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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9-28 00:31
[기타] 삼국사기에 나오는 한사군 기록들 -1-
 글쓴이 : 꼬마러브
조회 : 5,703  





삼국사기는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료입니다. 또한 국가에서 편찬한 정사로 삼국유사와 같이 고대사의 양대산맥이라 불리는 책이죠. (뭐 어디에서는 부정하겠지만?) 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는 한사군 관련 기록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시간순서대로 정리해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삼국사기 완역본이 있더군요. 혹시 빠뜨리거나 번역이 잘못되거나 잘못쓴것이 있다면 댓글 바라겠습니다. 저 개인의 의견은 밑에 굵게 표시하니 오해없으시길..

네이버 지식백과 삼국사기 완역본 - http://terms.naver.com/list.nhn?cid=49615&categoryId=49615



BC 28년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 1 시조 혁거세 거서간 30년)

樂浪人 將兵來侵 見邊人夜戶不? 露積被野 相謂曰


낙랑(樂浪) 사람들이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려다가, 그곳 사람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지내며, 들에는 노적가리가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서로 말하였다.

- 낙랑 병사들이 신라에 침입해 온 것으로 보아 낙랑과 신라는 서로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BC 18년 이전 (삼국사기 제 23권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백제건국설화)

北史及隋書 皆云 東明之後有 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북사(北史)』및 『수서(隋書)』 모두에는 ‘동명(東明)의 후손 구태(仇台)가 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다.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그의 딸을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쪽 나라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르겠다.]

- 이 기록의 따르면 백제는 동명왕의 후손인 구태가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고 나옵니다. 대방의 옛 땅이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요동태수의 딸을 아내로 맞은 것으로 보아 대방의 옛 땅이 요동과 가까이 있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한가지 더 알 수 있는점은 대방의 옛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현재의 대방과 옛 대방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개인적으로 대방의 옛 땅이 요동에 있었고 낙랑이 신라에 가까이 있었음을 보아 현재의 대방 역시 신라에 가까이 있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아직까지 그런 유추를 하기에는 부족해보이네요


BC 15년 (삼국사기 제 23권 백제본기 제 1 시조 온조왕 4년)

秋八月 遣使樂浪修好

가을 8월, 사신을 낙랑(樂浪)에 보내어 우의를 다졌다.

- 이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낙랑에 사신을 보내 서로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낙랑이 중국의 군현이였던 한사군 낙랑이라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 기록에서는 BC 15년에 백제와 낙랑이 교류했다 나오는데 당시 중국 사서에는 백제에 대해 기록되어진 것이 없습니다. 중국 사서에 제대로 적혀진 최초의 백제 기록은 372년 근초고왕때(진서)로 삼국사기에서 낙랑과 교류했다는 BC 15년보다 무려 382년 뒤입니다. 거의 400년 뒤이죠. 만약 백제와 중국이 서로 교류하는 사이였다면은 어떻게 교류한지 약 400년 만에서야 백제가 기록되었을까요? 이상합니다. 


BC 14년 (삼국사기 제 13권 고구려본기 제 1 유리왕 33년)

秋八月 王命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縣屬玄?郡]

가을 8월, 임금은 오이(鳥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한나라의 고구려현[현은 현도군(玄?郡)에 속한다.]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 이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유리왕이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을 정벌하게 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계속 서쪽으로 진군해서 현도군에 속하는 고구려현은 빼았다고 나오죠. 즉 이 말은 현도군이 고구려의 서쪽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대방의 옛땅이 요동에 있었다는 위의 기록과도 얼추 비슷하죠. 이런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한사군은 고구려의 서쪽에 있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BC 11~ BC1년 (삼국사기 제 23권 백제본기 제 1 시조 온조왕편)

온조왕 8년 가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지난날 서로 사신을 보내고 우호를 맺어 한 집안처럼 지냈는데 이제 우리 땅 가까이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니, 혹 우리 국토를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계책이 아닌가? 만일 지금까지의 우호를 생각하여 성을 헐고 목책을 부순다면 의심할 바가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내겠다.”
임금이 답하여 말하였다.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일이다. 어찌 이 일로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당연히 태수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약 태수가 강함을 믿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대비책이 있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11년(기원전 8)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甁山)의 목책을 습격하여 부순 뒤 백여 명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 독산(禿山)과 구천(狗川)에 두 개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의 통로를 막았다. 

온조왕 13년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 요상
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불안하여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중략)"
 
7년(기원전 2) 봄, 낙랑이 침범해서 위례성에 불을 질렀다.

11월, 임금은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는데, 폭설을 만나 돌아왔다.

한자생략 

- 이 기록에 따르면 낙랑과 백제가 서로 막상막하로 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즉 이 말은 백제와 낙랑이 서로 국경을 맞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죠.)  하지만 저는 여기서 의문이 드네요. 당시 백제는 건국되어진지 약 10년이 채 안되었습니다. 어떻게 10년이 채 안된 국가가 중국의 군현과 막상막하로 싸울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또한 위에도 말했다시피 중국사서에 적힌 백제 최초의 기록은 이 때보다 무려 약 400년뒤인 372년 근초고왕때로 당시 중국사서에서는 백제와 싸웠다는 기록은 물론 아예 백제와 관련된 기록이 없습니다. 즉 여기에 나오는 낙랑은 한나라의 군현인 낙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위의 고구려 유리왕 기록으로 한사군이 고구려의 서쪽이 있었다고 유추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신라와 백제와 가까이 있는 이 낙랑의 존재는 무엇일까요?


AD 4년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 1 남해차차웅 원년)

가을 7월, 낙랑(樂浪)의 병사가 와서 금성(金城)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임금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元年 秋七月 樂浪兵至圍金城數重 王謂左右曰

AD 14년 (삼국사기 제 1권 신라본기 제 1 남해차차웅 11년)

낙랑이 나라의 내부에 빈틈이 있다고 여기고, 금성을 공격하여 쳐들어오니 상황이 위급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적병이 두려워하며 퇴각하다가 알천(閼川)가에 주둔하면서, 돌무더기 20개를 쌓아놓고 물러갔다.

樂浪謂內虛 來攻金城 甚急 夜有流星 墜於賊營 衆懼而退 屯於閼川之上 造石堆二十而去

- 이 기록에 따르면 신라가 백제만큼은 아니지만 낙랑과 나름 막상막하로 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부분은 더욱 이해가 안되는 것이 왜 중국의 군현이 한반도의 약소국에 불과한 신라를 쳐들어 갔을까요? 또한 백제와 마찬가지로 당시 중국사서에는 신라와 싸웠다는 기록뿐만 아니라 신라에 관한 기록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기껏해봐야 진한의 소국중에 사로국이 있었다 정도이지요.


AD 32년 (삼국사기 제 14권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15년)

여름 4월,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서 유람하고 있었다. 그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대가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리오?”

낙랑왕 최리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가서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 후, 호동이 본국에 돌아와서 남몰래 아내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였다.
“네가 너의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너를 맞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다면 너를 맞이하지 않겠다.”

이전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적병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것을 부수어 버리게 한 것이었다. 이에 최씨의 딸은 예리한 칼을 들고 남모르게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의 입을 베어 버린 뒤에 호동에게 알려 주었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대비를 하지 않았고, 우리 병사들이 소리 없이 성 밑까지 이르게 된 뒤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낙랑을 없애기 위하여 청혼하고, 그의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를 삼은 후에 그녀를 본국에 돌려보내 그 병기를 부수게 하였다는 설도 있다.]

