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ㅁ)에서 화和는 예濊의 初音 [kəsər]이 변천한 음이다. 동주도東州道라
함도 東의 훈이 [사라 ㅅ@ㄹ@]였던 관계로 濊의 후예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교주도交州道의 교交는
상고음은 kragw이고 초음初音은 [가라 ㄱ@ㄹ@]이며 ‘ㄱ@ㄹ@(가라)>ㄱ@ㄹ(갈)’로 변천했다. 교交는
‘교환하다’는 뜻의 우리말 ‘갈다’의 어원과 동일하다. 교交의 초음[가라 ㄱ@ㄹ@]는 우리말임을 의미하며 이 역시
예濊의 후예인 가라族을 음사했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29>에
우리말을 음사한 고사가리高思曷伊는 관문冠文이라 했는데, 이는 高思(고사)와 관冠, 曷伊(가리)와 문文을 대응시켜 당시의 ‘곳(冠)갈(文)’을 말했던 것으로 오늘날 [고깔]이다. 교交, 문文은 [ㄱ@ㄹ@(가라)/갈(갈)/글]로 읽혔다.
(2.ㅂ)에서 예국濊國을 철국鐵國이라
한 것은 예濊 음이 변천한 [사라]에서 어말 모음이 탈락하여 [살]로 읽혔던 것이다. 철鐵은 [쇠, soj]이며 그 이전은 [솔, sor/sol]이었다. ㄹ이 반모음 [j]로 변천한 것이다. 동주東州를 철원鐵原이라 한 것도 동東이 [사라]이며 철鐵이 [사라>솔>쇠]로 변천했기
때문이다. 동東의 훈과 철鐵의 훈이 같았다는 것이다. 금교金橋가
송교松橋인 것도 金이 [사라>솔>쇠]로 변천하였기 때문에 松의 훈 [솔]을 대응시킨 것이다.
한사군을 정할 때 임둔臨屯으로 명명한 것은 임臨의 음에서 비롯된다. 임臨의 상고음은 [brjum]이며 초음初音을 재구하면 [bərəm]이 된다. 우리말 [바람(風)]과 일치한다. 우리민족에게는 늘 밝(白), 불(火), 바람(風), 새(鳥), 뱀(虫)이 따라 붙는다. 그
연유는 여기서 생략하기로 한다. 부여夫餘를 바람의 나라‘라고 일컫는 데는 그만한 연유가 있는 것이다. 둔屯은'땅', '지역’을 말하는 의미로 쓰였다. 즉
임둔臨屯으로 기록하면서 [바람당]으로 읽었던
것이다. ‘바람땅’, 즉 ‘부루땅’이라는 것이다. 중세국어 합용병서 ‘ㅅ당’은 ‘당’[dəŋ]이 후에 어두 [d]가 무성음화하면서 ‘ㅅ’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임둔臨屯을 고구려 때 하서랑河西良, 하슬라주何瑟羅州라
한 데서 중대한 단서를 포착할 수 있다. 당시 고구려어 초기 언어는 개음절어로서 음절말 자음은 무시하였다. 양良을 [라]로 읽었고
라羅와 같이 ‘나라’, ‘땅’을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河와
하何는 상고음에서 모두 [ga(r)]로 읽혔고 서西는 [siər], 슬瑟은 [ʂi ̯e
̆t]이다. 이들의 初音을 재구하면 각각 [sərə(사라)] ~ [sara(사라)]가 된다. 결국 하서河西, 하슬何瑟은
예濊의 초음初音 [kəsər]을 말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서랑河西良, 하슬라주何瑟羅州는 예지濊地, 예국濊國을
말했던 것이다. 거서간居西干, 거슬한居瑟邯도 한干, 한邯은 왕을 뜻하는 의미이고 거서居西, 거슬居瑟은 예濊의 초음初音이었던
것이다. 결국 거서간居西干, 거슬한居瑟邯은 예濊王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부여의 가섭원迦葉原도 [가사버러]로 읽혀 예‘濊벌’을 뜻했다.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이두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이두 표기법으로 읽어야 한다. 박朴은 '둥글(원圓)'과 '밝(명明)'이 있는데 혁赫은 박朴을 '밝'으로
읽어달라는 요청이다. 차의車衣에 의衣를 붙인 것은 [차의]로 읽지 말고 [수릐(>수레)]로 읽어달라는 것이다. 경북 칠곡의 옛 지명 북치장리北耻張里를 팔거리八居里라 기록했는데, 북北은 [배]로도 읽으니
그 이전의 음은 [발]이 된다. 여기서도 치耻는 北을 [북]으로 읽지 말고 [발]로
읽어달라는 것이다. 장리長里는 [기리/거리]로 읽혔다. 당시
ㅍ발음이 없었으므로 ㅂ으로 읽으면 [발거리]가 되는 것이다. 인리仁里라고도 하여 인仁은 ‘밝다’는 뜻으로 쓰였다. 결국, 치耻는 혁赫처름 앞 자字를 안내한 것이다.
경덕왕 때 칠곡漆谷으로 개명했는데, 이 지역은 지금도 옻(漆)나무가 지역 전체를 덮고 있다. 모든 식물 가운데 가장 붉게 물드는
것이 바로 옻(漆)이며 칠곡漆谷은 옻의 군락이 있는 마을이다. 그 물든 모습이 [八居里(발거리)]함을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부끄러워할 耻’를 썼던 것이다. 거居의 상고음은 [kjə], 세世의 상고음은 [ɕi
̯ad]이다. 거세居世의 초음初音은 [kəsər]로 복원된다. 결국, 박혁거세는 '밝濊'라는
뜻이다.
단군왕검이 도읍을 정한 아사달阿斯達에 대한 이설이 분분하나 제가諸家들의
설說들은 아阿가 당시 음으로 [가]였다는 사실을 배제한 것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아阿는 가可聲이라 했다. [ka(가)]로 읽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설문해자說文解字>는 AD.121년에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단군왕검의 도읍은 <설문해자說文解字>보다 훨신 앞선 시기이므로 [아]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는 수‧당 시대의 음, 즉 중고음인
것이다. 달達은 산山, 고高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따라서 아사달阿斯達은 [가사달]로
읽어야 하며 그 뜻은 예산濊山, 혹은 예지濊地가 되는 것이다.