671
1605 [일본] 日 동북부 '물 폭탄'...20여 명 사망·실종 (21) 블루하와이 09-11 3938
1604 [일본] 日 주가 22년 만에 최대 폭등...'아베노믹스' … (5) 블루하와이 09-10 2832
1603 [일본] 일본 대법, 한국 거주 피폭자 치료비 지급 판결할 듯 (1) 블루하와이 09-08 1560
1602 [일본] 식민지배 미화 논란 日우익교과서 점유율 높여 블루하와이 09-05 1977
1601 [일본] 1시간 만에 괴사…日 열도, '식인 박테리아' … (6) 블루하와이 09-04 4851
1600 [일본] 日, '항일' 부각에 유감..."아웃사이더로 더 밀… (4) 블루하와이 09-04 2455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