AD 37 (삼국사기 제 14권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20년)

20년(서기 37), 임금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二十年 王襲樂浪 滅之 


- 이 이야기는 다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32년에 낙랑왕 최리가 항복했는데 낙랑의 멸망은 37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5년이라는 공백기간동안 낙랑 부흥운동? 비슷한 것이 일어났다 생각해봅니다. 여기에 나오는 낙랑이 한사군의 낙랑인지 아니면 신라와 백제와 가까이 있는 그 낙랑인지 잘 모르겠으나 최리를 낙랑왕(王)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한사군의 낙랑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고작 중국 군현 지도자의 명칭을 굳이 왕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죠. 또한 중국사서에서 대무신왕이 낙랑군을 공격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AD 36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 유리이사금 13~14년)

가을 8월,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점령하였다.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陷朶山城

14년(서기 37), 무휼(無恤,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 낙랑왕이 고구려에 항복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36년에 신라의 타산성을 점령한 것으로 보아 부흥운동에 꽤 크게 일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37년에 낙랑은 완전히 멸망해버리죠


AD 44 ( 삼국사기 제 14권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27년)

27년(서기 44)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屬漢

- 살수는 청천강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한반도에 있었던 낙랑의 위치가 청천강 남쪽 즉 평양 일대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낙랑은 중국의 한사군의 낙랑일까요? 위에도 말했다시피 중국의 한사군은 고구려의 서쪽에 있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중국사서에 대무신왕이 낙랑군을 공격했다는 기록 또한 없고요. 그렇다면 한나라의 광무제는 왜 고구려의 영토인 낙랑에 침입하였을까요? 당시 중국사서 (후한서 책부원구)를 보면 한국(韓國)인들이 낙랑군에 속하게 해달라고 요청한 기록이 있습니다. (년도 또한 똑같음..) 아마 당시 중국사서에 적인 한국인들이 낙랑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고구려에 점령당하자 신라의 북쪽 성인 타산성을 점령할 정도로 부흥운동이 강력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낙랑사람들이 중국에 도움을 요청한 것도 이상할 것은 없을 것 같네요.

이후로 한사군(낙랑,대방,현도,임둔)의 기록들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구려는 111년에 백제는 246년에 신라는 300년에 나옵니다.

AD 111~ 146 (삼국사기 제 15권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59년(서기 111),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玄菟)에 속하기를 요구하였다.[『통감(通鑑)』에는 “이 해 3월, 고구려왕 궁(宮)이 예맥(穢貊)과 함께 현도를 쳤다.”고 하였는데, 혹 속하기를 원했는지 또는 침범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느 하나는 잘못 기록된 듯하다.]

五十九年 遣使如漢 貢獻方物 求屬玄菟[通鑑言 是年三月 麗王宮與穢貊 寇玄菟 不知或求屬或寇耶 抑一誤耶]

여름 6월, 임금은 예맥과 함께 한나라 현도를 습격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夏六月 王與穢貊襲漢玄菟 攻華麗城

69년(서기 121) 봄, 한나라 유주(幽州) 자사 풍환(馮煥), 현도 태수 요광(姚光), 요동 태수 채풍(蔡風)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략해서 예맥의 우두머리를 쳐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六十九年 春 漢幽州刺史馮煥玄菟大守姚光遼東太守蔡風等 將兵來侵 擊殺穢貊渠帥 盡獲兵馬財物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 다음에 나오는 위의 기록들은 고구려와 한나라의 대결구도가 기록되어져있네요. 여기에 나오는 현도나 낙랑과 같은 한사군 지명들은 한나라의 한사군이죠. 59년의 기록에서 한나라, 여름 6월의 기록에는 아예 한나라 현도라고 이름을 박아놓았고 그 후의 기록들도 전부 한나라가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럼 이 한나라의 한사군이 어디 있었냐는 건데 마지막 기록 (가을 8월)의 기록을 보면 아시겠지만 한나라 요동의 서쪽을 습격하여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 했다는 것은 요동의 서쪽에 대방군과 낙랑군이 있었다는 뜻이겠죠.. 고구려의 서쪽입니다. 한사군은 고구려의 서쪽 즉 요동의 서쪽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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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한잔 15-09-28 01:08
   
중국은 한족이 쓴 기록만 정사라고 인정하는 환타지..
만주족이 황제의 명에 따라 쓴 정사는 감추려고 한다는것..

게다가 시간이 오래 될수록 증명하기 힘든부분들은 분명 동이족의 역사인데..
한족의 역사로 둔갑시킴 ㅋㅋㅋㅋㅋㅋ
동이족들은 문화와 의복이 비슷비슷한데..
그것을 한족꺼라 우기는 중이고..

기록들 자체가 알타이계 언어인 sov형식의 언어체계로 되어있는 역사서들이 대부분인데.. 이게 한족꺼라 우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투르크 카자흐 몽골 만주 한반도 시베리아 일본 = sov
중국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 svo

이것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북방문화들을 모조리 한족문화로 둔갑시키는 작업을 한다는게 웃긴것임 ㅋㅋㅋㅋㅋㅋ

또 기본적으로 중원은 금나라가 최초 통일했을시부터 자칭 고려인의 후예라고 하던 금나라의 영향으로 고려는 선진국으로 여김..
그 후 원나라..
여기서 우리가 역사를 잘못 배우는게..
원나라가 고려와 전쟁을 했다는것은 맞는데..
원나라가 고려를 쳐들어와서 정복한게 아님..
고려가 정권이 약해지자 스스로 원나라에 손아래 국가로 동맹을 신청한거임..
그래서 스스로 본인들이 진짜 고려라고 하던 삼별초와 원나라+기존 고려정권이 연합해서 싸운것임..

북방 유목민족들은 동맹을 항상 혼인동맹으로 채결함..
그래서 몽골 공주를 시집 보내는것임..
이 혼인동맹이 식민지 노예인것처럼 이야기 하면..
몽골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할때 징기스칸이 모두 혼인동맹을 채결했는데..
몽골 민족들의 대다수가 그 논리로 적용하면 노예가 되는것임..

또 원나라가 무슨 고려를 정복해서 식민지 대하듯 한것처럼 왜곡하는 식민사관들이 있는데..
원나라는 고려에 인재를 요구했고.. 중원의 통치자들로 임명했슴..
즉 원나라는 중원을 통치하기 위해서 고려라는 핵심 동맹국을 얻은거임..
지금 미국과 동맹인데.. 미국과 동맹인 지금 처럼 고려가 전작권이 없는 나라도 아니었슴..
또 일제시대처럼 나라 국민들이 노예가 되어서 약탈당하고 식량도 약탈당하고 뭐 이런게 아니었슴..

또 원나라시대 고려양이라고 중원에서 고려풍이 유행이 되었던적에 대해서는..
문화라는것이 물과 같아서 항상 높은곳에서 아래로 흐르는것임..
그래서 원나라시대에 고려의 문화는 중원문화보다 더 선진문화였슴..
그리고 고려가 원나라의 식민지 노예들이었다면.. 절대 고려풍이 생길수가 없슴..
이것이 진실임..

중국의 중화사상은 완전한 허구임..

또 몇년전에 중국 남부에서 발굴된 원나라시대 고려인 다루가치 묘비들도 보면...
자신이 원나라 다루가치(지방통치자)지만 고려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묘비에 기록해놓았슴..
     
꼬마러브 15-09-28 01:29
   
그것과 이 글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댓글의 요지가 뭡니까?
          
막걸리한잔 15-09-28 06:57
   
기존에 식민사관을 비판하면서 중국의 황당한 역사관도 비판하는 글입니다.
본문 동영상에 식민사관 비판동영상이 아닌가요??
     
그노스 15-09-28 10:46
   
님께서 말씀하시는 중화사상의 허구는 공감이 가나, 예를 들어주신 내용들과 제 견해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우선 원나라의 고려 침략과 지금의 한미동맹을 비교하시기엔 좀 무리가 있는거 같네요.
원나라가 타민족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려에서도 수탈이 극심했고, 고려의 왕권을 인정해주긴 했으나 가능한한 몽골의 피가 흐르는 왕으로 세우거나, 필요에 따라 강제로 왕을 교체한 것을 보면 고려를 노예로까지 생각했던 것도 아니지만, 고려에 그다지 신사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일제가 중국이나 기타 다른 민족에 대한 처우와 한국에 대한 처우에 구분을 좀 했다고 일제의 수탈과 지배가 옳다고 할수 없는 것처럼, 원나라가 고려에 대한 처우와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 구분을 좀 했다고 고려와 원나라와의 관계를 긍적적으로 보기는 힘들지요.
적어도 우리 후손들 입장에서는 말입니다.

원나라 다루가치(지방통치자)지만 고려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묘비에 기록해놓았다고 하시나, 고려 수탈에 일조하던 다루가치들과 일제에 빌붙어 같은 동포를 수탈하던 친일파와 뭐가 다른지는 개인적으로 잘 모르겠습니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다루가치, 친원파가 척결된 것과 친일파는 살아남았다는 것이 다르겠지요.

원나라 시대 고려풍이 유행이 되었던적에 대해서는...
문화라는것이 물과 같아서 항상 높은곳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고 원나라 시대에 고려의 문화는 중원문화보다 더 선진문화였다 말씀하시는데요.
그럼 고려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변발문화는 어떻게 설명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요.
한국에서 세계 각국의 다양한 식문화가 유행이 되면, 그 문화를 받아들이는 한국이 아래가 되는 것인가요.
문화라는 것이 항상 고고하게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지는 않습니다.

일제 시대, 그들의 문화를 조선인들에게 강제하려고 했지만, 정작 조선 아이들의 놀이 문화가 조선 거주 일본 아이들에게 급속도로 퍼져서, 조선인들을 얕보던 일본인들에게 문화적 충격, 위협이었다는 기록을 보면 문화는 돌고 도는 거라 생각합니다.
문화가 우월한 쪽에서만 흐른다는 지난 세기의 낡은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이 한국에서 통용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님의 중화사상 비판에 공감이 가면서도, 님의 예들은 또 다른 사상을 주장하시는 것 같아 안타깝네요.
          
막걸리한잔 15-09-28 11:13
   
몽골의 피가 흐르는 왕으로 세운다??
그럼 원나라는 고려인의 피가 흐르는 황제가 나오지 않았나요???
또 일본은 문화가 거의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들의 문화를 버리고 외래 문화를 받아들였었고요..
일본과 한국에서도 한국 문화다 더 오래되고 제대로 구축된 문화가 맞습니다..
일본과 비교하는것 자체가 웃기는군요 ㅋ
일본이 문화강국이었나요???

또 고려와 원나라와 분명 관계상 자존심 상하는 관계이긴 하나..
또 그렇다고해서 무슨 일제나 한족들처럼 그런 정복지처럼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고려때랑 조선때랑 여진족과 일본에게 조공 받고 이런것은 말하면 국뽕이 되고..
지배받고 침채기만 이야기 하면서 무슨 역사 말살의도가 있듯이 그러는지 이해 불가네요..
그렇게 노예로만 살았던 중국 한족들도 자신들의 역사를 과대포장하고 있고..
또 오히려 역사기록이 없는 몽골 또한 역사를 모르니까..
중국이 이야기 하듯 몽골인들은 자신들은 중국인들에게 지배당한 민족인줄 알고 있다는겁니다..
이게 다 그 국민들을 어떤 위주로 가르치냐에 따른거죠..

역사는 돌도 돈다고..
청나라에 굴욕적이었을때도 있었지만..
이 만주족 여진족이 말을 안들으면 정벌하고 조공받고 했던 때도 있다는겁니다..
일본 또한 마찬가지 였고요..
중국 또한 통일된 대국이 아닐때는 모두 고려에 조공 받치는 나라들였습니다.
참고로 주원장도 고려에 조공을 받쳤지만 그것을 중국에서 가르칠까요????
또 한국에서는 왜 안가르치죠????
왜 식민사관은 이런 역사는 감추려고 하죠????

일본과 중국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치부같은 역사는 안가르치고 잘나갈때만 가르치고..
한국은 치부만 가르치고 잘나갈때는 감추기만하죠..

결국 그 결과는 한반도는 중일에 역사적으로 꾸준히 식민지처럼 산것으로 왜곡되어 전파되고 인식되어지고 있다는겁니다.
               
그노스 15-09-28 11:53
   
몽골의 피가 흐르는 사람을 원나라가 고려왕으로 세운것에 대한 님의 말씀에 대해...
원나라가 몽골의 피가 흐르는 사람으로 고려왕으로 세우거나 교체한 적은 있어도, 고려가 고려의 피가 흐르는 사람을 원나라 황제로 세우거나 교체한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문화와 비교한 것이 아닙니다.
일본문화가 우월해서 주고 받았다는게 아니라, 자기들이 우월하다고 믿으며 조선에 강제하려 했지만, 정작 일본 아이들은 조선 아이들의 놀이 문화를 받아들였다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자기 자신의 문화가 우월하다며 문화가 한쪽에서 흐른다는 사고방식이 제국주의 방식이라고 말씀드린거지 제가 일본 문화가 우월해서 조선이 받아들였다고 말씀드린것이 아니지 않나요.
일본이 강제한적은 있다고 말씀은 드렸지요.

고려때랑 조선때랑 여진족과 일본에게 조공 받고 이런것은 말하면 국x 이 된다고 하시는데, 전 그런 당연한 역사적 사실 가지고 국x 이라고 누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런 단어 사용을 즐기지도 않습니다.

지배받고 침체기만 이야기 하면서 무슨 역사 말살의도가 있듯이 그러는지 이해 불가라 하시는데요.
그런 뜻이 아니라, 수탈이 극심했던 원나라의 수탈을 한미동맹과 비교하시며 긍정적으로 표현하시는것 같아, 제가 우려해서 올린 글입니다.
고려가 전작권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원나라의 강요로 인해 고려로서는 원치않은 전쟁에 휘말린적이 있다고, 그로 인해 경제적 수탈도 막심했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청나라에 굴욕적이었을때도 있었지만.. 만주족 여진족이 말을 안들으면 정벌하고 조공받고 했던 때도 있다는 님의 말씀에 부정하지 않고 당연히 동감입니다. 님의 중화사상 허구 비판에 공감이 가기때문에 제가 공감한다고 말씀드렸지요?
님의 몇가지 예에 우려하며 언급을 한것이지 중화사상이 옳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노스 15-09-28 12:19
   
전 개인적으로 중화사상의 본질은, 타민족을 멸시하고 자신의 문화에 대한 우월감, 즉 제국주의와 비슷한 견해라 생각합니다.
님께서 중화사상을 비판하시면서, '문화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고 말씀하시는건, 중국과 한국의 입장만 바뀌었을뿐 비슷한 사상이 아닐까 우려해서 말씀드린겁니다.
문화적, 민족적 자부심과는 분명 다른 말이지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님의 몇가지 예에 제 다른 견해를 올린것이지, 중화사상에 대한 님의 비판에 동감합니다.
분명한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숨기며 식민사관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일제의 제국주의 논리를 부정하기 때문에 올린 글입니다.
                         
막걸리한잔 15-09-28 21:27
   
원나라 순제는 고려피가 아닙니까?
또 분명 몽골인들의 일부 반대도 있었지만.. 고려혈통이 황제가 되긴했죠..
그리고 미국과 동맹을 비교한다..
현재 대한민국 입장에서 미국과의 동맹은 필수적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힘이 없기 때문이죠..
그리고 어차피 한반도가 통일 된 이후에도 미국과의 동맹은 유지해야 중국과 대등한 외교를 할수 있기에 미국과의 동맹은 지속적인 유지가 되는게 좋습니다..
그런데 현재와 같이 분단상황에서는 중국과 일본에 대등한 외교는 할수도 없을뿐더러..
미국에게는 더더욱 그러겠죠..
즉 아쉬운 놈을 제대로 이용해먹는다 이말인겁니다.
현재 미국과의 동맹관계는 대등한 동맹관계는 절대 아니죠..
미국이 이래라 저래라 압박하고 규제하고 통제하는것은 사실인겁니다.
원나라와 고려와 대등한 동맹이 아니었듯 미국과도 대등한 동맹이 아니란 말을 하려고 한 말입니다.
그것을 꼭 무슨 식민지배나 정복당한듯 주장하는 사람들을 지적하기 위해서 한말인것이죠..
그리고 문화에 대해서 주고 받는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항상 문화라는게 약한 문화는 잠식당하는게 특징인것이죠..
님은 왜 그런것을 제국주의적이라고 말하는지 이해할수 없군요..
우리가 우리의 낡은 문화중에 비합리적인 문화들이 사실상 서양문물에 많이 잠식당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우리는 우리만의 고유의 좋은 문화는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것도 사실이고요..
만약 우리 나라가 북한 수준이었다면 지금의 한류가 있었을까요??
제가 말하려는 의도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반박을 위해서 당연한것을 제국주의적인 사고라고 말하는게 더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어떻게 문화가 위에서아래로 흐른다는것이 제국주의적인 발상입니까?
두가지 문화가 서로 교류될때.. 분명 더 합리적이고 좋은 문화가 잠식하는게 진리 아닌가요???
                         
그노스 15-09-28 23:37
   
막걸리한님 댓글이 안달아지니 여기 달께요.

제가 말씀드리는건, 고려왕실에 몽골의 피가 흐르거나, 몽골황실에 고려의 피가 흐르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누가 주체가 되어서 왕을 세우고 교체했느냐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다른 나라가 우리 나라왕의 혈통을 끊고 나라문을 닫는것도 기분 나쁘지만, 다른 나라가 마음대로 우리 나라 왕을 멋대로 세웠다가 갈아치우는 것도 유쾌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미국이 우리 나라 대통령을 마음대로 갈아치웠다가 다시 세우지는 않지요.
미국이 김영삼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그런 폭거를 하진 않지 않나요.
미국이 몽골처럼 한국에서 경제적 수탈을 했는지요.

미국이 이래라 저래라 압박하고 규제하고 통제하는것은 사실이라 말씀하시지만...
미국은 모든 나라에 그렇게 합니다 ㅋ
고려와 원의 관계를 한미동맹과 비교하시는건 몽골의 수탈이 정당화되는것 같아 제가 우려해서 올린 글입니다.

그리고 문화를 언급하시며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표현은 보통 '문화제국주의'라 불립니다.
'항상 문화라는게 약한 문화는 잠식당하는게 특징인것이죠' 라고 여전히 제게 말씀하시지만...
종족의 아이덴터티를 나타내는건 문화만한것이 없기 때문에 약한 문화가 잠식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적자생존의 논리는 견해차로 받아들이지 않고 현대 사회에서 조심하고 피하죠.
그리고 말씀드렸지만, 님께서 중화사상(중국문물이 타민족보다 우월하다는)을 비판하시는 글을 올리시면서, 정작 약한 문화가 잠식당하는게 당연하다 말씀하시는것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올린 글입니다.

몇 가지 소개해 볼께요.

흔히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는 문화제국주의의 입장을 뒤바꾼것이 문화번역이 가진 힘이라 할수 있다.
-문화번역(마정미)- CommunicationBooks

문화제국주의 이론은 현재 많은 비판을 받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론은 아니다. 한류의 경우에도 문화제국주의 이론보다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문화산업 경쟁력이 높은 국가에서 낮은 국가로 이동하는 경제적 비교우위의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씨네21(고정민)- 2014.02.11

한국이 예전처럼 원료 수입, 가공해서 제품을 수출하기만 하는 국가라면 모르겠으나, 지금은 한류 열풍의 중심지이고 문화를 수출하는 세계에서 주목받는 신흥강국입니다.
굳이 세계에서 비난받는 문화제국주의를 당연하다고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한국은 문화면에서 분명 '강자'입니다.

님의 의도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반박을 위해서 당연한것을 제국주의적인 사고라고 말하는게 더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하시는데요.
전 분명 님의 중화사상 비판에 공감한다고 여러번 말씀드렸습니다. 님의 의도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박을 할 이유가 없지요. 제가 님께 사적인 감정이 있는것도 아니고요^^
님의 몇가지 예에서 제가 다른 견해를 가진것이 님께 무조건적인 반박이라 받아들이셨다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비좀와라 15-09-28 15:18
   
저는 최소한 몽골의 중원지배시기에 고려와 몽골이 동족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몽골은 모쿠리입니다. 범어잡서같은 기록을 따질 필요 없이 몽골계 인도왕조가 무굴왕조로 무구리 내지는 무쿠리라는 이름이 근세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옴을 알 수 있습니다.

무쿠리는 무 쿠리(코리=고려高麗)입니다. 그냥 고려족입니다. 김정민 박사 유트브강의에서 징기스칸 당시의 인구구성이 케레이트 40 나이만 40 나머지 20이라고 몽골과 러시아에서는 추정한다고 하더군요. 케레이트는 저들의 역사기록으로 보면 발해유민 입니다. 발해를 그곳에서는 보하이 코리라 부른다더군요 그리고 발해의 정식국호는 고려입니다.

징기스칸의 몽골부도 고려고 다수 인구인 케레이트도 고려족 이었습니다. 나이만은 투르크계로 고려계 보단 하위 계급이었고요. 그래서 몽골 원나라시기에 왕건의 고려인은 몽골과 케레이트와 더불어 1등급 시민이었습니다. 왕건의 고려인이 2등급이라면 몽골왕실과 부인계급인 케레이트(고려족)도 역시 2등급이 되는 코메디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몽골과 고려와의 관계를 외국과의 관계로 본다는 것은 당시의 인식과 맞지않습니다.
                    
그노스 15-09-28 18:29
   
케레이트의 후손으로 알려진 토르구트와 현재 카자흐스탄이 있고, 징기스칸 몽골의 40프로를 차지했다는 나이만족(현재 40만의 카자크인) 이 카자흐스탄의 인구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정작 카자흐스탄이 소개하고 있는 자신들의 역사를 보면 고려족과의 연관 관계를 인식하고 있지는 않는것 같습니다.

http://e-history.kz/en/contents/view/314
(2013년 육아, 교육, 과학부분에서 수상)

저들의 역사에 의하면, 케레이트족은 기본적으로 투르크와 몽골족으로 구성되었으며,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동시에 위구르 문화의 영향에 있었으며, 나이만, 캉글리, 위구르, 메르키트, 몽골, 카라 거란, 탕구스와 긴밀한 정치, 민족, 문화적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고 나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케레이트족이 위구르 문자를 사용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이만족의 소개를 보면, 나이만족이 혼합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최신 과학 문헌에 의하면 투르크 언어를 사용한것으로 보여진다고 합니다(말씀처럼 투르크계).
특히 '캉글리', 그리고 그 밖에 주변 유목, 농업 민족과 강한 정치적, 문화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징기스칸 당시의 인구구성이 케레이트 40 나이만 40 나머지 20이라고 님께서 인용해 주셨는데, 결국 계산해보면 인종별 관련 비율이 어떠했을지 예측해볼수 있지 않나 합니다.

님께서 인용하신 김정민 교수님께선 카자흐스탄 알마티 국립대 박사과정을 지내셨던 그 김정민 교수님으로 보입니다만...
그 역사 주체인 카자흐스탄(그 분께서 연구하셨던) 이나 다른 세계 유수의 대학들(징기스칸이 워낙 유명인사라) 에선 아직은 정설로 인정되지 않는 주장, 즉 그 분의 개인 연구의 일부분으로 생각됩니다.

님께서 원나라 안에서 고려인의 등급을 언급해 주셨는데요.
제가 알고 있었던 원나라 등급을 보면,
1등급은 소수 몽골족
2등급은 색목인, 투르크인
3등급은 고려인, 여진인, 거란인, 북방 한족
4등급은 남송 한족

물론 저 등급은 가변적이고, 고려가 부마국이며 시대에 따라(원나라에서 정치적 입지를 굳힌 고려인들에 의해) 고려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긴 했지만, 님 말씀처럼 '왕건의 고려인은 몽골과 케레이트와 더불어 1등급 시민이었다' 라고 단정지을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원황실이 고려왕실과 혼인정책을 취하며 일정 대우를 해주었을지 모르나, 혈통이 섞인 일부 고려왕들이라면 모를까 우리 조상인 고려인들이 몽골인들을 동족으로 여겼을지도 개인적으로 의문이네요.

종합해 말씀드리면, 님 말씀처럼 징기스칸의 몽골부도 고려고, 다수 인구인 케레이트도 고려족이었다고 단정짓기엔 아직은 무리인게 아닌가 합니다.
연구는 계속 되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오늘의 가설이 내일의 정설이 되는 그 날을 위해서^^

님의 견해에서 많이 배우고 생각해보며 갑니다.
                         
막걸리한잔 15-09-28 21:43
   
어차피 카자흐 케레이 족보를 보면 자신들이 발해후손이라는것을 밝히는 여러가지 단서들이 있죠..
발해 부흥운동..
그리고 동쪽에서왔다고 기록하고 있고..
케레이 족보에서는 한반도에도 케레이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죠..

김정민박사는 이 족보에 내용들이 발해후손이라는 것들을 증명한것이죠..
                    
비좀와라 15-09-28 19:30
   
몽골과 케레이트의 역사는 사실 한국인에겐 지금 신천지이죠. 앞으로 연구 할 것이 많다고 해야 하나요. 앞으로 갈길이 먼다는 데는 그노스님 의견에 공감합니다.

일단 링크에 걸어주신 내용을 대충 봤는데요 앞선에서 북중국과 만주에 살다가 거란 요왕국에 928년에 지배당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발해가 만주에 있다가 928년경(정확히는 926년 이라고 하지요)에 요에 망하지요. 당시대에 만주와 북중국엔 발해만 존재 했습니다. 그리고 역시 김정민 박사가 소개한 내용인데 두 번에 걸쳐서 저항하다가 몽골고원으로 이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답니다. 역시 발해의 부흥운동과 연대가 같습니다. 그리고 링크글에 요가 금에 멸하고 일부의 종족이 금에 남아있다고 하는데 역시 발해와 같습니다.

그리고 종족명이 케레이트인데 케레이는 고려 다른 발음으로 중국이 까우리나 러시아가 카레이츠인 것을 보시면 추정이 된다고 봅니다. 트는 복수형의 사람을 말하는 말로 우리말 '들'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는 족族으로로 바뀌었고 몽골은 트로 바뀐 것 입니다. 그래서 케레이트는 고려족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종족의 정체성을 보려면 종족명이상 가는 비교대상이 없다고 봅니다. 그런면에서 케레이트는 자신의 정체성을 고려족으로 두었다고 봅니다.

인구 구성은 저도 김정민 박사의 의견만을 들은지라 잘 모르겠고요. 그분의 의견이 반박이 오더라도 재 반박을 할 수 가 없네요.

원나라 고려인 등급이 3등급이라고 하면 왕실과 혼인을 못합니다. 당시 신분사회에서 더군다나 신 왕족 왕후족의 삼위일체가 이상적인 국가 형태라고 믿던 스키타이 문화의 풍습에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건 한국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저 등급표가 믿기지 않는 다는 겁니다.

원나라의 신분체계도 역시 많은 연구 대상이 필요한 사항이고요. 위그르는 현지어로 Nine arrows의 의미를 갖는 다고 하더군요. 한국어로 재구성하면 구이九夷로 역시 고려족입니다. 고려족이 발자취가 생각보다 넓더군요. 아 물론 고려족은 다인종입니다 결코 단일인종아니고요 중국과 같이 문화적 공동체 였다고 추정합니다.
                         
그노스 15-09-28 21:48
   
발해와의 연관관계는 흥미롭고 제가 배울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고려와 원나라와의 결혼동맹을 논하자면, 쿠빌라이라는 인물에 대한 논평을 빼놓을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쿠빌라이란 인물은 참 흥미롭지요.
쿠빌라이의 막내 동생, 아리크 부카가 전통대로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대부분의 몽골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대칸에 올라 버리자, 쿠빌라이는 몽골의 기존 전통을 어기고 개평부(開平府)에서 자신의 지지 세력만으로 쿠릴타이를 개최해 대칸으로 오른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중국의 농경사회의 잠재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유목민족의 전통을 버리고 낯선 중국 문화를 수용했다는 사실을 보면, 3등급이라 보이는 고려인이 1등급인 몽골인과 혼인하는 것이 당시 몽골 신분사회에서 있을수 없는 풍습이라 하나, 전통보다 현실을 중시한 쿠빌라이에게 있을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지는 않는것 같습니다. 물론 제 견해입니다.
그리고 결과를 보면 원나라를 위해, 쿠빌라이의 결단이 탁월했다고 보여집니다. 혼인을 먼저 청한 고려 왕실도 물론 만족했겠지만요.

어떤 종족의 정체성을 보려면 종족명 이상 가는 비교대상이 없다고 보시는데, 제 견해는 조금 다릅니다.
우선 몽골이라는 말이 맥골(맥고구려)에서 나왔을 것이라 주장하시는 분들도 뵈었고, 징기스칸이 타타르 정벌후에 금나라 황제에게 받은 작호가 고려왕(高麗王) 또는 고려후(高麗侯)라고도 들었기는 합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북방 유목민족과 우리 민족간에 언어의 유사성(종족명)이 보인다고 동족 의식이 있었느냐는 제겐 다른 문제인거 같습니다.

예를 들어, 파르티아와 페르시아를 말씀드려 볼께요.
파르티아는 페르시아 Parthava-, 페르시아가 파생 된 줄기 Parsa-의 변형에서, 라틴 파르티아에서 유래했다는게 정설입니다.

파르티아는 셈족 계통(아랍)의 언어를 사용했고, 문화도 그리스 문화와 이란 문화를 동시에 존중하였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페르시아는 아랍어와는 다른 페르시아어를 사용했고, 파르티아를 무너뜨린 사산조 페르시아는 파르티아 이전의 페르시아의 전통으로 완전 복귀하여 민족적인 조로아스터교를 국교화하였습니다.

파르티아와 페르시아의 종족명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양 국가간을 두 개의 다른 종족으로 차별화를 두며, 현 이란(페르시아계)민족도 아랍민족과 차별화를 두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요.

예로부터 세력이 강한 집단이나 유명 인물을 자기 조상이라 슬쩍 칭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고려만 하더라도 왕건의 조부 작제건이 당나라 숙종의 아들이었다고 고려역사에다 사칭해서 원나라에서 논란이 되자 다시 말을 바꿔 당나라 선종의 아들이라 칭한 적이 있고, 거란도 고구려의 후계 문제로 고려와 분쟁을 벌인 적이 있지요(님께서 거란도 우리 동족이라고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언어의 유사성을 파헤쳐 양 민족간의 동질성을 찾는건 즐거운 일이고 뜻밖의 보물(동족)을 발견할수도 있지요.
부족한 제가 딱히 뭐라고 단정짓기는 현재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나, 고고학이란 학문을 보면 예기치 않은 시기에 뜻밖의 고서나 금석문이 쏟아져 나올수 있으니 더 확실한 근거가 나올때까지 기다려봅니다.

님 덕분에 김정민 교수님의 동영상을 더 찾아봐야겠네요^^
                         
비좀와라 15-09-28 23:15
   
그노스님 토론이 즐거웠고요.

한가지 덧붙이자면 어차피 역사란 자신의 입장에서 유리한 면으로 해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하지 않으면서 굳이 몽골이나 만주 그리고 위그르와 금을 긋느냐 입니다. 이들이 한국과 동족의식을 가졌다는 것은 음운의 변화만이 아니 종교와 신화등에도 공통접이 드러납니다. 저 개인적인 사견으론 북방문화권과 동방문화권으로 나뉘는데 이들이 서로 다른 문화권이긴 보단 동일 문화권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그노스 15-09-28 23:32
   
비좀와라님.
답변이 밑에 안달아지네요.

네, 저도 즐거웠고 님께 정말로 많이 배웠습니다. 특히 발해 관련부분은 제가 공부를 많이 해야겠습니다. 제가 아무래도 배우는 입장이고 어느 설이 옳은지 분별할 지식이 모자란지라 기존에 많은 분들께 받아들여지는 정설외에 새로운 가설엔 경계부터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좀와라님처럼 진실을 찾아 새로운 설에 도전하시는 분들을 존경합니다.
단단디 15-09-28 03:59
   
저기 동영상과 이글의 주제와 본문은 아무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좀저 자세하게 뭘 말하고 싶으신

지 알려주실수 있나요 동영상을 보면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한국사의 지배층은 일본의 잘못된 역

사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과 일본이 한반도 역사의 가치를 낮추기 위해 삼국사기의 기록은 거짓이

라고 거짓말을 한다는 것인데 그런 동영상과 한국이 중국의 심민지지배?라는 제목은 무슨 연관

이 있는거죠? 뭘 말하고 싶으신지 좀 알려주세요 동영상 처럼 자기가 불리한 말에는 답을 안하시

는 것은 아니겠죠 만약 안하시면 거짓 선동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꼬마러브 15-09-28 11:48
   
이 글의 주제는 한사군 재한반도설을 주장하는 주류사학을 반박하기 위해 쓴 것이고 그 주제의 근거로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든 것입니다. 허나 주류사학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하고 있죠. 저는삼국사기 부정론 또는 이 글의 근거인 삼국사기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동영상을 첨부하였고 밑에 삼국사기에 나오는 한사군 관련 기록들을 모두 정리하여 올린 겁니다. 저의 개인의 의견은 밑에 굵은 글씨로 표시하였고요. 제목이 좀 애매모호해 보이긴 하네요. 수정하겠습니다.
꼬마러브 15-09-28 14:06
   
한사군재한반도설은 임나일본부와 같은 맥락으로 고대 한반도는 남쪽은 일본이 북쪽은 중국이 지배했었고 한국의 역사는 중국,일본의 식민지 (한사군, 임나일본부)로 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의 매우 위험한 논리입니다. 한사군재한반도설은 삼국사기의 기록만 봐도 반박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아니 애초에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다고 기록한 1차 사료들은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일본은 이런 주장들(임나일본부, 한사군재한반도설)을 주장하기 위해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부정하고 일본의 기록인 일본서기를 증거로 이를 주장했습니다
     
지나가던이 15-09-28 16:13
   
22222
KilLoB 15-09-28 23:11
   
낙랑에 관한 모 싸이트 일도안사님(일본서기 기년조작을 풀어낸 분,개인적으로 고대 삼국사 국내 외 1실력자라 본다고. 이분 기본스타일이 삼국사기를 교과서로 봅니다. 저자 김부식 본인도 써놓고도 이해못하는 내용도 있었던걸로 안다고)

낙랑은 고구려가 성장함에 멸망하고 남쪽 잔존세력은  신라로 가서 귀순한다 .원 발상지가 요서인 백제는 여전히 요서에 땅이 있었고 낙랑은 요동지방, 신라가 상대했던 낙랑은 남쪽 낙랑. 둘은 같은나라나 다른지역이고, 낙랑역시 역사내내 영토가 고정되있지는 않았다...

이하 발췌내용-----------------------------------------------

낙랑군과 낙랑국의 시작은 고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 기본 시각은 다음과 같다. BC 2세기에 요서의 능하-요하 유역에 위만의 조선이, 대동강 북쪽유역에 준왕의 조선이 있었다. 위만의 조선은 그의 손자 때 한무제와 싸운 조선이고, 준왕의 조선은 세형동검으로 대표되는 마한조선이다. 이 마한조선이 낙랑유민들에게 대동강유역을 내주고 한강유역으로 남하하였다가, 역시 요서에서 바다를 건너온 백제에게 1세기에 정복된다.

따라서 최초의 낙랑군은 요서에서 시작되었다가, 고구려가 동진함에 따라 이들도 요동으로 가고, 다시 고구려가 서진하자 요서로 건너온 후, 나중에 난하를 건너 유주로 가서 사라진다. 대동강유역의 낙랑국을 삼국사기는 낙랑국으로 불렀지만, 중국사서는 조선으로 부르기도 하고 낙랑군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서 신라와 낙랑은 (한반도에)南-北으로 있고, 백제와 낙랑은 (요하유역에) 西-東으로 있어서, 백제와 신라의 낙랑기록이 겹치는 기록이 하나도 없는데 이는 당연하다.

낙랑태수는 요동에 있으면서 문서(봉니)를 통하여 낙랑국을 통치했다고 본다. 그래서 봉니를 보낸 요동이 아니라 봉니를 받은 대동강유역에 봉니가 모여있다고 생각한다. 요동의 낙랑군이 고구려에 밀려 요서로 건너가는 것은 4세기 초이다. 그리고 이 낙랑군의 서진 기록은 중국사서에도 나온다.

미천왕 14년(313);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아왔다.
미천왕 15년(314);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공하였다.
미천왕 16년(315); 봄 2월, 현토성을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아주 많았다.

고구려중심에서 보면 요동반도는 남쪽이다. 그리고 15년조의 남쪽은 낙랑군의 남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고구려 중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나란히 있었던 요동의 낙랑군이고, 다음이 낙랑의 남쪽인 요동반도이고, 가장 먼 것이 현토성이다. 따라서 가까운 곳에서부터 점차 먼 곳으로 공격해 가는 과정이 아주 자연스럽다.

삼국사기가 기록한 고구려의 대동강유역 정복과정은 다음과 같은데 3세기로, 4세기의 요동보다 먼저인데 역시 자연스럽다.

동천왕 19(245), 겨울 10월, 위군이 낙랑으로부터 물러갔다. (위군 잔병이 신라 땅으로 도망쳐 이들을 추격하여) 신라 국경을 넘었다. *동천왕 20년은 19년의 오기임.

조분이사금 16년(245), 겨울 10월, (위군 잔병을 추격하여 내려오던)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우로가 군사를 이끌고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위군과 고구려군이 신라 땅으로 몰려들어오고 가야 땅으로까지 내려갔다.)

첨해이사금 2년(248), 1월, (위군 잔병출신인) 이찬 장훤을 서불한으로 삼아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2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위군 잔병출신을 서불한에 임명한 것에 대하여) 화의를 청했다.

책계왕 원년(286) 고구려가 대방을 치매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에게 장가를 들어 부인을 삼았기 때문에 왕이 말하기를, “대방은 우리와 사돈이 되는 나라이다. 그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기림이사금 3년(300) 3월, 낙랑과 대방의 두 나라가 귀순하여왔다.

최근에 공개된 관구검 전쟁 직후에 만들어진 낙랑벽비는 아직 진품여부가 확실하지 않으나 당시 대동강유역이 고구려영토임을 보여준다. 관구검 전쟁이 끝난 2년 후인 동천왕 21년에 종묘사직을 옮기는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다.
KilLoB 15-09-28 23:37
   
또 대방국에 관해서는.......

이처럼 3세기 중후반에 고구려가 한반도에서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남쪽으로 점차 영토를 넓혀가는 과정이 아주 자연스럽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보과는 황해도 유역의 대방국 공주 '보과'여야 합당하다. 그런데 박창화의 백제왕기를 보면 대방왕은 3세기 요동의 송손씨이고, 보과공주는 그 공손씨의 딸이다. 이해하기 어렵다.

억지로라도 해석하자면, 요동의 공손씨가 위나라와 고구려의 협공에 멸망당하자, 그 잔존세력이 한반도의 황해도로 몰려와 살다가, 다시 고구려에게 통합되게 생기자 그 잔존세력이 마침내 신라에 귀복하고 막을 내렸다고 해석해야 한다.

백제왕기는 개루왕-고이왕까지 삼국사기와 다른 또 하나의 별도 왕력을 준비하고 있어서 각 왕의 기록이 두개씩이다. 백제왕기 중 대방관련 기록만 몇 개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

189 기사, 2월 요동태수 공손탁(도)왕이 사신을 보내어 화의를 청하니 왕 역시 동복아우 大知를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190 경오, 3월 공손탁왕이 딸 宝婁(보루)를 왕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왕이 아직 室家(부인-일도안사)가 없다 하기로 감히 비천한 딸을 보내어 수발을 들게 하오니 버리지 마옵소”서 하였다. 왕이 백마 3쌍으로 폐백을 삼고 맞아들였다.

194 갑술, 9월 공손도왕이 죽으니 태가 康이 왕이 되었다.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197 정축, 5월(고국천왕이 죽은 시점) 고구려 연우가 그 형을 쫓아내고 형수를 빼앗으니 공손강왕이 그 죄를 묻고자하여 우리에게 출병을 요청했으나, 왕은 같은 조상의 나라(同祖之國)로 서로 죽일 수 없다 하여 거절하니 공손강왕이 불쾌해했다.

209 기축, 10월 고구려 연우가 도읍을 환도로 옮기고 자신을 낮추어 화의를 청했으나, 왕이 공손강왕을 두려워하여 감히 내놓고 접대하지 못하고 태자 苩仁으로 하여금 그 사신을 국경에서 몰래 접대하고 돌려보냈다.

217 정유, 3월 공손강왕이 대방왕이라 비로소 칭하고 다시 그 누이 宝臯(보고)를 보내자 첩을 삼았다. 이때 조정은 漢人을 많이 등용하여 요동왕(공손강)에게 많이 의지하였다. 왕은 보루와 보고를 중하게 여겼으나 자식이 없었다.

221 신축. 7월 대방왕 姜이 죽으니 동생 恭(공)이 왕이 되고, 康의 아들 晃(황)은 한나라에 인질이 되었다. 왕이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228 무신, 5월, 대방왕 공이 이전 왕자 淵(연)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축하하였다.

231 신해, 2월, 대방인 초미 등을 불러 옥쇄를 주조하고 병사들을 西院에 잠복시켰다.

237 정사, 5월, 대방왕 연개도가 말하기를 연이 漢兵을 大川河에서 크게 격파했다고 하자 왕이 사신을 보내 축하였다.

238 무오, 8월, 위가 연을 쳐 크게 깨뜨렸다. (대방)왕 연이 태자수우사에 이르렀다. (우리) 왕의 아우 초해가 대방왕을 위해  구원을 청하니 왕이 5천군사를 내어주었다.

239 기미, 3월, (위에게 패한) 대방인 3천여명을 나라 서쪽에 이주시켰다. 7월 왕이 서쪽으로 순시하여 패하 입구에 이르렀다.(예성강 하구에 집단 이주시켰다는 뜻인가? 이것이 황해도에 나타나는 대방의 시작이란 말인가?-일도안사)

241 신해, 1월, 대방인 공손양에게 명하여 (우리나라) 종실의 위차 공경 예의 등을 정하게 하다.

257 정축, 7월, 구궁 태후 보고부인이 죽었다. 춘추가 57세이며 공손탁왕의 둘째 딸로 경국지생의 인물과 문무지덕의 인품이 있었으며, 구지왕과 소고왕 두 임금을 모셨고, 5녀 3자를 낳았다. 이에 이르러 굴원에서 태왕을 보살피다 병을 얻어 밀실에서 죽다.

264 갑신, 6월, 구수왕이 재위 11년째에 (35세로) 죽어 태자 사반이 즉위했다. 나이가 어려 정사를 볼 수 없으므로 선왕의 아우 고이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사반왕의 즉위는 234년으로 30년의 차이가 있다.

282 임인, 6월, 고이왕이 태자 책계를 대방왕녀 보과에게 장가들였다.

286 병오, 2월, 고구려가 대방을 쳤다. 구원을 청하자 고이왕이 명하여 태자가 구원하게 하였으나 고구려의 원망을 샀다. 위례성과 아단성과 사성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11월, 고이왕이 죽었다. 춘추가 52세였다.(삼국사기에는 고이왕의 재위기간이 만 52년임-일도안사)
     
꼬마러브 15-09-28 23:49
   
위의 글에서도 동천왕 대의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라는 것은 공감합니다만 백제가 원래 요서에 땅을 두고 있었고 한반도로 건너가서도 계속 땅이 있었다는 .. 소리가 굉장히 흥미롭군요. 어떻게 하면 그런 결과가 도출되나요?
그리고 대방국과 보과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환선비동이전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했는데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잘못 옮겼다. 그러자 신지가 한(韓) 백성들을 격분시켜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했다.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두 군은 마침내 한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오죠

고이왕 13년 8월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삭방태수 왕준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시켜 낙랑을 습격하여 변방 백성들을 잡아왔다. 유무가 듣고 노하므로 왕은 이들이 침범해 올 것을 염려하여 그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위 기록들은 보면 대방태수 궁준이 삭방태수 왕준으로 바뀐 것일 뿐 비슷합니다. 이런걸로 도출해봤을 때 동이전에 나오는 한은 백제이고 마한의 신지는 고이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백제의 사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백제를 마한이라고 기록한 것이죠. 그리고 한을 멸망시켰다는 것은 딱봐도 중국측의 위조이고요.
          
꼬마러브 15-09-28 23:49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계속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고구려가 대방을 치니 대방에서 우리에게 지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 왕의 딸 보과에게 장가들어 부인으로 삼았으므로 대방은 우리와 장인과 사위 관계의 나라이니 그 청을 듣지 않을 수가 없다 하여 드디어 군사를 내어 지원하였다.

이 기록은 고이왕의 아들인 책계왕에 관한 기록입니다. 책계왕이 대방 왕의 딸인 보과와 혼인하였으며 책계왕이 대방을 지원하였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 기록의 대방이 한사군의 대방군이라면 모순점이 생깁니다. 앞에서는 분명 백제와 대방군은 서로 적이었고 백제에 의해 대방태수 궁준이 죽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고이왕의 아들인 책계왕이 대방 왕의 딸과 혼인했죠. 책계왕이 대방 왕의 딸 보과와 혼인 한것은 고이왕 때인 것으로 보이는데 고이왕 때 백제와 대방군은 서로 적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설마 사돈끼리 싸운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보과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시집간 것이며 고이왕은 자신의 사돈을 죽인 것이 됩니다. 이건 딱봐도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죠. 즉 책계왕이 지원한 대방과 한사군의 대방군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책계왕이 지원한 대방은 조선유민들이 세운 독립국 대방국인 것이죠. 일단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책계왕이 대방 왕의 딸 보과에게 장가들었다고 나오는데 여기서 보과의 아버지가 대방의 왕이라고 나옵니다. 만약 이 대방이 한사군의 대방군이라면 보과의 아버지는 대방 왕이 아니라 대방 태수로 나와야 하죠. 고작 중국 군현의 태수가 왕을 칭할리는 없기 떄문입니다. 즉 고이왕이 싸운 대방과 책계왕이 지원한 대방은 다른 것이라는 거죠. 고이왕이 싸운 대방은 대방군이고 책계왕이 지원한 대방은 대방국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방국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아마 대방국은 지금의 황해도에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백제와 대방국은 북쪽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혼인동맹을 맺었습니다. 즉 혼인동맹을 맺었다는 것은 서로 가까운 곳이라는 것으로 유추가 가능하죠. 그리고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백제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고 하니 백제보다는 북쪽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백제보다 북쪽이라고 했으니 지금의 황해도가 가장 유력하다 볼 수 있습니다. 또 대방군, 즉 한사군의 위치는 요서에 있었다고 했죠? 즉 백제의 고이왕이 대방군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것은 백제의 대륙진출로 연결이 됩니다. 즉 고이왕이 대륙백제의 초석을 마련해 놓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비좀와라 15-09-29 00:19
   
잠 자야 하는데 쩝...

밑에 제가 올린 한자음으로 본 상고사는 러시아와 중국 푸단(?)대학의 솔그렌 박사가 지도하에 공동연구한 음가를 기초로 최춘태 교수(?)님이 한국 고대국가를 한자 고대 음운을 이용하여 연구한 논문입니다.

그리고 스타로스틴교수의 바벨 프로젝트(바벨 프로젝트는 알타이어,셈어,인도유러피언어, 코이산어 등 세계 각 어군의 프로토타입을 비교연구한 것으로서 미국의 펜실바니아대학과 공동 연구중이고 조지 소로스펀드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의 일환으로 홍콩대학 미국 산타페연구소와 공동연구한 한자 원 음가에서 한韓은 아르입니다.

한韓(아르)가 가라/사라로 변하고 고구려, 말갈과 마한은 말가라(맏이가라)이고 신라는 사라 낙랑은 가라라고 최교수님은 고증 하였는데요 이 음가를 바탕으로 하면 윗 내용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예濊. 왜倭, 당唐. 동이, 고려, 가야, 임둔 등등의 한자 초음이 가라라고 합니다. 이 내용을 적용하면 많은 내용이 바뀔 듯 싶은데요.

백제 초기는 요동의 공손가문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고 백제가 한반도 남부로 이주 했다고 추정하나 완전 이주 한것이 아니고 여전히 요동 지역에서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아마 이 의견을 따라서 요동에 있었다고 설정 한 것 같습니다.

이상 조금이나마 이해에 도움이 될 까해서 한 줄 적었습니다.
만법귀일 15-09-29 11:58
   
저는 꼬마러브님께서 말씀하시는 취지에 공감을 합니다.

우선 중국의 정사에서는 온조가 백제를 건국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전부 구태씨가 대방군에서 십제를 건국했다는 기록이죠.
이후에 나라이름을 백제로 고쳤다는 기록은 같습니다.

구태씨가 대방의 옛땅에 십제를 건국했다는 사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북사(北史), 주서(周書),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 수서(隋書) 등입니다.

그리고 대방군의 옛 땅인 진평이군에 건국했고, 진평이군과 대방군은 같은 지역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구태씨가 진평이군(晉平二郡)에 십제를 건국했다는 사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통전(通典), 통지(通志), 송서(宋書), 남사(南史), 양서(梁書) 등입니다.

삼국사기에서만 온조가 십제를 세웠다고 하였으나 그 삼국사기 32권 잡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김부식이 후세에게 힌트를 주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冊府元龜云 百濟每以四仲之月 王祭天及五帝之神 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按海東古記或云始祖東明 或云始祖優台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 有仇台 立國於帶方 此云始祖仇台 然東明爲始祖 事迹明白 其餘不可信也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백제는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도읍에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네 번 제사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대방군과 진평이군은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륙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에 꼬마러브님께서 피력하시는 한사군의 위치(고구려가 낙랑을 치러 서쪽으로 향했다등)가 한반도 없었다라는
취지에 많은 공감을 하여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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